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 성글게 녹아 (1)(3권) (13/24)

13. 성글게 녹아 (1)

황 대표의 뒤를 버들이 터덜터덜 따라 걸었다. 병원에서 빌려 신은 슬리퍼 사이즈가 컸다. 헐떡거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까닥하다간 벗겨지게 생겼다. 위기였다. 다급히 발가락을 둥글게 말았다. 버들의 턱 아래에 작게 호두가 생겼다. 버텨 보려고 애를 썼지만 몸 전체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무리였다. 시무룩하다. 버들이 코를 훌쩍거렸다. 잠깐 방심하는 사이 기어이 뻥 뚫린 슬리퍼 앞쪽으로 발이 반 이상 튀어나왔다. 신으나 마나였다. 거기다가 밑창까지 얇았다. 버들이 아래를 두리번거렸다. 분명 뭔가 밟은 느낌이 났는데 확인하니까 아무것도 없다. 고개를 갸우뚱거린 버들이 아예 멈춰 섰다. 굳이 슬리퍼를 벗어 발바닥까지 꼼꼼히 살펴보는 동안 처음 몇 발자국에 불과했던 황 대표와의 거리가 더욱더 멀어지고야 말았다.

버들의 시선이 황 대표의 단단한 등에 닿았다. 입술이 작게 틈을 냈다. 마치 한숨처럼. 절대 들리지 않을 크기로 버들이 황 대표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딱 세 글자가 제 세상에서 가장 고결하고, 특별한 의미가 됐다. 첫사랑이다. 그러면서 짝사랑이다. 마음이 어떤 봄처럼 살랑거리다가 혹독하게 덜그럭거리기도 한다.

잠자코 기다려 봤지만 역시나. 뒤돌아보는 법이 없다. 새삼스럽지도 않다. 가장 익숙한 황 대표의 모습이란 바로 저 뒷모습이었다. 이대로 자신이 영영 사라져 버려도 황 대표는 알지 못할 거다. 애초에 저 사람 성격으로는 자신 같은 건 신경 쓸 범주에 포함되지도 않을 테지만. 그건 좀 다행이다. 버들의 입가가 나긋하게 풀렸다.

읍내의 유일한, 응급실이 딸려 있는 조그마한 병원은 오래된 건물이었다. 서늘한 복도를 따라 케케묵은 시멘트 냄새와 약 냄새가 섞여 있었다. 이미 머리카락과 옷에 스몄을지도 모르겠다. 별로다. 서둘러 바깥으로 나온 버들이 질끈 두 눈을 감았다. 적응할 틈 없이 쏟아진 햇빛이 강렬했다.

병원 주변은 시장이었다. 읍내답게 번화가 느낌이 난다. 큼지막한 버들의 눈동자에 순간 호기심이 반짝거리면서 담겼다. 고만고만하게 낮은 건물들이 아침을 맞이하기 위해 앞다퉈 분주했다. 황 대표의 차 가까이 세워진 가게에서 수증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여러 개의 찜통에서 갓 쪄진 왕만두가 꺼내졌다. 윤기가 반질반질하다. 생소하게 허기를 느낀 제 아랫배를 버들이 무심코 만져 봤다. 홀쭉하다.

황 대표가 다가오면서 그림자가 졌다. 커다란 손이 버들의 이마를 덮었다. 떨린다. 제대로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두근두근, 심장이 난동을 부려 댔다. 황 대표의 사사로운 접촉에 버들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타. 차에.”

저 때문에 밤새웠을 황 대표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대표님은 어디 가세요?”

눈치 보며 물었다. 대답 없이 황 대표가 뒤돌았다. 손에 들린 종이가 제 처방전이란 걸 버들이 알아차렸다. 황 대표가 병원 일 층의 약국으로 향했다. 약국도 병원처럼 오래된 모양이었다. 다 허물어지게 생겼다. 따라갈까 했던 버들이 어쩐 일인지 곱게 황 대표의 말을 들었다.

꼭 멀미하는 것처럼 머리가 빙글빙글 울린다. 눈을 떴을 때 여러 모로 놀랐다. 여기가 병원이란 것도, 제 곁에 황 대표가 앉아 있단 것도. 그러면서 다 망쳤단 생각이 앞섰다. 허망해서 왈칵 눈물이 쏟아지려는 걸 참아 내느라 혼났다.

조수석이 아니라, 뒷좌석에 탄 버들을 보고도 황 대표가 별 말을 하지 않았다.

“대표님.”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쪽은 또 버들이었다.

“우리 만두 먹고 갈래요? 제가 사 드릴게요. 그게 싫으시면 포장해 가는 건 어때요? 단무지 많이 달라고 해서.”

냉정히 시동이 걸렸다.

“너 죽 먹어야 돼.”

집에는 금방 도착했다. 간지러운 볼을 긁기 위해서 무심코 든 팔이 깁스를 한 왼손이었다. 거치적거린다. 깁스 때문에 무거워 그런지 왼손만 제 신체와 따로 노는 것 같다. 반대쪽으로 손을 바꿔 든 버들을 바라본 황 대표가 낮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 소리를 따라 버들이 고개를 들었다. 짧게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혔다.

“저…….”

달싹거리던 버들의 입술이 그대로 닫혔다. 둥실둥실 공중을 떠다니는 잠자리 몇 마리에 잠시 홀렸다. 먼저 뒤돌아 집 안으로 들어가는 황 대표를 버들이 멀뚱히 바라봤다. 밤새 땀에 흠뻑 젖은 탓에 땀 냄새가 날까 봐 걱정이었다. 옆에 있고 싶은 황 대표를 피해 조수석에 앉지 못한 것도 그 이유였다.

버들의 하얀 발가락이 꼼지락거렸다. 황 대표가 던져 버린 제 운동화를 찾아봐야겠다. 정민이네 할아버지 집 근처 논두렁이었으니까. 잠시 장소를 더듬거리며 떠올렸다. 혹시 운이 좋으면 누군가 찾아서 빼놨을 수도 있다.

황 대표가 수북하게 담긴 약봉지를 식탁 위에 던졌다. 몽롱한 기분에 진한 커피 생각이 간절하다. 불덩이인 마른 몸을 무작정 차에 싣고 병원을 찾아 헤맸던 그 간밤의 일들이 떠오르는 것만으로도 바짝 입안을 마르게 한다.

당장 유 대표를 불러야 한다는 건 알지만 뒤죽박죽 엉킨 머릿속을 차분히 정리하기 전이었다. 우선 냉장고 속에서 생수를 꺼내 든 황 대표가 잠시 창문을 흘긋거렸다. ……왜 안 들어와. 늘 그래 왔듯 쪼르르 따라와서 재잘재잘 수다를 떨 줄 알았다. 벌컥, 현관문을 열어젖힌 황 대표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마당이 텅 비어있다.

당연히 노인의 집에 있을 줄 알았던 버들은 없었다. 개새끼들이 있는 파란색 대문 집에도 가 봤다. 개울가도 건넜다. 표면적으로 분명 한적한 오후였다. 새파란 하늘 위에 하얀 구름이 유유히 흘렀다. 작은 촌 동네에서 아는 곳은 전부 뒤졌다. 다음엔 또 어딜 가 봐야 하는지. 화가 나면서 속이 들끓었다.

“너…….”

황 대표의 걸음이 멈췄다. 맞은편에서 그늘을 골라 걷던 버들이 황 대표를 발견하고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황 대표의 사나운 눈매가 버들을 위아래로 훑었다. 거기에 버들이 괜히 몸을 사리며 움찔거렸다. 기가 찬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풀밭을 굴렀다가 온 모양이었다. 흙투성이의 버들의 꼴이 말 그대로 엉망이었다. 머리카락엔 나뭇잎과 벼 이삭 몇 개가 콕콕 박혀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제 성질을 긁어 댈 건지 모르겠다. 황 대표가 가만히 서 있는 버들의 멀쩡한 손목을 잡았다.

그대로 집까지 끌려오게 된 버들이 황 대표의 신발 옆에 가지런히 운동화를 벗었다.

“……대표님.”

버들이 쩔쩔맸다.

“저 잠깐만 나갔다가 오면 안 돼요?”

“앉아.”

“씻고만 올게요.”

“…….”

황 대표가 버들을 쳐다봤다.

“여기서 씻으면 되잖아.”

목소리 톤에 짜증이 섞였다. 옷가지들을 챙겨 황 대표가 욕실 앞에 뒀다. 주춤주춤. 무슨 생각 때문인지 버들이 자기 발로 욕실 안으로 들어가기까지 한참이다. 답답했지만 황 대표가 잠자코 기다렸다. 욕실 문이 드디어 닫혔다. 동시에 느낀 감정은 분명 안도감이었다, 버들이 제 수중에 있단 것으로.

황 대표의 고개가 위로 꺾였다. 피곤함 때문인지 눈 주변이 시큰거렸다. 크게 한숨이 터졌다. 환장하겠다. 뭐 저딴 새끼가 다 있지? 인상을 구긴 황 대표가 욕실 문을 노려봤다.

조심성 없이.

혹시 깁스한 손으로.

아. 설마.

안심이 됐던 게 언제냐는 듯 금세 다시 불안해졌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욕조 안에 몸을 담그고 있던 버들이 휙, 뒤를 돌아봤다. 콸콸 쏟아지는 뜨거운 물에 김이 가득 차 시야가 어릿했다. 당연하겠지만 문을 연 사람은 황 대표였다. 놀란 버들의 큰 두 눈이 깜박거리는 걸 잊었다.

