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닿아서, 덮여서 (3)
열어 놓은 창문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커튼이 나부꼈다. 쌓였던 눈이 녹으면서 햇볕이 강해졌다. 이윽고 거리가 울긋불긋 물들었다. 어제까지 만발했던 벚꽃이 어깨와 머리 위로 흩날리며 성가시게 굴었다. 계절의 변화를 남들이 말해 주고 나서야 알아차렸다. 옷차림이 얇아져야 하니 뒤늦게 드레스 룸을 정리하라고 지시했다.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황 대표가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느리게 매만졌다. 여유로운 몸짓이었다. 손등을 타고 굵직한 핏줄이 푸르게 돋아났다.
회의하라고 판을 깔아 줬더니 고성이 오고 가는 중이었다. 삿대질은 기본이다. 일찌감치 볼펜을 내던지고 두 대표는 무성의하게 상황을 관망하고 있었다. 데스크가 흔들리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쌓여 있던 서류 더미가 와르르 무너졌다. 정신이 하나도 없다. 유 대표가 팔짱을 꼈다. 황 대표의 한쪽 눈썹도 기어이 위로 올라갔다.
미뤄 두기만 했던 임직원들의 머릿수를 체계적으로 채워 넣었다. 꼰대들이 자리 깔고 앉아 회사 고유의 색깔을 칙칙하게 만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기우였다. 어쨌거나 찧고 빻으며 쌓은 실무 경험은 전적으로 사업에 도움이 된다. 회의가 끝나자 중요한 자료들만 골라 담은 태블릿이 두 대표 앞에 놓였다. 결과가 좋은 길을 턱 하니 찾아내니 내버려 두고 있는 거지 한 번이라도 수틀렸으면 진작 내쫓고도 남았을 거다.
“퇴근?”
“퇴근.”
해가 중천에 떠 있건만 황 대표가 차 키를 집어 들었다. 유 대표의 물음에 간략하게 황 대표가 대답했다. 유 대표 역시 황 대표를 따라 정장 재킷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까지 중국 출장이었다.
회의실을 치우러 들어온 직원이 하필 황 대표와 어깨를 부딪쳤다. 예민하게 황 대표가 인상을 찌푸렸다. 성질머리 봐라. 뒤돌아보지 않고 제 갈 길 가는 황 대표를 향해 유 대표가 혀를 찼다. 싸가지 없다고 욕이나 하면 될 걸,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걸레를 들고 쩔쩔매는 직원은 올해 대학교를 졸업한 사회 초년생이었다. 군대를 갔다 왔다고 그랬나? 아무튼 제 막냇동생과 비슷한 또래에게 어쩔 수 없이 관대해지고야 만다. 점심이건 저녁이건 직원들끼리 나가서 외식하라며 유 대표가 직원에게 카드를 건네주었다.
“집으로 가냐?”
“알아서 뭐 하게.”
황 대표가 눈길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동시에 차문을 열었다.
“안 궁금했어.”
“가라.”
“갈 거다.”
차에 올라타 막 시동을 걸었다.
“황 대표님!”
비서가 달려왔다. 유 대표의 차가 먼저 빠져나갔다.
“지난번에 구매하셨던…….”
“지난번에 구매?”
“요트입니다.”
“……아.”
비서의 손에 들린 서류 봉투를 낚아채 황 대표가 조수석에 놓았다. 그대로 집으로 돌아온 황 대표가 침대에 누웠다. 앞으로 3일간 회사에 나갈 필요가 없었다. 완벽한 방음으로 사소한 소음조차 들려오지 않는다. 적막함은 깊은 바닷속을 닮아 있었다. 답답함도 딱 바닷속만큼이었다. 이마에 팔을 올렸다. 노을이 질 때쯤 나갔다가 돌아오니 한밤중이다. 수영을 하는 횟수와 시간을 늘렸다. 그래야지만 약간의 잠을 잘 수가 있었다. 씻고 눈을 감았다.
선잠에서 깨자마자 몸을 반대쪽으로 뒤척이며 핸드폰을 쥐었다. 고작 2시간 남짓이 지나 있다. 시간의 흐름을 그다지 의식하며 살아 본 적 없었는데 요즘엔 신경 쓰인다. 하루가 이렇게 길었나. 일주일이, 한 달이 참 느리게 지나간다.
황 대표가 침실을 나왔다.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서류 봉투를 힐긋 쳐다봤다. 와인을 꺼내 잔에 따르고 거실 소파에 앉았다. 계속 무시하려고 했었지만 어느덧 손은 서류 봉투의 구겨진 모서리 부분을 반듯하게 펴고 있다. 황 대표가 내용물을 찬찬히 확인했다. 무인도 계약서가 클립으로 함께 고정되어 있었다. 작년에 주문 제작을 의뢰했던 요트가 이제 완성되어 한국으로 넘어온 모양이다.
「알아. 남자니까 지금 네가 얼마나 참기 어려운지. 그래도 참아. 나도 똑같이 참고 있잖아. 조금만 참았다가…….」
첫 관계를 여기서 가질 생각이었다.
「키스해 주세요.」
울먹거리면서 하는 그 말에 어떻게 안 넘어가.
새벽부터 수영을 다녀왔다. 물을 마실까 하다가 와인으로 목을 축였다. 여유를 일부러 만들어 내서라도 유 대표는 계속 뉴욕을 왕복하고 있었다. 그 부분을 굳이 아는 척하지 않았다. 먼저 버들의 근황을 물어본 적도 없었고, 마찬가지로 유 대표 역시 나서서 해 주는 말이 없었다. 둘 다 암묵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핸드폰 진동에 황 대표가 와인 잔을 내려놨다. 도착한 메시지에는 버들의 어제 일상이 짧게 보고되어 있었다. 낮잠을 잤고, 검사를 받고, 산책을 하고. 성에 차지 않는지 황 대표의 미간이 구겨졌다. 낮잠을 몇 시간 잤는지, 검사받고 나와 어떤 얼굴을 했는지, 어떤 신발을 신고 산책을 했는지. 좀 더 세세한 보고를 요구하려다가 관뒀다. 제 요구를 따르려면 좀 더 심도 깊게 버들을 관찰해야 하는 건데, 다른 사람이 그렇게 쳐다보는 게 싫다. 뉴욕에 다녀오면 유 대표의 기분이 한결 좋아 보였다. 버들의 모든 것이 나아지고 있단 거다.
봄을 지나 여름의 문턱이다. 새로 작업에 들어간 시나리오 내용을 다듬다가 때가 되어 식사를 하고 왔다. 목욕 후 소파에 앉았다. 커피가 내려지면서 주변으로 진한 원두 냄새가 진동한다. 황 대표가 소리 없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반대쪽 귀로 핸드폰을 옮겼다. 하기 싫은 통화란 게 표정에서 전부 드러났다.
“우선 결재부터 올려.”
구구절절한 핑계를 싹 잘라 버리고 전화를 끊었다. 태블릿 전원이 켜지지 않는다. 충전기를 연결해 메일을 열었다. 탐탁지 않은지 황 대표가 인상을 찌푸렸다. 몇 사람과 더 통화를 하면서 언성까지 높아졌다.
뉴욕에서 어제 유 대표가 돌아왔다.
“황 대표. 나 좀 봐. 얼굴이 꽃처럼 피지 않았어?”
손바닥을 꽃받침처럼 턱에 가져다 대고 지랄이다.
“치워.”
“뭘 치워.”
“네 얼굴. 그냥 피곤해 보이니까 치우라고.”
“잘 보라니까 잘못 봤네.”
하나도 안 피곤하다고 나불거리는데 어두운 눈 밑이나 가렸으면 우습지는 않았을 거다. 두 대표가 극장 문제로 동행한 장소였다. 하필이면 점심시간과 겹치는 바람에 층층마다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사내 식당이 지하에 있는 모양이었다. 음식 냄새까지 은근히 맡아지면서 절로 불쾌해진다.
유 대표를 앞에 세운 황 대표가 제 오랜 친구를 당연하게 방패 삼았다. 누군가 유 대표의 발을 밟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유 대표 혼자만 싱글벙글하다. 곧 입이 찢어지게 생겼다. 이유야 뻔했다. 뉴욕에 다녀온 직후 얼빠져 있는 유 대표의 꼬락서니에 내심 안도하게 된다.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황 대표가 짧게 웃었다.
바짝 집중해 일을 하면서도 황 대표가 핸드폰 진동을 놓치지 않았다. 불부터 켰다. 어느덧 시간은 자정에 가까워졌다. 물끄러미 메시지를 확인하면서 황 대표가 턱을 괬다. 버들이 울었다고 보고가 되어 있었다. 왜 울었을까. 그냥 넘기지 못하고 이유를 묻자 모르겠단 답이 돌아왔다. 울 일이 뭐가 있었을까. 누가 달래 주긴 했을까. 걱정에 뜬 눈으로 밤을 샜다.
잠에서 깬 황 대표가 어깨를 한쪽으로 꺾었다. 뚝, 뼈가 엇갈리는 소리가 났다. 일기 예보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장마가 어김없이 시작됐다. 신경질 나게 만들었던 시골의 매미 소리가 문득 생각이 났다. 그걸 기점으로 풍경이 줄줄이 이어진다. 정자, 개울가, 욕실, 파란색 집 대문, 강아지, 바다…….
뜨거운 물에 목욕하고 나온 황 대표가 와인을 꺼냈다. 버들의 둘째 형님이 공 같은 걸 사 들고 병실에 찾아왔단 보고를 반복해서 읽었다. 마음이 순간 녹는다. 공을 가지고 놀 정도라니. 기특하다. 버들은 착실하게 회복하고 있는가 보다. 살은 좀 쪘을까. 황 대표의 입가가 나긋해졌다. 오늘 같은 날을 매일 기다렸고, 간절히 소원했다. 딱 여기까지면 됐다. 직접 전화를 건 황 대표가 더 이상 버들의 일상을 보고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퇴근이 늦었다. 황 대표가 곧장 에어컨 온도부터 낮췄다. 장마가 끝나면서 본격적으로 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집안의 불을 켜지 않고 달빛에만 의존해서 돌아다녔다. 일의 연장선으로 유 대표와 지인들끼리 모여 식사 자리를 가지면서 마신 도수 높은 술은 원래부터 취향에 한참 벗어났었다. 관자놀이를 지끈거리게 만드는 취기가 괴롭다. 샤워한 뒤 젖은 머리 그대로 황 대표가 침대에 누웠다. 시간이 지체 없이 흘러간다. 감았던 눈이 얼마 못 가 쓱 뜨였다. 아무래도 잠을 자긴 글렀다.
일을 하던 황 대표가 노트북을 밀어 두고 소파에 앉아 앞쪽으로 두 다리를 뻗었다. 책장 사이에서 꺼내 온 조그마한 기계의 전원을 눌렀다. 기계의 정체는 비서가 사용하던 핸드폰이었다. 메시지 창을 빠르게 위로 올리는 황 대표의 손가락이 유연하다.
[정우.]
[정우야.]
[정우. 정우.]
[정우. 밥 먹었어?]
[정우 씨.]
매번 볼 때마다 웃음 짓게 하는 부분이었다. 귀여운 짓은 다 하고 있었구나. ‘막내 도련님’으로 지정된 사진첩을 연 황 대표가 한숨을 내쉬었다. 버들이 보내 준 사진들이 순서대로 저장되어 있었다. 어린놈이. 수전증이 있는 건지 사진들은 하나같이 전부 흔들렸지만 버들의 세상이 어떤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이건 하늘이고, 이건 꽃이고, 이건 강아지풀이고, 이건 나뭇가지고, 이건 돌멩이고, 이건 숯이고, 이건 칫솔이고, 이건 발목 조각품이고. ……조잡스럽다. 시시하고. 하지만 버들은 사소한 모든 것들을 포함한 세상을 자신과 나누고 싶었던 모양이다.
제일 끝에 저장되어 있는 사진은 버들이 제일 처음으로 보냈던 사진이었다. 그게 뭐냐면 본인 얼굴이다. 여러 장 저장되어 있는 사진 중에서 유일하다. 다른 사진과 마찬가지로 심하게 흔들려 눈을 가늘게 떠야지만 형체가 보인다. 어색한 낯으로 버들이 웃고 있었다. 기가 차단 듯 황 대표가 콧방귀를 뀌었다.
“얘는 뭐 이렇게 생겼냐.”
예뻤다. 속으로 혼자 감탄했던 거 말고, 실제로 버들에게 예뻤다고 말해 줬던 적이 있나. 기억을 더듬었다. 없다. 못생겼다고만 했지. 황 대표가 핸드폰 전원을 껐다.
「황 대표님. 좋아해요.」
웃으면 접히는 눈, 그 아래 볼록하게 튀어나온 살. 촘촘하고 긴 속눈썹. 뭐 하나 안 그리운 게 없다.
침대 헤드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 있는 버들이 하염없이 벽만 바라보고 있었다. 울적해 있는 사이 시간이 많이 지체됐다. 곧 둘째 형이 온다. 더는 미루지 못하고 버들이 옷을 갈아입기 위해 단추를 차례대로 풀었다. 곧바로 거울부터 외면했다. 손이 달달 떨린다. 수술과 회복에만 중점을 두고 있었다. 분명 의료진들은 수술 과정을 설명할 때마다 같이 언급했을 텐데, 당시에는 수술 가능 여부조차 명확하지 않았기에 흘려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수술 상처를 전혀 고려하지 못했다. 버들의 가슴팍 사이에 난 수술 자국이 흉측하다. 낫는 게 더뎠다. 새살이 덮고, 또 덮고.
계절이 머뭇거림 없이 흐른다. 바람이 쌀쌀해지면서 가을을 앞두고 있단 게 실감된다. 변수 없이 이대로 무사히 회복될 줄 알았다. 외출했던 공원에서 불현듯 숨이 차면서 버들이 쓰러졌다. 다시 한 번 수술 날짜가 잡혔다. 첫 수술과 비교했을 때, 심각할 건 없다며 의료진들이 가족들을 위로했다. 가슴을 또 열어야 한다니. 그럼 상처는 지금보다 더 더럽고 흉측해질 게 뻔했다. 푹 숙여진 버들의 고개가 들릴 줄 모른다. 참아 보려는데 훌쩍거림이 커진다. 속눈썹에 맺힌 눈물을 버들이 얼른 손등으로 닦아 냈다.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어.」
결국 허벅지가 흥건하게 젖을 정도로 울어 버렸다.
「한 달 내내.」
한 달 내내 내가 보고 싶다고 한 건, 내가 싫지 않기 때문이야. 싫었으면 안 보고 싶었다고 해야지.
버들이 서랍에서 뭔가를 꺼냈다. 낡고 엉망인 가죽 수첩이다.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모른다. 발견한 건 수술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황 대표가 분명 난간 밖으로 던져 버렸는데 이게 왜 제 병실 서랍에 들어 있는지 의아했다. 겨울은 저가 지나가다가 발견해서 찾아온 거라지만 거짓말인 걸 알았다. 황 대표의 이니셜인 ‘H’가 자수로 새겨진 부분이 깨끗하게 칼로 도려내져 있었다. 온전히 제 소유가 되어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다 놔 버리고 싶다. 수술받기 싫다. 그렇지만…….
미련 남기지 않으려고 힘껏 따라다니고, 하루에도 몇 번씩 좋아한다고 고백했는데 확실히 잘못된 방법이었다. 힘껏 따라다니고, 하루에도 몇 번씩 좋아한다고 고백한 만큼 황 대표가 눈에 밟힌다.
* * *
-어디야. 서울?
“서울 아니야.”
-오늘은 서울이어야 하지 않겠냐.
“별말 없으면 끊어.”
-별말 있어.
“있으면 빨리해.”
-앞으로 콩밭 매는 황 아낙네로 부르면 되냐.
“여기는 콩밭 남자들이 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뭐.
“너 와서 품앗이 좀 해라.”
나잇값 날려 버리고 서로 빈정거렸다. 비서를 더 고용하고, 연봉도 함께 올렸다. 그러면서 황 대표가 출퇴근을 줄였다. 시골의 매미 소리가 생각났을 즈음이었다. 비탈이 너무 심하지 않으면서, 마을과 가깝지도 않은. 그 주변의 땅을 전부 사들인 황 대표가 건축 허가를 받기 위해 도로까지 직접 냈다.
투자 가치가 전혀 없는 짓에 유 대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가, 풍경을 보고 나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마치 작품처럼 기가 막혔다. 주위가 나무로 우거져 푸릇하면서 저 멀리선 바다와 하늘이 맞닿아 경계가 흐릿한 수평선이 보였다. 버들이 때문에 여길 몇백 번이나 들락날락거렸음에도 불구하고 바다가 있단 걸 유 대표는 그날 처음 알았다.
「옥에 티가 여기다.」
유 대표의 한만한 힐난을 황 대표가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공사 막바지를 앞둔 건물은 한적한 시골 풍경과 걸맞지 않게 지극히 현대적이었다. 3층 높이에 엘리베이터가 집안으로 설계됐다. 건물이 완공될 때까지 따로 머물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 그러니 어쩔 수가 없었다. 전에 버들과 함께 살았던 펜션을 황 대표가 터무니없을 정도로 시세보다 높은 가격을 먼저 제시해 구입했다.
-늦지 말고 올라와.
유 대표와 전화를 끊은 황 대표가 뒤돌았다. 울타리나 담벼락, 대문 등 경계가 아직 없다지만 엄연한 사유지란 걸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웬 개가 무단 침입했다. 하얀색 털이 복실거린다. 혓바닥을 길게 빼고 있어서 웃고 있는 표정처럼 보인다. 살랑살랑 흔드는 꼬리가 당당하다. 황 대표가 주춤했다. 안면이 전혀 없는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주둥이를 높게 치켜들더니 시끄럽게 짖어 대며 아는 척이다. 한 발을 움직이자 개도 같이 움직였다. 그러니 멈추는 것도 똑같았다.
꼬리 흔드는 속도가 빨라진다. 경쾌한 발걸음으로 다가오는 개를 피해 황 대표가 정자에 올라갔다. 아직 어린 개라서 정자까진 못 따라 올라올 게 다행이었다. 아쉬운지 앞발을 턱 얹어 놓고 낑낑거린다. 서울에 잡혀 있는 일정으로 인해 시간이 촉박한 와중에 난데없이 고립된 황 대표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털 때문인지. 살 때문인지. 하여튼 두툼한 앞발이 개가 아니라 무슨 곰발바닥처럼 생겼다. 목에 채워진 목줄을 보아 분명 주인이 있는 강아지였다. 교육도 받았겠지, 그럼.
알아듣게끔 황 대표가 설명했다.
“가.”
* * *
유 대표 가족의 기업 창립 행사였다. 격식을 갖추면서 성대한 분위기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 있었다. 악수를 나누며 황 대표가 편안하게 대화했다. 제 집과는 완벽하게 선을 끊었는데, 남의 집 잔치에 와서 이러고 있는 게 문득 어이가 없었다. 휘영청, 보름달이 떴다.
“왔으면 나를 먼저 찾아야지.”
뒤에서 유 대표가 다가왔다.
“너 바빠 보여서.”
“언제 왔어.”
“행사 시작할 때부터 왔어.”
“……그래?”
유 대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비어 있는 황 대표의 잔을 새로 바꿔 주는 태도가 태연했다. 그러면서 표정을 면밀하게 살폈다. 뉴욕에서 돌아온 직후 지나온 나날을 새삼 유 대표가 되짚었다. 황 대표가 먼저 지나가는 투로 버들의 안부를 물어 온 적이 없었다. 속이야 알 수 없다지만 겉으로 보기엔 황 대표는 예전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재수가 없는 게 흠이기는 하나 믿을 수 있는 성격이니까 함께 동업도 할 수 있는 거다.
“뭐 할 말 있어?”
얼쩡거리는 유 대표가 거슬리는지 황 대표가 노골적으로 인상을 썼다. 황 대표가 중심을 잡고 있는 한 흔들리는 일은 없다고 유 대표는 확신했다. 그러니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차라리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긁어 부스럼이라는 옛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황 대표의 어깨를 툭툭 치며 유 대표가 사라졌다.
잠시 편안히 있고 싶어진 황 대표가 사람들을 피해 밖으로 향하다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방금 봤던 우측으로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심장이 떨어져 바닥을 구르는 기분이 들었다. 닮은 사람이거나 착각한 게 아니다. 정말 버들이 서 있었다. 격식을 차리기 위해 입었을 하얀 셔츠가 잘 어울린다.
자신을 보고 놀랐는지 버들이 숨을 쉬고 있지 않단 게 빤히 느껴진다. 빳빳하게 힘이 들어간 버들의 쇄골이 불거졌다. 저한테 다가오려는지 급한 걸음으로 움직이던 버들이 옆에 있는 친척들에게 붙잡혔다.
황 대표가 호텔 밖으로 나갔다. 어느 순간 등 뒤로 따라오는 걸음이 느껴졌다. 아. 속으로 욕을 짓씹었다. 빠르게 사라지고 싶지만 버들이 따라오다가 혹여 넘어질까 봐 신경 쓰인다.
버들은 없었지만 제 세상은 여전히 뒤집혀져 있었다. 가랑비처럼 버들이 깊숙하게 젖어 들어 혼자 남겨졌어도 하루가 더는 무미건조하지 않았다. 버들을 아예 몰랐을 예전으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했다. 바닥에 그림자가 두 개다.
콧잔등을 찌푸리며 버들이 심장을 매만졌다. 황 대표의 앞을 가로막고 싶은데, 못 따라가겠다. 버들이 신발을 벗어 황 대표에게 던졌다. 그게 근처까지 가지도 못하고 뚝 떨어졌다. 수술 후 재회를 기다렸다. 이렇게 느닷없을 줄이야. 좀 더 멋지게 가꿔진 모습으로 황 대표를 찾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얼굴을 보니 모든 각오와 벽들이 와르르 무너져 버렸다. 가루처럼 휘날려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대표님.”
버들의 목소리에 다리가 굳는 기분이다. 뒤를 돌았다. 버들의 맨발에 황 대표가 눈썹을 찌푸렸다.
“황 대표님.”
재차 저를 부르는 버들의 목소리가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었다.
“저한테 왜 보고 싶다고 하셨어요?”
“…….”
“한 달 내내, 미칠 정도로 제가 왜 보고 싶다고 하셨어요?”
계절은 다시 봄이었다. 하지만 둘은 시렸던 크리스마스에 서 있었다.
“너는 그게 중요해?”
“중요해요.”
못 만나는 동안 혹시나 내가 또 보고 싶진 않았을까. 미칠 정도로 보고 싶어 하진 않을까. 버들에게 한 달 내내 보고 싶었단 황 대표의 그 말은 폐허 속에 딱 하나 쥐고 있던 씨앗과도 다름없었다.
“저는…….”
버들의 목소리가 떨렸다.
“대표님이 계속 아쉬워요. 이제 어떻게 해야 돼요?”
멍청한 게, 진짜. 저만큼 멍청하기도 어려울 거 같다.
“매달려.”
“…….”
“해바라기 주면서. 궁에 가자면서.”
“…….”
“거지처럼 구걸해.”
“…….”
“너 그거 잘하잖아.”
고르고 골라, 잔인한 말을 내뱉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버들을 두고 황 대표가 돌아섰다. 두 개의 그림자가 서로 멀어졌다.
“너는! 진짜…….”
분에 찬 버들의 목소리가 등으로 박혔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제일 나쁜 놈이야. 개새끼고. 네가 제일 싸가지도 없고.”
하나 마나 한 욕들이었다. 차를 대기시키라고 비서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핸드폰을 꺼냈다. 황 대표의 걸음이 멈췄다. 구름에 찰나 가려졌던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황 대표가 고개를 내렸다. 뒤에서 뛰어온 버들이 제 허리를 꽉 껴안고 있었다. 깊게 한숨을 터트린 황 대표가 버들의 팔을 낚아채 떼어 냈다. 멍청한 새끼라고 욕을 해 주려고 돌아섰다. 그렇게 발긋한 버들의 눈가와 마주 봤다. 모른 척 외면하고 있었던 그리움이 폭발한다. 기다랗고 촘촘한 속눈썹이 계절이 바뀌는 동안 바뀌지 않았다.
버들이 참았던 숨을 낮게 내쉬었다. 물기가 서려 있다. 거리가 너무 가까우니까 황 대표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더 자세히 보려고 한 발자국 물러나는데, 그런 버들을 무의식중에 황 대표가 잡아당겼다.
“버들아.”
버들이 고개를 들었다. 황 대표의 시선이 버들의 몸 이곳저곳을 짚었다.
“수술 잘 받았어?”
고분고분, 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다시 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근데 왜 아직까지 이렇게 말랐어.
황 대표가 밤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외롭게 뜬 별 하나를 스쳐 지나 다시 고개를 내렸다. 안아 주지 않아서, 안아 주지 않아도 버들이 황 대표의 품을 최선을 다해 파고들었다. 좋아……. 너무 좋아. 밤하늘은 차분하기 그지없는데 어째 제 귓가에는 소란스럽게 천둥이 내리친다. 버들의 눈이 감겼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거세게 팔딱거리는 제 심장은 온전히 황 대표가 이유였다. 평생 변질되지 않을 각인이나 마찬가지다. 가슴을 짓누르며 뻐근하게 시작된 통증이 이윽고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갔다. 괴로운 대신 벅차올랐다.
상상이나 과거를 회상해서 떠오른 황 대표가 아닌 실제의 황 대표의 몸에 버들이 코끝을 살며시 비볐다. 바스락거리는 셔츠 뒤로 단단한 황 대표의 가슴 근육이 느껴진다. 마주 안아 주지 않아 더뎠지만 끈질기게 기다렸다. 서서히 제 쪽으로 황 대표의 체온이 번져 오자 버들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좋아하는 마음이 꽃처럼 만발하자 어느 순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헤맸던 길을 수술 후, 황 대표와 마주하게 되면서 제대로 찾아낸 기분이 든다.
수술 전에는 어차피 앞으로 살아갈 나날들을 보장받지 못했을 때니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무감각했다. 이별하며 황 대표가 제게 했던 말이 잘 먹고 잘 살란 거였다. 그래서 그 말 자체가 싫어졌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아팠다. 영영 지워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두 차례의 수술을 견디고 나니 그 말에 대한 심정이 간사하게 바뀌었다. 탐이 났다. 누구보다 더 잘 먹고 잘 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눈앞의 이 사람이 절대적으로 간절하다.
예전처럼 황 대표님이 나를 무릎에 앉혀 놓고 등이나 엉덩이를 토닥거리면서 재워 주면 좋겠다. 눈뜨면 언제 사 왔는지 모를 장어를 나 먹으라고 식탁 가득 차려 주거나, 뜨거운 죽을 먹기 편하게 식혀 줬으면 좋겠다.
바람이 불자 신발을 벗어 던진 한쪽 맨발부터 휑하다. 황 대표의 기억에는 환자복을 걸치고 있는 제 몰골이 마지막이었을 거다. 그게 늘 걸렸다. 왜냐하면 거울에 비쳐 본 제 모습이 스스로 느끼기에도 참 볼썽사나웠으니까.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며 그때엔 저를 보고 황 대표가 깜짝 놀랄 만큼 멋지고, 새롭고, 폼이 났으면 싶었다. 비록 그걸 위해 여태 세우고 있던 계획이 오늘을 기점으로 와장창 망해 버렸지만 중요한 건 현재 둘이 함께 있다는 거다. 버들이 숨을 흠뻑 들이켰다.
