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누군가 이른 아침부터 문을 두드렸다. 상단의 서류 더미를 뒤적거리다 새벽녘에야 잠이 들곤 하는 로잘린이 절대로 눈을 뜨지 않는 시간이었다. 이른 아침에 그녀가 얼마나 예민한지를 알고 있는 보가트 가문의 사용인일 리는 없었다.
자기도 모르게 구겨지려는 인상을 억지로 잡아 펴며, 로잘린이 문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문 앞에 선 클로티 부인이 여태껏 자고 있었냐는 듯 경악한 얼굴에 한심한 눈빛을 더해 로잘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보가트 양. 지금 기상하기엔 말도 안 되는 시간인 걸 알고 계시나요?”
“죄송합니다, 클로티 부인. 아버지의 일을 돕다가 새벽에야 잠이 들어서 시간을 가늠하지 못했네요.”
“더 늦어선 안 되니 어서 궁에 들 준비를 하세요.”
“그럴게요.”
로잘린이 순한 낯으로 웃으며 설렁줄을 당기자, 울리는 종소리에 하녀 마리가 후다닥 달려왔다.
“곧 뵙지요.”
문이 닫히자마자, 언제 웃었냐는 듯 로잘린의 얼굴에서 미소가 거짓처럼 사라졌다. 고개도 들지 못하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리가 기민하게 눈치를 살폈다.
“마리, 목욕 준비를 좀 도와줄래?”
“네. 갈아입을 옷도 미리 준비해 드릴까요?”
“아니. 그건 내가 고를게.”
로잘린이 대충 손짓하며 드레스룸으로 돌아섰다.
사실 드마셸이 왕가와의 혼인을 추진하면서부터 왕세자에 대한 정보는 수집한 바 있었다.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하기를 칼라브리아 왕국 최고의 미남이라 하는 자. 자신의 생김새가 아름답기 때문인지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해 동경도 무엇도 없다는 남자. 한껏 꾸민 공작새처럼 나서 봤자, 이미 보가트 가문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왕자는 그녀를 더욱 한심하게 여길 것이다.
굳이 그 마음에 들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굳이 더 미움을 살 필요도 없는 사이.
차라리 미움받는 게 더 쉬울지도 모른다. 로잘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로잘린 보가트가 곧 들어올 시간이구나.”
왕비가 우아하게 찻잔을 내려놓으며 이야기했다.
로잘린 보가트가 누구였더라, 잠시 생각하던 로비엔은 그녀가 머지않아 자신의 아내가 될 사람이라는 걸 기억해 냈다.
“그런가요.”
“왕께선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나도 응접실에 들지 말라 하시니.”
약간은 뾰로통한 얼굴로 왕비가 중얼거렸다. 아마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 로잘린 보가트에게 조금이라도 면박을 주고 싶었던 듯했다.
그러나 그들의 목표는 어차피 왕가와의 혼인이었다. 적당한 작위와 명예를 얻는 것이 목표인 가문의 사람인데, 왕비한테서 면박을 들은 듯 타격이나 있을까. 로비엔은 비관적으로 생각했다.
“얼핏 듣기론, 드마셸 보가트에게 미움을 받는다는 것 같던데.”
“……미움을 받아요?”
로비엔이 작게 미간을 찌푸리고 되물었다.
“그래. 보가트 쌍둥이들은 시도 때도 없이 사교 활동을 하는데, 그 애는 가뭄에 콩 나듯이 얼굴이나 한번 비치고 만다질 않니. 아마 지원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미운 오리 정도나 되는 모양이야.”
결국, 로비엔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따위 소문이 진짜라면, 버리는 카드 따위로 왕가와 혼약을 맺는 드마셸 보가트는 그를 얼마나 무시하고 있는 것인가.
“왕께선 정말 무슨 생각으로 널…….”
왕비가 속상한 얼굴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차마 괜찮다고 그녀를 달랠 마음도 들지 않아서, 로비엔은 말없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 커다란 창문 너머로 두 명의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는 익숙한 클로티 부인이었고, 다른 하나는 늘씬하고 길쭉한 몸을 가진 낯선 여자였다.
칼라브리아 내에서 흔치 않은 외형이었다. 키가 작고 풍만한 몸매의 클로티 부인 옆에서 일견 겅중 커 보이는 느낌까지 있었다. 물처럼 흘러내리는 하얀색 드레스는 허리에 포인트를 준 리본 하나를 제외하고는 레이스 장식 하나 없이 깔끔했다. 얼핏 보면 드레스가 아니라 몸에 붙는 로브 정도로 보일 것 같았다.
“어머! 저 애가 로잘린 보가트구나!”
묘하게 관찰하는 로비엔의 시선을 눈치챈 왕비 역시 창밖으로 보이는 로잘린의 모습을 발견했다.
“설마 저 아이 빈손인 걸까?”
“…….”