……멍청한 게. 욕조 틀에 수건을 깔고 그 위에 건성으로 걸쳐진 버들의 깁스된 손에 황 대표가 미간을 좁혔다.

“넌 생각이란 게 없어?”

황 대표가 들어오려고 하자 버들이 몸을 웅크렸다. 알몸이었다.

“나가세요!”

다급하게 내질러진 버들의 비명에 황 대표가 멈칫했다.

“씻겨 줄게.”

“네?”

“씻겨 준다고.”

“싫어요!”

거센 거절이 바로 돌아왔다.

“너 그럼 그 손으로 혼자서 어떻게 씻을 건데.”

“씻을 수 있어요. 머리도 감고, 혼자서 다 할 수 있어요.”

욕실이라 소리가 울렸다.

“빨리 나가세요!”

그래서 버들의 울먹거림이 더 크게 들리는가 보다. 사내새끼가. 어차피 같은 거 달려 있으면서 부끄러운 게 대수야? 그리고 버들은 모르겠지만 볼 거 다 본 뒤였다.

“나도 어차피 너 머리부터 발끝까지 씻겨 줄 생각 없어. 머리만 감겨 줄게.”

“……싫다는데. 왜 자꾸 그래요? 나가요. 진짜. 빨리. 나가세요!”

“너 왜 나한테 싫다고 그래?”

“싫으니까 싫다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해요?”

실랑이가 멈추면서 침묵이 생겼다. 그러는 와중에도 콸콸 물은 쏟아져 욕조의 반까지 채워졌다. 조심스레 버들이 레버를 들어 올렸다. 마른 팔꿈치 아래에서 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어찌나 억척스럽게 사수하는지. 보이는 건 고작 버들의 가느다란 목덜미뿐이었다.

“유버들.”

“……짜증 나.”

버들의 작은 목소리가 귀에 확 박혔다.

“뭐?”

“억울해…….”

어이가 없다.

“네가 지금 짜증 내고 억울해야 할 입장이야?”

버들의 고집을 나무라며 황 대표가 인상을 찌푸렸다.

“나가세요. 빨리.”

그래. 손 망가지면 뭐. 그게 네 손이지 내 손이야?

“…….”

“…….”

차마 욕실 문을 닫지 못했다.

“……내가 눈 감으면 되잖아.”

욕조에 뒷목을 기대고 있던 버들이 눈을 치켜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머리를 감겨 주는데 그 나른한 손길을 마음껏 감상할 수 없는 건…… 알몸이라서. 남자답게 근육이라곤 전혀 붙어 있지 않은 제 몸이 볼품없어서 보이고 싶지 않았다. 눈을 감고 씻겨 준다는 황 대표의 말을 버들은 믿지 않았다. 괜스레 분해져 씩씩거리기까지 했다. 둘 다 물러설 기미가 없었다. 팽팽히 대립하던 중 사업가인 황 대표가 먼저 절충안을 꺼냈다.

“대표님. 저 보여요?”

“……안 보여.”

쌀쌀맞은 대꾸였다.

“저 보면 안 돼요.”

“안 보인다니까.”

넥타이로 묶어 황 대표의 두 눈이 가려졌다지만, 불안하다. 성격처럼 황 대표는 세심했다. 감겨 준 머리에 수건까지 돌돌 말아 주었다. 멋대로 욕조에 물까지 빼 버린 뒤 황 대표가 욕실을 나갔다. 닫힌 문에 그제야 안심한 버들이 더듬거리며 수건을 만져 봤다. 풀리지 않게 단단히 매듭이 묶여 있다. 몸이 나른하다. 혼자 남겨진 욕실에서, 드디어 버들은 마음껏 부끄러워할 수 있었다.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겠지?

씻고 나온 황 대표와 버들이 마주 보며 앉았다.

“손.”

버들이 손을 식탁 위에 올렸다.

“……말고.”

깁스한 손으로 바꿔 올렸다. 다행히 깁스 상태는 멀쩡해 보인다.

“할 말 있지.”

황 대표가 팔짱을 꼈다. 눈이 마주친 버들에게 어서 말을 하라며 턱을 까닥였다. 버들이 고개를 끄덕인 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얼마예요?”

한숨이 샜다.

“병원비랑 약값…….”

“뭐. 나한테 돈 주려고?”

“얼마예요?”

“왜. 차 기름값도 챙겨 주지.”

“다 합해서 말씀해 주시면 갚을게요.”

“…….”

진짜 돌아 버리겠다.

“너 손 왜 이래? 언제부터 아팠어?”

갈 곳을 잃은 버들의 눈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말해. 빨리.”

“…….”

“유버들.”

“…….”

어깨가 처지자 옷도 같이 기울였다.

“내가 밀었을 때?”

버들의 고개가 살짝 끄덕여졌다. 그때부터 욱신거리면서 아팠다. 그리고 엉덩방아 찧었을 때, 다시 한 번 접질린 게 탈이었다.

“너 다쳤으면 바로바로 말을 해야지. 왜 말을 안 해?”

“……저 이거 참을 수 있어요.”

버들이 고개를 숙였다.

“너 손목에 인대 늘어났어. 그걸 참을 수 있다고?”

“괜찮아요.”

“아팠잖아. 너!”

황 대표의 언성이 점점 커졌다.

“아픈 거 저 잘 참아요.”

“그래서 정신 잃고 응급실 갔어? 잘 참아서?”

삽시간에 버들의 호흡이 흐트러졌다.

“내버려 두지 그랬어요.”

“……뭐?”

“참다 보면 익숙해지고 그럼 괜찮아져요.”

“넌 그게 말이 된다고 지껄이고 있어?”

“왜 제가 아픈 걸 말해야 돼요?”

꼴통다운 질문을 던지며 버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네가 아픈 걸 말했으면, 내가 알았겠지. 그럼 병원에 미리 갔을 거 아니야.”

……그게 싫다. 그게. 짜증나. 억울해. 분해.

“대표님이 저 아픈 거 왜 알아야 하는데요?”

황 대표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어딘가 초점이 나가 버린 대화였다.

“다른 사람한테 다 말해도 대표님한테는 말 절대로 안 해요!”

벌떡 일어나서 버들이 그대로 나가 버렸다.

황 대표가 뒤척였다. 시간을 확인하니 자정에 가깝다. 성질부리며 나간 버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와 바라본 식탁 위엔 버들의 약봉지가 널브러져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채였다. 저 때문에 다치긴 했지만 병원에 데려가 치료를 받게끔 했고, 머리까지 감겨 주었다. 그걸로 최선이다. 일일이 수발들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핸드폰을 꺼내 든 황 대표가 유 대표 번호를 찾았다. 네 새끼 데려가라고 당장 통화 버튼을 눌렀다, 생각만으로는 벌써 열댓 번도 넘게. 하지만 실제론 이상하게 망설이는 중이었다.

어두운 밤거리를 황 대표가 나섰다. 노인의 집은 잠잠했다. 아까 버들을 찾으러 갔을 때, 노인은 부인과 함께 외출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대학교에서 초청을 받아 강의를 나가야 해서 며칠 집을 비운다고 했었던가. 당시엔 버들을 찾는 게 급해 아프단 말을 하지 못했다.

방문을 열자 메주 냄새가 확 끼쳤다. 구석에서 몸을 웅크린 채 버들이 끙끙거리고 있었다. 이름을 불러도 반응이 없다. 만져 본 버들의 이마가 뜨겁다.

……아프겠지. 약을 챙겨 먹지 않았으니.

황 대표가 버들의 무릎 뒤에 손을 넣어 안아 들었다. 발끝에 뭔가 채였다. 버들의 로션이다. 그것도 챙겨 황 대표가 버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소파에 잠시 버들을 내려놨다. 고개가 기운 없이 외로 축 처진다. 서둘러 침대에 있는 모든 이불을 바닥에 펼친 다음 버들을 옮겨 눕혔다.

“유버들.”

하얀 얼굴이 아프니까 더 하얗게 보인다. 황 대표가 약봉지를 뜯었다. 알약이 여러 개다. 버들의 머리를 받쳐 허벅지에 올린 다음 약을 하나씩, 삼킬 수 있게 물과 함께 입가로 흘려주었다. 내뱉으면 어쩌나 싶었건만. 다행히 목울대가 올각거리면서 약이 넘어갔다.

확인차 황 대표가 버들의 입안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달뜬 숨이 금방 손가락을 적셨다. 열이 오른 상태에서 상대적으로 시원한 황 대표를 버들이 반겼다. 말캉한 혀로 누르면서 버들이 황 대표의 손가락을 간신히 빨았다. 황 대표의 눈빛이 깊어졌다. 둥근 입천장을 노골적으로 건드리자 버들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황 대표가 손가락을 뺀 뒤 버들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주었다. 이어 화상 연고를 가져왔다. 울긋불긋한 발등을 보자마자 욕이 튀어나왔다. 연고만 꾸준하게 잘 발라 준다면 추후 상처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단 의사의 말이 위안이 된다. 화한 냄새가 퍼진다. 워낙 피부가 약해서 따갑진 않을까 신경 쓰인다. 황 대표가 약봉지를 부스럭거렸다. 이번엔 새살이 돋게 해주는 연고를 꺼냈다.

버들의 팔에 링거 바늘이 꽂혔던 부분이 시퍼렇다. 마르고 허연 팔에 퍼렇게 비쳐 보이는 혈관으로 큰 바늘이 꽂혀 들어가는 걸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혹시 더 작은 바늘로 바꿔 줄 수 없냐고. 의료진들에게 번갈아 가며 꺼냈던 요구가 지금 생각하니 진상이다. 병원이 작은 것도 마음에 차지 않았다. 당장 제 주치의라도 호출하고 싶었다.

