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콩닥콩닥 (24/24)

콩닥콩닥

AM 05:01

잠에서 깬 황 대표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푸른빛이 감도는 새벽하늘에 형체만 남은 초승달이 박혀 있다. 제 품 안에서 느껴져야 하는 체온이 없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어른거리는 게 허연 발등이다.

살짝 구부린 손가락 마디로 예쁜 발가락을 툭 건드렸다. 아무 미동이 없다. 그때 버들이 꿈틀꿈틀 반대쪽으로 돌아누웠다. 작은 체구가 어느 방면에서든 눈길을 사로잡는다. 동그란 뒤통수에 황 대표의 시선은 한참이나 얽매여 있었다.

잠버릇은 못 고치는가 보다. 품에 단단히 가둔 채로 잠이 들어도 일어나 보면 지금처럼 아무 데나 머리가 가있길 일쑤다. 새벽에 답답해서 깨면 다리 한쪽이 턱 하니 제 배 위에 올라가 있기도 하다. 어이가 없어 흐르던 헛웃음이 깊게 잠긴 생각 끝에 사그라졌다.

참 희한한 일이다. 버들이야 원래 그렇다고 치고. 제게 일어난 변화가 사뭇 낯설다. 아무리 얘가 작고 귀엽다지만 같이 사용하는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자는데 저는 그걸 오늘처럼 인지하지 못하고 아침까지 푹 자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고질병이자 불치병인 줄 알았던 불면증은 전부 옛 기억이 됐다.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성격이 버들과 함께 있을 때에만 한없이 누그러진다. 어떠한 진정제로도 해결하지 못한 제 문제를 어린 꼴통이 쉽게 해결해 냈다.

황 대표는 상체를 들어 턱을 괬다. 팔꿈치 아래에 눌린 침대 시트가 지긋하게 주름졌다. 눈으로만 보길 잠시. 납작하게 가라앉은 버들의 파자마 위로 손을 올렸다. 큰 손에 움푹 파인 등 전체가 거의 가려질 듯하다. 손바닥 아래로 미세한 진동이 지난다. 그러다 이따금씩 크게 들썩이기도 한다. 숨을 쉬고 있는 게 다라지만 그 얕은 움직임이 대단한 임무처럼 다가와 대견스럽다.

둑 터지듯 쏟아진 감정에 예뻐해 주면, 왜 갑자기 예쁨받는 건지 모른 버들의 큰 눈이 끔벅끔벅한다. 저 그냥 밥 먹고 있는데요? 저 그냥 작업하고 있는데요? 저 그냥 책 보고 있는데요? 저 그냥 걷고 있는데요? 저 그냥 하품했는데요? 의문 가득한 얼굴로 버들이 고개를 갸웃한다.

그럼 그 갸웃한 고개가 대견스러워 또 예뻐해 주고 싶다. 천성이 못돼 그런 건지 삐뚤어진 방식으로 예뻐해 주고 싶은 게 문제다. 여린 살갗의 실핏줄이 다 터질 때까지 팔이든, 볼이든, 허벅지든 물어 버리고 싶다. 제 발치 아래 좁게 만들어진 그림자 간격만큼, 다시 말해 저와 한 몸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으려는 버들을 두고 그 욕구를 참는 게 그가 하루도 빼놓지 않고 겪는 비밀한 곤혹이다.

봉긋한 엉덩이를 한 손에 틀어쥐었다. 마실 나간 읍내에서 버들과 함께 방앗간을 구경했던 적이 있다. 똑같은 광경을 보고 버들은 신기해했고, 황 대표는 버들의 엉덩이를 생각했다. 버들의 엉덩이 감촉이 갓 쪄서 나온 하얀 떡처럼 보드랍고 말랑거리니까.

그는 이어 목덜미에 입술을 가져갔다. 잠잠히 기다리고 있으니 뜨끈뜨끈한 체온이 입술을 데운다. 오감 전부를 버들이 채워 줘야지만 비로소 황 대표에게 안정감이 발발했다.

간밤 사이 제가 발라 준 로션 냄새가 희미해졌다. 코밑을 은은하게 감도는 버들의 체향을 눈을 감고 감상했다. 성격처럼 감미롭다. 풍선껌 같기도 하고. 솜사탕 같기도 하고. 정확히 어떤 것과 비유를 하기 어려운 달콤함이 저를 물들인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버들을 제 쪽으로 안아서 데려올까 하는 망설임을 끝낸 터였다. 한번 잠들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푹 잠드는 버들을 알지만, 시간이 시간인지라 행여나 깨울까 봐 걱정이다.

황 대표는 버들을 옮기는 대신 반대쪽으로 베개를 가져가는 걸 택했다. 불필요한 바지를 벗긴 후에 버들을 부둥켜안았다. ……으음. 자면서도 불편함을 느끼는지 버들이 미간을 찡긋했다. 버들의 팔을 자신의 허리 위에 올린 황 대표가 최대한 빈 공간 없이 붙어 마른 몸을 강하게 속박했다.

조금 뒤척인다 싶던 버들은 곧 순종적으로 황 대표의 품에 안겼다. 착하네. 제 손을 탔다고밖에 볼 수 없는 어린 애인의 무의식이 만족스러워 황 대표의 입매가 곡선으로 휘었다. 자신의 코끝을 버들의 코끝에 가져가 짧게 부딪혔다.

AM 5:52

버들은 황 대표를 꼭 끌어안고 있는 자신의 팔을 자각하자마자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놀랐는지 직전까지 가물가물했던 시야가 번쩍 번개가 치듯 환해졌다. 미쳤나 봐. ……덮친 건가?

자고 있는 황 대표님을 변태처럼 더듬었을까 봐 걱정이다. 사귀기 전에 몽유병처럼 자다 말고 황 대표님 무릎 위로 기어 올라간 전적이 있는 자신이 썩 못 미덥다. 그때도 황 대표님은 착해서 그런 저를 내치지 않고 오히려 안아 줬었는데. 지금도 자다 깨면 서재에서 일하는 황 대표님의 무릎 위에 제가 턱하니 앉아 안겨 있을 때가 있다.

버들을 무릎에 올려놓고 있어야 안식을 느끼는 황 대표가 태연히 사기 친 말에 속아 넘어간 버들은 아직까지 진실을 알지 못했다.

……같이 껴안은 건가?

자신감 없이 가설을 세웠다. 그래. 제가 황 대표님을 끌어안고 있었듯이, 황 대표님도 저를 끌어안고 있었다. 제 허리를 지그시 누르는 팔의 무게가 사라진 게 아쉽다.

진위를 파악하려 나름 노력 중이던 버들은 툭 떨어져 나간 황 대표의 팔을 자신의 허벅지 위로 허겁지겁 끌어당겼다. 곧이어 퉁퉁 부은 얼굴에 웃음이 만연하게 지폈다. 입을 틀어막은 버들이 엉덩이를 들썩이며 소리 없이 좋아했다. 잠에서 깨자마자 보는 게 이토록 잘생긴 남자 얼굴이라니. 심지어 이토록 잘생긴 남자가 저와 사귀는 사이라니.

자랑스러워진 버들은 전장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전사인 양 위풍당당 가슴을 내밀었다. 아. 잠깐. 뭐야? 바지가 벗겨진 채다. 고개를 푹 잡아당긴 버들은 꿇고 앉은 제 무릎을 덜떨어진 표정으로 응시하다가 황급히 바지를 찾아 입었다. ……설마. 바지까지 훌러덩 벗어 버리고 덮친 건 아니겠지?