“아무리 부르주아래도 그렇지, 배운 바가 정말 없구나…….”
왕비가 안타까운 얼굴로 탄식했다. 그 표정만 본다면, 정말로 왕비가 로잘린을 가엾거나 안타깝게 여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일 터였다.
평소라면 그런 왕비를 달래 보려고도 했을 테지만, 부왕과 한심한 졸부가 자신에게 떠넘긴 대상이 미운 오리 새끼라는 데서 마음이 상한 로비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잠시 잠깐 로잘린에게 머물렀던 시선을 돌려 버렸을 뿐이었다.
“왕세자 전하, 왕께서 찾아뵙기를 원하십니다.”
“……지금 가마.”
작은 한숨 끝에, 로비엔이 몸을 일으켰다.
“다녀오렴.”
왕비가 작게 손짓했다. 아들 앞에서도 철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걱정 하나 없이 가벼운 어머니.
“로비엔의 기분이 썩 좋지 않으니 말 한마디도 조심하도록 해.”
그러나 눈치 하나만큼은 기민하다.
왕비의 조언에, 가라앉은 로비엔의 표정을 힐끗 살핀 시종이 허리를 깊게 숙이며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로잘린 보가트는 도착했나?”
“그런 줄로 알고 있습니다.”
왕가가 파산을 감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느 길로 가도 결혼할 사이니 얼굴이라도 봐 두라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로잘린 보가트가 그의 눈을 돌아 버리게 할 만큼 뛰어난 무언가를 가지고 있을까? 그런 경우가 아니고선 그가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는 상황 같은 건 평생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단 한 번도 여인의 미색 따위에 홀려 본 적이 없는 로비엔은 그렇게 장담했다.
긴 회랑을 성큼성큼 걸어, 그 끝에 있는 왕의 응접실에 도착한 로비엔이 시종장에게 눈짓했다. 시종장이 로비엔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문을 지키던 경비병들이 왕의 허가를 받고서야 양쪽 문을 하나씩 크게 열어젖혔다. 창문을 열어 두었는지, 문을 열자마자 크게 불어온 바람과 새하얗게 부서지는 빛에 눈앞이 흐렸다.
“보가트가의 차녀 로잘린이 왕세자 전하를 뵙습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로잘린이 드레스 양쪽 밑단을 가볍게 잡고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탐스럽게 굽이치는 갈색 머리카락이 한쪽 어깨로 쏟아져 내렸다. 드러난 한쪽 목덜미 옆으로 부옇게 이는 먼지까지 보일 정도로 선명한 그림이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섬세한 그림 같기도 했다.
“곧 남편이 될 텐데 지나치게 예의를 차리는구나. 자리에 앉아라.”
로비엔의 허가가 떨어지지 않아, 굽힌 허리를 펴지 못하는 로잘린에게 왕이 대신 명령했다. 그제야 허리를 편 로잘린의 시선이 로비엔에게 명확히 꽂혔다.
바람도 불지 않는 호수처럼 잠잠한 초록색 눈동자, 그러나 그 속에 분명히 무언가 감춰진……. 로비엔은 아주 잠깐 사이에 그녀의 속내를 스치듯 읽어 냈다.
“로비엔, 너도 이리 와서 앉아라.”
왕의 명에 로비엔이 우아하게 움직여,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로잘린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제야 로잘린 역시 왕의 명을 따라 푹신한 의자에 몸을 내렸다.
“이미 짐작하겠지만 둘을 이렇듯 부른 이유는.”
“…….”
“칼라브리아 왕가가 특별한 경사를 앞두고 있기 때문이야.”
경사. 로비엔과 로잘린은 각각 각자의 이유로 왕의 눈에 띄지 않도록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둘이 마주 보고 앉은 모습을 보니 상상 이상으로 잘 어울리는구나.”
“…….”
“이제야 한 번 만난 사이에 혼인을 이야기하기에 우습다 싶을 수도 있겠지만, 이미 그리 결정된 바. 로비엔과 보가트 양이 잘 지내 주기를 바랄 뿐이야.”
왕이 사람 좋은 척 넉넉한 웃음을 지었다. 로잘린은 그런 왕의 비위를 맞추어,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드마셸은 어찌 지내는가?”
“폐하의 은덕 하에 몸 건강히 지내고 계십니다.”
그러나 화제는 곧 그들이 아닌 드마셸 보가트로 향했다. 왕은 드마셸이 벌이는 사업은 무엇이고, 그것이 그에게 무엇을 얻게 해 줄 수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컸다.
“이번엔 무슨 사업을 한다고 하던가?”
“제게도 크게 언질을 주신 바가 없습니다.”
사실 왕은 자신에게 돈을 지원해 줄 드마셸이 아닌, 그 딸 로잘린에게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자신이 왕가의 존속을 위해 팔아넘긴 것과 진배없는 아들에게도 매한가지였다.