“……대표님.”
황 대표의 목울대가 일렁거렸다.
“술 냄새 나요. 술 많이 마셨어요?”
황 대표의 향수 냄새보다 술 냄새가 먼저 맡아졌다. 진하고 독했다. 대답 없는 황 대표의 가슴팍에 버들이 다시 코를 파묻었다. 꼬물꼬물한 버들의 움직임에 간지러운 감촉이 지핀다. 무심코 버들의 허리 뒤쪽으로 향했던 팔을 닿기 직전에 거뒀다.
수술 잘 받았다면서. 이제 괜찮아졌다면서. 자신을 대하는 버들의 태도가 전혀 달라진 게 없다. 아쉬운 게 없다고 콧대 세워야지 왜 아쉽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황 대표의 시선이 아래로 잠겼다. 잔인하게 내지른 제 말에 분명 상처받았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품속을 버들이 파고들었다. 마른 몸뚱이가 나약하게 느껴진다.
차마 자신이 먼저 건드릴 수 없으니 버들이 떨어져 나가길 황 대표가 기다리는 중이었다. 째깍째깍, 시간이 흐른다. 하필 호텔 뒤쪽의 외진 곳이라 오고 가는 사람도 없이 오롯하게 단둘이다. 남자 둘이 이러고 있는 걸 누군가에게 들킬까 봐 눈치 봐야 하는 상황이 생기지 않는다. 까딱하다간 이렇게 날을 새게 생겼다. 하는 수 없이 황 대표가 입을 열었다.
“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버들이 더 힘껏 황 대표를 껴안았다.
“신발 가져다 줄 테니까 놓으라고.”
“……신발 안 신어도 돼요.”
“신발 안 신고 어떻게 돌아다닐 건데.”
머리 위로 황 대표의 나직한 목소리가 울린다. 타박하는 게 아니었다면 더 좋았을 뻔했다.
“저 맨발로도 잘 돌아다녀요.”
“바닥에 날카로운 거 있으면. 다칠 거 아니야.”
황 대표의 신발 위로 버들이 제 맨발을 슬그머니 올렸다.
“이러고 있으면 되잖아요.”
허리를 감고 있는 버들의 팔이 순간 느슨해졌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황 대표가 뒤로 물러나 거리를 뒀다. 금방 다가오려는 버들을 향해 황 대표가 엄하게 표정을 찌푸렸다.
“가만히 있어.”
제 신발을 가지러 가는 황 대표의 뒷모습을 버들이 말끄러미 응시했다. 버들의 발치에 황 대표가 신발을 툭 내려놨다. 둘의 눈빛이 부딪혔다. 비스듬히 기울인 턱을 황 대표가 까닥였다. 그게 신발을 빨리 신으라는 뜻이란 걸 알면서도 버들은 일부러 반응하지 않았다.
서로 말이 없는 가운데 버들의 어깨가 축 처졌다. 반면 입술에는 힘이 들어간다. 버들의 턱 아래에 작게 호두가 생겼다. 숨을 크게 몰아쉰 버들이 제 신발 한 번, 황 대표 얼굴 한 번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신발을 신으면 기다렸단 듯 저를 두고 황 대표가 다른 데로 가 버릴 거 같다. 심란하고 불안하다.
황 대표가 신으라고 주워 준 신발을 버들이 허리를 굽혀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아무 데나 휙, 던져 버렸다. 난데없이 물소리가 났다.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바로 옆 분수에 신발이 빠져 버렸다. 제 행동에 대한 결과로 놀란 버들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버들이 나머지 한쪽 신발도 벗어 분수를 향해 내던졌다. 풍덩! 이번에는 아예 노골적이었다. 그렇게 버들은 완벽한 맨발이 됐다.
뭐 잘한 게 있다고 똑바로 저를 쳐다보는 버들의 큰 눈망울에 황 대표의 인상이 짙어졌다.
“따라오지 말고.”
황 대표를 따라가려던 버들이 주춤거렸다.
“거기 그대로 있어.”
황 대표가 분수 속으로 들어갔다. 고작 신발 따위를 줍기 위해 황 대표가 분수 속으로 들어갈 줄은 몰랐다. ……어떡해. 옷 젖으실 텐데. 물이 더러울 수도 있는데. 조마조마해진 버들이 발을 굴렀다.
버들의 한쪽 신발은 찾았는데 다른 한쪽 신발은 어디에 처박혔는지 보이지가 않는다. 인상 쓴 채 주변을 살펴보고 있던 황 대표가 문득 뒤를 돌았다. 곧장 한숨이 터졌다. 따라오지 말고 거기 그대로 있으라니까. 어느 틈에 버들이 분수 속에 들어와 있다. 맨발이라 미끄러운지 첨벙거리는 발걸음이 아슬아슬하다. 미처 뭐라고 구박할 틈도 없었다. 우려했던 대로 버들이 휘청거렸다. 놀란 황 대표가 다급히 팔을 뻗었다. 그대로 붙잡은 버들의 몸을 품에 꽉 껴안았다. 어떠한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놀란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 뒤로 미끄러지지 않고 버들이 자신이 서 있던 앞쪽으로 미끄러져서 천만다행이었다.
“……대표님.”
“너 혼나야겠다.”
저 때문에 황 대표가 놀라고 걱정까지 하게 만들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말 들을걸. 버들이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 뉴욕으로 떠났던 날 이후 처음이다. 황 대표의 품에 안겨 있지만 제 잘못을 아니까 떨리는 것과 별개로 마냥 기뻐할 수가 없다. 황 대표가 버들의 무릎 뒤로 팔을 넣어 번쩍 안아 들고는 근처의 벤치로 데려갔다.
“가만히 있어. 알았어?”
“……네.”
버들의 대답을 확실히 듣고 나서 황 대표가 분수 속으로 들어가 신발을 찾아 꺼내 왔다. 둘 다 옷이 젖어 버려 주변으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신발을 찾느라 더 많이 젖은 쪽은 황 대표였다. 나란히 의자에 앉아 있던 황 대표가 버들을 쳐다봤다.
“괜찮아요.”
황 대표가 제 이마를 짚자 버들이 얼른 제 상태를 알렸다.
“추워?”
“아니요.”
이마가 따뜻하나 아파서 열이 오르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안도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괜찮더라도 젖은 상태로 오래 있다 보면 탈이 날 수도 있다. 가족들이 있는 연회장 안으로 버들을 들여보내는 게 가장 나은 방법이겠지만 역시나 젖어 있는 게 걸린다. 버들의 바지가 검은색이라 물에 젖은 경계가 또렷하게 티가 나지 않는다고 해도 걸을 때 흐르는 물이 문제였다. 가족들이 봤다간 무슨 일인지 덩달아 걱정을 끼칠 수도 있다. 자리에서 일어난 황 대표가 버들의 신발을 벗겨 최대한 물기를 털어 냈다. 이어 겉옷을 벗어 버들의 젖은 바지 부분을 닦아 냈지만 딱히 도움은 되지 않는 거 같다.
버들이 힐긋, 황 대표를 쳐다봤다.
“언제 왔어.”
“2시간도 채 안 됐어요.”
“……말고. 한국에 온 지.”
“아. 2주 됐어요.”
“2주?”
유 대표 새끼. 욕의 화살촉을 버들에게는 겨눌 수 없으니, 버들의 형에게로 향했다.
황 대표가 다시 버들의 옆에 앉았다. 버들의 눈이 황 대표의 몸을 타고 굴러간다. 황 대표가 눈썹을 찌푸렸다. 정확히 버들이 제 몸 중 어디를 궁금해하는지 알 것 같다.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상처가 남은 손등을 감췄다. 새카만 연기처럼 구름이 흐른다.
“대표님.”
“…….”
“있잖아요.”
“…….”
“혹시…….”
“…….”
“결혼하셨어요?”
한참을 뱅뱅 돌더니 버들이 조심스레 물었다. 기가 친다.
“안 했어.”
“……아.”
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했냐고 묻기 전에 비해 표정이 많이 편안해졌다.
“저도 아직 안 했어요.”
황 대표가 버들을 쳐다봤다. 버들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서 서로의 시선이 닿았다. 잔잔한 기류가 주변으로 퍼졌다.
“대표님. 저 이제 아무 데도 안 가요.”
눈길을 피하지 않은 채 확고한 어조로 들려준 버들의 그 말은 머릿속을 일순 굳게 만들었다. 찰나 정신까지 아득해지는 기분이다. 황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나 핸드폰을 꺼냈다.
“유 대표, 불러 줄게.”
황 대표님이랑 좀 더 같이 있고 싶은데. 아쉬움에 버들이 콧등을 찌푸렸다.
“어디야.”
신호가 짧았다. 통화가 빠르게 연결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벌써 연회장을 빠져나와 어딘가로 샜단다.
-나 왜 찾아? 뭐 할 말 있어? 내일 해. 회사 나올 거잖아.
네 막냇동생, 나랑 있으니까 데려가라고 말을 하지 못한 채 전화가 끊겼다. 심각해진 황 대표의 곁에 버들이 다가왔다.
“버들아.”
“네?”
버들의 긴 속눈썹이 순하게 깜박였다. 황 대표가 이름을 불러 줄 때마다 혹독하게 견뎠던 수술 후의 일상이 별거 아닌 것처럼 잊힌다.
“……집에 갈래?”
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나란히 호텔 후문을 향해 걸었다. 황 대표의 전화에 비서가 차를 끌고 와 대기하고 있었다. 술을 마셔서 운전을 직접 할 수 없으니 황 대표와 버들이 뒷좌석에 같이 올라탔다.
“안전벨트.”
“아.”
버들이 끈을 잡아당겨 채웠다.
“전에 계신 비서님은요?”
“오늘 쉬는 날이야.”
“아. 대표님. 차 새로 사신 거예요?”
“아니. 있던 거야.”
“저는 처음 보는 건데요? 언제부터 있던 차예요?”
말해 주기 싫어서 황 대표가 입을 다물었다. 버들이 뉴욕에 있는 동안 뽑은 차니, 처음 보는 게 당연했다. 아무렇지 않을 수도 있는데 괜히 그 말을 듣고 버들이 울적해할까 봐 신경 쓰인다. 부드럽게 차가 출발했다. 버들의 심장이 다시금 소란스러워졌다. 창틀에 팔꿈치를 올려 턱을 기댄 채 바깥을 내다보고 있던 황 대표가 운전석에서 뒷좌석을 볼 수 없게끔 버튼을 눌렀다.
버들도 창밖을 보고 있었다. 더 정확히 차창에 반사된 황 대표를 눈에 담고 있었다. 차 안은 적막했다. 과속 방지 턱을 넘어가면서 차가 덜컹거리자 버들의 시선이 황 대표를 비껴가 풍경에 꽂혔다. 익숙한 거리다. 허리를 꼿꼿하게 펴서 버들이 더 자세히 창밖 주변을 둘러봤다.
“대표님.”
버들이 저를 부르자 황 대표가 그쪽을 쳐다봤다.
“집에 가자고 하셨잖아요.”
버들의 표정에 잔뜩 억울함이 담겼다. 집에 가자고 했지. 그게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
“여기 대표님 집 가는 방향 아니잖아요. 지금 우리 집 가는 거예요?”
……황 대표가 한숨을 삼켰다. 꼴통 새끼 때문에 술이 다 깼다. 집에 갈 건지 물었던 건 바래다준다는 뜻이었다.
“저 대표님 집 갈래요.”
“안 돼. 안 데려갈 거야.”
“왜요? 시간이 늦어서요?”
“그냥 내가 그러기 싫어.”
“…….”
단호한 황 대표의 거절에 달싹거리던 버들의 입술이 그대로 닫혔다. 이내 버들이 고개를 숙였다. 잘잘 끓는 물처럼 기분이 달아올랐다가 한순간에 식었다가 종잡을 수가 없다. 집에 도착하는 동안 버들이 애써 제 생각들을 정리했다. 수술 후 보상처럼 제게 주어진 상황들을 연거푸 상기하기도 했다. 예전처럼 급하지 않아도 돼. 여유롭게 다가가도 시간은 충분해.
“데려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의 바르게 버들이 인사했다.
“그럼 저는 가 볼게요.”
“…….”
“대표님. 술 많이 드셨으니까 물도 많이 드세요.”
“…….”
“운전도 조심하세요. 아. 오늘은 운전 안 하시지.”
예의 바른 인사를 몇 번 더 하고 나니 바닥이 났다. 안전벨트를 푼 버들이 머뭇거렸다.
“대표님.”
심호흡을 크게 내쉰 다음에야 버들이 이어 입을 열 수 있었다.
“저 보고 싶었다고 했던 거. 한 달 내내 제가 미칠 정도로 보고 싶다고 하셨던 말, 그거 혹시 거짓말이에요?”
매년 돌아오는 크리스마스에 의무적으로 전달하는 선물 같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황 대표에게 들썩거릴 줄 알았던 제 감정이 너무나 얌전해 버들이 스스로 놀랐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단 건 생각보다 커다란 무기였던 모양이다. 버들이 다시 한 번 인사를 전한 뒤, 차에서 내렸다.
차 문이 닫히고 나서야 황 대표가 버들이 내린 쪽을 바라봤다. 웅장한 대문이 열렸다. 뒤 한 번 돌아보지 않는 버들을 따라 황 대표가 차에서 내렸다. 그러곤 버들의 어깨를 잡아 제 쪽으로 돌려세웠다. 마지막으로 솔직하게 제 마음을 뒤집어 까서 보여 준 거나 다름없었다. 떠나보내는 건 떠나보내는 거고, 확실한 건 확실해야 했다.
“거짓말한 거 아니야.”
힘 조절을 못 한 황 대표의 손에 잡힌 어깨가 아팠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버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어디서 꽃향기가 난다.
집에 들어온 황 대표가 젖은 옷을 갈아입는 것도 미루고선 와인을 찾았다.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나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데려다준 지 얼마나 됐다고. 버들이 뒤쫓아 온 거라고 생각하며 황 대표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잔을 내려놓고 현관으로 나가자 비서와 눈이 마주쳤다. 황 대표가 차에다가 놓고 내린 태블릿을 전달하고 비서가 재빠르게 빠져나갔다. 내일까지 확인해야 하는 서류가 담긴 태블릿이라 중요하게 챙겼어야 했는데 깜박했다. 밤을 샜지만 이후 비밀번호가 눌리는 일은 없었다.
* * *
“오셨습니까.”
“황 대표는.”
“대표실에 계십니다.”
“그래? 언제 왔어?”
회사에 모습을 드러낸 유 대표가 비서에게 겉옷을 전해 주며 먼저 출근해 있다는 황 대표를 찾아 나섰다. 급할 건 분명히 없는데 괜히 서두르게 된다. 이게 다 버들이 탓이었다. 골칫덩어리가 따로 없다. 어제는 가족들 틈에서 벗어나 어디로 가 버렸는지 보이지 않는다는 버들이 전화까지 받지 않아 온갖 걱정을 하게 만들었다. 샅샅이 찾으러 다니다가 혹시나 싶어 집으로 차를 돌렸다. 버들은 자기 방, 침대에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새 씻었는지 좋은 향기가 나는 머리카락이 축축했다. 잠들어 있는 얼굴을 살피자 아무렇지 않아 보여 안도하기 잠시였다.
신발이랑 같이 벗어 놓은 옷가지들이 젖어 있는 걸 발견하고선 버들을 깨울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자 버들이 웅얼거렸다. 졸음이 가득한 목소리라 발음이 불분명했으나 아무 일도 없었다고 선을 그었다. 그게 말이 되냐고. 아무 일도 없었으면 신발이랑 옷도 멀쩡해야지. 순간 앞뒤 재지 않고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이 황 대표였다. 버들의 젖은 신발과 옷, 그리고 황 대표가 서로 무슨 상관인지 스스로 납득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억지가 써졌다.
큰 눈을 끔벅거리는 버들을 다시 눕혀 이불을 덮어 줬다. 습관처럼 황 대표의 안부를 궁금해하던 버들이 막상 한국에 와서는 잠잠했던 게 이제 와 걸린다. 다음 날, 버들은 기분 좋은 얼굴로 잠에서 깼다. 꿀물을 타 달라고 부탁하니 퉁퉁 부은 눈으로 뭐라고 잔소리까지 지껄였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버들의 모습에 안도가 들어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무 일도 없었단 건 거짓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사옥 여기저기에 직원들과 소속 연기자들이 널려 있었다. 밝게 건네 오는 인사에 유 대표가 대충 손을 흔들어 반응했다. 기다란 복도를 따라 걸을수록 고요함이 깊어진다. 건물의 가장 외진 곳에 다다랐다. 거기가 바로 황 대표의 대표실이었다. 굳건하게 닫혀 있는 문을 앞에 두자 눈썹이 절로 삐딱해진다. 황 대표 새끼. 공연한 욕이 툭 내뱉어졌다. 질색할 정도로 예민하게 타고난 황 대표의 성질머리를 뻔히 다 알면서 유 대표가 노크 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그래도 될 사이였다.
결재에 사인하면서, 최근 업무에 관련된 결과물을 간략하게 보고받는 중이던 황 대표의 미간이 옅게 구겨졌다. 두 대표의 눈이 마주쳤다. 허락 없이 멋대로 들어온 것으로도 모자라 유 대표가 뻔뻔하게 굴었다. 블라인드를 걷고 창문까지 힘차게 열었다. 대표실 안으로 밝은 햇볕이 꼭 소리를 낼 것처럼 와르르 쏟아졌다. 불어오는 바람이 하루 종일 맑은 날씨란 것을 예견했다. 새파란 하늘에 눈이 부신다.
“회사는 역시 놀러 나오는 곳이야.”
썩 만족한 표정으로 한가한 감탄이나 뱉어 내는 유 대표의 모양새가 역시 염치가 없다. 언제나 저래 와서 별로 새삼스럽지도 않다. 낮게 헛바람을 켠 황 대표를 유 대표가 유유히 지나쳤다. 그러면서 “그렇지 않냐?” 불쑥 제 뜻에 동의를 구한 게 실장이다. 기습을 당한 실장이 마땅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드물게 얼버무렸다. 표정에서 당황스러움이 한껏 묻어나고 있었다.
황 대표가 손가락을 까닥였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실장이 전달해야 할 보고를 마무리 지었다. 두 대표에게 고개를 숙인 뒤 대표실을 빠져나가기 전, 공기 청정기 세 대를 작동시키는 걸 잊지 않았다. 곧 비서가 차를 내왔다. 달그락거리며 놓인 하얀 찻잔이 어떤 무늬도 없이 수수하다. 그래서 찻잔 속에 만발한 꽃이 더 화려해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옅은 분홍색을 띤 꽃잎들이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잔잔한 바람을 타고 빙글빙글 돈다.
단둘이 남겨지고 난 후 황 대표가 가만히 유 대표를 응시했다. 주머니에 한쪽 손을 꽂고 제 대표실처럼 휘젓고 다니는 유 대표의 모습이 평소와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유 대표 역시 황 대표와 관련해 똑같은 생각이었다. 그대로 걱정을 비웠다.
황 대표가 손목에 채워진 제 시계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시간을 확인하자 12시 이전이다. 원래 예정되어 있던 유 대표의 출근 일정은 점심을 넘어 오후로 알고 있다. 무감했던 황 대표의 한쪽 눈썹이 위로 까딱였다.
“나한테 할 말 없어?”
“할 말은 네가 있어야지.”
“내가 무슨 할 말이 있어.”
“어제 전화로 나 찾은 거 뭐야?”
결재에 사인하느라 여태 손에 쥐고 있던 만년필을 황 대표가 내려놨다.
“어제 전화 왜 했냐니까.”
“실수로 어쩌다 보니 걸린 거야.”
“나한테 전화한 게 실수였다고?”
어디냐고 묻기까지 했던 주제에 실수로 전화를 걸었다는 황 대표의 변명은 얼토당토않았다. 그걸 알아차린 유 대표가 일부러 빈정거렸다.
“혹시 나 뭐 단축 번호로 저장되어 있고 그래?”
“징그러운 소리 좀 하지 마.”
두 대표의 팔뚝에 닭살이 돋았다. 징그러운 소리였단 걸 인정하며 유 대표가 굳이 황 대표의 옆자리에 앉았다. 맞은편의 제 찻잔을 끌어와 한 모금 음미하는 유 대표의 태도가 자못 여유롭다. 황 대표가 유 대표에게 물었다.
“할 말. 진짜로 없어?”
“있어야 하는 거야?”
“…….”
“눈빛 보니까 있어야 하는 거네? 그렇다면 지금 아무렇게나 지어 볼게. 황 대표, 너 알지? 내가 할 말 이런 거 잘하잖아.”
발랄하면서 성의 없이 뱉어 내는 유 대표의 어조에서 의중을 알아차렸다.
“옛날, 옛날에 황 씨 성을 가진 싸가지 없는 놈이 시골 바닥에 오두막을 짓고 살았어요.”
버들이 한국에 들어온 걸 유 대표는 절대로 저한테 말해 줄 생각이 없는 거다. 한숨을 삼킨 황 대표가 팔짱을 꼈다. 뭐 하나 신경 안 쓰이는 게 없다. 버들을 만난 어제 이후로 그게 더 심해졌다. 잠이 모자란 탓인지 설상가상 머리까지 잘 굴러가지 않는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실타래처럼 엉키고 쌓여 끝도 없이 막막해진다.
유 대표가 직접 저를 뉴욕까지 데려가 버들을 보여 줬던 건 그게 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도움은커녕. 저 때문에 버들은 몇 번이나 울어야 했다. 결과적으로 버들의 수술 날짜가 정해졌다. 그건 순전히 버들의 의지였다.
버들에게 자신이 끼치는 영향이 긍정적이지 않단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들이 한국에 들어온 시점, 유 대표가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다는 게 거슬린다. 유 대표의 입장에선 수술까지 받았으니 뉴욕에서와 달리 버들에게 구태여 자신이 필요 없을 거란 판단을 내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그만큼 버들의 상태가 나아졌단 뜻이 되는 건가. 하지만 정작 어제 마주하게 된 버들은 수술 전과 다름없이 자신이 아니면 안 될 것처럼 굴며 매달렸었다. 황 대표의 인상이 구겨졌다.
“호미로 콩밭을 매며…… 뭘 봐.”
“늑대는 안 나오나 해서.”
“늑대 나오지. 걔가 입김으로 집 날려 버리잖아.”
“그래?”
“사실은 싸가지 없는 황 씨, 그놈이 늑대였어.”
“언제는 나무꾼이라면서.”
“나무꾼도 되고, 늑대도 되는 거지. 돈이 썩어 날 정도로 많은데 명함 두세 개가 문제야?”
지치지도 않나 보다. 어디서 주워들은 전래 동화를 섞어 헛소리를 주야장천 나불거리며 유 대표가 황 대표의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차곡차곡 쌓여 있는 결재 서류를 위에서부터 펼쳤다. 내용이야 어차피 먼저 사인한 황 대표가 알아서 잘 확인했을 테니까. 공동 대표의 입지는 이래서 편하다. 해야 할 일은 두 명이서 나누고, 성과는 두 배고. 황 대표의 사인 옆에 제 사인을 휘갈기는 유 대표의 태도가 한만하기 짝이 없다.
“사인 할 거 더 없어?”
“회사에 사인하러 나왔어?”
“놀러 나왔다니까.”
“그게 끝이야.”
까칠하게 황 대표가 대꾸했다. 회사에 나와 처리해야 할 업무들을 금방 끝내 놓고 나니 여유가 넉넉하다. 그걸 티내듯 유 대표가 태평히 다리를 꼬았다.
나란히 차를 들이켜며 두 대표가 진중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사업에 관련해 한창 대화를 나누던 중에 벨소리가 울렸다.
“잠깐만.”
양해를 구한 뒤 유 대표가 걸려 온 전화를 받기 위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잠시 주춤거린 것도 자동으로 씰룩거린 입가도 서둘러 감췄지만 이미 황 대표에게 들킨 뒤였다. 유 대표가 핸드폰을 거꾸로 뒤집었다. 액정이 보이지 않게끔 어물쩍 감추는 행동이 수상쩍다. 그러고 보니 유 대표가 이랬던 적이 몇 번 더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 딱히 계산하지 않아도 알 만하다. 누구 전화인지 묻거나, 누구 전화인지 알겠단 듯 내색하지 않았다. 찻잔을 내려놓는 황 대표는 그저 차분하다. 그러는 사이 퇴근하겠다며 유 대표가 자리를 떴다. 황 대표는 버들에 관한 걸 유 대표에게 마찬가지로 함구했다.
* * *
핸들을 꺾자 눈앞에 고르지 않은 길이 나타났다. 언제부턴가 시골까지 내비게이션을 작동하지 않고도 찾아갈 수 있게 됐다. 가는 곳만 가게 되는데, 거기에 이따위 촌구석이 포함될 줄 몰랐다. 단 한 차례 경로를 이탈한 적 없이 처음 시골에 도착했던 날, 차에서 내리지 못하고 한참이나 앉아 있어야 했었다. 버들에게 먼저 입을 맞춘 후로도 달라지는 건 없을 거라 자부했던, 제 세상이 뒤집혔던 계절인 여름이 몽땅 이곳에 녹아 있었다. 뒤집혀진 세상에 혼자 남아 있지만 그건 지금도 여전했다.
“안녕하십니까.”
모자를 벗으며 다가온 건축가가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덥진 않으십니까. 조금 쉬었다가…….”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럼 여기부터 확인하시죠.”
앞장선 건축가가 추가로 공사가 진행된 부분들을 일일이 짚어 가며 설명했다. 보통은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게 예산이건만 제약이 없다 보니 유능하다 정평이 나 있는 건축가가 그야말로 날개를 달았다. 설계 단계에서부터 순탄했다. 자신감과 의욕이 넘쳤던 만큼 공사 기간도 단축되었고, 결과물 또한 흡족하게 잘 나왔다. 주차장을 포함해 외관을 둘러본 황 대표가 동그랗게 파헤쳐진 땅 앞에서 멈춰 섰다. 그런 구멍들이 주변에 몇 개 더 있었다. 직업이 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부유하면서 성격은 섬세한 클라이언트가 묻기 전, 건축가가 알아서 일정을 알렸다.
“묘목은 다음 주에 심을 예정입니다.”
비밀번호를 누르자 현관문이 열렸다. 통으로 된 유리가 바깥과 안쪽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든다. 내부를 느릿하게 둘러보는 황 대표의 뒤를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건축가가 묵묵히 따랐다.
“이제 작동됩니까?”
“됩니다.”
건축가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층수만 놓고 따진다면 계단만으로 이동 수단이 충분할 거 같으나 천장이 높아 엘리베이터가 반드시 필요했다. 꼭대기 층에 오른 황 대표가 서재로 향했다.
“말씀해 주신 대로 웨인스코팅을 제거하고…….”
