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겨울의 끝자락.
유난히도 날이 따뜻해서 이르게 분홍빛 꽃잎을 틔운 아름드리나무를 스치는 바람이 불었다. 동시에 꽃잎 몇 장이 팔랑거리며 비처럼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 나무 아래 티타임을 명목으로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은 모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어떻게 말을 해야 네가 그나마 충격을 덜 받을지 도저히 알 수가 없구나.”
“…….”
“폐하께서 네게 보가트 상단주의 둘째 딸과 혼인할 것을 명하셨단다.”
그들 사이에 대화가 시작된 것은 왕비가 왕세자, 로비엔 피베체 르 칼라브리아의 부드럽고 결 좋은 머리 위로 떨어진 꽃잎을 떼어 내면서부터였다.
“이런 말을 전달하게 되어 마음이 아파. 하지만 왕실의 파산만은 막아야 하지 않겠니.”
왕비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러나 눈동자 안에는 숨기지 못한 안타까움, 염려, 슬픔과 같은 감정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 만한 일이었다. 이는 칼라브리아 왕가에게는 몹시 수치스러운 일이었고, 그 희생자는 다름 아닌 그녀의 아들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왕이 친히 내린 명령이었고, 누구도 그 확고한 결정에 반기를 들 수 없었다. 왕과 왕비의 적장자인 로비엔은 현실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알고 있습니다. 제겐 이 왕국을 유지해 나가야 할 책임이 있으니까요.”
과거에는 왕실이 아주 강력한 왕권을 누리던 때도 있었다. 왕의 명이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었던 그런 날도 있었다.
그러나 변화는 소리 없이 다가와 그들에게 칼날을 겨누고 있었다. 귀족들이 왕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영지를 비우고 수도로 몰려든 때를 놓치지 않고, 상공업을 통해 돈을 축적한 자들이 주인을 잃은 땅에서 점차 세력을 불렸다.
언젠가 왕을 지지했던 새로운 시대의 힘은 왕의 손아귀 밖으로 모래알처럼 새어 나갔다. 그러나 왕은 여전히 그들을 구속하여 자신의 발밑에 두고 싶어 했다. 왕은 이 땅의 모든 생명체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해야만 한다고 믿었다.
마침 그들이 원하는 것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명예였다. 주면 받는 것이 당연한 상인들의 세계. 그들은 사치로 휘청거리는 왕가의 재정 상태를 구원해 주는 대신 명예를 요청했다.
그들이 가진 막대한 부, 사들인 넓은 땅, 이국의 물건, 그리고 혜안. 왕은 자신의 첫째 아들을 희생하여, 그것들을 쉽게 얻고자 했다.
“그저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뿐이야.”
어차피 모두가 왕족의 혼인은 사랑놀음 따위가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그들의 혼인은 각자의 가치가 반영된, 경제적이며 정치적인 동맹이었다.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인물과 정략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왕가의 명목을 유지해 나가는 것. 그것이 왕족의 숙명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을 잘 알면서도, 로비엔은 턱에 바짝 힘이 들어가는 걸 숨길 수 없었다.
이것은 단순히 귀족 여성과의 혼인이 아니었다. 그들이 아무리 강해지고, 더욱 세력을 넓혀 가고 있다 한들 고작 귀족 흉내를 내고 싶어 하는 제3의 세력에 불과했다. 평민, 가진 것이라고는 손아귀에 틀어쥔 돈밖에 없는!
그러나 이제 그들의 신분과 세력이 무슨 상관인가?
“그래도 최소한 네 약혼녀였던 마리안느보다는 훨씬 어여뻐.”
왕비의 위로를 들으며 로비엔이 허탈하게 웃었다. 칼라브리아에서 왕과 왕비 다음으로 귀한 사람이라 여겼던 왕세자는 결국 드마셸 보가트의 차녀와 결혼할 운명을 지니게 되었다.
“어떻게 생겼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다만…….”
“걱정하지 마라, 아들아. 그 아이는 내가 직접 가르칠 테니까.”
왕비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비록 그들이 드마셸이라는 졸부에게 금전적으로 지원을 받게 되었을지언정, 그들은 왕족이었고, 그 혈통에 대한 긍지가 드높았다.
“그들 역시 칼라브리아의 백성일 뿐이야. 그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면 우리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을 거란다.”
