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 비 오는 날 흙냄새 (5) (12/24)

12. 비 오는 날 흙냄새 (5)

물감을 섞던 중에 진동이 울렸다. 허겁지겁 붓부터 입에 물었다. 자유로워진 양손을 주머니에 꽂아 넣었지만 잡히는 게 없다. 두리번거리던 버들이 허리를 굽혔다. 바닥에 내려놨던 핸드폰 화면에 겨울의 이름이 번쩍거린다. 한가할 때 전화 달라고 메시지를 남긴 지 겨우 10분 남짓이 흘렀다. 이렇게나 일찍 전화가 걸려 올 줄이야. 엄청 반갑다. 통화 버튼을 누르는 버들의 얼굴이 화사하다.

“형. 뭐 하고 있었어? 집이야?”

-돈 벌고 있었지. 내 새끼 맛있는 거 사 주려고.

“회의 중이였단 거야? 다 끝났어?”

-잠깐 멈췄어. 괜찮아.

저를 토닥이는 겨울의 의연함에 버들이 콧잔등을 찌푸렸다.

“형. 나 때문에 회의 멈췄단 건 아니겠지?”

-내 새끼. 다 컸네. 응? 언제 이렇게 컸지?

감동받았다면서 겨울이 과하게 훌쩍이는 척을 했다. 회의 중이라면 장소는 분명 회사일 테고 주변에는 당연히 직원들도 있을 거다. 그런데 마치 단둘이 있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주책을 떨어 대는 제 형에게 버들이 대신 민망함을 느꼈다. 조용히 좀 하라고 말려 보았지만 소용없다. 원래부터 겨울은 그랬다. 별거 아닌 것도 그냥 넘어가는 법 없이 칭찬을 후하게 퍼 주었다. 그걸 구실 삼아 상이라면서 당사자인 자신이 마다함에도 불구하고 마음껏 선물을 사다 나르는 게 일상이었다. 언제까지 이럴 건지.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가면 어쩌나 싶다.

“나는 원래 다 컸는데 형들만 모르고 있어.”

-그랬어?

도톰한 아랫입술을 사리물면서 버들이 앞치마 끈을 비비 꼬았다.

“나중에 통화해.”

전화를 끊으려는 버들을 겨울이 붙잡았다.

-냉정하게 새끼가. 지금도 통화하고 나중에 또 통화하면 되잖아.

“지금은 회의 중이었다면서.”

-그냥 엎어 버릴까? 그래도 너희 형 돈 잘 벌잖아.

“나 때문에 회의 멈추고, 그러지 마.”

-아, 새끼, 진짜. 오늘 작정했어?

“무슨 말이야?”

-자꾸만 형 감동시키는 말만 골라 할래?

대체 어느 부분에서 감동을 받았단 건지 잘 모르겠다.

-너 때문에 회의 멈춘 거라니. 이젠 얼굴값 하는 소리도 지껄일 줄 알고. 진짜로 다 컸네.

아, 뭐야. 잔잔함을 띠던 버들의 눈가가 확 찌푸려졌다. 너무 황당하다. 귓가에서 핸드폰을 떼어 내 바라봤다. 한심하단 눈초리다. 한숨까지 절로 샌다. 스스로 절충하는 법을 깨우치며 적당한 시기에 앞가림을 했던 다른 형들과 달리 겨울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변함없이 뺀질거리기 바쁘다. 돈 잘 벌면 뭐 해. 제 형이 대체 언제 철들는지 걱정이 된다. 이런 걸 바로 아픈 손가락이라고 하는 건가?

“형. 회사가 장난이야?”

외박하지 마라, 밤늦게까지 술 마시고 다니지 마라. 이어지는 버들의 추궁과 잔소리가 웃긴지 겨울이 수화기 너머로 오두방정을 떨어 댔다. 내 새끼, 예쁜 새끼, 다 큰 새끼.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새끼들을 겨울이 혀 짧은 소리로 찾아 댔다. 버들이 전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왜 이래? 질색하며 잠깐 말려 보았지만 말을 들어 먹지 않는다. 포기했다. 철딱서니 없는 제 형의 지랄이 진정될 때까지 버들은 차분히 기다렸다.

더운 열기를 담은 바람이 버들의 앞머리를 건드렸다. 풍성하게 들떴다가 아무렇게나 가라앉았다.

「네 머리 못 만지게 해.」

머리카락 끝이 닿아 간지러운 눈가를 긁으려던 버들이 의식한 채 손을 내렸다. 만 하루도 지나지 않은 일이건만 마치 오래된 것처럼 아득하다. 노을을 등지고 저를 내려다봤던 황 대표의 눈빛과 옅게 퍼졌던 향수 냄새, 슬며시 닿아 오던 손길. 모든 게 차곡차곡 쌓여 간다.

꼭두새벽부터 가위를 들고 찾아온 정민을 버들은 어르고 달래 돌려보냈다.

“형. 이제 할 말 다 했어?”

-응. 이제 내 새끼가 말할 차례야.

“뭐 좋아하셔? 황 대표님.”

잠깐 잠잠했다.

-형은 뭐 좋아하냐면…….

“형 말고. 황 대표님 말이야. 뭐 잘 드셔?”

못들은 척 시침 떼려던 겨울이 실패했다.

-그렇게 쓸데없는 정보를 알아서 뭐 하게.

쓸데없다니. 버들이 웅얼거렸다.

-너는.

“나? 뭐.”

-너 밥 잘 먹고 있냐고, 너.

“응. 내 걱정은 하지 마.”

고개까지 끄덕이며 버들이 곧장 둘러댔다.

“황 대표님이 식사를 거르셔. 입맛이 없대. 내가 세어 봤거든? 어제까지 두 번밖에 안 드셨어.”

-내버려 둬. 여름이면 특히 그러더라. 원래 예민하잖아, 성질머리가.

아무리 원래 그렇다지만…….

“어떤 음식 좋아하는지 형은 몰라?”

-같이 살고 있잖아. 네가 직접 물어보지. 왜?

여러 번 물어봤는데 대꾸하지 않았다. 버들의 눈썹이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황 대표, 그 새끼 돈 좋아해.

“……그게 뭐야. 돈은 못 먹는 거잖아.”

-줘 봤어?

버들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시작은 창대했을지 몰라도 끝은 하등 영양가 없는 통화였다.

목표했던 것만큼 그림 작업을 끝내고 나서 버들이 집 안으로 들어가 씻었다. 젖은 머리를 내버려 둔 채 잡지를 빼든 버들이 벽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페이지는 팔랑팔랑 넘기고 있으나 내용을 읽고 있는 건 아니었다. 맞은편에 황 대표가 보인다. 올곧은 자세로 작업 중인 모습이 우아하다. 좋아한단 감정을 막 깨우쳤을 때부터 심각했던 상태였다. 그런데 같이 사는 동안 구덩이가 더 깊게 파였다. 그곳에 그대로 갇힌 기분이 든다. 그만큼 황 대표에게 홀딱홀딱 빠지는 순간, 순간이 넘쳐 났다. 갈증이 일었다.

무엇이든 다 황 대표의 손에 쥐여 주고 싶고, 잘해 줘서 황 대표가 기뻐하는 걸 보고 싶다. 첫사랑이 아니라 두 번째, 세 번째였다면 어땠을까? 지금보다야 덜 서툴렀을지도 모르겠다. 시작부터 단추를 잘못 꿰는 바람에 줄줄이 엉망이다. 버들이 눈가를 찡그렸다. 좋아한다는 고백, 그런 식으로 하지 말걸. 그게 현재로서 가장 사무친다. 낭만이랄 게 전혀 없었다. 시간을 되돌려 그때로 딱 돌아가고 싶다. 그럼 커다란 케이크를 주문해야지. 풍선이랑 촛불로 그윽하게 주변을 꾸며 무드를 조성한 다음에…….

어차피 거절당하겠지만. 아쉽고, 미안하다.

“대표님. 바빠요?”

잡지를 들고 조심스레 버들이 황 대표에게 다가갔다.

“이거 무슨 뜻이에요?”