전에 지시했던 부분들이 수정되었단 걸 건축가가 태블릿을 전해 주며 알렸다. 수정되기 전에 찍어 놓은 사진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어 어떻게 변화가 되었는지 비교하기가 수월했다. 난간 앞에 서 황 대표가 밑을 내려다봤다. 아래에서 위가 한눈에 들어오듯, 위에서 아래가 한눈에 들어온다. 차분한 모노톤으로 꾸며진 인테리어가 전체적으로 화려하다. 그러면서 대리석 패턴의 바닥과 건축가가 직접 외국에서 공수해 와 보관 중이었다는 빈티지한 조명들이 한데 어우러져 우아한 분위기가 난다.
“청소가 끝나는 대로 가구 배치 후 연락드리겠습니다.”
알겠단 대답 후 황 대표가 시동을 걸었다.
“아.”
터벅터벅 길을 걷던 버들이 풀이 우거진 바닥을 골라 주저앉았다. 슬리퍼처럼 끌고 다니는, 낡은 운동화 한쪽을 벗어 뒤집자 자그마한 돌멩이 하나가 톡 튀어나왔다. 웃음이 난다. 한적한 풍경이 오랜만이었다. 되는 대로 두 다리를 쭉 뻗어 버리고선 버들이 바람에 살랑거리는 들꽃을 말끄러미 주시했다.
낮에는 매미가, 밤에는 정체 모를 풀벌레들이 목청껏 울어 댈 계절을 손꼽아 기다리는 중이었다. 다시 이곳에서 여름을 맞게 될 줄이야 꼭 꿈만 같다. 갖가지 추억들이 만연해지자 가슴까지 벅차올랐다. 그게 숨을 막히게 하면서, 간지러운 감정을 동반시킨다.
지저귀는 새소리를 따라 버들이 문득 턱을 치켜들었다. 새는 금방 날아가 버렸는지 눈에 담긴 건 광활하게 펼쳐진 하늘뿐이었다. 등 뒤에서 차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진다. 그때까지 별생각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버들이 엉덩이부터 탈탈 털었다. 운동화를 꿰신고. 옆에 내려놓은 바구니를 챙기고. 제 갈 길 가기 위해 뒤를 돌자 어느새 차는 성큼 가까워져 있었다. 그게 황 대표의 차란 걸 곧바로 알아본 버들의 눈이 휘둥그레 였다. 국내에서 흔하지 않은 차 기종이었지만 버들이 반응한 건 똑같은 차 번호 때문이었다.
황 대표가 액셀에서 얼른 발을 뗐다. 갑자기 버들이 나타나서 놀란 마음을 눈가를 일그러뜨린 걸로 감췄다. 아무리 겁이 없다고 한들 차가 앞에 있으면 피하고 봐야지. 버들이 꼼짝하지 않고 서 있자 황 대표가 나직하게 욕을 중얼거렸다. 거리상 목소리가 들리지 않지만 버들의 입모양이 “황 대표님.” 하고 저를 부르고 있었다. 버들은 우연히 부딪힌 줄 알겠지만 아니었다. 친손자처럼 아꼈던 스승님 댁에 수술 후 얼굴을 보여 주기 위해서 버들이 꼭두새벽부터 시골에 내려와 있었단 걸 알았다. 이곳까지 버들을 바래다준 건 유 대표였다.
버들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작정하면 시간 단위로 끊어서 알 수 있다. 어렵지 않다. 그렇지만 남의 입을 통해 듣는 것과 직접 눈으로 보는 건 다르다. 어제 젖어서 혹시나 감기에 걸리지 않았는지 스치듯 잠깐 얼굴만 확인하고 가려고 했었다. 멀쩡한 것 같다. 목적은 여기서 끝이다. 하지만 좁은 길 한가운데에 턱 하니 버티고 서 있는 버들은 변수였다. 차가 비껴 지나갈 틈이 없었다. 한숨이 샌다.
버들이 제 차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하자 황 대표가 차에서 내렸다.
“저 여기 대표님 따라온 거 아니에요.”
대뜸 뱉은 버들의 첫 마디가 황당하다.
“……알아.”
“알아요? 어떻게 알아요?”
급급해진 버들이 해명을 덧붙였다.
“저는 여기 아침 다섯 시에 도착했는데, 대표님은요?”
“알아서 뭐 하게.”
“뭐 하려는 게 아니라……. 저 스승님 댁에 인사드리러 왔어요.”
“안다니까.”
“대표님이 그걸 어떻게 아시는데요?”
표정 변화가 없는 황 대표와 반대로 버들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여기는 그럼 어쩐 일이세요?”
“일 때문에.”
이런 시골 바닥에 무슨 일이 있단 건지 수긍은 되지 않지만 버들이 우선 고개를 끄덕였다. 점차 버들의 눈 깜박임이 느려졌다. 뜨거운 계절을 통째로 공유했었던 시골에서 황 대표와 마주 보며 서 있다니. 멀어졌던 현실이 차차 돌아오면서 버들이 애꿎은 입 안쪽 살을 우물거렸다. 오늘 잠에서 깨자마자 새롭게 새겼던 각오들이 있다. 그런데 황 대표의 얼굴을 보게 되니 전부 가루처럼 무너져 일절 소용없게 되어 버릴 것만 같다. 꼭 어제처럼.
지금 당장 황 대표의 허리를 끌어안고 싶은 걸 참느라 말아 쥔 버들의 주먹이 옹골차다. 어제, 그러니까 수술 후 처음 황 대표와 마주하게 된 재회에서 막무가내로 굴었던 건 그만큼 갑작스러웠던 탓이었다. 이제는 ‘오늘’을 ‘마지막’처럼 급급해하지 않아도 된다. 추웠던 계절을 지나 제게도 ‘내일’이 있고, ‘다음’이란 게 주어졌다. 그러니 예전과 달리 황 대표가 놀라지 않게끔 천천히 다가가기로 했다.
여섯 달 뒤에 좋아한다고 고백하면 되나? 일 년은 내가 못 참을 거 같은데 어쩌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면서 황 대표의 미간이 동시에 찌푸려졌다. 금방이라도 제 옆에 바짝 붙을 줄 알았던 버들이 도리어 뒤로 물러났기 때문이다. 버들의 도톰한 입술이 뭔가 할 말이 있단 듯 오물거리다가 잠잠해졌다. 마주치기 직전, 시선도 휙 피해 버린다.
“바구니 그거 뭐야.”
“스승님이 이거 빌려 오라고 해서요.”
버들이 들기엔 과하게 커 보이는 바구니였다. 안에 든 내용물이 없어서 한시름 놨다. 아차 하는 새 버들의 손에서 바구니를 빼앗은 황 대표가 턱을 까닥거렸다.
“앞장서.”
“……괜찮은데.”
“…….”
“대표님. 안 바쁘세요?”
미적거리는 버들을 두고 황 대표가 먼저 움직였다. 버들의 몸통만 한 바구니가 황 대표에겐 참 가벼워 보인다. 황 대표의 뒤를 졸졸 따라 걷다가 모퉁이를 돌 때 즈음 버들이 은근슬쩍 속도를 맞췄다. 그러면서도 어깨라든가, 팔이라든가 황 대표와 부딪히지 않도록 간격을 유지했다. 괜스레 화끈거리는 제 양쪽 귓불을 버들이 꼬집어 잡아 당겼다.
“유버들.”
“네?”
갑자기 불린 제 이름에 버들이 움칠거렸다.
“너 이렇게 돌아다녀도 돼?”
차분한 음성이었다. 황 대표가 무슨 뜻으로 물어본 건지 버들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는 괜찮아요.”
“이 정도?”
“이렇게 걷는 거요. 아직까지는.”
“…….”
“근데 차차 더 건강해질 거예요.”
가볍게 버들이 대답했다.
“이제 주세요.”
함께 막걸리를 마셨던 평상을 지나 스승님 댁에 도착했다. 바구니를 건네받으려고 버들이 손을 내밀었다. 황 대표의 눈에는 툭 튀어나와 있는 버들의 손목뼈부터 부각됐다.
“됐어.”
단조롭게 거절하고선 황 대표가 안까지 들어갔다. 집에는 아무도 없어 보인다. 마루에 바구니를 올려 둔 뒤 황 대표가 뒤돌아 버들을 쳐다봤다. 봄 햇살이 이르게 뜨거웠다.
“이쪽으로 와.”
눈가를 비비던 버들이 주춤거리며 걸음을 뗐다. 그늘 속으로 좀 쏙 들어가지 반만 걸쳤다.
“더 가까이 와.”
“……왜요?”
왜긴. 그러고 있다간 얼굴이나 팔이 반쪽만 타게 될지도 모른다. 그럼 꼴이 얼마나 우습겠어. 답답함에 버들의 팔을 붙잡아 끌어당기고 싶지만 경계하듯 움츠러든 어깨에 그러지 않았다. 소극적이나마 저를 피하고 있는 버들의 몸짓이 상기된다. 황 대표가 서 있는 위치를 바꿔 버들을 그늘 속으로 유도했다. 그게 하필 담벼락으로 몰아세운 게 됐다. 바닥에는 황 대표의 그림자만 길게 남겨졌다.
“서울은 언제 가?”
“곧 가요.”
“곧?”
“형이 지금 데리러 오는 중이에요.”
“유 대표가?”
“네.”
버들의 볼에 속눈썹 한 가닥이 달라붙어 있었다. 아까 버들이 눈을 비비면서 떨어져 나왔나 보다. 다른 데 신경을 돌렸다가도 그걸 떼 주고 싶으니까 자꾸 버들에게 눈길이 간다. 이끼로 축축한 담벼락에 등을 완전히 붙여 서서는 버들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황 대표가 어디 가지 않고 제 앞에 있는 건 너무 좋은데 자꾸만 쳐다보니 그건 또 부끄럽다. 신발 속에 감춰진 버들의 발가락이 꼼지락댔다.
다른 말 없이 황 대표가 돌아섰다. 갑작스러워 버들이 황 대표를 따라 얼른 대문을 넘어갔다.
“대표님.”
제 앞을 버들이 가로막자 황 대표의 미간이 좁혀졌다.
“……할 말이 있는데요.”
‘내일’이 있고, ‘다음’이 주어졌으니 기약 있는 사이가 되길 간절하다.
“우리…… 내일 만날래요?”
하고 싶었던 말을 버들이 조심스레, 그러면서 확고하게 건넸다.
“제가 대표님 있는 쪽으로 갈게요.”
곱게 휘어진 버들의 눈웃음에 오지 말란 말은 차마 목구멍 밖으로 튀어 나가지 못했다.
생각들이 다시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일부러 마을을 빙 돌아 빠져나가는 길이었다. 반대편에서 유 대표의 차가 스쳐 지나갔다. 첫 번째 신호에 걸렸을 때 황 대표가 꺼 뒀던 핸드폰 전원을 켰다. 유 대표에게 버들이 한국에 있단 걸 알면서 계속 함구할 작정이었지만 알리는 게 낫겠다.
산처럼 싣고 온 선물들을 내려놓으며 유 대표가 스승님 내외와 다정히 안부를 주고받았다. 스승님 내외가 지금 막 캤다며 가져가라고 챙겨 주는 봄나물이 향긋하다. 유 대표가 넉살을 떨었다.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주차해 놓은 차로 두 형제가 나란히 걸었다. 뭐 하고 놀았는지. 덥거나 춥진 않았는지. 아픈 곳은 혹시 없는지. 유 대표가 버들의 상태를 꼼꼼하게 확인했다. 차에 올라타 막 시동을 걸었을 때다. 짧게 알림이 온 핸드폰을 유 대표가 꺼내 들었다.
[유버들 씨 볼에 속눈썹.]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유 대표가 버들의 얼굴을 휙 쳐다봤다. 속눈썹이 진짜로 붙어 있다. 귀찮아하는 버들의 아래턱을 붙잡고 유 대표가 속눈썹을 떼어 줬다. 어이가 없어서 헛바람이 켜졌다.
“버들아. 황 대표 만났어?”
“……아니.”
갑자기 창문을 내렸다가 올렸다가 버들이 딴청을 피웠다.
“진짜 안 만났어?”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
“안 만났는데 네 볼에 속눈썹 붙어 있는 건 어떻게 알아.”
버들의 허리가 꼿꼿해졌다.
“황 대표가 너 볼에 속눈썹 붙어 있대.”
“근데 진짜로 내 볼에 속눈썹 붙어 있었어?”
“그래. 새끼야.”
……아. 그래서 아까 그렇게 얼굴을 쳐다보신 건가?
“안 만났는데 그걸 황 대표가 어떻게 알아. 어?”
“음……. 감이 아닐까?”
감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유 대표가 버들을 흘겨봤다. 거짓말을 못 하는 건지. 아니면 황 대표와 관련해서 딱히 거짓말할 노력이 없는 건지. 어쨌든 팔은 무조건 안으로 굽게 되어 있다. 다른 걸 다 떠나 제 막냇동생을 누구한테 주는 게 아깝다.
……이러면서 올가미 찍는 건가. 자아 성찰을 하는 유 대표의 한숨이 깊었다.
그날 버들은 기분 좋게 침대에 누웠다.
* * *
출근한 황 대표의 표정이 굳은 채였다. 회의실 문을 열자 임원들이 모여 북적이는 상태였다.
“황 대표님. 계약서입니다.”
실장에게 건네받은 파일이 두껍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유 대표 역시 변호사와 함께 서류를 살펴보느라 여념이 없다. 전반적으로 어수선한 상황이었지만 외부인이 있단 걸 곧바로 알아차렸다. 황 대표의 고개가 끌리듯 오른쪽으로 향했다. 대각선 방향, 데스크 구석에 버들이 이어폰을 꽂고 앉아 있었다. 앞에 놓인 건 잡지 같다. 버들의 손가락에 걸린 페이지가 천천히 넘어가는 걸로 보아 바짝 집중한 상태였다. 이상하게 초조하다. 겉으로 내색하지 않으며 황 대표가 만년필을 꺼냈다.
버들이 한국에 있단 걸 앎과 동시에 만난 적도 있단 걸 유 대표에게 언질을 한 건, 버들을 감출 거면 더 꽁꽁 감추라는 뜻이었다.
「우리…… 내일 만날래요?」
3일 동안 얼굴을 못 봤다.
기지개를 켜려던 찰나, 버들이 황 대표를 발견했다. 언제 오셨지? 허둥거리느라 건드린 잡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핸드폰과 연결된 이어폰까지 잡지에 걸려 다소 요란한 소리가 났지만 황 대표의 시선만 제게 닿지 않았다. 안달이 난다. 내가 여기에 있단 걸 모르시나? 손이라도 번쩍 들어 알리고 싶다.
점심에 맞춰 회의가 일단락 지어졌다.
“유버들, 밥 먹으러 가게 나와.”
유 대표가 버들을 불렀다.
“……나 입맛 없는데.”
버들이 여전히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는 황 대표를 힐긋거렸다.
“유 대표님. 이거 하나만 더 확인해 주시겠습니까.”
회의실 밖으로 나갔던 변호사가 급한 투로 다시 되돌아왔다. 얌전히 제 형의 눈치를 살피던 버들이 자리에서 일어난 황 대표의 뒤를 쫓아갔다. 주변에 직원들이 있는데 황 대표님한테 아는 척해도 되나. 예전에는 어땠었지?
어딘가로 황 대표가 들어갔다. 놓칠 새라 버들이 급해졌다. 문고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던 황 대표가 버들이 들어오자마자 문을 닫아 버렸다. 주변이 컴컴했다. 인적이라곤 없는 비상구였다. 황 대표와 거리를 벌린 버들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말아 물었다. 그런 버들을 보며 황 대표가 미간을 구겼다. 입술 상하니까 저 버릇 볼 때마다 못 하게 했었는데 떨어져 있던 시간을 불현듯 셈하게 된다.
“할 말 있으면 해.”
“대표님…….”
버들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피하시는 거예요?”
홀로 끙끙 앓아 가며 고민했던 걸 황 대표에게 직접 묻게 되자 더 울적해지고야 말았다.
“제가 만나러 간다고…….”
“만나러 왔어?”
“매일 보러 갔어요. 대표님이랑 만나려고.”
“……어디로.”
“회사요.”
3일 만에 얼굴을 본 건 다른 게 아니라 서로 엇갈렸을 뿐이었다. 그걸 알고 나니 관자놀이가 지끈거린다. 아까 봤던 것처럼 바쁠 땐 유 대표마저 신경 못 써 주는 회사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을 버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유버들.”
저를 기다리는 거, 그 정도 했으면 지치거나 질릴 법도 한데 왜 조금도 변함이 없는 건지. 버들의 미련함에 치솟았던 화가 거품처럼 가라앉았다. 밀어내려고 단단히 세웠던 벽을 버들이 자꾸만 물렁거리게 만든다. 가랑비는 멈출 줄 모르고 계속해서 내리는 중인가 보다. 황 대표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항상 집에서 만났잖아.”
버들이 집으로 올 줄 알고, 집에만 있었다. 미리 잡혀 있던 스케줄까지 깨면서.
“대표님 집에 가도 돼요?”
버들의 목소리가 바닥을 기었다.
“전에 저 안 데려가실 거라고…….”
“집으로 와.”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다른 생각을 하느라 멀리 나가 있던 버들의 정신이 비로소 돌아왔다. 치켜 뜬 눈으로 층수를 확인하자 두근거림이 거세진다. 씻고, 머리를 말리고. 여기까지 조금이라도 더 일찍 오고 싶어서 준비하는 내내 서둘렀던 제 모습들이 까맣게 잊혀졌다. 내려야 하는데 선뜻 움직여지지 않는다. 아마 오랜만이라서 그런가 보다. 낯설게 번진 압박감이 점차 몸집을 키워 어깨를 무겁게 만든다. 한숨을 내쉬자 고개가 아래로 절로 꺾였다. 한쪽 신발 끈이 곧 풀릴 것처럼 아슬아슬하다. 다시 헛생각에 빠져 머뭇거리는 사이 엘리베이터 문이 그대로 닫혀 버렸다.
……어쩌지, 망설이며 버들이 아랫입술을 자근자근 씹었다. 갑자기 층수가 깎이면서 엘리베이터가 하강했다. 여러 사람들이 탔다가 내렸다가 하는 동안 엘리베이터 역시 여러 층을 오르락내리락했다. 지하 주차장에 버들이 홀로 남겨졌다. 어떡하지. 다시 망설이다가 원하는 층수를 눌렀다.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하지만 꼭대기 층까지 금방이다. 엘리베이터 안에 갇혀 시간을 버린 보람도 없이 여전히 여유가 모자랐다. 차분하게 마음을 다스리려 더 노력하는 대신 차라리 포기하는 것을 택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직전, 열림 버튼을 급히 눌러 붙잡았다.
복도가 잠잠하다. 여기서 황 대표와 첫 통화를 했었다. 나직하게 제 이름을 불러 줬던 황 대표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한동안 가만히 멈춰 서 있던 버들이 손끝으로 제 가슴을 꾹꾹 짓눌렀다. 뉴욕에 있는 동안 좋았던 기억만 되짚었다. 그 좋았던 기억 속에 황 대표와 첫 통화를 했던 그날은 없었다. 헤어지는 날이기도 했으니까. 그러지 말걸. 첫 통화를 했던 그날도 무수히 되짚어 볼걸. 다양한 무게를 띠고 흩날리는 감정들에 마음이 하염없이 울렁거린다.
황 대표의 집 비밀번호를 버들이 차근차근 눌렀다. 계절이 몇 번 바뀌었지만, 황 대표와 연관된 건 전부 선명하다. 마지막 숫자 하나만 남겨 두고선 버들의 손가락이 미약하게 떨렸다. 애써 모른 척 외면하고 있던 긴장감이 폭발하고야 말았다. 당혹스럽다. 버들의 목 주변 피부가 삽시간에 새빨개졌다. 비밀번호를 바꾸셨으면 어떡하지?
안 되겠다. 엘리베이터를 좀 더 타고 와야겠다. 돌아서려던 찰나 휘청거린 버들이 제 발밑을 내려다봤다. 그새 풀려 버린 신발 끈을 다른 쪽 발이 밟으면서 하마터면 넘어지는 줄 알았다. 신발 끈을 묶기 위해 한쪽 무릎을 막 굽혀 앉았을 때였다. 황 대표가 열어젖힌 문에 쿵, 이마를 부딪친 버들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둘 다 상황은 갑작스러웠다. 길게 더 생각하지 못하고 황 대표가 버들의 팔을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마른 몸이 힘을 주는 대로 딸려 왔다. 황 대표의 큼지막한 손이 버들의 곱실거리는 앞머리를 뒤집어 깠다. 거기에 놀란 버들이 무의식중에 황 대표의 허리춤을 붙잡았다. 서로의 숨결이 섞일 정도로 거리가 가까웠다. 드러난 버들의 고운 이마를 황 대표가 꼼꼼하게 살폈다. 걱정했던 것처럼 혹이나 생채기가 없어서 다행이다.
문에 부딪힌 이마는 얼얼했지만, 황 대표가 만져 주는 게 그저 신나고 좋은 버들이 속없이 눈웃음쳤다.
“다쳤어?”
“안 다쳤어요.”
고개까지 저으며 버들이 대답했다.
“저 온 거 어떻게 아셨어요?”
“시끄러우니까 알지. 어떻게 알아.”
“저 시끄럽게 한 적 없어요.”
“시끄러웠어.”
“……아닌데.”
꿍얼거리는 버들의 얼굴이 말갛다. ……진짜 뭐 이렇게 생겼냐. 큰 눈에 코, 입술. 이목구비가 참 오밀조밀하다. 뒤집어 까고 있던 버들의 앞머리를 황 대표가 느릿하게 놓아줬다. 숱이 풍성한 버들의 머리카락이 처음처럼 가라앉지 않고 사방팔방으로 뻗쳐 엉망이 됐다. 자기 모습이 어떤지 모를 버들이 속눈썹을 깜박거리며 황 대표를 말끄러미 바라봤다. 황 대표와 눈이 마주치길 기다렸다가 버들이 사르르 웃었다. 난데없이 옆구리를 타고 간지러움이 퍼진 황 대표가 미간을 확 구겼다. 욕이 나갈 것 같은 걸 간신히 참았다. 외면해야 하는데 도톰하게 솟은 버들의 눈 아래 살이 예쁘니까 자꾸만 시선이 머문다. 제 허리에서 꼼지락거리는 버들의 손을 이제야 알아차렸다. 그냥 넘어가지 않고 황 대표가 떼어 냈다.
“너 지금 시간이 몇 시야.”
아홉 시였다.
왠지 혼나는 것 같은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쭈그러든 어깨를 버들이 폈다. 이번만큼은 다르다. 스토커처럼 몰래 온 것도 아니었고, 변태처럼 쫓아온 것도 아니었다. 만나러 가겠단 내 말에 황 대표님이 직접 집으로 오라고 그랬다. 그러니 당당해도 된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턱을 치켜든 버들을 내려다보며 황 대표의 인상이 점차 짙어졌다. 집에 오랬다고 당장 오늘 올 줄은 몰랐다. 그것도 이 늦은 시각에.
“어떻게 왔어.”
“…….”
“택시 탔어?”
“기사님이 데려다주셨어요.”
“저녁은.”
“……먹었어요.”
입맛이 없어 몇 수저 뜨지 않았지만, 어쨌든 먹긴 먹은 거다. 침묵 속에 계속 당당하기가 어렵다. 이내 버들의 속눈썹이 축 가라앉았다. 경험상 느낌이 왔다. 이건 쫓겨날 거 같은 분위기다. 투정도 못 부리고 버들이 눈치만 봤다.
“대표님. 술 마셨어요?”
와인 냄새가 은은하게 났다.
아침에 다시 오면 되겠지. 주어진 현실을 혼자 해석하고 받아들인 버들이 순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기 몇 초였다. 황 대표가 옆으로 반걸음 움직였다. 아무런 말은 없었지만 그게 무슨 의미인지 버들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끔 황 대표가 제게 공간을 내준 순간, 줏대 없이 방금 전의 결심을 당장 취소했다. 이제는 가라고 해도 못 간다. 황 대표의 마음이 언제 바뀔지 모르는 일이니 버들이 우선 현관으로 몸부터 집어넣고 봤다.
황 대표가 새 슬리퍼를 꺼내 버들의 발 앞에 내려놨다.
“……감사합니다.”
조그맣게 버들이 인사했다. 황 대표를 따라 집 안 깊숙이 들어가자 모든 맥박들이 난동을 피우기 시작한다. 테이블에는 역시 잔과 와인이 놓여 있었다. 황 대표와 버들이 가로로 긴 소파의 끝과 끝에 앉았다. 주섬주섬 가방을 벗어 버들이 제 발밑에 내려놨다. 숨 쉬는 것도 괜히 조심하게 된다. 커다란 버들의 눈이 데굴데굴 구르며 주변을 둘러봤다.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느꼈던 감정이 똑같이 겹친다. 몇 번이나 와 본 곳이었지만 꼭 처음처럼 낯선 압박감이 전해진다. 공기 청정기와 에어컨 기종이 바뀐 걸 제외하고 달라진 게 없다. 황 대표가 잔에 와인을 기울였다.
그렇게 한 시간이 흘렀다. 서로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황 대표는 와인을 마셨고, 버들은 그냥 앉아 있었다. 잔을 내려놓으며 황 대표가 버들이 앉아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닥 어딘가를 빤히 주시하고 있는 버들의 옆얼굴이 말갛다. 심심하거나 무료하진 않을까 신경 쓰인다. 황 대표가 제 아랫입술을 혀로 훑었다. 계속 와인을 마셔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안이 바짝 타는 이유를 모르겠다. 황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버들의 시선이 자석처럼 들러붙었다.
“앉아 있어.”
황 대표의 말에 버들이 반쯤 뗐던 엉덩이를 도로 붙였다. 주방으로 들어간 황 대표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장 쓸데없는 가전기기를 꼽으라면 역시 냉장고다. 냉동고에 달랑 초콜릿이 얼려져 있는 게 전부다. 자기가 살면서 먹어 본 캐러멜 초콜릿 중 가장 맛있었다며 버들이 재잘거렸던 수다가 생각난다. 황 대표가 초콜릿을 만지작거렸다. 수제 초콜릿이라 포장지에 찍힌 유통기한이 터무니없이 짧다. 버들이 뉴욕으로 떠난 것도 모르고 그날 아니면, 그다음 날 먹일 수 있을 줄 알았다. 다시 초콜릿을 집어넣고선 황 대표가 냉동고 문을 닫았다. 인상이 써진다. 집에 마실 거라곤 와인 아니면 원두커피뿐이다. 알코올이건 카페인이건 버들의 몸에는 별로 좋지 않을 것 같다.
마시기 편하게 미지근한 물을 따른 컵을 황 대표가 버들에게 건넸다.
“……잘 마시겠습니다.”
버들이 물을 홀짝였다.
“유버들.”
버들이 황 대표를 올려다봤다.
“차 대기시켜 줄게. 그거 타고 가.”
“……조금만 더 있다가 가면 안 돼요?”
“너 할 것도 없잖아. 여기서.”
“더 있고 싶은데…….”
한 마디 더 하려던 황 대표의 말문이 시무룩해진 버들의 모습에 가로막혔다. 다시 한 시간이 흘렀다.
“대표님. 저…….”
“…….”
“무릎에 앉아도 돼요?”
“아니.”
삼십 분이 더 흘렀다. 그러는 사이 와인 병이 텅 비었다. 흐트러짐 없이 황 대표가 버들을 쳐다봤다. 집에 가서 편하게 쉬는 게 나을 거 같은데 왜 저러고 있나 모르겠다.
