# 3.
로잘린이 피곤한 얼굴로 구두를 대충 벗어서 바닥에 던져 버렸다. 몸이 자연스럽게 안락한 소파에 기울어졌다.
속 빤한 소리를 하는 왕이나, 그녀의 의중을 떠보려는 로비엔이나, 온종일 상대하기에는 지나치게 피곤했다. 특히나 그녀의 남편이 될 로비엔은 쉽게 보기엔 꽤 감이 좋은 유형으로 보였다.
그저 순진한 왕자님인 줄 알았더니…….
사람을 쉽게 믿지 않으며, 이유 없는 호감이나 선의에 의심이 많았다. 아직 상대를 만나지 못했을 뿐 꽤 로맨틱하기도 한 모양이라, 그 마음만 얻는다면 품 안에 가진 것도 다 내줄 것 같긴 했지만.
사실 그의 애정이 필요하지 않은 로잘린에게는 상관없는 얘기였다.
“로잘린!”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에도 놀라지 않고, 소파에 반쯤 드러누운 자세로 로잘린이 문 쪽으로 고개만 돌렸다. 촌스러울 정도로 모자에 조화를 한가득 달아 머리 위에 얹은 리리엔이 씩씩거리며 문 앞에 서 있었다.
“언제쯤 남의 방에 들어오기 전에 노크하는 예절을 배울 셈이야?”
“진짜로 왕세자랑 결혼해?”
항간에 소문으로 떠돌긴 했어도 진짜로 이루어질 일이라고 생각지는 못했던지, 리리엔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로잘린의 대답을 종용했다. 로잘린은 충격받은 그 얼굴을 보고 어쩐지 즐거워졌다.
“그렇게 됐어.”
“미쳤어! 어떻게 그게 가능해?”
놀리듯 빙글거리며 웃는 얼굴을 보고 리리엔이 소리를 질렀다. 쿵쾅거리는 소리를 내며 다가온 리리엔이 소파 위로 늘어진 로잘린의 몸을 힘으로 일으켜 세웠다.
“드마셸 보가트의 이름으로 못 할 일이 뭐가 있겠어?”
“아니, 그렇다고 해도. 아무리 그래도, 그 콧대 높은 왕가가 받아들였다고? 아버진 왜 나한테는 일언반구 말도 없이……!”
“네게 말해서 뭐 하게?”
“뭐?”
“리리엔, 너 결혼해서 애가 셋이나 있는 유부녀야. 아무리 왕족이 자존심을 구겨도, 재혼 자리로 왕자를 허락할까. 정부라면 또 모르겠지만.”
로잘린이 심드렁한 얼굴로 대꾸했다. 로잘린의 말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리리엔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기보다는 그 말을 한 대상이 로잘린이기 때문일 터였다.
“글쎄. 사생아가 왕세자비가 되는 것보단 나을 수도 있지 않겠니?”
“…….”
“왕세자께서 그건 아신다니?”
할 말 못 할 말 못 가리는 건 여전하다고 생각하며, 로잘린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왕자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고. 넌 도박하는 네 남편 손모가지나 관리해. 아버지 모르게 뒤치다꺼리해 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야!”
“아버지가 원하시는 일이야. 방해했다가 그나마 손에 쥐고 있던 것마저 잃어버리고 싶은 게 아니라면 좀 닥쳐!”
결국, 큰 소리가 나고서야 리리엔이 찔끔한 얼굴로 입을 닫았다. 이길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항상 싸움을 걸고 씩씩거리는 걸 보면 인생으로부터 배우는 게 있기나 한지 의문이었다.
“좀 나가 줄래? 머리 아프니까.”
“아무리 발버둥 쳐 봤자 네가 우리 가문을 대표하게 되는 날은 오지 않을 거야!”
들어올 때 그랬듯 쿵쾅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리리엔이 밖으로 나가 버렸다. 뒤로 천둥처럼 문 닫히는 소리가 따라붙었다. 명백한 불만의 표시였다.
어차피 쉬기는 글렀다. 로잘린이 몸을 일으켜 책상 앞에 앉았다. 매끄러운 윤기와 자연스러운 색으로 반짝이는 최고급 마호가니 테이블은 드마셸이 로잘린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가문 내에서 그가 로잘린을 얼마나 예뻐하는지에 대한 증거기도 했다.
아마 이 집안에서 위협받지 않게 된 것은, 이 테이블을 선물받은 3년 전부터였던가. 세상에 별별 방법으로도 인간을 숨 막히게 할 수 있다는 걸 보가트 저택 내의 사람들로부터 배웠다.