양심이 있으니 변태란 말은 부정하지 않겠다. 하지만 바지를 벗든가, 덮치든가, 둘 중에 하나만 저질렀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동안 가지가지 했던 자기 스스로에게 신용이 없는 버들의 바람은 소박하다.

버들은 다시 잘생긴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머릿속 잡념이 사라지고 우월한 감상에 젖는다. 버들은 제 삶의 질이 굉장히 우수하단 것에 자긍심을 갖고 사는데, 황 대표가 결정적 역할을 한다.

도톰한 입술이 느리게 열렸다.

“잘 주무신다.”

잘 먹는 황 대표도, 지금처럼 잘 자는 황 대표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모두 버들의 즐거움이다. 두근두근하다. 비밀스런 입맞춤이 오늘도 이어진다. 눈을 감은 버들이 황 대표의 쇄골에 정성스레 입술을 대었다.

너른 품속을 파고들었지만 이걸로는 무언가 모자라다. ……아무 데도 못 줘. 목줄이라도 채워 버릴 거야.

과감한 결단을 내린 버들은 황 대표의 다리 사이로 제 다리 하나를 꼬물꼬물 집어넣었다.

AM 07:11

거의 동시에 눈을 떴다. 아침 햇살에 침실이 환하다.

“잘 잤어?”

아직 잠결이 남아 있는 제 눈가를 매만지며 물어오는 낮은 목소리에 버들은 무던히 설렜다.

“대표님. 있잖아요. 제가 생각해 봤는데…….”

……얘는 눈 뜨자마자 헛소리네.

연애하기 전엔 카페인부터 찾곤 했던 아침을 이젠 버들의 헛소리를 들으며 맞이한다. 버들의 전화가 걸려 오면 열 일 제치고 서둘러 퇴근했던 유 대표가 어떤 심정이었는지 이제는 알 것도 같다. 버들과 노는 게 제일 재밌다. 헛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모를 정도다.

소중해 마지않는 막냇동생을 평생 제 옆구리에 끼고 살 거였단 유 대표의 계획이 재평가된다. 그때는 브라더 콤플렉스의 비정상적인 발상으로 치부하고 정신과 치료를 권할 뻔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순수하기 이를 데 없다. 제가 버들의 친형이었다면 달랐을 것이다. ……따먹었겠지. 천박하고 저속한 표현이나 직설적인 제 속내가 그렇다.

직접 업어 키운 내 새끼가 나 말고 다른 사람이랑 살겠다는데 어떻게 두고만 봐. 저라면 그런 눈 뒤집히는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 미리 손을 썼겠지만 아니어도 괜찮다. 어리고 약한 내 새끼의 속을 억지로라도 꿰뚫어 버리고, 그 기점부터 오직 제게만 의지하도록 상과 벌을 적절히 분배시켜 길들이면 되니까.

제 수중에서 내 새끼가 느껴야 할 감정은 ‘안정’ 딱 하나다. 괜한 반항심은 피로를 키운다. 그런 달갑지 않은 상황을 미리 차단하기 위해선 내 새끼가 자신이 사육당하고 있단 일말의 의아함조차 가질 수 없게 물밑부터 차근차근 교묘히 작업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차갑고 이성적인 성격에 사회화가 잘된 그는 이변 없이 목적을 완벽히 달성할 것이다.

황 대표가 지금 자신을 보며 머릿속으로 어떤 음심을 품었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버들의 눈이 호수처럼 청명하다.

“대표님. 오늘 출근 안 해요?”

다 알면서 모른 척 묻는다.

“응.”

“저도 오늘 작업 쉬는 날인데…….”

“버들이도 오늘 작업 쉬는 날이야?”

다 알면서 황 대표 역시 모른 척 호응했다.

“그럼, 우리…… 섹스해요?”

조그마한 게 발칙하다. 그 발칙한 새끼의 볼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 그대로 자신의 얼굴까지 당겨 왔다. 발칙한 새끼를 대하는 황 대표의 어조가 물씬 상냥하다.

“너 오늘 몸무게 재는 날인 거 알아, 몰라?”

“몰라.”

버들이 황 대표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반말까지 더해진 응석에 헛웃음을 켠 황 대표는 버들의 등을 찬찬히 쓸어내렸다. 팔과 허벅지를 차례대로 쥐어 보던 황 대표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살 빠졌네. 3kg 정도. 굳이 몸무게를 재지 않아도 가늠된다.

버들의 신체 중에서 토실토실한 부분을 꼽으라면 볼, 눈 밑 애굣살, 회음, 엉덩이가 다다. 부지런히 살을 찌우고 싶은데 급한 건 언제나 황 대표 쪽이다.

“산책 갈 거야.”

“산책?”

꼴통에겐 섹스와 아침 산책이 동일선상인가 보다. 신이 나서 침대를 박차고 나간다.

AM 07:48

커플 스니커즈를 신고 이슬 묻은 흙길을 걸었다. 같은 날 구입한 황 대표의 스니커즈는 흠 없이 깨끗한 반면 버들의 스니커즈는 걸레짝이다. 거기다 뒤를 꺾어 신었다. 그걸 본 황 대표가 걸음을 멈췄다.

이렇게 신발을 끌고 다니면 무릎에 무리가 간다. 황 대표를 따라 버들이 걸음을 멈췄다. 버들이 신발을 똑바로 신는 동안 비틀거리지 않게 황 대표가 중심을 잡아 줬다. 뻐꾸기가 운다. 이르게 농사일을 하러 나온 어르신들이 버들을 보고 반갑게 알은척을 했다.

“저는 대표님이랑 산책 나왔어요.”

버들이 황 대표의 팔을 잡았다. 황 대표가 고개를 까닥했다. 무궁한 발전이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가까워진다. 개울가에 도착했다. 요요히 흐르는 물살에도 가을이 찾아왔다. 넘실넘실 떠다니는 붉은 단풍잎을 시선으로 좇는 버들을 황 대표가 자연스럽게 어깨에 들쳐 메고 징검다리를 건넜다. 무사히 반대쪽으로 건너간 버들이 둘만 공유했던 계절의 추억 하나를 꺼냈다. 악의 없는 얼굴이 그저 해사하다.

“대표님. 예전에 저 여기서 빠진 거 기억나요?”

“…….”

“운동화도 젖고 그랬었는데.”

“…….”

죄 많은 황 대표가 먼 산으로 눈을 돌렸다.

아침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니 세탁기 작동이 종료된 상태다. 버들이 들고 온 세탁 바구니에 수북이 채워져 있는 건 작업용 앞치마였다. 힘이 좋은 황 대표가 탈탈 털어 건넨 앞치마를 버들이 빨랫줄에 널었다. 둘이서 일을 분담한 덕분에 수월히 끝났다.

황 대표가 버들의 머리카락에 빨래집게를 꽂았다. 산책을 나오기 전에 간단히 세수와 양치만 했을 뿐, 빗질은 따로 하지 않은 터라 버들의 머리는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난리였다. 황 대표가 자신의 곱슬머리를 얼마나 사랑스러워하는지 모르고 버들은 주체되지 않는 제 머리칼을 불만처럼 여겨 붉은 입술을 삐죽했다.

“형들 머리는 멋있는데 저만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네 머리가 왜.”

“이상하잖아요.”

“누가 이상하대. 예뻐.”

“아니에요.”

