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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굽이치는 밤 (1) (16/24)

16. 굽이치는 밤 (1)

널따란 집은 언제나 적막했다. 곳곳에 장식된 값비싼 도자기 작품을 주기적으로 깨뜨렸던 건 주변의 오해처럼 고약한 취미 따위가 아니었다. 얄팍한 도자기가 조각조각 박살이 나면서 일어난 소란은 잠시뿐이었다. 발목부터 잠겨 오던 고요함은 어렸을 적부터 못 견딜 정도로 괴로웠다. 숨이 막혔다. 악몽에서 퍼뜩 깨어나면 싸늘하게 식어 버린 체온으로 깜깜한 세상과 직면했다. 앓았다. 도움을 바라는 대신 이불을 뒤집어쓰고 철저히 혼자가 되는 걸 택했다.

주위에 아무도 없단 걸로 외로웠던 적은 없었다. 자존심이 셌다. 오히려 다행이라고 여겼다. 주위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마음껏 아파하는 게 가능했다. 곁에서 살펴봐 주는 누군가가 있었더라면 아픈 걸 내색하지 않고자 어떻게든 이를 악물고 긴 밤을 버텨 냈을 거다. 그러면서 도자기를 깨뜨리는 일도 없었을 거고. 또…….

고작 일곱 살 많은 혜주가 어린 정우의 눈에는 한없이 어른처럼 비춰졌다. 언제부터인가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혜주가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에 흠뻑 빠져들었다. 그런 정우를 혜주는 환영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쫓아내는 것도 아니었다. 혜주 입장에선 본인의 위치를 위태롭게 만든 원흉인 그에게 최대치로 베풀었던, 아주 관대한 아량이었다. 잠 못 드는 아주 늦은 시각, 간혹 피아노 소리가 가느다랗게 새어 들어올 때가 있었다. 어둠이 깔린 복도를 지나 빠끔히 열린 문 앞까지 걸어가며 당시의 제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잊어버렸다. 안도했을까, 불안했을까.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만 이제 와 약간의 궁금증이 남을 뿐이다.

한기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벽에 기대어 앉았다. 피아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저도 모르게 선잠에 빠져들고는 했다. 도중에 깨어났을 땐 피아노 연주는 끊겨 있는 반면, 밤은 계속되는 중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혼자였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나. 그 해로운 갈등은 누군가의 바람처럼 성격에 어떠한 영향조차 끼치지 못했다. 애초에 그딴 성질머리로 태어났다. 넓기만 한 집 안 어디에도 잘못된 젓가락질을 올바르게 고쳐 줄 애정은 없었지만 그게 상처로 이어지진 않았다. 젓가락질을 하지 않아도 하루에 필요한 영향을 충분히 채울 수 있는 방법을 택해 터득했다. 집안의 부유함에 정당성을 담아 기꺼이 저 편할 대로 이용하되, 간섭받는 건 끔찍하게 기피했다.

「정우야. 집에 오면, 네가 안 보였으면 좋겠어.」

맹목적으로 따르던 이복 누나의 입에서 차분히 쏟아져 나온 부탁은 날카로운 송곳처럼 가슴에 꽂혔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이른 독립은 그녀를 위해서가 아니라, 독립적인 취향과 성정 탓이었다. 뼈대부터 워낙 잘나서 집안의 배경을 등지고서도 아쉬운 게 없었다.

황 대표가 두 개의 잔에 각각 다른 종류의 와인을 따랐다. 색깔부터 맛과 향, 비슷한 점이라곤 일절 없다. 혜주의 입맛에 맞춰 고른 와인을 앞에 내려놓았다. 오랜만의 입국이었다. 따라서 제 공간에 포함된 혜주의 모습을 보는 것 역시 오랜만이었다.

“뭔가 달라진 거 같아.”

“똑같아.”

“아니야. 달라졌어.”

“…….”

오피스텔 내부를 찬찬히 살피며 걷던 혜주의 발끝에 볼펜이 걸렸다. 각별하게 관리되는 오피스텔에서 받았던 차가움이 흐릿하다. 볼펜을 힐긋 내려다본 혜주가 와인 잔을 내밀었다. 그쪽으로 다가간 황 대표가 혜주의 와인 잔을 들어 주었다. 자유로워진 팔로 혜주가 겉옷을 벗었다. 작은 체구가 마냥 작게 느껴지지 않는다. 피가 반밖에 섞이지 않은 본인의 상황을 원초적으로 불리하다며 판단은 하되 주눅 드는 법이 없었다. 조용히 뜻하는 바를 이뤘다. 원하는 건 어떻게든 얻었고, 거치적거리는 건 무엇이든 없앴다.

잔을 쥐는 가냘픈 손가락이 상처하나 없이 깨끗하다.

“얼마나 있다가 갈 건지 정해졌어?”

“아직.”

혜주의 등 뒤로 창문이 있었다. 바깥 풍경이 훤히 펼쳐져 답답한 기색을 조금 가시게 했다.

“결혼, 진짜 할 생각이야?”

나지막하게 물은 질문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뉴욕에 사귀는 사람이랑은 헤어졌어?”

“그것과는 별개야.”

“…….”

“비즈니스라고 생각하면 쉬워.”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단 걸, 허탈한 웃음을 터트리고 나서야 황 대표는 알아차렸다. 와인을 음미하며 혜주가 소파에 앉았다. 황 대표의 눈썹이 옅게 일그러졌다. 제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문득 이질감이 느껴졌다. 황 대표가 혜주를 직선으로 쳐다봤다.

피아니스트 혜주와 덥수룩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음악에 관한 칼럼을 쓰는 남자는 제법 잘 어울리는 관계였다. 사귀는 사람이 뉴욕에 있건 말건 집에서 시키는 대로 혜주는 군말 없이 입국했다. 앞으로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빤히 예상되었다. 선을 본 상대와 약혼 날짜를 잡고, 그리고 결혼까지 순탄한 과정으로 이어질 것이다.

“하기 싫은 거 아니야? 결혼.”

처음부터 다 가진 채 태어난 네가 뭘 알겠냔 시선이 돌아왔다. 내심 대단하다고 느꼈던 혜주의 생존 기반은 사실 열등감이었다. 갑자기 변한 계절을 깨달은 기분이다. 황 대표가 와인 잔을 내려놓았다.

“할 거야.”

“왜.”

머릿속에 먼저 떠오른 대답이 한 치의 오차 없이 혜주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집에서 원하니까.”

* * *

[대표님. 뭐 하고 계세요?]

몇 자 되지 않는 메시지를 하루 내내 고민해 겨우 전송할 수 있었다. 읽었단 표시의 ‘1’이 사라지지 않는다. 버들이 손등 위에 턱을 올리고 엎드렸다. 그러면서 시선은 계속 잠잠한 핸드폰에 집중되어 있는 채다. 다리를 까닥였다. 의미 없는 음을 잠깐 흥얼거리기도 해 보았다. 하루가 유독 길게 느껴진다. 고개를 옆으로 틀자 열어 둔 창문으로 펼쳐진 밤하늘이 시야에 가득 찼다. 반짝거리는 별의 개수가 적다. 그래서 시시하게 받아들이면 되는 것인지, 아니면 안타까워해야 하는 것인지 헷갈린다.

[대표님. 저는 집이에요.]

다시 새롭게 메시지를 보냈다.

“고장 났나?”

혼잣말을 불퉁하게 내뱉은 버들이 핸드폰을 귓가에 대고 괜히 흔들어 봤다. 진동을 풀었다가 벨소리를 바꿨다가.

[정우.]

[정우야.]

[정우. 정우.]

[황정우.]

[정우. 밥 먹었어?]

[정우 씨.]

이러면 당장 전화가 걸려 올 줄 알았다. 순간 정점을 찍은 기대감으로 심장이 콩닥거렸다. 발그레한 볼을 한 버들이 핸드폰을 소중하게 꼭 쥐었다. 화를 내는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지만 한 시간이 지나도 애석하게 핸드폰은 계속 과묵했다.

[사실은 집 아니에요. 술 마시고 있어요.]

[술 많이 마실 거예요. 막걸리랑 소주랑.]

버들의 입술이 점점 튀어나왔다.

[황 대표님. 주무세요?]

정말 주무시나. 아직 아홉 시밖에 안 되었는데…….

한숨을 폭 내쉰 버들이 갈아입을 옷을 챙겨 욕실로 향했다. 수증기가 금방 천장을 뒤덮었다. 발바닥을 타고 전해져 오는 바닥 타일이 차다. 거품이 씻겨 내려가는 도중이었다. 다급히 욕실을 박차고 뛰쳐나간 버들이 핸드폰 전원을 켰다. 고양되었던 표정이 단숨에 식었다. 분명 메시지가 도착한 소리를 들었던 것 같은데 착각이었나 보다. 멍하니 서 있던 버들의 어깨가 축 처졌다. 쇄골에 고여 있던 거품이 흘러 팔꿈치 아래에 매달렸다. 방 안에 거품 섞인 물이 군데군데 고였다.

도로 욕실로 돌아가던 버들이 그걸 밟고 크게 휘청거렸다. 미끄러지면서 바닥을 디딘 팔목이 하필 전에 다쳤던 그 팔목이라 많이 시큰거렸다. 잠시 웅크린 채 아픔이 가시기를 기다렸다. 나니까 이걸 참을 수 있는 거지, 아마 다른 사람이었으면 비명까지 내지르며 데굴데굴 굴렀을 거다. 소리가 샐까 꾹 깨문 버들의 아랫입술이 허옇게 질렸다.

젖은 몸을 수건으로 닦아 내기 전 버들이 제 몸을 거울에 비춰 보았다. 갈비뼈며 허리며 골반이며. 마른 제 상태를 객관적으로 짚어 가며 버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영 볼품없다. 이런 몸에 황 대표의 입술이 닿았다. 스치는 손길에서 전해지는 온도는 분명 다정하고 다감했다. 머뭇거리던 버들이 제 가슴을 만져 보았다. 손끝이 스치자마자 등허리를 타고 찌르르 전율이 퍼졌다. 신음을 삼키며 버들이 어깨를 움츠렸다. 황 대표가 물고 뜯고 씹어 댈수록 조그마한 살점은 점점 더 예민해진다.

[손목이 아파요.]

완성된 메시지를 전부 지웠다. 드라이기를 챙겨 버들이 겨울의 방으로 넘어갔다.

“……윽.”

술 냄새가 코를 찌른다.

“형.”

창문부터 열어젖힌 다음 겨울을 버들이 발로 흔들어 깨웠다.

“씻었어. 씻었어. 형 씻었다.”

옷도 안 갈아입었으면서 무슨.

“어디가 씻었어?”

“내일 씻을 거야. 형 지금 골이 빠개질 거 같아서, 못 움직여.”

꼬부랑꼬부랑 겨울의 혓바닥이 바닥을 긴다.

“골 안 빠개질걸?”

“네가 어떻게 알아?”

“내가 잘 알아. 술 많이 마셨다고 해도 골은 안 빠개져.”

“네 골 아니라고 그렇게 쉽게 말하면 돼, 안 돼?”

버들이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형. 겨울이 형.”

비몽사몽 한 겨울이 도통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버들아.”

“응?”

“형이 딱 한 시간만 자고 예뻐해 줄 테니까 옆에 누워서 너도 자.”

“진짜 한 시간만 자고 일어날 수 있어?”

“응.”

못 믿을 거짓말이다.

“형.”

“…….”

“형. 겨울이 형.”

“왜 새끼야.”

하마터면 답도 안 나오는 주정뱅이에게 팔을 잡힐 뻔했다. 강제로 포박당할 위기를 아슬아슬하게 넘긴 버들이 코를 훌쩍거렸다.