“손목 좀 조심해라.”

뒤척이면서 손목이 깔리기 직전, 어깨를 잡아 막았다. 앓는 버들의 숨이 거칠다. 황 대표가 버들을 안고선 소파에 앉았다. 잠버릇 심한 게 신경 쓰였다. 제 가슴팍에 엎어져 푹 기대어 오는 무게가 정말이지 하찮다. ……사내새끼가. 오늘 얘가 뭘 먹었던가 생각하게 된다. 적어도 내가 보는 앞에선 아무것도 없었다. 황 대표가 인상을 썼다. 뜨끈뜨끈한 버들의 체온이 제 체온과 뒤섞였다. 기묘한 한탄이 샌다. 황 대표가 물끄러미 버들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도톰한 입술이 우물거리면서 힘겹게 쌕쌕거린다.

얼마 후였다.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황 대표가 제 귀를 가져갔다.

“……아파.”

설마, 했더니. 미쳐 버리겠다. 아픈 거 잘 참지도 못하면서 왜 말을 안 해, 그러니까. 혼란스러운 얼굴로 황 대표의 큰 손이 버들의 등에 내려앉았다. 약 기운이 빨리 퍼져야 할 텐데. 가만가만 쓰다듬으면서 버들을 얼렀다.

새벽이 찾아왔다.

“음…….”

들려온 신음에 곧장 황 대표의 눈이 뜨였다. 저도 모르게 깜박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가슴팍에 푹 기대어 잠이 든 버들의 체온과 무게가 그대로다. 황 대표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꾹 감긴 버들의 속눈썹이 잘게 진동했다. 곧 넘어갈 듯 불안정하게 헐떡이던 호흡은 약 기운이 퍼졌는지 어느덧 잔잔해졌다. 버들의 등에 놓인 황 대표의 커다란 손이 버들의 이마를 짚었다. 들끓었던 열도 내려간 모양이다. 살짝 콧잔등을 찌푸리며 칭얼거리는 버들의 등을 다시 토닥거렸다. 조심스레 입가로 귀를 가져갔다. 한참 집중했지만, 아프다고 중얼거리는 말은 없었다.

“왜?”

칭얼거린 이유를 물었지만 당연히 되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새벽 내내 접힌 무릎이 불편해서 그런가. 자꾸 신음하는 버들을 안아 황 대표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바닥에 깔아 놓은 이불에 버들의 몸을 천천히 눕혔다. 다리가 먼저 닿았고 엉덩이, 등이 차례차례 내려졌다. 편한 자세를 찾아 버들이 스스로 몸을 뒤척였다. 황 대표가 인상을 썼다. 잠버릇 심한 걸 알기에 아픈 손목이 영 불안하다.

“너 움직이면 안 된다.”

목 뒤에 베개를 받혀 주면서 주의를 줬지만 세상모르게 잠든 버들의 귀에는 안 들릴 게 뻔했다. 아침 운동은 하는 수 없이 건너뛰어야겠다. 버들을 어르고, 재우느라 마찬가지로 불편한 자세를 몇 시간째 유지해야만 했다. 뻐근한 근육을 풀기 위해 목을 좌우로 꺾으며 황 대표가 욕실로 들어갔다.

웃통을 벗고 막 칫솔을 물었을 때다. 잠에서 깬 지 얼마 안 되었어도 예민한 성질머리는 여전했다. 황 대표가 미간을 좁혔다. 부스럭거리며 무슨 소리가 들린 거 같아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고요한 집안에 시곗바늘 소리가 전부다. 황 대표의 시선이 올곧게 버들을 향했다. 웅크린 채 새근새근, 버들이 잘 자고 있다. 포동포동하게 살이 오른 두 뺨이 살짝 불그스름하다. 가까이 다가가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가 됐다. 뒤돌아서려던 황 대표가 다시 앉았다. 버들의 몸 위의 이불이 얕게 들썩거렸다. 지체 없이 그 속을 확인했다. 이제 좀 살 만한가 보다. 습관처럼 배꼽을 만지려고 꾸물거리고 있는 버들의 멀쩡한 손을 이불 밖으로 빼냈다. 춥지 않게끔 에어컨 온도를 올렸다.

……미치겠네. 자조 섞인 웃음이 샜다. 이후 튀어나오는 쌍욕들은 모두 저 자신을 향해 있었다. 욕실 문을 열어 놓은 채로 샤워를 했다. 틈틈이 자고 있는 꼴통 새끼를 확인하느라.

* * *

“어떻게 할 거야?”

부스스 일어나 앉은 버들이 산발이 된 채 앞으로 쏟아진 머리를 한 손으로 쓸어 넘겼다. 가물가물한 눈에 초점이 잡히면서 황 대표가 보였다. 일하는 중인가 보다. 앞에 노트북을 둔 채로 앉아 있었다.

“네?”

갈라진 음성으로 버들이 겨우 대답했다.

“씻고 밥 먹을 거야. 아니면 밥 먹고 나서 씻을 거야.”

“……씻고.”

의자를 뒤로 밀며 황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

어쩐지 재촉하는 투라 꾸물거림 틈 없이 버들이 일어났다. 풍성하고 깨끗한 이불이 발목을 휘감는다. 폭신폭신하다. 그걸 멀뚱히 내려다보는데 덥석 손목이 붙잡혔다. 좁은 욕실이 남자 두 명으로 꽉 찼다. 좁은 창문에서 새어 들어온 햇빛에 그림자가 만들어졌다. 수납장을 열어 황 대표가 새 칫솔을 꺼내 포장을 뜯었다. 옆에 나란히 서 있던 버들이 작게 하품했다. 아직까지 잠이 덜 깨서 그런지 머릿속이 멍하다. 황 대표가 치약까지 대신 묻혀 건네주는 칫솔을 눈을 슴벅거리던 버들이 자연스럽게 받아 들었다. 별생각 없이 입속으로 가져갔다. 황 대표가 등 돌려 나가는 걸, 정면의 욕실 거울을 통해 버들이 빤히 쳐다봤다. 칫솔질하던 버들의 손목이 우뚝 멈췄다.

“야. 유버들.”

낮게 울린 황 대표의 목소리가 위협적이었다. 욕실 안에서 버들이 꼼짝없이 굳었다.

“유버들.”

굳게 닫힌 문을 사이에 두고 문고리가 반 바퀴 돌아가다가 만다. 어이가 없으니까 헛바람이 켜진다. 세수하는 동안 혹시나 불편할까 앞머리를 고정시켜 놓으려고 빨래집게를 가져오는 사이, 버들이 욕실 문을 잠가 버렸다. 황 대표가 차분한 척 노크했다.

“……왜요?”

“열어. 문.”

여러모로 혼란스럽다. 분명 스승님 댁에서 잠들었던 것 같은데, 왜 내가 여기에 있는 거지? 곰곰이 머리를 굴려 보지만 떠오르는 기억일랑 아무것도 없다. 못 살겠다, 정말. 황 대표님이 보고 싶어서 자다가 혼자 걸어온 건가? 몽유병, 뭐 그런 거. 가지가지 한다는 생각에 울상이 되어 버린 버들이 제 머리를 쥐어짰다.

“유버들.”

버들이 움찔거렸다.

철컥철컥, 거칠게 돌아가는 문고리가 금방 부서지게 생겼다. 당혹스러워진 버들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다리를 동동 구르던 버들이 결국 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 문짝 박살 내다가 행여나 크고 소중한 제 대표님이 어디 다치진 않을까 걱정이었다.

빠끔히 열린 문틈으로 화가 단단히 난 황 대표의 얼굴과 마주했다.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다가 세면대에 막혔다. 도망갈 구석이라곤 전혀 없는. 딱, 사각지대였다. 버들의 목울대가 올각거렸다.

“너 왜 내 허락 없이 문을 잠가?”

“……씻으려고.”

버들이 웅얼거렸다.

“세수했어?”

턱 아래로 뚝뚝 흐르는 물을 손등으로 닦으며 버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와. 그럼.”

“저, 샤워할 거예요.”

“알았어.”

담백한 대답이었다. 그래서 담백하게 물러설 줄 알았다.

“벗어.”

……뭐래. 버들이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얼음이 되어 버린 버들이 제 티셔츠를 황 대표가 잡아당기기 시작하자 파닥거렸다. 제 형들과도 같이 사우나 한 번 가 본 적이 없었다. 주기적으로 운동을 해 만들어진 근육들이 크고 단단하니까 같은 남자로서 자기가 갖는 콤플렉스 따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거다. 되도록 아무에게도 제 알몸 따위 보여 주기 싫었다.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아등바등 버티는 버들을 황 대표가 되게 하찮단 눈빛으로 내려다봤다. 보드라운 버들의 아랫배에 몇 번이나 황 대표의 손끝이 스쳤다. 노골적인 접촉이었다. 저릿하게 올라오는 감각에 버들이 자꾸만 어깨를 움츠렸다.

“알았어.”

혹시나 다친 손이 또 탈이 날까 봐 황 대표가 먼저 물러나 줬다.

“어제처럼 하면 되잖아.”

눈을 가릴 넥타이를 한 손에 든 황 대표와 버들이 함께 욕조에 콸콸 채워지는 물을 지켜봤다. 수증기가 천장에서 넘실거린다. 문득 황 대표가 고개를 들었다. 욕실의 거울에 버들과 제 몸이 비춰졌다. 체격 차이가 상당하다. 버들의 마른 목덜미를 오랫동안 눈에 담았다. 전에는 무관심하게 넘겼던 부분들을 하루 안아서 재웠다고 자꾸만 되새기게 된다. 가벼운데, 사내놈이라 기본 뼈 무게가 있어서 그런지 지그시 제 품에 안겨 왔었다. 그게 더 존재감을 확실하게 드러냈다. 뜨끈뜨끈한 체온과 함께.