황 대표가 버들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마주 보게 된 황 대표의 허리춤을 버들이 자연스럽게 붙잡았다. 황 대표가 버들의 머리를 양손으로 만졌다. 쓱쓱, 처음엔 이마 뒤로 앞머리를 넘겨주는가 싶더니 우발적으로 5:5 가르마를 탔다. 그게 너무 웃겨 뒤로 넘어가 버렸다. 역시 버들과 노는 게 제일 재밌다. 버들이 아니었으면 이렇게 크게 웃어 본 적도 없을 것이다.

황 대표의 웃음에 덩달아 배시시 좋아했다가 그게 제 머리 탓이란 걸 안 버들의 눈썹이 축 가라앉았다. 불퉁히 나온 입술까지, 시무룩한 버들의 표정을 무심코 따라 하던 황 대표가 얼른 제 어린 연인을 달랬다.

“예뻐서. 응? 예뻐서 웃은 거야.”

“놀리신 거잖아요.”

저런. 눈치가 있네.

황 대표가 다시 숱 많은 버들의 머리칼을 반으로 갈랐다. 5:5 가르마가 정교하다. 미치겠다. 입 안쪽 살을 깨물었다. 얼굴의 반을 차지할 것처럼 눈이 커서 인형 같다. 참아야 하는데 다시 크게 웃음이 터지고야 말았다.

“저도!”

까치발을 든 버들을 위해 황 대표가 다리를 벌려 눈높이를 맞춰 주었다. 버들이 황 대표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잠잠히 내리깔려 있던 황 대표의 속눈썹이 슥, 들렸다. 고요함 속에서 서로의 눈빛이 충돌했다. 그 정도 거리에서도 그는 콩닥콩닥, 빠르게 뛰는 버들의 진심을 들을 수 있었다.

AM 09:25

씻겨 주겠단 황 대표를 두고 버들은 재빨리 욕실 문을 잠갔다. 혼자 씻으며 할 게 많다. 씻고 나온 버들의 눈에 커튼을 정리하고 있는 황 대표가 담겼다. 살금살금 발걸음을 죽여 다가간 버들은 팔을 최대한 활짝 펼쳐 황 대표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분명 끌어안은 것인데, 어째 창문에 비쳐진 실루엣은 버들이 대롱대롱 붙들려 잡혀가는 꼴이다.

아무렴 좋다. 황 대표가 나머지 커튼을 정리하는 동안 버들은 널따란 등에 옆얼굴을 기댄 채 단단한 등골을 만끽했다.

“씻고 나올게.”

……어? 황 대표를 끌어안고 있던 팔을 푼 버들이 당황했다. 욕실은 방의 개수만큼 넉넉했지만 황 대표가 씻으러 들어간 욕실은 방금 전 버들이 사용한 욕실이었다. 말릴 틈이 없었다. 닫힌 욕실 문을 바라보며 버들은 전전긍긍하게 손톱을 깨물었다.

같이 씻은 적이 허다한데, 자신이 사용한 욕실을 황 대표가 바로 이어 쓴다는 게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큰 쑥스러움을 몰고 온다. 서둘러 그 앞을 떴다. 자신이 사용한 욕실에서 정갈한 남자가 수음한 적도 있단 걸 버들은 평생 모를 것이다.

황 대표가 씻고 나왔을 때 버들은 침대에 앉아 있었다. 옆에 갈아입을 옷을 챙겨 뒀는데도 버들이 다시 꺼내 입은 건 파자마였다.

“유버들.”

자기를 부르는 데도 버들이 반응 없다. 그저 흘깃 눈짓한 게 다다.

“대표님.”

가까이 다가온 황 대표의 팔을 버들이 잡아당겨 앉혔다. 황 대표는 충분히 버틸 수 있던 그 약한 힘에 설득당해 주었다. 공기에 섞이는 샴푸 냄새가 두 사람 몫이라 진하다.

은근슬쩍 제 무릎 위에 올라와 앉은 버들을 내려다보는 황 대표의 눈빛이 어쩐지 서늘하다. 버들이 뭘 바라는지 빤히 읽혔지만 황 대표는 가만히 있기만 했다.

고개를 비틀어 다가간 버들이 황 대표에게 입을 맞췄다. 버들의 혀끝이 황 대표의 입술을 살며시 할짝거렸다. 그 어설픈 욕망에 황 대표는 순간 시야가 휘청거렸다.

“……해요.”

“안 돼.”

단호할 땐 단호해야 하는 법이다. 영화 프로모션 때문에 며칠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가 모처럼 여유롭게 맞은 휴일이다. 오랜만의 섹스에 이성이 끊길 게 뻔하다. 휴일을 통째로 침대에서만 보내기엔 가을날, 이 좋은 날씨가 아깝다. 악착같이 인내하는 걸 오늘의 목표로 세웠다.

어느 틈에 티셔츠 속으로 손이 들어왔다. 살금살금, 맨살을 만져 대는 버들의 손목을 붙잡아 저지했다. 그대로 눕혀 동그란 코끝에 입을 맞췄다. 황 대표의 입술이 버들의 귀 뒤에서 조금 오랫동안 머물렀다. 간지럽다며 버들이 발을 동동 굴렸다. 쇄골과 어깨까지 황 대표의 입술이 차분히 닿았다가 떨어졌다. 버들이 체온 높은 한숨을 길게 터트렸다.

버들이 언제 꺼냈는지 모를 콘돔 포장지 끝을 황 대표의 입술에 물려 주었다. 기가 찬다.

“대표님.”

뭘 본격적으로 시작도 하기 전이건만 버들은 기대만으로 뜨거워진 다리를 자꾸 오므리려 헛된 애를 쓴다. 자신의 사정이 빠를까 봐 신경 쓰고 있는 건데 정말 하찮고 귀엽다. 어린 꼴통의 발목 사이에 발을 걸어 오므려든 다리를 확 벌려 버리자 놀란 듯 버들이 펄떡거렸다.

황 대표의 육중한 몸통이 버들을 지그시 눌렀다. 자신의 민감한 다리 사이로 실려 오는 체중을 느끼며 내쉰 버들의 달뜬 호흡이 황 대표의 성감대인 귀 근처에서 부서졌다. 속이 타는 걸 억누르며 황 대표는 버들에게 키스했다.

혀 뒷부분의 신경을 농밀하게 쓸어 올리자 버들이 허둥거린다. 콘돔까지 물려 주며 먼저 유혹한 게 누군데. 과감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어린 꼴통의 혀끝을 붙잡아 황 대표는 자신의 입 안으로 초대했다.

황 대표의 입술이 바짝 움츠린 버들의 목덜미로 옮겨 갔다. 움켜 쥔 버들의 머리카락이 황 대표의 손가락 마디마디 사이를 빠져 나왔다. 물기에 젖는다.

“너 속옷도 안 입고…….”

말문이 막혔다. 가운 밑자락을 더듬거리자 바로 버들의 연한 살덩이가 만져졌다. 버들의 볼에 홍조가 짙다.

“속옷 어디에 뒀어?”

불필요해 벗겨 버린 바지를 찾아 입더니.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을 안다. 바지는 입되, 더 불필요한 속옷을 벗어 버린 버들이 순하게 눈을 깜박인다.

팔을 교차해 머리 위로 티셔츠를 벗는 황 대표를 올려다보며 버들이 쌕쌕거렸다. 다시 황 대표가 버들과 몸을 맞댔다. 으……. 맨 살갗이 부딪히는 감각에 버들의 온몸은 빨갛게 물들다 못해 익어 버릴 수준이다.

