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닿아서, 덮여서 (2)
병원 복도 공기가 유독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다. 버들의 기침 소리가 바로 사라지지 않고 주변을 메아리처럼 울린다. 갑작스럽게 치솟은 고열에 시달리는 중이라고 했다. 발이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겠다.
날이 바뀌고 병실 문이 열리는 기척에 황 대표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문고리를 잡고 버들이 가만히 멈춰 서 있다. 안 그래도 조막만 한 얼굴이 그새 더 작아져 점처럼 사라지게 생겼다. 앉아 있던 자리에서 황 대표가 일어났다. 촘촘하고 기다란 속눈썹 뒤에 감춰진 커다란 눈망울이 덧없이 순하다. 새벽부터 기침 소리가 잦아들더니 이제 좀 괜찮아진 모양이다. 얼굴 봤으니까 됐다. 황 대표가 돌아섰다. 저도 모르게 황 대표의 뒤를 따라가려고 두어 걸음 떼던 버들이 우뚝 멈췄다. 바닥에 그려진 황 대표의 그림자가 점점 작아져 가는 걸 보며 버들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다시 하루가 반복됐다. 황 대표는 버들의 뒤를 따라다니고, 버들은 황 대표를 기다렸다. 휴게실. 복도. 엘리베이터 앞. 도서관. 몇 안 되는 장소였다. 동선이 겹치면서 하루에 한 번 봤던 얼굴을 하루에 두 번, 세 번까지 보는 날도 더러 생겨났다. 오고 가는 대화는 없었고 서로를 향해 스치는 눈빛 또한 극히 드물었지만 버들은 충분히 떨렸다. 황 대표와 같은 시간과 장소에 함께 있을 수 있다니까. 그게 버들을 기쁘게 했다.
아침부터 도서관을 찾은 보람이 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 있던 버들이 눈높이에 맞춰 들고 있던 책을 슬그머니 내렸다. 힐긋 바라본 대각선 방향에 황 대표가 앉아 있었다. 빽빽하게 꽂힌 책에 둘러 싸여 있자 저절로 황 대표의 집이 떠오른다. 소파, 침대, 식탁……. 그리고 병원의 도서관 따위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더 근사한 책장까지.
버들의 책장이 느리게 넘어갔다. 그저 의도적인 움직임일 뿐이었다. 무슨 책을 꺼내 왔는지도 모르겠고, 내용이 뭔지 일절 관심이 없었다. 신경이란 온통 황 대표에게만 꽂혀 있었다. 버들이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현재 앉은 자리에선 궁금한 황 대표의 손등이 잘 보이지 않는다. 상처에 연고, 바르셨을까. 저가 놓고 간 연고를 아예 발견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어쩌면 버렸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연고 필요 없다고 다른 사람을 줘 버렸거나. 순식간에 여러 추측들이 떠올랐는데 그게 전부 다 사실일 거 같아 조마조마하다. 예쁜 황 대표의 손이 계속해서 예쁘길 바란다.
자리에서 일어난 버들이 움찔거렸다. 워낙 조용해서 뒤로 의자가 밀리는 소리가 상대적으로 컸다. 황 대표가 책을 덮었다. ……이제 가시는 건가? 축 처진 버들의 입꼬리에서 아쉬움이 뚝뚝 묻어났다. 책을 정리하는 황 대표의 너른 등짝에 홀려 있던 중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서둘러 제 책도 원래의 자리에 꽂아 넣은 뒤 버들이 모퉁이를 돌았다. 노린 건 아니었는데, 문 앞에서 부딪혔다. 대표님 먼저 나가시라고 버들이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문을 먼저 연 황 대표 역시 그대로 멈춰 있다.
“먼저 나가셔도 되는데…….”
버들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황 대표에게 고스란히 전달됐다. 아무리 기다려 봐도 황 대표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결국 쭈뼛거리면 버들이 먼저 발을 뗐다. 문을 잡고 있는 황 대표를 지나쳤다. 도서관은 지나치게 후덥지근하더니, 바깥은 지나치게 춥다. 발갛게 달아오른 버들의 볼은 단순히 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앞만 보며 걷던 버들이 코에 제 팔뚝을 파묻고선 킁킁거렸다. 심각한 얼굴로 버들의 고개가 연신 갸웃거려졌다. 병원 생활에 적응된 만큼 객관적인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 약냄새 나나? 신중하게 다시 냄새를 맡아보았지만, 역시 잘 모르겠다. 향수 같은 걸 좀 뿌려 볼까.
엘리베이터에서 버들이 내렸다. 제 병실을 향해 걷다 말고, 정원으로 방향을 틀었다.
“으…….”
찬바람에 몸이 저절로 부들부들 떨린다. 겨울은 겨울인가 보다. 연고를 놓았던 자리는 텅 비어 있다. 혹시나 다른 곳에 떨어졌을까 봐 버들이 벤치 밑을 들여다봤다. 없다. 황 대표님이 가져가신 거 맞을까? 아니면 어쩌지.
무심코 뒤를 돈 버들의 어깨가 흠칫거렸다. 황 대표가 정원에 들어와 있다. 운이 좋다. 병실에 가지 않길 잘했다. 오늘은 얼굴을 적어도 두 번이나 보는 날이 된다. 황 대표가 자리에 앉았다. 엉거주춤 서 있던 버들도 그제야 자리에 앉았다. 작게 부는 바람에도 가느다란 나뭇가지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버들이 재채기를 터트렸다. 동시에 인상을 찌푸린 황 대표의 목울대가 일렁거렸다. 한여름, 뜨거운 날씨 속에서조차 에어컨 바람을 못 이겨 제 배꼽을 만지작거리는 게 버들의 습관이었다. 걸치고 있는 겉옷은 얇고. 발가락은 다 드러내 놓고. 추위에 약한 버들에겐 겨울이 참 혹독할 거 같다.
버들의 고개가 황 대표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대표님. 있잖아요.”
입김이 뿌옇게 올라왔다.
“연고…….”
“있어.”
나지막하게 황 대표의 대답이 돌아왔다. 버들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제가 여기에 연고 놓고 갔는데, 아셨어요? 그 연고, 가져가신 거예요?”
“응.”
단조로운 한 마디에 안도가 퍼졌다.
“바르셔야 돼요, 연고.”
버들의 시선이 황 대표의 손등으로 떨어졌다. 가죽장갑을 껴서 상처를 눈으로 확인할 수 없었다.
“흉터 남지 않게 하려면…… 물 닿을 때면 잘 건조시켜야 하고요. 어, 연고도 틈틈이 바르는 게 중요해요.”
얄팍하더라도 저가 알고 있는 상처 관리 지식을 버들이 몽땅 띄엄띄엄 털어놨다. 그걸 끝으로 침묵이 유지됐다. 응, 한 마디를 기다리고 있는데 황 대표가 정원을 나가 버렸다. 버들이 턱 아래를 잠시 긁적거렸다. 황 대표가 없으니 또 연고를 가져가셨다고 하니 정원에 더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
그새 파래진 얼굴로 버들이 정원을 나섰다. 아예 사라지고 없을 줄 알았더니, 복도 중간쯤에서 황 대표의 뒷모습이 보였다. 제 병실과 딱 반대 방향이다. 어쩌지. 갈팡질팡하던 버들이 마음을 굳혔다. 사실은 아까부터 계속 아른거렸던 게 있었다. 애써 넘겨 버린다면 꼭 새벽에 다시 떠올라 잠들지 못할 게 뻔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복도에 버들의 발소리가 탁탁, 울렸다.
버들이 황 대표의 앞을 가로막았다. 황 대표가 내쉬는 한숨에 버들이 움츠러들었지만, 잠깐이다. 버들의 시야에 황 대표의 구두가 담겼다. 한쪽 끈이 곧 풀어질 것처럼 아슬아슬하다. 묶어 주려고 쪼그려 앉아 마자 황 대표에게 팔이 붙잡혀 버들이 억지로 일으켜 세워졌다. 황 대표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또 열이 오르면 어쩌려고. 빨리 병실에 들어가서 쉬든가 하지 따라와서 뭘 하려나 싶었다. 힘이 들어가기 전에 황 대표가 버들의 팔을 놓았다.
“끈 풀리려고 해서요.”
“내가 묶어.”
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끈을 묶으려면 장갑에서 손을 빼야 하는데 황 대표가 그러지 않았다. 버들이 힐끔힐끔 황 대표의 눈치를 봤다.
“계속 생각날 거 같아서요. 그리고 저, 끈 되게 잘 묶어요.”
다부지게 버들이 말했다. 확신을 줬다고 생각했는지 버들이 슬쩍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풀리기 직전이었던 황 대표의 구두끈을 새롭게 묶어 줬다. 예쁘장한 리본 모양이다. 만족스러운지 버들의 입가가 옅게 호선을 그렸다. 황 대표가 아래턱에 힘을 줬다. 기울여진 몸에 환자복이 붕 뜨면서 버들의 쇄골이 드러났다. 살이 빠질 대로 빠져 움푹 파여 있다.
버들이 고개를 들면서 눈이 마주쳤다. 까만 눈동자가 깊기도 하다. 그러면서 같이 마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아프다고 했던 버들의 말이 이해가 됐다.
수술만.
수술만 되면…….
서로 같은 생각을 했고, 길은 그렇게 두 갈래로 나뉘어졌다.