……둘이 있는 동안 뭘 하면서 시간을 보냈었더라. 지금이랑 별반 차이가 없다. 문득 굳어 버린 황 대표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저랑 함께 보낸 나날들 중에 버들의 입장에선 특별한 날이 단 하루도 없을 게 분명하다. 집에 있으면서 그저 껴안고 수면을 취했던 게 기억의 태반이다.
「좋아해요…….」
돌이켜 보니까 과분했다. 내가 아니라, 차라리 달도 별도 따 준다고 맥락 없는 말을 주절거리는 사람에게 반했으면 버들은 훨씬 행복할 수 있었을 거 같다. 방금 든 제 생각에 황 대표가 속으로 욕을 짓씹었다. 달도 별도 따 주겠다, 그 사기 치는 말에 속아 버들이 기뻐한다거나, 그 사기꾼이 버들의 단물을 빨아먹는단 걸 가정하자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이건만 짜증이 치솟아 속이 뒤집혔다.
「대표님. 저랑 궁에 갈래요? 돌담길 걸어요.」
……갈걸. 궁이든 돌담길이든 전시회든.
텅 빈 와인 병을 식탁 위로 옮겼다. 손을 씻은 황 대표가 냉장고 앞에서 망설였다. 만나자기에 버들이 당연히 집으로 찾아올 줄 알고, 그러니까 정확히 3일 전에 사 둔 게 있었다. 과도와 함께 황 대표가 꺼내 온 게 사과였다. 붉디붉게 익은 사과가 싱싱해 보인다. 깜박거리는 버들의 눈망울이 순하다. 소파 끝과 끝이 아닌, 버들의 근처에 황 대표가 앉았다. 그게 의외였는지 버들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대표님. 사과 드시게요?”
“네가 먹을 거야.”
“저요?”
버들이 제 가슴을 찌르며 되물었다.
“너 사과 좋아하잖아.”
“저 사과 안 좋아하는데요.”
“…….”
황 대표가 가만히 버들의 얼굴을 주시했다.
「버들아. 오늘 뭐 했어?」
뉴욕에서 재잘거리며 수다 떠는 버들의 모습이 밤새도록 생각나서 오늘 뭐 했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어……. 사과 먹고.」
「사과 먹었어?」
뭘 먹었다고 한 게 처음이었다.
“너 뉴욕에 있을 때 사과 먹었잖아.”
갸웃거리던 고개를 버들이 멈췄다. 갈아서 먹으면 소화하기 쉬워서 식사로 대체했던 거지, 사과가 좋아서 굳이 먹었던 게 아니었다. 그걸 솔직하게 털어놓는 대신 버들이 조금이라도 더 깊게 황 대표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황 대표님!”
버들이 얼른 손을 내밀었다.
“제가 깎을게요.”
황 대표가 과도를 괴상하게 집었다. 태어나 처음 과도를 쥐어 본 게 역력히 티가 났다.
“……다쳐요.”
“깎을 줄 알아?”
선뜻 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사과 되게 잘 깎아요.”
자기 자랑에도 황 대표가 과도를 건네주지 않았다. 곱상한 황 대표의 손에 상처가 날까 조마조마하다. 가만히 못 앉아 있겠는지 버들이 벌떡 일어났다. 저가 물어뜯은 적 있는 황 대표의 손등이 잘 보였다. 그대로 버들이 숨을 참았다. 흉터 자국은 언뜻 보면 모르고 지나칠 정도로 아주 흐릿하게 남았지만 저한테는 그저 가혹하게 비춰졌다. 사과에 과도를 꽂기만 했을 뿐 어떻게 깎아야 할지 모르겠는지 황 대표가 비스듬히 고개를 들었다. 자기 달라며 버들이 공손하게 손을 내밀었다.
버들이 과도를 기울였다.
“대표님.”
“…….”
“이것 봐요.”
“…….”
“나비에요.”
버들이 전공을 살려 사과 나부랭이로 멋들어진 조각품을 완성했다. 황 대표가 한숨을 내쉬었다.
“너 먹는 걸로 장난치면 진짜 혼난다.”
꾸중을 들은 버들이 얌전하게 과도를 내려놓는 사이, 황 대표가 다시 사과를 꺼내 왔다. 많이 사 둬서 다행이다.
“대표님!”
버들의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과도를 집어 든 황 대표의 손이 역시 불안하다. 크고 소중한 제 대표님이 다칠까 봐 버들이 안절부절못했다. 정신 사납다. 가만히 있으라고 말려 봤자 버들이 말을 들을 것 같지 않기에 황 대표가 과감히 과도를 움직였다. 사과가 컸다. 그렇게 컸던 사과가 황 대표의 손에서 껍질이 뭉텅뭉텅 벗겨져 나가 콩알만 해졌다. 겨우 한 조각 먹을 수 있겠다. 그마저 울퉁불퉁하게 못났다.
황 대표가 먹으라고 턱을 까닥였다. 집어 든 사과 조각을 제 입에 가져가던 버들이 불쑥 황 대표의 입술로 가져다 댔다. 얼결에 황 대표가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대표님. 안주 없이 계속 와인 드셨잖아요.”
“……너 먹으라니까.”
짜증을 내는 것 같으면서도 황 대표가 새로이 사과를 깎아 줬다. 황 대표의 시선이 버들에게 고정됐다. 소음 하나 없이 쥐죽은 듯 조용했던 집에 아삭아삭, 버들이 사과 먹는 소리가 가득하게 채워졌다. 꿈처럼 기분이 오묘해진다.
버들의 양손에 사과가 들려 있었다. 저가 깎아 놓은 나비 조각을 버들이 이쪽저쪽 돌려 가며 살폈다. 입안에 든 사과가 꿀꺽 삼켜지는 소리가 났다. 본인 작품을 평가하고 있는 것인지 버들의 눈빛이 진중하다. 다시 사과를 베어 물었다. 천천히 사과를 씹느라 버들의 볼과 턱이 같이 오물거렸다. 무방비하다.
“버들아…….”
버들이 손에 들고 있던 나비를 떨어뜨렸다. 황 대표가 버들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너 어쩌려고 이래.”
아무도 못 보게 내가 가두면 어떻게 하려고.
「그거 범죄야.」
「알아요.」
「나 가둬서 뭐 하게.」
「키스나 하게요.」
가둬서 키스든…… 키스보다 더한 짓이든 하루 종일 해가며 못 살게 굴면 어쩌려고. 왜 자꾸 나타나.
자정을 훌쩍 넘기고 나서야 버들을 집까지 데려다줬다. 조수석에 같이 타 있던 황 대표가 뒤따라 내렸다. 버들의 팔꿈치를 붙잡아 저를 보게끔 돌려세웠다. 문에 부딪힌 이마를 확인하느라 뒤집어 깠던 앞머리가 여전히 엉망이었다. 그걸 황 대표가 손가락으로 빗어 정리해 줬다.
쉽게 잠들지 못하고 버들이 새벽까지 뒤척였다. 두근거림이 오래도록 지속된다.
* * *
대학을 다시 갈까 싶었지만, 어차피 하고 싶은 건 조각과 그림뿐이라 관뒀다. 집에서 레슨받는 게 훨씬 더 나을 거 같다. 버들이 교사들의 프로필이 정리된 팸플릿과 포트폴리오를 뒤적거렸다. 며칠 고심 중에 있지만 시골에 계신 제 스승님만 한 분은 없는 것 같다. 왔다 갔다 하며 배우는 게 나을까?
늦게 일어났더니 하루가 짧다. 아까 점심 먹은 것 같은데 금방 저녁 먹을 때다. 집에 없는 겨울을 빼고 가족들이 오붓하게 식탁에 둘러앉았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눠 가며 식사를 했다. 장 여사가 좀처럼 살이 붙지 않은 제 막내아들을 걱정했다. 버들이 웃었다. 까끌까끌한 입안을 참고서 버들이 제 몫의 죽을 비웠다.
차를 마시며 함께 모여 뉴스를 보고 있는 사이 귀가한 겨울이 장 여사와 유 회장에게 인사를 하며 얼굴을 비쳤다. 버들의 눈썹이 뾰족해졌다. 멋을 왜 저렇게 부린 거래. 버들의 볼을 겨울이 아프지 않게 콕콕 찔렀다. 하지 말라며 휙 내치는 손길이 사납다.
“너는 인마. 형이 왔으면 인사를 해야지 뭘 멀뚱히 보고만 있어.”
“어디 갔다 오는 거야?”
“너 오늘 늦잠 잤지? 형은 다 안다.”
“말 돌리지 마. 어디 갔다 왔어?”
“왜. 같이 갈 걸 그랬나?”
“어디 갔었는데?”
“어린 너는 몰라도 된다.”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던 겨울이 대꾸했다.
“어땠어?”
관심 없는 어조로 장 여사가 넌지시 물었다.
“괜찮았습니다.”
“그래.”
버들이 장 여사와 겨울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형. 뭐야?”
궁금한 걸 해소시켜 주지 않고 겨울이 도망치듯 계단을 올랐다. 찻잔을 내려놓고 버들이 쫄래쫄래 따라갔다.
“형. 겨울이 형.”
“내 새끼. 오늘 따라 왜 이렇게 살갑지? 형 없어서 심심했나 보다?”
“나 시골까지 매일 바래다주고 데리러 올 수 있어?”
“……새끼가. 부려 먹을 생각하고 있었네.”
다리를 걸어 버들을 침대에 쓰러뜨렸다. 겨울이 씻으러 들어가 버리자 버들이 다시 장 여사와 유 회장의 곁으로 돌아왔다. 멋을 잔뜩 부린 겨울이 오늘 어디에 갔다 왔는지 장 여사가 소곤거리며 알려 줬다. 처음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버들이 멍하니 눈을 깜박거렸다.
아침까지 도무지 못 참겠다. 뜬 눈으로 밤을 새우던 버들이 새벽에 황 대표의 집으로 향했다. 택시가 잡히지 않아 다리를 동동 구르는 동안 몹시 초조했다. 비밀번호를 누르지 않고 문을 두들겼다. 혹시나 주무시고 계셨을까 봐 걱정이었는데 다행이다. 문을 열어 준 황 대표의 모습이 멀끔하다. 갑자기 찾아온 버들을 내려다보며 황 대표가 인상을 구겼다. 시간은 새벽 네 시경이었다. 버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기에 무슨 일이 있을까 덜컥 걱정이 들었다.
“대표님…….”
제 형과 황 대표는 동갑이었다. 겨울은 맞선을 봤다고 그랬다. ‘내일’이 주어졌고, ‘다음’이 생겨서 안도했는데, 그건 저의 사정일 뿐이었다.
“일단 들어와.”
황 대표가 버들의 팔을 잡아당겼다.
“대표님.”
등 뒤로 문이 닫혔다.
“잘 먹고 잘 사는 거요……. 그거 저랑 같이해요.”
버들의 목소리가 달달 떨렸다.
“너 추워?”
안 춥다며 버들이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황 대표님.”
버들이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저랑 연애해요.”
잡고 있던 버들의 팔을 황 대표가 놓았다.
“……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연애해요. 저랑.”
황 대표가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왜 예전이랑 달라진 게 없어.”
달라진 게 왜 없어. 언제 떠나야 할지 모르니까 예전에는 내가 얼마나 자신 없고 암담했었는데.
“황 대표님…….”
황 대표가 화를 냈다.
“너는 왜 앞만 보고 내지르는 거야. 뭐에 쫓겨?”
“쫓겨요. 쫓기는 거나 마찬가지에요.”
“대체 뭐에 쫓긴다는 거야.”
“대표님, 저랑 연애해요.”
백날, 천 날 졸라도 될 일이 아니었다, 이건. 눈빛이 매서워진 황 대표의 앞을 버들이 견뎠다.
“대표님. 저랑 잘 먹고 잘 살면 안 돼요?”
“우리 둘이 붙어 있으면 그게 잘 먹고 잘 사는 거야?”
“왜 저랑 연애하기 싫단 거예요?”
“누가 싫대? 안 된다는 거야.”
“왜요? 제가 남자라서? 어려서?”
버들이 코를 훌쩍거렸다. 문이 쾅, 닫혔다. 결국 쫓겨났다.
어슴푸레 동이 텄다. 침대에 그저 누워만 있던 황 대표가 몸을 일으켜 씻고 나왔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린다. 현관문을 지그시 바라봤다. 버들을 내쫓은 뒤로 비밀번호가 눌린다거나 문 드리는 소리가 난다거나 하지 않았다. 집에는 잘 찾아갔을까 모르겠다. 오로지 그 생각뿐이다. 유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이른 시간이라 부재중으로 넘어갔다.
차 키를 챙겨 든 황 대표가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대로 굳어 버렸다. 머릿속이 싸하게 식었다. 버들이 복도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내쫓은 뒤로 몇 시간이 흘렀다. 욕이 나왔다. 일으켜 세워 몸을 만지자 버들의 체온이 차다. 몸을 숙여 버들의 눈높이를 맞췄다.
“어디 아픈 데 있어?”
“대표님……. 연애해요.”
“너 진짜.”
혼내는 걸 미룬 황 대표가 버들을 들어 욕실로 데려갔다.
“뜨거운 물로 씻고 나와.”
간단히 씻고 나오라는 거였지, 그게 샤워하란 말은 아니었다. 물기 어린 하얀 얼굴이 촉촉하다. 푹 젖은 버들의 머리카락을 바라보고 있던 황 대표가 인상을 찌푸렸다. 수건을 더 꺼내 오고, 실내 온도를 높였다.
“너 누가 밖에서 그러고 있으래.”
“……저 대표님, 기다린 거예요.”
“네가 뭔데 나를 기다려.”
황 대표의 목소리가 쌀쌀맞다.
“예전에 내가 한 말 잊어버렸어? 기다리는 것도 자격이 있어야 한다고 했잖아.”
“저 대표님 기다릴 자격 있어요. 충분해요. 충분하다 못해서 흘러넘쳐요.”
“……뭐?”
황 대표가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네가 무슨 자격이 있어.”
“예전에는 없었는지 몰라도 지금은 있어요.”
“유버들!”
“대표님 저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고 그랬잖아요. 그거 제가 대표님 기다릴 자격 있는 거예요.”
버들의 호흡이 불안정하게 흐트러졌다.
“저랑 연애하는 거 싫은 게 아니고 안 된다고 하셨죠? 그게 무슨 말이에요? 우리 연애하는 거 누가 안 된대요?”
제겐 자격이 없으니까 안 된다는 거였다. 꾸역꾸역 벌려 놓았던 거리를 버들이 단숨에 고삐를 잡아당겨 확 좁혀 버렸다.
“대표님. 연애 그거 되게 쉽대요. 어려운 거 아니래요.”
“……버들아.”
진짜 미쳐 버리겠다.
“너는 나랑 왜 연애하고 싶은데. 나는 너 아픈 것도 눈치 못 챘고…….”
“저 살 빠지면 가장 먼저 알아주셨어요.”
황 대표의 말을 버들이 가로막았다.
“……아프면, 안 참을게요. 아프다고 말할게요.”
버들이 이마를 짚었다.
“저 여기 아파요.”
놀란 황 대표가 곧바로 버들의 이마를 만졌다.
“여기 왜 아파?”
“어제 부딪혀서…….”
엄살이었다.
“…….”
“…….”
방금 저를 향했던 황 대표의 눈빛과 목소리가 한없이 다정했다. 그걸 가두듯 버들이 눈을 길게 감았다가 떴다.
“대표님이랑 있을 때가 제일 좋아요. 그래서 대표님이 저하고만 있었으면 좋겠어요.”
소유하고 싶고, 독점하고 싶단 걸 버들이 감추지 않았다. 황 대표의 눈이 깊어졌다. 단물, 괜히 빨아먹었다. 혀가 얼얼할 정도로 달콤한 맛이란 거 아니까 완벽하게 뒤돌아설 수 없었다. 이용하라고 해도 이용하지 말 걸 그랬다. 잠을 자기 위해 부둥켜안은 몸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아니까 완벽하게 잊을 수가 없었다.
나도 너랑 있을 때가 제일 좋다. 너하고만 있고 싶다.
“황 대표님…….”
더는 막다른 골목이었다. 황 대표가 버들을 안았다.
“…….”
“…….”
이제야 안아 주는 황 대표의 품을 버들이 더 강하게 파고들었다. 따뜻하다. 꼴깍, 꼴깍, 울음을 삼켰다. 향수 냄새가 훅 끼쳐 온다. 버들이 황 대표를 올려다봤다.
“저랑 연애하다가 혹시 결혼하고 싶어지는 사람이 따로 생기면 말해 주세요. 그럼 그때 미련 없이 떨어져 나갈게요.”
이제껏 해 왔던 행실을 보면 방금 버들의 말은 별로 신빙성은 없었다. 버들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눈을 감았다가 뜰 때마다 속눈썹이 척척해졌다.
“근데,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단 생각 안 드실 거예요.”
“…….”
“제가 잘할 거거든요.”
“…….”
“제가 대표님,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 줄게요.”
한 사람의 행복을 보장하기에는 무척이나 어설펐다. 귓가는 새빨갰고, 목소리는 기어들어 갔다. 하지만 저를 올려다보는 눈빛은 물기로 어룽거리면서도 헤매지 않았다. 안 된다고. 자격이 없다고. 견고히 쌓아 올렸던 벽을 온몸으로 부딪쳐 버들이 전부 박살을 내 버렸다.
“황 대표님.”
버들이 속삭였다.
“좋아해요.”
황홀하게 젖어 들었던 첫사랑의 벽은 감당하기 벅찰 만큼 높다랬고 그만큼 고되었다. 계속 모질었던 첫사랑이었기에 버들은 계속 무모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연애해요. 달콤한 뜻이 담긴 고백마저 로맨틱함은 저 멀리 날려 버리고 치열하게 달려들었다.
설령 실제로 피가 철철 흘러 발목까지 고인다고 해도 황 대표에게 주기 위한 제 마음을, 뿌리까지 도려내는 것에 버들은 주저하지 않았을 거다. 이미 수차례 나자빠지고 굴렀던 탓에 마음의 모양은 온전치 못했다.
황 대표가 안아 준 순간 수채화처럼 주변의 배경이 뉴욕 크리스마스 때로 묽게 번졌다.
수술 잘 받고 너 좋아해 주는 사람 만나서 잘 먹고 잘 살라며. 그 시렸던 계절에 고여 있는 건 서로 다른 온도로 마주하고 앉아 고했던 이별뿐만이 아니었다. 처음, 그리고 유일하게. 자신을 향해서 내비쳤던 황 대표의 진심이 그날 머물러 있었다.
내가 보고 싶었다고. 미치는 줄 알았다고.
그날을 떠올리면 날카롭게 가슴이 헤집어지는데 함부로 울지도 못했었다.
“보고 싶어서 저는, 죽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출발선은 딱 그날에서부터다.
“크리스마스 선물도 안 받아 주고.”
“…….”
“그때 왜 나 두고 갔어요?”
“…….”
“내가 미운 것도 아니었으면서…….”
“…….”
“왜 한 번도 안아 주지 않았어요?”
“…….”
연애하는 관계가 되자 비로소 원망할 자격이 주어졌다. 그간 삼키기만 했던 설움이 기다렸단 듯 목구멍 밖으로 치솟았다. 온몸에 열꽃이 필 정도로 자지러지게 울음을 토해 내는 버들의 등에 황 대표가 강하게 손가락을 박아 넣었다. 그래서 버들은 다리가 풀려 고꾸라져도 여전히 황 대표의 품에 안겨 있을 수 있었다.
반대쪽으로 몸을 비틀고 싶은데 쉽지가 않다. 움찔거리는 정도에서 그칠 뿐이다.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제 몸에 답답한지 인상을 찌푸린 버들이 가느다랗게 신음을 흘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잠에서 깨어난 버들의 얼굴이 바로 상황 파악이 안 되는지 다소 멍하다. 축축한 숨결이 가슴을 크게 부풀리면서 나른한 속도로 내뱉어졌다. 울음의 여파가 여태 호흡 속에 녹아 있었다. 흐릿했던 시야에 서서히 초점이 잡히면서 눈에 들어온 게 목젖이었다. 그것도 제 코끝과 닿기 직전으로 가까웠다.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한숨이 샜다. 허리 위를 묵직하게 눌러 오는 팔의 무게가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르겠다.
“황 대표님…….”
소파 안쪽에 누워 있는 버들이 황 대표의 품에 거의 갇혀 있었다. 속눈썹을 깜박거리는 걸 제외하고, 현재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신체 부위란 고작 손가락이 전부였다. 서로의 다리가 얽혀 들어 아랫배가 빈틈없이 밀착된 상태였다. 황 대표가 숨을 들이켜고, 내쉴 때마다 희미한 진동이 전해져 같은 타이밍에 몸이 떨렸다. 모든 감각들이 마치 작정하고 간지러움을 태우는 것 같아 버들의 콧잔등에 주름이 졌다.
더워……. 샤워하고 나온 저의 체온이 떨어질세라 황급히 황 대표가 작동시켰던 난방이 집안의 공기를 천장까지 달궈 놓았다. 뚝뚝 물이 떨어졌던 머리카락 끝은 어느 틈에 바싹 말라 바스락거린다. 버들의 도톰한 입술이 가운데로 모아졌다. 울었던 탓인지 심한 갈증이 도는 입안을 달래려 침을 꼴깍 삼켜 보았지만 역시나 충분하지가 않다.
잠들어 있는 황 대표를 깨우지 않고서 품을 벗어나기 위해 버들이 조심스레 꼼지락거렸다. 우선 제 허리를 감싸고 있는 황 대표의 팔부터 내려놓았다. 옆구리까지 지그시 압박하던 팔의 무게가 사라지자 편한 게 아니라 허전함이 들이닥쳤다. 버들이 허겁지겁 다시 황 대표의 팔을 제 허리 위로 둘렀다. 황 대표의 목젖 근처까지 코를 파묻고 흠뻑 체향을 취했다. 들쭉날쭉 어지러웠던 감정들이 진통제를 맞은 효과처럼 한껏 누그러지고 나서야, 지난날들의 감정들이 얼마나 위태로웠는지 새삼 깨닫는다.
미약하게 꿈틀거리는 버들이 잠결에도 감지되는지, 황 대표가 더 바짝 몸을 붙여 왔다. 아……. 감동을 만끽하기 전에 곤란해졌다. 아랫입술을 비틀어 깨문 버들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제 한쪽 다리가 딱딱하게 힘이 들어간 황 대표의 허벅지 사이에 끼어 짓눌린 채다. 못 살겠다. 간질간질한 느낌을 황 대표가 곧 자극으로 바꿔 놓았다. 숨죽인 버들이 애꿎게 발끝만 꼬부렸다가 폈다. 배꼽 아래가 뜨거워질까 봐 끙끙 앓게 된다. 조여 오는 황 대표의 몸을 밀쳐 소파를 벗어나기까지 한참 걸렸다. 다행히 황 대표는 여전히 수면 중에 있다. 서둘러 목만 축이고 와야지.
“……내 거 슬리퍼.”
소파 아래에서 하나, 욕실 앞에서 하나. 슬리퍼를 각각 찾아 꿰신었다. 주방으로 걸어가다 말고 버들이 다시 소파 앞으로 돌아왔다. 찢어진 약봉지와 컵, 물수건으로 인해 근처의 테이블이 너저분했다. 먼저 집어 든 컵 안이 아쉽게 텅 비어 있다. 물수건 아래에 깔려 모서리가 얼룩진 약봉지의 정체는 바로 해열제였다. 혀를 굴리는 대로 버들의 볼이 볼록하게 튀어나왔다. 입안에 쓴맛은 남아 있지 않으나 아마도 황 대표가 제게 약을 먹였나 보다. 언제까지 울고, 언제부터 잠이 들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안아 주고, 쉬지 않고 제 등을 토닥거렸던 손길만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물을 홀짝거리던 버들의 눈썹이 위로 치켜떠졌다. 식탁 유리에 제 몰골이 아른아른 비춰지고 있었다. 샤워하고 나서 제대로 빗질을 하지 않은 머리가 잠까지 푹 자 버렸으니 새집처럼 산발이 된 상태였다. 황 대표가 깨기 전 부랴부랴 씻고 나왔다. 후덥지근한 난방에 말라 있던 버들의 입술이 본래대로 촉촉해졌다.
나중에 허락 맡으면 되지. 파우더 룸 근처를 소심하게 맴돌던 버들의 걸음걸이가 결정을 굳히고 나서부턴 언제 그랬냐는 듯 대범해졌다. 원래는 머리만 딱 빗고 나올 예정이었지만, 황 대표의 스킨까지 듬뿍 덜어 발랐다. 쾌청한 향이 좋다. 초록색으로 우거진 잎사귀 사이로 퍼붓는 소나기가 떠올랐다.
버들이 소파로 향했다. 황 대표가 있는 곳이 곧 종착지였다.
널따란 집 안이 조용하다. 한 번 부각되기 시작한 약봉지가 외면해 봐도 계속해서 신경이 쓰인다. 골똘해진 표정으로 버들이 제 이마를 오랫동안 더듬거렸다. 미간 사이가 묵직했다. 하지만 열은 확실히 없었다.
바닥에 앉은 버들이 잠든 황 대표의 얼굴을 말끄러미 응시했다. 워낙에 예민한 성격인지라 제 시선을 느끼고 황 대표가 금방 깰 줄 알았더니, 미동조차 없다. 덕분에 버들은 무척이나 곱고 예쁘기까지 한 황 대표의 속눈썹에 실컷 감탄할 수 있었다.
황 대표의 집 안을 버들이 살금살금 기웃거렸다. 책에 정신이 팔려 주변을 살피지 못했다. 장식품이나 다름없는 작은 의자를 무릎으로 쳐 넘어뜨린 버들의 시선이 곧장 황 대표를 향해 꽂혀 들었다. 걱정과 달리 집 안 공기는 여전히 잠잠할 뿐이었다. 나오려던 안도의 한숨이 턱 끝에서 가로막혔다. 가만. ……이게 더 걱정해야 하는 일인가?
“황 대표님.”
일정한 속도로 호흡하며 잠이 든 황 대표가 편안해 보인다. 버들이 황 대표와 소파 사이로 몸을 눕혔다. 황 대표의 팔이 제 몸을 단단히 옥죄어 온다. 설렘에 버들의 심장이 난리 법석이다. 곧 수마에 빠져들었다. 그때까지 밝았던 밖은 다시 눈을 떴을 때엔 완벽히 어두워져 있었다. 할 일 없이 멀뚱멀뚱 천장만 올려다보고 있던 버들이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아까 한 번 해 보았다고, 소파를 벗어나는 게 처음보단 수월했다. 이래서 뭐든지 경험이 중요하단 명언이 있나 보다. 두 번이나 씻은 게 무색할 정도로 버들의 몰골이 부스스하다.
약 먹을 시간에 맞춰 버들이 가방을 뒤적거렸다. 빈속에 먹으면 신물이 올라올 정도로 독한 약이라 누가 시키지 않아도 꼭 식후에 챙겨 먹는 약이었다. 주방의 서랍을 열고 닫는 버들의 뒷모습이 부지런하다. 어딜 뒤져도 쌀 한 톨 나오지 않는다. 버들이 냉장고를 열었다.
“있다.”