따라서 그녀는 드마셸의 딸을 다스리고 짓누르는 것으로 그들 사이의 우열을 확실히 보여 줄 작정이었다. 절대로, 결단코, 그들이 가진 티끌 한 점 없는 명예에 반기를 들 생각조차 할 수 없도록.
연노란 새의 깃털을 모아 만든 부드러운 부채를 팔랑거리며, 왕비가 웃었다. 부채 손잡이에 알알이 장식된 온갖 보석과 그녀의 드레스 소매 안으로 보이는 화려한 팔찌. 드레스 안에 감춰진 이국 비단으로 만든 구두. 별것 아닌 것 때문에 파산 직전의 상태라니, 그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굳이 그럴 필요도 가치도 없습니다. 혼인하게 되는 결과는 바꿀 수 없더라도, 그 전에 대화 한번은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세요.”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왕께서 내일 입궁을 명하셨으니, 잠시 시간을 낼 수 있을 거야.”
가엾은 것. 왕비가 테이블 위로 사뿐히 몸을 일으켜 가엾은 제 아들을 끌어안았다.
아마도 이 궁 안의 모두가 자신을 그렇게 보고 있을 것이다.
얼마쯤의 분노, 절망감, 그리고 비참함.
새로운 시대의 희생양이 된 왕세자는 가만히 눈을 감아 내렸다.
드마셸 보가트의 차녀, 로잘린 보가트는 비밀이 많은 인물이었다.
장녀인 리리엔 보가트의 경우 열아홉에 혼인을 해 이미 아이를 셋이나 둔 부인이었지만, 로잘린 보가트는 스물이 되도록 약혼조차 하지 않은 상태였다.
무엇이 그리 싫은 건지, 모임에도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어쩌다가 한번 얼굴을 보이는 때에도 이방인처럼 굴었다. 귀족들을 따라 하며 한껏 꾸미기 바쁜 아가씨들 사이에서 독보적이었다. 그 때문에 묘하게 사람을 끌어들이는 특유의 분위기나 우아한 얼굴이 아까울 지경이라고 다들 입을 모았다.
아마도 드레스 값이나 보석 값 따위가 아까워서 집에 처박아 두는 게 아닐까? 다들 그녀가 드마셸 보가트에게 단단히 미움을 산 게 틀림없다고 수군거렸다.
“로잘린!”
그 모든 예상이 완벽하게 비껴간 것임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로잘린 보가트는 드마셸 보가트에게 미움을 사서 살롱에 나설 수 없었던 게 아니라, 드마셸 보가트가 지나치게 상단 일을 떠맡겨 외부 활동에 나설 수 없었다.
장녀인 리리엔 보가트나 장남인 발란 보가트는 아버지인 드마셸의 뛰어난 사업적 자질을 물려받지 못했다.
그나마 발란의 경우, 후천적인 노력을 통해 조금 나아지긴 했다. 그러나 손대는 일마다 손해를 보지 않는 정도인 게 잘한다는 의미인 건 아니지 않은가.
드마셸은 미래의 상단주가 될 발란에게는 사교를, 로잘린에게는 비밀리에 실무를 맡기고 의지했다. 기실 그녀에겐 허튼짓할 시간이 없었다는 게 맞는 얘기였다.
“로잘린!”
재차 자신을 부르는 드마셸의 목소리에 로잘린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탐스러운 갈색 머리칼은 깃펜으로 대충 똬리를 들어 고정한 상태였다.
살피던 종잇장을 대충 밀어 두고 자리에서 일어난 로잘린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바로 맞은편에 이미 조금 열린 방의 문고리를 잡아당기자, 자리에 선 드마셸과 낯선 여자가 보였다.
로잘린이 고개를 숙여 여자에게 인사했다. 날카로운 눈빛이 순식간에 로잘린을 훑고 지났다.
“이쪽이 제 둘째 딸 로잘린 보가트입니다.”
“배워야 할 것이 많아 보이는군요.”
“하하, 아직 왕궁 예절에는 다소 미숙할 수 있으나, 결혼 전까지는 꼭…….”
“아마 그럴 시간이 거의 없을 겁니다.”