옆에 앉아 모르는 용어들을 몇 개 물어보는가 싶었다. 그러다 잡지는 덮어놓은 채 종알종알 버들이 모아 뒀던 수다를 실컷 떨었다. 주로 어디 가서 뭘 보고 왔는지, 뭘 하다가 왔는지 그런 별 시답지 않은 일상이 대다수였다.

“밖에 나가 운동화를 벗은 적이 없는데요. 나중에 보니까 발등에 모기가 물려 있었어요. 너무 신기하죠?”

……시끄럽다. 내쫓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는 이유는 그런 버들의 수다가 들을 만해서가 아니라 대답할 가치가 없어 상대를 하지 않는 것뿐이었다. 황 대표에게 무시당하는 줄 알면서도 그게 하루 이틀이 아닌지라 버들은 언제나 꿋꿋했다.

새근새근 약한 숨소리에 황 대표가 옆을 돌아봤다. 어느 틈에 버들이 잡지를 베고 잠들어 있었다. 바깥이 훤했다. 얼굴을 가리고 있는 버들의 앞머리를 황 대표가 손끝으로 슬쩍 들어 보았다. 꾹 감긴 눈꺼풀이 보인다. 황 대표의 고개가 반대쪽으로 기울어졌다. 매일 자정도 안 되는 이른 시간에 잠자리에 들고 있으면서도, 요즘 들어 버들은 꼭 이렇게 낮잠까지 챙겨 잔다. 그늘 아래에서 그림 작업을 하다가 말고 꾸벅꾸벅 조는 걸 본 적도 여러 번이었다. 잠이 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도련님 팔자 한 번 참 좋네. 황 대표가 비죽거렸다. 모니터에 집중하던 황 대표의 고개가 얼마 못 가 다시 버들에게로 향했다. 턱을 괬다.

“유버들.”

“…….”

“너 왜 거짓말하고 다녀.”

“…….”

유 대표에게 전화가 걸려 왔었다. 버들의 방학이 얼마 남지 않았단 걸 쓸데없이 재차 반복해 상기시켰다. 그러면서 어쩐 일이냐고 한참 호들갑을 떨어 댔었다. 내 새끼가 그러는데 말이야. 황 대표, 네가 잘해 준다면서? 이기적인 네 새끼가 어쩐 일이래? 너는 안 처먹으면서 꼬박꼬박 내 새끼 삼시 세끼는 챙겨 먹인다니. 뭐야, 드디어 돌았어? 잘 먹고, 잘 자고, 거기 좋은 공기 마시고. 내 새끼 이러다가 포동포동, 건강이 넘쳐서 오는 거 아니냐? 안 그래도 영상 통화할 때마다 볼 빵빵하게 살이 올라서 만져 보고 싶어 환장하겠던데.

유 대표는 버들의 말마따나 전화비 아깝게 개풀 뜯어 먹는 소리만 해 댔다. 간략하게 업무 이야기로 넘어갔지만,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볼은 빵빵하네. 딱 거기만.

황 대표가 팔을 뻗어 옅게 오르락내리락하는 버들의 등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말라서 오돌토돌한 척추뼈가 손바닥 밑으로 고스란히 만져진다. 자세가 불편할 버들을 번쩍 안아 들었다. 살짝 인상을 찌푸리면서 버들이 뭐라고 칭얼거렸다. 조심히 바닥에 눕히니 곧바로 몸을 웅크린다. 베개를 가져와 목 뒤에 넣어 주고 이불을 덮어 줬다.

버들의 오른쪽 발등이 볼록하게 부풀어 있다. 모기가 물어 놓은 자국은 동그란 모양으로 분홍색이었다. 워낙 살결이 곱고 뽀얗다 보니까 그 부분만 크게 도드라진다. 살짝 손만 가져다 댔을 뿐이건만. 잠이 든 상태에서도 뭔가 귀찮게 느껴지는지 버들이 발을 이불 속으로 쏙 숨겨 버렸다. 모기 물린 자국, 아직 덜 구경했다. 버들의 발목을 덥석 움켜쥔 황 대표가 예고치 못한 감각에 흠칫거렸다.

……사내새끼가. 어떻게 된 게 발목 두께가 제 한 손에 전부 잡히게 생겼다. 힘을 주면, 버들의 모든 몸을 조각조각 부러뜨릴 수도 있을 것만 같다. 기가 막힌 황 대표가 저도 모르게 미간을 구겼다.

“긁지 마.”

버들이 그대로 굳었다.

“……간지러운데.”

황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울상을 짓던 버들이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낮잠 한숨 푹 자고 일어나 밖에 나갔다가 돌아온 버들이 그때부터 모기 물린 제 발등을 못살게 굴고 있었다. 주의를 주면 그때뿐이다. 황 대표의 시선이 돌아가면, 그걸 기회로 삼았다. 눈치를 살펴 가며 버들이 슬금슬금 다시 발등에 손을 가져갔다.

“머리에 손 올려.”

주춤거리면서 버들이 말을 들었다.

“왜요?”

“보려고.”

“제 발을요?”

놀라서 감춰 보려고 했지만 역시나 힘에 밀렸다. 도톰하게 부풀어 올랐던 자국에 가로 세로를 겹쳐 손톱으로 찍어 누른 흔적이 있다. 아까까진 멀쩡했으니 누가 그랬을지 안 봐도 뻔했다.

“정민이가 이러면 안 간지럽다고 해서요.”

“그래서. 이러니까 안 간지러워요?”

“……아뇨. 간지러워요.”

짜증이 확 났다. 버들을 데리고 황 대표가 욕실 문을 열었다.

“왜 따라 들어와.”

“…….”

“안까지 따라 들어와서 나랑 뭐 하게.”

“…….”

버들이 나가려고 반쯤 몸을 돌렸다.

“누가 나가래.”

“…….”

버들이 갈팡질팡했다.

“얌전히 있어.”

문지방에 버들을 앉혀 놓고 황 대표가 바지를 걷게 했다. 차가운 물을 틀었다. 버들의 모기 물린 발등에 샤워기를 가져다 댔다. 화들짝 놀란 버들이 어깨를 움츠렸다. 금방 발 전체가 얼얼해졌다. 그러면서 간지러움이 둔해졌다. 자기 무릎 위로 버들이 턱을 기대었다. 발에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갔다. 샤워기를 지나, 황 대표의 손목까지 시선이 닿았다. 굵직하게 돋아난 파릇한 핏줄이 주인의 성격을 닮아 사납게 느껴진다. 걷어 올린다고 올린 바지 밑단이 살짝 축축해졌다.

“됐어?”

황 대표의 물음에 버들이 턱을 주억거렸다.

“이제 안 간지러워?”

“네. 이제 괜찮아졌어요.”

황 대표가 물을 껐다. 타일로 둘러싸인 욕실 특성상 똑똑, 여운처럼 물 떨어지는 소리가 동굴처럼 울렸다. 버들의 발등이 붉어졌다. 꼼지락꼼지락 움직이는 걸 황 대표가 물끄러미 응시했다. 푹 젖어서 그런지 더 여리게 보이는 버들의 발톱과 발가락이 기묘한 가학심을 자극해 아랫배 깊숙한 곳이 순간 움찔거렸다.

“……대표님?”

버들을 확 잡아당겨 벽에 기대 세웠다. 황 대표가 눈을 내리깔았다. 버들의 배꼽 밑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 뒤로, 안 세웠어?”

그 뒤로도 섰고, 그 전에도 섰었다. 아침이면 으레. 남자니까.

“…….”

“…….”

말을 잃은 버들에게 황 대표가 바짝 제 하반신을 가져다 댔다.

“아. 이상해요.”

당혹스러운 얼굴로 버들이 고개를 저었다.

“뭐가 이상해. 게이 새끼야. 넌 좋아해야 한다니까.”

“……이상해요.”

황 대표가 버들의 등 뒤로 손을 감았다. 얇은 티셔츠가 황 대표의 손가락을 따라 주름이 졌다. 움푹 파인 허리 뒤쪽을 황 대표가 엄지손가락으로 밀듯 문질렀다. 금방 헐떡거리며 버들의 호흡이 가빠졌다. 어깨를 밀치고 벗어나려는 버들의 꼴이 같잖아 내버려 뒀다. 수건으로 발을 닦은 다음 버들이 소파에 앉았다. 의미 없이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지만 사실은 욕실 문을 닫고 나온 황 대표에게 모든 오감이 쏠려 있었다.