“나 머리 말려 줘.”

자물쇠로 굳게 걸어 잠근 것처럼 꽉 닫혔던, 겨울의 눈이 빠끔히 뜨였다. 부스스 몸을 일으킨 겨울이 관자놀이를 짚었다. 막 씻었는지 버들의 물기 어린 얼굴이 말갛다. 들고 있던 드라이기를 겨울이 가져가자 버들이 쪼르르 의자에 앉았다. 여실하게 버들의 마른 뒷모습을 주시하던 겨울이 드라이기 코드를 꼽았다. 그래. 실제로 골이 빠개지는 한이 있어도, 뭐든 혼자서 해결하려고 구는 버들이 드물게 피우는 어리광이 우선이다. 봄꽃처럼 반갑기까지 한다. 간단하게 씻고 나온 겨울이 본격적으로 버들의 머리를 말려 주었다.

“내일도 형이 머리 말려 줄게.”

“형. 누구랑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신 거야?”

“있어. 너는 모르는.”

“황 대표님?”

“너는 모르는 다른 회사 대표들.”

“그럼 황 대표님은?”

“다른 사람 만나러 가야 돼서 자리에 빠졌어.”

버들이 긴장했다.

“다른 사람? ……누구?”

“뭘 꼬치꼬치 캐묻고 그래.”

“내가 언제 꼬치꼬치 캐물었어?”

“지금. 인마. 꼬치꼬치 캐묻고 있잖아.”

“…….”

입을 꿍하게 다문 버들이 거울에 반사되어 비춰지는 제 형의 벗은 상체를 빤히 주시했다. 근육이 불긋불긋해서 부럽다. 저 정도는 되어야 황 대표님과 나란히 섰을 때 어울릴 수 있을 건데. 옷 속에 손을 넣자 납작한 아랫배가 만져진다. 시무룩하다. 건강한 몸으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내 새끼, 이제 자자.”

버석하게 머리가 말랐다. 드라이기를 아무렇게나 내려놓은 뒤 겨울이 버들을 침대로 잡아끌었다. 겨울의 다리가 낙지처럼 버들의 몸통을 찰싹 감쌌다. 더 나아가 허락도 없이 뽀뽀하려고 뾰족하게 내민 겨울의 주둥이를 버들이 옹골차게 철썩철썩 때려 품 안에서 벗어났다.

문을 쾅 닫고 나간 버들이 주방으로 향했다. 흐린 달빛이 익숙해 굳이 불을 켜지 않아도 괜찮았다. 꿀물을 탄 컵을 들고 버들이 다시 제 형의 방에 들어왔다. 엎드린 채 겨울은 그새 잠이 들었다. 작게 한숨이 폭 새어 나왔다. 일어나면 제 형이 쓰린 속을 바로 달랠 수 있도록 버들이 잘 보이는 테이블 위에 꿀물을 내려놓았다.

사각사각, 필기해 가며 공부를 하는 사이 자정이 훌쩍 넘어갔다. 해바라기가 다발로 꽂혀 있는 화병 앞에 버들이 뒷짐을 진 채 섰다. 망설이고 또 망설이고. 망설이고 나서야 전송 버튼을 겨우 누를 수가 있었다.

[황 대표님. 시든 꽃은 별로예요?]

* * *

비밀번호가 경쾌한 음을 내며 풀렸다. 가만히 문을 연 버들이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갔다. 저절로 숨을 죽이게 된다. 마치 도둑처럼, 이방인처럼. 걱정처럼 누군가 안에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못 보던 짐이 군데군데 놓여 있었다. 공기 중에 떠도는 향수 냄새의 주인은 황 대표가 아니었다. 오피스텔을 빠져나온 버들이 입구 계단에 앉았다. 한가로움을 띤 바람에 나뭇잎이 유유히 나부꼈다. 버들이 굽힌 무릎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괴었다. 지나다니는 차를 주시했다. 확신 없는 기다림이 길다.

보고 싶다.

버들이 황 대표를 찾아 나섰다. 레스토랑을 기웃거리다가 두 대표가 운영하는 사옥으로 향했다. 두 마리의 강아지가 없는 마당이 한적하다. 안으로 들어가자 비서가 벌떡 일어나 반겨 주었다.

“안녕하세요. 잘 계셨어요?”

해사하게 웃으며 버들이 인사했다.

“강아지들은요?”

“유치원 갔어요.”

서로의 안부를 짤막하게 주고받는 동안에도 버들의 신경은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대표님 계세요?”

“유 대표님, 대표실에 계십니다.”

유 대표님 말고, 다른 대표님 계시냐고 바꿔 물으려다가 버들이 그냥 웃었다.

“형?”

“어쩐 일이야?”

깜짝 놀라며 겨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는 실장이 서 있었다.

“놀러 왔어.”

“연락도 없이?”

“왜? 나가 봐야 해?”

겉옷을 걸치고 있는 차림새를 보며 버들이 예상했다. 예상한 게 맞는지 겨울이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버들이 가방을 내려놓으며 소파에 앉았다.

“형 없이도 나 잘 놀아.”

“저녁 형이랑 먹자. 이따가 연락할게.”

선뜻 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에 있을 거야?”

“어. 노트북 가져왔어.”

“무겁게 뭐 하러 그런 걸 들고 다녀.”

“과제 때문에.”

실장이 유 대표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형. 빨리 나가 봐.”

“전화할게. 받아. 알았지?”

“응.”

비서를 호출하려는데 때마침 문이 열렸다. 버들을 위해 마실 것을 챙겨 들어온 비서에게 유 대표가 데스크에 펼쳐진 서류 뭉치들을 턱 끝으로 가리키며 황 대표에게 전달하란 지시를 내렸다. 버들의 노트북 전원이 완전히 켜졌다. 기본 바탕 화면이 밋밋하다. 마우스 몇 번을 까닥거렸다.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제출 기한이 촉박한 과제의 중요도가 뒷전으로 밀려났다.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이미 버들의 커다란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버들이 제 형을 배웅하고 나서 비서를 붙잡았다.

“황 대표님 계세요?”

“네. 대표실에 계십니다.”

심장이 쿵쾅거린다.

“제가…….”

“네?”

비서가 갈무리한 서류 뭉치들을 버들이 주뼛거리며 받아 갔다.

“제가 전해 드릴게요. 비서님, 일 보세요.”

가방을 둘러멘 버들이 황 대표실로 향했다. 벅차다. 노크를 하면서 설렐 수 있는 인생이다.

“네.”

그토록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문밖으로 들려왔다. 입안이 순간 바짝 말랐다. 떨린다. 문을 열기 전 버들이 입고 있는 옷 상태를 점검했다. 최근 겨울이 사 준 새 옷 중에서 고른 건데…… 너무 새 옷이란 티가 나니까 내심 민망해졌다. 그 와중에 더 밝은 톤을 입을 걸 그랬나, 못내 아쉬움이 감돌았다. 머리를 매만지고 두어 번 심호흡을 커다랗게 반복했다. 이제야 마음을 굳히고 문을 열어 볼까, 싶던 찰나였다. 문고리를 채 쥐기도 전에 난데없이 벌컥 문이 열렸다. 깜짝 놀란 버들이 저도 모르게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황 대표에게 손목이 붙잡힌 순간, 안으로 끌려갔다.

이러다 터지겠다, 심장이.

“왜 네가 노크해.”

“제가 노크한 거 아셨어요?”

“바깥에 입구 비추는 카메라만 여덟 대야.”

“…….”

버들이 서류 뭉치들을 건넸다. 황 대표가 아무 말 없이 받아 가 데스크 위에 성의 없이 내던졌다. 철저히 업무만 이뤄지는 중요한 공간에 제 의지로 버들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대표님…….”

손가락을 애꿎게 꼼지락거리고 있는 버들을 황 대표가 느릿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눈이 마주쳤다. 고개를 푹 숙이면서 버들이 옅게 웃었다. 발개진 얼굴이 감정을 투명할 정도로 밝히고 있었다.

“잘 계셨어요?”

“누가 보면 오랜만에 얼굴 보는 줄 알겠다.”

3일이나 못 봤는데……. 그럼 오랜만, 아닌가?

“오피스텔에 갔었어?”

버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표님은요?”

대답은 없었지만 갔었던 거 같다. 만나지 못한 건, 길이 엇갈렸기 때문이었나. 버들의 입술이 조심스레 열렸다.

“저 기다리셨어요?”

“……너를?”

기가 찼다.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황 대표가 웃었다. 가만히 있다 보면 알아서 먼저 찾아와 방긋하게 웃는 얼굴을 들이민다. 저를 향해 꽂혀 있는 버들의 맹목적인 애정은 평생 변함이 없을 거란 확신이 선다. 뒤집힌 세상 탓인지. 몇 달 전과 달리 그게 징그럽거나, 거추장스럽지가 않다. 좋아한단 고백이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소파에 먼저 앉은 황 대표가 버들을 끌어안았다. 손발을 제외하고 온통 따끈따끈한 체온이 전해져 온다. 황 대표가 제 무릎에 앉혀 놓은 버들의 목덜미에 코끝을 파묻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넌 나 없으면…….”

기온이 높은 오후였다.

“…….”

“…….”

황 대표의 뒷말이 한참 뒤에 이어졌다.

“나 없이 잘 수 있어?”

등줄기를 따라 쓰다듬어 주는 커다란 손이 좋아서. 이마를 짚어 오는 관심이 좋아서. 맨살을 지분거리는 체온과 나지막하게 귓가를 울리는 목소리가 좋아서. 없으면 없는 나날만큼, 잠 못 드는 밤이 연속으로 쌓인다.

대답 대신 버들이 황 대표의 품에 폭 안겼다.

두 사람이 고르게 숨을 뱉으며 잠이 들었다.

“우리 어디 가요?”

차창 밖으로 펼쳐진 풍경을 힐긋거리다가 버들이 핸들을 꺾는 황 대표를 쳐다봤다.

“밥 먹으러.”

“아. 우리 밥 먹으러 가는 거예요?”

노을로 인해 황금빛이 너울진다.

“겨울이 형이 밥 같이 먹자고 그랬는데…….”

혼잣말로 버들이 중얼거렸다.

“나랑 먹고 또 먹어.”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모자랐던 수면을 채워 주어서 그런지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피로 회복제나 다름없다. 먼저 눈을 뜬 쪽은 자신이었다. 행운이었다. 잠이 든 황 대표의 얼굴을 보고 또 보고, 계속 쳐다봤다. 반대로 갈증은 더 커다랗게 번졌다.

“대표님.”

“응.”

늘 오는 레스토랑이었다. 안내된 자리에 세 사람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맞은편에 앉으려는 버들을 황 대표가 옆자리로 오게끔 지시했다. 주문을 이따가 하기로 미뤘다. 비어 있는 자리를 보며 버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겨울이 형이 오기로 되어 있나? 숫접게 냅킨을 못살게 굴던 버들이 가방을 열었다.

“이거…….”

“…….”

“대표님 볼펜으로 필기했어요.”

황 대표가 턱을 괴었다. 버들이 팔랑팔랑 페이지를 넘기며 보여 주는 노트를 내려다봤다.

“……잘 썼네.”

흘러가는 칭찬이었다. 버들이 페이지를 북 찢어 황 대표에게 내밀었다.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황 대표가 무슨 짓이냐고 물었다.

“대표님, 가지세요.”

“내가 이걸 가져서 뭐 하게.”

“…….”

버들이 황 대표를 쳐다봤다.

“필요 없어요?”

바로 구겨 버리려는 페이지를 뺏어 황 대표가 노트에 끼웠다.