“그래. 가까운 시일 내에 왕궁으로 들어 나를 찾아오도록 하라 전하게.”
로잘린과의 대화를 통해 아무것도 얻어 내지 못하자, 왕의 얼굴이 곧 시큰둥해졌다. 창문에 걸어 둔 천이 불어오는 바람에 몇 번이고 펄럭거리는 소리를 내다가 사그라들 즈음이었다.
“봄이 가기 전 길일을 잡을 것이니, 근시일 내로 보가트 양은 왕궁으로 들어와 예법과 내전 일을 익히도록 하고. 로비엔은 네 비가 될 사람의 적응을 돕도록 해라.”
그 말끝에 왕은 피곤하다는 이유로 모두 물러갈 것을 명했다.
“잠시 대화할 시간이 있겠습니까?”
닫힌 왕의 응접실 문 앞에서 로비엔이 물었다. 가만히 양손을 모아 잡고 있던 로잘린이 예상치 못한 듯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지웠다. 거부할 이유 없는 제안에 차분한 대답 역시 뒤따랐다.
“따르겠습니다.”
로비엔의 등 뒤를 따르는 동안 로잘린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그를 훑어 내렸다. 자기 자신의 미색에 홀린 듯 여인에겐 관심도 없다더니. 호사가들이나 지껄이는 말인 줄 알았건만 크게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차를 준비해 다오.”
“예, 전하.”
연못과 조경으로 꾸며 둔 정원이 어슴푸레 보였다.
“정원이 아름답네요.”
“왕비께서 신경 쓰시는 곳이라. 그대도 여기서 보내게 될 시간이 많을 겁니다.”
아치형 석재를 담쟁이덩굴이 칭칭 감아 조경한 입구를 지나 커다란 분수를 끼고 늘어진 오래된 나무. 맞는 계절이 아니란 것도 모르고 주변으로 흐드러진 가지각색의 꽃. 일정하게 모양을 유지하는 수풀과 그 옆으로 늘어진 산책길은 조경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봐도 감탄할 만큼 아름다웠다.
“이리로.”
로비엔이 의자의 등받이를 잡아 빼며 로잘린을 불렀다. 로잘린이 낯설기 짝이 없는 에스코트를 받아 먼저 자리에 앉자, 그 맞은편에 로비엔이 자리를 잡았다.
“내가 그대에게 만남을 청한 건.”
“…….”
“궁금해섭니다.”
로잘린이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마냥 얼굴 반반하고 순진한 왕자님일 줄만 알았더니, 눈빛에 묘한 긴장감이 있었다.
“전하께서 제게 무엇이 궁금하실까요?”
얌전히 웃는 얼굴로 로잘린이 물었다. 마침 하녀가 찻주전자와 화려하게 세공된 두 개의 찻잔을 내와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지만, 둘 사이의 미묘한 긴장감은 여전했다.
먼저 팔을 뻗어 찻주전자를 집어 든 로비엔이 차를 내려 로잘린 앞으로 내밀었다. 조금은 서늘한 온도에, 김이 사르륵 피어오르는 찻잔에서는 코가 아릿할 정도로 향긋한 향이 났다.
“왕궁 안의 모두가 당신을 탐탁지 않게 여길 걸 알면서도 왕자비가 되겠다 결심한 이유가 가장 궁금하죠.”
“글쎄요, 그저 어릴 때부터 꿈꿔 왔던 꿈이라 하면 믿으실 건가요?”
해맑은 양 웃는 고운 얼굴을 보며 로비엔이 비틀린 미소를 보였다. 불신의 뜻이었다.
“왕족이 가진 것보다 더 많은 부를 가진 자가 고작 왕족을 동경해서라?”
“아버지의 사랑을 더 받기 위해서일 수도 있겠네요.”
믿지 않는다, 돌려 비꼬는 아름다운 왕자님을 보며 로잘린의 얼굴에 깊게 미소가 팼다.
“제가 왕족이 되고, 제 가문이 작위를 받는 건 정말로 제가 꿈꾼 일이랍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남편에게 사랑받으며 일생을 의탁하는 일보다?”
아하핫, 저도 모르게 터져 버린 웃음에 로잘린이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사랑은 불완전하고, 그 어느 것도 보장하지 못해요, 전하.”
“…….”
“그리고 저는 의탁하는 일 같은 건 좋아하지 않아서.”
천천히 로잘린의 입을 가린 손이 거두어지고, 로비엔은 거짓처럼 미소가 사라진 로잘린의 무표정한 얼굴과 마주했다.
분명 창문 너머로 지나치는 모습을 봤을 땐, 무엇 하나 분명한 것 없이 흐릿한 인상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측면에서부터 크게 불어온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겨 수습하면서 그를 똑바로 바라보는 시선에서는…….
“제 한 몸은 제가 건사할 수 있답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선명한 색채, 그리고 인형과는 다른 생명력이 박동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