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비 오는 날 흙냄새 (2)
버들이 소파에 앉아 쉬고 있었다. 에어컨 바람이 너무 차다. 추워진 버들이 꾸물꾸물 배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타자를 치던 황 대표의 손이 멎었다.
“손 빼. 빼, 빨리.”
옆에 눈이 달리셨나.
“손 시린데…….”
“손 시린데 배꼽을 왜 만져.”
황 대표의 목소리에 신경질이 뚝뚝 묻어 있다.
“따뜻해서요.”
주눅이 든 버들의 목소리가 바닥을 기었다.
“배꼽 만지지 마.”
“…….”
“머리 만져. 털 많아서 훨씬 따뜻하겠네.”
“…….”
“손 아직도 안 뺐어?”
어쩔 수 없이 버들이 배꼽에서 손을 뗐다. 황 대표의 말대로 머리카락 속으로 손을 파묻으니까, 웬걸. 의외로 따뜻하다. 버들이 만족해하는 동안 황 대표의 눈썹은 점점 일그러졌다. 하얗게 생긴 애가 저러고 있으니까 그냥 속이 꿈틀꿈틀 틀어진다.
“남중이나 남고 나왔어요?”
버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황 대표가 생각했다. 한참 치기 어린 연령대에 게이 새끼란 걸 들켰다면 몹쓸 것들이 가만히 놔두지 않았을 거다. 멍청한 것으로 모자라 저렇게 무방비해 보이니 험한 꼴을 당하고도 남았겠지.
“대표님. 뉴욕에는 왜 오셨어요?”
황 대표의 곁으로 버들이 슬쩍 다가갔다.
“뉴욕 되게 넓고 사람도 많잖아요. 대표님이 잃어버린 수첩을 주운 게 저라니. 진짜 운명이었나 봐요, 우리.”
운명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한심스럽단 듯 황 대표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일 안 해요?”
“해요. 나가서 그림 그리려고 했어요.”
버들의 눈이 반달처럼 휘어졌다. 총체적 난국이다. 자존심도 없고. 울지도 않고. 상처도 안 받고. 거기다가 웃음까지 참 헤프다.
햇볕이 따사롭다. 그림을 그리다가 필요한 색을 내기 위해 물감을 섞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림을 확인하려는지 황 대표가 마당으로 나왔다. 때마침 전화가 걸려 왔다.
비록 시큰둥한 어조였으나 그냥 있다는 둥, 밥은 먹었다는 둥 지극히 사적인 황 대표의 대화만으로 통화 상대와 친근한 사이일 거란 짐작이 간다. 거리가 있어 상대방 목소리까지 들리지 않지만 어쩌면 여자가 아닐까 싶었다. 버들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당장이라도 황 대표님이 차를 탈까 봐 조바심이 난다. 호텔까지 길을 안내하라고 하면 어떡해.
“대표님. 누구예요?”
전화를 끊은 황 대표의 고개가 버들이 있는 쪽으로 돌아갔다. 통화 상대는 유 대표였다. 형식적인 안부를 묻고선, 새로 배웠단 음담패설을 줄줄 늘어놨다. 유 씨 형제들이 세트로 골치를 아프게 한다.
“대표님. 좋아해요.”
버들이 붓을 내려놨다.
“저 서울에 맛있는 밥집 많이 알아요.”
“…….”
“전시회 일정 같은 건 꿰고 있고요.”
“…….”
“그리고…….”
시끄럽다.
“버들 씨. 같이 나가요.”
버들이 고개를 숙였다. ……싫다.
“말 안 들려요?”
호텔까지 길을 안내하라고 시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황 대표는 그대로 차를 지나쳤다. 그제야 굳었던 버들의 얼굴이 살짝이나마 풀렸다. 얼른 황 대표의 등 뒤로 다가갔다.
“대표님. 어디 가요?”
“산책.”
조깅하기 쉽게 길을 외워 볼 요량이었다. 빨간색 지붕을 지나서 파란색 대문을 지나서……. 뒤를 돌자 빨간색 지붕도 여러 개, 파란색 대문도 여러 개다. 참 개성 없는 촌구석이다.
“산책? 우리 둘…….”
‘우리’라는 지칭에 짜증이 나서 뒷말은 들려오지도 않았다. 주변에 인적이 없다. 담벼락 사이로 황 대표가 버들을 끌고 갔다. 뾰족이 튀어나온 돌에 버들의 등이 밀렸다. 야외라서 그런지 집보다 버들의 버둥거림이 심했다. 같잖아. 힘에 밀린 버들의 어깨가 바짝 움츠러들었다. 황 대표가 힘껏 깨문 버들의 가느다란 목에 핏줄이 터지고 울혈이 남았다. 큰 눈이 어룽진다. 쌕쌕, 빠르게 숨을 몰아쉬는 버들을 황 대표가 쌀쌀히 내려다봤다.