“나중에 붙여. 보고 새로 쓰던가.”

그렇게 하라니까 버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표님. ……이거.”

버들이 또 가방을 뒤졌다. 뭉치로 꺼낸 게 음식점 전단지다. 황 대표가 버들이 앉아 있는 의자를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무게가 가벼우니 별로 힘을 들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의자 통째로 버들이 쑥 끌려왔다.

놀란 기색이 버들의 표정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빠르게 깜박거리는 버들의 눈동자가 참 깊다. 황 대표와 가까워진 시선에 버들이 숨을 참았다. 그러면서 쇄골이 불거졌다. 황 대표가 고개를 기울여 여린 피부를 핥았다. 부드럽다. 분리된 룸이라고 하지만 어찌됐건 공공장소였다. 황 대표와 맞닿은 시선을 버들이 어색하게 웃으며 피했다. 제 타액이 묻어 번들거리는 버들의 몸이 만족스럽다.

황 대표의 손이 버들의 뒷목을 감쌌다. 음……. 버들이 콧등으로 앓았다. 짧은 키스였다. 짧은 만큼 여운이 길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버들의 귓불이 어느 틈에 붉어졌다.

한 장, 한 장 버들이 정성껏 보여 주는 전단지를 황 대표가 다시 턱을 괴고 내려다봤다. 이런 걸 어디 가서 모아 왔는지 모르겠다. 헛웃음이 피식, 피식 켜졌다.

“먹고 싶지 않아요?”

“응.”

“저 이거 할 줄 아는데.”

쌀국수다.

“안 좋아해요?”

“응.”

“이건요?”

뼈다귀 전골을 가리켰다.

“별로야.”

“별로예요?”

“응.”

파스타, 초밥 차례대로 버들이 보여 줬다.

“싫어해요?”

“응.”

황 대표는 늘 가는 장소만 가고, 먹는 음식만 먹는다. 그리고 저는 가 본 적 없고, 먹어 본 적 없는 음식들이 수두룩했다. 처음으로 겪게 될 경험을 둘이서 하고 싶었다. 집착은 그걸 토대로 시작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처음인 걸 함께한다는 것.

전단지를 쥐고 있는 버들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황 대표와 함께 색다른 곳에 찾아가 맛있는 음식을 먹는 걸 상상하면, 그 막연한 상상만으로 사는 게 즐거워졌다. 사는 게 즐거워지면 안 되는데…….

전단지를 가방에 쑤셔 박았다.

“대표님, 이거 볼래요?”

여행 책자를 꺼내려던 순간 문이 열렸다.

황 대표가 자주 웃었다. 저를 비롯해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확연히 다르단 걸 함께 살았던 적이 있는 만큼 버들은 더 빠르게 알아차렸다. 목구멍이 조였다. 현재 느끼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그저 실처럼 복잡하게 꼬여 있어 어지럽다.

분위기가 유하다. 잔에 커피를 내린 혜주의 입가에 긴 머리카락이 붙었다. 그걸 황 대표는 무시하거나 단순한 말로 지적하지 않았다. 대신 팔을 뻗어 직접 귀 뒤로 넘겨 주는 황 대표의 행동을 버들은 끝내 쳐다보지 못했다. 손끝을 타고 모든 맥박이 도근거린다. 소극적으로 말린 버들의 둥근 어깨를 뻔히 알아차렸음에도 황 대표는 혜주가 누군지 여전히 설명해 주지 않았다.

버들의 접시만 음식이 줄지 않았다. 누굴까. 황 대표와 혜주의 관계를 예측했다. 잘은 몰라도 둘이서 오래된 사이란 건 분명했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만이 룸을 채웠다. 과거와 미래를 쉽게 넘나든다. 저는 알지 못하는 이야기뿐이었다. 철저하게 없는 사람 취급당하면서, 버들은 일분일초 상처 받고 있었다. 그러면서 차마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진 못했다. 옆에 황 대표가 있었기 때문에. 가슴팍이 답답하다. 힘껏 주먹으로 두드리고 싶은 걸 애써 참았다. 소화제 생각이 간절해진다.

“오피스텔로 올 거지.”

“이따가. 퇴근하면.”

혜주가 자리를 뜨면서 다시 버들과 황 대표만 남겨졌다.

“……누구에요?”

머릿속에서만 빙빙 맴돌던 말이 튀어 나갔다.

“애인이에요?”

“애인이면.”

가볍게 황 대표가 대꾸했다. 애초에 혜주와 둘이서 예정되었던 식사를 황 대표가 동의 없이 버들을 끼워 넣었다. 혜주와 둘이 있는 것보단 확실히 나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기분은 안정적이었다. 오피스텔에 둔 혜주의 짐을 다른 집이나 호텔로 옮기라고 할 예정이었다. 그러면서 허투루 짚은 버들의 착각을 굳이 고쳐 주지 않았다. 단물 다 빨아먹으라고 한 것도, 이용해도 된다고 허락한 것도 모두 버들이었다.

“일어나. 집에 데려다줄게.”

버들이 마른 침을 삼켰다.

“우리, 예전이랑은 달라요.”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예전이랑은…….”

“애매하게 둘러대지 말고 할 말 있으면 확실하게 해. 답답하니까.”

“대표님이랑 저, 예전과 달라요.”

“어떻게 다른데.”

황 대표의 여유로움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키스하잖아요. ……안고.”

“키스하고 안고. 그래서 뭐.”

“……달라요.”

버들이 중얼거렸다.

“우리…….”

간신히 입술을 뗐다.

“우리,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예요?”

“네가 말해 봐. 뭐 하고 있는 거 같아? 연애는 아닐 거고.”

“…….”

목이 타들어 가는데 손이 덜덜 떨려 눈앞의 물 잔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진정되지 않는 제 손끝을 버들이 서로 붙잡았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천국에 있었다. 예고 없이 밑바닥까지 추락한 기분이 든다.

“……모르겠어요.”

피하는 게 아니었다. 그게 최선의 대답이었다. 키스하고, 안고……. 서로가 없으면 잠들지 못한 건 똑같지만 이게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기대하지 않기로 독하게 다짐하면, 그걸 황 대표가 뿌리째 흔들어 놓는다. 저는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는데 불현듯 도중에 달라진 건 황 대표였다. 웃어 주고, 이름 불러 주고, 만져 주고, 걱정해 주고, 챙겨 주고.

왜 웃어 주는지. 왜 자꾸 이름은 부르는지. 왜 만지는지. 왜 열이 나나 새벽 내내 걱정은 했는지. 왜 식사를 챙겨 주는지. 억울하다. 황 대표의 마음이 아주 조그맣게라도 자신에게 기울고 있는 걸까, 스치듯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황 대표에게 어느 것 하나 따져 물을 자신은 없었다. 코끝이 시큰거렸다.

“내가 너 데리고 노는 거라는 생각은 안 해 봤어?”

황 대표가 버들의 볼에 묻은 속눈썹을 떼 주었다. 여린 피부에 자극이 될까 힘을 뺀 손길이 물씬 상냥하다. 대답 없는 버들의 얼굴을 감싼 손이 눈높이에 맞춰 위로 들어올렸다. 황 대표가 웃었다. 순한 성격이 화를 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저 데리고 놀면, 재밌어요?”

그래 봤자 밟힌 지렁이가 꿈틀거린 수준이다.

“어떨 거 같아?”

“…….”

“재밌는 건 너 하기에 달렸지.”

“…….”

황 대표가 살짝 입을 맞추었다. 버들의 눈가가 살짝 경련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오기로 물었다. 그런 제 귓가에 황 대표가 속삭였다.

“좋아한다고 말해 볼래?”

그 순간 진심으로 울고 싶어졌다.

* * *

사업을 크게 확장시킨 만큼 회사는 더욱더 바빠졌다. 대표로서 당연히 맡아야 할 업무량과 책임져야 하는 일들이 함께 늘어났다. 회의가 릴레이로 진행됐다. 당장에 꺼야 하는 급한 불이었다. 그러니 다음으로 일정을 미룬다거나 일정을 분산하고 조절하는 게 불가능했다. 부서마다 의견이 조율되지 않아 서로 언성이 높아지는 경우가 있었다. 두 대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해외 마케팅으로만 책정된 예산이 컸다. 최대한 오류 없이 체계적인 방향을 잡기 위해 다들 신경이 바짝 곤두세워져 있는 상태였다. 흡연실의 담배꽁초들이 수북하게 쌓여 갔다. 하루를 꼬박 채우고 다음 날 정오가 되었을 때야 비로소 진행 사항들이 일단락 지어졌다.

스크린 전원이 꺼짐과 동시에 들고 있던 볼펜, 서류 따위들을 책상에 던지듯 내려놓는 소리들이 겹쳤다. 진이 빠진 직원들이 너도 나도 엎드렸다. 누군가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제정신을 차리고 둘러본 주변이 말 그대로 초토화다. 간단히 배를 채울 수 있는 음식들과 마시다 만 음료수 등이 무질서하게 잔뜩 어질러져 있었다. 이틀의 휴가를 얻은 직원들이 퀭해진 몰골로 앞다투어 퇴근했다.

대표 둘만 남았다. 북적거렸던 회의실이 찬물을 뿌린 것처럼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그제야 들려오는 소음들이 있다. 나뭇가지를 박차고 날갯짓하는 새들의 움직임이라든가, 낮게 울리며 작동되는 공기 청정기 같은.

손가락에서 원을 그리며 돌아가던 볼펜이 황 대표의 손에서 뚝 떨어졌다. 수영이나 갈까. 예정되어 있는 하루 일과를 머릿속으로 정리 중이던 황 대표가 아, 하고 맞은편에서 들려온 신음에 고개를 들었다. 눈을 감고선 고개를 젖힌 유 대표가 최대한 편한 자세로 늘어져 있었다. 푸석해 보이는 꼬락서니가 아무래도 밤을 새우는 게 무리였던 모양이다. 시큰거리는 눈가 주변을 유 대표가 손바닥으로 눌러 마사지했다.

전체적으로 기운 빠진 유 대표와 달리, 황 대표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태연했다. 시골에서 돌아온 뒤로 낮과 밤을 바꿔 생활하는 중이었으니 황 대표에겐 별로 타격감이란 게 없었다. 그저 익숙한 하루가 시작되었을 뿐이다. 당장 수면 욕구도 없다. 이따가 버들을 안고 자면 되는 거니깐.

“운동이나 하러 가자.”

“……안 피곤해?”

운동이라니. 유 대표가 황당하단 듯 묻는 말에 황 대표는 대꾸하지 않았다.

“너 나 몰래 뭐 먹어?”

“뭘 먹어.”

“정력에 관련된 뭐 그런 보양식 종류들.”

“예를 들어 봐.”

“뱀이나.”

황 대표가 인상을 찌푸렸다.

“취소.”

저가 뱉은 헛소리를 유 대표가 깔끔하게 거두었다. 예시가 몰상식했단 걸 인정했다. 그리고 오래 알아 온 세월만큼 예민한 황 대표의 취향 또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비위가 약해서 뭔 보양식을 처먹겠어.

나란히 넥타이를 헐렁하게 잡아당겼다.

“전화.”

황 대표가 싸가지 없이 유 대표의 핸드폰을 향해 턱을 까닥였다. 게으른 태도로 유 대표의 고개가 꺾였다. 무음으로 설정해 뒤집어 놓은 핸드폰에서 불빛이 짧게 번쩍거리다가 만다. 전화가 아닌 메시지 도착 알림이었다.

“아. 누가 허락 없이 메시지를 보내고 지랄이야.”