황 대표가 버들의 병실 앞에 다다랐다. 문을 열지 말지 생각 중이다. 그때였다. 병실 문이 확 열렸다. 문이 도로 튕겨져 나올 정도로 세찬 힘이었다. 눈앞에 버들의 말간 얼굴이 나타났다.
“저희 형 보러 오셨죠? 잠깐 주치의 만나러 갔거든요.”
이미 이야기를 다 전달받았단 듯, 버들이 나불거렸다.
“기다리면 올 거예요.”
황 대표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들어와서 기다리실래요? 따뜻해요.”
아침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황 대표의 어깨가 젖은 걸 보며 버들이 한쪽으로 몸을 비켰다.
“저도 검사 뭐 받을 거 있어서 지금 나가 봐야 돼요. 안에서 기다리세요.”
조심히 권해 봤지만, 거절당했다. 뒤돌아서서 가 버리는 황 대표를 보며 버들이 비스듬히 얼굴을 기울였다. 이러나저러나 참 쉽지 않은 사람이다. 검사를 받으러 가면서 어딘가에 황 대표가 있진 않을까 두리번거리느라 버들이 무척이나 산만했다.
겨울과 황 대표가 병원을 빠져나갔다. 다른 곳을 둘러볼 필요도 없이 검사 후 버들이 곧장 제 병실로 향했다. 오늘은 얼굴 한 번 본 걸로 끝인 건가? 침대 끝에 걸터앉은 버들의 어깨가 서운함으로 인해 처졌다.
아. 진짜 나는 왜 이러지? 좋아하는데, 안 좋아하는 척은 어떻게 하는 거야.
뭐 하나 쉬운 게 없다. 높다랗게 벽까지 세워 가며 다짐하면 뭐 하나. 황 대표가 보이면 그걸로 끝인걸. 말 걸고 싶고, 다가가고 싶고, 백 번 다시 태어나도 백 번 황 대표에게 반해 버릴 제 인생이 버젓이 느껴진다. 오로지 황 대표에 한해서 낯 뜨거운 스토커 기질이 발휘되는 게 스스로도 영 곤란하다. 이러라고 제 식구들이 저 하고 싶은 거 다 하라며 부추겨 줬던 게 아닐 텐데. 어차피 만나면 또 넋 놓고 쳐다볼 거면서 이런 뉘우침 같은 것도 변태 같은가. 버들이 가만가만 눈을 깜박였다. 변태도 하고, 스토커도 하지 뭐. 새삼스럽지도 않다. 벌러덩 누워 버린 버들이 깊게 호흡했다.
겨울이 욕했다. 꼭두새벽부터 일어난 버들이 현재는 세상에서 제일 바빠 보인다. 거품 내어 목욕하고. 세심하게 로션 바르고. 온갖 부산이란 부산은 다 떨고 자빠졌다. 오랜만에 만나는 거라 극진한 환대를 바라고 있던 겨울이 저를 홀대하는 버들에게 대놓고 섭섭함을 표했다. 그러면 뭐 하나. 싸가지 없는 새끼가 본 척도 하지 않는다. 민망함을 감추고자 겨울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버들.”
“말 시키지 말아 봐.”
새끼. 진짜. 장가는 못 보내겠다. 옆구리에 끼고 살아야지.
“형. 겨울이 형.”
“말 시키지 말라면서 너는 왜 나한테 말 시키는데?”
“이게 나아? 저게 나아?”
“다 똑같은 거 아니냐?”
“달라. 잘 보면.”
무늬부터 바느질까지 다 똑같은 환자복을 두고 버들이 고민에 빠졌다. 기가 차서 겨울이 코웃음을 쳤다.
“이게 좀 더 깔끔한가?”
버들이 준비를 끝냈다. 그러더니 갑자기 동전 뒤집듯 얌전 떨며 앉아 있었다. 아. 진짜 어이가 없어서.
“너 이리 와 봐.”
“왜.”
“이리 와 보라고.”
“왜. 이유를 대.”
결국 겨울이 버들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너 머리 좀 이상한데?”
“아 진짜?”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 지적을 받자 버들이 당황했다.
“형이 만져 줄게. 이리 와.”
순순히 버들이 고개를 기울였다. 겨울이 손끝에 침을 발라서 들뜬 버들의 앞머리를 눌러 줬다. 은혜도 모르고 버들이 냅다 짜증을 냈다.
“형. 왜 이래?”
“뭘 왜 이래. 고맙다고 해야지.”
“나한테 왜 침 바르고 난리야.”
“야. 인마. 아주 조금 발랐다.”
“조금도 바르지 마.”
기가 찬다.
“너는 오늘부터 절교야.”
“나도 절교야. 형이랑은.”
아홉 살 많은 놈이나 적은 놈이나 등 돌리고 앉아 꿍얼거렸다. 정오에 맞춰 점심과 약을 챙겨 먹은 뒤 버들이 시계를 확인했다. 그로부터 두 시간이 더 흘렀다. 아쉬운 놈이 먼저 굽히게 되어 있다. 하염없이 문만 바라보고 있던 버들이 겨울의 옷깃을 잡고 흔들었다.
“형. 겨울이 형.”
“말 걸지 마라. 나는 의 상한 형제랑은 대화도 안 해.”
“전화 좀 해 봐. 응?”
“누구한테.”
“두 시에 오신다고 안 그랬어?”
버들의 말에 속이 슬쩍 뒤집혔다.
“지금 두 시 십 분이잖아.”
“오겠지. 온다고 했으니까.”
“늦는다고 황 대표님한테 연락 왔어?”
“그런 거, 우리 사이에 주고받는 내용 아니야.”
순간, 버들이 눈을 홉떴다.
“둘이 무슨 사인데?”
“너는 몰라도 돼요.”
“전화 좀 해 봐. 응? 중간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
제 팔을 붙들고 조잘조잘 조르는 버들의 다리를 걸어 막 넘어뜨리려던 찰나였다. 문이 열리면서 황 대표가 들어왔다.
가습기에서 안개가 피어올랐다. 서류들로 테이블이 복잡해졌다. 업무에 관련된 내용으로 이야기가 오고 갔다. 태블릿 전원이 꺼지면서 겨울이 길게 기지개를 켰다. 문득 버들을 바라봤다. 어이가 없어져서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너 왜 조용하냐? 내내 그 난리를 치더니.”
버들이 무릎께만 내려다봤다.
“말 좀 해.”
“……뭐.”
황 대표가 버들을 쳐다봤다. 겨울이 어느덧 버들의 곁에 다가가 옆구리를 콕콕 찔러 댔다. 겨울의 입장에선 황 대표와 버들이 한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집히다 못해 쓰리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그런데 황 대표만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단 걸 동네방네 소문이라도 내듯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그 난리를 피워 놓더니, 버들이 막상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까 얘가 왜 이러나, 싶다.
“하마 얘기라도 해 줘.”
“……하마 뭐.”
“하마 왜 하품하는지.”
버들이 곁눈질로 황 대표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고개까지 딴 곳으로 돌려 버렸다. 가만히 내버려 둬도 바짝바짝 속이 타들어 가는 것도 모르고 자꾸만 깐족거리는 제 형 때문에 못 살겠다. 저리 가라며 버들이 먼저 밀치면서 형제 둘이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서류를 한쪽에 치워놓으니 할 게 없어졌다. 황 대표의 시선이 느릿하게 버들을 향했다. 제 무릎에 앉아서 잠만 잔 게 아니었다. 꼭 밀착한 채 버들은 저가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상세히 수다를 떨거나, 어디서 주워듣고 온 쓸모없는 지식 따위들을 들먹거리거나 했었다. “대표님. 있잖아요. 그거 아세요?” 무릎에 앉아 눈을 마주한 상태로 하마가 왜 하품하는지 버들이 말해 줬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날의 날씨는 물론, 창밖으로 저녁노을이 어떤 빛을 띠었는지까지. 그런 나날들이 평생 동안 여럿 있을 줄 알았다.
“……맞다.”
가죽장갑을 끼는 황 대표를 보며 버들이 눈을 깜박였다. 황 대표와 같이 있는 것만으로 긴장감이 커 손등 상처를 확인한다는 걸 까맣게 잊고야 말았다.
“가자. 너 검사받으러.”
겨울의 말에 버들이 작게 턱을 주억거렸다.
“여기 있어. 금방 갔다 올 거니까.”
황 대표에게 말을 마친 겨울이 버들의 어깨를 감쌌다. 닫혔던 문이 금방 다시 열렸다.
“황 대표님. 침대에 앉으세요. 여기 의자 전부 딱딱해서 별로예요. 근데 침대는 폭신폭신해요. 앉으세요. 편하게 앉아서 저희 형 기다리세요.”
제 할 말을 겨우 끝냈다. 바깥에서 기다리라니까 그새를 못 참고 문까지 온 겨울이 “유버들!” 하고 제 이름을 부르자 버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어차피 아무리 기다려 봤자 황 대표에게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버들이 그대로 뒤를 돌아 문을 닫고 나갔다.