“……무거워요.”

버들을 소파에 눕혔다. 황 대표가 버들의 다리 사이 빈 공간에 무릎을 딛고 올라왔다. 내려다보길 잠시. 황 대표가 버들의 목과 어깨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뜨겁게 호흡이 스며들자마자 버들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숨도 참아 버린다. 이를 세우려던 황 대표가 잠시 고개를 뗐다. 지금을 견뎌 내기 위해서인지 두 눈을 질끈 감은 것으로 모자라 버들이 아래턱 전체에 힘을 줬다.

……아. 이러다가 입 안쪽 살을 깨물면 또 상처가 생기는 거지.

상처가 왜 생겼는지 파악하게 된 황 대표가 눈살을 찌푸린 뒤 버들의 입술 틈을 비집고 제 손가락 하나를 집어넣었다. 상냥함 따위 없는 갑작스러운 삽입이었다. 화들짝 놀란 버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말랑한 혀가 밀어내려고 반항해 보지만, 나약할 뿐이었다. 황 대표의 손가락 전체가 습한 기운으로 젖어 들었다. 느릿하게 넣었다가 뺐다. 버들의 아랫니에 달그락 긁힌 제 손가락을 시작점으로 몸 구석구석, 뜻밖의 자극이 번졌다.

깊어진 황 대표의 눈빛을 더는 못 버티고 버들이 저쪽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왜 네가 피해.”

넌 매달리고, 내가 피해야지.

화난 황 대표의 목소리가 가슴을 저리게 만들었다. 왜? 뭐에 화가 나셨을까. 머리를 굴려 보지만 짐작 가는 게 없다. 그저 평소처럼 화풀이로 제 몸을 씹어 댈 황 대표를 기다리면서 좁은 소파에 누운 버들이 바르작거렸다.

황 대표의 얼굴이 다시 버들의 어깨로 내려앉았다. 일부러 이를 세우지 않았다. 달뜬 입술과 혀로만 느릿느릿 버들의 피부 위를 지분거렸다. 버들이 다급히 숨을 삼켰다. 머리카락이 쭈뼛 선다. 기이한 감각이 피어오르면서 소리가 나올 거 같다. 참기 위해 입을 다물고 싶지만, 입안을 지그시 누르는 황 대표의 손가락이 그걸 방해했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버들이 무릎을 버둥거렸지만, 돌덩이 같은 황 대표의 허벅지에 고스란히 깔려 버렸다.

황 대표가 버들의 귓바퀴를 핥았다. 단맛이 난다.

“아…….”

버들이 결국 신음을 흘렸다. 눈가가 글썽거린다. 반면 황 대표는 처음부터 여유로웠다. 티셔츠를 들추고 들어온 황 대표의 커다란 손이 버들의 배꼽 밑까지 파고들었다. 희미한 버들의 신음이 숨소리에 섞여 황 대표의 귓가로 흘러들어 갔다. 보드랍고 연한 곳에 손길이 닿자 버들의 아랫배가 바짝 납작해졌다. 온몸의 솜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다. 더는 못 참겠다. 버들이 있는 힘껏 황 대표의 손가락을 물어 버렸다.

“대표님. 아파요?”

황 대표가 몸을 일으키자 버들이 얼른 물었다. 목소리는 불분명하게 잔뜩 떨고 있는 주제에, 눈에 걱정은 한가득이다.

“네 손으로 직접 보여 줘.”

“……아!”

황 대표의 손이 가슴을 스쳐 지나가면서, 전율이 찰나 폭탄처럼 터져 숨이 꽉 막혔다.

“보여 줘. 직접.”

“제 거, 젖꼭지요?”

바들바들 떨면서 버들이 되물었다. 젖…… 뭐? 황 대표의 말문이 콱 막혔다.

“…….”

“…….”

황 대표가 제 몸 위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힘이 전체적으로 빠져 버렸지만 그렇다고 계속 누워 있을 순 없었다. 한쪽 팔꿈치를 밀어 체중을 지탱하며 버들이 엉거주춤 상체부터 일으켰다. 그 잠깐 사이 진땀이 뻘뻘 났다.

“너 왜 못 만지게 해? 보지도 못하게 하고.”

새빨개진 얼굴로 버들이 숨을 골랐다.

“바지 한 번 벗어 볼래?”

“……바지요?”

“왜. 싫어?”

“…….”

버들의 속눈썹이 아래로 잠겨 들었다.

“이게 입만 열면 거짓말이네.”

쌀쌀한 어조였다. 무슨 말이냐는 듯 버들이 황 대표를 올려다봤다.

“내가 갖고 싶다는 거 뭐든 다 준다고 하지 않았어요?”

“…….”

“해 줄 수 있는 건 다 해 준다면서.”

“…….”

난감하다.

「대표님이 갖고 싶다는 거 뭐든 다 드릴 거고요. 또 제가 해 줄 수 있는 건 다 해 드릴 거예요. 정말이에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사뭇 진지해진 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황 대표가 속으로 비웃었다. 저를 놀리고 있단 걸 버들이 못 알아차리고 있다. 표정을 보아하니 이제 곧 가슴도 홀라당 보여 주고, 바지도 벗게 생겼다. 아니나 다를까. 눈에 띌 정도로 달달 떠는 손으로 버들이 지퍼를 찾아 쥐었다. 한숨에 물기가 척척하게 섞여 있다.

“대표님…….”

“네.”

“…….”

작은데……. 볼품없는데. 훨씬 큰 거 갖고 계시면서.

“됐어.”

황 대표가 고개를 돌렸다.

“줘도 안 가져.”

순간 당황스러움에 버들이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가지세요. 드릴게요.”

“됐어요.”

“망설였던 건, 주기 싫어서가 아니라 제가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그랬어요.”

남들과 달리 털 한 올 없는 제 아래를 보고 황 대표가 또 징그럽다느니 그런 말을 할까 봐 두려웠다. 내가 애초에 털이 없고 싶어서 이렇게 태어난 게 아닌데.

“생각 다 했어요?”

“네! 생각 다 했어요.”

소파에서 내려온 버들이 현기증으로 잠시 휘청거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황 대표를 향한 시선만큼은 올곧다.

“대표님 줄 거예요.”

“어딜.”

“다요. 다. 제 몸 다.”

“안 가질래요.”

“왜요? 가지세요. 네?”

“어디다 써요. 내가 네 몸을.”

“청소나 빨래나 심부름 같은 거 시키실 때요.”

“됐어요.”

“왜요?”

“말라서 별로예요.”

“대표님. 저 밥도 많이 먹을 거고, 앞으로 근육도 키우고. 어디 가세요? 대표님!”

버들이 황 대표의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정자에 누워 잠이 든 황 대표의 곁으로 버들이 살살 걸어 다가갔다. 저가 물었던 손가락을 유심히 살폈다. 크게 상처는 없었지만 일자로 긁힌 자국은 또렷했다.

……어떡해.

버들이 어딘가에서 얻어 온 반창고를 황 대표의 배 위에 살짝 올려놓고 돌아섰다. 물론 황 대표는 그 반창고를 사용하기는커녕 건드리지도 않았고, 버들의 애만 바짝 타들어 갔다.

* * *

나른한 눈을 깜박이며 담배 연기를 내뿜던 황 대표가 다리를 꼬았다. 집 안에 있던 버들이 쌩하니 튀어나왔다. 당연히 저를 찾아 옆으로 올 줄 알았는데 웬 모자를 챙겨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필터를 비벼 끄고 몇 분 더 풍경을 보며 앉아 있었다.

정신도 차릴 겸 욕실에 들어갔던 황 대표가 곧장 다시 나왔다.

“유버들.”

“……네?”

“너 이리 와.”

아무렇지 않게 표정 관리를 하고 있다지만 그 자체만으로 어색했다. 황 대표님은 섬세한 남자니까 이런 걸 좋아하지 않을까? 나름 준비해 본 이벤트에 기뻐할 모습들을 상상하며 전날부터 행복했더랬다. 딱딱한 황 대표의 얼굴을 보자마자 잘못되었단 걸, 알아차렸다. 이미 늦었다. 황 대표가 도망치지 못하게 버들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나란히 욕실로 들어갔다. 버들이 코를 훌쩍거렸다.