땅이 꺼져라 커다랗게 한숨을 내쉰 다음 유 대표가 핸드폰을 집었다. 전원을 켜기까지 귀찮음이 노골적으로 묻어난 얼굴이 참 가관이었다. 하지만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언제 피곤했냐는 듯 유 대표가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았다. 뒤집힌 동전처럼 안색이 밝게 바뀌었다. 그것도 모자라 입가에 실실 웃음이 걸렸다. 빠르게 손가락을 놀려 답장을 보내 놓고 나서도 뭐가 아쉬운지 유 대표의 시선은 계속 핸드폰 화면에 고정된 채였다. 황 대표가 물병의 뚜껑을 돌려 땄다.

“운동은 나중에 가고, 한숨 자라.”

“허락 없이 지랄 떤 상대가 누구야.”

메시지를 누가 보낸 건지 목을 축이며 황 대표가 성의 없이 물었다.

“내 새끼.”

요즘 만나고 있는 상대 정도로 예상했던 게 비껴갔다. 대답을 들은 황 대표의 시선이 곧장 벽에 붙은 시계로 향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더라.

“맛있는 거 해 놓고 기다리고 있다는데 딴 데로 어떻게 새냐. 어차피 잠도 자야하고. 아무튼, 난 지금 집에 들어간다.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누가 팔불출 아니랄까 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유 대표가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다. 혼자 남겨진 황 대표가 차 키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느릿한 박자감이었다. 서늘했던 눈빛이 불만으로 옅게 일그러졌다. 버들의 학교 시간표를 외우고 있었다. 그러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오늘은 오전에 수업이 딱 두 개뿐인 날이었다. 이 시간에 집이라니. 수업 끝나는 대로 나 만나러 오피스텔에 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식탁에 턱을 괴고 앉아 있던 버들이 귀가한 제 형에게 뛰어갔다. 서두르느라 슬리퍼가 벗겨질 뻔했다.

“진짜로 일찍 왔네?”

바쁘게 일하는 통에 하루 동안 못 본 겨울을 버들이 반겼다. 음식이 데워지고 있는 사이, 때마침 겨울이 씻고 나왔다. 버들이 각자의 자리에 물컵과 함께 미리 정리해 놓은 식기들이 참 정갈하다. 젓가락 끝이 엇나가지 않고 일정하게 맞춰져 있다. 젖은 머리를 겨울이 수건으로 탈탈 털었다. 물기가 버들의 팔뚝까지 튀었다.

“말리고 와. 머리.”

“이따가.”

멀뚱거리며 서 있는 버들을 먼저 의자에 앉혀 놓고선 겨울이 궁금한 안부를 물었다.

“잘 잤어?”

“응.”

“아침밥은?”

“먹었지.”

잘 자지도 못했고, 아침 식사는 먹은 대로 전부 토했으면서 버들의 입을 통해 나오는 대답은 전부 긍정적이었다. 그런 식의 거짓말이 익숙했다.

“형은? 조금이라도 잤어?”

“잘 틈이 어디 있었겠어.”

“……밥도 잘 못 챙겨 먹었겠다.”

그저 겨울이 씩 웃었다. 그러다가 버들의 지시를 따라 전골을 식탁 위에 옮겼다. 홍합과 새우, 조개들이 가득하다. 냄새를 맡자마자 어떤 요리인지 뻔히 다 알아차렸으면서 겨울이 모르는 척 물었다.

“이게 뭐야?”

“부야베스.”

“샀어?”

“이걸 어디에서 사?”

“그럼.”

“뭐야. 아까 문자로 내가 직접 만들었다고 했잖아.”

“산 것처럼 보여서 물어본 거지. 이걸 어떻게 직접 요리했어?”

국물을 떠먹는 겨울을 보며 버들이 조심스레 물었다.

“맛은 어때? 괜찮아?”

“응.”

버들의 눈가가 휘어졌다. 주방을 독차지하고 본격적으로 팔을 걷어붙인 보람이 있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았다. 감자를 깎고, 양파를 다지고, 오렌지 즙을 내고, 육수를 우리고, 해물을 손질하고. 시간이 꽤 걸려 완성된 프랑스 해물 스튜는 며칠 전 유 회장이 나름의 비법을 섞어 요리했던 음식이었다. 그날 겨울은 늦게까지 회사에 있던 통에 함께 저녁 식사를 하지 못했다.

유 회장의 옆에서 착실하게 보조를 했던 덕분인지 처음엔 가물가물했던 요리 순서가 갈수록 상세히 떠올랐다. 버들이 물을 들이켰다. 생각을 애써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해도 황 대표로 귀결이 나고 만다. 황 대표님은 해물 요리 좋아하실까? 먹겠다고 한다면 뭐든 내가 다 만들어 줄 수 있는데.

식사를 끝낸 겨울과 버들이 각자의 방으로 헤어졌다. 구역질을 참느라 혼났다. 버들이 곧장 화장실로 뛰어갔다. 목구멍이 부어서 침만 삼켜도 따끔거린다.

침대 끝에 걸터앉은 버들이 벽에 옆머리를 기댔다. 학교를 관뒀다. 남아도는 시간을 뭘 하면서 채워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재깍재깍, 유독 부각되어 들려오는 시곗바늘 소리가 낭떠러지를 향해 등을 밀치는 거 같아 신경이 초조해진다. 창문을 통해 불어닥친 바람에 버들의 머리가 흩날렸다.

손가락을 한참 꼼지락거렸다. 그래 봤자 고작 30분이 지나간 뒤다. 무료하게 감았다 뜬 버들의 눈에 완성 직전의 제 조각품이 담겼다. 어찌되었건 학점 ‘D’란 참담한 성적은 피할 수 있었으니 다행이라고 봐야 하나.

버들이 화병 앞으로 걸어갔다. 바닥 주변에 시들어 마른 잎들이 떨어져 있었다. 그걸 주워 휴지통에 넣었다. 앞치마를 걸치고 조각도를 들었다가 내려놨다. 날씨가 좋으니까 바깥으로 나갔다.

마당 한쪽 구석에 쪼그려 앉아 버들이 천을 염색했다. 집중한 만큼 저도 모르게 입술이 점점 튀어나왔다. 그냥 선물했다면 또 모를까. 서툰 실력으로 굳이 자수를 새겨 넣은 바람에 우글우글해진 손수건은 가치가 떨어졌다. 정성을 흉내 내지 말고 저가 잘하는 걸로 황 대표에게 선물해야겠다.

빨랫줄에 걸린 천이 팔랑팔랑 흔들렸다. 새파란 하늘과 잘 어울린다.

“……이제 뭐 하지.”

버들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핸드폰을 챙겨 들고 무작정 대문 밖을 나섰다. 목적지 없이 산책하려고 했는데 어느덧 시끄러운 걸 좇고 있다. 공원 벤치에 앉았다. 가까운 위치에서 허름한 농구 골대 밑을 뛰어다니는 제 또래들이 보인다. 공을 사수하기 위해 격하게 몸싸움을 하면서도 다들 즐겁게 웃는 얼굴이다. 햇볕에 반짝거리는 땀이 건강함을 상징하는 듯하다. 물끄러미 버들이 그쪽을 쳐다봤다.

……나는 담배 피우니까 괜찮아.

까마득하게 잠겨 있던 기억을 버들이 꺼냈다. 어린 날, 무아지경으로 공을 차며 달리고 다녔었던. 그때의 심장 박동보다 황 대표를 보며 뛰는 심장 박동이 더 거세다. 그러니까 진짜로 괜찮다. 부럽지 않다.

두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한 통의 전화는 정민이었다. 왜 학교를 관뒀는지 속사포처럼 묻는다. 침이 꼴깍 삼켜졌다. 유학 가게 되었다며 버들이 차분히 둘러댔다. 느닷없이 맞게 되는 헤어짐이 자신에겐 당연했다. 은연중에 학습되어 아무렇지도 않았다. 발치의 돌멩이를 버들이 툭 걷어찼다. 갑자기 웬 유학이냐며 따져 묻는 정민이 송별회를 하자며 만날 날을 정했다. 나와! 알았지? 꼭 나와! 막무가내로 약속을 밀어붙인다. 친구를 사귄다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그랬을까. 이상한 감정이 맴돈다. 한참 뒤, 알겠단 대답을 남기며 버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디야.

다른 한 통의 전화는 겨울이었다.

“나 잠깐 밖인데.”

-밖, 어디?

“지금 집에 가고 있어.”

-얼마나 걸리는데?

겨울의 목소리가 자다 깨서 꽉 잠겨 있다.

“금방 도착해.”

아닌 척하나 유난 떨고 자빠진 제 형을 안심부터 시켜 놓은 다음 버들이 벤치를 벗어났다.

집에 돌아온 버들을 겨울이 반겼다. 차를 우리며 겨울이 가만히 버들의 기분을 살폈다. 학교 수업과 병원 예약 시간이 자꾸 겹쳤다. 학교를 좀 더 다니고 싶어 하는 버들이 병원에 가지 않겠다며 고집을 피우면 어쩌나 싶었는데 쓸데없는 기우에 불과했다. 납득하며 버들이 학교를 관뒀다.

“어디에 있다가 왔어?”

“편의점.”

“뭐 샀어?”

“응. 껌.”

버들이 주머니에서 껌을 꺼내 겨울에게 건네줬다.

“은단 껌이네. 누가 효자 아니랄까 봐.”

하얗고 고른 치아를 드러내며 버들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껌 사 온 걸로 온갖 칭찬을 다 퍼붓는다. 아무것도 모르는 남들이 봤다면 무슨 난리냐고 분명 흉봤을 거다. 오래오래 같이 못 살 수도 있는 거니까 한꺼번에 몰아서 예뻐해 주는 거 누가 모르나. 나도 한꺼번에 몰아서 누굴 예뻐해 주는 중이라 어떤 기분인지 이해한다. 동정하지 않기로 약속해 놓고 왜 자꾸만 동정하는 거냐고 말하는 대신 버들이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 * *

오피스텔 비밀번호를 한참 머뭇거린 뒤에야 눌렀다. 문이 열렸다. 버들이 조심스레 안쪽으로 발을 옮겼다. 다른 사람의 짐이 보이지 않는다. 꼭 못된 짓을 하는 것처럼 불안하다. 안을 뒤졌다. 보물처럼 보관했던 황 대표의 머플러를 괜히 오피스텔에 전시했나 보다.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제자리에 선 버들이 엄지손톱을 자근자근 씹었다. 뭐지? 황 대표님이 자기 거라고 다시 챙겨 가신 걸까?

휴지통에서 수첩을 발견했다. 그걸 가방에 집어넣었다. 부리나케 도망치듯 나오는 길에 황 대표와 부딪혔다. 서로 인사 없이 서 있었다.

“잘됐네.”

황 대표가 버들을 차에 태웠다.

“우리 밥 먹으러 가요?”

“…….”

“근데 저 밥 먹었는데…….”

“…….”

“……대표님.”

우리 둘이서만 밥 먹는 거냐고 묻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수업 끝나면 전처럼 오피스텔로 와.”

준비된 자리가 또 셋이다.

……밉다. 그렇지만 여전히 소중하다.

“대표님. 이거요.”

빈자리를 애써 모른 척하며, 버들이 가방 속에서 여행 책자를 꺼냈다. 읽어 주고 보여 주고. 그러면서 틈틈이 황 대표의 표정을 살폈다.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는지 무감한 표정이다.

“대표님. 저랑 궁에 갈래요? 돌담길 걸어요.”

“피곤해. 사람 많은 곳은 질색이고.”

“오늘 말고요. 사람 적은 평일에 대표님 안 피곤할 때.”