두 사람이 빠지자 갑자기 스위치를 꺼 버린 것처럼 고요함이 찾아왔다. 혼자 남겨진 병실을 황 대표가 찬찬히 둘러봤다. 고풍스러운 분위기하며 공간 구조 역시 호텔이나 다름없다. 희미하게 나는 약냄새가 여기가 병원이란 걸 상기시켜 준다. 버들이 자기 침대를 대뜸 내주고 가서 그런지, 시선이 침대를 향해 못처럼 박혔다. 끌리듯 황 대표가 그쪽으로 걸어갔다. 걸터앉은 침대가 버들의 말처럼 폭신폭신하다. 갈증을 참아 냈다.
창밖을 통해 대낮의 햇볕이 겨울을 잊을 만큼 따사롭게 내리쬐고 있었다.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내뱉은 황 대표가 그대로 한 시간을 보냈다. 침대에 누웠다. 고개를 옆으로 비틀자 시트가 코에 닿으면서 버들의 냄새가 물밀듯 밀려왔다. 그러면서 살 것 같단 생각이 진하게 들었다. 호흡이 단박에 흐트러졌다. 황 대표의 눈이 감겼다.
갑작스럽게 걸려 온 전화에 외출을 해야 하는 제 형을 배웅해 주고선 버들이 터덜터덜, 병실로 돌아왔다. 문을 열자마자 그대로 굳었다. 황 대표가 이미 가 버리고 없을 줄 알았다. 꿈인가 싶다. 제 침대에 누워 잠이 든 황 대표를 향해 버들이 소리를 죽여 다가갔다.
“대표님.”
버들이 소리 내어 황 대표를 불렀다. 깊게 잠들었는지, 황 대표가 일어나지 않았다. 검사를 받느라 진이 빠진 버들이 침대 위에 기어 올라갔다. 황 대표의 옆에 몸을 납죽 엎드리고 누웠다.
“황 대표님…….”
잠들어 있는 황 대표의 얼굴을 버들이 유심히 쳐다봤다. 속눈썹, 코, 입술…… 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전부 곱다.
“저 때문에 성가셔요?”
작게, 겨우 물어볼 수 있었다.
“…….”
“…….”
황 대표의 고른 숨소리에 집중하자 손끝까지 안정된다. 버들이 황 대표의 한쪽 팔을 조심스레 들어 제 허리 위에 올려 뒀다. 버들이 눈을 감았다. 지그시 허리를 눌러 오는 황 대표의 팔 무게에 계절은 뜨거운 여름으로 둔갑했다.
컴컴했던 비상구 계단의 센서에 불이 들어왔다. 계단에 앉아 있던 버들이 고개를 뒤로 꺾었다. 비상구 문을 살짝 열어 뒀었다. 제 병실에서 나와 그 앞을 지나칠 사람은 현재 딱 한 명뿐이었다. 잠에서 깬 황 대표가 저가 옆에 있으면 당황스러워할 게 분명했으니 버들이 비상구 계단에 앉아 혼자서 한참 시간을 보냈다.
으슬으슬하다.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 병실에 돌아오니 역시나 침대가 텅 비어있다. 어느덧 어둑어둑, 밤이 찾아왔다. 황 대표가 누웠던 주변으로 시트에 주름이 져 있다. 그게 펴지거나 흐트러지는 게 아까워서 버들이 차마 침대에 눕지 못하고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침대 위에 달빛이 내려앉는 대로 길이 났다. 그걸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계속해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폭설이 내렸다. 계속해서 쌓이기만 할 것 같았던 눈이 이틀이 지나자 햇볕이 나면서 녹기 시작했다. 창밖을 통해 내다본 바깥이 한가롭다. 오고 가는 사람들도 없고, 차도 평소보다 적다. 한파라서 세상이 위축된 모양이다. 황 대표님도 오늘 같은 날은, 은사님 병문안 오는 게 힘들겠지? 느린 걸음으로 버들이 도서관을 찾았다. 역시나 황 대표는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못 만나려나. 마음을 비웠다. 읽고 싶은 책을 찾아 버들이 도서관을 배회했다. 간신히 발견한 책은 하필 책장 꼭대기에 꽂혀져 있었다. 버들이 까치발을 들었다. 그때였다. 뒤에서 황 대표의 향수 냄새가 풍겼다. 착각인가? 몸이 굳었다. 착각이 아니란 듯, 곧 어깨 너머로 황 대표의 팔이 뻗어졌다. 대신 꺼낸 책을 황 대표가 버들에게 건넸다. 표지를 물끄러미 쳐다만 볼 뿐 버들이 받아 가지 않았다. 지금 꺼낸 책 기점으로 오른쪽, 왼쪽에 꽂힌 책을 차례로 꺼내 다시 건넸지만 마찬가지다.
“이거 다 아니야?”
나직하게 물어 온 황 대표의 물음에 설렌다. 그래서 버들이 더 꾹 입을 다물었다. 말이 없는 버들의 손에 들린 종이를 황 대표가 가져갔다. 보고 싶었던 책을 정확하게 찾아 줬다. 버들이 제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 잠 한숨 자지 못하고 어떻게 해야지만 좀 더 나아질 수 있을까, 줄곧 생각했다.
“대표님.”
버들이 고개를 들었다.
“제가 다 거짓말했어요.”
“…….”
“사실은 대표님 안 좋아해요.”
“…….”
“거짓말한 거예요.”
울지 않으면서, 버들이 그렇게 말을 했다. 결국 자신은 황 대표에게 한없이 약해질 수밖에 없단 걸 깨달았다. 복잡하게 얽힌 다른 생각들은 전부 지워 냈다. 그저 황 대표가 바라고, 원하는 걸 자신이 들어줄 수 있단 것에 가치를 뒀다. 버들이 애써 표정을 밝게 관리했다.
「우리 앞으로 싸우면……. 싸우면, 화해해요. 제가 항상 먼저 화해할게요. 받아 주기만 하세요. 네? 대표님. 우리 사이좋게 지내요.」
황 대표는 그 자리에서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책을 받고 도서관을 나간 버들을 황 대표가 뒤쫓아 나가 돌려세웠다. 버들의 말간 얼굴을 응시하자 스치는 감정들이 진한 색깔을 띠고 있었다. 바닥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그려졌다.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
“먹고 싶은 거라든가. 가고 싶은 데라든가.”
버들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어차피 떠날 생각이었잖아.」
「…….」
「누가 등 떠밀어서도 아니고, 네가 직접.」
「…….」
「나는 가만히 있었어. 시작도 끝도 다 네가 결정했어.」
「…….」
「그러니까 취소해. 네가 이제껏 뱉었던 말 전부.」
「…….」
「거짓말이었다고 해.」
자신이 황 대표의 소원을 들어줘서, 황 대표님도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는 건가. 보통 때라면 아니라고 할 텐데, 역시나 넉넉지 않은 시간에 약해진다. 버들이 황 대표에게 잡힌 제 손을 바라봤다. 뜨겁다.
“대표님…….”
버들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안아 드려도 돼요?”
황 대표는 말이 없었다. 오랫동안 시간이 멈춰 있었다. 아주 느리게, 황 대표의 고개가 끄덕여지며 허락이 떨어졌다. 버들이 황 대표의 허리 뒤로 손을 둘렀다. 황 대표의 가슴팍에 이마를 기댔다가 얼굴을 올려다봤다.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대표님. 식사하셨어요?”
버들을 마주 안아 주지 못했다. 아마 평생, 마주 안아 주지 못할 거다.
“식사 거르지 마세요.”
응. 목이 막혀서 겨우 대답할 수 있었다.
애꿎게 손가락만 꼼지락거리고 있던 버들이 재채기를 터트렸다. 코끝이 아까부터 간지러웠다. 질끈 눈부터 감겼다. 어쩌지 못할 사이 작게 재채기가 연달아 터졌다. 병실의 동그란 테이블에 마주 보며 앉아 있던 황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환기시키기 위해 살짝 열어 둔 창문을 닫고 돌아왔다. 자동차 경적, 새 지저귐, 바람과 같은 바깥의 소음이 일순 차단됐다. 그러면서 꽉 막힌 공간에 황 대표와 단둘이란 게 현실이 되어 다가왔다.
제 재채기 소리에 화들짝 놀란 버들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가 서서히 펴졌다. 기다란 버들의 속눈썹이 오로지 황 대표에게만 고정되었다. 침묵에 금이 갔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보다. 무의식중에 버들이 코를 훌쩍거렸다. 동시에 황 대표와 눈이 마주쳤고, 시선을 먼저 피한 쪽은 버들이었다. 황 대표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 헤드에 비스듬히 걸쳐져 있는 카디건을 챙겨 와 버들에게 건네줬다. 추운 거 아닌데……. 웅얼거리면서도 버들이 황 대표가 건네준 카디건을 받아 팔을 끼워 넣었다.
직전까지 침울하게 처져 있던 버들의 눈썹이 살아났다. 걱정이 된다. 이러다간 아무것도 못하고 날을 새게 될지도 모르겠다. 마른 침을 삼키며 버들이 슬쩍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몇 시간째다. 병실에서 황 대표와 함께 있는 이유가 따로 있었다.
이제껏 저가 황 대표에게 들려줬던 무수한 고백을 전부 다 거짓말이었다, 말했을 때 황 대표와의 관계도 하얀 도화지가 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도화지에는 미련처럼 저가 물어서 생긴 황 대표의 손등 상처가 남아 있었다. 정말 다 없던 일로 치려면, 황 대표의 손등 상처도 말끔히 사라져야 하는 게 맞다. 그걸 버들은 분명하게 말하면서 황 대표의 옷을 잡아끌었고, 어떠한 대꾸도 없이 황 대표는 병실까지 순순히 따라왔다. 물론 다른 사람의 눈에는 황 대표의 손등을 치료해 주고 싶어 구질구질하게 핑계를 댄 것으로 보여도 어쩔 수가 없다.