다리 사이를 가만가만 노니는 황 대표의 손끝에 질끈 눈을 감은 버들이 손등으로 입을 가리곤 끙끙거렸다. 그런 식의 억눌린 신음은 애써 감춰 둔 가학성을 자학한다. 그래서 더 집요하게 혀를 놀리게 된다는 걸 너는 알까?

“아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버들이 신음을 흘렸다. 자꾸만 뜨거워지는 자신의 몸에 비해 황 대표의 손은 상반되게 차가웠다. 버들의 어깨가 몇 번이나 움찔거렸다. 상의를 탈의했어도 황 대표는 정갈했고, 하의만 벗은 버들은 잔뜩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황 대표가 버들의 목 뒤에 팔을 집어넣었다.

황 대표가 손을 오므렸다. 온후한 손바닥 안에 모든 자취를 감춰 버린 버들의 좆이 사르르 녹겠다. 버들은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렸다. 가닥가닥 젖어 뭉친 속눈썹이 질척하다. 왜인지 황 대표가 키스를 해 주지 않는다. 그 탓에 감각과 신경이 분산되지 않고 오직 한 곳에만 찌르르 집중된다. 황 대표가 예고 없이 손을 움직였다. 물기 어린 소음이 찰박찰박 튄다.

눈을 꾹 감은 버들이 바들바들 떨다가 황 대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른한 눈길로 황 대표는 자신의 손길에 울긋불긋 달아오르는 버들의 표정을 놓침 없이 주시했다. 절대 서두르지 않았다. 느리고, 끈적끈적하게 왕복했다. 기둥 전체를 위아래로 쓰다듬다가, 시럽 같은 투명한 액을 생성한 귀두 끝만 노려 살며시 문질러 버들을 완전히 함락시켰다. 온몸에서 힘이 빠진 버들은 시트를 움켜쥘 수도 없었다. 흐느낌을 닮은 신음이 끊길 듯이 가늘게 이어진다.

가슴을 들썩거려도 놓아주지 않는 황 대표를 바라보려 버들이 눈을 반쯤 떴다.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얼룩진 시야에 황 대표의 이목구비가 번져 보였다.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궁금한데 확인할 재간이 없었다. 눈꺼풀은 금방 허물어졌다.

버들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황 대표가 손등의 핏줄이 불긋하게 솟아오른 손을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놀란 버들이 황 대표의 팔을 붙잡았지만 그뿐이다. 아득하게 멀어지는 머릿속으로 꽃잎이 휘날리더니 한순간에 폭발했다. 팡, 하는 축제의 소리가 들려온 것도 같았다. 뭉근한 후유증이 혈관을 타고 오래 부유한다. 축 늘어져 잘게 떠는 버들의 몸이 잔잔해질 때까지 황 대표가 보듬어 줬다.

“좋았어?”

겨우 목소리를 내어 네, 했다.

“제, 제가…….”

자신도 해 주겠단 버들의 소보록한 엉덩이를 치아 자국이 날 만큼 세게 문 황 대표가 수건을 가지러 갔다. 혼자 남겨진 버들은 팔을 지탱해 몸을 일으켰다. 하얀 정액으로 지저분해진 다리 사이를 응시하다가 떨어져 있는 콘돔을 집어 들었다. 황 대표의 흉내쟁이인 버들은 황 대표가 했던 것처럼 굳이 이 사이로 포장지를 물어 찢으려다가 톱니 같은 둘레에 입술이 긁혀 잠시 아파했다. 윤활제가 미끌미끌하다.

황 대표는 좆이 두껍고 긴 만큼 사용하는 콘돔 사이즈도 크다. 어느 날, 친구들 앞에서 카드를 꺼내려다 지갑에 같이 넣어 둔 콘돔까지 딸려 나왔던 적이 있다. 와! 유버들이 콘돔 들고 다닌다! 다 큰 놈들이 콘돔을 보며 박장대소를 했다가 이내 사이즈를 알아차리고 경건해졌다. 그게 버들이 쓰는 콘돔인 줄 오해한 것이다.

그건 그들 사이에서 정말이지 파격적인 사건으로 남았다. 놈들은 연상의 누님이 왜 버들이랑 사귀는지 알 것 같단 눈빛을 저들끼리 주고받았다. 갑자기 충격받은 얼굴로 정민이 드르륵,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감독님 호출 때문에 지금 가 봐야 한다는데 불안정한 동공이나 어색한 톤이 누가 들어도 ‘저 새끼, 지금 거짓말 하고 있네.’ 하고 삿대질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혼자서만 분위기를 파악 못한 버들은 비틀비틀 걸어 사라지는 제 친구 따위 안중에도 없이 오직 콘돔을 챙겨 도로 지갑에 넣었다. 아무도 빼앗아 갈 생각이 없는데 달라고 할까 봐 표정이 앙칼졌다. 마치 화나서 가슴 털을 푸냥하게 부풀린 하얀 새 같았다. 아무 타격감이 없었단 소리다.

“…….”

이걸 어떻게 쓰는지 방법은 알지만, 실제로 해 본 적은 없다. 콘돔을 만지작거리다 아래를 조심히 비틀어 공기를 빼는 버들의 볼이 발그레하다. 황 대표의 좆에는 고무가 찢겨질 정도로 팽팽하게 당겨지던 물건이 저한테는 헐렁거린다. 그냥 쑥 빠져 버린 콘돔을 쥐고 버들이 꼼지락댔다.

「아무 남자하고는 안 자.」

「그럼요?」

「내가 남자 경험이 처음이라 기준치가 높아서.」

「대표님 성에 차는 남자는 어떤 남자인데요?」

「백마 탄 왕자 정도는 되어야지.」

다음 생에선 정말 뭐든지 다 크고 튼튼한 백마 탄 왕자로 태어나 황 대표님에게 청혼해야지.

이미 이뤄진 희망사항이란 걸 모르고 버들이 마음 깊이 되새겼다.

개구리가 나타나면 자신의 애인을 지켜 주기 위해 전방에 서서 나뭇가지를 휘둘러 쫓아내는 용맹한 자질이 충분한 유버들은 황정우만의 백마 탄 왕자였고, 유버들의 온몸 구석구석, 하다못해 손가락이 벌어지는 간격이라든가 귀 구슬의 모양마저 황정우의 취향이 아닌 곳이 없었다.

황 대표가 돌아오는 소리에 허겁지겁 콘돔을 티슈에 싸 휴지통에 버렸다.

AM 11:00

버들을 식탁에 앉힌 뒤 황 대표가 과일 몇 종류와 크루아상을 내왔다. 껍질이 숭덩숭덩 잘려 나간 사과가 콩알만 하다. 밥과 국, 생선이 반드시 포함되는 아침상을 간단하게 차린 이유는, 제대로 된 식사는 밖에 나가 할 예정이라 그렇다.

“버들아.”

“네?”

어린 애인에게 데이트를 청하는 황 대표의 발음이 정중했다. 버들이 한 템포 늦게 입을 열었다.

“데이트?”

“응.”

버들의 목소리가 밝다.

“그럼 우리 이따 밤 주우러 가요!”

밤 줍는 게 데이트가 될 수 있단 걸 꼴통이 아니었으면 평생 몰랐겠지. 미소를 띤 황 대표가 말간 버들의 볼에 묻은 빵가루를 털어 주었다.

“밤은 나중에.”

“그럼요?”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어때.”

“좋아요!”

자신과 뭘 하든, 그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의미를 두는 버들을 알지만, 오랜만에 여유롭게 맞은 휴일을 특별한 하루로 보내고 싶다. 전에 버들이 말한 애인이 있는 친구들은 전부 다 가 봤다는 카페가 바쁜 동안에도 계속 생각이 났다.