“오늘 아니고도 피곤해.”

“…….”

버들이 코를 훌쩍거렸다. 이어서 요리책을 꺼냈다. 재료 따위들을 상세히 언급하며 버들이 이건 어떤지, 저건 어떤지 물었다. 버들의 조용조용한 목소리가 귓가로 스민다. 한가로운 기분이 든다. 대답도 하지 않고 황 대표가 고개만 가로저었다. 버들이 문득 불퉁해졌다. 저만 계속 진지하고 황 대표의 태도는 무척이나 나른해 보인다. 아직 남아 있는 페이지가 많았지만, 요리책 표지를 버들이 팍 덮었다.

곱지 않은 눈초리로 황 대표를 흘겨봤다가 그 이유로 볼을 꼬집혔다. 그 주위로 열꽃이 피듯 피부가 붉어졌다. 버들의 속눈썹이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퍽퍽, 제 볼을 손바닥으로 쓰다듬는 버들의 손목을 잡아 그러지 못하게 황 대표가 테이블 위로 얌전히 내려놓았다.

“아파?”

“아니요.”

“아픈 거 잘 참잖아.”

“…….”

“못 참아?”

“잘 참아요.”

황 대표가 또 볼을 꼬집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버들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남은 한 자리가 채워지자 곧 식사가 차려졌다. 작게 조각낸 고깃덩어리를 버들이 입에 넣고선 오래 씹어 삼켰다.

“호텔은 어때.”

“편해.”

황 대표의 머플러와 수첩에 ‘H’라고 새겨진 자수를 누가 새겼는지 알겠다. 버들의 척추가 굽었다. 귀라도 막아 황 대표와 혜주가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무관심 속에 버들의 심장이 몇 번이나 추락해 바닥을 뒹굴었다.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혜주가 중간에 자리를 떴다.

“대표님…….”

겨우 입을 뗐다.

“결혼해요?”

약혼식 일정이 황 대표와 혜주 사이에서 오고 갔다. 황 대표가 버들을 쳐다봤다.

“해야지.”

“……언제요? 곧?”

“결혼이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하고 싶다고 해서 바로 할 수 있는 건 줄 알아?”

두 사람이 참 잘 어울렸다. 손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하실 거예요? 나중에? 진짜로 결혼해요?”

가만히 깜박이는 버들의 커다란 눈을 황 대표가 주시했다.

……울려 볼까.

“넌.”

“……저 뭐요?”

“결혼.”

“아. ……저도 결혼할 거예요.”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황 대표가 웃었다. 비웃음이었다.

“언제.”

“제가 좋아하는 만큼, 저 좋아해 주는 사람 나타나면요.”

호흡이 불안정했다. 가까스로 말을 끝냈다.

“그게 언젠데.”

“몰라요. 그냥 살다 보면…….”

눈물이 야트막하게 어룽졌다.

“결혼 못 하겠네.”

“……9년 뒤에 결혼할 거예요.”

“언제 결혼할지 모른다면서.”

“9년 뒤에 할 거예요.”

아래로 감춘 손을 버들이 주먹 쥐었다.

“왜 9년 뒤야.”

“대표님 나이까지 살다 보면, 혹시 저랑 똑같은 방식으로 저 좋아해 주는 사람이 나타날지도 모르잖아요.”

“결혼하고 싶을 정도로 누가 너 같은 걸 좋아해.”

버들의 고개가 숙여졌다.

“거울 안 봐? 너 지금 살 다 빠져서 곧 죽을 환자 같아. 못생겼고.”

큰 눈이 끝내 울지 않았다.

적막한 집 안에 황 대표가 들어섰다. 라디오를 켰지만 허전함이 완벽하게 채워지지 않는다. 며칠 연속 충분하게 잠을 자지 못하니 머릿속이 붕 뜬 것 같아 불쾌하다. 괜히 시골에서 나왔나. 화려한 야경이 시들면서 날이 밝았다. 수영을 다녀온 뒤 침대에 누워 시간이 가길 기다렸다. 버들의 시간표를 떠올렸다. 몸을 일으킨 황 대표가 옷을 갈아입고 향수를 뿌렸다. 그대로 차를 끌고 간 곳이 버들의 학교 앞이었다.

「오피스텔, 당분간 못 가요. 중간고사 때문에 공부해야 돼요.」

나 없으면 잠도 못 자는 게 무슨 공부야.

교문 앞에서 기다리기 잠깐이다. 황 대표와 버들의 시선이 좀 멀찍이 떨어진 거리에서 부딪쳤다. 시끌벅적하게 버들을 둘러싸고 있는 다른 사람들은 황 대표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기묘한 조바심으로 기분이 바닥을 쳤다. 황 대표가 미간을 찌푸렸다.

웃고 있던 버들의 얼굴이 굳었다. 제 곁으로 오란 듯 황 대표가 무심히 턱을 까닥였다. 본능적으로 황 대표에게 가고 싶은 걸 버들이 참았다. 뭐지. 내가 여기에 있는 거 어떻게 알고 오셨지? 학교 관둔 거, 모르시겠지? 조마조마하다.

“찜질방 가서 라면에 계란에 식혜에…….”

버들이 황 대표를 스쳐 지나갔다. 어쩌다 보니 정민의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게 됐다. 곁눈질로 황 대표를 훔쳐본 정민의 친구들이 잘생겼다고, 누구냐고 호들갑을 떠는 동안 버들은 계속 침묵했다. 아무도 못 보는 곳에 황 대표를 숨겨 두고 싶은 마음이 불쑥 몸집을 키웠다. 힘만 셌다면. 황 대표님보다 힘세게 태어났다면. 어쩌지 못할 아쉬움이 느껴졌다.

……찜질방? 기가 찬다.

헛웃음을 켠 황 대표가 버들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새파란 하늘이 높게 펼쳐져 있었다. 사우나 앞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던 정민이 씩씩거리며 버들에게 화부터 냈다. 버들이 뒤를 힐긋거렸다. 황 대표의 그림자를 발견하고선 혹여 정민이 딴소리를 할까 입을 가로막았다.

황토 색깔의 옷을 각자 나눈 뒤 여자는 여자끼리, 남자는 남자끼리 흩어졌다. 황 대표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살면서 이딴 곳을 오게 될 줄이야. 계산 후 황 대표가 버들이 들어간 문을 열어젖혔다. 훅 끼쳐 오는 열기가 단박에 거슬린다. 황 대표가 곧장 버들을 발견했다.

“뭐 해?”

쭈뼛거리는 버들을 보며 정민이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선 찜질하러 위층으로 사라졌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버들이 황 대표를 무던히 의식하는 중이었다.

“옷 안 갈아입어?”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정민이 물었다.

“갈아입을 거야.”

버들의 말끝이 늘어졌다.

“너 찜질방 처음 와 보지?”

“…….”

“옷 벗기 민망해서 그런 거면 가려 줄까?”

정민이 수건을 흔들어 보였다.

“너 먼저 올라가.”

“같이 가.”

“…….”

“알았어. 그럼 찜질방 입구에서 기다릴 테니까, 빨리 와.”

티 나지 않게 한숨을 쉰 버들이 바지 버클을 풀었다. 뚫어져라 저를 쳐다보고 있을 황 대표가 신경 쓰인다. 아무렇지 않은 척 옷을 갈아입고 싶지만, 그게 마음처럼 쉽지가 않다. 이러다 심장이 터지게 생겼다. 버들의 바지가 골반 밑으로 살짝 흘렀다. 더는 못 봐주겠는지, 인상 쓴 황 대표가 움직였다. 버둥거리는 버들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왔다. 곧 속옷이 보일 정도로 아슬아슬하다. 신경질적인 손길로 황 대표가 버들의 바지 버클을 대신 채웠다. 순간, 황 대표의 손등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던 버들이 무슨 짓이냐며 뒤늦게 펄쩍 뛰었다.

“너 저기가 얼마나 지저분한지 알아?”

“매일 청소한다고 종이에 쓰여 있었어요.”

“너 진짜 옷 벗으려고 했어?”

“…….”

버들의 입술이 달싹거리다가 이내 닫혔다.

“다른 사람한테 몸 보여 줘도 돼?”

“……네?”

목, 쇄골, 허리, 등, 무릎, 어깨, 배꼽, 아랫배, 허벅지……. 아무튼, 생긴 대로 논다고 순하고 말랑거리는 버들의 몸을, 그게 머리카락 한 올이 됐든 아무에게나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다시 들어갈 거야?”

“…….”

버들이 망설였다.

“집에 데려다줄게.”

선택지가 두 가지라도 어차피 고를 답은 하나로 정해져 있었다. 아까 교문 앞에서 황 대표를 피했던 이유는 다른 사람이 낀 식사 자리에 또 가야 할까 봐 그랬던 거다. 좁은 차 안에 갇혀 집에 가는 동안만이라도 황 대표님과 단둘이 있을 수 있는 거겠지?

운전하는 황 대표를 쳐다보며 버들이 넋을 뺐다.

“내려.”

버들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데굴데굴 굴렀다. 처음 와 본 곳이었다.

“여기 저희 집 아닌데요.”

“이제부터 너희 집 할래?”

엘리베이터 앞에서 눈만 깜박거리는 버들의 손목을 잡고 황 대표가 집 안으로 데려갔다.

“……여기 어디에요?”

“내 집.”

사실은 황 대표에게 대답을 듣기 전부터 알아차렸다. 온통 황 대표님의 냄새가 난다. 두근거린다. 황 대표가 차 키를 던지고 냉장고를 열어 물을 꺼냈다. 현관 쪽에 서 있는 버들을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바라봤다.

“집에 누구 데려온 거 처음이야.”

버들이 숨을 참았다. 또. 멋대로 기대감을 심어 준다.

“……집에 가야 돼요.”

“이따가 바래다줄게.”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거실 중앙을 차지한 소파에 황 대표가 앉았다.

“집에 가서 할 거 있어요.”

“할 거 뭐.”

“과제.”

“세 시간 정도 여유도 없어?”

“…….”

가까이 다가온 버들을 황 대표가 제 무릎에 앉혔다. 버들의 체온과 무게가 전해지자 아, 탁한 탄식이 입안을 맴돈다.

“너 나 없으면 잠 못 자잖아.”

내가 잠을 못 잔만큼 황 대표님 역시 잠을 자지 못한다. 나는 못 자는 거 상관없는데……. 좋아하는 마음이 약점이 된다는 걸 깨닫고 나니 서러움이 목구멍을 건드린다. 나는 그냥, 내가 줄 수 있는 걸 다 주고 해 줄 수 있는 걸 다 해 주고 싶었을 뿐인데.

버들의 눈썹이 축 처지면서 침울해졌다. 1초도 안 되는 찰나였지만, 무의식중에 그런 버들의 표정을 황 대표가 따라 했다.

“쳐다보지 마요.”

“네가 안기면 되잖아.”

“대표님 먼저 주무세요.”

황 대표의 커다란 손이 버들의 목덜미를 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가까워진 귓불을 빨았다. 달다.

“……아.”

흠칫거린 버들이 얼른 상체를 뒤로 물렀다.

“귀, 빨지 마요.”

“알았어.”

귀를 빨지 말라고 했더니 황 대표가 입술을 빨았다. 입술을 빨지 말라고 했더니 쇄골을 빨고. 쇄골을 빨지 말라고 했더니 어깨를 빨고. 어깨를 빨지 말라고 했더니 팔을 들어 안쪽을 빨고. 팔을 빨지 말라고 했더니 가슴팍 사이를 빨고. 가슴팍 사이를 빨지 말라고 했더니 왼쪽 젖꼭지를 빨고. 젖꼭지를 빨지 말라고 했더니 손가락으로 툭, 건드리고. 손가락으로 건드리지 말라고 했더니 배꼽 주변을 핥고. 배꼽 주변을 핥지 말라고 했더니 허리를 이빨 자국이 나도록 깨물었다. 그런 식으로 버들의 상체에 황 대표의 입술이 안 닿은 곳이 없었다.