“저…….”
머뭇거리던 버들이 입을 열었다.
“대표님. 손 주세요.”
긴장한 걸 감추고 싶어도 소용없다. 말끝이 갈수록 바닥을 기었다. 힐긋 쳐다본 황 대표의 얼굴이 그저 무감할 뿐이다. 다행히 의사는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황 대표가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렸다.
“장갑 제가 벗겨요?”
황 대표가 버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대답은 없었지만 긍정으로 알아듣고선, 버들이 황 대표의 장갑 끝을 살며시 쥐었다. 가죽 소재라 차갑다.
“벗긴다며.”
“벗길 거예요.”
“못 벗기고 있잖아.”
“벗길 건데…….”
장갑 끝만 버들이 쥐었다가 놓을 뿐이었다.
“언제 벗길 거야.”
재촉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한숨을 내쉰 버들을 대신해서 황 대표가 장갑을 벗어 테이블 한쪽에 내려놨다.
“…….”
“…….”
연고 준 지가 언젠데. 얌전했던 버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갑작스럽게 원망이 찾아왔다. 그 원망은 온통 저 자신을 향해 있었다. 황 대표의 손등에 살점이 떨어져 나간 부위가 피가 섞여서 흉측하다. 관리가 전혀 되지 않고 있었다. 황 대표가 손등의 상처를 말 그대로 방치하고 있단 게 확고히 느껴졌다. 죄책감이 핀다. 황 대표 앞에서 버들이 작아졌다.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여겼던 사람의 손등을 정말 물어서 상처를 냈다니, 간절하게 꿈이었으면 싶다.
“연고 가지고 계세요?”
버들이 물었다.
“잠깐만요.”
“어디 가는데.”
자리에서 버들이 일어나자 황 대표가 희미하게 인상을 썼다.
“연고 사 가지고 올게요.”
“…….”
“약국 가까워서 얼마 안 걸려요. 10분 정도.”
“……연고 있어.”
“가지고 계세요?”
“응.”
달라는 버들의 말에 황 대표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받아 든 연고가 새것 그대로다. 속상하다. 버들이 입 안쪽 살을 으득 씹었다.
“소독부터 해야겠어요.”
말릴 틈도 없이 병실을 나갔던 버들이 금방 돌아왔다. 약국까지 가지 않았다. 입원하는 동안 친해진 의료진에게 부탁해서 얻어 온 구급상자를 버들이 테이블에 펼쳤다. 집게로 마른 솜을 집어 소독약으로 흥건하게 적셨다. 뚝뚝, 맑은 액이 떨어질 정도다. 버들의 입술이 일자로 굳었다. 준비는 끝났는데 선뜻 다음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고요한 분위기를 뚫고 오로지 제 심장만 쿵쾅거리고 있었다. 버들이 참았던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그리고 마침내 소독약을 황 대표의 손등 상처에 문질렀다. 액이 닿자마자 상처에서 하얀 거품이 부글부글 끓었다. 아플 게 틀림없는데 황 대표의 표정에선 변화가 없다. 오히려 버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파요?”
“괜찮아.”
괜찮단 말은 아프지 않단 뜻은 아니었다. 피가 번진 솜을 버리고 버들이 연고를 집어 들었다. 뚜껑 뒤쪽, 뾰족한 부분으로 막을 뚫자 끈적거리는 연고가 불쑥 흘러나왔다. 면봉을 살살 굴렸다. 황 대표의 손등 상처 위에 연고를 최대한 두껍게 발랐다.
황 대표의 눈이 서늘해졌다. 제 손등에 거의 입술이 부딪칠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 연고가 마르도록 정성껏 입김을 호, 호 불어 주고 있는 버들의 동그란 뒤통수를 가만히 응시했다. 태어났을 적부터 숱이 많고 곱실거렸다는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싶은 충동을 황 대표가 가까스로 억눌렀다. 반창고를 붙여 주는 것으로 버들이 치료를 끝냈다.
“대표님. 왜 가만히 계셨어요?”
순전히 제 책임이라지만, 따지듯 묻게 된다.
“힘도 세시면서. 제가 물면 멱살이라도 잡아서…….”
“내가 네 멱살을 어떻게 잡아.”
버들의 말을 황 대표가 가로막았다.
“예전에 몇 번 잡은 적 있잖아요.”
예전이다, 세상이 뒤집히기 전.
“…….”
“…….”
묵묵히 버들이 구급상자를 정리했다. 가슴에 돌덩어리가 얹힌 것처럼 답답하다.
“대표님. 상처, 남으면 진짜 안 돼요.”
누가 들으면 꼭 자기 손이라도 되는 줄 알겠다. 애걸복걸하는 버들에게 그저 고개를 끄덕여 보일 수밖에 없었다. 상처에 눈을 떼지 못하면서 버들이 연고를 황 대표에게 내밀었다. 황 대표가 연고 뚜껑을 열었다. 무슨 일인지 눈을 깜박이는 버들의 아래턱을 혹여 도망갈까 붙잡아 고정했다. 손가락 끝에 묻힌 연고를 황 대표가 갈라진 버들의 입술에 가만가만 발라 줬다. 아래로 잠긴 버들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뭐라고 말을 하고 싶은데 뭐라고 말을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달싹거리는 버들의 입술이 연고 때문에 번지르르하다.
“이거, 입술에 바르는 약 아니에요.”
“…….”
“새살 돋게 하는 약이에요.”
“네 입술에도 새살 돋아야겠네.”
“…….”
“다 갈라져서.”
똑똑, 노크 후 의료진들이 들어왔다. 손에는 링거가 들려 있었다. 미리 예정되어 있던 일정이었다. 황 대표와 버들의 시선이 서로를 스쳤다. 기약 없는 사이이기에 작별 인사 또한 의미가 없었다. 밖으로 나가는 황 대표의 뒷모습을 버들이 쳐다봤다.
복도에 서서 황 대표가 제 손등을 내려다봤다. 참 꼼꼼하게도 반창고를 붙여 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버들의 병실에서 의료진들이 빠져나갔다. 그러고도 한참 동안 황 대표는 복도에서 머물렀다. 가습기 물을 채우고, 화병을 닦고. 바삐 병실을 들락날락했던 간호인의 발길마저 끊겼다. 그제야 황 대표가 벽에 기대고 있던 등을 뗐다.
문을 조금 열어 보자 병실 안의 공기가 잠잠하다. 황 대표가 안으로 들어갔다. 링거에서 약이 느릿한 속도로 떨어진다. 침대에 누워 버들이 잠들어 있었다.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일정했다. 마음 놓고 황 대표가 버들의 얼굴을 실컷 바라봤다. 거칠게 갈라져 있지만 버들의 입술은 여전히 도톰하고 붉고 예뻤다.
황 대표의 눈길이 버들의 발치에서 머물렀다. 손으로 버들의 발끝을 쥐자 차다. 몸은 대체적으로 뜨끈한 편이었으나 버들은 늘 손과 발이 차가워 고생했었다. 그러니 한겨울에 슬리퍼를 끌고 다니는 게 신경 쓰일 수밖에 없다. 밖으로 삐져나와 있는 버들의 손과 발을 황 대표가 세심하게 시트 속에 감췄다.
버들이 잠에서 깼다. 낮잠을 너무 깊이 자 버려서인지 눈을 뜨니 날이 바뀌어져 있다. 아직 남아 있는 잠결에 기분이 멍하다. 링거는 이미 사라지고 없지만, 바늘이 꽂혀졌던 팔뚝이 묵직해 괜히 문지르게 된다. 일기 예보대로 하늘이 몹시 흐렸다. 부스스한 몰골로 겨우 일어나 앉은 버들의 머리가 산발이었다. 자꾸만 감기려는 눈꺼풀에 억지로 힘을 줬다. 그때였다. 인기척을 따라 버들의 고개가 돌아갔다.
“겨울이 형. 언제 왔어?”
신문을 펼쳐 들고 있던 겨울이 이내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까.”
대답도 왠지 불퉁하다. 뭐에 삐친 거지? 의아함을 담아 버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짐작만 갈 뿐, 확신이 없다.
“씻고 올게.”
“응.”
“형. 근데…….”
“우선 씻고 와.”
“응.”
수건을 챙겨 버들이 욕실로 들어갔다. 다시 신문으로 시선을 옮긴 겨울이 낱말 퀴즈를 발견했다. 제 수준에선 영 시시하다 보니, 정답을 맞히는 데 비협조적으로 굴게 된다. 그런데도 페이지를 곱게 빼놓는 건 순전히 제 막냇동생이 흥미로워하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짜증이 확 끼친다. 가늘게 뜬 눈으로 겨울이 침대 아래에 놓인 박스를 노려봤다.
“박스 이거 뭐야?”
씻고 나오자마자 버들이 박스를 건들며 뭐냐고 물었다.
“몰라.”
“신발이야?”
“모른다니까.”
“신발 맞네.”
운동화다.
“신발 많은데 왜 사 왔어?”
“산 거 아니야.”
“그럼?”
“오다 주웠어.”