“너 이거 뭐야.”

“……대표님 기분 좋으시라고, 제가 준비했어요.”

욕조엔 둥실둥실 정체 모를 꽃잎들이 떠다녔다.

……아. 진짜. 꼴통 새끼.

“다 건져 내.”

“대표님. 목욕하세요. 제가 와인 따라 드릴까요?”

“건져 내라고 두 번 말했어요. 이게 어떤 꽃인 줄 알고 목욕을 해.”

“……식용 꽃이라서 먹어도 돼요. 안전해요.”

“건져 내. 빨리.”

“네.”

시무룩해져선 버들이 다시 모자를 들고 왔다. 꽃잎을 건져 내기 위해 버들이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허리 밑으로 소복한 엉덩이가 보였다. 뒤에 선 황 대표가 문에 비스듬히 기대어 선 채 느릿하게 버들의 몸을 훑었다.

“욕조 닦아.”

“…….”

“꽃 뿌렸잖아.”

“…….”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 그러니까.”

“…….”

황 대표가 타박하자 버들의 눈썹이 축 처졌다.

어김없이 밥때가 돌아왔다. 식기 부딪치는 소리가 침묵이 이어지는 걸 막았다. 황 대표의 난데없는 행동에 버들이 오물거리고 있던 걸 꿀꺽 삼켰다.

“저 이거 다 주면, 대표님은 뭐 드세요?”

“여기 내 거 따로 있으니까 잠자코 먹기나 해요.”

“……양 많은데.”

먹기 싫어서 둘러대는 말일 게 뻔했다. 황 대표가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반찬은 가짓수가 다양하나 전부 폴 쪼가리들이었다. 이런 걸 먹어서 얘가 말랐나 싶었다. 황 대표가 스테이크를 두 덩이 구워 하나는 버들에게 내밀었다. 미적거리기에 대신 한 입 크기로 잘게 잘라 주기까지 했다.

“대표님.”

“…….”

“황 대표님.”

황 대표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좋아해요.”

황 대표가 맞은편을 힐긋거렸다. 막 씻고 나온 버들이 머리를 말리지도 않고 노트와 색연필부터 챙겨 자리에 앉았다. 보통 그런가 보다 가벼이 그냥 넘겨 왔던 게 로션 성분을 확인한 터라 신경 쓰인다. 옆으로 불렀다. 가까이 다가온 버들의 볼을 황 대표가 빤히 살폈다. 눈 아래가 다소 울긋불긋하다.

“로션 발랐어요?”

“아직 안 발랐어요.”

“……아. 안 발랐어?”

“네.”

황 대표가 미간을 좁혔다.

“바르고 와.”

“대표님. 저 할 말 있는데요. 앞으로 조각…….”

“일단 로션 바르고 와.”

버들이 욕실로 뛰어 들어가 로션을 통째로 꺼내 왔다.

“조각 이제 마무리 작업 들어가요.”

“…….”

“거의 다 완성됐어요.”

“…….”

“엄청 웅장해요.”

“…….”

“제가 한 조각, 진짜 대표님 영화에 나오는 거예요?”

“…….”

“그림도 거의 다 그렸고.”

손바닥에 덜어 낸 로션이 하얀색이었다. 그걸 마치 세수하듯 버들이 벅벅 문지르면서 발랐다. 성의라곤 일절 찾아볼 수가 없었다. 무식한 손길에 황 대표가 움찔거렸다. 울긋불긋한 게 더 짙어졌다.

“너 로션을 왜 그렇게 발라. 여기는 하나도 안 발라졌잖아.”

황 대표에게 잔소리를 들은 버들이 큰 눈을 멀뚱히 깜박거렸다. 역시 사나이답게 터프하다면서, 겨울은 칭찬해 줬었다.

“이거 진짜 안 따가워요?”

“안 따가워요. 오래전부터 썼던 거예요.”

손을 씻고 온 황 대표가 자기 손등에 버들의 로션을 적게 덜었다. 말없이 버들의 턱을 붙잡고 제 쪽으로 고개가 향하도록 돌렸다. 버들의 이마, 볼, 턱 아래에 로션을 조금씩 묻혔다. 버들이 얌전했다. 겉으로만 그럴 뿐이었다. 속으로는 심장이 난동을 부려 대는 중이었다.

버들이 최대한 숨을 죽였다. 황 대표가 손에 힘을 뺐다. 별짓을 다한다면서 속으로 자조 섞인 욕설을 내뱉었다. 볼부터 넓게 문지르며 로션을 발라 주는데 놀랐다. 새삼 버들의 피부가 꼭 생크림처럼 녹아 버릴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손길이 떨어지자 버들이 가만히 눈꺼풀을 들었다. 황 대표의 눈에 제 모습이 언뜻 비춰지는 게 신기했다.

“대표님.”

“……응.”

“속눈썹이 왜 그렇게 길어요?”

“너도 길어. 속눈썹.”

보드레한 버들의 볼이 붉게 물들면서 숫접게 웃었다. 버들은 처음부터 단 한 번의 이탈이 없었다. 작정하고 날카로운 단어들을 골라 퍼부으며 자존심을 긁어 대도 직진만 하면 되니 쉬워서 그런지 길 잃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제 앞에 방긋방긋 웃으며 다가와 좋아한다고, 예쁘다고, 근사하다고 소곤거렸다. 그마저 병신 같은 새끼라고 비웃어 버리면 됐다.

같이 사업하는 동생이라서 어쩔 수 없이 그었던 선이 있었다. 저를 못 쳐다보게 눈을 멀게 만드는 게 아니라, 애달프게 쳐다보건 말건 내버려 두는 것. 딱 거기까지였다. 직접 세운 기준으로 그었던 선이였건만 어느 순간부터 흐릿해졌다. 무심코 뒤를 돌아보면서 틈틈이 제 뒤에 서 있는 버들을 봤다. 감정이 오락가락 널뛴 건, 버들 때문이 아닌, 순전히 자신의 탓이었다.

단물을 빨아먹지 말았어야 했을까?

아픈 거 잘 참나 호텔에서 쓰러뜨리지 말았어야 했을까?

회사에서 우연히 마주쳐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 끔찍했던 때와 비교하면 더 확연하게 현재와 차이가 벌어진다. 그게 자각이 되면서 머릿속이 일순간 혼잡스러워질 때가 있었다. 자다가 문득 깨 혐오스러운 게이 새끼랑 한 집에 살면서, 같은 샴푸 냄새를 공유하면서, 살찌우기 위해 고심하면서 도대체 뭐 하고 있는지 스스로 묻게 되는 경우도 종종 생겨났다.

“유버들 씨.”

“네.”

“저 좋아해요?”

“좋아해요.”

버들의 눈빛이 맑다.

“나랑 뭐 하고 싶어서 좋아한다는 건데. 솔직하게. 화 안 낼게. 섹스하고 싶어요?”

“저 대표님이랑 섹스하고 싶어서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그럼. 지지고 볶고, 연애질 뭐 그딴 거 하고 싶어요?”

“아니요. 저는…….”

버들이 웅얼거렸다.

“섹스가 목적도 아니고. 연애질도 아니고. 그럼 나 왜 좋아해요?”

버들이 깊게 숨을 들이켰다.

“저는 그냥…… 대표님 보자마자 좋았어요. 얼굴이 좋았고, 몸이 좋았고, 발목이 좋았고, 손가락이 좋았고, 목젖이 좋았고, 눈이 좋았고, 입술이 좋았고, 눈매가 좋았고, 머릿결이 좋았고, 목소리가 좋았고…… 전부, 다. 다 좋았어요.”

워낙에 투명해서. 계산할 줄도 몰라 제 마음 하나하나 뒤집어 까, 남김없이 탈탈 털어 전해 주는 버들의 맹목적인 애정에 아무런 감흥이 생기지 않는 게 맞는 건데 불쾌하고, 신경질이 솟구치며, 어렵다.

황 대표가 얼굴을 기울여 버들의 목덜미에서 나는 향기를 맡았다.