……불쾌해야 하는 게 맞는데.

“그런데요, 대표님.”

불쑥 말을 건 버들의 얼굴을 황 대표가 내려다봤다.

“저 왜 여기에 있어요?”

조심히 물었다.

“어떻게 제가 여기에 있는 거예요? 저는 분명히, 스승님 댁에서 잤거든요.”

황 대표가 버들의 초조함을 무심하게 외면했다.

“알아서 뭐 하게.”

“뭐 할 건 아니지만…….”

욕조에 물이 채워지는 동안 황 대표가 갑자기 생각났단 듯, 버들의 깁스에 비닐을 감아 주었다. 눈 감으면 된다는 투의 황 대표를 기어코 벽 쪽으로 돌려세운 다음 버들이 꾸물꾸물 옷을 벗었다. 그러고는 한 발, 한 발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됐어?”

황 대표의 입장에선 지루한 기다림이었다. 버들의 허락이 떨어지기 전에 황 대표가 벽을 외면했다. 잔뜩 웅크리고 있는 버들의 뒷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저기에 입욕제 있잖아.”

“……넣어도 돼요?”

“응.”

버들이 팔을 뻗어 입욕제를 들었다. 뚜껑이 채 닫히지 않았었나 보다. 통째로 빠졌다. 곧 어마어마한 거품이 만들어졌다. 깜작 놀란 버들이 얼른 황 대표를 돌아봤다. 눈을 감고 어떻게든 화를 삭이느라 애를 쓰고 있는 황 대표의 모습에 버들이 바짝 쪼그라들었다. 작게 사과했다.

“제가 더 좋은 걸로 사 드릴게요.”

입욕제의 싱그러운 향기가 너울진다. 풍성한 거품에 버들의 몸이 가려졌다. 과정이야 어쨌든 만족스러운 상황에 버들이 샐쭉 웃었다.

“대표님. 이거 몇 개예요?”

넥타이를 눈에 두른 황 대표에게 버들이 손가락을 가져갔다. 하나. 다 보였다. 그런데 솔직하게 말했다간 지랄할 게 뻔했으니 황 대표가 그냥 안 보인다고 둘러댔다. 안심하며 버들이 욕조 뒤로 목을 젖혔다. 잘생긴 얼굴은 거꾸로 올려다봐도 잘생겼다. 눈 깜박이는 속도까지 늦추며 버들이 황 대표의 입술과 콧대, 눈썹 등을 차분하게 감상했다. 이런 기회는 정말로 흔치 않았다.

“뜨거워?”

“아니요.”

황 대표가 조심히 숱 많은 버들의 머리에 샤워기를 가져다 댔다. 충분히 적신 다음 샴푸했다. 갑자기 인상이 써지면서 한숨이 터졌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이렇게까지 왜 하고 있어야 하나. 그러니까 싫다는 새끼를 억지로 붙들고 눈까지 가린 채 머리를 왜 감겨 주고 있는 것인지 저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

넥타이가 느슨해지더니, 곧장 아래로 풀썩 풀려 버렸다. 방황하는 것 없이 두 사람의 시선이 그대로 마주쳤다. 뜻밖의 상황에 버들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여유로운 태도로 황 대표가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새하얀 거품에 감싸이다 만, 버들의 유두가 아슬아슬하게 보였다.

“……너 다 보인다.”

버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쩔쩔매며 버들이 황 대표의 곁에 앉아 있었다.

“대표님. 아파요?”

“너 거품 눈에 한 번 집어넣어 줄까? 아픈지 안 아픈지 볼래?”

버들이 코를 훌쩍였다. 너 다 보인다는 황 대표의 낯간지러운 희롱에 허둥거릴 수밖에 없었다. 입욕제 한 통이 쏟아진 물이 황 대표의 얼굴에 튀어 버렸다. 거품을 그대로 뒤집어쓴 황 대표의 눈이 살짝 충혈됐다.

“어디 봐요.”

“네가 보면 뭐 알아?”

짜증 섞인 황 대표의 태도에도 버들은 굳건했다.

“제가 불어 드릴게요.”

뭐가 들어간 것도 아닌데 버들이 눈꺼풀을 향해 정성껏 호, 불어 줬다. 감은 눈으로 잠자코 황 대표가 얼굴을 대 줬다.

둘이서 맞이한 하루가 오전부터 어수선했다.

“먹어.”

황 대표가 죽을 끓여 줬다. 죽이 부드럽지 않고 버석거린다. 버들이 수저를 입술에 물고 미적거렸다. 물만 여러 번 마셨다. 반면 설익은 쌀로 죽을 끓여 놓은 황 대표에게선 머쓱함이란 찾아볼 수 없었다.

“대표님. 다음부터 이런 거 하지 마세요.”

“…….”

“제가 알아서 먹을게요.”

“…….”

“바쁘시잖아요.”

버들의 근처로 황 대표가 약봉지를 던졌다.

“유버들 씨.”

“네?”

“저 좋아해요?”

버들의 입을 통해 좋아한다는 말, 들어 본 지 꽤 됐다. 질릴 정도로 나 좋다고 하더니. 그 입으로 싫단 표현이 나오니까 심기가 거슬렸다.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여 저를 쳐다보고 있는 황 대표를 향해 버들이 턱을 주억거렸다.

“말로 해.”

“……좋아해요.”

황 대표가 보는 앞에서 약까지 삼킨 버들이 나갈 준비를 했다. 양치 후 설거지를 한 다음, 이불을 전부 개켰다. 한쪽 손이 시원치 않아 시간이 오래 걸렸다. 바닥에서 굴러다니고 있는 제 로션을 챙겼다. 턱을 괴고 바지런히 움직이는 버들을 바라보고 있던 황 대표가 권태롭게 입을 열었다.

“어디 가.”

“밖에요.”

“밖에 어디.”

“조각하러 가야죠.”

눈썹이 찌푸려졌다.

“야.”

“……네?”

차라리 어디 놀러 나간다고 그랬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거다.

“너 손이 그따윈데 조각을 어떻게 해.”

“할 수 있어요. 주변 정리 같은 거라도…….”

“지금 너 스승도 없잖아.”

“어떻게 아세요? 그걸?”

황 대표가 외면했다.

“내일모레 오세요.”

“그럼 내일모레부터 해.”

“…….”

기껏 재워 주고, 씻겨 주고, 먹여 놨더니만.

종알거리던 버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잠잠해졌다. 대신에 하품이 잦아졌다. 약에 수면을 유도해 주는 뭐 그런 게 섞여 있나? 혼자 이불을 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버들이 까무룩 낮잠에 빠졌다. 열이 있는지 없는지 틈틈이 황 대표가 살폈다.

-내 새끼 더위도 잘 타고. 추위도 잘 타고.

몇 시간 전에 버들과 통화를 했다는 유 대표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그런데 그쪽 공기가 좋긴 좋나 봐? 어쨌든 잘 지내고 있다니까 다행이네. 나 좀 보고 싶어 할 줄 알았더니.

또. 꼴통 새끼가 거짓말을 했나 보다. 손목에 깁스 해 놓고 잘 지내긴 개뿔.

-버들이 보양식 먹을 때네.

버들을 보내라고 하거나 아니면 친히 데리러 온다고 하거나 그럴 줄 알았다.

-황 대표. 네가 좀 챙겨. 내 새끼 보양식으로 장어 잘 먹어.

시킨 적도 없는 내 보양식 챙기려다가 사고 친 버들이 떠올랐다. 수첩까지 덩달아.

-근처에 안 그래도 잘하는 장어 전문점 있거든. 주소 찍어 줄게.

“내가 네 새끼 보양식을 왜 챙기고 있어야 해. 일하기에도 바빠.”

-야. 새끼야. 감사납게 그럴래? 나도 버들이 보양식 챙기고 싶지.

“그럼 네가 챙겨 먹여.”

늘 그래 왔듯, 유 대표는 남의 말은 들어 처먹지 않았다. 팔불출답게 제 새끼 자랑에만 넋을 뺐다.

-내 새끼, 장어 먹는 거 얼마나 웃긴지 아냐? 꼴에 꼬리만 쏙쏙 골라 먹는다.

황 대표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어 업무적 이야기를 진득하게 나눴다.

오후에는 멀쩡하게 바락바락 말대꾸하며 신경을 긁어 대더니만. 밤이나 새벽녘엔 버들이 꼭 아팠다. 끙끙거리는 마른 몸뚱이가 열이 올라 불덩이였다. 해열제를 삼키게 한 뒤, 황 대표가 버들을 안아 소파에 앉았다. 들여다본 얼굴이 괴로운 듯 허옇게 질려 있다. 가슴팍에 폭 안겨 든 버들의 여린 몸을 황 대표가 천천히 쓰다듬었다. 등줄기, 허리, 엉덩이까지. 서로의 체온이 스며들었다.

* * *

다음 날 병원에 들러 검사를 받았다. 빌렸던 슬리퍼를 돌려주고 약도 새로 지었다.

“대표님. 제가 만두 사 드릴까요?”

버들이 생글생글했다.

“……너 죽 먹어야 된다고.”

다 포기하고 버들이 차에서 늘어졌다. 그놈의 죽. 말 그대로 쌀만 끓여 낸 죽은 장점이라곤 토하기 쉬운 것밖에 없다.