반색하며 꺼내 든 게 사과였다. 냉장고 맨 아래 칸에 들어 있는 박스가 눈에 띈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버들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자세히 박스를 살폈다. 굳이 박스 안까지 들여다보지 않아도 약재 그림에 한약이란 걸 알아차렸다. 유버들? 버들의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황 대표의 글씨체는 아니었으나 심이 굵은 매직으로 박스에 적혀 있는 게 분명 제 이름이었다. 이게 뭐냐고 이따가 물어봐야겠다. 우선 호기심을 차곡차곡 접은 버들이 과도를 찾아 사과를 깎았다. 달달하다. 반쪽은 저 먹고, 반쪽은 황 대표를 위해서 남겨 뒀다.
황 대표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는 걸 발견한 버들이 바로 난방부터 껐다. 거실 창문을 열었지만 더운 열기가 생각처럼 빠르게 가시지 않는다. 다리를 동동 구르던 버들이 황 대표의 셔츠 단추로 손을 가져갔다. 처음엔 하나만 풀었다. 좀 망설이다가 세 개. ……눈 질끈 감고 전부를 풀어 헤쳤다. 황 대표의 하얀색 셔츠 자락이 너풀거린다. 버들이 더워하는 황 대표를 위해서 가방에 넣어 온 팸플릿으로 부채질을 해 주었다.
“대표님…….”
황 대표가 눈을 떴다. 덜컹거리는 심장을 버들이 붙들었다.
“더워서 깨셨어요?”
“…….”
“잠깐만 계세요.”
말릴 틈도 없이 버들이 물을 뜨러 가 버렸다. 그사이 황 대표가 몸을 일으켰다. 눈앞에서 버들이 왔다 갔다 하니까 얼마나 잤는지 계산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다른 생각이 들지 않는다. 관자놀이의 통증이 많이 흐려졌다.
가까이 다가온 버들의 손목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힘을 전혀 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란 버들이 컵을 기울였다. 그 바람에 바닥이 물로 흥건해졌다. 티슈를 가져와야 한다며 손목을 비틀어 빠져나가려는 버들을 끌어당겨 황 대표가 제 무릎 위에 앉혔다. 버들의 무게가 허벅지를 타고 슬슬 퍼지자 한숨이 터져 나왔다. 답답했던 속이 같이 풀어졌는지 숨 쉬는 게 한결 쉬워졌다.
불시에 황 대표를 마주하게 된 버들의 긴 속눈썹이 아래로 감겼다. 나랑 같이 잤으면서……. 나보다 훨씬 더 많이 잤으면서. 어떻게 된 게 잠에서 막 깨어난 황 대표의 모습이 흐트러진 기색 하나 없이 번듯하다.
“버들아.”
네. 작게 대답한 버들의 눈가가 탈진할 정도로 눈물을 쏟아 냈던 탓에 발긋해져 있다. 황 대표가 가만히 버들의 이마를 짚어 열을 쟀다. 해열제 덕분인지 미열이 가라앉은 채다.
“언제 일어났어?”
“……아까.”
“아까 일어났어?”
“네.”
버들이 아랫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입술이 상하니까 그러지 말란 듯 황 대표가 손가락으로 버들의 턱을 살짝 잡아당겼다. 꾹 맞물렸던 버들의 입술이 벌어졌다.
“그런데요, 대표님.”
다 기어가는 목소리로, 내내 궁금했던 걸 버들이 물었다.
“……몸이 왜 그래요?”
가뜩이나 좋았던 황 대표의 몸이 못 본 새 더 근사해져 있었다. 굵고 거친 핏줄이 돋은 장골은 강인했고 복근을 비롯한, 가슴팍 사이를 가르는 모든 근육들이 마치 사납게 숨을 쉬는 것처럼 느껴졌다. 위협을 주면서 또 한편으로는 은밀한 기분에 사로잡히게끔 했다.
“내 몸이 왜.”
“야해서요.”
고개를 숙인 버들이 살며시 황 대표의 셔츠 단추를 매만졌다. 같은 남자이기에 상대적 박탈감이 스쳤다. 그리고……. 연애하는 사이가 됐기에 이게 꼭 제 몸이라도 되는 것처럼 뿌듯해졌다.
“야한 거 싫어?”
“저 야한 거 환장해요.”
“…….”
문득 제 젖꼭지를 촉촉하게 빨던 황 대표가 떠올라 서글퍼졌다. 두 차례 진행되었던 수술은 흉흉한 흉터로 남아 기록됐다.
버들이 황 대표의 어깨에 이마를 붙이며 기대었다.
“버들아. 고개 들어 봐.”
버들이 황 대표가 원하는 대로 따랐다. 황 대표의 커다란 손이 감싼 뒷덜미 전체가 저릿하다.
“대표님…….”
버들의 얼굴을 하염없이 들여다보고 있는 황 대표의 눈빛이 깊다. 우는 버들을 달래 가며 약을 먹이고 나서 같이 누웠는데 도무지 어느 틈에 잠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잠을 잤으니까 관자놀이의 통증이 흐려진 거겠지만 그 시간이 못내 아깝다. 사무치게 버들의 빈자리가 느껴지는 때가 있었다. 특히 비가 오는 날은 어김없었다. 그러면 흔들린 버들의 사진을 꺼내 봤었다.
“수술……. 많이 아팠어?”
“아니요.”
버들은 고개를 내저었지만 야윈 몸이 많이 아프고, 힘들었다고 대신 말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버들은 언제나 꾸밈없이 제게 다가왔다. 계산하지 않았고. 머리 굴리는 법도 몰랐다. 미련할 만큼 투명하게 내비치는 버들의 마음이 더 이상 같잖다거나, 하찮지 않다.
침묵이 유지되던 중 황 대표를 힐긋거렸던 버들이 움찔 떨었다. 마치 제 속눈썹을 한 올 한 올 셀 기세처럼 황 대표의 시선이 집요했다. 쑥스러움이 몰려든다. 피하고 싶었지만 뒷덜미를 붙잡혀 황 대표가 놓아주기 전까지 가만히 얼굴을 대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버들의 맑은 눈동자가 이쪽저쪽 굴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황 대표의 얼굴이 다가왔다. 느릿하게 좁혀 드는 거리에 긴장감은 급물살을 탔다. 그대로 숨을 참은 버들의 쇄골이 움푹 파였다. 입을 맞출 거라고 생각했지만 황 대표는 자기 코끝을 제 코끝에 살며시 가져다 댔을 뿐이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두근거림은 여전했다.
“끊어.”
버들이 소곤거렸다.
-어디냐니까.
“……근처에 있어.”
-언제 들어올 거야.
“금방.”
-너 그 말은 아까 30분 전에도 하지 않았냐?
“왜 30분 간격으로 전화하고 있어?”
-어디야. 어?
“…….”
되돌이표다.
어디냐고, 겨울이 30분 간격으로 전화를 걸어 대고 있었다. 술주정뱅이에게 시달리던 버들이 결국 핸드폰 전원을 꺼 버렸다. 황 대표의 집에서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었다. 드디어 집 안이 잠잠해졌다. 그러길 잠깐. 이번엔 황 대표의 전화가 울렸다. 액정에 겨울의 이름이 번쩍였다. 베란다로 나가 통화를 끝낸 황 대표가 말없이 버들의 가방을 챙겼다.
……우리 집 가는 거 안 까먹으셨네. 내비게이션은 잠잠한데 핸들을 꺾는 황 대표는 주저함이 없다. 한창 도로 공사가 진행 중이라 길이 평소보다 더 막혔음에도 불구하고 마냥 아쉽다. 미적거리면서 안전벨트를 풀던 중 별안간 걱정이 들었다. 보고 싶은 마음을 억눌러 가며 따로 떨어져 보낸 계절들이 휘청거렸다. 앞으로 단단했으면 싶다. 그래서 버들은 무엇이든 확실하게 해 두고 싶었다. 혹시나. 이게 전부 저가 꾸민 공상이 아닐까, 하는 고민으로 오늘만큼은 밤을 새우기가 싫었다.
“대표님.”
“응.”
나직하게 울려오는 황 대표의 대답에 고막이 녹을지도 모르겠다.
“어디 가서…….”
버들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사귀는 사람 있냐고 누가 물어보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뭐?”
잘못 알아들을 게 뭐 있다고 황 대표가 되물었다. 버들이 눈도 깜박이지 않았다. 확고한 어조로 황 대표에게 저들 관계를 주입시켰다.
“황 대표님. 저랑 연애하기로 한 거 절대 잊어버리면 안 돼요.”
……그걸 어떻게 잊어버리겠어.
“저 이제, 대표님 남자 친구예요.”
찰나 황 대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너 내 남자 친구야?”
“네. 제가 대표님 남자 친구예요.”
저도 모르게 황 대표가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아홉 살 어린 나이 차가 불쑥 옆구리를 치고 들어왔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자 버들이 인사도 없이 차에서 내렸다. 문 닫히는 소리가 허공에 두 번 들렸다. 뒤따라 내린 황 대표가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 버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서로를 올곧게 주시했다.
“버들아. 너 어디 가서…….”
뜸 들이는 황 대표가 불안해져 버들이 저도 모르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남자 친구 있다고 하면 안 된다.”
하얀 얼굴이 무해하다. 오해가 생기지 않게 황 대표가 설명을 덧붙였다.
“너 내 남자 친구 맞아. 맞는데……. 남자 친구 말고, 애인 있다고 해. 나도 그럴 거니까.”
버들이 집에 들어가는 것까지 보고 황 대표가 차에 올라탔다.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여 버들의 집을 쳐다봤다. 새롭게 불이 밝혀진 창문이 있다. 저기가 버들이 쓰는 방인가 보다.
집으로 돌아오니 다시 혼자가 됐다. 곳곳에 남아 있는 버들의 흔적들이 공허함을 흩뜨려 놓았다. 와인 없이 식탁에 앉아 보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황 대표가 턱을 괬다. 하염없이 들여다보고 있는 게 버들이 깎아 놓은 사과 껍질이다.
* * *
하루는 형수님과 선약이 잡혀 있어서, 하루는 약을 타러 병원에 다녀오느라. 무려 이틀간 황 대표를 만나러 가지 못했다. 버들의 머릿속은 어떻게 하면 황 대표의 집에 가서 오랫동안 있을 수 있을지, 그 궁리로 바빴다.
드라이어를 막 정리했을 때 겨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었다. 겨울의 서재 데스크에 처박혀 있는 외장하드를 들고 버들이 집을 나섰다. 겨울이 부탁한 심부름을 후딱 끝내 놓고 그길로 황 대표를 만나러 갈 계획이었다.
“바쁜 거 아니지?”
“괜찮아. 형이 바쁘다며. 밥은?”
“못 먹었어. 돈 벌려면 어쩔 수 없지.”
“많이 벌어라.”
“내 새끼 옷 사 주고, 껌 사 주고, 신발 사 주고…….”
본격적으로 팔불출 짓을 떨려던 겨울이 직원에게 붙잡혀 회의실로 끌려갔다. 바쁘단 말은 핑계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황 대표님, 안 계시죠?”
별 기대 없이 비서에게 황 대표의 출근 여부를 물었다.
“회의 중이십니다.”
안 물어봤으면 큰일 날 뻔했다.
회의실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버들의 자세가 반나절이 넘어가면서 엿가락처럼 늘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시선만큼은 회의실 문에 고정된 채다. 이따금씩 회의실 문이 벌컥벌컥 열렸다. 그럴 때마다 버들의 어깨가 깜짝깜짝 놀랐다. 애먼 사람들만 보일 뿐이다. 시간이 흘러 앉아 있는 것도 배겨서 버들이 여기저기 부산스레 움직였다.
“버들아.”
정수기 앞에 서 있던 버들이 휙 몸을 돌렸다.
“……대표님.”
담배를 손에 든 황 대표가 서 있었다. 시선을 피해 둘이 들어간 곳이 비상구 계단이었다. 어둡고 습한 건 별로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 다짜고짜 버들이 황 대표의 허리를 껴안았다. 얇은 셔츠라 버들의 숨결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피부를 뜨겁게 간질이는 느낌에 당황했지만 황 대표가 버들의 등을 가만가만 어루만졌다.
“이틀 동안 바빴어?”
“오늘은 만나려고 대표님 집에 가려고 했는데…….”
길이 엇갈리지 않아 그저 다행이다. 황 대표가 버들의 핸드폰을 가져갔다. 제 번호가 저장되어 있었다.
“집 나오기 전에, 전화해.”
“……전화?”
“그럼 데리러 갈게.”
버들의 전화는 새벽에 걸려 왔다. 한국에 들어오면서 바뀐 버들의 핸드폰 번호를 외우고 있었다. 노트북을 잠시 밀어 두고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휘영청 뜬 달이 밝다.
-…….
“…….”
서로의 숨소리만 오고갔다.
-저…….
버들이 침묵을 깨고 입을 달싹였다.
-황정우 핸드폰 아니에요?
황 대표가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대표님? 아무 말 없어서 제가 전화 잘못 건 줄 알았어요.
“방금 뭐라고 했어?”
-대표님 핸드폰 아니냐고 했던 거요?
“이름 불렀었잖아.”
-황정우.
황 대표가 다시 웃었다. 댐이 무너지는 것처럼 모든 마음들이 방출되면 숨이 막힐 수도 있다. 그러니 조심스런 조절이 간절했다. 하지만 자꾸 버들이 웃게 만들었다.
-저, 이거…… 반말한 거 아닌데.
서로의 목소리가 조곤조곤 들려왔다.
-대표님. 아직 안 주무셨어요?
“넌 왜 아직까지 안 자고 있어.”
-저는 자다가 깼어요.
“그랬어?”
직접 마주하고 있는 게 아니라서, 떨리는 가슴을 움켜쥔 버들의 모습을 황 대표는 볼 수 없었다.
-저 내일, 대표님 못 만나요. 시골 가야 돼서.
앞으로 스승님한테 조각을 배우기로 했다면서 버들이 종알종알 떠들었다. 형수님이 몰래 작업실도 내 주었다고 자랑도 했다. 주기적으로 시골에 방문해야 하는 버들의 일정에 황 대표가 초점을 뒀다. 무언가 겸연쩍다. 마침 나도 거기에 일이 생겨 가 봐야 하니 가는 김에 데려다주겠다고 황 대표가 입을 열었다. 조금 더듬거린 목소리에서 수작질이 여실히 드러났는데 버들은 의심하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황 대표가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저쪽에서 꺾어야 돼요.”
길을 설명해 주는 버들의 목소리가 듣고 싶으니까 황 대표가 일부러 운전을 틀리게 했다. 스승님 댁에 다다르자 버들이 안전벨트를 풀었다. 앞에서 세워 줄 줄 알았더니 황 대표의 차가 그대로 대문을 지나쳤다.
멋진 풍경에 버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기 어디에요?”
황 대표가 버들의 시선을 피했다.
“……내 집.”
“대표님 집?”
차에서 내린 버들이 연속으로 감탄했다. 말 그대로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이 지어진 집이었다.
“여기서 혼자 사세요?”
“…….”
“혼자 살기에 너무 큰 거 아니에요?”
황 대표가 작게 헛기침을 터트렸다. 그늘진 곳으로 황 대표가 버들을 데려갔다. 나란히 벤치에 앉았다. 버들은 황 대표의 집을 빤히 쳐다봤고, 황 대표는 그런 버들의 옆얼굴을 빤히 주시했다. 하늘 위의 구름이 유유히 흐른다. 잠시 뜸들이던 황 대표가 버들의 앞에 열쇠를 내밀었다.
“너 줄까?”
“열쇠고리?”
“…….”
사유지에 들어올 수 있는 울타리 열쇠였는데 버들이 관심을 보이며 가리킨 건 건축가가 매달아 놓은 유치한 모양의 열쇠고리였다.
“조각 배우다가 쉬고 싶어질 때도 있을 거 아니야. ……가져. 여기.”
버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왜. 멋있다고 했잖아.”
“저도 집 있는데요?”
“작업실은. 여기 넓어서…….”
“저 이제 작업실도 생겼어요.”
반짝거리는 버들의 눈망울이 순하다.
“대표님. 연애하는 거 쉽죠? 제 말처럼 어렵지 않죠?”
집 있고 작업실까지 갖춘 남자와의 연애가 쉽지 않다. 그래서 동의하지 않았다.
“이렇게 같이 시간 보내는 게 연애하는 거예요.”
황 대표의 주머니에 든 초콜릿 한 알이 끈적끈적 녹아 가고 있었다. 입안에서 한숨이 맴돈다. 뭐든 다 해 줄게요. 뭐든 다 줄게요. 맹목적인 애정을 보였던 버들의 말이 귓가에서 울린다. 그때와 무게가 달라졌다. 버들은 결코 가볍게, 쉽게 뱉었던 말이 아니었다. 초콜릿 하나 못 건네는 지경에서야 알겠다. 어렵다.
울타리 틈새로 하얀색 털 뭉치가 쑥 내밀어졌다. 퉁퉁한 꼬리를 사정없이 흔들고 있는 강아지를 발견한 버들이 벌떡 일어났다. 어디로 가 버릴까 싶었는지 황 대표가 무의식중에 버들의 손목을 바로 붙잡았다. 잔뜩 반가워하기에 서로 아는 사이냐고 버들에게 물었다.
“스승님 댁 옆집에서 키우는 강아지예요. 전에 왔을 때 봤어요.”
황 대표가 강아지 이름을 말해 줬다.
“재복이? 쟤 백구예요. 다른 강아지랑 헷갈리신 거 아니에요?”
하얀색에 기다란 속눈썹……. 누굴 연상시키는 특징들이 없었더라면 애초에 이름을 붙일 일도 없었을 거다.
“이름 있는지 몰랐어.”
“대표님이 지어 주신 이름이에요?”
“아니.”
“그럼요?”
“부탁했어. 개 이름 짓는 사람한테.”
“그런 사람도 있어요?”
“전문직이라던데?”
“…….”
공식적인 이름은 백구였으나 두 사람 사이에선 재복이라고 불릴 강아지가 발랄하게 뛰어갔다.
며칠째 황 대표의 차를 타고 버들이 시골로 조각을 배우러 다녔다. 차창으로 반사되어 비치는 황 대표를 바라봤다. ‘거기에 마침 일이 있어서 가는 길에 데려다준다’는 황 대표의 말이 사실은 그렇지 않단 걸 놀랍게도 버들은 이미 알아차렸다. 운전하느라 황 대표가 피곤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버들이 안전벨트를 풀었다. 황 대표가 뒷좌석에 둔 버들의 가방을 들어 무릎 위에 올려 줬다.
“두 시간 뒤에 데리러 올게.”
“……대표님. 할 일 있다고 하셨잖아요.”
“두 시간 뒤에 나도 일이 끝나.”
“…….”
내리려는 버들의 이름을 황 대표가 나직하게 불렀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별말 없었던 버들의 이마를 짚었다. 아픈 줄 알았는데 다행이다.
“오늘은 기분이 안 좋아? 무슨 일 있어?”
버들의 눈동자를 찬찬히 들여다봤다. 연애하는 사이로서 버들이 요구하는 게 어떤 것도 없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꼭 나여야만 된다고. 생전 처음 느낀 맹목적인 애정에 자만하고 오만을 떨어 대느라 작정하고 저질렀던 쓰레기 짓이 머릿속을 하나하나 스쳐 지나갔다. 버들이 아무런 말을 하고 있지 않았지만 전부 없던 일로 덮어 둘 수는 없었다. 떠올렸을 때 버들에게 좋았던 기억이 정말로 있기는 한 걸까.
“있어요. 많아요.”
에둘러 물어 온 황 대표의 물음에 버들의 표정이 환해졌다.
“어제도 자기 전에 떠올렸어요.”
“어떤 거?”
“대표님이랑 같이 우동 먹으러 간 거요.”
“…….”
어깨에 힘이 탁 풀려 버린다. 우동 먹으러 간 게 뭐라고 자기 전에 떠올려. 속이 상한다.
“유버들.”
조각 수업을 끝내고 대문 밖으로 나온 버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던 황 대표에게 답삭 안겼다. 버들과 눈이 마주쳤을 때 황 대표가 흐릿하게 웃었다. 지 꼴리는 대로 물고 빨고 했었던 주제에 지금은 힘을 세게 주면 버들이 깨지진 않을까 노파심을 떨게 된다. 황 대표의 손이 버들의 등을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대표님…….”
버들이 저를 부르자 황 대표가 버들의 어깨와 목 사이로 코를 파묻었다. 가까워진 거리만큼이나 황 대표의 목소리가 가까이 들렸다. 버들아.
“궁에 갈래?”
장소부터 시간까지. 약속다운 약속을 정했다.
“안녕하십니까.”
비서의 인사에 버들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피곤해 보이십니다.”
티가 나나? 그거 티 나면 안 되는데.
“타시죠.”
“감사합니다.”
비서가 문을 열어 준 차에 버들이 올라탔다. 차창에 제 모습을 비췄다. 과연 핏줄이 서서 피곤해 보인다. 거의 뜬 눈으로 잠을 설친 거나 다름없었다. 원래는 약속 시간보다 훨씬 더 일찍 나가 주변에 뭐가 있나 둘러보고 황 대표를 기다리려고 했었다. 하지만 전날 황 대표에게 걸려 온 전화에 꼼짝없이 발이 묶여 버렸다. 시간 맞춰 차를 보낼 테니까 타고 오라니. 외출 준비를 완벽하게 끝내 놓고 나니 무료함이 찾아왔다. 내내 시계만 노려봤다. 그런 저를 놀리는 것처럼 유독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어제까지 흐렸던 날씨가 오늘은 맑다. 주차장에 도착했다. 관광객들로 인해 궁 주변의 도보가 붐볐다. 버들이 두리번거리면서 황 대표의 차를 찾았다.
“대표님은…….”
비서에게 말을 걸던 찰나, 누군가 차창을 두드렸다. 어제도 같이 있었고, 엊그제도 같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또 이상한 기분이 든다. 차에서 내린 버들이 황 대표 앞에 섰다. 둘 다 정장을 갖춰 입고 있었다. 앞머리를 올린 황 대표의 모습에 홀린 버들이 잠시 넋을 놨다. 심장이 마구 쿵쾅거린다. 데이트라는 게 상기되면서 괜히 멋쩍어진 버들이 황 대표의 시선을 피했다.
“여기 와 보신 적 있어요?”
“처음이야.”
처음이란 말이 설렌다. 저가 못 해 본 무수한 것들을 마찬가지로 처음일 황 대표와 하고 싶었는데 그런 바람이 이루어졌다. 어지러울 정도로 귓불 뒤쪽의 맥박이 뛴다. 궁에 대해 공부를 많이 했다. 여기에 오자고 노래를 불렀던 게 저고, 연애를 하자고 한 것도 저이니 첫 데이트에서 황 대표를 리드해야 한단 생각에 벌써부터 진땀이 날 것만 같다. 아직은 보송한 주먹을 버들이 괜스레 꾹꾹 쥐었다가 풀었다.
“저기서 표 사야 되거든요. 제가 사 올게요.”
먼저 와 있던 황 대표가 직접 사 놓은 표를 보여 줬다.
“너 돌담길 걷고 싶어 했잖아.”
이쪽이라며 황 대표가 제 팔꿈치를 살짝 잡아당겼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통에 나란히 걷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책에서 본 사진에는 사람들이 없었다. 딱 배경만 나와 있어서 실제로도 그럴 거란 착각을 했다. 광활하게 넓은 궁 안에도 관광객들은 넘쳐 났다. 버들이 말을 잃었다.
버들의 등에 황 대표의 시선이 닿았다. 바람이 뒤에서 앞으로 불고 있었다. 셔츠가 달라붙을 때마다 버들의 어깨뼈가 선명해졌다. 어느 순간부터 버들이 앞장서서 걷고 있었다. 그런 버들의 뒤를 묵묵하게 황 대표가 따라 걸었다. 버들이 멈추면 같이 멈추고. 버들이 앉으면 같이 앉았다. 저를 피하며 딱딱하게 굳은 버들의 표정이 처음엔 걱정이었다. 기분이 안 좋나? 어제 아팠나? 여기가 별로인가? 온갖 생각들이 스쳐 지나간 뒤에 발그레한 버들의 볼을 봤다. 부끄럽나 보다.
“버들아.”
황 대표가 부르자 버들의 어깨가 떨렸다. 돌아가는 차 안이었다.
「대표님. 연애 그거 되게 쉽대요. 어려운 거 아니래요.」
자신이 한 말을 떠올리며 버들이 울적해졌다. 어떤 식으로 황 대표를 바라봐야 하고,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몰라서 쩔쩔맸다. 쉽지 않다. 어려웠다.
“밥 먹으러 갈래?”
가만히 버들이 고개를 내저었다. 핸들을 쥐고 있는 황 대표의 손가락이 잠시 삐끗거렸다. 딱 점심시간이었다. 체력을 위해 살이 쪄야 하는 버들에게 보양식을 먹이려고 따로 예약해 놓은 한정식 집이 있었다.
“대표님.”
침울하게 버들이 물었다.
“오늘 별로였죠?”
“……아니.”
버들이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럼 어디 가고 싶은 데 있어?”
“집.”
그래. 황 대표가 대답했다.
“저희 집 말고. 대표님 집에 가고 싶어요.”
“…….”
“……안 돼요?”
“돼.”
길이 많이 막혔다. 그날따라 두 사람의 눈에 손을 잡고 걸어가는 연인들이 주로 들어왔다.
서울 집 말한 건데 황 대표가 차를 끌고 온 게 시골이었다. 한적한 시골길을 황 대표와 나란히 걷고 있자 첫 데이트를 제대로 리드하지 못해 울적했던 기분이 서서히 옅어졌다. 그런 버들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황 대표가 읽었다. 뒤집힌 세상에 오롯이 둘만 남고 싶다. 바람이 불 적마다 나뭇잎이 서로 부대끼며 흔들렸다. 자전거가 다가오자 황 대표와 버들이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 길의 폭이 좁아 갓길에 붙어 자전거가 먼저 지나갈 수 있게 비켜 줬다.
황 대표가 버들에게 팔을 뻗었다. 버들의 손등에 황 대표의 새끼손가락이 스쳤다. 하필 그때 논두렁에서 버들을 아는 사람이 아는 척을 해 왔다.
버들의 손을 못 잡고 일주일이 흘렀다.
* * *
버들이 눈을 깜박였다. 할 말 있으시다더니 뭐지? 기다리고 있는데 30분째 황 대표가 잠잠하다. 밤하늘이 짙다. 차 안으로 황금빛의 가로등이 쬐어 들어왔다. 고개를 살짝 비틀어 황 대표가 버들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초콜릿 주는 것만큼이나 손을 잡는 게 어렵다. 갈증이 나면서 막막하다.
“먹어.”
황 대표가 전해 주는 종이 가방을 버들이 얼떨떨하게 건네받았다.
“초콜릿이에요?”
“……너 먹기 싫으면 유 대표 주고.”
“저희 형은 단거 안 좋아해요.”
“…….”
다행이었다.
“어디서 났어요?”
“…….”
“누가 줬어요?”
“그걸 누가 줘. 내가 가서 샀어.”
“…….”
돌연 황 대표의 발끈한 어조에 버들이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대표님이 가서 샀어요?”
“……그래.”