“풀밭에서 굴렀어요?”

“아, 이거 로션 냄새에요. 허브 향.”

“…….”

“대표님한테, 지금 제 냄새 나요.”

* * *

조각도를 정리하고 버들이 앞치마를 풀었다. 빨리 가서 황 대표님과 있고 싶다. 일분일초 더 서두르는데 부엌에서 노부인이 부르는 소리가 났다. 크게 대답하며 버들이 그 안을 들여다봤다. 비릿한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제 막 잡아 온 놈이라며 오골계의 뒷다리를 노부인이 들어 보였다. 몸보신할 때가 된 것 같단 말에 버들의 눈썹이 치켜떠졌다.

“그거 저 주시는 거예요?”

“응. 푹 고아 줄게.”

“저 이거 집에 가서 먹어도 돼요?”

“고아 줄게. 가져가. 같이 사는 대표 양반이랑 나눠 먹어.”

“아니요. 제가 요리할게요.”

노부인은 놀란 눈치였다.

“요리할 수 있어?”

“네. 유 회장님이 하시는 거 봤어요. 옆에서 제가 자주 도와드리기도 했고.”

“아니야. 아니야. 내가 해 줄게.”

“부탁할게요. 제가 하고 싶어서 그래요.”

버들의 고집에 그녀가 졌다. 못 하겠으면 곧바로 가져오기로 약속한 뒤 버들이 오골계를 소쿠리에 담아 옆구리에 끼었다. 압력 밥솥도 빌렸다. 입맛 없는 황 대표가 더위 타서 그런 걸 수도 있단 판단이 들었다.

벌컥, 문을 열었다. 어디 외출하셨는지 집이 텅 비어있다. 차라리 잘됐다. 버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오골계 손질부터 서둘렀다. 식칼로 배를 가르고 거침없이 내장을 뜯어냈다. 흐르는 물에 깨끗하게 오골계를 씻었다. 본격적인 손질은 지금부터다. 배 안쪽에 닭 껍질이 말려 있는 걸 그대로 삶으면 너무 기름지니 전부 제거해 줬다. 누린내를 줄이기 위해 닭 머리가 있었을 목까지 칼로 내려쳐 잘라 냈다.

다시 한 번 흐르는 물에 닭을 벅벅 씻어 준 다음 노부인이 따로 챙겨 준 한약재와 전복 같은 걸 배 속에 집어넣었다. 오골계의 다리를 서로 모아 실로 감았다. 압력 밥솥에 넣은 뒤 가스레인지를 켜고 나서 버들이 바깥으로 나갔다.

어디 가셨지? 길치라 혼자 멀리 나가진 않았을 테니까 근처에 계실 텐데. 마당을 기웃거리면서 버들이 황 대표를 기다렸다. 시간이 흘러 압력 밥솥이 달궈지는 소리가 났다. 버들이 신발을 벗고 후다닥 집안으로 뛰어갔다. 상을 미리 차려 놓기 위해서 버들이 조심스레 압력 밥솥을 들었다.

식탁에 옮기는 중이었다. 10년도 더 된 압력 밥솥의 꼭지가 떨어지면서 손등 위를 굴렀다. 뜨거움을 못 참고 반사적으로 버들이 손을 놓아 버렸다. 압력 밥솥이 그대로 식탁 위에 엎어졌다. 노트북 쪽으로 국물이 길을 내며 흘러갔다. 버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떡해. 다리를 동동 구르며 압력 밥솥을 치웠다. 아래 황 대표의 가죽 수첩이, 자신이 뉴욕에서 주워 찾아 줬던 그게 흥건히 젖어 엉망이 되어 버렸다. 뚜껑이 벌어지면서 오골계가 빠져나오려고 했다. 다급한 마음에 손부터 뻗은 버들이 뜨거움에 화들짝 놀라 물러났다. 집 꼴은 한순간에 엉망이 되어 버렸다. 하필 그때, 현관문이 열렸다.

“……대표님.”

잠시 멈춰 상황을 파악하던 황 대표의 얼굴이 있는 대로 구겨졌다. 성큼성큼 걸어 노트북과 외장하드를 저쪽으로 치웠다. 버들의 손에 들린 제 수첩을 바라봤다. 기가 막힌다. 수첩을 낚아챈 뒤 자신에게로 다가오려는 버들의 어깨를 황 대표가 세게 밀어 버렸다. 버들의 몸이 벽에 가서 부딪혔다.

벽에 튕겨진 버들이 풀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곧바로 일어나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애써 노력해도 무릎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버들의 눈가가 곧장 불콰해졌다. 잘게 떨리기 시작한 아랫입술을 버들이 비틀어 힘껏 깨물었다. 가빠진 호흡에 목구멍이 옥죈다.

“평소에나 잘 처먹지 너 이게 무슨 짓이야.”

“제가 먹으려고 한 게 아니라, 대표님 입맛 없다고 하셔서…….”

더듬더듬 늘어놓은 버들의 변명에 순간 한계까지 신경질이 치솟았다.

“이 미친 새끼야. 왜 애를 쓰고 지랄이야. 너 가만히 있어도 정신 나가 보여. 나서서 미친 짓 골라 할 필요가 없다니까.”

식탁 위에 엎어져 뒤범벅인 된 음식 냄새가 진하게 올라오더니 황 대표의 비위를 건드렸다.

“네 손으로 만지고 만든 음식, 내가 먹을 거 같아?”

버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손을 주먹 쥐어 제 등 뒤로 감췄다.

“거지새끼처럼 구걸하려고? 제발 좀 먹어 달라고 따라다니면서?”

싸늘한 목소리 톤으로 황 대표가 욕을 짓씹었다. 노트북과 외장하드보다 수첩이 망가진 게 모든 성질을 건드려 댔다. 출국 날짜까지 미뤄 가며 왔던 길을 되밟고, 또 되밟아 가며 찾아다니다가 잃어버렸단 걸 겨우 인정하고 나니 산사태처럼 덮쳐 오던 허망함이 아직도 선명했다.

다시 되돌아온 수첩이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늘 품에 지니고 다니면서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왔다. 황 대표의 손목 주변으로 핏줄이 단단하게 섰다. 마디마디가 하얗게 불거져 나올 정도로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낙엽처럼 수첩이 반으로 접혀 구겨졌다. 뚝뚝. 수첩 끄트머리에 고여 떨어지는 국물의 양이 상당했다. 굳이 자세히 확인할 필요도 없다. 수첩의 상태가 어떨지 짐작됐다. 오래된 가죽이었다. 아무리 닦아 낸다고 한들. 바짝 말린다고 한들. 원래대로 복구시키는 건 거의 불가능이다. ‘H’ 자수 역시 축축했다.

쓰레기통에 황 대표가 직접 수첩을 처박았다. 난폭하게 널뛰는 제 심장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황 대표가 차 키를 챙겨 들었다. 난장판으로 더럽혀진 집 꼴과 정신 나간 게이 새끼를 보고 있자니 도무지 침착할 수가 없었다. 현관문을 나가기 직전, 황 대표가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봤다.

“유 대표한테 전화해서 데리러 오라고 하세요. 그리고 오늘 이후로 절대 내 눈에 띄지 마.”

버들의 옆에 사용한 휴지가 산처럼 쌓여 갔다. 그만큼 시름은 깊어졌다. 어떻게든 황 대표의 수첩을 깨끗하게 닦아 보려고 했으나 오히려 티슈에서 묻어 나온 하얀 먼지까지 들러붙어 더 최악이 되어 버렸다. 종이로 된 속지가 젖어 저들끼리 뭉쳐 떼어지지 않는다. 안에 중요한 내용이라도 있으면 어쩌나. 미치겠다. 괴롭고 마음속이 절절 끓는다. 자꾸 못살게 깨물어 댄 버들의 아랫입술이 부어 텄다. 한숨이 사라지지 않고 겹겹으로 쌓인다.