로잘린은 담담하게 생각하다가, 문득 자신에게 사심 하나 없이 묻던 로비엔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왕궁 안의 모두가 당신을 탐탁지 않게 여길 걸 알면서도 왕세자비가 되겠다 결심한 이유가 가장 궁금하죠.’
진실로 특별한 이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드마셸은 왕가와의 접점이 필요했고, 마침 결혼하지 않은 로잘린이 이용하기 좋은 패였을 뿐이다. 그리고 로잘린은 여태 길러 준 은혜를 갚으라는 말에 그러겠다고 대답했을 뿐이었다.
어차피 한평생을 위협받으며 살았는데, 이 저택이나 왕궁이나 다를 게 뭔가.
사랑만 받고 자란 왕자님이 이런 사실을 알게 될 날은 평생 오지 않을 터였다. 어쩌다 말하게 된다 해도 이해를 바라는 건 요행이었다.
로잘린은 말없이 책상 한편에 쌓인 종이 무더기를 끌어왔다. 쓸데없는 생각에 젖어 드느니, 차라리 일거리를 끌어안고 있는 편이 나았기 때문이다.
‘글쎄. 사생아가 왕세자비가 되는 것보단 나을 수도 있지 않겠니?’
그러나 로잘린은 곧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가장자리로 내팽개치고 말았다. 그녀가 짜증스러운 기색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집중하기엔 리리엔이 던지고 간 폭탄이 꽤 컸다.
사실 리리엔은 학습 능력이 없다기보다는, 그나마 효과 있는 게 그녀의 콤플렉스를 건드리는 일이란 걸 알고 있어서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망할 계집애…….”
사실 발란 보가트나 리리엔 보가트가 정실의 자녀인 것과 달리, 로잘린은 거의 열 살이 다 되어 가는 시기에 이 저택에 들어왔다. 사생아였기 때문이다.
여전히 사리 분간 못 하는 것 같은 발란이나 리리엔도 그 사실만은 아주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들은 어린 나이에도 제 어미의 치마 뒤에 숨어 온갖 방법으로 로잘린을 괴롭혀 왔다. 그런 일들은 당연하게도 로잘린에게 자신의 출생에 대한 거부감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어느 수준까지는 드마셸도 그를 묵인했다. 그 존재를 탄생시킨 건 본인이면서, 공격 대상이 아무 죄 없는 딸이 되는 걸 당연하다고 여겨 온 셈이었다.
그런 괴롭힘이 잦아든 건 그녀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 난 이후부터였다.
‘감자? 사람들이 먹지도 않는 재료로 뭘 하겠다고?’
‘일조량이 부족한 지역에서도 잘 자란대요. 기후가 좋지 않은 곳에서도 괜찮은 식자재가 되리라고 생각해요. 다른 지역에 판매할 수도 있을 거예요.’
카를로스 백작가 영지 끄트머리에 접한, 몰락 귀족에게서 작은 영지를 사들이고 얻은 보가트라는 성姓. 그러나 영지는 척박하기 그지없었다. 그 때문에 드마셸이 소작농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수익도 아주 적었다.
그걸 개선할 방법을 찾아낸 로잘린은 드마셸로부터 난생처음 칭찬을 받았다.
그리고 악마의 음식 취급을 받던 감자를 본격적으로 재배하고 판매하는 일이 그에게 막대한 돈으로 돌아왔을 때.
‘그만해!’
‘어머니를 잡아먹은 주제에 어디 감히 같은 테이블에서 밥을 먹어?’
드마셸은 눈치 없이 자신 앞에서 로잘린을 괴롭히는 발란의 뺨을 후려갈겼다. 제 어머니의 기일이라 더욱 괴롭히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타이밍이 좋지 못했다.
‘아, 아버지…….’
‘식사 자리에서 뭐 하는 짓이야!’
멍청하게 입을 헤 벌리고 드마셸을 바라보는 발란과 리리엔을 비웃었던 그날의 기억만이 지금까지의 인생 중에 가장 즐거운 기억이었다.
동시에 로잘린은, 자신의 콤플렉스를 가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능력을 내보이고 인정을 받는 거란 것도 깨달았다. 그래서 몇 년이나 잠을 줄여 가며 드마셸의 일에 대신 매달렸다.
그러나 그렇게 4년을 헌신했어도, 그녀는 여전히 그의 책사 정도에 불과했다. 여전히 리리엔의 쌍둥이이자 장남인 발란이 그의 후계자로 인정받고 있다는 현실이 그녀를 미치게 했다.