“그게 뭐야.”
버들이 인상을 썼다. 박스 뚜껑을 건성으로 덮어 두는 버들의 행동에 겨울이 잘했다며 뜬금없이 칭찬했다. 버들의 머리를 말려 주고, 반나절을 병실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며 겨울이 외출했다. 병실에 홀로 남겨진 버들이 침대 위를 뒹굴다가 문득 박스를 내려다봤다. 오다 주웠다더니, 사실이었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겨울이 제 신발 사이즈를 착각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한쪽만 신어 본 운동화가 크다.
눈이 내렸다. 야트막하게 쌓이기까지 했다. 휴게실에 버들이 먼저 가 있었다. 나중에 황 대표가 들어왔다. 황 대표와 버들이 같은 벤치의 끝과 끝에 떨어져 앉았다. 불안하게 마음이 죈다. 황 대표님은 뉴욕에 언제까지 머무는 걸까. 은사님 병문안은 언제까지 오는 걸까. 황 대표님과 이런 만남은 언제까지 지속되는 걸까. 삽시간에 물음표가 번식했다. 확실하게 물어 정답을 얻고 싶지만 겁부터 난다. 황 대표의 입에서 당장 내일 한국에 가 버린다는 말을 듣게 될까 봐.
버들이 저도 모르게 허벅지 부근의 환자복을 꾹 움켜쥐었다. 수술만. 제발, 수술만 되면. 당사자인 주제에 항상 뒤쪽에 물러나 방관하는 조로 소홀히 대했던 심장 수술이 누구보다 간절해졌다. 없던 일로 쳤지만, 건강을 회복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기회가 주어진다. 수술은 환자의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했다. 제발.
버들이 황 대표를 곁눈질로 바라봤다.
“대표님. 결혼은 누구랑 하실 거예요?”
“…….”
“어떤 사람이랑?”
“…….”
“보니까 자기랑 닮은 사람이랑 결혼 많이들 하는 거 같던데.”
“…….”
“대표님은 대표님이랑 닮은 사람이랑 결혼해서, 대표님 닮은 자식 낳을 거예요?”
쌍욕이나 다름없었다. 저 닮은 사람이랑 결혼해서 저 닮은 자식새끼를 낳으라니. 상상만 해도 싫은 황 대표의 표정이 구겨졌다. 벤치 끝과 끝 사이에 일행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와서 앉았다. 어수선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자리를 떴다.
“손등에 연고 바르셨어요?”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황 대표가 대답을 대신했다.
“보여 주세요.”
황 대표가 있는 쪽으로 버들이 엉덩이를 끌며 다가갔다. 유심히 손등의 상처를 살폈다. 아직 딱지가 생길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어깨가 가라앉을 정도로 버들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소독해야 돼요.”
“나중에.”
반창고를 미리 챙겨 가지고 오기 잘했다. 상처의 범위가 여기서 더 넓어지거나, 탈나지 않길 바랄 뿐이다. 마냥 조심스러운 손길로 버들이 황 대표의 손등 위에 반창고를 여러 개 겹쳐 붙여 주었다. 침묵이 이어진다.
“버들아.”
“……네?”
저음의 목소리로 제 이름이 들려오자 버들이 움칠거렸다.
“오늘 뭐 했어?”
자신이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재잘재잘, 수다 떨던 버들이 어제 밤새도록 생각이 났었다.
“어…….”
황 대표의 물음이 의외였다. 다 없던 일로 친 판국에 그런 건 왜 묻는지 따지지 않고 버들이 운을 뗐다.
“사과 먹고.”
“사과 먹었어?”
“네. 그리고 검사받았어요.”
“…….”
“약 먹고, 낱말 퀴즈 풀다가 낮잠 조금 자고…… 그랬어요.”
단조로운 하루였다.
황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 대표가 네 병실에서 만나자고 해서.”
“……아. 형, 금방 들어온다고 했어요.”
“응.”
버들이 황 대표를 따라 일어나 앞장섰다. 휴게실에 들어갔을 때부터 황 대표는 버들의 발부터 봤다. 새하얀 발가락이 훤히 드러난 슬리퍼 대신, 버들이 자신이 사 놓은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운동화가 든 박스를 들고 나타났을 때 저를 보고 유 대표가 욕만 했지 다른 별말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버들이 보기 전에 버리든가, 감추든가 했을 줄 알았더니.
앞장서서 걷는 버들을 보면서 황 대표가 인상을 찌푸렸다. 신발 사이즈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자고 있는 버들의 발바닥을 손으로 재서 얼추 비슷하겠거니 싶은 사이즈로 골라 사 올 수밖에 없었다. 크다. 뒤꿈치가 헐떡거린다. 계단을 오르는데 신발이 쏙 벗겨졌다. 아무렇지 않게 버들이 다시 발을 꿰어 신고선 덜커덕, 덜커덕 걸었다. 간간히 뒤를 돌아보는 버들의 행동이 어색하다.
“너 목 아파?”
어느덧 버들의 옆에 황 대표가 섰다.
“아픈 건 아니고 조금 불편해요.”
버들이 제 상태를 꾸밈없이 고했다.
“왜.”
“아까 낮잠 자고 일어났는데 자세가 이상했어요.”
“……어떻게 이상했는데.”
“침대랑 벽 사이에 고개가 껴 있었어요.”
잠버릇 심한 버들을 가족만큼이나 황 대표가 잘 알고 있었다. 또다시 버들의 신발이 벗겨졌다. 황 대표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병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황 대표가 핸드폰을 꺼냈다. 지금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으니 곧 도착한단 유 대표의 전화가 걸려 왔다. 통화 내용을 들은 버들이 더 망설일 여유가 없단 걸 알았다. 부랴부랴 소독약을 꺼내 들자 황 대표가 알아서 테이블에 손을 올려 주었다. 반창고를 살살 뗐다. 상처에 소독약이 닿으니 어제 만큼이나 하얀 거품이 부글부글 끓었다. 언제쯤 나아지려나, 까마득하다. 연고를 바르고 이어 반창고를 붙였다. 소독할 때 사용한 솜을 안 보이게끔 휴지에 돌돌 말아 막 버리고 나니 병실 문이 열렸다.
“유버들. 너 검사 오후에도 있지?”
“응? 응.”
뭐 죄지은 게 있다고 버들이 제 형을 보자마자 딸꾹질을 했다.
검사를 마치고 병실에 돌아온 버들이 입구에서 멈췄다. 할 이야기를 끝내 놓고 겨울은 먼저 나가 버렸는지 병실에는 황 대표만 남아 있었다. 가습기에서 희뿌연 물안개가 뿜어졌다. 제 침대에 누워 곤히 잠이 든 황 대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버들이 옅게 웃었다. 옆구리가 이상하게 간질간질하다. 시트만 덮어 줬을 뿐, 황 대표에게 손끝도 대지 않고 버들이 문을 닫았다. 비상구 계단으로 향했다.
노을이 지면서 눈이 내렸다.
컴컴했던 비상구 계단에 센서가 켜졌다. 살짝 열어 뒀던 비상구 문 밖으로 누군가 지나갔다. 버들이 엉덩이를 털며 계단에서 일어났다. 그때 갑자기 벨소리가 울렸다. 장소 특성상 더 우렁차게 울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액정에 군 복무 중인 하늘의 이름이 번쩍거리고 있다.
“형.”
전화를 받으며 문고리를 쥐었다. 그 순간 벌컥, 문이 열렸다. 그러면서 버들이 황 대표와 마주 보게 됐다.
“……어. 아니. 밥 이따가 먹을 거야. 아직 때가 아니라서.”
버들이 황 대표의 눈치를 살폈다. 제 안부부터 묻던 하늘이 징징거린다. 겨울이 뉴욕에 들어갈 때 맞춰 저도 따라가려고 했었는데, 휴가를 반납해야 하는 상황이 생겨 어쩔 수 없이 미뤄졌단다. 버들이 하늘을 달랬다. 황 대표가 버들을 비상구 계단에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통화가 끝났다. 둘 다 움직임이 없자 머리 위의 센서가 꺼졌다.
“왜 여기에 있어.”
“…….”
“내가 네 병실에서 자고 있어서?”
“아니에요. 저 원래 여기 앉아 있는 거 좋아해요.”
“…….”
“대표님. 제 병실에서 잤어요?”
버들이 모른 척했다. 센서가 황 대표로 인해 다시 환하게 켜졌다.
“대표님. 여기 앉으시려고요?”
버들이 황 대표의 옷자락을 잡았다가 도로 놓았다.
“엉덩이 시릴지도 모르는데……. 대표님. 제 무릎에 앉을래요?”
황 대표보다 먼저 버들이 풀썩 계단에 앉았다. 그 위쪽 칸에 황 대표가 앉았다. 그러면서 버들의 어깨를 잡아 제 쪽으로 오게끔 유도했다. 버들의 환자복이 얇았다. 말처럼 엉덩이가 시릴 게 분명했다. 황 대표의 무릎에 옆으로 걸터앉게 된 버들이 숨 쉬는 걸 잊어버리고 말았다. 황 대표가 눈썹을 찌푸렸다. 워낙 말라 무릎에 올려놓아도 별로 무게감이 전해지지 않는다. 수술만. 버들의 수술만 결정되면.
“그냥 의자 취급해.”
“…….”