좋아한다고 멋대로 귀찮게 굴었다. 내 감정부터 막무가내로 앞세웠다. 한 대 맞아도 할 말 없는데, 오히려 황 대표가 잘해 준 것들이 수북하다. 작업실도 내줬지, 여기 와서 옷이랑 속옷도 빌려줬지, 담배도 같이 피우게 해 줬지, 같이 살게 공간도 양보해 줬지. 입에 맞지 않았을 게 분명한데도 저 대신해서 막걸리도 마셔 줬지, 무거운 거 참고서 저를 번쩍 들어 개울가를 건넜지, 로션 발라 줬지, 잡지도 보게 해 줬지, 밥 먹으라고 챙겨 줬지…….

손가락 열 개 정도는 금방 접힌다. 그런 반면 저는 황 대표의 옆에서 폐만 끼쳤다. 잘해 주려고 정성을 보일수록, 또 잘 보이려고 노력할수록 어긋나는 느낌이다. 왤까. 이대로 황 대표 때문에 제 애간장이 전부 녹아 버리게 생겼다.

가늘게 떨어지기 시작했던 빗줄기가 차츰 굵어졌다.

번개가 내리쳤다. 현관문으로 향하는 계단에 앉아 있던 버들이 일어났다. 밝게 켜진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가까워진다. 몇 번 들어 본 엔진 소리가 기억에 박혀 저 멀리서도 미리 황 대표의 차란 걸 알아차렸다. 처마 끝에 덧붙여진 좁은 지붕이 차양 역할을 완벽히 해 주지 못했다. 바람이 불어닥치는 방향대로 빗줄기가 정처 없이 휘어졌다. 앞서 빌려다 놓은 우산을 줍기 위해 허리를 굽히자 날카로운 이명이 들려왔다. 익숙하다. 침을 삼키며 버들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대표님. 수건…….”

눅눅해진 수건에 버들의 말이 나오다가 말았다. 차에서 내린 황 대표는 현관 아래로 건너오면서 자신처럼 젖어 버렸다. 빗물로 얼룩진 황 대표의 등과 어깨, 귀 등을 차례차례 버들의 눈동자가 집요하게 짚었다. 보통은 나갔다가 돌아올 때 옷이 바뀌어 있었던 것 같은데, 어제 그대로다. 버들의 눈꺼풀이 아래로 잠겼다. 수건과 우산을 준비해 놓으면 뭐 해. 늘 그랬듯 황 대표에게 자신은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우울함을 감추기 위해 숨을 깊게 들이켜자 가슴이 들썩였다.

“대표님. 수영장, 다녀오셨어요?”

버들이 있는 쪽으로 돌아간 황 대표의 눈길이 매섭다.

“유 대표한테 전화했어요?”

딱딱 끊듯 내뱉은 질문에 버들이 움츠러들었다. 틈을 두고 고개를 저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고 또 밤이었다. 기온이 낮았다. 긴팔을 챙겨 입었으나 천이 늘어질 정도로 젖어 있는 버들을 보며 황 대표가 비웃었다.

“불쌍한 척 굴면서 뭐 하자는 건데.”

사과하고 싶었다. 수첩에 대해. 진심으로.

“대표님 제가, 수첩 똑같은 걸로…….”

“너 내가 눈에 띄지 말라고 했잖아.”

권태로운 톤으로 비난이 돌아왔다.

“넌 내가 하는 말들이 우스워?”

“…….”

“아니면. 멍청해서 듣고도 금방 잊어버리는 거야?”

분명 쓰레기통에 처박았던 제 수첩을 버들이 더러운 손으로 들고 있었다. 그걸 빼앗은 황 대표가 마당에 던져 버렸다. 빗물에 패인 구덩이 속에 수첩이 푹 잠겼다. 놀란 버들의 큰 눈이 느릿하게 깜박거렸다.

“대표님. 제가 잘못했어요.”

눈을 감았다가 뜰 때마다 속눈썹이 축축해졌다.

“어딜 따라 들어와.”

주춤거리며 버들이 뒤로 물러났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린다. 갑자기 얼얼하게 번지기 시작한 두통에 눈가를 찌푸리며 황 대표가 현관문을 닫아 버렸다. 기껏 차를 끌고 나갔지만 사실 목적지 자체는 애매했다.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라 핸들을 꺾었고 그때마다 경로를 이탈했다. 그러면서 뻔히 길을 잃었다. 예고치 못하게 비까지 퍼부었고 결국 갓길에 차를 세워 놓을 수밖에 없었다.

주변으로 물안개가 희뿌옇게 일었다. 무연하게 차 안에 갇힌 채로 유 대표가 버들을 데려갔을 시간을 얼추 계산한 뒤에 돌아왔다. 그런데 말을 들어 처먹지 않는 게이 새끼 때문에 하루만 낭비한 셈이 됐다. 열이 받자 속이 울컥거린다.

황 대표가 스위치를 눌렀다. 몇 번의 깜박거림 끝에 형광등이 환하게 켜졌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다가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식탁을 중심으로 난장판이었던 집안 꼴은 몇 시간 사이 깔끔하게 정리된 채였다. 비위를 건드렸던 음식 냄새 역시 완벽하게 사라졌다. 마치 아무런 일이 없었단 듯 시침을 떼는 거 같아 심기가 거슬렸다.

“대표님…….”

다시 현관문을 열자 버들이 서 있었다. 황 대표가 버들의 짐이 들어 있는 상자는 물론 옷, 칫솔, 로션, 곱게 개켜진 이불과 베개까지. 전부 던져 버렸다.

다음 날 버들은 잠에서 깨자마자 신발을 신었다. 뒤에서 밥 먹으란 노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금방 다녀와서 먹겠다며 걸음을 재촉했다. 새벽으로 넘어가면서 비가 그쳤다. 땅이 온통 질척거린다. 마당에 차가 있는 걸 보고 버들이 가슴까지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현관문을 차마 바로 열지 못하겠는지 버들이 창가 근처를 기웃거렸다. 커튼 틈이 작게 벌어진 곳을 포착했다. 집중해서 쳐다봤다. 매직 아이처럼 곧 눈동자가 가운데로 몰리고야 말았다. 아이. 뭐야. 버들이 잔뜩 콧잔등을 찌푸리며 손등으로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아쉽게 안이 잘 보이지 않는다. 너무 이른 아침이었다. 아직 주무시나? 나중에 조깅하러 나올 황 대표가 놀라지 않았으면 해서 버들이 꼬물거리는 지렁이를 집어 화단으로 옮겨 주었다.

황 대표는 오후가 지나서 볼 수 있었다. 담벼락 뒤에 숨은 버들이 꾀죄죄한 앞치마를 움켜쥐었다. 주머니 안에 넣어 놓은 수첩이 만져진다. 재차 심호흡을 한 뒤에 몸을 살짝 기울였다. 방금 전까지 텅 비어있던 버들의 눈빛이 햇볕만큼 초롱초롱 생기를 머금었다.

제 스승님과 황 대표가 조각품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혹시나 싶어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황 대표의 서늘한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향수 냄새까진 맡아지지 않아 조금 아쉬웠다. 건강하게 벌어진 넓은 등짝을 타고 버들의 눈꺼풀이 아래로 떨어졌다. 어쩜 저러지. 아킬레스건과 발목이 저렇게나 야해 보이는 사람은 태어나 처음 만나 봤다. 황홀함이 비눗방울처럼 둥실거린다. 아. 조각하기 정말 잘했다. 안 그랬으면 황 대표와 아는 사이로 남을 기회가 일절 없었을 거다.

다리가 풀린 버들이 흙바닥에 벌러덩 누워 버렸다.

* * *

이틀 뒤, 황 대표의 비서가 내려와 그림이 완성된 캔버스를 차에 실었다. 큰 눈을 슴벅거리는 버들에게 비서가 팔을 내밀었다. 전처럼 조심히 건네주는 박하사탕을 받아 가며 버들이 꾸벅,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목소리가 바닥을 기었다. 그림과 함께 황 대표까지 데려가면 어쩌나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황 대표 없이 차만 빠져나갔다. 버들이 힐긋, 황 대표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단정한 입매가 굳건하게 닫혀 있다. 사소한 줄 알았더니, 그림 그리느라 수고했단 칭찬 한 마디가 너무 큰 바람이었나 보다. 눈이 마주쳤다. 동시에 숨까지 멈추며 굳어 버린 버들을 남겨 두고 황 대표가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대표님…….”