버들이 골머리를 앓으며 데이트 계획을 세우는 동안 황 대표는 묵묵히 몇 개 되지 않는 식기들을 설거지했다. 엄연히 식기 세척기가 있지만 이렇게 제가 직접 거품을 짜 설거지를 해야만 뭔가 속이 시원하다.

PM 12:22

소파에 긴 다리를 꼬고 앉아 황 대표는 버들이 세운 데이트 계획을 확인했다. 하얀 종이가 깨알 같은 글씨로 빽빽하다. 이걸 다 하려면 한 달도 모자라겠다. 유 대표가 봤으면 뒷목 잡고 쓰러졌을 추상적인 내용들에 인상을 쓰는가 싶던 그는 종이로 얼굴을 가리고 소리 내어 웃었다.

프로모션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했던 데이트를 회상했다.

그날 황 대표는 미간을 구기고 모니터 화면을 집중해 들여다봤었다. 한숨이 절로 샜다. 공기 청정기가 제대로 작동 중에 있었고, 온도와 습도 또한 적절히 조절되어 쾌적한 환경의 집무실이 유난히 답답하게 느껴졌다.

넥타이를 살짝 잡아당긴 데에 이어 단추 두어 개를 풀어 내렸지만 그 정도로는 기분이 나아지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창문을 열었다. 저 멀리 계절에 맞게 색이 변하는 나무들이 보였다. 묵직한 바람을 맞으며 다시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들여다봤다. 심각한 상관의 얼굴을 본 비서가 괜스레 서늘해진 간담을 쓸어내렸다.

「여기서 어떻게?」

살짝 눈치를 살핀 비서가 다시 다가와 마우스를 잡았다.

「이쪽 길로 쭉 가면 사거리가 나옵니다. 오른쪽으로 꺾어 편의점이 나오면…….」

간결하고 정확한 비서의 길 찾기 설명을 들으면서 황 대표의 인상은 짙어지기만 했다. 마침내 말을 마무리 지은 비서가 뒤로 물러났고, 황 대표는 새로 마우스를 잡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출발지는 회사 사옥, 도착지는 역 근처 공영 주차장이다.

마우스를 까닥거리며 인터넷 창을 작게 조절했다. 이렇게 보면 거리가 얼마 안 되는 것 같은데, 길이 꼬불꼬불하다. 편의점이 나오면 은행이 있을 거고 그걸 끼고 다시 오른쪽. 오른쪽에 있는 파출소를 지나 좁은 언덕을 올라간 다음……. 뭐가 이렇게 복잡한 건지. 시련이 덮쳐든다.

「막내 도련님이랑 같이 이동하시는 게 어떠십니까.」

「…….」

넌지시 건넨 비서의 제안에 황 대표는 대꾸하지 않았다.

「아니면 제가 운전할까요?」

「…….」

황 대표는 점심 먹고 오라며 비서를 내보냈다. 점심을 챙겨 먹기엔 터무니없이 이른 때였으나 뜻밖에 자유를 얻게 된 비서가 군말 없이 밖으로 나갔다. 넓은 집무실에 혼자 남아 황 대표는 다시 집중해 화면을 주시했다.

비서가 알려 준 대로 길을 지나던 마우스 커서가 어느 지점에 막혀 갈팡질팡한다. 오른쪽으로 꺾으면 나오는 편의점이 세 개나 된다. 헷갈리지 않고 잘 갈 수 있을까? 이마에 툭 힘줄이 돋아났다. 그때,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버들이었다.

발신인 : 자기

내용 : 대표님, 잘 찾아오실 수 있어요?

마치 버들이 곁에 있는 것처럼 황 대표의 눈가가 저도 모르게 온화해졌다. ‘응, 찾아갈 수 있어.’라고 답장을 남겼다. 핸드폰 저편에서 웃고 있을 무해한 얼굴이 충분히 예상됐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화면을 바라봤다.

예정되어 있지 않은 데이트였다.

조각에 대해 자문을 구하기 위한 어떤 자리에 첫째 형과 참관하러 간 버들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근처에 조그맣게 사진전이 열리고 있는데 주변 경치도 고즈넉하여 좋고, 야간까지 운영을 하고 있단다.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요…….

조심스레 시간 있냐고 물어오는 수작질에 옅은 웃음이 내뱉어졌다.

데이트를 리드하는 건 언제나 버들이다. 여기에 가요, 저기에 갈까요? 하는 제 꼴통을 황 대표는 번거로운 기색 없이 선선히 따라 준다.

* * *

6시. 본가에 가서 같이 밥 먹자는 제 첫째 형을 이 핑계 저 핑계 다 갖다 붙여 먼저 보낸 후 버들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데이트 시간이 다가오면서 가슴이 설렘으로 뛰었다. 버들은 황 대표가 지갑에 꽂아 준 카드로 미리 구입한 사진전 표를 잃어버릴까 봐 손에 꼭 쥔 채 벤치를 찾아 앉았다.

한동안 북적거렸던 거리가 사람들이 빠져 한산해졌다. 오색 빛깔을 퍼트리며 해가 진다.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며 버들은 석양에 잠기는 풍경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뭘 배웠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조각에 관해 자문을 구하면서 힐끔힐끔 시계를 쳐다보기 바빴다. 오늘따라 유독 시간이 느리게 갔다.

아. 황 대표님, 보고 싶다.

* * *

사진전이 열리는 곳은 길거리 폭이 좁아 근처에 마땅히 차 둘 데가 없다고 버들이 ‘여기’에 세워 두는 게 좋다고 했다. 그래서 목적지는 우선 공영 주차장이었다.

예습을 한 덕분인지 의외로 헤매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차에서 나와 지하철역을 찾았다. 약속 시간보다 이르게 도착한 황 대표의 표정에 한층 여유가 감돌았다. 지하철역 출구, 여길 기점으로……. 그러니까 오른쪽으로 돌라고 했나?

비현실적으로 긴 다리가 거침없다.

* * *

왜 안 오시지? 버들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시간은 어느덧 7시 30분이었다. 약속 시간은 7시였으니 30분이 오버됐다. 핸드폰을 꺼내 봤지만 황 대표에게서 들어온 연락이 없다. 굳은 얼굴로 버들은 ‘마이 큐티 엔젤’ 번호를 찾아 통화 키를 꾹 눌렀다. 신호가 가다가 음성 메시지로 넘어가는 것에 놀란 버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다시 전화를 걸어 봤다. 안 받는다. 또 걸어 봤지만 역시나 통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벌떡 일어나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씹는 버들의 얼굴에 초조함이 어렸다. 여럿 생각들로 뺨이 저릿하다. 끊어지겠다 싶은 타이밍에 황 대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도가 되어 다리까지 풀리려 했다. 혹시나 오는 길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그 찰나 얼마나 걱정됐는지 모른다.

「대표님, 어디에요? 출발했어요?」

「공영 주차장까지 잘 찾았어. 주차시키고 나왔는데 핸드폰 배터리가 없어서.」

아. 배터리가 없어서 다시 주차장에 돌아가 핸드폰을 충전시키느라 연락이 없으셨나 보다.