“왜?”

저를 향한 말간 눈빛을 마주하며 황 대표가 뻔뻔하게 물었다. 어느덧 버들이 눕혀져 있었다. 한쪽 팔도 옷 밖으로 빠져 나와 있는 상태였고.

황 대표의 밑에 깔린 버들이 당황스러운지 숨이 가빠졌다. 황 대표가 다시 버들을 일으켜 제 무릎에 앉혔다. 한쪽 팔이 빠진 옷을 제대로 입혀 주면서 황 대표가 입술을 겹쳤다. 숱 많은 버들의 속눈썹이 감겼다. 녹아들 듯 두 사람의 체온이 섞였다. 버들의 콧잔등에 주름이 졌다. 점막을 헤집는 황 대표의 입맞춤에 머릿속이 곤죽으로 변해 흘러내릴 것만 같다. 입천장을 긁는 황 대표의 혀끝에 오금이 절절하게 저렸다. 움칠거리며 떨던 버들이 고개를 살짝 비틀었다. 숨을 잘 못 쉬고 버거워하는 버들의 한계를 황 대표가 알아차렸다. 입술을 놓아주자 지쳤는지 곧장 제 어깨에 축 기대 버린 버들의 얼굴을 황 대표가 감싸 들어 올렸다.

타액으로 젖은 버들의 입술이 붓기 시작했다. 그게 만족감을 피운다.

“대표님은 아무나하고 키스해요?”

황 대표는 버들의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긍정으로 알아듣고, 버들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맺혔다. 황 대표의 팔을 뿌리치고 버들이 무릎에서 내려왔다.

“우리 이렇게 자요.”

나란히 앉았다. 한 몸처럼 겹쳐져 있지 않은 이상 이게 뭔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황 대표가 인상을 쓰자 버들이 꿈질거려 간격을 빈틈없이 좁혔다. 서로의 허벅지 측면이 닿았다. 어이가 없어서 헛바람이 켜졌다.

휘황찬란하게 석양이 진다.

같이 있는데도 잠들지 못한 황 대표의 옆에서 버들이 어느새 곯아 떨어졌다. 툭 치니까 버들이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황금빛 노을이 버들의 속눈썹과 손톱 끝을 물들였다. 옷 밖으로 척추뼈가 여실하다. 오르락내리락하는 버들의 등을 쓰다듬던 황 대표가 제 볼을 살짝 대 보았다.

왜 자꾸 마르지.

품 안이 허전하다고 느껴지는 순간 황 대표가 잠에서 깼다. 손끝까지 삽시간에 번진 허전함을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이 채웠다. 밖은 어느덧 어둑어둑했다. 제 집 안 곳곳을 기웃거리고 있는 버들의 뒷모습을 나른하게 풀린 눈꺼풀로 황 대표가 바라봤다.

넓은 면적에 비해 가구나 소품들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구경할 게 뭐가 있다고 버들의 고개가 바지런히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귓바퀴로 이어져 목덜미를 타고 내려오는 선이 참 곱다. 황 대표의 입가가 나긋해졌다.

오늘이나 내일, 떼어 버리려던 포스트잇 앞에서 버들이 한참을 머물렀다. 반대쪽으로 버들의 걸음이 옮겨갔다. 높은 천장과 벽면 전체를 차지하고 있을 만큼 큰 규모의 책장에는 서적들로 빈틈이 없었다. 그걸 쳐다보고 있는 버들이 현재 어떤 눈을 하고 있을지 예상된다. 호기심으로 가득가득한 눈빛이 반짝거리겠지.

황 대표가 소파에 누웠다. 그러자 천천히 책장을 따라 이동하는 버들이 시야에 옆으로 담긴다. 정신이 책장에 온전히 팔려 있는 게 불안했다. 제대로 앞을 보라고 지적하기 전에 버들이 장식으로 놓아둔 의자와 부딪히고야 말았다. 소리가 꽤 크게 났다. 황 대표의 미간이 구겨졌다. 부딪힌 자기 무릎이나 어떨지 좀 살피지 풀썩 주저앉은 버들이 의자를 만져 보고 있다. 얼핏 보이는 손가락에서 당혹스러움이 전해진다. 자기 나름대로 의자가 멀쩡하단 판단이 드나 보다. 작게 터진 한숨은 안도에서 비롯된 것일 테고. 버들의 고개가 뒤쪽을 향해 오자 황 대표가 자는 척 눈을 감았다.

버들이 쓰는 로션 냄새가 가까워진다. 제 쪽으로 최대한 조심스레 다가오고 있는 버들의 기척에 웃음이 번지려는 걸 황 대표가 참았다. 무미건조하고 평탄했던 내 세상은 원래의 위치로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뒤집혀졌다. 그간 피아노 연주 소리를 대체하기 위해 의미 없이 켜 두었던 라디오가 앞으로 필요 없게 됐다. 세상이 뒤집히고 나서부터 확연하게 달라진 부분은 백색 소음에 의존하지 않아도 제 상태가 괜찮단 거다. 그걸 작게 “대표님.” 하고 소곤거리며 저를 부른 버들의 목소리로 깨달았다.

황 대표가 자는 척을 계속하는 중이었다. 무의식중에 뻗은 제 손을 황급히 거두고 나서, 버들이 황 대표의 발목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만지면 욕심난다는 걸 배워서 안다. 예전에 한 번 만져 본 걸로 됐다. 버들이 시계를 확인했다.

“황 대표님.”

말간 버들의 시선이 닿은 얼굴이 괜스레 간지럽다. 더는 못 참고 황 대표가 버들의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마른 몸이 별로 힘을 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딸려 온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너무 깜짝 놀라 다른 소리도 못 내고 버들이 그대로 황 대표에게 안겼다. 얼어 버린 버들의 목 뒤로 황 대표가 팔을 집어넣었다.

“잘 잤어?”

나지막하게 울린 황 대표의 목소리와 팔베개에 두근거린다.

“왜 벌써 일어났어?”

“……우리 다섯 시간 잤어요.”

“더 자야겠네.”

많이 잔 거라고 중얼거리는 버들의 등을 더 가까이 오도록 끌어안았다. 황 대표의 목젖에 버들의 이마가 살며시 맞붙었다. 긴장이 되면서 흐트러진 버들의 숨결이 황 대표의 어깨 주변으로 번졌다. 자잘하게 주름이 질 만큼 버들이 질끈 눈을 감았다. 허리 위를 지그시 누르는 팔의 무게감이 벅찰 정도로 버거운 설렘을 동반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대표님. 주무세요?”

“……응.”

“안 주무시고 계시잖아요.”

“…….”

황 대표가 버들의 얼굴을 품에서 살짝 떼서 내려다봤다. 버들이 역시 빠끔히 치켜뜬 눈으로 황 대표를 응시했다. 긴 속눈썹 속에 가려진 버들의 눈동자가 맑다. 황 대표가 넌지시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주무시면서 대답을 어떻게 해요.”

……자는 척하는 걸 들킨 건, 지금뿐이란 거네.

“더 자. 잠 오래 못 잤을 거 아냐.”

황 대표의 팔을 물리고 버들이 일어나 앉았다.

“다음에 다시 자요.”

“다시 언제.”

“오피스텔에서 만나면 되잖아요.”

“거기 이제 안 갈 거야. 안 가려고 너 내 집에 데려온 거고.”

“……거기 아무도 없이 비어 있던데.”

“비어 있어도.”

혜주를 내보냈어도 왠지 거슬렸다. 쓸데없이 놀리고 있는 다른 집들 여러 채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어느 것 하나 탐탁지 않아 그대로 흘려보냈다. 버들이 오고 가기 쉽게 학교 근처로 아파트 한 채 박아 놓을까 하다가 결국 선택한 건 실질적 생활을 하고 있는 거주지였다.

집에 누구 데려온 건 처음이라고 했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것도 자발적 선택으로. 살다 보니까 별일이다. 가장 가까운 사이라고 할 수 있는 유 대표마저 직접 보지 않은 이상 믿지 못할 거다. 네가? 네 성격에? 다른 사람을 집에 들였다고? 재차 물음표를 던져 대다가 이내 심드렁해지지 않을까. 처음 집에 데려온 상대가 죽고 못 사는 자기 막냇동생이란 걸 알면 또 어떨지.

“유 회장님이 쓰시는 골프채 집에 몇 개 있어?”

“많이 있는데 왜요?”

“…….”

황 대표 얼굴 그만 보고 아까부터 해야 했던 말을 버들이 떠올렸다.

“대표님.”

“응.”

“집에 가야 돼요.”

“왜.”

누워 있던 황 대표가 몸을 일으켰다.

“늦었어요.”

“……진짜 문제다.”

“뭐가요?”

“너 어린 거.”

자리에서 일어난 황 대표가 핸드폰을 열어 간략하게 메시지를 보냈다.

“제가 어린 게 문제가 돼요?”

“그럼 문제가 안 돼? 나이 차가 너무 많이 나지 않냐?”

벌떡 일어난 버들이 적극적으로 황 대표에게 다가갔다.

“저는 문제없는데요.”

뭐 이런 꼴통이 다 있나 싶은 눈초리로 황 대표가 버들을 바라보다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황 대표의 뒤를 버들이 쫄래쫄래 뒤쫓았다. 물만 몇 병 꽂혀 있을 뿐인 냉장고는 있으나 마나 하다. 물을 따른 컵을 황 대표가 버들에게 건네줬다. 응접실로 나온 황 대표가 제 옆자리를 툭툭 건드렸다. 버들이 거기에 얌전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물을 마시느라 버들의 목울대가 일렁거렸다. 충분히 목을 축일 수 있도록 황 대표가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너 아무 데서나 옷 벗으면 안 돼.”

“……아까 사우나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래.”

“사우나는 원래 옷 벗고 들어가요.”

잠시 황 대표의 말문이 막혔다.

“아무 데서나 옷 갈아입지도 말고. 알았어?”

“찜질방 가려면 옷 갈아입어야 돼요.”

당연한 버들의 말대꾸에 황 대표가 입을 다물었다.

“…….”

“…….”

시간이 흘렀다.

“사우나건 찜질방이건 옷 벗어야 하는 데는 전부 가지 마.”

버들이 한참 생각했다.

“대표님도 옷 벗는 데 가잖아요.”

“사우나? 찜질방? 나는 공용으로 쓰는 그런 데는 안 가.”

“사우나랑 찜질방 말고요.”

“그럼.”

“수영장이요. 대표님 수영장 가서 옷 벗을 거 아니에요.”

“야. 맨몸으로 수영해? 스윔 슈트 입어.”

“…….”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대치 중이었다. 쓸데없이 팽팽하다. 황 대표가 먼저 입을 열려던 찰나, 초인종이 울렸다. 현관문을 아주 살짝만 열어 놓고 황 대표가 비서에게 뭔가를 건네받았다. 커다란 봉투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사방팔방으로 퍼져 나간다.

황 대표가 버들을 주방으로 데려갔다. 큰 식탁이 금방 음식들로 빽빽해졌다. 메인은 큼지막한 전복이 푸짐하게 들어간 죽이었다. 먹으라고 사 온 음식을 앞에 두고 버들이 멀뚱멀뚱하다. 옆자리에 앉은 황 대표가 턱을 까닥였다. 버들이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배 안 고파요.”