“어디 가세요?”

집에 도착했는데도 차에서 내리지 않는 황 대표를 보고 불안한 표정으로 버들이 물었다.

“집에 가 있어.”

“……안 들어와요? 오늘?”

“아니. 들어갈 거야.”

확실하게 말을 해 주니까 조마조마했던 감정이 거짓말처럼 확 누그러졌다.

“제가 같이 갈까요? 길 아세요?”

“됐어. 더우니까 집에 가서 쉬고 있어.”

백미러로 황 대표가 버들을 힐긋거렸다.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찍었다. 유 대표가 알려 줬던 그 장어 전문점이었다. 아침에 주문을 미리 해 놓았고, 시간 맞춰 가지러 가는 길이었다. 한 시간 삼십 분 정도 소요가 된단다. 핸들을 꺾자 어김없이 경로를 이탈했단 딱딱한 음성 메시지가 들려왔다. 다시 차분히 길을 따랐다. 어울리지 않는 짓이란 걸 잘 안다. 그래서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황 대표가 욕을 내뱉었다.

* * *

“아. 겨울이 형.”

-뭐. 새끼야.

소리 내지 않고 버들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도대체 하루에 전화를 몇 번을 해?”

-지금까지 두 번.

하필 첫 번째 전화는 병원에서 경과를 듣고 있을 때 걸려 왔었다. 혹시나 뭘 알고 전화를 한 건 아닐까 도둑처럼 제 발이 저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회의 중이라 전화를 받을 수 없단 메시지를 보내며 통화를 거부했다.

“이제 그만해.”

-이따가 세 번 더 하려고.

겨울의 막무가내인 통화 계획이 참 뻔뻔하면서 곤란하다.

“아까 영상 통화도 했잖아.”

황 대표가 약국에 간 사이 버들이 먼저 겨울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장 구경 왔다며 실컷 웃는 얼굴을 보여 줬었다.

“형. 설마 한가해?”

황 대표님은 여기서 엄청 바쁜데.

나지막하게 겨울이 욕했다.

-한가할 때만 보고 싶어 할 얼굴이야, 네가? 어?

뭐 저 따위로 닭살 돋는 말을 한껏 목소리를 깔면서 진지하게 하는지 모르겠다. 어디서 배워 온 거래? 난색인 얼굴로 버들이 머리를 긁적였다. 내버려 두니까 겨울은 끝을 몰랐다. 보고 싶다며 고래고래 노래를 부른 다음 실제로 안고 싶고, 만지고 싶다며 졸라 대기 시작했다. 나잇값과 더불어 덩칫값까지 날려 버린 채 징징거리는 제 형을 버들이 한참 달랬다.

버들의 어깨가 축 처졌다. 살도 많이 빠져 버렸고 손까지 다쳐서 현재 제 가족들과는 우연히 마주치는 상황조차 없어야 한다. 제 이런 상태가 발각되면 뻔했다. 집에 갇히거나, 병원에 갇히거나. 둘 중에 하나인데 어느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황 대표님이랑 같이 있을 수 없으니까.

미리미리 가족들에게 영상 통화를 통해 제 얼굴을 보여 주는 건 영악한 속임수였다. 나중에 어차피 전부 걸리게 되겠지만. 아무튼 어떤 짓을 해도 빠지지 않은 볼살이 가장 큰 도움이 됐다. ‘먹고, 자고, 공기 좋은 곳에서 잘 쉬고 있어요!’ 하는 제 말에 ‘네가 혼자서 먹으면 뭘 얼마나 먹고, 쉬고 있겠어.’ 하는 걱정이 돌아오면 증인처럼 황 대표를 언급했다. ‘황 대표님이 잘 챙겨 주셔요.’ 그건 속임수 중에 유일한 사실이기도 했다. 지금도 봐. 귀찮을 텐데 병원에 데려가 주시고, 죽도 끓여 주시고, 머리도 감겨 주시고.

“내가 누차 말하잖아. 이제 그러지 마.”

-뭘 그러지 마?

“애 대하듯 나한테 그렇게 말하지 마. 남들이 들으면 흉봐, 이제.”

-내가 내 새끼 예뻐하는데 남들이 왜 흉봐?

겨울이 펄쩍 뛰었다.

“내가 네 새끼이긴 한데.”

-야, 새끼야. 형이라고 해야지. 어디 싸가지 없이.

“내가 형 새끼이긴 한데.”

-응.

웃음기 섞은 목소리로 겨울이 대답했다.

“내가 이제 다 커 버렸잖아.”

-너 다 컸어?

금시초문이란 투의 반문이 기가 막힌다. 매번 쳇바퀴 도는 부분이었다. 버들이 인상을 쓰며 잠시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그럼 내가 한두 살 먹은 어린애야? 제발 현실 좀 받아들여.”

-너 몇 살이야? 어? 스물한두 살 먹은 어린애 아니야?

대화가 영 통하지 않는다. 아. 진짜. 언제 철들 거야.

“형.”

비장하게 버들이 겨울을 불렀다.

“끊어.”

겨울이 제 이름을 사정없이 외치고 있었지만 버들이 먼저 전화를 종료해 버렸다. 단호할 땐 단호해야 하는 법이라고 배웠다. 곧이어 메시지가 도착했다. 발신자는 당연히 겨울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하트가 알록달록하게 창 가득 채워져 있다. 가만히 바라보다가 버들이 옅게 웃음 지었다.

* * *

황 대표는 내비게이션이 예상했던 소요 시간보다 배가 걸려서 겨우 장어 전문점에 다다를 수 있었다. 표정이 좋지 못했다. 시뻘건 사인펜으로 굵직하게 원조, 자연산이라고 강조해 놓은 낡은 종이 간판을 단 다 쓰러져 가는 허접한 조립식 건물 앞에서 당연히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어딜 봐서 전통 있는 전문점이란 거야? 몸보신이 되는 거 맞아? 오히려 위생 문제로 먹었다가 탈만 생기는 거 아니야?

유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따져 묻듯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들 식구들은 물론, 특히나 유 회장님이 연애 시절부터 더위에 약한 장 여사님의 여름철 몸보신을 위해 친히 방문했던 곳이라고 하니 그제야 안심이 됐다.

「뭐. 더 할 말 있어?」

「……끊어.」

버들이 다쳤단 말이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야.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지. 네가 싸가지 없이 끊으라고 하니까, 버들이가 그거 배워 가지고 걸핏하면 나한테 전화 끊으라고 하잖아.」

「그건 네가 전화비 아깝게 구니까 그런 거고.」

「뭐야. 지금 내 허락 없이 내 새끼 편드는 거야?」

「일단…… 전화 좀 끊어라.」

집에 오는 길도 헤맸다. 애초에 한 시간 삼십 분 정도 걸리는 거리를 태평하게 ‘근처’라고 대놓고 사기 친 유 대표를 내내 씹어 댔다.

* * *

“……어?”

뜻밖이다. 저 멀리서 황 대표의 차 엔진 소리가 들려올 때부터 심장이 마구 두근거렸다. 기대를 하게 되면 그 자체만으로 실망이 크니까 착각한 거라고, 애써 진정시키며 현관 앞에 앉아 있던 버들이 벌떡 일어났다. 그사이 마당에 황 대표의 차가 들어왔다. 가뜩이나 큰 버들의 눈이 놀라서 더 커졌다. 시선은 여전히 황 대표의 차에 꽂혀 있는 채로 다급히 엉덩이를 털었다.

오늘 안으로 집에 들어온다는 황 대표의 말이 사실일 줄은 몰랐다. 아주 당연히 새벽을 넘겨야지만 얼굴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버들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차 안에 있는 황 대표와 버들의 눈이 마주쳤다. 시동을 꺼 놓고도 황 대표가 내리지 않았다.

……미쳤나. 해맑게 저를 보며 웃는 버들을 보자 어울리지 않은 짓을 한 게 아니라, 미친 짓을 저지른 기분이다. 마음이 순간적으로 비틀렸다. 조수석에 둔 장어와 만두를 잠시 노려봤다. 짐은 그대로 내버려 두고 황 대표가 차에서 내렸다.

“대표님.”

버들이 쪼르르 다가왔다.

“저 기다렸어요?”

“아니요!”

“근데 왜 나와 있어.”

“저 대표님, 안 기다렸어요. 정민이 기다렸어요.”

“…….”

현관문으로 걸음을 옮기던 황 대표가 잠시 멈칫했다. 물어본 적도 없는 걸 계속해서 버들이 나불거렸다. 원래 약속대로라면 내일 일찍 오는 건데요. 갑자기 전화가 와서 막차 타고 오는 중이래요. 그래서 잠깐 얼굴 보려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쳐다보자 버들이 움찔거렸다. 수작 부리고 있는 게 뻔히 보였다.

“나 안 기다린 거 맞아요?”

“저 대표님 안 기다려요. 평생 안 기다릴 거예요.”

“…….”

버들이 황 대표의 곁에 우물쭈물 붙었다.

“근데 대표님.”

“…….”

“어디 다녀오셨어요?”

“…….”

“그냥 드라이브하다가 오신 거예요?”

“…….”

“운전은 조심히 하셨어요?”

“…….”

황 대표가 귀찮단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나 기다릴 자격만 없는 거 같지? 넌 그런 거 일일이 나한테 물을 자격도 없어.”

잠깐 멍했던 버들이 곧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열심히 끄덕거렸다. 여전히 방긋방긋, 해맑은 얼굴이었다. 어쨌든 버들에겐 지금 서로 얼굴을 보고, 같이 있단 게 가장 중요했다. 황 대표가 들어갈 수 있게 버들이 현관문을 잡아 주었다.