「제가 그쪽으로 갈까요?」

「힘들게 뭐 하러 그래. 지금 지하철역 앞이니까 내가 빨리 갈게.」

「사진전, 오는 길은 알아요?」

「응. 알아. 편의점이랑 파출소 찾으면 금방이잖아.」

「지금 지하철역 앞에 계신다는 거죠?」

「거기서 조금 걸어 나왔어.」

「근처에 표지판 있을 거예요. 워낙 작기는 한데…….」

몇 번 출구냐고 묻자 황 대표가 달랑 지하철역 명만 말했다. 출구가 여러 개다. 5번 출구를 기점으로 길을 찾아야 한단 걸 모르는 황 대표를 눈치챈 버들은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여전히 손에는 사진전 표 두 장을 움켜쥔 채였다.

「대표님. 주변에 뭐 보여요?」

비타민 음료, 스쿠터 등 보이는 걸 말했는데 그게 썩 버들에게 도움이 되는 대답이 아니었던가 보다. 서두르는 발소리가 골목에 퍼졌다.

「대표님. 그럼 전화 끊고, 가만히 계세요. 제가 갈게요. 아셨죠?」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또 어떤 출구는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면서 버들은 1번 출구부터 차례로 둘러보기 시작했다.

전화가 끊어진 순간 황 대표가 걸음을 멈춰 섰다. 손에는 풍성한 꽃다발이 들린 채였다. 간간히 오고 가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하게 된다.

미리 도착해서 버들을 기다리려고 했건만. 해가 저물자마자 주변이 빠르게 껌껌해졌다. 가로등 불빛이 협소하다. 길게 뻗은 황 대표의 속눈썹이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어제 저는 대표님 기다리다가, 바로 저녁…….」

「기다려? 기다리는 것도 자격이 있어야지. 넌 그런 거 없어.」

겹쳐 온 옛 기억에 가슴이 묵직해졌다. 버들을 찾아 당장 움직이고 싶은 걸 참았다. 심장이 약해 행동에 제약이 많았던 버들이 달려서 저를 찾으러 오는 기쁨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나무 아래에 서 있는 긴 인영을 발견한 순간, 버들은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착각을 받았다. 수술하러 떠난 뉴욕의 병원에서 황 대표와 어긋났던 순간들이 떠올라 목이 멨다. 목소리가 듣고 싶어도, 얼굴을 만져 보고 싶어도 못 본 척 황 대표를 지나쳤던 버들이 한달음에 뛰어갔다. 가까워진 버들의 팔을 잡아 황 대표가 품에 확 끌어안았다. 서로 다른 체온이 한데 엉겼다.

「버들아.」

황 대표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저를 찾아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그러한 기색을 전혀 내비치지 않는다. 거친 숨을 내쉬면서도 버들의 얼굴엔 환희가 퍼져 있었다. 황 대표의 커다란 손이 애처로운 버들의 마른 등을 쓰다듬기에 여념이 없었다. 황 대표의 품에 안긴 버들이 고개를 빠끔히 들었다.

「대표님. 여기 길바닥인데요?」

「응.」

「우리 이렇게 있어도 돼요?」

「……어둡잖아.」

버들은 마음 놓고 황 대표의 품속에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익숙한 향수 냄새가 코밑으로 스민다. 호흡을 고르게 고르는 동안 시간이 유유히 흘렀다. 황 대표의 목울대가 크게 올각거렸다. 꽉 끌어안고 놓기 싫은 버들을 풀어줬다. 버들의 동그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주는 손길이 조심스럽다.

「꽃, 제 거예요?」

「……응.」

「감사합니다.」

녹듯 접혔던 버들의 눈가가 스릉, 작동된 엘리베이터에 멀어졌다. 그때 선물한 꽃은 버들이 예쁘게 말려 작업실에 장식해 놓았다.

가로로 열린 문으로 버들이 튀어나왔다. 예쁘게 옷 입었네. 낮은 칭찬에 버들이 수줍게 눈을 피해 버린다. 황 대표가 애틋하게 버들을 끌어안았다. ……하. 꼴통 새끼. 이거 진짜.

“…….”

“…….”

뭘 잘한 게 있다고 버들이 눈을 깜박깜박한다.

“속옷 왜 안 입었어.”

확인해 보기 잘했다.

“영화관에서…….”

버들이 황 대표의 귓가에 소곤거렸다.

“영화관 화장실에서 섹스 못 해.”

“왜요?”

“못 하니까.”

“어떻게 다 하던데요?”

뭘 어떻게 했기에 어린 꼴통의 목소리가 저리 확신에 찬 건지 모르겠다. 봐주려고 했으나 정서상의 문제로 조만간 적립금이 얼마가 들었든 제가 보는 앞에서 사이트를 탈퇴시켜야겠다.

같이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황 대표는 버들의 속옷부터 골라 줬다. 같은 성별과 사귀는 건 때때로 고난에 잠기게 한다. 데이트를 하는 사이지만, 데이트를 하는 사이처럼 보여선 안 된다.

황 대표는 버들이 입었던 셔츠 브랜드와 같은 브랜드 중에서 옷을 골라 입고선 거울 앞에 섰다. 디자인은 다르지만 색깔이 비슷하다. 버들의 셔츠가 좀 더 밝단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게 의식이 되어 황 대표가 넥타이를 꺼냈다.

먼저 나가 기다리고 있던 버들이 계단을 내려오는 황 대표를 멍하니 쳐다봤다. 일하러 나갈 땐 머리를 올리지만 저와 편안히 시간을 보낼 땐 머리를 내린다. 황 대표가 버들의 손목에 들고 온 시계를 달칵, 채웠다.

PM 01:07

버들은 몸을 기울여 운전석에 올라탄 황 대표의 안전벨트를 대신 채워 주었다. 황 대표가 시동을 걸고 주차장을 빠져 나가는 동안 버들은 내비게이션을 작동해 주소를 입력했다. 내비게이션의 기계음은 황 대표에게 하등 도움을 주지 못한다. 300M 앞에서 우회전하란 안내를 무시했다. 저기 낚시 가게에서 우회전하시면 돼요. 버들의 조곤조곤한 설명에만 의지한 채 황 대표가 핸들을 꺾었다.

예전에는 운전을 하는 동안 가사 없는 잔잔한 음악을 듣거나 백색 소음이 필요해 볼륨을 죽여 라디오를 틀어 놓고는 했었는데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 황 대표는 재잘재잘 떠드는 버들의 수다에 집중했다.

“어때요, 대표님?”

“그래. 산딸기도 심자.”

좋아하는 얼굴이 보고 싶어 버들이 하자는 걸 되도록 다 들어주려고 노력한다.

PM 02:38

“여기 맞아?”

“네.”

버들은 태연한 표정을 가장했다. 황 대표의 시선이 주변을 살폈다. 버들이 말한 카페는 굉장히 인기가 있다는 곳인데 어째서인지 길을 걸으면 걸을수록 번화가와 멀어진다. 거의 다 도착했다며 버들은 걸음을 늦추려는 황 대표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모퉁이를 꺾자 어떤 매장이 나타났다. 간판에 ‘성인용품 판매점’이라고 쓰여 있다. 어? 여기에 이런 데가 다 있었네. 버들의 말투가 국어책 읽듯 딱딱했다. 연기를 발로 한 배우가 손가락으로 간판을 가리켰다.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배우를, 스폰서인 황 대표가 느슨히 눈길을 내려떠 바라봤다.

“들어가 볼까요?”

“안 돼.”

그가 차갑게 일축했다.

“저 필요한 거 있는데…….”

황 대표의 한쪽 눈썹 끝이 위로 올라갔다.

“네가 여기서 필요한 게 뭐가 있어.”

“있어요. 콘돔.”

황 대표가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콘돔?”

“네.”

“집에 많아.”