“넘어져도 내가 못 잡아 주니까 네가 잘 버텨 내고.”
“……네.”
대답과 동시에 버들이 휘청거렸다. 못 잡아 준다고 했으면서 황 대표의 손이 버들의 등을 단단히 받쳐 줬다. 버들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사이즈가 큰 운동화 한쪽이 벗겨지기 직전이다. 발등에 겨우 걸쳐졌다.
센서가 꺼지면 즉시 황 대표가 밝혔다.
“검사는 잘 받았어?”
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검사인지 궁금했지만 황 대표가 묻지 않았다. 유 대표에게 전해 들은 말이 떠올랐다. 전반적으로 버들의 수술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한 검사가 진행되는 중이라고 그랬다. 가족들의 피가 바짝바짝 마른다고. 마찬가지다.
“……아.”
버들의 목이 자라처럼 움츠러들었다. 잠을 잘못 자는 바람에 불편했던 목과 어깨를 황 대표의 큼지막한 손이 주물러 주기 시작했다. 이렇게 긴밀한 접촉이 정말 오랜만이었다. 전기가 퍼진 것처럼 볼 전체가 저릿저릿하다. 더 나아가 코끝까지 시큰거렸다. 예전부터 그랬다. 무릎에 앉힌 저를 황 대표가 만질 때면 지금처럼 언제나 상냥한 손길이었다. 분에 넘치면서도 그게 꿈결처럼 황홀했다.
아무런 말없이 황 대표를 등지고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때 탈진할 정도로 오열이 터졌던 건, 두 번 다시 황 대표에게 상냥한 손길을 받을 수 없단 이유가 포함되어 있었다. 생각보다 몸이 앞서 움직였다. 당장 심한 욕지거리를 듣는다고 한들 상관없다. 버들이 황 대표의 목에 팔을 감아 어깨에 얼굴을 기대었다.
“대표님 좋아해서 이렇게 안겨 있는 거 아니에요.”
누가 뭐랬나. 버들의 목소리가 조곤조곤 귓가를 울렸다.
“저 원래 아무 남자한테나 이렇게 안겨요.”
“……아무 남자 누구.”
“저희 형들이요.”
꼴통은 계속 꼴통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황 대표가 고개를 기울였다. 제 품속에서 버들이 어느새 잠이 들어 있었다. 새근새근, 호흡이 편안하다. 축 늘어지는 몸을 안아 들고선 황 대표가 병실로 향했다. 편히 잘 수 있게끔 침대에 버들을 조심히 눕혀 준 뒤, 비상구 계단에 떨어져 있는 운동화를 들고 와 가지런히 놓았다.
겨울이라 날씨 추운 것만 고려했는데, 올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 며칠 연속 기온이 영하에 머물렀다. 하루가 통째로 그저 그렇지 않았다. 황 대표와 만나는 순간은 특별했다.
도서관에는 유독 사람들이 많았다. 몇십 명, 몇백 명, 몇천 명일지언정 자신 있다. 버들의 시야가 헤매지 않고 곧장 황 대표를 담아냈다. 황 대표가 앉아 있는 곳에 어떤 종류의 책이 있나 살폈다. 책장 주변을 어슬렁거리자 이윽고 황 대표가 다가왔다. 제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가져가 책 위치를 확인했다. 손이 닿지 않은 꼭대기면 나았을 텐데. 하필 하단에 책이 꽂혀져 있었다. 그래도 군말 없이 황 대표가 대신 책을 꺼내 주었다.
턱을 괴고 한창 책을 읽어 나가던 버들이 다리를 까닥였다.
“대표님.”
버들이 작게 소곤거렸다.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더 말하지 않아도 알겠단 듯 황 대표가 턱을 끄덕였다. 나란히 책을 정리한 뒤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버들은 사이즈가 커서 자꾸 벗겨지는 운동화 뒤쪽을 언제부턴가 시골에서처럼 꺾어 슬리퍼처럼 끌고 다녔다. 발가락은 가려졌으나 뽀얀 발뒤꿈치에 더 집중되는 격이다. 남들이 볼까 신경 쓰인다. 하지만 그걸 지적할 자격이 없는 걸 알기에 황 대표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황 대표의 손등 상처는 어느덧 핏기가 사라졌다. 대신에 딱지가 생겼다. 그럼에도 소독을 해 주고 연고를 발라 주는 버들의 손길은 정성스러웠다. 얼른 말끔하게 나았으면 좋겠다.
겨울의 날씨는 변덕이 심하다. 비가 내렸다가, 눈이 내렸다가. 갈팡질팡한다. 뉴욕 거리의 간판들이 어두워지니 더욱더 화려하게 깜박인다. 버들이 무릎을 끌어 모아 창밖 아래 풍경을 감상했다. 휴게실에 앉아 있던 버들이 문이 열릴 때마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보고 싶은 얼굴은 나타나지 않았다. 세 시간이 지나면서 도서관으로 장소를 옮겼을 때다. 막 도착한 황 대표가 코트를 벗어 옆 의자에 걸쳐 놓는 게 보였다. 기다리고 있던 걸 내색하지 않으며 버들이 황 대표의 앞을 얼쩡거렸다.
“밖에 추워요?”
“오전에 눈 내렸어.”
“아. 저도 봤어요.”
황 대표가 버들을 쓱 쳐다봤다.
“다른 할 말 있어?”
“그게 아니라…….”
버들이 쭈뼛거렸다. 확 붙잡진 못하고, 손끝으로 버들이 황 대표의 옷을 잡아끌었다. 오고 갈 수 있는 장소가 협소한 만큼 도서관이건, 휴게실이건, 정원이건, 비상구 계단이건 진작 질려 버렸을 수도 있다. 흔한 장소에서 흔하지 않은 걸 노력해서 발견한 버들이 황 대표에게 알려 주고 싶어 했다.
병원 구석에 위치한 도서관은 침침한 분위기였지만, 햇볕이 잘 들어오는 공간이 있었다. 책장 사이와 사이로 버들과 황 대표가 들어갔다. 작은 창문에서 비쳐 들어온 햇빛이 바닥에 커다란 웅덩이처럼 그려졌다. 책장 사이와 사이에 남자 둘이 껴 있기엔 몹시 비좁았다. 버들이 황 대표를 올려다봤다. 무릎이 서로 맞닿았다. 겹쳐진 숨소리가 가장 은밀했다.
“대표님.”
버들이 소곤거렸다.
“여긴 따뜻하죠?”
“…….”
“바깥이 추운데 전혀 안 느껴지죠?”
“…….”
“꼭 봄 같죠?”
버들의 눈이 반달처럼 휘어졌다. 흔하지 않은 걸 찾기 위해 기울인 노력에 비해 할 게 없었다. 갑자기 저 혼자 어색하게 느껴 버린 분위기에서 버들이 안절부절못했다. 가까이 황 대표의 향수 냄새가 그윽하게 풍겨 왔다. 시선을 피한 채 꼼지락거리는 버들을 두고 황 대표가 책장 사이를 빠져나왔다. 찰나 서로의 허벅지가 깊숙하게 겹쳐졌다. 도서관에 혼자 남겨진 버들의 심장 박동이 사정없이 쿵쾅거렸다.
고드름에서 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밤이 되자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복도에서 마주친 두 사람이 각자 갈 길을 가나 싶었다. 버들이 뒤를 돌았다. 아는 척 없는 황 대표를 졸졸 따라다녔다.
“거기로 가면 막다른 길 나와요.”
황 대표가 멈췄다.
“여기로 가면 자판기 나오지 않아?”
“자판기? 반대쪽으로 가셔야 돼요.”
“……아.”
“제가 같이 가 드릴까요?”
거절한 황 대표에게 상세히 길을 설명해 줬다. 버들이 제 병실까지 서둘러 걸었다. 냉장고를 열어 제 입에 가장 맛있는 음료수를 꺼냈다. 겉에 열대 과일이 먹음직스럽게 그려져 있다. 다음 날, 그다음 날에도 버들이 음료수를 들고 황 대표를 만났다. 고작 음료수일 뿐인데. 건네주기까지 큰 용기가 필요할 줄 몰랐다.
병원 복도 벤치에 앉아 있는 버들에게 황 대표가 다가갔다. 머리 위로 그림자가 지면서 버들이 고개를 들었다. 황 대표가 버들의 손에서 음료수를 가져갔다. 당혹스러운지 버들이 속눈썹을 빠르게 깜박였다. 시원하게 마셔야 맛있는 음료수였다. 영어로 그런 문구가 써져 있기도 했다. 그런데 버들이 양손으로 꼭 쥐고 다닌 통에 겉이 미지근해져 버렸다.
냉장고에 있는 다른 걸로 바꿔다 준다고 말을 하기도 전이었다. 황 대표가 마개를 땄다. 음료수는 마시고 싶은데 마개를 못 따서 버들이 들고 다닌 줄 오해하고 있었다. 거꾸로 들고 다녔던 모양이다. 하필 탄산이 섞여 있던 음료수가 황 대표의 손을 적시면서 흘러넘쳤다. 가까이 서 있던 버들에게도 음료수가 튀었다. 끈적거린다.
“대표님…….”
혼나도 싸다. 버들이 얼른 제 옷을 살폈다. 마땅찮은지 뒤를 돌았다.
“대표님. 제 옷에 닦으세요. 등에는 음료수 안 튀어서 안 젖었어요. 얼른 손 닦으세요.”