버들의 귀가가 평소보다 일렀다. 정자에 누워 있는 황 대표가 단박에 눈에 들어왔다. 불안했던 마음이 그제야 진정된다. 황 대표가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 버렸으면 어쩌나 울적한 생각들에 조각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저 멀리서 노을이 진다. 버들이 황 대표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가족과 떨어져 있어서 외롭지만 황 대표님이랑 단둘이서 보내는 시간들이 꿈만 같다. 감겨 있는 황 대표의 속눈썹이 변함없이 곱다. 황 대표의 얼굴과 손, 어깨, 다리, 귓바퀴를 버들이 가만히 눈에 새겼다.
「사랑해.」
솜사탕에 절여지는 줄 알았다.
「뭐, 이런 말 기대해요?」
「…….」
「행여나 너 좋아한단 말 꺼내는 건 그냥 너랑 한 번 자 보겠단 뜻이고.」
「…….」
「그럴 일은 평생 없을 거야. 내가 머리에 총 맞지 않는 한.」
산뜻하게 바람이 불었다.
“대표님. 머리에 총 맞았으면 좋겠어요.”
버들의 목소리가 소곤소곤 가라앉았다.
“그래서 저랑 뽀뽀도 하고, 손도 잡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으러 다녀요.”
나직하게 웃으며 제 할 말을 끝낸 버들이 뒤돌아 멀어졌다. 황 대표의 눈이 쓱, 뜨였다.
……저 쌍놈의 새끼가.
멀어지는 듯했던 발소리가 다시 가까워진다. 황 대표의 눈이 잠든 척 다시 감겼다. 헐레벌떡 뛰어온 버들이 방금 한 말을 취소했다. 대표님이랑 뽀뽀도 하고 싶고, 손도 잡고 싶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으러 다니고 싶은데. 머리에 총 맞으시면 안 돼요.
버들이 저미는 입술을 열었다.
“사랑해요.”
정민과 버들이 마주 보며 섰다. 나란히 거지꼴이다. 할아버지 포도밭에 갇혀 있다가 나온 정민이나 직전까지 조각하고 온 버들이나 흙을 뒤집어쓴 상태였다. 양옆으로 벼가 익어 가는 중이다. 귀뚜라미 소리가 우렁차다.
“야. 뭘 봐.”
저답지 않게 과묵하던 정민이 그만 보란 듯 억실억실한 눈에 힘을 빡 줬다. 전혀 영향력이 없었다. 순한 버들의 큰 눈이 여전히 빤히 정민을 향한 채였다. 정민이 엉거주춤 각도를 틀었다. 상의는 할머니 꽃무늬 티셔츠, 하의는 할아버지 고무줄 바지를 빌려 입은 채였다. 부끄러움이 몰려든다. 원래의 계획은 씻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버들을 만나러 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를 솔선수범 실천하시는 할아버지는 하나뿐인 손자에게조차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그러면서 계획은 틀어졌다. 꿀떡꿀떡 삼킨 음식들이 목구멍에 걸린 기분이었다. 후회해도 이미 늦은 뒤였다. 아침에 먹은 밥 두 공기와 신나서 미리 당겨 먹은 새참을 갚기 위해선 할아버지의 호통 아래 한눈팔 틈도 없이 포도를 따야만 했다. 간신히 포도 지옥에서 탈출했을 땐 버들과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이 가까워져 있었고, 늦지 않으려면 엉망인 채로 달려올 수밖에 없었다.
“너 멋있다.”
툭 던진 버들의 한 마디에 정민의 볼이 단숨에 빨개졌다.
“그래. 내가 좀 멋있긴 하지?”
뻔뻔하게 굴었지만 도통 화끈거림이 가라앉지 않는다. 그런 정민에게 버들이 운동화를 끌며 한 발자국 다가갔다. 버들의 손가락이 뭔가를 가리켰다.
“그거 어디서 샀어?”
“……뭐. 모자?”
챙이 둥근 밀짚모자였다.
“갖고 싶어?”
“어디서 샀는데?”
“줄까?”
정민이 밀짚모자를 벗었다.
“너 머리 이상해.”
“야. 방금 전까지 멋있다며.”
“모자 멋있다는 거였지.”
김이 팍 샌다. 말간 버들의 얼굴을 흘겨보던 정민이 궁금한 걸 물었다.
“너 근데 귀가 왜 그러냐?”