외국에서 배송 오는 거라 한번 사 둘 때 수량을 넉넉히 체크한다.

“그건 대표님 거잖아요.”

버들의 말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하고 황 대표가 무슨 소리냐고 되물었다.

“제 거요. 제 거 콘돔.”

“네가 콘돔이 왜 필요해.”

“……필요 없어요?”

“있겠어?”

그 물음에는 버들이 눈치 못 챌 만큼의 약소한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더 이상 어이없는 소리는 못 들어 주겠단 듯 황 대표가 버들의 팔을 붙잡았다. 점점 멀어지는 성인용품 가게가 아쉬운지 버들이 자꾸만 뒤돌아본다.

“저 자꾸 침대 더럽혀서……. 오늘도 그랬고.”

콘돔이 정말 갖고 싶은 것 같기도 한데 일단 저 안이 몹시 궁금하단 눈치다. 그 와중에 호기심으로 반짝거리는 눈빛이 꼭 별을 박아 넣은 것처럼 예뻐서 기가 찬다. 딸기 좋아하니까 딸기 향 나는 걸로 하나 사 줄까, 하다가 생각을 고쳤다. 버들의 정액이 제 손안에서 주르륵 흘러내려야 흐뭇하다.

“너 여기 혼자서 왔다간, 혼날 줄 알아.”

황 대표는 진심으로 으름장을 놨다. 점원이 이것저것 추천해 주면, 제 꼴통은 그냥 다 사 올 가능성이 농후했다. 버들은 자신의 관심 대상에겐 판단력이 흐려지는 모습을 보이니까.

위생과 안정성이 확실하게 검증됐단 조건하에 저야말로 이것저것 써 보고 싶은 섹스 토이가 많다. 입혀 보고. 끼워 보고. 넣어 보고. 그렇지만 버들의 몸이 허약해 시도를 해 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 저는 섹스 토이에 끝까지 즐거울 테지만 버들은 아닐 것이다. 즐거움은 짧게 고갈되고 제 아래에서 아주 많이 울게 되겠지.

「제가 어린 게 문제가 돼요?」

「그럼 문제가 안 돼? 나이 차가 너무 많이 나지 않아?」

「저는 문제없는데요.」

길게 흐를 고된 밤에서 구원해 줬건만 어린 양이 고마워할 줄을 모른다. 정말 문제였다.

좁은 골목까지 줄이 이어진다. 붐비는 상황에 황 대표는 인상을 구겼다. 다행히 저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키가 커 공연한 시선을 산다.

버들이 말한 카페는 인기가 정말 많았다. 정확히 케이크가 유명한가 보다. 한 발자국 앞에 서있던 버들이 황 대표를 돌아봤다가 정통으로 내려쬔 햇빛에 눈을 찌푸렸다. 황 대표가 버들을 끌어 제 옆에 세웠다. 황 대표의 큰 몸이 버들에게 그늘을 만들어 줬다.

드디어 자신들 차례가 됐다. 운이 좋게도 구석진 자리가 비어 있었다. 냅킨을 정리하며 버들이 얼마나 맛있을지 기대된다고 종알거린다. 맛있어 봤자 쓰레기겠지.

곧 주문한 케이크와 음료가 나왔다. 알록달록한 크림의 첫인상은 최악이었다. 척 봐도 건강을 해치게 생겼다. 버들은 습관처럼 케이크를 찍은 포크를 황 대표의 입으로 가져갔다. 마찬가지로 습관처럼 버들에게 케이크를 받아먹으려던 황 대표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하마터면 이목이 집중될 뻔했다.

제 포크 두고 황 대표는 버들의 손에 들린 포크를 가져가 케이크를 입에 넣었다. 달다. 끔찍하게. 관용을 베푼 감상은 그게 다였다. 고작 이딴 걸 먹으려고 삼십 분도 넘게 줄을 서는 거야?

한심한 눈초리가 가게 내부로 향했다.

결벽증에 까다로운 남자에게도 ‘좋아하는 단맛’은 존재한다.

「제 단물 다 빨아먹어 주세요!」

다시 버들에게 도착한 황 대표의 시선은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대표님. 맛있죠?”

“……응.”

“포장해서 하나 더 사 갈까요?”

“…….”

대답 없는 황 대표를 향해 버들이 고개를 들었다. 황 대표가 가증스럽게 상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PM 03:56

역시. 케이크를 괜히 먹였다. 밥 먹어야 하는데 버들의 수저질이 영 시원치 않다. 수랏상이 거하단 걸 생각 못 하고 마음처럼 줄지 않은 음식에 황 대표가 걱정했다.

황 대표가 버들을 옆자리로 불렀다. 버들이 밥을 떴다. 그 위에 황 대표가 반찬을 골고루 골라 올렸다. 아까 카페와 달리 단둘뿐인 프라이빗한 공간이라 버들의 식사를 편안히 챙겨 줄 수 있었다.

밥을 먹고 난 다음에 영화관으로 향했다. 버들은 자신의 섹스 판타지가 허구란 걸 깨달았다. 실망한 버들을 데리고 황 대표가 비상구 계단으로 들어갔다.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올지도 모를 상황에서 긴장감이 마음을 콕콕 쫀다. 철문을 흘긋거리는 버들의 턱을 붙잡고 황 대표가 입을 맞췄다. 쪽. 버들의 허리가 곧추세워졌다. 해실거리는 버들의 말랑한 볼을 톡, 건드리며 황 대표가 피식거렸다.

영화는 지루했다. 내용만 보면 그렇단 소리다. 엘리베이터에 같이 어울려 탄 사람들이 투덜거리는 걸 듣고 버들이 턱을 주억거렸다. 아. 그런 내용이었구나. 두 시간 내내 황 대표의 손을 만지작거리느라 버들은 영화가 어떤 줄거리로 흘러가는지도 몰랐다.

“……또 밥 먹어요?”

“저녁 먹어야지.”

낮엔 한정식을 먹었고, 밤엔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먹었다. 식당을 예약하는 건 언제나 황 대표의 몫이다. 울상인 채로 버들이 작게 썬 스테이크 조각을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뭐든지 동기 부여가 중요하다.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황 대표가 유연하게 입을 열었다.

“너 3㎏ 찌우면…….”

버들이 코를 훌쩍였다.

“거기 가자.”

거기? 거기가 어딜까 곰곰이 궁리해 보던 버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진짜요?”

“응.”

“콘돔 사도 돼요?”

어떻게 반응할지 에두른 꾐에 버들이 넘어갔다. 버들의 몸에 섹스 토이를 사용할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황 대표는 이 자리에서 단언했다. 버들을 위해서란 핑계를 덜어 내고 솔직해지자면, 버들의 몸에 제 신체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닿게 하는 것 자체를 용납할 수가 없다.

“얼마나 혼나려고 그러지. 음?”

한 번 더 경고했다.

황 대표가 말한 ‘거기’는 무인도였다. 저들만의 지상 낙원.

“갈래요! 무인도!”

식사를 하는 버들의 태도가 의욕적으로 바뀌었다.

PM 08:16

쉬는 날의 시간은 유독 빠르게 흐른다. 집에 가는 길에 황 대표가 핸들을 꺾었다. 달빛에 물비늘이 반짝거리는 큰 강이 나왔다. 인적이 드물다. 사각사각 밟히는 작은 돌멩이 소리가 들린다. 황 대표가 버들의 손을 잡았다. 나란히 걷다가 차 뒷좌석에 앉았다.