맹세컨대, 로잘린은 그 꼴을 그대로 두고 볼 마음이 없었다.
왕이 일주일 뒤, 로잘린 보가트의 정식 입궁을 명했다. 그때부터 로잘린은 공식적으로 결혼하기 전까지 왕세자의 약혼녀로 인정받게 될 터였다. 그 속 모를 의뭉스러운 여자와 약혼을 하고 결혼을 한다는 게 어떤 의미가 될지 그는 아직도 알 수 없었다.
로비엔은 적빛 포도주가 담긴 잔을 둥글게 돌리다 테이블 위로 큰 소리가 나게 올려 두었다. 머릿속에서는 마지막으로 로잘린과 나누었던 대화가 맴돌고 있었다.
‘물어보실 것은 그게 전부인가요?’
‘……아마도.’
‘나름 아내가 될 몸인데, 궁금한 게 그것뿐이라니 아쉽네요.’
로잘린이 다시 예의 그 얼굴로 부드럽게 웃었다. 보통의 귀족 아가씨들이 그렇듯이, 자신이 아름답다는 걸 알고 인형처럼 웃는 얼굴은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그가 로잘린 보가트라는 여자를 제대로 인지한 순간부터 그것은 가면처럼 느껴졌다.
‘그대의 목표가 단순히 왕자비의 관이 아니라는 건 분명히 알았으니까요.’
‘그런가요…….’
로잘린이 작게 중얼거리며 오른손을 테이블 위에 두고 턱을 괴었다. 길고 고운 손끝이 악기를 두드리듯 오른쪽 턱과 볼 사이를 여러 번 두드렸다.
다른 여자들처럼 그의 앞에서 부끄러워하며 몸을 배배 꼬는 유형은 아닐 거라고 생각은 했다. 그러나 로잘린 보가트는 로비엔의 생각보다도 훨씬 예상치 못할 사람이었다.
‘그래도 하나는 확실히 할게요. 보가트 가문은 다른 무엇보다도, 왕세자 전하의 안위를 위해 움직일 거랍니다.’
‘그대의 아버지도 동의하는 일입니까?’
‘이 혼인 동맹을 제안한 순간부터, 그건 아버지도 피해 갈 수 없는 일이에요.’
‘…….’
‘무엇보다도, 수치나 다름없는 저를 받아들인 것에 대한 보상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로잘린이 빙긋 웃었다. 자신을 그의 수치라고 이름 붙여 놓고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웃고 있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로비엔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원래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편입니까?’
‘사실 모두가 그렇게 취급하고 있지 않나요?’
로잘린이 오일이라도 바른 듯 매끄럽게 반짝이는, 드러난 양쪽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어차피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는 양.
한쪽이 왕족이고 다른 한쪽이 돈 많은 상인 집안이라는 전제를 제외하고 본다면, 기실 말도 안 될 정도로 기울어 있는 조건이었다. 고작 혼인 동맹을 조건으로 파산 직전의 가문을 구해 준 것으로도 모자라, 무엇이든 그의 안위를 위해 움직이겠다는 건.
‘그게 뭡니까.’
사실 그 순간 로비엔은 조금 긴장했다. 그런 그를 직시하며 거창한 소원이라도 얘기할 것 같았던 로잘린이 한 얘기라고는 한 가지였다.
‘정부는 두지 않으셔야 해요.’
‘……하.’
고작 그따위 얘기였다.
‘제가 동정을 받는 위치가 된다면, 화가 날 것 같아서.’
그가 당장 어디서 사생아를 하나 만들어 왔다고 해도 초록빛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런가요?’ 하고 한번 물은 이후엔 신경도 쓰지 않을 것 같은 무해한 얼굴인 주제에. 심지어, 그 놀람조차도 이미 알고 있던 것을 듣고 놀란 척하느라 인위적일 것만 같았다.
그럴 생각도 없었지만, 괜히 정조나 의심받는 느낌이라 기분이 좋지 못했다.
‘약속하죠.’
로비엔의 확답에, 로잘린이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아, 저런 표정. 어디에선가 본 듯한 느낌이었는데 그 순간에는 도저히 생각나지 않았다.
‘즐거운 티타임 시간을 마련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렇게 얘기하고 자리에서 미련 없이 일어나던 로잘린의 얼굴을 다시 한번 떠올리던 로비엔이 문득 어디서 느낀 기시감인지 뒤늦게 깨달았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끝낸 얼굴.
그렇다면 그녀가 해치운 식사가 나였던 건가?
로비엔의 질문은 대답 없이 방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