“그래도 먹어.”

“대표님은요?”

“생각 없어.”

“양이 너무 많은데……. 우리 이거 나눠 먹을까요?”

“개수작 부리지 말고 먹을 수 있을 만큼 먹다가 남겨.”

황 대표의 눈빛에 못 이긴 버들이 수저를 들고서도 어기적거렸다.

“먹어. 빨리.”

“뜨거우니까 식을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에요.”

황 대표가 여분의 수저로 죽 그릇을 저어 식혀 줬다.

“됐어?”

더 버티는 건 불가능했다. 수저 끝에 살짝 뜬 죽을 버들이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대표님.”

“응.”

“……아무것도 아니에요.”

“왜. 맛없어?”

“그게 아니라. 이것도 지금 저 데리고 노는 거예요?”

“그럼. 달리 다른 이유가 있을까 봐?”

“…….”

곧장 침울해져선 죽 그릇으로 시선을 내린 버들의 머리카락을 황 대표가 만졌다.

“너 학교에서 점심 챙겨 먹어?”

“네. 저희 학교 밥 맛있어요. 같이 먹으러 갈래요? 제가 사 드릴 수 있는데.”

“가끔 먹으면서 먹는다고 하지 말고. 꼬박꼬박 챙겨 먹느냐고.”

“맛있는 메뉴가 뭔지 안 궁금해요?”

“너 잘 안 챙겨 먹지.”

“그런 거는 왜 물어요?”

“너 살이 너무 많이 빠졌잖아. 유 대표가 뭐라고 안 해?”

“…….”

뚱한 표정으로 버들이 한숨을 참았다.

“대표님도 아마 살 빠질걸요?”

“……뭔 소리야.”

“대표님도 대표님이랑 똑같은 사람 좋아하게 되면 아마, 뭔 소리인지 아실 거예요.”

황 대표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버들이 재잘재잘 수다를 떠는 동안 몇 번 떠먹지 않은 죽은 퉁퉁 불어 버렸다. 전에 장어 꼬리는 제법 잘 먹었던 것 같은데, 그걸 사 오라고 했어야 했나. 각각 다른 욕실에서 양치를 끝냈다. 버들이 주섬주섬 가방을 챙겼다.

“한 시간만 더 있다가 가. 나 지금 운전하면 졸음운전이라 안 돼.”

“바래다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저는 길치도 아니고. ……아. 맞다.”

현관문을 향해 앞서 걷던 버들이 뒤를 돌아봤다.

“대표님. 오피스텔에서 혹시 머플러 못 보셨어요?”

“아. 그거 혜주가 뭐 흘렸다가 급한 대로 옆에 있기에 그걸로 닦았다던데. 왜.”

……보물처럼 아꼈던 황 대표의 물건 중 하나였다.

“너 그 머플러 어디서 났어?”

“……집에 갈래요.”

“내일 학교 끝나는 대로 여기로 와.”

* * *

새벽부터 오전까지 쭉 조각을 하며 시간을 보낸 버들이 황 대표의 집으로 향했다. 바람에서 여름이 흐려진다. 조금 더 지나면 단풍이 지고 낙엽이 물든 모습을 볼 수 있겠다. 버들이 비밀번호를 눌렀다. 제 형은 아침에 착실하게 출근하기에 황 대표 역시 회사에 있을 줄 알았다. 바로 마주하게 된 황 대표가 전혀 뜻밖이라 버들이 눈을 깜박이는 것도 잊었다.

잠을 자고 일어나니 식탁이 푸짐했다. 퉁퉁 부어 있는 버들의 얼굴을 보며 황 대표가 못생겼다면서 이죽거렸다. 속상한 마음으로 버들이 장어 꼬리를 몇 개 씹어 삼킨 뒤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머리 감겨 줄까?”

등 뒤에서 황 대표가 물었다. 머리를 감겨 줄 때 황 대표의 손길이 다정하게 느껴져 망설였지만, 귀찮게 하는 거 같아 버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일찍 만나서 그런지 함께 있는 시간이 길다. 마치 예전 시골 생활을 떠올리게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황 대표의 무릎에만 앉아 있었다. 맞닿은 가슴팍으로 서로 다르게 뛰는 심장 박동을 느꼈다.

“너 오늘…….”

황 대표의 어깨에 턱을 올려 두고 있던 버들이 얼굴을 들었다.

“학교 세 시에 끝나는 거 아니었어?”

지금 시각은 두 시였다.

“휴강해서 일찍 온 거예요.”

“하루 수업이 통째로 휴강을 했다고?”

그럴싸한 핑계를 찾아낸 줄 알았는데 예리하게 파고드는 황 대표로 인해 버들의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렀다.

“저 아까 잘 때 꿈꿨어요.”

버들이 말을 돌렸다.

“무슨 꿈.”

“기억은 잘 안 나는데, 어쨌든 꿨어요.”

“잠 잘 잤나 보네.”

황 대표가 느릿하게 버들의 허리를 쓰다듬었다.

“대표님은 꿈 안 꿔요?”

“난 뭐 사람 아니야?”

“가장 최근에 무슨 꿈 꾸셨어요?”

“네가 나왔어.”

버들이 흠칫거렸다.

“저요?”

“응.”

스위치를 켠 것처럼 버들의 귓불이 붉어졌다. 제 꿈에 황 대표가 나오면 어김없이 몽정을 했다. 황 대표님의 꿈에 내가 나왔다니. 어딘가 초조한 기색으로 버들이 황 대표의 하반신으로 눈길을 내렸다.

“너도 나오고. 전에 시골에서 봤던 개도 나오고.”

……야한 꿈인 줄 알았더니, 개꿈이었다. 실망한 버들의 볼을 황 대표가 세게 꼬집어 흔들었다.

“영화 개봉 날짜 잡히면 말해 줄게.”

버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제 조각품이랑 그림, 영화관에서 볼 수 있는 거예요?”

턱을 주억거린 뒤 황 대표가 입을 열었다.

“작품이랑 잘 어울리더라.”

“저 조각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려요.”

“사람이 겸손할 줄 알아야지.”

“태어날 때부터 잘했어요.”

황 대표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소원 들어줄게.”

그렇게 황 대표와 첫 키스를 했었다. 여름의 날씨와 풍경이 색이 입혀지는 것처럼 떠올랐다. 흙냄새와 바람, 우렁차게 울어 댔던 매미 소리 하나까지, 전부 상세하게.

“왜 저한테 잘해 주세요?”

“너 데리고 노는 거라니까.”

“…….”

잠깐 들떴던 기분을 버들이 꾹꾹 억눌렀다.

“어디 가고 싶은 데 없어?”

“……네?”

“가고 싶은 데.”

꾹꾹 억누르기 위해 노력한 걸 황 대표는 손쉽게 허물어뜨려 놓는다.

“대표님. 궁…….”

“실내로.”

“그럼 전시회 가요.”

“전시회?”

버들이 꿰고 있던 전시회 일정과 작가 이력, 콘셉트를 줄줄 나열했다. 황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웃느라 휘어진 버들의 눈 밑 살이 도톰하게 도드라져서 예뻤다.

황 대표가 밥 먹으러 가자고 했을 때부터 마음을 비워 두기 잘했다. 이번엔 혜주가 먼저 와 있었다. 식사가 끝나자 서버가 들어와 테이블을 치우기 시작했다. 줄어들지 않은 제 접시를 버들이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버가 망설이고 있단 걸 뒤늦게 알아차리고선 치워도 좋다는 듯 버들이 접시를 슬쩍 밀었다.

이어서 디저트가 나왔다. 걸려 온 전화를 받기 위해 혜주가 잠시 자리를 떴다. 두 사람의 대화가 이상했다. 결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기는 한데, 묘하게 핀트가 어긋나 있었다. 결혼과 깊숙이 관련된 혜주와 달리 불성실하게 관망하는 황 대표의 온도차를 버들이 알아차렸다.

“대표님.”

황 대표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전시회 둘이서 가고 싶어요. ……안 돼요?”

“셋이 갈 거야.”

“제 소원이잖아요.”

“…….”

“둘이서 가요. 저랑 대표님이랑.”

황 대표가 나른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과하게 힘이 들어간 버들의 주먹이 하찮았다. 키스할 때 숨 쉬는 것도 어설프고. 질투하는 것도 어설프고. 결혼한다고 하면 득달같이 하지 말라며 가랑이 붙잡고 늘어질 줄 알았더니.

감정과 기분이 표정에서 솔직하게 드러나는 편이지만, 꼴통이라 그런지 예측을 불허할 때가 있었다. 그래서 데리고 놀 만하다.

“저 여자 분이랑 결혼 안 하시는 거죠?”

황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여자 분이랑 결혼은 안 하시지만, 대표님…….”

“다른 사람이랑 결혼할 거냐고? 그거 물어보려는 거지.”

“아니요. 저 여자 분이랑 결혼은 안 하더라도, 대표님 저 여자분 좋아하시는 거 맞죠?”

와인 잔을 내려놨다.

“왜 그렇게 생각해?”

“한 사람이랑 자주 만나고 밥 먹은 적 없잖아요.”

그걸 아는 놈이 나한테 아무나하고 키스하냐고 물어본 거야?

“너는.”

“저요? 저 뭐요?”

“너 진짜 결혼할 거냐고.”

“네.”

버들의 대답이 곧장 튀어나왔다. 황 대표가 버들이 앉아 있는 의자를 바짝 끌어당겼다. 버들의 입술 끝에 묻어 있는 아이스크림을 냅킨으로 닦아 줬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버들이 애써 무시했다. 의식하면 더 부끄럽다.

“너 결혼 어떻게 할 거야?”

“상대방이랑 상의 잘 해서 잘할 거예요. 거창하게 하고 싶다고 하면 거창하게 할 거고. 바닷가에서 하고 싶다고 하면 바닷가에서 할 거고. 또…….”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방치된 채 녹고 있었다.

“너 가진 거 없잖아.”

……아직 학생이라 그런 거다.

“너희 집이 재벌인 거지, 너는…….”

황 대표의 말을 버들이 불쑥 가로챘다.

“겨울이 형이 그랬는데, 내 돈도 내 돈이고 겨울이 형 돈도 내 돈이랬어요.”

“결혼 안 하겠다고 지금 말해.”

“……대표님은 하실 거잖아요.”

“난 그럴 능력이 있으니까. 넌 없잖아.”

“아주 나중에 학교 졸업해서…….”

이번엔 버들의 말을 황 대표가 가로챘다.

“너 첫 키스 누구랑 했어?”

“…….”

“가슴 누구한테 처음 빨려 봤어?”

“…….”

예민한 부위인 걸 빤히 알면서 황 대표가 버들의 옆구리를 감싸 안았다. 버들이 자극에 움츠러들었다. 소중해서 황 대표의 머리카락 한 올도 만지지 못하는 버들과 달리 황 대표는 멋대로 굴었다. 가까워진 숨결에 황 대표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말해 봐.”

“…….”

“음?”

“…….”

“유버들.”

도톰한 버들의 입술이 달싹거리기만 할 뿐이다.

“너 섹스도 나랑 처음 하게 되겠다.”

“대표님 저랑 섹스 안 하실 거잖아요.”

깊고 투명한 버들의 눈이 황 대표를 빤히 쳐다봤다.

“섹스하는 것도 너 데리고 노는 거야.”

나긋나긋한 어투였다.

“대표님은 재밌으려고 섹스해요?”

“그럼. 섹스를 왜 하는데.”

“좋아하는 사람끼리…….”