안개처럼 휘감긴 성적 뉘앙스에 버들이 경직됐다. 황 대표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다가갔다. 가까워진 황 대표의 목에 버들이 마른 팔을 걸었다. 혀끝이 얽힌 긴 키스에 콧잔등을 찌푸린 버들이 앓는 소리를 냈다. 나긋한 손길로 황 대표가 버들의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침을 삼키느라 버들의 목울대가 작게 일렁거렸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난동을 부린다.

아주 예전에, 시골 생활을 끝냈을 때다.

「단추 너무 작아. 풀기 어렵게.」

이 장소에서, 황 대표가 버들의 가슴을 빨았었다. 그때처럼 촉촉하게 젖은 소리가 좁은 차체를 채웠다.

PM 09:24

집에 도착해 차를 세웠다. 원래는 야경이 근사한 호텔을 예약해 뒀지만 버들은 그런 곳보다 집을 더 좋아해 하는 수 없이 경로를 바꿨다. 버들은 어느 틈에 잠이 든 채다. 핏줄이 지나가는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다. 무릎 뒤에 팔을 넣고 안아 들자 익숙하게 자신의 가슴팍으로 고개가 기우는데 그 작은 무게가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을 선사한다. 케이크까지 챙겨 집 안으로 들어갔다.

“유버들.”

침대에 눕히고 작게 속삭였다.

“……네.”

잠기운이 가득한 대답이 돌아왔다.

“씻어야지.”

“네에…….”

착하게 팔을 들어 주는 버들의 겉옷을 황 대표가 벗겨 주었다.

“같이 씻을까?”

황 대표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음?”

“…….”

버들이 계속 대답이 없다. 아닌 척해도 버들은 아직까지 자신의 흉측한 수술 흉터를 보이는 것을 꺼려 한다. 섹스할 땐 시트로나마 가릴 수 있지만 씻을 땐 실오라기 하나 없는 알몸 상태니까……. 머리 굴리고 있는 게 조막만한 얼굴에서 고스란히 읽힌다. 황 대표는 버들의 손을 들어 자신의 볼에 가져다 댔다. 항상 냉정하고 당당한 남자의 애원에 버들은 가슴이 저몄다.

PM 10:09

황 대표의 머리카락을 헤집던 버들이 못 견디겠는지 이내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가는 발목 옆에 거품을 낸 샤워 볼이 떨어져 있었다. 황……정우. 멈추게 하려는지 끊어지듯 더듬더듬 이름을 부른다. 집요하면서도 강한 허리 짓에 내부까지 낙인이 찍혀 버릴 것만 같다.

PM 11:15

“손 치워.”

나른한 명령이 떨어졌다. 버들은 그걸 들을 정신이 없었다. 혀를 빨리느라 만지지 말아 달란 사정도 할 수 없었다. 황 대표가 직접 버들의 손을 잡아 치웠다. 부푼 좆에서 맑은 액이 방울 맺혀 흐른다. 마를 길 없는 귀두의 둘레를 손끝으로 따라 그리다가 연분홍 핏줄을 톡 건드렸다. 미약하게 꺼덕거리던 좆에서 느닷없이 왈칵왈칵 물이 범람했다.

아, 안 돼……. 자신이 실수한 줄 알고 버들의 눈에 놀란 기색이 서렸다. 참아 보려는데, 참는다고 참아지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아랫배에 힘을 줄수록 뜻 모를 성감이 복받쳐 버들은 마구 고개를 흔들었다. 배출된 액체가 푸들거린 허벅지 안쪽을 축축하게 적시며 타고 흐른다.

싫어요. 대표님. 보지 마세요. 버들의 호소는 음성으로 만들어지지 못했다. 수치스러움에 코끝이 빨개질 만큼 울고 있는 어린 애인을 달래 주지 않고, 또 버들의 걱정을 해소시킬 진실을 일부러 함구한 채 황 대표의 손길은 포악하기만 했다. 아래쪽 수분을 남김없이 전부 쥐어짜 버리겠단 듯 고리 형태가 된 손가락이 강한 압력으로 옥죈다. 아리고 야릇한, 완전하지 않은 통증에 버들의 숨이 넘어갔다.

AM 12:58

까무룩 수마에 빠져든 버들을 침대 위에 천천히 눕혔다.

AM 08:17

새 지저귀는 소리가 아침을 연다. 눈 뜨자마자 황 대표는 버들을 안아 어디론가 데려갔다. 체중계 앞이다. 위에 올라서자 깜박거리던 숫자가 고정됐다. 두 사람의 무게에서 제 무게를 빼니 버들이 감추고 싶어 했던 몸무게가 들통 났다.

계절을 타는지 버들이 근래 부쩍 입맛을 잃은 상태였다. 최근에 비해 몸무게가 확 줄어 있다. 어젯밤의 정사도 필히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안쓰러움에 전부 제 탓을 하게 된다. 빠진 체중을 어떻게 다시 보충하면 좋을지 궁리하고 있는 황 대표의 눈앞이 순간 까매졌다. 언제 일어났는지 버들이 황 대표의 눈을 가렸다.

“봤어요?”

목이 쇠어 물음이 탁했다.

“아니.”

“저 살찔 거예요. 3㎏.”

그럼 당분간은 금욕해야 한다.

황 대표가 버들을 다시 침대로 데려갔다. 몸을 가리려는 버들의 손을 치우고 다리 사이를 살폈다. 여린 회음이 황 대표의 좆에 쓸리고 눌리며 괴롭힘당한 통에 붉디붉었다. 엉덩이 사이를 벌렸다. 그 속에 숨겨진 좁은 근육 역시 붉어진 채다. 부기로 인한 열감만 심할 뿐 다행히 찢어진 흉터는 없다.

“어제 몇 번 갔어?”

“한 번이요.”

버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한 번은 황 대표의 사출 횟수다.

“……나 말고, 너 어제 몇 번 갔냐고. 인마.”

“저도 한 번인가.”

한 번은 무슨. 말간 얼굴로 눈치 살살 보며 친 거짓말이 너무 어이없어서 황 대표는 작게 웃었다. 네 번째부터 드라이 오르가슴에 눈앞이 깜박깜박 점멸했던 버들은 그 후로……. 자꾸만 달구치는 절정을 이기지 못해 분수가 터졌고 정신을 놓아 버렸기에 자신이 몇 번 갔는지 기억이 없다.

“있잖아요. 대표님.”

그런데도 꼴통은 천하무적이다.

“저는 하루 종일 섹스해도 괜찮아요.”

살찌우려면 금욕해야 하는데 버들이 벌써부터 제 인내심을 긁는다.

장어 꼬리와 정력 좋아지는 한약만 믿고 자꾸만 센 척하는 아홉 살 어린 애인 때문에 심란하다. 몸 상할까 봐 마음처럼 하지 못하고 절제해야 할 필요가 있는 황 대표는 벌써부터 피가 마르는 심정이었다.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팔베개를 해 주는 황 대표의 가슴에 버들이 안겼다.

“어제 데이트, 재밌었어요?”

물음이 조심스럽다.

“응.”

오랜만에 여유롭게 맞은 휴일을 특별한 하루로 보내고 싶었지만, 객관적으로 평가해 보자면 지극히 평범했다.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케이크를 줄 서서 먹고, 식사를 하고, 영화를 보고, 강가를 산책하고…….

하지만 그 평범함 속에서 특별함이 주어질 수 있는 건 너와 나라서, 같이 뒤집어 버린 세상에서 시간과 계절을 함께 공유하는 게 서로라서, 어느 평범한 가을 휴일도 간지럽게 추억될 수 있다.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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