거북스러울 정도로 뚫어지게 보는 거부감 어린 시선에 로잘린이 말없이 시선을 바닥으로 두었다. 진짜 무례는 제가 누군지 소개하지도 않는 여자에게 있었으나, 지적할 수 없었다. 그리고 사실 로잘린은 이미 그녀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곧 그녀와 혼인할 왕세자 로비엔의 유모이자 베르타 궁의 시녀장, 라비앵 클로티.
그녀의 눈동자에 숨기지 않은 적의가 넘실거렸다. 그걸 알면서도 비위를 맞추겠다고 해맑게 웃을 만큼 속이 없지는 않았다.
로잘린은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 클로티 부인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보가트가의 차녀 로잘린 보가트입니다.”
“그나마 얼굴이라도 반반하니, 왕자님 옆에서 누가 되지는 않겠군요.”
대놓고 면박을 주는구나. 로잘린은 덤덤하게 생각했다.
베르타 궁의 시녀장 따위가 왕자비가 될 사람에게 이 정도의 태도라면 궁 안에서야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특히나 왕세자를 싸고돈다는 왕비라면 더하겠지.
“하나라도 폐를 덜 끼칠 수 있다면 다행입니다.”
이미 예상했던 바, 크게 충격을 받지도 않았다. 로잘린이 염원하는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어차피 단순히 사랑이나 신분 상승에 대한 욕구로 결혼을 꿈꾸고 있는 게 아니었다. 하다못해 지금보다 더 철없던 어린 날에도 왕자님과 결혼해 신분 상승하는 꿈은 꾸지 않았다.
“왕께서 내일 입궁을 명하셨으니 저와 함께 들어가지요. 왕비께서 보가트 양을 위해 직접, 이 몸을 보내셨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각별한 도움에 감사드려요, 클로티 부인.”
과연 저 등쌀에 내일 편안히 입궁할 수는 있을까. 그게 걱정될 따름이었다.
“일단 별채에 부인께서 묵을 방을 준비해 뒀습니다. 밖에 하녀 아이가 있으니 그 아이를 따라가시면 됩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로잘린이 문가에서 살짝 비켜서자 클로티 부인이 우아한 몸짓으로 문턱을 넘어섰다. 하녀 아이가 종종걸음으로 앞서고, 클로티 부인은 로잘린에게 시선 한번 두지 않은 채 사라졌다.
그 꼴을 지켜보던 드마셸이 코웃음을 쳤다.
“다 망해 가는 왕족이나 모시는 주제에 콧대는 어지간히도 높군.”
“아버지, 듣겠어요.”
“내가 돈을 대 주지 않으면 그 대단한 집안은 폭삭 몰락하는데도 말이야!”
부르주아. 시대의 변화로 천문학적인 금액의 돈은 끌어모았지만, 가문의 명맥을 잇는 명예는 없는 이들. 그 대표적인 예시가 드마셸 보가트였다.
그는 누가 일러 준 바 없이도 기가 막히게 시대의 변화를 알았다. 돈이 될 만한 건 누구보다 빨리 발견하고 시장에 가져다 팔았다.
그 후에 그는 탄광을, 그리고 사치할 돈이 부족한 귀족의 영지를 사들였다. 그 안에 속한 건물과 사람도 곧 그의 소유가 되었다. 자연스럽게 돈은 또다시 돈이 되어 그에게 돌아왔다.
그러나 그 돈도 그에게 작위와 명예만큼은 주지 않았다. 드마셸은 어지간한 공작들보다도 돈이 많았지만, 낮은 직위의 귀족 앞에서도 고개를 숙여야만 하는 평민에 불과했다.
그의 삶에는 여전히 재산과 작위 사이 수많은 괴리가 있었다. 드마셸 보가트는 그걸 견딜 수 없어 했다.
“콧대를 세울수록 뭉개질 테니, 그 꼴이 볼 만하겠군.”
드마셸이 콧김을 뿜으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클로티 부인이 그 모습을 봤다면 채신머리없다고 기함했을 모양새였다.
“곧 왕족들도 저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거예요.”
로잘린이 드마셸 가까이 다가서며 속삭였다.
“가진 거라곤 뻣뻣한 목과 자존심이 전부인 자들도,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게 현실이니까요. 아버지의 세상도 그리 머지않았어요.”
세상은 변하고, 변하지 않는 인간은 도태된다. 그는 당연했다.
그리고 로잘린은 변화하는 세상의 가장 앞에 설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