알록달록한 초콜릿 매장에 서 있을 황 대표의 모습이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또 사다 줄게.”
“…….”
“너 좋아한다고 했던 수제 초콜릿, 그것도 이태리에서 오는 중이야.”
“…….”
황 대표의 말을 조각조각 이어 붙였다.
“저 주려고 사신 거예요?”
황 대표가 대답하지 않고 차에서 내렸다. 쾅, 문 닫히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저를 따라 내린 버들에게 황 대표가 인상을 찌푸렸다.
“왜 내려. 추운데.”
봄과 여름의 경계에 위치한 밤공기가 차다. ……대표님이랑 같이 있고 싶어서요. 머뭇거리며 밝힌 버들의 속마음에 더 타박할 수가 없었다. 거리를 좁혀 다가간 황 대표가 버들의 어깨에 제 재킷을 든든하게 둘러 줬다. 향수 냄새가 은은하게 묻어난다. 그게 마냥 좋은지 버들의 입가가 부드럽게 풀렸다.
“괜찮은데…….”
황 대표가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맞췄다. 버들의 커다란 눈이 슴벅거렸다. 제 볼을 건드리는 황 대표의 손길에 목덜미를 타고 저릿하게 전기가 퍼졌다. 속눈썹을 떼 주고 나서 황 대표가 반걸음 물러났다. 그러는 편이 버들의 손이 잘 보였기 때문이었다. 낮게 한숨이 터졌다. 누군가의 손을 잡고 싶어서 이렇게 애가 탔던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게 버들이니까 스스로가 낯설 정도로 어울리지 않는 생각들을 하는 것 같다.
버들이 흠칫거렸다. 황 대표의 손가락이 버들의 새끼손톱을 간신히 붙잡았다. 그나마 힘을 주지 못해 헐렁헐렁하다. 천천히…… 버들의 손바닥 전체를 감싸려던 그때. 버들이 재채기를 터트렸다.
오늘로서 버들의 손을 못 잡은 지 일주일이 넘어갔다.
* * *
“너 이리 와.”
현관에 들어서는 버들을 보자마자 겨울이 대뜸 시비를 걸었다. 거기에 일절 대꾸하지 않은 채 버들이 제 방으로 숨어들었다. 응접실에 자리를 잡고 퍼질러 있는 겨울의 한만한 꼬락서니를 보아 장 여사와 유 회장이 함께 부재중인 모양이었다. 야구 경기를 보는 중이라 저를 따라올 기색은 아니었지만 겨울의 마음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일이니 앞서 단단히 대비해 두는 게 좋겠다. 그래 봤자 고작 문을 잠그는 게 최선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안도가 된다.
옷 속에 감춰 왔던 작은 종이 가방을 꺼내 침대에 올려놓고 버들이 재빨리 씻고 나왔다. 머리를 말리는 와중에도 시선은 거울에 비춰지는 종이 가방에 고정되어 있었다. 저에게 주기 위해 초콜릿을 샀단 황 대표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어룽거린다. 초콜릿 가게와 황 대표라니. 어울리지 않는다. 어떤 얼굴이었을지 궁금하다. 인상을 쓰고 있었을까?
황 대표가 준 초콜릿을 종이 가방 통째로 어딘가에 숨겨 두려던 버들이 멈칫했다. 예전에 치즈케이크를 보관만 하다가 결국 상해서 버렸던 기억이 있다. 아쉬웠던 걸 번복하지 않고자 버들이 초콜릿을 꺼냈다. 포장이 예쁘다. 끈을 잡아당겨 상자에 장식되어 있던 리본을 풀었다. 울퉁불퉁한 초콜릿이 뭐 특별할 게 있다고 버들이 한참 감상했다.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손바닥의 열기로 초콜릿이 살짝 녹기 시작하자 버들이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천천히 맛을 음미했다. 한쪽 볼을 그득하게 차지한 초콜릿을 버들이 와삭, 깨물었다. 오물거리던 걸 멈추고 버들이 눈을 깜박거렸다. 초콜릿만으로 부드럽게 채워졌던 입안이 안에 들어 있던 것으로 인해 거칠어졌다. 꿀꺽, 삼켰다. 설마. 새로운 초콜릿을 꺼내 반을 갈라 본 버들이 그대로 침대에 발라당 누워 버렸다. 온몸이 전부 화끈거린다. 황 대표님……. 진짜 미친놈이 아닐까? 가둬 버리고 싶다, 영영. 아무도 못 보게. 나만 보게. 황 대표보다 힘이 셌다면 정말 망설이지 않고 저질렀을지도 모르겠다.
초콜릿 속에 든 건 씨앗이었다.
해바라기 씨앗.
대표실에 앉아 업무 중이던 황 대표가 고개를 들었다.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자 버들이 보였다. 황 대표의 눈이 순간적으로 커졌다. 대표님, 하고 저를 부르는 버들의 목소리가 환청인 줄 알고 진짜 미친 건가 저 자신을 잠시 의심했었다. 버들아. 이름을 부르자 활짝 웃는 버들의 얼굴이 티 없이 맑다.
“대표님. 일하고 있어요?”
창문이 높아서 버들이 턱을 한껏 치켜들어 황 대표를 올려다보는 중이었다.
“들어올래?”
“들어가도 돼요?”
어둡고 습한 비상구 계단에서 비밀스럽게 만나는 것도 흡족하지만, 밝은 곳이라면 얼굴이 더 잘 보일 터였다. 창문을 넘어가기 위해 귀하게 자란 재벌 집 막내아들이 아등바등했다. 틀에 손을 올리고 제자리 돋움만 여러 번 하는 중인 버들을 황 대표가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이런 거, 동물 나오는 다큐멘터리에서 본 적 있었던 것 같다. 생긴 게 동글동글하니 귀여웠는데 뭐였지.
버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부족한 체력만 체감한 꼴이라 낙담하게 된다.
“대표님. 비상구 계단에서 만나요.”
밝은 곳에서 버들을 자세히 보고 싶은 황 대표가 창문 밖으로 넘어갔다.
“……아.”
버들을 번쩍 들어 손쉽게 창문 위로 올려 줬다. 혼자서는 턱도 없더니 황 대표가 도와주니까 금방이다. 기쁜 표정으로 버들이 소파에 앉았다. 시원한 음료나 차를 부탁하기 위해 무심코 비서를 호출하는 벨에 손을 가져간 황 대표가 정신을 차렸다. 누군가 들어오면 창문까지 넘어 가며 둘이서 몰래 만나는 게 어떤 의미도 없어진다. 황 대표가 괜히 데스크 주변을 맴돌았다가 버들이 있는 소파로 향했다. 대표실에는 물밖에 없었다.
“물 마실래?”
“네.”
다행히 대수롭지 않게 버들이 손을 뻗어 물병을 받았다.
“……기침하네.”
버들이 코를 훌쩍였다.
“감기 걸렸어?”
맞은편에 앉으려던 황 대표가 옆자리로 옮겼다. 큰 손이 이마를 짚어 오자 버들의 속눈썹이 여러 번 깜박거렸다. 버들이 고개를 얼른 내저었다.
“창문 열어 놓고 자서 그런가 봐요.”
“왜 창문을 열어 놓고 잤어.”
“밖에 쳐다보다가……. 나도 모르게 잠들었어요.”
버들이 들고만 있는 물병을 황 대표가 도로 가져갔다. 대신 뚜껑을 따서 건네주던 그 찰나, 서로의 손끝이 스쳤다. 버들의 손을 못 잡고 자꾸만 황 대표가 겉돌았다. 버들이 종알종알, 제 하루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여기 오기 전에 유 대표와 서점에 들렀고, 무슨 책을 샀고, 그저 그런. 별거 없는 하루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버들의 일상이란 점에서 무게가 달라졌다. 황 대표가 버들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손 못 잡아서 신경 쓰고 있는 건 오로지 저 자신뿐인가 보다.
버들의 핸드폰이 울렸다.
-어디야?
“회사. 형이랑 회사 왔잖아.”
-회사 어디에 있는데 코빼기도 안 비쳐?
“형은 어디에 있는데?”
-빨리 나와.
바깥이 시끄러웠다. 회사의 전체 회식 날이었다. 쓸데없는 사진이 찍히지 않을까 걱정을 줄이면서 소속 배우들이 자유롭게 즐길 수 있도록 식당을 예약하기보다 호텔 출장 뷔페를 불렀다. 많은 인원들이 단체로 이동하지 않아도 되니 그게 편하기도 했다. 넓은 정원에선 바비큐가 구워지고 있는 중이었다. 황 대표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사람들로 바글바글하다.
“저쪽이십니다.”
경호원이 황 대표를 자리까지 안내했다.
“왜 둘이 같이 와?”
유 대표가 도끼눈을 떴다.
“어. 여기 오다가 중간에서 만났어. 우연히.”
황 대표는 가만히 있는데 버들이 나서서 변명했다. 더듬거리는 통에 우연히 만난 게 아니라, 여태 같이 있다가 오는 거라고 광고를 하는 셈이나 다름없었다.
“넌 이리 와.”
황 대표 뒤를 졸졸 따라가려던 버들을 유 대표가 제 옆에 앉혔다. 여섯 명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에 달랑 셋뿐이다. 직원들은 물론 소속 배우들과도 어울리지 않았다. 대외적인 스케줄이 아닌, 회사 내 사적인 행사였지만 혹시나 기자들이나 팬들이 작정하고 지켜볼 수도 있는 것이니 양쪽 대표는 골치 아플 일이 생기지 않도록 이런 자리에선 더욱더 철저했다.
유 대표의 지시로 서버가 음식을 내왔다. 즉석에서 구워진 해산물이 한 상이다. 와인 잔을 앞에 둔 황 대표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적은 양으로 항상 화려하게 요리되어 있는 것만 보고, 먹어 왔는데 그저 즉석에서 구운 해산물이 산처럼 쌓여져 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렇게 먹어야 더 맛있는 법이야.”
똑같이 곱게 자랐으면서 유 대표는 음식 편견이 거의 없었다.
“조개 먹을래?”
“응.”
버들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황 대표가 시선을 조개로 돌렸다. 해감은 제대로 되었는지 미심쩍다.
“내가 맞선을 봤는데…….”
술을 마시며 유 대표가 입을 열었다.
“나이 차가 네 살이나 나서, 거절했잖아.”
나이 차를 유독 강조하는 어투였다.
“집안 어른들도 잘 어울린다고 하고, 상대방도 나 좋다고 하는데도 나이 차가 네 살이나 나는데 어떻게 진지하게 만날 수가 있겠냐.”
유 대표의 눈빛이 대.놓고 황 대표를 직시했다.
“흑심을 가진다는 게 변태지. 양심이 있다면 그럼 안 되는 거지, 안 그래?”
“형. 네 살 위 여성분이랑은 사귄 적 있잖아. 일곱 살 위까지 만나 본 적 있지?”
“……누나들이 형을 좋아해.”
“형을? 누나들이? 왜?”
“어린 너는 몰라도 되고.”
매번 연상만 만났던 유 대표가 인상을 찌푸리며 제 막냇동생을 째려봤다. 저 위해서 하는 말인 줄 모르고.
“저리 가.”
술이 살짝 올라 저한테 질척거리는 유 대표를 버들이 밀쳤다.
“까 줘.”
“뭐.”
“새우.”
버들이 꼼지락거리면서 새우를 야무지게 깠다. 아. 기다리고 있던 유 대표가 입을 벌리자 군말 없이 입에 넣어 주기까지 했다. 회식이 끝날 때까지 대표실에 가 있으려고 자리에서 막 일어났던 황 대표가 다시 앉았다. 버들이 깐 새우들이 유 대표의 입으로 족족 들어갔다.
“대표님. 입맛 없으세요?”
“신경 쓰지 마. 저거 지금 깔끔한 척하느라 지랄하고 있는 거야.”
조심스레 묻는 버들의 물음에 빈정거리며 유 대표가 대답했다. 아무런 말 없이 황 대표가 와인만 들이켰다.
“까 줘.”
“뭐.”
“게.”
……남은 함부로 잡지도 못한 손으로 뭘 저딴 걸 시키는 거야. 게살을 바르고 있는 버들의 손에 황 대표가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얄미운 걸 떠나서, 넙죽넙죽 처받아먹기만 하는 유 대표의 모습이 진상이 따로 없다.
가장 통통하게 잘 익은 새우 하나를 버들이 골랐다. 황 대표와 버들의 눈빛이 공중에서 어색하게 스쳐 지나갔다. 황 대표가 와인 잔을 기울였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내심 기대가 증폭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방금 든 제 감정이 매우 낯설다. 불쑥불쑥 느껴지는 낯선 감정들은 오로지 버들에게만 국한되어 있었다.
때마침 유 대표가 잠시 자리를 떴다.
“드세요.”
……기대가 식었다. 까 줄 줄 알았던 새우를 버들이 접시에 올려놓기만 했다.
* * *
핸들을 꺾자 길이 울퉁불퉁 흙길로 바뀌었다.
“저기 재복이 있어요.”
버들이 가리킨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하얀색 털 뭉치가 참외를 입에 물고서 신나게 달려가는 중이었다. 스승님 댁에 다다르자 버들이 안전벨트를 풀었다.
“앞에서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응.”
“일 있다고 하셨잖아요.”
“……일 끝나고 기다리겠단 말이었어.”
“이따가 봐요.”
이따가 보잔 말을 꺼낸 버들이나, 그 말을 들은 황 대표나 서로를 쳐다보지 못했다. 수업이 끝난 버들을 도로 차에 태우고 황 대표가 새로 지은 집으로 데려갔다. 버들은 여전히 유치한 열쇠고리에 관심을 보였다. 황 대표 입장에선 환장할 노릇이었다. 벤치에 앉은 버들이 두 다리를 쭉 뻗었다. 황 대표가 버들의 옆에 열쇠를 내려놨다.
“가져.”
달랑거리는 열쇠를 버들이 집어 들었다. 열쇠고리를 가지란 뜻으로 알았나 보다.
“이거 안 떼어져요.”
“응. 안 떼어질 거야.”
열쇠고리와 열쇠가 분리되지 않도록 이미 수를 쓴 상태였다. 버들의 옆에 앉은 황 대표가 다리를 꼬았다. 바람이 느긋하게 분다. 이런저런 말을 덧붙이며 집 안으로 버들을 유도했다. 집 안은 청소 후 가구들 배치까지 완벽히 끝난 상태였다. 버들이 주춤거리면서 황 대표의 뒤를 따랐다.
“여기 미술관 같아요.”
버들의 감상에 황 대표가 웃었다. 유 대표는 호텔 펜트하우스 같다고 했었다. 이 시골 바닥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며 한껏 비아냥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미술관 같고, 전시회장 같아요.”
버들이 수다를 떨었다. 요즘 관심이 가는 작가들과 작품들을 줄줄 나열했다.
“전시회도 열리고 있어요.”
버들의 목소리 톤이 밝다. 황 대표가 한숨을 삼켰다. 전시회 일정을 묻고 같이 가자고 말을 하고 싶은데, 선뜻 입이 열리지 않는다. 예전에 어떤 전시회장 근처에서 퍼붓던 비를 고스란히 맞아 가며 저를 기다리고 있던 버들이 떠올랐다.
“대표님도 가 보시면 좋을 텐데. 예술 잘 몰라도 워낙 대중적이라 재미있을 거예요.”
가 봤단 말로 들려 크게 동요가 됐다.
“……가 봤어?”
“네. 두 번.”
“누구랑 갔어?”
“저희 형이요.”
“유 대표?”
버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늘이, 아. 다섯째 형이요.”
이름을 말하려다가 황 대표가 모를 것 같아 버들이 순번으로 지칭했다. 밖으로 나오면서 버들이 대롱거리는 열쇠를 흔들었다. 청량한 소리가 퍼졌다. 비밀번호는 전부 똑같았다. 버들이 원하는 때, 언제든지 들락날락할 수 있었다. 제 공간이기도 하지만, 오롯이 저를 위한 공간은 아니었다.
황 대표와 버들이 나란히 동네를 걸었다. 같이 살았던 적이 있는 펜션이 점차 가까워진다. 버들이 크게 호흡했다. 여러 감정의 크기로 황 대표와 나누었던 뜨거운 여름이 떠올라 두근거린다.
……여기서 첫 키스를 했었지.
“그렇게 들어가도 돼요?”
“돼. 들어와.”
“남의 집인데요?”
남의 집은. 네 거 아닌 게 없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 우선 황 대표가 참았다.
“여기도 황 대표님 집이에요?”
“너 오고 싶을 때 언제든지 와도 돼.”
창문을 통해 버들이 기웃거렸다.
“우리, 여기서 자요.”
버들의 그 말에 황 대표가 숨을 참았다.
낮잠을 자고 버들이 깼을 때 창밖에는 빗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얇은 빗줄기가 언제부터 내리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부스스, 일어나 앉은 버들의 머리를 정리해 주며 황 대표가 눈을 맞췄다.
“산책 갈까?”
예전이 겹친다. 언제 떠나야 할지 몰랐던 그때는 황 대표와 함께했던 순간이 너무 좋았지만 그만큼 불안함이 동반되어 괴로웠었다. 연인 관계가 된 지금은…….
촉촉한 공기가 살갗에 닿는다. 버들이 황 대표를 지나쳐 걸었다. 우산 두 개의 끝이 부딪혔다. 물웅덩이를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밟고 지나가는 버들을 보며 황 대표가 인상을 찌푸렸다. 뭐에 정신이 팔려 있는지 우산도 똑바로 들지 않아 버들의 한쪽 어깨가 이미 젖은 채다. 더는 못 지켜보겠는지 황 대표가 결국 제 우산을 접고선 버들의 우산 밑으로 들어갔다.
“어?”
갑작스레 황 대표에게 우산을 빼앗긴 버들이 놀란 눈을 크게 떴다. 황 대표의 팔이 버들의 어깨 위로 둘러졌다. 그게 비를 맞지 않도록 막아 주려는 의도였는데, 안아 주는 걸로 착각했나 보다. 목에 팔을 두른 버들이 품속을 파고들었다. 따뜻하게 번지는 버들의 체온을 느끼며 황 대표가 옅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러면…….”
이러면, 집은 어떻게 가냐.
비 내리는 깜깜한 밤, 빗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두 사람이 포옹한 채 한참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계절이 여름으로 흘러가면서 기온이 점차 높아졌다. 사과 깎아 먹으며 함께 시간을 보낸 뒤, 버들의 집에 바래다주는 길이었다. 황 대표가 카페를 발견하고 갓길에 차를 세웠다. 기다리고 있으라니까 버들이 말을 듣지 않고 따라 내렸다.
각자의 손에 시원한 음료가 들렸다. 손에 묻은 물기를 버들이 제 옷에 슥 문질러 닦았다. 주변에는 시간이 늦은 만큼 아무도 없었다. 제 쪽으로 황 대표의 팔이 다가오자 재잘재잘 거리고 있던 것도 멈춘 채 버들이 몸을 돌려 피했다.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 * *
“밥은 먹었어?”
“네. 대표님은요?”
“먹었어.”
전화로 약속한 대로 황 대표가 시간 맞춰 버들을 데리러 갔다. 엘리베이터에 단둘이다. 핸드폰을 꺼내기 위해 움직였을 뿐이건만, 버들이 제 팔을 등 뒤에 감췄다. 눈이 마주치자 버들이 어색하게 웃으며 뭐라고 말을 걸었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황 대표가 버들이 먼저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문을 잡아 줬다.
“대표님.”
생각이 복잡한 황 대표가 대꾸하지 않았다. 버들이 얌전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어디 가.”
“……물 마시려고요.”
일어나 다른 데로 가 버리려는 버들의 손목을 붙잡았다. 잡아당기자 마른 몸이 훅 따라왔다. 비틀거리며 소파에 풀썩 주저앉은 버들이 중심을 잃고 옆으로 넘어갔다. 그게 하필이면 황 대표의 무릎을 베고 누운 꼴이다. 서로의 얼굴을 주시했다. 황 대표의 눈빛이 깊다. 꼭 잡아먹힐 것 같다.
“유버들.”
일어나려는 버들의 어깨를 힘을 주지 않고 눌러 막았다.
“너 알지. 내가 네 손, 잡고 싶어 하는 거.”
버들의 맑은 눈동자가 황 대표를 그대로 투영했다.
“……3년만 있다가 잡아요.”
몸을 일으키는 버들을 이번에는 황 대표가 등을 받쳐 도왔다. 의외로 버들이 황 대표의 곁을 피하지 않았다. 3년만 있다가 잡자는 말이 무슨 뜻인지 황 대표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못해도 3년은 날 만나 주겠다는 건가? 연인 관계가 되었다지만, 완벽하게 맞물리지 않았기에 두 사람의 생각이 삐걱거렸다.
“대표님. 저 조각 계속할 거예요.”
버들의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렸다.
“제 손……. 더러워요.”
아무렇지 않게 버들이 말을 했기에 황 대표의 속은 더 뭉개졌다.
“병원 다니고 있어요. 한의원. 습진 전문이래요. 할머니가 소개해 준 곳인데, 3년 꾸준히 치료하면 손끝에 피부 벗겨지는 거랑 손톱이 지금보다 깨끗하게 될 수 있대요. 그럼, 그때 우리 손잡아요.”
별 하나 뜨지 않은 밤하늘이 휑하다.
버들이 눈치를 봤다. 사귀기로 한 날 이후, 이렇게 차 안이 조용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고개를 숙이자 꾀죄죄한 제 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황 대표가 차를 세웠다. 벌써 집에 도착한 게 아니라 며칠 전에 갔던 카페가 있는 길목이었다. 주변에 인적들이 없어 24시간 운영을 하는 게 딱히 실속 있게 느껴지지 않는다. 황 대표가 내리자 버들이 따라 내렸다.
“……감사합니다.”
버들이 좋아하는 취향대로, 그렇지만 밤에 마셔도 수면에 영향을 주지 않는 걸로 골라 주문한 음료를 황 대표가 버들에게 건넸다.
“마시고 갈래?”
황 대표가 물었다. 마땅한 자리를 찾아 버들이 비어 있는 좌석들을 빙 둘러봤다. 하지만 정작 안에서 마실 생각이 없었던 것인지 황 대표가 카페를 나가 버렸다. 빠른 걸음이 아니라 버들이 쉽게 황 대표의 옆에 설 수 있었다.
「제 손, 더러워서요?」
「네. 저 비위 약해요.」
숨이 순간 턱 막혔다.
「더러운 손으로 어딜 만져.」
황 대표가 속으로 욕을 짓씹었다.
“대표님. 여기 앉을래요?”
길거리 벤치에 앉아 본 게 태어나 처음이다. 버들이 아니었다면 평생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어차피 뒤집힐 세상, 좀 더 일찍 뒤집혔다면. 스스로를 탓할 수밖에 없다. 제 성격과 어울리지 않은 짓이란 걸 뻔히 알면서도 자꾸만 소용없는 바람들을 되짚게 된다.
머리 위로 비추는 가로등 빛이 협소하다.
각자 얼마 마시지 않은 음료에 든 얼음이 전부 녹을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협소한 가로등에 비춰진 버들의 기다란 속눈썹이……. 속눈썹을 포함해서……. 저답지 않게 긴장이 됐다.
“버들아.”
무거워지는 입을 달싹였다. 말해야 했다. 제가 던진 말에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아 했으나 상처받은 버들의 여린 마음이 고스란히 손에 쥐어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복잡하고 어렵다. 그렇지만 더는 시간을 넘길 수가 없었다.
“너…….”
내 눈에 네가 어떻게 비춰지는지. 속으로만 품고 있는 걸 황 대표가 털어놨다.
“예뻐.”
딱딱한 어조로 식상한 표현이 최선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모질었던 첫사랑이었기에 그런 식상한 표현에도 버들의 얼굴은 삽시간에 달아올랐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버들이 황 대표가 손을 잡으려는 때에 간발의 차로 피했다. 도망치려는 버들의 앞을 황 대표가 가로막았다. 버들아. 다정하게, 제 이름을 부르는 황 대표의 목소리에 버들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황 대표가 버들의 손을 잡았다. 손바닥 전체로 서로의 체온이 번졌다. 동시에 두 사람이 호흡이 흐트러졌다. 사시나무처럼 떠는 버들의 손가락을 황 대표가 놓아주었다가, 이내 더 꼭 옥죄었다.
“……좀 걸을까?”
버들의 보폭에 맞춰 걸었다. 텅 빈 횡단보도에 서서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렸다. 즐비해 있는 가게들이 전부 닫혀 있다. 그만큼 주변이 고요했다. 서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기에 고요함은 더욱더 깊어졌다.
천천히 다시 차로 향했다. 앞에서 황 대표가 망설였다. 집까지 버들을 데려다주려면 운전을 해야 하는데 그러면 겨우 잡은 버들의 손을 놓을 수밖에 없다. 황 대표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떨어져 나간 손이 아쉬운 건 버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황 대표와 손을 잡았단 게 믿기지가 않는다. 아직까지 체온이 남아 있는 것 같아 그게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버들이 주먹을 쥐었다.
“내일…… 봬요.”
“내일 올 거야?”
“네.”
“어디로.”
“……회사. 회사에 있다가 대표님 집에 갈래요.”
“응.”
기약 있는 사이란 걸 버들이 곱씹었다. 수술한 심장이 잘못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뛰어 댄다. 여전히 얼굴은 뜨거웠다. 버들을 내려 주고 멀어지던 황 대표의 차가 후진으로 되돌아왔다.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린 황 대표가 버들의 앞에 섰다.
“언제까지 서 있으려고 그래.”
“대표님 가는 거 볼 거예요.”
“들어가. 시간 많이 늦었잖아.”
버들이 황 대표를 빤히 올려다봤다.
“저기가 네 방이야?”
“네. 어떻게 아셨어요?”
“불 켜지는 거 보고.”
황 대표의 말에 버들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황 대표를 남겨둔 채 버들이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뒤로 물러나면서 황 대표의 시선은 버들의 방에 고정되었다. 불이 켜지고 창문이 열리면서 버들이 빠끔히 나타났다. 손을 흔드는 버들의 인사에 황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가 온화하다.
뒤척거리던 황 대표가 몸을 일으켰다. 잠들지 못하겠다. 잡았던 버들의 손의 감촉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그래서 차를 끌고 도로 버들의 집으로 향했다. 버들의 방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아. 미쳤나. 진짜.”
황 대표가 제 가슴을 헤집었다. 심장이 사정없이 쿵쾅거렸다.
* * *
새로운 와인이 늘어났다. 셀러 앞에 철썩 들러붙은 버들이 그걸 구경하느라 바쁘다. 황 대표가 버들의 가방을 대신 챙겼다. 시골에 가기 위해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예쁘단 말을 황 대표가 자꾸 버들에게 들려줬다. 버들의 귓가와 목덜미가 빨개질 정도로 속삭이고, 또 속삭였다.
두 사람의 손가락이 얽혀 빈틈없이 맞물렸다. 뻣뻣하게 어깨가 굳을 정도로 긴장했던 버들도 처음 손을 잡았던 날에 비해 많이 나아졌다. 발그레한 버들의 양쪽 뺨에서 부끄러움이 전달됐다.