“대표님. 그러면 쉬세요.”

“……너 어디 가는데.”

문을 닫았던 버들이 황 대표의 목소리에 다시 벌컥 열어 얼굴을 쏙 들이밀었다.

“저 스승님 댁에 가요.”

“거긴 왜.”

“네? 그냥…….”

나 안 기다리고 다른 사람 기다렸다면서, 내 얼굴 보자마자 볼일 끝났단 듯 다른 곳에 가겠단다. 셔츠 단추를 풀어 내리며 황 대표가 옅게 콧방귀를 뀌었다. 입만 열면 거짓말이다. 그런데 그럴싸한 노력조차 하지 않아 거짓말이란 걸, 초장부터 들켜 버리는 게 한심스럽다.

“너 들어와.”

“……왜요?”

“약 어디에 뒀어?”

“아. 밖에요.”

“가져와.”

황 대표가 미간을 좁혔다. 아까 내려 주면서 들려 줬던 약이 왜 밖에 있어. 아침에 끓여 놓은 죽을 확인하기 위해 냄비 뚜껑을 열었다. 양이 그대로다. 그렇다는 건, 병원에 갔다 온 뒤로 약도 안 먹었단 뜻이다.

약봉지를 챙겨 집 안으로 들어온 버들이 눈썹을 찌푸렸다. 손을 씻고 나온 황 대표가 제 밥그릇에 죽을 퍼 담고 있었다. 이미 식탁 위에는 제 숟가락이 정갈하게 놓인 뒤였다.

“대표님. 제가 알아서 챙겨 먹을 게요.”

쩔쩔맸다.

“약 먹었어, 오늘?”

“…….”

그것 보란 투로 황 대표가 밥그릇을 숟가락 옆에 내려놨다.

“저 때문에…….”

죽 끓여 주고 약 먹었는지 묻는 황 대표에게 미안했다.

“밖에 나가서 제가 알아서 잘 챙겨 먹을게요.”

“씻고 나올 테니까 먹고 있어.”

버들이 우물쭈물했다.

“왜? 너 내가 밥 먹으라고 다그친 게 하루 이틀 일이야?”

“멀쩡했을 때랑 아팠을 때 그런 거 달라요.”

“뭐가 달라.”

“아프니까…….”

짐이 된 채 황 대표를 귀찮게 만드는 거 같았다. 병원에 안 데려가 주셔도 되는데. 머리도 진짜 감겨 줄 필요 없는데…….

황 대표가 잠깐 버들을 바라봤다.

“뭐 착각하나 본데.”

느릿하게 황 대표가 입을 열었다.

“나한테 너는 그냥 지나가는 동네 개새끼 한 마리일 뿐이야. 내가 던진 돌에 맞아 다쳤고. 그래서 나중에 뒷말 나오지 않게 나을 때까지만 책임지는 건데. 넌 뭐 징그럽게 의미 부여하는 거 같다?”

냉담하게 돌아선 황 대표가 욕실 문을 닫을 동안 버들은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식어서 퉁퉁 부은 죽을 몇 수저 삼키고, 약도 챙겨 먹었다.

사선 방향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잡지를 보고 있는 버들에게 황 대표의 시선이 스쳤다. 자리에서 일어난 황 대표에게 버들의 동그란 눈이 자동으로 달라붙었다. 차에서 짐을 꺼내 든 황 대표가 현관에서 비틀거리며 신발을 신고 있는 버들을 지나쳐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왔다. 버들이 신발을 내팽개쳤다.

“이거 뭐예요?”

“…….”

“먹는 거예요?”

버들이 코를 킁킁거렸다.

“너 주려고 사 온 거 아니야.”

먹는 것에 버들의 호기심이 짧았다. 다시 잡지를 마저 봤다. 황 대표가 냉장고에 장어와 만두를 집어넣었다. 버들이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대표님. 저 스승님 댁에 가 있을게요.”

“……왜?”

“좀 졸려서요.”

“…….”

졸린데 왜 거길 간다는 거야. 여기서 낮잠, 잘만 자 놓고선.

“앉아. 너 조각하고, 그림 그리는 게 일 전부가 아니잖아.”

옆의 의자를 황 대표가 꺼냈다. 작게 나오던 하품이 쏙 들어갔다. 황 대표의 옆자리에 버들이 냉큼 앉았다. 버들이 볼 수 있게끔 황 대표가 노트북을 밀어 줬다. 꼭 지금 끝내야 할 일은 아니었지만 마우스도 건넸다. 시나리오를 보며 둘이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화면에 바짝 집중해 있는 버들의 기다랗고 촘촘한 속눈썹과 동그란 코끝, 색이 고운 입술에 저절로 시선이 머물렀다.

“이거 뜻, 뭐예요?”

“……뭐.”

버들의 손가락은 화면 어딘가를 콕 짚었지만, 황 대표는 버들의 얼굴만 쳐다봤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큰 눈을 순하게 깜박거리며 버들이 황 대표를 마주 봤다.

“대표님?”

황 대표가 뒤늦게 화면을 확인하고 뜻을 말해 줬다. 두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버들의 마른 목덜미에 은근히 얼굴을 기울였다. 버들이 사용하는 로션 냄새가 은은하게 풍겨 왔다. 냉장고 속에 둔 장어와 만두 생각이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배고파?”

“저요? 아니요. 대표님 배고파요?”

“아니.”

속으로 탄식했다. 배고프다고 하면 사 온 걸 꺼내 놓을 수 있을 거 같은데 버들이 눈치 없이 생글거렸다. 두 시간이 더 훌쩍 지났다. 얼추 시나리오에 관련된 업무가 마무리됐다. 창밖으로 날이 저물고 있었다.

“너 저녁 먹어야 돼.”

“아, 저 약속 있어요, 대표님. 식사 꼭 챙겨 드세요.”

그때였다.

“유버들.”

바깥에서 정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나갈게!”

크게 아는 척을 한 뒤 버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 대표가 버들을 잡았다.

“너 잘 땐 여기 와서 자.”

“……저는 괜찮은데.”

“내가 말했잖아. 나 때문에 다쳤고, 거기서 뒷말 나오는 거 싫다고.”

“저 다친 거 대표님 탓 절대로 안 해요.”

정민이 다시 버들의 이름을 불렀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버들이 홀랑 나가 버리자 황 대표가 인상을 찌푸렸다.

“너 다쳤어?”

인사를 건넨 버들에게 정민이 인상을 쓰며 걱정했다.

“인대 살짝 늘어난 거래. 금방 괜찮아진대.”

어디로 이동하는지 둘의 대화가 점점 멀어지면서 들렸다.

“밥은 먹었어?”

“나 그거 먹고 싶다. 사러 갈래?”

“뭐? 뭐가 먹고 싶은데?”

황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탄산수.”

“야. 그거 우리 할아버지 집에 있어. 가자.”

“내가 마셔도 돼?”

“돼. 돼.”

약도 먹어야 되는데. 밥을 먹으라고 해야지 탄산수를 왜 먹여. 듣고 싶지 않은데도 소리가 다 흘러들어 왔다. 짜증이 났다.

저녁 즈음 혼자 산책길을 나선 황 대표가 어느 포도밭 앞에서 버들을 발견했다. 인상을 쓴 채 황 대표가 그쪽으로 다가갔다. 말없이 버들의 손에 들린 소주잔을 뺏어 치웠다. 옆에 쓰러진 정민을 피해 황 대표가 버들을 데리고 술판에서 빠져나왔다. 그러는 와중에도 버들이 주변 어른들에게 꾸벅꾸벅, 인사를 했다. 조그마한 얼굴이 발갛다. 손에 깁스까지 한 꼴을 보고도 술을 먹이다니. 반대로 손에 깁스까지 해 놓고선 술을 처받아 마시다니. 대체 무슨 정신머리들인지 모르겠다.

“대표님.”

손목이 잡혀 비틀거리며 버들이 그를 따라갔다. 집에 데려온 버들을 자리에 앉힌 뒤 황 대표가 차가운 물을 따라 줬다. 곱게 버들이 꼴깍거리며 마셨다.

“약은.”

“밥도 먹고 약도 먹었어요.”

왠지 혼날 거 같다. 버들이 황 대표의 눈치를 살폈다.

“약술이라고 해서 마셨어요. 약초 많이 넣고 오래 묵인 술이라, 상처에 도움 된다고 해서요. 정민이도 그거 먹고 아픈 거 나은 적 있대요. 그리고 저 딱 한 잔밖에 안 했어요.”

황 대표가 한숨을 내쉬자 버들이 움츠러들었다.

“먹어.”

황 대표가 냉장고에서 장어와 만두를 꺼냈다. 막 사 왔을 때 먹였어야 했는데. 식어 빠져 별로 맛도 없어 보인다.

버들이 큰 눈을 깜박거리며 황 대표의 움직임을 좇았다. 뭔가를 먹고 싶진 않았지만 앞에서 황 대표가 보고 있으니 하는 수 없었다. 버들의 젓가락이 정확히 장어 꼬리를 집었다. 익숙한 맛이다. 어디서 사 왔는지 물을까, 하다가 그런 분위기가 아닌 거 같아서 관뒀다. 만두도 먹었다. 단무지가 엄청나게 많다.

버들이 젓가락을 내려놨다.

“다 먹은 거야?”

“대표님은 안 드세요?”

“난 됐어.”