황 대표가 가만히 버들을 내려다봤다. 손이야 안 닦아도 그만이었다. 그런데도 황 대표의 손이 버들의 등에 천천히 닿았다. 다른 핑계 없이 솔직하게 만져 보고 싶었으니까. 위에서 아래로 쓰다듬었다. 마를 대로 말라 버려 척추뼈가 적나라하다.
“괜찮은데…….”
버들이 웅얼거렸다. 황 대표가 코트를 벗어 버들에게 입혀 줬다.
“대표님도 추우시잖아요.”
“안 추워.”
“……저도 안 추워요.”
안 춥단 버들의 말을 무시했다. 전화가 울렸다. 버들이 핸드폰을 귓가에 가져다 댔다. 겨울이었다. 어디에 있냐고 호들갑을 떨면서 저를 찾자 버들이 인상부터 찌푸렸다. 한 사람 목소리가 아니었다. 연락도 없이 뭐야. 떠들썩한 게 가족들이 우르르 몰려온 모양이었다. 가까운 곳에 있으니까 곧 가겠다고 대꾸 후 버들이 전화를 끊었다. 황 대표가 먼저 앞장서서 움직였다.
두 갈래의 길이 나왔다. 버들의 병실로 향하는 길, 병원 출입구로 향하는 길. 당연히 황 대표가 출입구로 향할 줄 알고 옷을 돌려주려는데 제 병실로 방향을 꺾었다. 멈춰 있던 버들이 뒤쫓았다.
병실 앞까지 금방이다.
여전히 작별 인사 같은 걸, 나눌 수 있는 사이는 아니었다. 조심히 가세요. 내일 또 올게, 하는. 그런 기약이 간절하다. 수술만 되면. 버들이 애써 웃었다. 옷을 벗어 주기 위해 꼼지락거리는 버들의 손목을 황 대표가 치웠다. 그러고선 오히려 단추를 끝까지 채워 주었다. 체격 차이가 크다 보니 제 코트 속으로 버들의 몸이 잡아먹히는 꼴이다. 재차 황 대표를 돌아보며 버들이 병실 문을 열었다.
복도를 걷던 황 대표가 멈췄다.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것처럼 커다랗게 유 대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족들이 어째서 전부 몰려왔나 싶었다. 기뻐하는 환호성에서 황 대표가 방금 들었던 유 대표의 말이 틀리지 않았단 걸 확신했다. 그렇게 애간장을 태우더니. 버들의 수술이 결정된 거다. 다리가 풀린 황 대표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호텔에 들어온 황 대표가 와인을 찾았다.
……아직은 아니라며 뒤로 미뤘던 일을 다시 한 번 더 뒤로 미뤘다.
그날 밤 황 대표와 버들이 각기 다른 생각들로 시달렸다. 생각은 달라도 잠들지 못한 건 똑같았다.
좀 더 확실한 수술 성공률을 확인하기 위해 버들의 검사가 진행됐다. 제 수술이 가능하단 점을 황 대표에게 알려 주고 싶었지만 확실한 검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버들이 비밀로 숨겼다. 도서관에서, 정원에서, 비상구 계단에서, 휴게실에서. 황 대표를 만날 때마다 버들이 웃었다. 순하고, 말갛고, 유하다.
황 대표의 손등 상처는 딱지가 겹겹이 졌다. 24일, 크리스마스이브 오전에 나온 결과라 더 특별했다. 버들의 수술 날짜가 확실하게 결정됐다. 그걸 황 대표는 유 대표를 통해 전달받았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인 줄 모르고 황 대표에게 말해 줄 생각에 버들이 들떴다.
의료진들이 산타 모자를 쓰고 들락거렸다. 트리 장식들로 화려하게 꾸며진 거리와 달리 버들의 병실은 잠잠했다. 크리스마스였지만, 케이크나 샴페인 따위들도 없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지만 크리스마스란 걸 인지하고 둘러보니 조촐할 뿐만 아니라 다소 삭막하기까지 한다.
황 대표의 손등을 치료해 주고 나서 버들이 심호흡을 했다. 옷장 깊숙한 곳에서 상자를 꺼내 열었다. 황 대표의 머플러를 주웠던 계절은 봄이었다. 벚꽃과 목련을 볼 수 있었던. 현재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 있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봄과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조각품을 팔아서 얻게 된 돈으로 황 대표에게 선물하려고 샀던 머플러를 들고 오기 잘했다. 평생 못 전해 줄 거라며 포기하고 있었는데…….
버들이 황 대표에게 머플러를 내밀었다.
“대표님. 크리스마스 선물이에요.”
바라만 보던 머플러를 황 대표가 만지작거렸다. 버들의 예쁜 입술이 웃었다.
황 대표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밀어내도 질길 정도로 달라붙어 좋아한다고 자신을 향했던 버들의 고백이 의아했다. 그래서 버들의 맹목적인 애정을 자꾸만 시험하려 들었다. 확신이 들었을 땐 그게 귀한 줄 모르고 꼭대기에 서서 오만을 떨었다. 살면서 줄 수 있는 거 다 준다고 그러고, 해 줄 수 있는 거 다 해 주겠단 말을 어느 누가 들어 보겠냐고. 버들이 당연하게 심어 준 맹목적인 애정이 영원할 줄 알았다.
“……버들아.”
찾으러 가고 싶었다. 뉴욕에 있다는 너를 당장 만나러 가고 싶었다. 말없이 어딜 갔냐고 화를 내고 두 번 다시 제 곁을 떠나지 못하게끔 붙잡아 두고 싶었다. 가둬 두고 싶었다. 아무도 못 보는 곳에 숨겨 두고 싶었다.
비행기 티켓을 쥐었던 날, 네가 아프단 걸 알았다.
……아파서 그랬구나. 그동안 아파서 말라 갔구나. 내가 준 색연필은 버려두고. 집에 둔 칫솔 같은 사소한 자기 물건들을 모조리 치워 버리고. 말없이 떠난 이유가 수술하기 위해서였다니. 비행기 티켓은 그냥 찢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저 크리스마스 선물 또 있어요.”
“…….”
“수술할 수 있대요.”
“…….”
“새해 지나서.”
“…….”
눈을 접고 버들이 웃었다. 황 대표가 희미하게 따라 웃었다.
멸시해도, 매몰차도, 배려 없이 막 대해도, 자존심을 깎아 먹어도. 왜 네가 내 등 뒤에 뿌리를 내렸을까. 왜 그렇게 아등바등 나한테 네가 매달렸을까. 아팠다니까 전부 다 이해가 갔다. 말없이 떠난 이유까지 전부 다 납득했다.
“수술하게 되면…….”
“네?”
“보통 사람들처럼 달리기도 하고, 축구 선수도 하고.”
“맞아요.”
수줍게 버들이 얼굴을 붉혔다. 닮은 사람이랑 결혼한댔나. 버들과 똑같은 것들 둘이 머리 맞대고 오순도순 연애한다고 상상하니까 귀여워서 절로 웃음이 지핀다.
“버들아.”
“네?”
“수술 잘 받아.”
“네.”
계속 수줍어하며 버들이 대답했다. 좋았던 기억은 버들을 위해 모두 이곳에 놓아두기로 마음먹었다. 버들의 수술이 결정되면서 마지막으로 솔직해질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거나 다름없었다. 딱 한 번 솔직해지는 것에 그래서 버들이 울 수도 있겠지만, 자신 때문에 버들이 우는 것 또한 마지막일 거다. 두 번 다시 만날 일 없을 테니까.
“버들아.”
다정한 목소리에 버들이 설렜다.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어.”
“……대표님.”
“한 달 내내.”
“…….”
황 대표가 버들이 있는 쪽으로 머플러를 밀었다. 섞이지 않은 온도를 감지한 버들의 큰 눈이 눈물이 차면서 일렁거렸다.
“네가 아파서…….”
“…….”
“썩은 것도 모르고 어쩌다가 나를 동아줄처럼 잡고 매달렸는데.”
“…….”
“수술받게 되면, 아쉬운 게 전혀 없을 거 아니야.”
“…….”
“수술 잘 받고……. 너 예뻐해 주는 사람 만나서.”
“…….”
“너도 잘 먹고 잘 살아.”
새살이 돋아나야 할 정도로 심각하게 갈라진 입술 틈새로 피가 비쳤다. 잠 한숨 들지 못한 밤이 길게 흘렀다. 무료하고 그저 지겨웠을 하루가 오색 빛깔처럼 특별할 때가 있었다. 황 대표의 향수 냄새를 희미하게 느끼고, 얼굴을 보고, 시선이 스치고. 한 시간도 채 못 되는, 짤막한 그 순간만 오로지 기다리면서 하루하루를 버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적요하게 크리스마스가 끝났다. 뒤를 구긴 운동화를 꿰신고 버들이 병원을 온종일 돌아다녔다. 히터의 텁텁한 온도로 달궈진 휴게실을 기웃거려 보고, 눈발이 세차게 휘날리는 정원을 내다보고, 책도 없이 오랫동안 도서관에 앉아 있어 보고, 문이 열릴 때마다 혹시나 싶어서 심장 박동이 한계치까지 치솟았다.
기대와 실망이 번갈아 가며 반독되는 사이 날이 지고, 날이 밝았다. 예고 없이 도로 주어진 따분한 하루 속에는 애써 부정하는 것들에 대한 초조함이 섞여 있었다.