시골로 향하던 중 황 대표가 다른 곳으로 핸들을 꺾었다. 일찍 출발했던 덕분에 버들의 조각 수업 시간까지 아직 여유가 있었다. 황 대표가 차를 세웠다. 여기가 어딘가 싶은지 버들이 창밖의 풍경들을 두리번거렸다. 길을 잃으신 건가? 내비게이션을 입력하려던 버들을 보며 황 대표가 중간에 차를 세운 이유를 밝혔다.
“얼굴 보고 싶어.”
뜻밖의 황 대표의 말에 버들이 눈을 여러 번 깜박였다.
“무릎 위로 올라올래?”
눈 둘 곳을 모르겠다. 저를 무릎에 앉혀 놓고 황 대표가 정말 얼굴만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장소가 차 안이라서 그런가. 황 대표의 무릎에 처음 앉아 보는 것도 아닌데 생소한 감각들이 발바닥을 둥글게 말리게 만든다. 침을 삼키자 그 소리가 크게 들렸다. 버들이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가 얼른 놓았다.
“대표님. 우리, 차에서 이러고 있으니까…….”
뜸들이던 버들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너 야한 말 하려고 했지.”
“아니에요. 야한 말.”
“그럼.”
“그냥. 주워들은 말이 생각나서 그랬어요.”
“어떤 말인데.”
버들이 꿍얼거렸다.
“옷 벗을 때 머리 찧고 이러니까…….”
“너 뭐 봤어?”
“……아니요. 주워들은 말이라고 했잖아요.”
“마저 말해 봐.”
“차에서 옷 벗을 때는 머리 찧을 수도 있으니까 조심해야 돼요.”
“차에서 옷을 왜 벗어.”
곤란한 표정으로 폭삭 제 품에 안기는 버들의 등을 황 대표가 쓰다듬었다. 웃음이 터지려는 걸 참았다. ……뭘 보긴 봤네.
스치는 눈빛이, 오고가는 숨결이 전부 간지럽다.
“어디로 갈까?”
수업이 끝난 버들을 차에 태우고 황 대표가 물었다. 펜션 아니면, 버들이 미술관으로 부르고 있는 새로 지은 집에서 낮잠을 자는 게 둘만의 고유한 일상으로 굳어졌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시간이었지만 지루하지 않았다. 창밖으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황금빛으로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며 함께 구경했다. 조금 더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기다린 두 사람이 밖을 나왔다. 고즈넉한 거리를 손을 꼭 깍지 낀 채 걸었다.
“대표님.”
“응.”
한참 말 없던 버들이 황 대표를 불렀다.
“연애할 줄 알아요?”
“…….”
“연애해 본 적 있어요?”
“…….”
저야 이렇게 둘이 있는 게 좋지만 버들은 아닐 수 있다. 저야 둘이 함께하고 있는 시간이 지루할 틈이 없지만 버들은 아닐 수 있다. 버들의 물음이 당황스러운 황 대표가 머리를 굴렸다. 연애가 처음이었다. 연애를 하고 싶단 생각을 버들이 처음 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우리 이거 연애하는 거예요?”
처음인 만큼 헤매고 있었다. 황 대표가 보통의 데이트를 떠올렸다. 차를 마시거나 밥을 먹고 영화를 본댔나?
집으로 돌아왔다.
“대표님.”
영화관을 사는 게 좋을지, 빌려야 할지. 그런 걸 고심하고 있던 황 대표가 버들을 내려다봤다.
“저는 이제 확실하게 연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겠어요.”
버들의 큰 눈이 순하다. 황 대표의 왼쪽 뺨에 버들이 입을 맞췄다. 순간 황 대표가 낮게 웃었다. 버들이 이번엔 황 대표의 오른쪽 뺨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너는 볼에 뽀뽀하는 게…….”
너는 볼에 뽀뽀하는 게 연애냐고. 아홉 살 어린 제 꼴통에게 하려던 말을 황 대표는 완성하지 못했다. 갑작스레 버들이 체중을 실어 왔다. 황 대표의 등이 벽에 닿았다. 입술에 부드럽게 닿아 오는 느낌에 반사적으로 황 대표가 눈을 감았다. 버들이 황 대표의 목에 팔을 걸었다. 황 대표의 아랫입술을 머금었다가 놓았다. 서로의 혀끝이 비벼지면서 녹아들었다. 가느스름하게 뜬 눈으로 버들이 황 대표의 표정이 변하는 걸 지켜봤다.
숨이 찬다. 헐떡거리는 버들을 위해 황 대표가 고개를 반대쪽으로 꺾어 주면서 숨 쉴 틈을 내줬다. 더 버티지 못하고 버들의 눈꺼풀이 스르륵 감겼다. 그 순간, 황 대표의 눈이 뜨였다. 입안에 고인 타액이 질척거리는 소리를 냈다. 붉어진 버들의 얼굴을 보며 한 손으로는 뒷덜미를, 다른 한 손으로는 허리를 강하게 붙잡았다. ……아. 가느다랗게 버들의 신음이 흘렀다. 마냥 조심스러웠던 키스가 잡아먹을 것처럼 변했다.
황 대표의 한쪽 무릎이 깊숙한 각도로 구부러졌다. 밀어붙이는 강한 힘을 버티기에 체력이 턱없이 모자란 버들의 두 다리가 벌어졌다. 기다렸단 듯, 그 사이로 파고든 황 대표로 인해 둘의 하체가 빈틈없이 밀착됐다. 순간 척추에서부터 저릿하게 피어오르는 은밀한 감각에 버들이 콧등으로 앓았다. 미약하게 떨리는 버들의 허벅지 안쪽이 느껴지자마자 황 대표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점멸되었다.
몸에서 힘이 풀려 축 처지는 버들을 안아 현관문을 열었다. 침실까지 가려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동해야 하나 그 정도의 여유란 현재로선 남아 있지 않았다. 깨끗하게 닦인 대리석 바닥에 황 대표가 버들을 조심스레 눕혔다. 서늘한 감촉에 놀랐는지 등을 움칠거린 버들을 다독거리는 손길만큼은 한없이 다정했다.
둥근 입천장을 채웠던 황 대표의 혀가 여린 점막을 온통 헤집고 있었다. 흐트러진 호흡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 마치 불꽃이 터지고 있는 것처럼 아찔해진 버들이 고개를 옆으로 돌려 피해 보았지만 금방 붙잡히고야 말았다. 물기 어린 소리가 계속해서 귓가를 울린다.
미치겠다. 황 대표의 커다란 손이 버들의 티셔츠 밑자락을 들췄다. 긴장했는지 납작하게 수축된 버들의 아랫배가 귀엽다. 손끝으로 버들의 뜨끈뜨끈한 체온이 감겼다. 제 어린 연인은 체온마저 상냥한 인상을 준다. 예전부터 변함없는 부분이었다.
버들이 눈을 떴다. 황 대표의 뜨거운 입술이 제 몸 아래로 향하려고 했다. 찰나 떠오른 건 가슴팍을 가로지른 흉측한 수술 상처였다. 나약한 달빛에도 뚜렷하게 비춰질 게 분명하니 덜컥 겁이 났다. 버들이 제 옷 안에서 유영하는 황 대표의 손목을 황급히 붙잡았다.
“……황 대표님.”
다정하게 응, 할 줄 알았더니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발버둥을 쳐 벗어나려고 해도 단단한 허벅지 아래에 깔려 녹록지가 않다. 흐……. 황 대표의 혀가 배꼽 주변을 핥아 오자 하반신은 물론 온몸이 척척하게 젖는 기분이 든다. 울먹거리던 버들이 황 대표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쥐고 제 얼굴로 오게끔 만들었다. 둘의 눈빛이 가깝게 부딪혔다. 들썩거리는 황 대표의 가슴팍이 거칠다. 핀트가 나가 있던 눈동자에 초점이 점차 맞춰지면서 황 대표가 버들의 표정을 봤다.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가 안쓰럽다.
“버들아…….”
앞머리를 넘겨 주며 드러난 버들의 이마에 황 대표가 입을 맞췄다. 달뜬 열기가 갇힌 몸속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아우성이었지만 뭐든 버들이 우선이었다. 천천히 일으킨 버들을 황 대표가 제 무릎에 앉혔다. 기력이 전부 빠져 버린 탓인지 버들의 고개가 힘없이 황 대표의 어깨로 숙여졌다. 호흡을 가다듬으려는데 어려운지 버들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꽉 껴안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황 대표가 가만가만 버들의 등을 쓰다듬었다. 살이 빠진 탓에 툭툭 튀어 나온 버들의 척추뼈가 여실하다.
살이 좀 붙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버들아. 너…….”
직전까지 달았던 입안이 버들의 지난 시간과 직면하게 되면서 삽시간에 써졌다. 시골에서 같이 살지 않고 그 시기에 자신과 떨어져 있었더라면 버들의 상태는 훨씬 나았을 거라고 확신한다. 예전 아팠던 버들이 제 곁에 있었던 통에 더 말라 버린 게 틀림없다.
나 때문에 고생해서. 마음 앓아서.
그새 곯아떨어진 버들을 옆으로 기울여 제 팔을 베게끔 눕혔다. 한쪽 벽면이 전부 유리창이라서 다행이다. 집 안을 덮치며 달이 내려앉았다. 시간은 그렇게 멈췄다. 버들의 말간 얼굴을 눈으로 담고, 담고, 또 담았다. 눈꺼풀이 감겨 있는 것과 별개로 버들의 기다란 속눈썹은 항상 위로 둥글게 말려 있었다. 청초하다. 손가락 마디로 매만진 볼의 감각이 금방 녹아내릴 것처럼 보드랍다. 목구멍이 답답하게 죈다. 버들이 제 곁에 있단 걸 실감하다가도 아득하게 멀어지는 경우가 있다, 지금처럼. 혹독했던 겨울이 스친다. 평생 안아 주지 못할 거라고 단념했었는데……. 잠들어 있는 버들이 현재 제 품속이다.
“유버들.”
……응. 잠결에 대답한 버들의 목소리가 가느다랗다. 돌아 버릴 정도로 얘가 좋다. 제 옆에서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못하게 사지를 묶어 놓고 싶을 정도로. 평생 자신만 알고. 자신만 보면서 살도록 소유하고 싶은 욕심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번져 버린 뒤다.
“너 예쁜 거 알아?”
속삭이는 것처럼 낮게 물었다.
“응…….”
“알아? 너 예쁜 거?”
“……응.”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낮게 웃음이 터졌다.
“버들아.”
버들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재차 이름을 불러 봤다. 가슴이 벅차다.
먹을 걸 앞에 두고 버들이 가만히 앉아만 있을 뿐이다. 먹어. 턱을 까닥이며 황 대표가 말을 걸자 그제야 젓가락을 드는 폼이 마지못해 보인다.
“여기는 어디에요?”
“밥집이잖아.”
버들의 물음에 황 대표가 당연한 말로 대꾸했다. 여기 누가 밥집인 거 모르나. 가는 곳만 가는 황 대표가 새로운 음식점에 데려온 것에 버들이 경계했다.
“여기 누구랑 와 보셨어요? 혼자서? 저희 형이랑? 아니면 직원들?”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을지 몰랐다. 버들이 있는 쪽을 향해 황 대표가 고개를 들었다. 나 지금 질투한다고,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낸 모습까진 용감무쌍하더니 버들이 왜인지 시선은 피해 버리기 바쁘다. 때마침 노크 소리가 나면서 문이 열렸다. 문 앞에 서 있는 책임자에게 코스로 나올 것들을 한꺼번에 내오라고 황 대표가 지시했다. 이윽고 커다란 상 위는 음식들로 가득하게 채워졌다. 하나같이 소담스럽다. 둘이 되었을 때 소화시키기 편한 것들을 골라 황 대표가 버들의 앞에 접시들을 옮겨 주었다.
“왜. 별로야?”
수랏상이었다. 입을 꾹 다문 채 애꿎은 젓가락 끝만 맞춰 대고 있는 버들을 곧게 응시하고 있자니 황 대표의 표정이 언제 무감했었냐는 듯 유순하게 풀려 버렸다. 예전 같았으면 어떻게 생각하건 말건 무시했을 터였다. 가운데에 놓여 시야를 방해하는 화병을 황 대표가 치우면서 차분하게 입을 뗐다.
“너 아니면 이런데 와 볼 일도 없어.”
궁중 요리의 전통을 잇는 전문가가 오너로 운영하고 있는 한국 전통 음식점이었다.
“네 입맛에 괜찮다고 하면 다음에 또 올 거고, 별로라고 하면 새로운 곳을 찾을 거야.”
버들이 젓가락 한 짝을 놓쳤다.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실은 목이 뻣뻣해질 정도로 긴장을 한 채였는데, 그게 방금 전 황 대표의 말로 인해 전부 가셨다. 버들의 코 평수가 넓어졌다. 내 입맛에 괜찮으면 여길 다음에 또 온다고? 별로라고 하면 안 오는 거고? 곱씹어 본 황 대표의 말은 모로 가나, 바로 가나 저한테 맞춘다는 걸로밖에 해석이 되지 않는다.
“먹어.”
황 대표가 제 앞에 가장 가까이 놓아준 접시가 관자 요리다. 짜지 않고 식감이 부드러워 부담 없이 삼킬 수 있었다. 이거 맛있어요. 감탄하는 버들의 목소리가 작았다.
“그거 더 시켜 줄까?”
다른 요리들도 많기에 버들이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버들의 식사 시간이 길었다. 오미자를 우린 차로 가볍게 입술을 축이면서 황 대표가 평소보다 더 많은 음식을 섭취하는 중인 버들을 주시했다.
“대표님.”
이제껏 깜박하고 있던 게 문득 떠올라 물었다.
“한약 뭐예요?”
“……뭐가.”
“냉장고에 한약 있잖아요. 그거요.”
버들이 안 보는 틈을 타 황 대표가 살짝 미간을 구겼다.
“무슨 한약.”
“있잖아요. 제 이름 쓰인 거.”
어물쩍 넘어가려고 했었는데 언제 확실하게 본 적이 있나 보다. 설명하는 게 구체적이다.
“나도 몰라.”
무뚝뚝한 어조로 황 대표가 대화를 잘랐다.
“그거 한약 제 거예요?”
버들이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 먹었어?”
“네.”
“데려다줄게. 가자.”
“…….”
자리에서 먼저 일어난 황 대표의 너른 등짝을 버들이 빤히 올려다봤다.
“왜.”
“저 디저트…….”
“아.”
문고리까지 쥐었던 황 대표가 도로 자리에 착석했다. 상이 치워지고 버들이 주문한 디저트가 나왔다. 황 대표의 몫으로 나온 원두커피에서 김이 모락모락 솟는다. 뜨거운 것과 별개로 황 대표는 커피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저 턱을 괸 채 버들의 납작한 아랫배를 쳐다볼 뿐이었다.
뭘 보시는 거지? 노골적인 황 대표의 시선이 의식되기 시작하면서 버들이 디저트에 집중하지 못했다. 슬그머니 티스푼을 내려놨다. 황 대표가 보지 못하게끔 제 아랫배를 주춤거리며 한쪽 팔로 감쌌다. 그래도 황 대표의 눈빛이 끈덕지게 버들의 몸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오늘 버들이 먹은 걸로…… 5킬로그램 정도 체중이 불어났으면 좋겠다. 평소보다 더 많은 음식을 먹었다지만 그래 봤자 한주먹 정도가 고작이다. 하지만 양심 없는 황 대표는 첫술에 버들의 배가 부르길 바랐다.
퇴근길에 막혔던 도로가 버들이 사는 동네에 와 조금 한산해졌다.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버들이 내비게이션의 경고에 고개를 휙 돌렸다. 황 대표가 태연하다.
“경로 이탈했대요.”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또 경로 이탈했대요.”
신호에 차가 멈추자 황 대표가 내비게이션 전원을 꺼 버렸다. 버들이 다시 창밖을 내다봤다. 풍경이 낯설었다가 낯익었다가 한다. 분명, 우리 집 가는 거 황 대표님이 확실하게 알고 계셨는데……. 길을 잃은 황 대표가 참 뜬금없다.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으니까 여태 길을 못 찾는 척 굴었던 황 대표가 버들이 차근차근 제 집 가는 방향을 설명해 주자 한숨이 나올 것 같은 걸 참았다.
병원에 들렀다가 버들이 곧장 제 작업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 바닥에 기대 세워진 캔버스부터 눈에 들어온다. 휑했던 공간이 제 손길을 타 제법 분주해진 게 뿌듯하다. 가방에 넣어 가지고 온 물건들을 곳곳에 배치했다. 컵 두 개, 숟가락 두 개, 칫솔 두 개, 샤워 스펀지 두 개. ……제 개인 작업실이지만 혹시나. 황 대표님이 놀러 올 수도 있고. 놀러 온 황 대표님이 비가 많이 와서 불가피하게 자고 갈 경우도 생길 수 있으니까. 중얼중얼 듣는 사람도 없는데 버들이 혼잣말로 변명했다.
집에 돌아온 버들이 샤워를 끝냈다. 늘 외면만 했던 거울에 제 몸을 비춰 봤다. 버들의 표정이 한껏 가라앉았다. 거울 표면에 물방울이 다닥다닥 맺혀 있어서 그런지, 수술 흉터가 유독 더 징그럽게 느껴지는 것 같다. 외면하고 얼른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아. 시끄러워.”
싸울 거면 나가서 싸우지. 머리를 말리다 말고 버들이 드라이기를 세게 내려놨다. 세 살 버릇 정말 여든까지 가려나 보다. 넷째와 다섯째가 다 컸음에도 불구하고 사소한 걸로 다투는 중이었다. 유치해서 더는 못 들어 주겠다. 버들이 방문을 열고선 고개를 내밀었다.
“나이를 어디로 먹은 거야?”
제 형들을 버들이 따끔하게 나무랐다.
“그렇게 싸울 거면 둘 다 집에서 나가!”
겨울이 눈을 끔뻑거리다가 정신을 차렸다.
“저 싸가지 없는 놈이. 너 이리 와!”
형들이 쳐들어오기 전에 버들이 냉큼 문을 잠갔다.
여러 이유들로 울적하게 잠자리에 든 버들이 침대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몇 시나 되었을까. 여전히 바깥은 캄캄했다. 뜨이지 않는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린 버들의 표정이 멍하다. 베개 밑을 뒤져 핸드폰을 꺼냈다. 빨간색 불빛이 깜빡거리며 부재중 통화가 들어와 있음을 알렸다. 빨리 문 열라며 제 형들에게서 걸려 온 전화인 줄 알았다. 액정을 밝혔을 때, 잠이 홀딱 깨는 기분이 들었다. 황정우. 뜻밖의 이름에 전화가 걸려 온 시간부터 확인했다. 지금으로부터 두 시간 전이다.
잠을 자는 건 아니었고, 그저 눈만 감고 있을 뿐이었다.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30분 전에 급한 업무로 임원진과 통화를 했었기에 인상부터 써졌다. 내버려 두니 전화는 알아서 끊겼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전화는 재차 다시 울렸다. 다섯 번째가 되어서야 황 대표가 핸드폰 액정을 확인했다. 무심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다. 액정에 뜬 버들의 이름을 발견하면서 황 대표의 인상이 좀 더 짙어졌다. 이제껏 걸려 온 전화가 전부 버들이 걸어온 거란 걸 뒤늦게 알아차리고 욕을 내뱉었다. 자세를 고쳐 앉았을 때 전화가 뚝 끊겼다. 여섯 번째 전화가 걸려 오기 전 황 대표가 먼저 버들의 번호를 눌렀다.
-대표님.
버들의 잠긴 목소리에 황 대표의 표정이 나른해졌다.
-바빠요?
전화를 바로 받지 못한 핑계를 떠올리려던 참이었다.
-제가 전화 여러 번 했는데. 대표님 귀찮게 했을까 봐…….
황 대표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정우야. 집에 오면, 네가 안 보였으면 좋겠어.」
무미건조한 삶이었다. 내가 잘났으니까 그만이라는, 성격 자체가 그따위로 생겨 먹어서 좌절감 같은 것도 모르고 살았다. 버들을 알고 나서 새롭게 배우게 되는 감정들이 있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외로움이었다.
“버들아. 어제 바빴어?”
-아. 조금. 여기저기 다니느라.
“그랬어?”
-시간이 너무 늦어서 대표님 만나러 못 갔어요.
새벽 두 시경이었다.
-황 대표님.
“응.”
-지금 제가 갈까요?
“……나한테 온다고?”
-조금만 기다리고 계세요. 제가 금방 갈게요.
뭘 더 들으려고 하지 않고 버들이 전화부터 끊었다. 양치와 세수를 하는 걸로 외출 준비를 끝냈다. 산발이 된 머리가 걸리지만 다시 감을 시간이 아깝다. 그럴 시간을 아껴 빨리 황 대표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 택시가 바로 잡혀야 할 텐데. 마당을 가로 질러 간 버들이 대문을 열었다. 동시에 화들짝 놀라 주저앉아 버렸다. 황 대표가 집 앞에 서 있었다.
“대표님.”
주저앉은 버들을 황 대표가 묵묵히 일으켜 세웠다.
“왜 여기에 계세요?”
“……그냥.”
황 대표에게 부재중 전화가 걸려 왔던 시각은 두 시간 전이었다. 못해도 여기서 두 시간 계셨다는 뜻일까?
황 대표를 버들이 안았다.
“왔으면 왔다고 말을 하지.”
“…….”
“만약에 제가 자다가 안 깨고, 전화가 온 줄도 몰랐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셨어요?”
“뭘 어떻게 해.”
“계속 여기에 계셨을 거예요?”
“……집에 가자.”
황 대표의 집에 들어서자, 버들이 주인처럼 익숙하게 누비고 다녔다. 와인이 많이 비네. 채워졌다가 비워졌다가 한다지만. 뭔가 깊게 생각에 빠지려는데 욕실에서 황 대표가 나왔다.
성인 남자 둘이서 야심한 밤, 골라 앉은 곳이 식탁이다. 오른손을 버들에게 내맡긴 채 황 대표가 턱을 괴었다. 눈빛이 나른하다. 바짝 집중해 있는 버들의 옆얼굴이 말갛다. 황 대표의 손을 조물조물 만지면서 버들이 올바르게 젓가락을 잡는 방법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렇게 날이 샜다. 식구들이 기상한다는 시간보다 더 이르게 황 대표가 버들을 집까지 바래다줬다.
“이따가 봬요.”
황 대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버들이 다시 황 대표의 집을 찾았을 땐 점심을 넘긴 후였다. 그때 황 대표는 셔츠를 입던 중이었다. 무작정 버들을 안아 든 황 대표가 소파로 향했다. 황 대표의 무릎에 앉아 있던 버들이 슬쩍 눈치를 봤다. 제대로 단추를 잠그지 않아 셔츠가 벌어져 그 틈으로 황 대표의 몸이 드러났다.
“대표님. 수영 갔다 온 지 얼마 안 됐죠?”
“……어떻게 알았어?”
“수영하신 날에는 여기랑 여기. 딱딱해져요.”
여기랑 여기……. 황 대표의 옆구리 근육과 가슴 위쪽을 버들이 손끝으로 스치듯 만졌다. 둘 다 입을 다물어 버리자 분위기가 은밀해졌다. 발그레한 볼로 버들이 적극적이다. 황 대표 쪽으로 고개를 숙인 버들이 목덜미를 애무했다. 어설펐다. 어설펐지만, 살갗에 뭉근하게 비벼지는 버들의 혀끝은 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촉촉한 마찰음에 눈앞이 아득해지기 직전이다. 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지 버들의 입술이 황 대표의 귓불을 물었다. 귀는 황 대표의 성감대였고, 둘 다 남자였다. 버들이 먼저 굳어 버렸다. 내색하지 않고 황 대표가 버들을 욕실까지 안아서 데려다준 뒤 문까지 닫아 줬다.
황 대표의 손에서 커다란 사과가 조그맣게 깎이더니, 역시나 한 조각만 살아남았다. 그걸 황 대표가 버들에게 건넸다. 버들이 참고 있던 숨을 한꺼번에 내쉬었다. 과도를 저만치 치워 버리고 황 대표의 손을 꼼꼼히 살폈다. 다칠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모르겠다.
버들의 수다를 듣다가, 황 대표가 보는 책을 함께 읽다가, 소파에 누워 잠이 들었다. 황 대표가 먼저 잠에서 깼다. 제 목을 감고 있는 버들의 손을 살살 풀었다. 기온이 부쩍 높아졌다. 에어컨을 작동시키기 위해 몸을 일으키자 버들도 함께 꼼지락거렸다. 황 대표의 고개가 아래로 향했다. 잠결일 텐데……. 저가 어디로 가 버릴 줄 알았는지 버들이 옷깃을 쥐었다. 있는 힘껏. 손 마디마디가 하얗게 불거질 정도로.
불안해하고 있는 버들의 속이 뚜렷하게 읽히고 보였다. 저를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겠다며, 평생 아무 데도 가지 않겠단 버들에게 반대로 확신을 주지 못했다. 그게 가슴을 답답하게 건드린다. 버들의 관자놀이에 황 대표가 입을 맞추었다. 이제는 너 예뻐해 주는 사람 만나라고 등을 떠밀지도 못하겠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버들의 관자놀이를 타고 입술로, 황 대표의 입맞춤이 조곤조곤 이어졌다.
“뭐 먹으러 나갈까?”
“어떤 거요?”
“너 먹고 싶은 거.”
퉁퉁 눈이 부은 버들을 보며 황 대표가 피식피식, 웃음을 흘렸다.
“대표님은 어떤 거 먹고 싶으세요?”
“난 신경 쓰지 말고.”
“대표님 가리는 거 많잖아요.”
“너 먹고 싶은 것만 생각하라니까.”
먹고 싶은 걸 버들이 떠올렸다.
“저랑 다르게 대표님은 별로 안 먹고 싶은 거면 어떡해요?”
“…….”
“네? 대표님. 어떡해요? 네?”
버들이 황 대표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대답을 종용했다.
“너 먹으면 나도 먹어.”
이날, 황 대표는 버들의 손을 잡고 따라간 곳에서 태어나 처음 팥빙수를 먹어 봤다.
“너 저거 룰 알고 보냐?”
겨울이 옆에 앉아 있는 버들을 툭 건드리며 물었다. 표정이 자못 심각하다.
“룰 모르면 저걸 어떻게 봐.”
“너 누구 팀 응원하는데.”
“나는 이기는 팀.”
“…….”
후반전으로도 승부가 나지 않아 연장전까지 이어진 축구 경기가 끝이 났다. 이기는 팀을 응원한다는 버들은 어떤 결과에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 빈 맥주 캔을 찌그러뜨리며 겨울이 제 막냇동생을 힐끔거렸다.
“누구한테 문자해?”
“형수님.”
“확실해?”
“응.”
“어디 봐. 뭐라고 문자하는데?”
버들이 겨울의 눈앞에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둘러대는 말인 줄 알았더니 확실히 형수님이다. 겨울이 헛기침을 했다.
“형이 핸드폰 봐도 돼?”
“내 거?”
“응.”
“뭐 볼 거 없어.”
“속도 빨라지게 해 줄게.”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버들의 핸드폰을 겨울이 손에 쥐었다. 어. 어. 밖에 봐 봐 밖에. 큰일이 난 것처럼 긴급한 말투로 버들의 정신을 다른 곳에 팔리게 한 뒤 저장 목록에 들어가 황 대표의 번호부터 찾았다. 황정우. 지극히 담백하게 저장되어 있었다. 다른 형제들을 비롯해 제 이름 역시 유겨울, 담백했다. ……이것들이. 서로 짰나?