버들이 현관문을 빠끔히 열었다. 황 대표의 고개가 오로지 노트북 화면에 고정되어 있다. 차라리 욕이라도 해 주지. 아예 없는 사람 취급을 해 버리니 더욱더 애가 타고 긴장된다. 버들이 신발을 벗었다. 눈치를 보는 하얀 발가락이 애처롭다.

“저 일부러 여기 온 거 아니고, 볼일 있어서 왔어요.”

“…….”

“색연필 가지러 온 거예요.”

“…….”

“근데, 대표님. ……식사, 하셨어요?”

“…….”

집안에 남은 물건이라고는 이제 색연필 정도뿐이었다. 철제 뚜껑이 비틀려 제대로 잘 닫히지 않아 달그락거렸다. 품에 안은 색연필을 버들이 다시 원래 자리에 되돌려 놨다.

“아. 생각해 보니까, 지금 필요 없겠다.”

혼잣말이었지만, 황 대표가 들었으면 싶었다. 이제 여기에 올 수 있는 구실은 색연필밖에 없었다.

무릎 꿇고 앉아 있는 버들의 뒷모습에 황 대표의 눈길이 무심히 닿았다. 쯧. 낮게 혀가 차졌다. 거지새끼, 거지새끼 했더니 정말로 거지꼴로 버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대체 누구 옷을 빌려 입은 건지 모르겠다. 손등까지 푹 내려오는 긴 티셔츠가 버들의 마른 몸에 맞지 않았다. 부대 자루를 뒤집어쓴 것처럼 볼품없다. 하마터면 한 푼 적선할 뻔했다. 그거 받고 떨어지라고.

“야.”

더 이상 핑곗거리도 없어 이만 돌아가야 할 것 같아 마당을 가로지르고 있는 버들의 운동화가 뒤를 꺾어 신은 탓에 금방 벗겨질 것처럼 헐떡거렸다. 터벅터벅 걷던 버들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갑자기 들려온 황 대표의 목소리에 심장이 쿵, 떨어졌다. 다시 말 걸어 주시는 건가? 예전처럼 이름도 불러 주시고, 웃어 주시고.

“……아.”

발 근처를 노리고 황 대표가 던진 색연필이 버들의 둥근 어깨에 정통으로 부딪혔다. 낮게 신음하며 버들이 제 어깨를 감싸 쥐었다. 와르르 쏟아진 색연필 심이 여러 개 부러졌다. 이어 페이지가 아무렇게나 펼쳐진 채 노트가 날아왔다. 황급히 버들이 노트부터 주워 들었다. 여태 그려 놓았던 그림들에 진흙이 스며들어 너덜거렸다.

……어떡해. 황정우 하트는 물론, 해바라기까지 전부 다.

쾅. 문이 닫혔다.

정민이 눈살을 찌푸렸다.

“앉아.”

“잠깐만 있어.”

할아버지가 휘두르는 빗자루를 맨몸으로 맞서면서 정민이 포도 몇 송이를 따 왔다. 동네 길목의 나무에 등을 대고 앉아 있는 버들의 허벅지에 그걸 내려놨다. 낮은 높이로 잠자리 몇 마리가 날아다녔다. 정민의 귓가가 홧홧하게 붉어졌다. 멀뚱하게 저를 올려다본 버들의 얼굴이 말갛다.

“나 주는 거야?”

“……어. 먹어.”

“이렇게 많이 필요 없어.”

“누가 당장 다 먹으래? 뒀다가 먹어. 다른 사람 주지 말고, 너만.”

“…….”

딱 나흘 만이었다.

“너 어디 아파?”

“아니.”

포도를 우물거리면서 버들이 고개를 흔들었다.

“근데 왜 이렇게 말랐어?”

“옷이 커서 그렇게 보이는 거야.”

버들의 눈이 순하게 접혔다.

“옷 빌려줘서 고마워.”

“……고맙긴. 내 허락 맡지 말고, 너 알아서 빨랫줄에 걸린 거 다 꺼내 입어.”

정민이 버들의 옆에 앉았다. 잠시 망설이다가 재차 물었다.

“진짜 어디 아픈 데 없어?”

“없다니까. 나 되게 튼튼해.”

“……그럼 작업하느라 힘들어?”

곡선으로 말린 버들의 긴 속눈썹이 깜박였다.

“아니. 그림 끝내서 오히려 일이 줄었어. 한가해.”

“넌 모르는데 네 몸은 스트레스 같은 거 받고 있는 거 아니야?”

“응. 아니야.”

걱정이 그득하게 담긴 제 물음들에 비해 버들의 대답은 온통 장난처럼 쉽고, 가벼웠다.

“너 금방 가 봐야 한다고 안 그랬어?”

“어…….”

다른 지방에 거주하는 친척 생일로 인해 정민의 가족 나들이가 예정되어 있었다.

“넌? 운동하느라 힘들지 않아?”

“아니. 오히려 운동 안 하고 건너뛰면 근육 배겨서 힘들어.”

“운동 안 하는 날에도 그럼 운동해라. 여기 오지 말고.”

“…….”

버들이 작게 재채기를 터트렸다.

“너 수영 할 줄 알아?”

“어.”

“할 줄 알아?”

그렇다고 대답한 정민의 얼굴을 버들이 길게 바라봤다.

“……난.”

“너 뭐.”

“나는 담배 펴. 부럽지?”

“그게 부러운 거냐.”

단지 허세로 짐작하며 정민이 실없게 픽, 웃었다.

“넌 못 피우잖아.”

“몸 관리 차원에서 안 피우는 거지.”

“그러니까. ……잘 생각해 봐.”

“뭘.”

“나 담배 피우는 거 부러울 수도 있잖아.”

달짝지근한 포도 향이 코 밑으로 스몄다. 우연히 스친 생각에 정민이 인상을 찌푸렸다. 협소한 스탠드에 앉아 물끄러미 운동장을 내려다보던 버들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너 나 운동하는 거 부러워?”

버들의 목울대가 침이 넘어가면서 올각거렸다. ……아니! 뒤늦은 강한 부정이었다.

“…….”

“…….”

수다쟁이 둘이서 입을 다물자 별안간 정적이 찾아왔다. 궁금한 게 생긴 버들이 먼저 침묵을 깼다.

“너도 수영하러 수영장 가고 그래?”

“여기 바다 있어.”

황 대표가 욕을 내뱉었다. 며칠 쥐죽은 듯 굴더니 또다시 버들이 거치적거리기 시작했다. 버들의 한쪽 어깨를 타고 사이즈 큰 옷이 주룩 흘러내렸다.

“혹시나 싶어서. 나 열 받게 해서 버들 씨가 얻는 거 있어요?”

“대표님. 부탁드려요. 한 번만요. 한 번만, 저랑 산책 가시면 안 돼요?”

버들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대표님이랑 가고 싶은 곳이 있어요.”

조르고, 조르고, 또 졸랐다.

파리를 때려잡으면 손이 더러워지니까 나가라고 문을 열어 두는 것처럼, 괜히 더 말 섞기가 싫은 황 대표가 결국 턱을 작게 끄덕거렸다. 버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해가 기울었다. 새파랬던 하늘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앞장서서 걷던 버들이 슬쩍 뒤를 돌아봤다. 계곡만 있을 줄 알았는데 바다까지 있었을 줄이야. 횡재했단 기분이 앞섰다. 여기 바다가 있단 정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짜고짜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물었다. 전봇대를 지나 빨간 지붕 집을 지나 감나무를 지나……. 차근차근 떠올려 보지만 헷갈린다. 미리 먼저 가 보고 나서 조를걸. 또 마음이 앞섰던 게 후회가 된다.

「너 아직 안 가 봤지? 바다, 외국 같다.」

걷고 또 걸어도 바다는커녕 눈앞에는 커다란 산밖에 보이지 않는다. 마을을 벗어나니까 급기야 울퉁불퉁 길이 험해졌다. 지친다. 질척질척, 두 사람의 바지 밑단이 더러워졌다. 버들이 황 대표의 눈치를 살폈다.

“대표님…….”

간신히 입을 열었다. 마른 입술을 버들이 혀로 핥았다.

“다음에 제가 길 확실하게 알아서…….”

“너한테 ‘다음에’ 그런 거 없어.”