시간이 거듭 흘러간다.
“유버들.”
오전에 잡혀 있던 검사를 마치고 돌아온 직후부터였다. 병실 밖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는 제 막냇동생을 겨울이 불렀다. 버들의 점심 식사로 차려진 스프가 식다 못해 굳어 가고 있었다. 새해를 맞이해 특별히 주문한 커다란 케이크 역시 버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방치되고 있었다. 겨울이 케이크 박스를 살짝 들여다봤다. 정중앙에 꽂힌 초코 장식이 아직까지 멀쩡하다. 목소리를 키워 두어 번 더 이름을 불러 보았지만 버들에게서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겨울이 문을 열고 나갔다. 쾌적하고 훈훈한 병실 안의 공기와 확 다른 싸늘함이 엄습한다. 버들은 얇은 환자복만 달랑 걸친 채다. 더는 못 봐주겠다.
“형이 부르는 거 못 들었어?”
“들었어.”
“근데 여기서 뭐 해.”
“……그냥 있어.”
추위 때문인지 버들의 목소리가 탁했다.
“빨리 들어와서 식사해.”
“조금만 더 있다가.”
“식사 다시 차리라고 할게.”
“나중에.”
겨울이 인상을 썼다.
“나는 그냥 여기서 좀 있고 싶어서.”
그냥 있기는. 복도 끝을 향해 버들의 눈동자가 박혀 있었다. 저기서 걸어와 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게 역력했다. 겨울이 한숨을 내쉬었다. 느리게 감겼다가 뜨이는 버들의 속눈썹이 음울하다. 그간 잘 웃더니. 밝았던 색깔 자체가 어둡게 바뀌어 버린 것 같다. 불안함을 띠기 시작하면서 버들은 동시에 말수까지 잃었다. 그런 지 꽤 됐다.
현재 버들이 누굴 기다리고 있는지. 또 틈이 나는 대로 병원 구석구석을 헤집으며 찾으러 다니는 사람이 누군지. 겨울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버들이 불안정해진 시기가 황 대표가 한국에 돌아가겠다고 일정을 전달했던 날과 겹쳤다. 설마, 싶었던 게 확신에 차면서 겨울의 머릿속이 곧 암담해졌다. 누굴 향한 위로인지 모르겠지만, 전부 지나갈 일이라고 암기하듯 떠올렸다.
꿈쩍 않는 제 막냇동생의 어깨를 끌어안고 겨울이 어딘가로 이동했다. 납득시켜야 하니, 위층에 있는 아무 특실이나 보여 줬다.
“어디야.”
“……은사님 병실.”
버들의 물음에 겨울이 콧등을 긁적이며 답했다.
“비어 있잖아.”
“퇴원하셨으니까.”
겨울이 버들의 옆얼굴을 살폈다. 비어 있는 병실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버들의 표정이 의외로 차분했다. 버들이 크게 숨을 들이켰다. 은사님이 퇴원하셔서 황 대표님은 이제 병원에 올 일이 없는 걸까? 늘어져 있던 손끝이 미약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걸 간신히 주먹 쥐어 감췄다. 어차피 황 대표님은 나 보러 병원에 온 게 아니었단 걸 알면서도 가슴이 뻥 뚫려 버린 기분이 든다. 애써 부정해 왔지만, 현실이 바뀔 일은 없다.
이별이 서서히 실감된다.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어.」
버들이 주저앉았다.
「한 달 내내.」
서러움에 가슴이 미어진다.
병실을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나갈 이유가 없었다. 영하로 급격하게 떨어져 피해를 주던 겨울 날씨가 평균 기온을 찾았다. 새로 물을 채워 넣은 가습기에서 촉촉한 물안개가 넓게 퍼져 나갔다. 세탁이 된 커튼으로 교체하면서 간호인이 할 일을 끝냈다.
혼자 남겨지자마자 버들이 의무적으로 펴 뒀던 잡지를 덮었다. 불을 끄고 침대에 올라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삽시간에 시야가 어두워졌다. 적막함 속에서 가뜩이나 어지럽게 떠도는 생각들이 짙어졌다. 제 수술 날짜는 가족들에게 곧 축제날이나 다름없었다. 날짜가 다가올수록 가족들은 기뻐했지만, 거기에 동참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면서 외톨이가 되었다. 외롭다.
수술받고 어떻게 해야 하지? 회복한 다음에는 내가 뭘 해야 하는 거야?
나침판을 잃고 난파당한 배와 현재의 제 심경이 똑같다.
수술 당일이 됐다. 시트 속으로 버들이 손을 감췄다. 스쳐 지나가는 천장들이 꼭 무너지는 도미노 같다. 형광등에 눈이 부신지 버들의 콧등이 찌푸려졌다. 지체 없이 굴러가던 침대 바퀴가 멈췄다.
버들아. 당부하듯, 응원하듯 여럿 사람들의 목소리가 뒤섞여 들려오자 오히려 귓가가 둔해진다. 가족들에게 버들이 애써 웃어 보였다. 이윽고 두꺼운 문이 닫혔다. 수술실 안으로 버들이 들어가고 나서야 가족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대기실 벽에 수술 중이란 불이 켜졌다.
수술실에서 버들이 혼자가 됐다. 얼어붙을 것처럼 차가운 공기에 소름이 쭈뼛 선다. 아래턱이 딱딱 부딪힌다. 울음을 꾸역꾸역 삼켜 가며 버들이 의료진들의 물음에 대답했다. 버들의 마른 몸에 곧 마취가 주입됐다.
대기실 구석 벤치에 앉아 있던 황 대표의 곁으로 유 대표가 다가갔다. 모여 있던 가족들이 전부 빠져나간 대기실이 황량하다. 황 대표가 고개를 들었다.
“수술은.”
“잘됐어.”
수술이 끝나고 회복실로 옮겨졌던 버들은 잠깐의 위기를 무사히 넘겼다. 시달리던 마취에서도 확실하게 깨어났다. 희미하게 깜박였던 눈꺼풀이 약기운에 취해 녹아내리듯 다시 감기면서, 버들은 깊은 숙면에 빠져들었다. 가족들과 함께 이제 막 수술을 집도한 의료진들의 명확한 브리핑을 듣고 나온 길이었다. 앞으로 경과를 더 지켜봐야겠지만, 우선은 수술을 끝냈단 자체만으로 안심이었다.
“잘됐어?”
“어.”
“확실히 잘됐어?”
“그렇다니까.”
유 대표에게 황 대표가 재차 결과를 확인했다. 원하는 답을 듣고 또 들었다. 제대로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자리를 지켰던 황 대표가 머리를 뒤로 젖혔다. 팽팽하게 옥죄었던 긴장감이 갑작스레 풀리면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황 대표의 목울대가 크게 일렁거렸다. 차곡차곡 쌓였을 피로가 이제야 자각된다. 눈이 감겼다.
황 대표의 옆에 유 대표가 앉았다. 서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버들이가 너만 찾으러 다니고, 기다렸단 거 알아?”
안다.
“이렇게 있어도 돼, 너? 출국 오늘 아니었어?”
황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독한 새끼야. 출국은 오늘이면서 너는 왜! ……말을 말자.”
날카롭게 나가려던 말을 유 대표가 삼켰다. 너 나 할 것 없이 지친 상태였다. 과묵하게, 그대로 몇 분이 더 지났다. 침묵을 깨뜨린 건 유 대표의 핸드폰 진동이었다.
“얼굴 보고 가라.”
걸려 온 전화를 받기 위해 대기실 출구로 향하던 중이었다. 불쑥 화가 치밀었다. 유 대표가 황 대표를 돌아봤다.
“심각한 건 줄 알았거든? 버들이가 너 좋아하는 거. 근데 따지고 보니까 별로 심각할 것도 없더라고. 아직 어리잖아, 버들이. 그리고 이제 수술도 했고. 스물일곱, 아니 다섯만 되어도 지금 감정, 자기가 더 쪽팔려하면서 잊고 싶어 할 거야. 안 그래?”
충분히 동의하는 터라 황 대표가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혼자 대기실에 남겨졌다.
「대표님. 왜 저 미워해요. 어디 가지 마세요.」
크리스마스 날, 자지러지게 울며 안기려는 마른 몸을 끝까지 내칠 수밖에 없었다. 환청처럼 버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인기척에 황 대표가 눈을 떴다. 비행기 시간에 맞춰 찾아온 비서를 물렸다. 출국 날짜를 이틀 뒤로 연기했다. 버들이 호흡기를 떼고, 병실로 옮겨진 날이었다.
황 대표가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끔 병실 문을 열었다. 버들이 잠들어 있었다. 굳은 표정으로 유 대표가 먼저 자리를 비켜 줬다.
밖이 어둡다. 별 하나 뜨지 않은 컴컴한 밤하늘이 참 광활하다.
“버들아.”
낮게 이름을 불렀다. 울었는지 버들의 눈가가 붉게 짓물러 있다. 허리를 기울여 안쓰러운 버들의 얼굴을 바라봤다. 주머니에서 황 대표가 연고를 꺼냈다. 핏기가 진 버들의 입술 위에 새살 돋으라며 연고를 발라 줬다.
“……고생했어.”
버들은 듣지 못한 칭찬이었다. 황 대표가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