“눈을 왜 그렇게 뜨냐.”
“왜. 형 눈이 어때서 그래.”
겨울의 눈이 가느스름하다.
“가자미 같아. 좋게 눈 떠.”
제 핸드폰을 도로 받아 가며 버들이 겨울의 허벅지를 퍽, 내려쳤다. 며칠 전 황 대표에게도 속도 빨라지게 해 주겠다며 사기 쳐 핸드폰을 가져가 확인했던 적이 있다. 유버들. 단순히 이름 석 자로 버들의 번호가 저장되어 있는 것에 가슴을 쓸어내렸건만.
“황 대표는 오늘 뭐 할까? 전화해 볼까?”
“……아마 바쁘실걸.”
“네가 어떻게 알아.”
“…….”
예전에는 습관처럼 황 대표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더니. 지금은 그런 게 일절 없다. 나를 거치지 않고도 이제 알 수 있다, 이건가?
“너…….”
“응?”
황 대표를 언급해서 그런가. 버들이 움칠거렸다.
“내일 한의원 가야 되는 거 잊지 마.”
“알아. 나도.”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를 피해 버리는 버들을 잡지 않았다. 군대까지 함께 다녀온 것으로 모자라 사업까지 함께하고 있는 오래된 친구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곱게 키운 막냇동생 사이에서 기묘하게 흐르는 기류를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할 나름이다. 모르는 척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뜯어 말려야 하는 건지. 남녀 사이였다면 답을 내리기 훨씬 쉬웠을 문제였을까?
한숨이 샌다.
나한테 감정이나 들키지 말든가. 나보고 어쩌라고.
“……이 원수 같은 것들.”
무인도에 처넣어 버릴까 보다.
버들이 머리 자르는데 황 대표가 동반했다. 바닥으로 잘려 나간 버들의 곱슬머리가 수북이 쌓인다. 아까워서 주워 담아서 오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아. 황 대표가 욕을 짓씹었다. 버려지는 머리카락이 문제가 아니었다. 가느다랗고 뽀얀 버들의 뒷목이 너무 잘 보여서 짜증이 났다.
“영화 보러 갈래?”
커플이니까 커플 전용 좌석에 앉았고, 영화관을 통째로 빌렸으니 관람객은 딱 둘뿐이었다. “제가 대표님이랑 영화 보고 싶어 했던 거, 어떻게 아셨어요?” 기쁜 어조로 수다 떨던 버들이 영화 시작하면서 스크린만 바라봤다. 괜히 갈증이 나는 것 같다. 깜깜한 데다 보는 사람도 없건만, 망설여지게 된다. 버들의 어깨를 감싸고 싶은데 번번이 실패했다.
“영화 재미없어요?”
“아니.”
나중에 가선 버들이 영화에 푹 빠져 버려 그거 방해할까 봐 손끝도 건드리지 못했다.
시골로 가는 길목에서 아무 데서나 핸들을 꺾어 나오는 곳을 산책했다. 새로운 곳에서. 둘이 함께. 시간을 공유한다는 게 특별한 순간처럼 다가왔다. 밟히는 흙이 사각거린다. 중반쯤 걷다가 서둘러 차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먹구름이 잔뜩 끼어 흐렸던 하늘에서 꽤 굵직한 빗줄기가 떨어졌다. 황 대표가 큰 손으로 버들의 머리 위를 막아 줬다.
번개가 쳤다. 산장을 테마로 꾸며진 카페가 몇 개 보였는데 둘 다 그쪽으론 관심이 없었다. 퍼붓는 비 때문에 바깥이 보이지 않았다.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키스했다. 손을 꼭 잡고 있는 채였다. 차를 두드리며 쉴 새 없이 떨어지고 있는 빗줄기보다 제 심장이 더 요란스러울 거라고 버들은 확신했다. 흘러가는 시간을 내버려 뒀다.
“대표님?”
뿌옇게 습기가 어린 창문에 의미 없이 선을 긋던 버들이 허리를 세웠다. 귓가에 색색, 고른 숨소리가 닿는다. 어느 틈에 잠이 든 황 대표의 얼굴이 제 어깨에 툭, 기대어 왔다. 버들의 표정이 마치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환해졌다. 잡고 있는 황 대표의 손은 저가 물어서 생긴 흉터가 있는 쪽이었다. 정확히 손등의 그 위치에 버들이 정성껏 입을 맞추었다.
소나기였는지 시골에 도착했을 즈음 다행히 빗줄기가 멎었다.
“다녀올게요.”
손을 흔들며 인사 후 버들이 제 스승님 댁으로 들어갔다. 펼쳤던 책을 금방 덮어 버린 황 대표가 무슨 생각에선지 앞쪽으로 조금 더 차를 이동시켰다. 대문이 살짝 열려져 있어 버들의 모습이 보였다. 먹구름이 모두 걷혀 햇볕이 내리쬐기 시작했다. 곧 매미가 우는 소리도 들을 수 있겠다.
여름이 코앞이다.
황 대표의 시선이 계속 버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스승이 하는 말을 주의 깊게 듣던 버들이 턱을 주억거렸다. 눈빛이 진지하다. 그동안의 수업은 굳어 버린 손을 푸는 데 초점이 맞혀져 있었지만, 오늘부터는 본격적으로 조각을 할 수 있을 거라며 버들이 기대를 했었다.
스승이 버들에게 내민 걸 보고 황 대표가 인상을 썼다. 움직이기 거추장스러운지 걸치고 있는 남방을 벗고, 버들이 반팔 차림이 됐다. 손목이 가느다랗다. ……내 눈에만 연약해 보이나. 스승이 내민 망치가 무게가 나갈 것 같은데 그걸 쥔 버들은 막상 아무렇지 않아 보인다. 핸들에 엎드려 누운 황 대표가 나른한 눈길로 계속 버들을 감상했다.
심장이 약하게 태어났고 그로 인해 활동하는 게 제약될 수밖에 없던 환경에서 자라났다. 법석거리며 뛰어노는 제 형들이나 또래들이 부러웠을 텐데. 버들의 성정은 그걸 비관하지 않았다. 대신 제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걸 찾아냈고, 열심히 몰두했다. 버들에게 조각이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까 상처투성이의 버들의 손이 어느 무엇보다 더 소중해진다.
수업을 끝낸 버들의 손끝에서 물이 뚝뚝 흐른다. 비누 향이 번진다. 버들의 턱 끝을 올려 진득하게 입을 맞춘 황 대표가 속삭였다.
“스폰서 필요하지 않아? 작품 하는 데.”
“…….”
“내가 네 스폰서 해도 돼?”
통통하게 부어 번들거리는 입술로 버들이 종알거렸다.
“그거 야한 말 아니에요?”
“…….”
“대표님 그렇게 안 봤는데.”
“……스폰서 하고 싶단 말이 왜 야한 말이야.”
저만치 꼴통이 먼저 가 버렸다.
“유버들! 스폰서 하고 싶단 말이 왜 야한 말이냐니까. 뭐 봤어?”
비가 내린 탓에 물웅덩이가 여러 개 생겨났다. 걷는 게 쉽지 않은 황 대표와 달리 버들은 거침없다. 버들을 따라 황 대표가 물웅덩이를 피하는 대신 밟고 지나쳤다. 옷이 젖는 느낌이 영 불쾌하기만 하다.
“나 밟은 데로만 걸어.”
버들의 손목을 잡은 황 대표가 긴 다리로 앞서 나갔다. 그것도 잠깐이다. 황 대표가 우뚝 멈춰 섰다.
“대표님. 왜요?”
“……개구리.”
황 대표의 중얼거림에 버들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개구리? 개구리 무서워하는 황 대표를 위해 버들이 앞으로 나섰다가 똑같이 굳어 버렸다. 같이 살 때 종종 집에 나타났던 개구리는 기껏해야 엄지손가락 반만 했었다. 그런데 지금 길을 가로 막고 있는 개구리는…….
누가 봐도 양서류다. 엄청나게 컸다. 게다가 무늬와 색깔이 초록으로 짙어 위협적이기까지 했다. 팽팽히 대치 중이었다. 볼록 튀어나온 개구리의 볼이 움직이자 버들의 팔에 소름이 쭈뼛 섰다. 바라본 버들의 얼굴이 하얗다. 겁에 질린 제 어린 남자 친구를 옆구리에 번쩍 안아 든 황 대표가 그 자리를 벗어났다.
“무인도에 갔을 때…….”
개구리가 안 보이고 나서야 버들이 정신을 차렸다.
“개구리 나오면 그건 내가 해결해 줄게.”
“이렇게 도망쳐서요?”
“어쨌든.”
버들의 큰 눈이 빠르게 깜박였다.
“대표님, 무인도 가실 거예요?”
“……너는.”
“안 가요. 무인도.”
선한 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황 대표의 눈매가 깊어졌다.
“내가 무인도 사 주면 갈래?”
“아니요.”
“……왜.”
“대표님 무인도에 안 가실 거잖아요.”
요트 타고 무인도에 가려면, 너랑 요트 타고 무인도에 가고 싶다고 한 치의 벗어남 없이 있는 그대로 솔직해야 가능할 것 같다. 황 대표가 말없이 버들의 동그란 뒤통수를 바라봤다. 가슴이 꽉 막힌다. 예전에는 대체 어떤 생각에서 버들의 저 감정들이 쉽다고 가볍게 멸시할 수 있었을까. 황 대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좋아하는데. 미칠 정도로 네가 좋은데 그걸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사랑해. 뭐, 이런 말 기대해요? 행여나 너 좋아한단 말 꺼내는 건 그냥 너랑 한 번 자 보겠단 뜻이고. 그럴 일은 평생 없을 거야. 내가 머리에 총 맞지 않는 한.」
암담하다.
“대표님.”
잿빛이었던 황 대표의 눈동자에 저를 부르는 버들을 담는 순간 다정함이 비쳤다.
“재복이 왔어요.”
동네를 산책 후 새로 지은 집에서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고 해서 시간을 보내고 있던 터였다. 울타리 틈새로 재복이가 얼굴을 집어넣었다. 진흙탕에 굴렀는지 엉망인 꼬락서니로 한껏 웃고 있는 표정이다. 미리 챙겨 놓은 간식을 주고 버들이 돌아왔다.
“근데 이름이 왜 재복이에요? 백구가 훨씬 잘 어울려요.”
누굴 닮았는지 호기심 가득한 성격이라 하필 벌집을 건드려 발과 얼굴이 퉁퉁 부어서 돌아다녔던 적이 있다. 아플 법도 한데 꼬리 살랑살랑 흔들며 뛰어다니는 게 역시나 또 누굴 닮아서 저러나, 하며 계속해서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시골 생활에 행운 가득하라고 지어 준 이름이었다. 있을 재에 복 복 자. 재복이 이름 뜻을 알게 된 버들이 콧잔등을 찌푸렸다.
“진짜 이상해요.”
얼마짜리 이름인 줄 알고 이상하대.
“진짜 이름 짓는 전문가가 지어 준 이름 맞아요?”
“그렇다니까. 감자랑 금동이 주인이 소개시켜 줬어.”
“감자랑 금동이도 이름 짓는 전문가가 지어 준 이름이래요?”
“응.”
……둘 다 사기당한 거 아니야?
“혹시 돈 주고 지은 이름이에요?”
얼마짜리 이름인지 밝히려던 때, 차가 한 대 들어왔다. 건축가였다.
“대표님. 죄송합니다. 길이 막혀 늦었습니다.”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황 대표가 지시한 걸 건축가가 보고했다. 잘 자라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쪽은 브로콜리, 저쪽은 버섯, 새로 심어진 나무는 감과 사과……. 버섯 같은 경우는 온도를 유지시키는 게 까다로워서 혹시 섭취 목적으로 재배하시는 거라면 차라리 사서 먹는 게 나으실 겁니다.
「대표님. 우리 여기서 그냥 평생 살래요?」
말은 건축가가 하고 있는데 버들은 황 대표의 얼굴을 쳐다볼 뿐이었다.
「제가 계획을 세워 봤는데요. 텃밭에 브로콜리 따 먹고, 버섯 캐서 먹고, 감이랑 사과 따 먹고.」
손으로 쓸자 가슴에 난 수술 흉터 자국이 만져진다. 피부가 고르지 않고 울퉁불퉁하다. 추웠던 겨울이 떠올라 버들이 엎드려 울었다. 울음이 멎고 진정이 되자마자 버들이 황 대표를 만나러 갔다.
“대표님.”
문을 열고 버들이 들어오자 황 대표가 놀랐다.
“오기 전에 연락하랬잖아.”
“왜요? 연락 없이 잘만 왔었는데.”
“데리러 간다고 그랬잖아. 어떻게 왔어?”
“택시 탔어요.”
황 대표의 허리를 안으며 버들이 품을 파고들었다.
“연락해도 대표님 운전 못 하셨을 것 같은데요?”
황 대표에게서 은은하게 와인 냄새가 묻어났다. 눈이 마주치자 버들이 웃었다. 도톰하게 솟은 버들의 눈 아래 살이 달콤하게 보인다. 속눈썹 근처에 황 대표가 입을 맞추자 와인 냄새가 좀 더 진해졌다. 분위기가 참 근사한 남자다.
“저도 와인 마시고 싶어요.”
버들을 안아서 주방까지 데려갔다. 식탁에 와인 잔과 와인이 꺼내져 있다.
“사과 깎아 줄게.”
버들이 소리 내어 웃었다.
“저 술…….”
“안 돼.”
단호하다. 버들이 황 대표의 눈, 코, 입술을 차례대로 바라봤다. 이게 다 꿈이면 어떡하지, 싶다.
“그럼 저 그냥 물 주세요.”
사과와 함께 황 대표가 물을 내왔다.
“이거.”
황 대표가 자리에 앉자 버들이 일어나서 냉장고를 열었다. 한약 박스가 그대로다.
“이거 뭐예요? 여기 제 이름 적혀져 있잖아요. 제 거 맞죠?”
전에 물어봤을 때도 모르는 척하더니, 지금도 황 대표가 모르는 척하고 있다. 버들이 한약 박스를 꺼냈다. 무게가 가볍다. 박스 안에 든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거 진짜 뭐예요?”
당황한 황 대표가 버들의 손에서 한약 박스를 가져갔다. 버들에게 먹이려고 지어 왔던 살찌는 한약이다. 그러니까 아주 오래전에. 버들이 뉴욕으로 떠났던 날. 안에 든 한약들은 유통기한이 지나가자 부풀어 올라 버렸지만 박스는 버릴 수가 없어 그대로 냉장고에 뒀다. 못 버린 이유는, 겉에 버들이 이름이 적혀져 있어서. 소음 하나 없이 적막한 집에 오롯하게 혼자 남겨진 기분이 떠올랐다.
“제 거 맞죠?”
“……어.”
어쩔 수 없이 인정했다.
“저 주려고 한약 지었어요?”
“먹으면 살찐다고 해서.”
“한약은 다 어디 갔어요?”
“버렸어. 오래돼서.”
“……언제 지었는데요?”
머뭇거리던 황 대표가 지나가는 투로 날짜를 말했다. 버들의 입술이 미약하게 떨렸다. 뉴욕으로 떠나고 일주일 정도 뒤다. 일주일간, 이 집에 안 왔던 저를 황 대표님은 기다리고 있었을까? 다시 올 줄 알고 한약을 지었던 걸까?
“대표님.”
버들이 황 대표를 안았다.
“전에도 말했지만, 저 이제 아무 데도 안 가요.”
“…….”
“평생 대표님 곁에 있을 거예요.”
“…….”
황 대표가 버들을 마주 안았다. 여린 몸이 한 품에 들어오고도 남는다. 그게 참 애달프다. 버들은 저한테 끊임없이 확신을 심어 주고 있는 반면, 저는 제자리에 멈춰 서 있는 것 같다.
“버들아.”
“네.”
“너 시간 괜찮은 날…… 전시회 보러 갈까?”
“대표님이랑 둘이서요?”
“응.”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버들을 내려다보는데 순간 목이 막혔다.
궁에 이어서 두 번째 데이트를 앞둔 버들이 잔뜩 들떴다. 이번만큼은 제대로 리드해야 돼. 온갖 전시회 일정들을 버들이 꿰기 시작했다. 앉으나 서나 그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잠깐 기다려.”
“응.”
한의원에 들렀다가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갓길에 차를 세운 겨울이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어떤 전시회가 괜찮을까. 핸드폰으로 검색하던 버들이 클랙슨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황 대표님 차다. 차 기종은 물론 번호까지 똑같았다. 근처 건물의 지하 주차장으로 향하는 걸 보고 버들이 안전벨트를 풀었다. 어디 가냐고 묻는 겨울에게 대답도 잘 못 해 줄 정도로 서둘렀다. 건물로 들어선 후 황 대표에게 전화를 했는데 부재중 통화로 넘어간다.
“8층?”
엘리베이터가 8층에 멈춰 있는 걸 발견했다. 버들이 무작정 8층으로 올라갔다. 사람들은 많았는데, 다들 정숙했다. 병원이라면 으레 느낄 수 있는 분위기였다. 이런 데에 정말로 황 대표님이 있을까? 아닐 것 같다. 그렇지만……. 혹시나 싶었는지 버들이 부지런히 두리번거렸다. 화장실에서 나오던 황 대표와 버들이 마주쳤다.
“버들아.”
“대표님.”
황 대표는 눈에 띄게 당황스러워했고, 버들은 반가워했다.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너는.”
“저는 대표님 따라왔어요. 저 여기 근처 편의점 앞에 있었거든요.”
“……여기 근처 편의점 앞을 왜 왔어.”
“다니는 한의원이 여기에 있어요.”
“…….”
막힘없이 버들이 대답했다.
“대표님. 제가 전시회 일정을 뽑아 봤는데…….”
“버들아. 내가 지금 여기서 아는 사람을 좀 만나야 돼.”
어떻게든 버들을 밖으로 내보내려고 황 대표가 티 나지 않게 진을 쓰는 중이었다.
“황정우 님.”
황 대표의 이름이 불렸다.
“진료실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버들이 황 대표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진료실에 왜 들어가요?”
“…….”
물어도 황 대표가 대답이 없다. 버들이 그제야 여기가 어디인지 자세히 알아차렸다. 크진 않지만 건물 전체가 병원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어떤 층은 불안 장애 클리닉. 어떤 층은 우울증 클리닉……. 황 대표가 있는 8층은 알코올 중독 클리닉이었다. 버들의 눈가가 그대로 일그러졌다.
황 대표의 손목을 잡고서 버들이 비상구 계단으로 데려갔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뛴다.
“대표님. 방금 저한테 거짓말하신 거죠.”
“…….”
“만나러 올 사람이 누군데요? 여기 진료 보러 오신 거죠?”
터질 것처럼 심장이 뛰는 만큼 버들의 목소리가 달달 떨렸다. 몸에서 열이 나는 것 같다. 황 대표의 침묵이 길다. 누군가 속 시원하게 설명해 줬으면 좋겠다.
“저희 형은 대표님이 왜 여기에 있는지 알아요?”
버들이 핸드폰을 꺼냈다. 유 대표에게 전화를 걸려는 버들을 황 대표가 막았다.
“몰라. 아무도.”
버들의 호흡이 엉망이 됐다.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다 말해요.”
아무한테도 알리기 싫어 일부러 주치의가 있는 병원이 아닌, 멀리 떨어진 클리닉을 골라 다니는 중이었건만. 저가 왜 여기에 있는지 버들이 알아보려고 작정하면 못 알아볼 것도 없을 거다. 이미 들켜 버렸기에 더 이상 침묵은 답이 되지 않을 거란 판단이 선다. 황 대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잠을 잘 못 잤어.”
황 대표의 말이 느리게 이어졌다. 설명은 단조로웠다.
버들이 탁한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말을 들은 건지, 머릿속이 굳어 버린 느낌이다. 잠을 잘 못 잤고. 그래서 먹은 수면제가 어느 정도 지나니 탈을 일으켰고. 생활을 하려면 잠깐이나마 눈을 붙이는 게 필요했기에…….
뉴욕 제 병실에서 잠이 들었던 황 대표가 시야에 아른아른 겹쳐졌다. 빨리 눈치 못 챈 게 원망스럽다. 원래도 와인을 잘 마셔서 전혀 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불면증이라니. 평소처럼 와인을 즐겼던 게 아니라, 조금이라도 잠에 들기 위해서 의존했을 거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버들이 숨을 크게 들이켰다.
“잠은 언제부터 못 잤는데요?”
“버들아. 이거 심각한 거 아니야.”
“언제부터 잠 못 잤냐고 묻잖아요.”
“여기서 나가자. 배고프지 않아?”
황 대표에게 잡힌 팔을 버들이 뿌리쳤다.
“나 없어도 잘 먹고 잘 산다고, 대표님 입으로 말하셨어요.”
“…….”
“이게 잘 먹고 잘 산 거예요?”
냉장고에 초콜릿도 한약 박스도 버리지 못해 놓고선. 겉으로 멀쩡하니까 진짜로 잘 먹고 잘 산 줄 알았다. 그리고 잘 먹고 잘 살았길 바랐다. 버들의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버들아.”
떨리는 아랫입술을 비틀어 물었다가 놓았다.
“헤어져요.”
황 대표의 목울대가 일렁거렸다. 방금 전 내뱉은 버들의 말에 심장이 쿵 떨어져 나뒹굴었다.
“내 말 안 들려요?”
“……들려.”
버들의 용기로 연애를 하게 되면서, 떠올리면 좋은 기억들이 한꺼번에 선물처럼 불어났다. 너 예뻐해 주는 사람 만나라고 먼저 등 돌릴 순 없게 됐지만 떠난다는 너를 순순히 보내야 한다는 걸 안다. 그게 너를 위해서 훨씬 나은 길이란 걸 예전부터 받아들였다. 절망이 찾아든다. 누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 쉬는 게 버겁다.
“헤어져.”
새빨개진 얼굴로 버들이 황 대표를 노려봤다.
“응.”
헤어지잔 제 말에 황 대표가 응, 긍정한 순간 버들이 눈을 감았다. 속눈썹에 밀려 굵은 눈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헤어지잔 제 말에 어떻게 헤어지겠다고 할 수 있는지……. 서글픔에 뒤덮인 버들이 울지 않으려고 억세게 눈가를 문질러 닦았다.
“데려다줄게. 오늘만. 헤어져도 허락해 줘.”
연락하면 데리러 가겠단 말을 지키고 싶었다. 그러려면 언제든지 운전할 수 있게 술의 의존도를 차차 낮춰야 했다. 버들이 아니었다면 알코올 클리닉을 손수 알아볼 일도 없었을 거다.
“나 없으면 잠도 못자는 게.”
버들이 황 대표를 밀치며 때렸다.
“매달려!”
“…….”
“너도 나 없으면 안 되잖아!”
“…….”
“내가 어떻게 매달리는지 봤잖아. 어떻게 하는지 알 거 아냐!”
“…….”
“매달려…….”
눈물이 계속해서 쏟아졌다. 뒤돌아선 버들이 계단으로 내려가 버렸다.
어쩌면 죽을지도 모르는 너를 뉴욕에서 마주했을 때. 수술을 끝낸 널 두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어야 했을 때. 얼마나 절박했는지 모르겠다. 무서웠다. 가슴을 후벼 팔 정도로 고통이 동반됐다. 안고 싶고. 입 맞추고 싶고. 너한테 쏟고 싶은 애정을 어떤 식으로든 참아 내야 했다. 나랑 있으면 네가 행복하지 않을 거 같아서.
그런데 내가, 이런 내가 너한테…… 매달려도 될까?
일층까지 다다른 버들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소란스레 계단을 울렸던 발소리가 함께 멎었다. 황 대표가 뒤에서 버들을 온 힘을 다해 껴안았다. 영원히 놓쳐 버릴까 조바심이 든다.
“버들아.”
너 없으면 안 된다.
네가 아니어도 안 된다.
뒤집힌 내 세상의 일상은 곱실거리는 구름 모양이 네 머리카락과 닮았다고 해서 힐긋 올려다본 하늘이 온통 너로 채워지곤 했다. 그런 주제에…….
“내가 전부 다…….”
맹목적인 네 애정에 자만하고. 괄시하고. 평생 네가 내 곁에 있을 거라고 오만을 떨어 댔었다. 그것도 모자라 다른 사람에게 너를 보내려고 단념까지 했었다. 그 모든 것을 포함해서, 버들아. 내가 전부 다…….
“……잘못했어.”
뉴욕에서부터 여태, 지금은 아니라고. 아니라고, 미뤄 두고 또 미뤄 뒀던 일이 있었다. 황 대표의 얼굴이 파묻힌 버들의 어깨가 흥건히 젖기 시작했다. 잘못했다고 매달리고 나서야 황 대표는 울 수 있었다.
황 대표가 아팠다. 근 나흘간. 고열이 전부 내리고 나서야 황 대표가 눈을 떴다. 온몸이 묵직하다. 뻐근한 손목을 확인하자 링거 바늘이 꽂혔던 자국이 있다. 더듬거려 만져 본 이마에는 열을 식혀 주는 시트가 붙여져 있었다. 제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어 버들이 새근거리며 잠들어 있었다. 씻은 지 얼마 안 됐는지 머리카락이 축축하다.
버들이 손에 쥐고 있는 물수건을 빼 내려놨다. 용서할 기회도, 곁에 설 기회도, 버들이 줬고, 거기에 매달렸다. 그로 인해서 버들이 불안해하면 안아 줄 자격이 생겼다. 다른 게 크리스마스 기적이 아니다. 버들의 몸을 안으려다가 멈칫했다. 땀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황 대표가 씻고 나왔다.
“대표님…….”
욕실 앞에서 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열은요?”
버들이 만질 수 있게 황 대표가 고개를 숙여 줬다.
“너는.”
“…….”
“아픈 데 없어?”
다정하게 묻는 황 대표의 목소리에 버들의 눈가가 금방 뜨거워졌다. 황 대표가 버들의 마른 몸을 껴안았다. 어둠이 밀려나면서 어슴푸레 새벽이 시작되는 중이었다. 살짝 열어 놓은 창문으로 맑은 바람이 들어온다. 새로 지은 집의 담벼락을 타고 여름이 되면 해바라기가 만발할 예정이었다. 반 발자국 떨어져 버들을 마주 봤다. 확실하게. 버들이 보여 줬던 애정에 응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버들아.”
“…….”
“씨앗은 네가 심었으니까…….”
“…….”
“꽃은 내가 피울게.”
“…….”
“최선을 다할 거야.”
이렇게 긴장한 황 대표의 모습을 처음 보는 것 같다. 마음에 들어찬 애정을 죄다 드러내며 손까지 떨고 있었다.
“버들아. 행복에 사무치도록 해 줄게. ……평생.”
낮게 울리는 목소리 톤과 눈빛 모든 게 정중했다.
“약속할게.”
뒤집힌 두 세상이 하나로 합쳐졌다. 그곳에서 오붓하게 단둘이 맞게 될 여름은 풀벌레 울음소리가 밤하늘을 수놓을 거고, 달큼한 향기를 뽐내며 포도가 익어 갈 것이다.
“사랑해.”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