기가 찬다. 욕이 나오다가 말았다. 황 대표가 뒤돌아섰다. 주변이 서서히 어두워진다. 버들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바로 앞에서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려드는 트럭을 피하다가 황 대표가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버들이 얼른 그걸 주웠다. 조막만 한 기계에 진흙이 여기저기 묻었다. 제 옷에 열심히 문질러 닦아 다시 황 대표에게 건네줬다.

이번엔 뒤에서 차가 달려왔다. 큰 소리에 화들짝 놀란 버들이 휘청거렸다. 넘어지지 않고자 뻗은 팔을 황 대표가 잡아 주지 않고 바라만 봤다. 버들이 풀썩 쓰러졌다. 엉덩방아를 크게 찧으면서 황 대표의 얼굴로 진흙이 튀었다.

* * *

“정민아.”

버들의 목소리가 낮았다.

“정민아!”

크게 불러 봤지만, 어두컴컴한 집은 그대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만 친척 집에 모셔다 드리고 저는 금방 오겠다더니. 아쉬움에 버들의 눈썹이 축 처졌다. 내일이면 오려나? 그러겠지? 턱을 잡아 당겨 버들이 제 모습을 내려다봤다. 엉망이다. 이대로 스승님 댁에 가면 걱정하시니까 어쩔 수가 없다. 남의 집 대문 앞에 버들이 쪼그려 앉았다. 산속 깊은 곳에서 정체 모를 새소리가 들렸다.

* * *

진득하게 씻고 나온 황 대표의 표정이 좋지 않다. 그때 벌컥, 문이 열렸다. 당연히 버들인 줄 알고 욕부터 튀어 나갔다. 하지만 문고리를 쥐고 있는 사람은 버들의 스승이었다. 노인의 주름진 얼굴이 무서울 정도로 와락 구겨졌다.

“버들이 있는가!”

깜박거리는 커서에서 황 대표가 눈을 뗐다. 팔꿈치를 식탁에 올리고 마른세수를 했다. 눈가가 피곤하다. 따라 놓은 와인이 금방 바닥을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황 대표가 밖으로 나갔다. 시간이 늦어 동네 자체가 고요했다. 노인의 집에 도착한 황 대표가 손님방을 열어 봤다. 당연히 버들이 잠들어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도 없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황 대표가 노트북 앞에 앉았다. 냉담한 태도였다.

그러기 잠깐이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줄기는 실처럼 얇았다. 노인이 버들을 찾으러 왔을 때 시간은 이미 자정이 넘어 있었다. 늦게까지 어디서 뭘 하고 돌아다니는지 모르겠다. 신경질적으로 황 대표가 와인 잔을 던져 버렸다. 파삭, 얇은 유리가 산산조각이 났다. 재차 욕설을 내뱉으며 황 대표가 제 이마를 짚었다. 눈앞에 있을 때나. 안 보일 때나. 버들은 이젠 똑같은 크기로 제 속을 뒤집어 놓기 시작했다. 창백한 안색을 기점으로 큰 눈, 바짝 마른 버들의 어깨 같은 것들이 떠올랐다. 어디 가서 쓰러져도 이상할 거 없어 보였다. 급하게 펜션을 나섰다.

한 시간은 족히 주변을 헤매야 했다. 끝끝내 황 대표가 버들을 찾아냈다. 몸을 잔뜩 웅크리고 앉아 내리는 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었다. 어김없이 짜증이 폭발했다.

“……대표님.”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턱을 기대어 앉아 있던 버들이 놀라 숨을 들이켰다.

“너…….”

말문이 나오다가 막혔다. 버들이 비틀거리면서 황 대표의 앞으로 다가갔다.

……아. 어떡해.

“무슨 일 있어요?”

“…….”

“황 대표님…….”

쩔쩔매던 버들이 제 신발을 벗었다. 황 대표가 맨발이었다. 그 앞에 신발을 내려놨다.

황 대표가 주먹을 쥐었다. 버들의 하얀 얼굴을 보고 있으니 뺨이라도 한 대 쳐 버리고 싶은 충동이 거세게 일었다. 그걸 황 대표가 가까스로 억눌렀다. 버들의 신발을 집어 들어 논두렁으로 던져 버렸다.

“너 따라와.”

나란히 맨발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버들이 눈치를 봤다. 황 대표가 짤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노인의 집에 보내기엔 버들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씻어.”

마른 몸을 밀치자 밀치는 대로 밀린다. 반대로 잡아당기면 잡아당기는 대로 끌려왔다.

기껏 씻어 놓고선 더러운 옷을 그대로 주워 입은 버들의 앞에 황 대표가 제 옷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작은 목소리로 인사 후 버들이 황 대표의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소매가 길어서 다행이었다. 여기에 있어도 되는 건가. 나가야 하는 건가. 머릿속이 줏대 없이 갈팡질팡 난리가 났다. 어차피 저는 이기적이고, 뻔뻔했다. 황 대표님이랑 조금만 더 같이 있고 싶다. 쫓아내면 하는 수 없겠지만.

버들이 잡지를 꺼냈다. 황 대표가 앉아 있는 식탁 맞은 편 의자를 조심히 뺐다. 벽에 얼룩진 와인과 깨진 잔을 곁눈질로 바라보기만 했을 뿐 왜 그런지 이유는 묻지 못했다. 비 내리는 소리만 공간을 메웠다.

황 대표의 눈길이 버들에게 닿았다. 옷에 삼켜진 버들의 한쪽 손가락이 꼬물거렸다.

“잘 거야.”

“……네.”

버들이 사용할 수 있는 여분의 이불이 없었다. 황 대표가 던져 준 재킷의 용도를 버들이 알아차렸다. 양해를 구하지 않고 황 대표가 집안의 모든 불을 꺼 버렸다. 잡지의 글자가 보이지 않게 됐다. 황 대표가 잠을 청하고 있을 복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이 곧 눈에 어둠이 익었다. 버들이 재킷을 덮고 누웠다. 하루 종일 한 건 없지만 왜 이렇게 몸이 노곤한지 모르겠다. 금방 잠에 빠졌다.

“……미친.”

이불을 걷고 벌떡 일어난 황 대표가 바닥을 내려다봤다. 신음이 노골적이다. 변태 새끼가 야한 꿈이라도 꾸는지.

“야. 조용히 해.”

잠깐 멎는가 싶더니 버들이 다시금 신음을 흘려 댔다.

“닥쳐.”

황 대표가 제 베개를 던졌다. 베개가 버들의 웅크린 등을 맞고 튕겨 나왔다. 푹신해서 어차피 아프진 않을 거다. 끙끙거리는 버들의 숨소리가 신경을 갉아먹는다. 더는 못 참고 황 대표가 계단을 내려왔다. 불부터 켰다. 재킷을 걷자 식은땀에 푹 젖은 버들의 얼굴이 허옇게 질려 있었다. 손을 대자마자 놀랐다. 온몸이 불덩이다.

“유버들.”

“…….”

“버들아.”

“…….”

인상 쓴 황 대표가 서둘러 버들의 몸을 안아 들었다. 땀에 젖어 이마 위에 들러붙은 앞머리를 치웠다. 꾹 감긴 속눈썹이 처연하다.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거칠면서, 가냘프다. 그때 늘어진 손이 바닥에 툭, 닿으면서 버들이 앓는 소리를 냈다. 황 대표가 버들의 손을 확인하기 위해 소매를 걷었다. 손등에 옅은 화상 자국이 있다. 뜨거운 국물이 식탁 말고 버들의 발까지 적셨나 보다. 발등마저 울긋불긋했다. 비가 잦아 쌀쌀해진 날씨 탓에 긴 옷을 입고 다녔던 게 아니라, 이걸 가리기 위해서였나 보다.

황 대표가 버들의 손목을 쥐었다. ……아! 전기에 감전되듯 파르르 떨며 버들의 고개가 힘없이 외로 꺾였다. 뭔가 이상하다. 마른 몸을 추스르던 황 대표가 살짝 걷은 소매를 아예 팔꿈치 위까지 올렸다. 버들의 왼쪽 손목 둘레가 해괴할 정도로 퉁퉁 부어 있었다.

[3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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