버들의 반문을 황 대표가 입맞춤으로 막았다. 바닐라 맛이 혀끝에 감돈다. 황 대표의 눈빛이 여유롭다. 그게 버들을 좌절케 했다. 낮은 목소리로 그러면서 가볍게, 황 대표가 속삭였다.

“너 나 좋아하잖아.”

* * *

열이 나고 아팠다. 그러는 사이 이틀이 지났다. 그림 그릴 걸 챙겨 버들이 황 대표의 집으로 향했다.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현관 앞에 섰을 때 하필 집밖으로 나오는 황 대표와 부딪혔다.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는데 막상 황 대표의 얼굴을 보자 서러움이 앞선다. 자신의 집에 돌아가기 위해 버들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어디 가.”

“……집에요.”

“여기 너희 집 하라니까.”

“…….”

붙잡혀 대화를 하는 사이, 코앞에서 엘리베이터를 놓쳤다.

“너 좀 민망하겠다.”

정곡을 찔렸다. 버들이 고집스레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버들아.”

무슨 말을 해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갈 거다, 그렇게 버들이 다짐했다.

“나 아파.”

버들이 휙 뒤를 돌아봤다.

“아파요?”

“응.”

“어디가 아파요? 많이 아파요?”

버들의 눈이 커졌다.

“열이 좀 나서. 누워 있어야 할 거 같아.”

서둘러 버들이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에 들어갔다. 약은 먹었는지, 병원에는 다녀왔는지. 캐묻는 버들의 목소리에 걱정이 묵직하게 담겨져 있다. 문을 잠근 뒤 황 대표가 소파에 앉았다.

“대표님. 지금도 열나요?”

황 대표가 버들을 향해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만져 봐.”

망설이다가 버들이 손을 뻗었다. 손이 흉터로 더러우니까 손목으로 황 대표의 이마 열을 쟀다.

“열나지?”

신중한 얼굴로 버들이 반대쪽 손목으로 바꿔 쟀다.

“왜 말이 없어?”

“…….”

“열이 너무 높아?”

“…….”

……열 하나도 안 나는 거 같은데. 엄살이신 거 같은데.

“잘 모르겠어?”

손을 내린 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 대표가 버들의 볼을 감쌌다. 그러곤 제 이마를 버들의 입술에 가져다 댔다. 결과만으로 황 대표에게 뽀뽀하게 된 버들이 그대로 굳었다.

“아직도 모르겠어?”

또 한 번 버들의 입술에 제 뺨을 황 대표가 붙였다가 뗐다.

“지금은?”

여전히 대답이 없자 황 대표의 한쪽 눈썹이 위로 쭉 올라갔다.

“…….”

“…….”

진짜 미워. 황 대표를 쏘아보던 버들이 어깨를 물어 버렸다. 차마 세게 힘을 주진 못했지만.

서로 만나지 못한 만큼 불면에 시달렸던 건 똑같았다. 까만 밤하늘에 그믐달이 떴다. 한숨 푹 자고 나서 황 대표가 먼저 차 키를 챙겼다.

“대표님……. 어디 가세요?”

“바래다줄게. 시간 늦었잖아.”

“……아침에 가도 돼요.”

“응?”

“가족 행사가 있어서 오늘 집에 아무도 없어요.”

이걸 보내야 돼, 말아야 돼. 고민하던 황 대표가 씻겠단 버들에게 편한 옷을 찾아 줬다. 비록 티셔츠 한 장이 전부였지만. 먼저 씻고 나온 황 대표가 욕실 문이 열리자마자 버들을 안아 들었다.

“어떻게 할 거야?”

“…….”

“소파로 갈까. 침대로 갈까.”

“잠만 잘 건데요. 저.”

“그러니까. 어디서 잘 거냐고.”

모기만 한 목소리로 버들이 소파라고 대답했다. 심술궂게 황 대표가 허벅지를 넓게 벌려 버리자 그 위에 앉아 있는 버들의 허벅지도 같이 벌어졌다. 기장이 길다지만 속이 보일까 아슬아슬하다. 힘으로 버티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황 대표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진짜로 보이면 어쩌지. 버들이 얼른 황 대표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러자 버들의 어깨에 자연히 턱을 올리게 된 황 대표의 시야엔 천장이 담겼다. 황 대표가 웃자 몸의 진동이 전해진다.

“버들아.”

“……왜요?”

“그냥.”

5분이나 지났을까.

“유버들.”

“네.”

“그냥 불러 본 거야.”

다시 또 5분이나 지났을까.

“버들아.”

“…….”

“전시회 둘이서 갈래?”

버들의 눈이 기대감으로 물결쳤다.

“네. 저 대표님이랑 둘이 있고 싶어요.”

* * *

“형. 더 빨리 밟아.”

“여기서 더 어떻게 빨리 밟아.”

“아. 더 밟아 봐.”

황 대표와 전시회에 가기로 한 날, 오전에 병원 예약이 잡혀 있었다. 약속은 저녁이므로 넉넉하게 시간적 여유가 남아 있는 상태였으나 조바심과 긴장이 뒤섞여 입술이 바짝바짝 탄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버들이 빠르게 마당을 가로질렀다.

“어디 나가?”

“응.”

“어디 나간다는 말 없었잖아.”

“지금 말할게.”

“짐은 언제 쌀 거야?”

“내일.”

“너 어제도 내일 쌀 거라며.”

“몰라. 내일 진짜 쌀게.”

혹시나 고약한 병원 냄새가 몸에 스몄을까 좋은 향기를 내는 입욕제를 풀어 정성껏 씻고 나온 버들이 곧장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온갖 부산을 떠는 버들을 바라보며 겨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어딜 가는 건데 저렇게 신나 있지? 몇 번이나 물어봤지만 버들이 새치름하게 대답해 주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버들이 신나 하자 그 옆에서 겨울이 오두방정을 함께 떨어 댔다. 두 형제가 같이 심혈을 기울여 최종적으로 옷을 골랐다. 머리를 만져 주는 제 형에게 버들이 “멋있게! 멋있게!” 주문을 반복했다.

……아. 아무리 봐도 이놈 이거, 데이트하러 가는 거 같은데. 복잡 미묘한 감상에 젖은 제 형에게 버들이 대충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하늘이 흐리다. 일기 예보엔 비 소식이 없었지만 혹시 모르니 버들이 작은 우산을 가방에 챙겨 넣었다. 이르게 전시회장에 도착했다.

한 달간 열렸던 전시회는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떨려…….”

버들이 제 심장을 만져 봤다. 약속 시간이 다가올수록 미치겠다. 하늘이 우중충하다. 먹구름이 꾸물거리더니 급기야 먼지처럼 비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평일이라 사람이 적었다. 버들이 핸드폰을 꺼냈다. 두 시간이 지나면서 약속 시간을 넘겼다. 계속 서 있는 동안 또 한 시간이 흘렀다. 기다림이 막연하게 계속된다. 그럼에도 계속 버들의 얼굴은 상기된 채였다. 매일 가는 곳 말고 색다른 곳에서 황 대표와 둘이서 만나는 거니 약속 시간 쯤이야 넘겨도 괜찮다.

……길을 잃어버리셨나?

빗줄기가 굵어졌다. 버들이 우산을 폈다. 골목골목이 많아 내비게이션을 작동해도 길치인 황 대표에겐 난이도가 높은 길일 거다. 버들이 도롯가로 나갔다. 빠르게 지나다니는 차도엔 황 대표의 차가 보이지 않았다. 골목 어귀에서 멈춰 서 있던 버들이 우산을 빙글빙글 돌리며 다시 전시회장으로 돌아왔다.

어느덧 전시회장이 마감이다. 물끄러미 닫힌 문을 바라보며 서 있던 버들이 건물 밑에 섰다. 우산을 접어 정리한 뒤 황 대표의 번호를 찾았다. 전화를 세 번이나 했는데 세 번 다 연결이 되지 않았다.

[어디쯤 오고 계세요?]

[길 못 찾겠으면 전화 주세요.]

[대표님. 어디에요?]

[무슨 일 있어요?]

버들이 가방을 열었다. 직접 염색한 천에 해바라기를 그렸다. 샛노란 색깔로 큼지막하게 자라는 해바라기는 버들의 입장에선 제일 건강한 꽃처럼 여겨졌다. 그걸 황 대표에게 주고 싶었다. 어차피 버려지겠지만.

점점 어두워지는 사이, 비가 세차게 퍼붓는다. 비를 맞지 않기 위해 벽에 등을 찰싹 기댄 버들이 입술을 내밀었다. 새 옷인데…… 바지 밑단이 전부 젖어 버렸다. 그냥 약속도 아니고, 내 소원이니까 황 대표님 꼭 올 거야.

집에서 나온 지 다섯 시간이 지났다.

처져 있던 버들의 어깨가 펴졌다. 버들이 이쪽저쪽 고개를 돌렸다. 엔진 소리를 먼저 알아차렸다. 저 멀리서 헤드라이트를 켠 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황 대표일 게 분명했다. 버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전시회장 앞에 황 대표의 차가 멈췄다.

“대표님!”

차문이 열렸다. 그러면서 차 안이 살짝 보였다. 전시장 앞까지 비를 맞은 채 황 대표가 뛰어왔다. 미간을 찌푸린 표정에서 당황스러움이 섞여 있었다.

시간이 많이 늦어 당연히 버들이 없을 줄 알았다. 집과 반대 방향이지만 들러 보길 잘했다.

“버들아. 내가 집에 일이 생겨서…….”

“괜찮아요.”

버들이 웃었다.

“…….”

“…….”

둘이서 만나기로 해 놓고 차엔 황 대표 혼자가 아니었다.

“이거 우산 쓰세요. 저는 가방에 우산 또 있어요.”

황 대표가 한숨을 내쉬었다.

“집에 바로 들어가.”

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 여기 오는데 길 복잡했죠?”

“…….”

“오른쪽 골목 세 번, 왼쪽 골목 두 번. 이렇게 꺾으면 바로 도로 나와요.”

“…….”

“운전 조심하세요. 우산 꼭 쓰시고.”

제 우산을 쓰고 차로 걸어가는 황 대표의 뒷모습을 버들이 물끄러미 바라봤다. 시동을 꺼 두지 않은 차는 빠르게 멀어졌다. 한바탕 꿈을 꾸고 난 기분이다. 크게 들이켠 숨을 최대한 길게 내뱉었다. 버들이 지저분한 휴지통에 해바라기를 그려 넣은 손수건을 버렸다. 손등과 손톱, 손가락 할 거 없이 크고 작게 수놓아진 흉터들이 흉측하다. 우산은 하나밖에 없었다. 차가 사라진 반대 방향으로 버들이 오랫동안 터벅터벅 걸었다. 클랙슨 소리에 놀란 기색도 없이 버들이 옆쪽으로 비켰다.

핸들을 쥐고 있는 황 대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화가 치솟는다. 황 대표가 다시 클랙슨을 울렸다. 버들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결국 안전벨트를 풀고 황 대표가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버들의 손목을 잡고 돌려세웠다.

“너 미쳤어? 비를…….”

“……대표님.”

버들의 눈이 커졌다.

“길 잃어버리셨어요?”

“…….”

“이쪽으로 오면 안 돼요.”

“…….”

“조금만 더 가면 차 못 지나가요. 길이 좁아져서.”

싸늘한 기온을 못 이긴 버들의 입술이 새파랬다.

“대표님. 왜 비 맞고 있어요?”

“…….”

“제가 드린 우산…….”

“그게 지금 중요해?”

“…….”

“……차에 있어. 그거.”

버들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는 건 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

“…….”

버들이 울고 있었다.

멍청한 게. 내리는 비에 눈물이 감춰질 줄 아는지 눈이 마주치자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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