식사를 마치고는 정해진 수순처럼 함께 욕실로 갔다. 씻겨 주는 대로 버들이 얌전했다. 술기운이 서서히 올라오는 탓인지 눈꺼풀이 절로 느려졌다.

“대표님. 제가 대표님 얼굴이랑 몸이면…….”

조금 흥미를 당기는 서두였다.

“왜 말을 하다가 말아.”

“그렇게 안 살았을 거예요.”

“그렇게 안 살았단 게 뭔 말이야.”

“군대에 다섯 번은 가고…….”

주정뱅이가 술에 취해 헛소리를 장황하게 늘어놨다. 버들의 머리를 감겨 준 다음 황 대표가 욕조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거품과 함께 물이 서서히 사라졌다. 버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마저 씻었다. 노곤하다. 황 대표가 꺼내 준 옷을 입던 중 버들이 콧잔등을 찌푸렸다.

“대표님. 저 바지 없어요.”

“그것만 입어. 어차피 그거 너한테 길잖아.”

“……이것만 입고 스승님 댁에 어떻게 가요.”

“요령껏 가 봐.”

“…….”

기운 없이 버들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황 대표의 사이즈라 확실히 티셔츠의 기장은 길었지만, 달랑 이것만 입고 요령껏 집 밖을 어떻게 나가란 건지 모르겠다. 아무리 밤이라 보는 사람이 없어도 그렇지. 빌려준 새 속옷도 황 대표 것이니 당연히 컸다. 주춤거리며 문밖을 나오자 이불이 미리 깔려 있었다. 다행이다. 버들이 후다닥 그 속을 파고들었다. 여기서 자면 안 될 거 같은데……. 피곤함에 짓눌려 누운 채 길게 기지개가 켜졌다.

“너 로션 안 발라?”

식탁에 앉아 있던 황 대표가 턱 끝으로 로션을 가리켰다.

“던져 주시면 안 돼요?”

“와서 가져가.”

냉랭하다.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는 황 대표가 다행히 자신한테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인다. 살금살금, 근처로 다가간 버들이 로션을 집어 들고 이불로 돌아갔다. 버들의 뒷모습을 황 대표가 노골적인 시선으로 훑었다. 움푹 파인 아킬레스건, 길게 뻗은 종아리, 하얀 허벅지, 어깨뼈, 귓불, 목…….

새벽이 깊어졌다. 핸드폰에 진동이 울리면서 메시지 도착을 알렸다. 잠깐 눈가를 손끝으로 지압하며 황 대표가 핸드폰 화면을 밝혔다.

[곧 한국 들어가. 아버지가 부르셔서.]

발신자는 이복 누나, 혜주였다. ‘H’ 자수를 직접 새겨 수첩을 선물했던. 곧바로 어지럽혀진 생각들을 정리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황 대표가 핸드폰을 내려놨다. 이불을 걷어 그 속에서 끙끙 앓는 버들을 들여다봤다. 식은땀으로 축축한 버들의 이마가 불덩이다. 미리 챙겨 놓았던 해열제를 삼키게 했다. 동그랗게 몸을 만 채 버들이 자꾸 배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습관처럼 배꼽을 찾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어디가 아파?”

“…….”

“속?”

“…….”

“그러니까 술을 왜 처마셔.”

“…….”

황 대표의 큰 손이 버들의 배를 오랫동안 어루만졌다. 웅크렸던 몸이 살짝 펴지자 황 대표가 버들을 안아 소파로 데려갔다. 매일 밤 이렇게 재우다 보니, 가슴팍에 기대어 오는 무게가 이제는 익숙하다. 버들의 접힌 무릎이 혹시나 불편할까 살펴보고, 고개 방향을 틈틈이 바꿔 주었다. 차분해진 버들의 호흡과 제 호흡의 속도가 맞춰졌다.

「정우야. 집에 오면, 네가 안 보였으면 좋겠어.」

낳아준 자가 불행하게 죽었단 소식에 황 의원은 혜주를 거둬들였다. 외도로 낳은 자식을 집안에 들였던 건, 그때까지 어머니의 임신 소식이 없었기에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딱 그해, 힘들다고 이제는 포기하라고 했던 임신이 됐다. 그렇게 자신이 태어났다. 육아랄 게 없었다. 낳은 걸로 끝이었다. 그러니 칠 년 차의 혜주가 거의 정우를 업어 키울 수밖에 없었다.

항상 피아노 치는 소리가 집안을 채웠다. 고왔던 혜주의 손가락이 지금도 생생하다. 돌이켜 보면 옆에 앉아 그걸 쳐다보는 게 어린 정우의 일상의 전부였다. 정우가 크면 클수록. 자라면 자랄수록. 혜주는 동생 때문에 버려질 순간을 걱정하며, 겁을 먹고 있었다. 거의 강박증처럼.

좋아한단 말은 하지 못했다.

좋아한다고 제 마음을 드러낸 순간, 돌아올 경멸이 충분히 예상이 되었으니까.

“……아파.”

황 대표가 흐느끼는 버들의 등을 쓰다듬었다. 더 편하게 저한테 기대 오는 버들의 목덜미에 황 대표가 가만히 입술을 묻었다. 동성을 좋아해서. 좋아한단 그 상대에게 멸시당하면서. 재차 좋아한다고 마음을 기꺼이 열어 보이며, 그 자리에서 꼿꼿하게 버텨 내는 꼴통 새끼가 지금도 여전히 미련스럽고, 멍청해 보인다.

잠들었던 황 대표가 깨어났다.

“돌아 버리겠네…….”

서로 꼭 맞닿아 있는 아랫배를 바라본 황 대표가 인상을 썼다. 한숨을 내쉬며 동시에 고개를 뒤로 젖혔다.

……장어 꼬리 괜히 먹였나 보다. 어차피 쓸 데도 없는데.

고작 한 줌뿐인 버들의 성기가 윤곽을 드러내며 서 있었다. 바지를 입힐 걸 그랬나. 날이 밝으면서 바깥이 환해졌다. 버들의 이마를 짚어 보니 열이 내려 체온이 서늘하다. 조심히 황 대표가 버들을 이불에 옮겨 눕힌 뒤 씻고 나왔다. 약 따위를 정리하는데 버들이 일어났다. 일부러 관심을 두지 않았다. 두리번거리던 버들이 벌떡 일어나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 * *

“이게 다야?”

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 대표가 버들의 옷가지를 넘겨받았다. 빗속에 처박혔던 상자는 이미 버려 버렸고 옷만 새로 빨아 말려 놓았다. 방에 두면 메주 냄새가 스밀까 빨랫줄에 그대로 걸어 놓은 상태였다.

“더 있지 않았어?”

“……아닌데.”

황 대표가 집 뒤로 향하자 화들짝 놀란 버들이 더 빠르게 움직였다. 여우다, 여우. 더 있단 건 어떻게 아셨대. 새빨개진 얼굴로 버들이 숨겨 놓은 속옷을 휙휙, 걷어 품속에 감췄다.

“대표님. 그런데요. 저 스승님 댁에서 계속 자도 돼요.”

황 대표가 걸음을 우뚝 멈췄다.

“넌 걸핏하면 집 나간다는 못된 버릇을 어디서 배워 온 거야.”

걸핏하면 집 나가라고 했던 황 대표가 양심 없이 굴었다. 버들이 빤히 황 대표의 얼굴을 쳐다봤다.

“대표님.”

날이 좋았다.

“우리 앞으로 싸우면…….”

뭘 싸워. 내가 너랑? 항상 먼저 사고 쳐 놓고선.

“싸우면, 화해해요.”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켜졌다. 옆에서 버들은 계속 진지했다.

“제가 항상 먼저 화해할게요.”

“…….”

“받아 주기만 하세요.”

“…….”

“네? 대표님.”

“…….”

“우리 사이좋게 지내요.”

주례사가 할 말을 잘도 종알거리면서 버들이 눈을 접고 웃었다. 덜떨어져 보였다. 산책 후 식사를 끝냈다. 특별할 것 없지만, 나른한 오후였다.

버들이 약속했던 장소에 먼저 나가 기다렸다. 이윽고 자전거를 두 대를 질질 끌고 정민이 나타났다.

“나 자전거 못 타…….”

버들이 고했다.

“야. 너 전에 술 마실 때 자전거 서서도 잘 탄다면서.”

“술 마시고 취한 상태로 무슨 말을 못 해?”

“야. 씨.”

결국 정민이 홀로 펼치는 방정맞은 자전거 묘기를 멀거니 바라보며 버들이 담배를 피웠다.

“뒤에 타 볼래?”

“……아니.”

“왜. 뒤에 타 봐.”

망설이다가 끝끝내 버들이 고개를 저었다.

“넌 형도 많다면서 자전거도 하나 못 배웠냐?”

“……나 몸 많이 움직이는 거 안 좋아해서 그래. 형들은 가르쳐 주려고 했었어.”

“몸 움직이는 거 왜 안 좋아하는데?”

의아한 투로 정민이 물었다.

“……그냥.”

“넌 별게 다 ‘그냥’이더라?”

“…….”

몸 많이 움직여서 심장이 뛰어 대면 덜컥, 겁부터 나는데 황 대표를 보면서 심장이 뛰어 대면 그건 날아갈 것 같다.

정민과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온 버들이 약부터 챙겨 먹었다.

“대표님. 자전거 타실 줄 알아요?”

어디 가서 뭘 했고. 뭘 보고 왔는지 버들이 재잘재잘 수다를 떨었다. 버들의 수다 끝은 언제나 ‘저랑 같이 가 볼래요?’ 혹은 ‘저랑 같이 먹어 볼래요?’였다. 대꾸 한 마디 없던 황 대표가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버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너 색연필 어디다 뒀어?”

버들이 가방을 열어 색연필을 꺼내 왔다. 철제 케이스가 덜컹거린다. 황 대표가 무심하게 눈길을 거두었다.

“새로 사 줄게.”

“저 집에 새거 많아요. 형들이 많이 사 줬어요.”

망가진 색연필을 버들이 다시 가방 속에 챙겼다. 황 대표에게 빌린 종이에 버들이 볼펜으로 뭔가를 끼적거렸다. 해바라기 한 송이가 커다랗게 그려졌다.

“그거 색칠 안 해?”

“색연필이…….”

“집에 가기 전에 필요하겠네. 색연필.”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해 입술을 오물거리면서, 버들이 황 대표를 힐긋거렸다.

“색연필, 멀쩡한 거 하나 있긴 있는데…….”

“……어디.”

예전에 황 대표가 색연필을 던졌을 때 노란색 색연필이 장식장 좁은 틈 속으로 굴러들어 가 버렸다. 우물쭈물하는 버들에게 황 대표가 다시 한 번 어디에 있냐고 물었다.

기어가는 목소리로 뱉어 낸 버들의 말을 따라 황 대표가 장식장을 옆으로 옮겼다. 원목 소재라 언뜻 봐도 무거워 보이는 장식장이었다. 황 대표의 등 뒤에서 버들이 다리만 굴렀다. 제 색연필을 꺼내는 건데 하필 손이 다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노란색 색연필을 주워 든 황 대표가 굽히고 있던 허리를 폈다. 그리고 뒤를 돌았다.

석양이 지고 있었다. 손톱, 속눈썹, 입술…… 버들이 온통 따스한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순간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황 대표가 건네주는 색연필을 버들이 웃으며 받았다. 문득 마주친 시선에 버들의 눈이 가만히 깜박거렸다. 무심코 황 대표가 버들의 얼굴로 팔을 뻗었다. 보드레한 볼을 쓱 만져 보았다. 녹아내릴 것처럼 부드러웠다. 갑작스러웠던 접촉에 버들의 어깨가 흠칫거렸다. 황 대표가 만지고 지나간 제 뺨을 버들이 손바닥으로 감쌌다. 왜요? 낮게 이유를 물었지만, 황 대표가 잠잠했다. 황 대표의 서늘한 눈동자가 버들의 몸을 느릿하게 옮겨갔다. 움푹 파인 쇄골. 하얀 목덜미.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남자라서 외면했지만, 처음부터 버들은…… 예뻤다.

* * *

“이거 하면 돼?”

“네! 정각에 클릭해야 돼요.”

버들이 초조한 얼굴로 기다렸다. 정각이 되자마자 황 대표가 마우스를 클릭했다. 잠시 멈칫거렸던 화면이 곧 정상으로 돌아왔다. 수강 신청을 황 대표가 대신 해 줬다. 덕분에 버들은 원하는 교양 수업을 전부 듣게 됐다.

“정민아. 난데. 아 진짜? 너도?”

기쁘게 전화하는 버들에게서 황 대표의 눈이 떨어질 줄 몰랐다.

* * *

그림에 이어 조각이 얼추 마무리됐다. 이른 아침부터 황 대표의 뒤를 버들이 어미 닭 쫓는 병아리처럼 쫓아다녔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그랬다. 잘했단 말이 고팠다. 칭찬해 달라며 아닌 척, 버들이 열심히 우물을 파는 중이었다.

“대표님. 이거 쉬운 거 아니에요. 근데, 스승님이랑 제가 날짜 맞춘 거예요.”

“…….”

“다른 사람이었으면, 아마 못 했을걸요?”

“…….”

“제가 스승님이랑 호흡도 좋고. 가르쳐 주는 거 빨리 배우고 그래서, 할 수 있었던 거예요.”

“…….”

“저 조각 뭐든 잘해요.”

“…….”

“제가 어렸을 때부터…….”

아. 시끄러워. 소파에 앉아 태블릿 화면을 넘기던 황 대표가 정면에 서 있는 버들을 쳐다봤다. 눈빛이 매서워 버들이 입을 꼭 다문 채 움찔거렸다. 인상 쓴 얼굴로 황 대표가 태블릿을 한쪽에 내려놨다.

“뭐 어쩌라고.”

“아니에요…….”

버들이 시무룩해졌다. 황 대표를 잘 볼 수 있는 위치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잡지를 보고 있기는 하나 번번이 황 대표에게 넋이 빠졌다.

꼬고 있던 다리를 황 대표가 풀었다. 자기 딴에는 몰래 훔쳐보는 거겠지만, 따라붙는 버들의 시선이 간지러웠다. 시선이 마주치기 직전 버들이 잡지를 눈높이에 맞춰 들더니 제 얼굴을 그 뒤로 숨겼다.

싫다는데.

징그럽다고 하는데.

겁 대가리 없이, 자존심 다 뭉개 가며 도리어 마음을 더 크게, 크게 부풀리는 버들이 어떤 의미로…….

황 대표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혜주에게 어떤 답장도 못 하고 있었다.

“고생했어.”

숨을 헉, 들이켠 버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잡지에 얼굴을 파묻었다. 좋아 죽을 것 같다.

“얼굴 보여 줘.”

“……왜요?”

눈까지만 빠끔히 보이도록 버들이 잡지를 내렸다. 거울을 통해 확인하지 않아도 새빨개진 제 얼굴이 느껴졌다. 부끄러웠다.

“소원 딱 하나만 들어줄게.”

“소원이요?”

“딱 하나야. 잘 생각해.”

“……대표님이랑 할 수 있는 거요?”

“어.”

버들이 얼른 입을 열었다.

“그럼 궁에 가요.”

한심하다.

“소원 딱 하나라니까.”

“…….”

“어떤 것도 된다고. 딱 하나.”

머리 굴리는 게 다 보였다. 그렇지만 저 속에 담긴 것들은 별로 신통하진 않을 게 뻔했다. 우물쭈물, 달싹거리는 버들의 입술이 도톰하다. 황 대표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와서, 키스해.”

버들의 깜박거리는 눈이 그대로 멎었다. 침이 아프게 목구멍을 휘젓고 넘어갔다.

“……네?”

“와서 키스하라고.”

“…….”

줘도 못 먹는 버들을 황 대표가 차분히 기다렸다. 이리저리 방황하던 버들의 눈이 황 대표에게 겨우 고정됐다.

“……그래도 돼요?”

빼진 않는다. 황 대표가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짧게 웃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버들이 휘청거렸다가 이내 중심을 잡았다. ……소원. 지금 꿈을 꾸는 건가? 현실감이 뒤떨어졌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심장은 이미 제어하기 어려울 정도로 미친 듯이 널뛰고 있었다. 버들이 주춤거리며 서서히 황 대표와 거리를 좁혔다.

“…….”

“…….”

황 대표가 느릿하게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눈…….”

“…….”

“감으셔야 돼요. 키스할 때…….”

섹스를 영상으로 배워 놓고 별걸 다 챙기려 들었다. 순순히 황 대표가 눈을 감아 줬다. 버들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놓았다. 모든 열이 머리꼭지로 모여 드는 것 같았다. 아래를 보지 않고 걸음을 뗐던 탓에 하마터면 황 대표의 발등을 밟을 뻔했다. 화들짝 놀라 물러나려던 버들이 비틀거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황 대표의 감긴 눈꺼풀은 잠잠했다. 질끈 눈을 감은 채, 버들의 고개가 서서히 다가갔다.

황 대표의 윗입술과 버들의 아랫입술이 맞닿았다. 전기에 감전되는 줄 알았다. 버들이 얼른 고개를 뗐다. 시간상으로 1초도 되지 않은, 아주 짧은 찰나였다. 황 대표의 눈이 뜨였다. 그 앞에서 숨을 헐떡거리는 버들이 보였다.

“……감사합니다.”

허리를 숙이며 인사한 버들이 신발도 신지 않은 채 현관을 나갔다. 햇볕이 강했다. 부는 바람을 타고 나부낀 나뭇잎들이 싱그럽게 빛이 났다. 다리가 풀려 얼마 걷지 못했다. 벽을 타고 마른 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더듬거리며 입술을 만져 봤다. 손끝을 통해 화끈거리는 게 느껴졌다. 꿈만 같다. 어디서 설움이 몰려들었다. 왈칵, 눈물이 날 거 같았다.

그때였다. 눈앞에 그림자가 졌다. 황 대표가 버들의 손목을 잡고 억지로 일으켜 세워 벽에 밀어붙였다. 큼지막한 손이 버들의 여린 뒷덜미를 감쌌다. 뭐라고 말을 꺼내려던 것도, 흐트러졌던 숨결도 황 대표에게 그대로 삼켜졌다. 처음 버들의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머금었던 황 대표가 더 깊숙이, 성이 난 채 파고들었다.

귓가에 스치는 모든 것들이 소란스러웠다. 그게 점점 아득해졌다. 예민한 입안 점막을 황 대표의 혀가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 헤집을 때마다 머릿속이 온통 꿀로 절여졌다. 바들바들 떠는 손으로 겨우 황 대표의 팔을 붙잡았다. 버들의 애처로운 손가락이 구부러졌다. 살짝 입술을 떼 공기를 주고 황 대표가 미끄러지듯 입맞춤을 반복했다. 날씨는 맑은데 소나기가 퍼부어 발바닥까지 척척하게 젖어 버린 기분이 든다. 둥근 입천장이 황 대표로 가득 채워졌다. 온몸이 녹진하게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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