걱정이 들어 버들의 귓불로 정민이 팔을 뻗었다. 화들짝 놀란 버들이 얼른 뒷걸음질 쳤다. 새벽에 황 대표가 잔뜩 씹어 놓은 통에 귓불이 전체적으로 퉁퉁 부어 여태 가라앉지 않았다. 불안해진 버들이 손바닥으로 제 귀를 얼른 가렸다. 공중에서 정민의 팔이 갈 곳을 잃었다.
“뭐야?”
“만지지 마.”
“누가 만진대?”
억울한 투로 정민이 반박했다. 한가득 불신이 담긴 버들의 눈이 여전히 공중에 올라와 있는 정민의 팔에 닿았다. 말과 행동이 달라 머쓱해진 상황이었다. 정민이 헛기침을 하며 팔을 접었다. 이어 버들을 안심시키고자 팔짱을 꼈다.
“귀 빨갛던데.”
손을 내리려던 버들이 다시 제 귀를 사수했다.
“보지 마.”
“야. 치사해서 안 봐.”
두 사람의 옆으로 자전거가 지나갔다. 울퉁불퉁한 흙길에 덜컹거리는 자전거 바퀴 소리가 금세 멀어졌다. 콧잔등을 찌푸린 버들의 앞으로 정민이 들고 왔던 뭔가를 내밀었다.
“뭐야?”
“포도. 내가 땄어.”
비닐봉지 안을 활짝 벌려 버들이 안을 들여다봤다. 들어 있는 건 달랑 포도 한 송이건만 무게가 묵직했다. 그만큼 알갱이가 큼직하게 잘 익은 포도였다. 달콤한 냄새가 풍겨 온다. 그간 뭐가 딱히 먹고 싶었던 적이 없었는데 오랜만에 맡아 본 단내에 저절로 침이 꼴깍 삼켜졌다.
두리번거리며 그늘진 곳을 찾았다. 둘 다 어차피 옷은 더러웠다. 정민과 버들이 아무렇지 않게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포도를 나눠 먹었다. 씨를 후, 뱉느라 버들의 입술이 동그랗게 모아졌다. 안 먹겠다고 툭툭거릴 줄 알았더니. 의외다. 오물오물, 잘 먹는 버들의 모습에 정민이 땀 뻘뻘 흘려 가며 포도를 딴 보람을 찾았다. 이게 바로 할아버지가 모토로 삼은 착한 농부의 마인드인가.
“모기가 물었나?”
“모기?”
“너 귀.”
“보지 말라니까.”
까칠하게 버들이 발끈했다.
“빨갛게 부어 있는데, 알아?”
“내 귀야. 당연히 알지.”
“안 간지러워?”
“응.”
“근데 너랑 나…….”
뜬금없는 감격에 젖어 든 정민이 마저 말을 이었다.
“여기서 보다니. 이 정도면 운명 아니냐?”
“그냥 우연이지.”
버들이 인상을 썼다. 운명은 황 대표와의 사이에서만 쓰고 싶은 특별한 단어였다.
“많이 먹어라.”
많이 먹고 키 4cm 더 커라. 버들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가 기어이 한 대 얻어맞았다. 정민이 제 옆에 앉아 있는 버들을 실컷 구경했다. 아르바이트가 고된지 많이 야윈 것 같다.
“유버들.”
“왜.”
“……아무것도 아니다.”
살 빠졌냐고 콕 집으면 살 안 빠졌다고 바득바득 우겨 댈 버들의 모습이 안 봐도 선하다. 할아버지 댁에서 쫓겨나는 한이 있더라도 포도 따위 외면하고 버들이 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와주고 싶었지만, 아르바이트가 곧 조각이라고 하니 가만히 빠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정민은 못내 아쉬웠다.
“어때?”
뽐내듯 정민이 씨와 껍질을 한꺼번에 씹어 삼켰다. 과격하게 턱이 움직인다.
“뭐가 어때?”
“남자답지 않냐?”
“씨랑 껍질은 버리는 거야.”
“네가 포도에 대해서 뭘 알아?”
“포도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씨랑 껍질은 맛없어.”
“원래 맛없는 게 몸에 좋아. 다 씹어 먹는 거야.”
포도송이 줄기가 생선뼈처럼 앙상해진다. 이러다간 남는 게 없을 성 싶다.
“왜?”
말이 없어진 버들의 어깨를 정민이 건드렸다.
“나 그만 먹을 건데, 너는?”
포도는 한 다섯 살 때부터 물린 지 오래였는데 단지 버들이 먹기에 따라 먹은 거였다. 정민이 저도 그만 먹을 거라고 말했다. 왜인지 조마조마했던 버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줄기에 붙은 포도 알맹이가 몇 개 남지 않았다. 그대로 버려도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손끝에 물든 포도 물을 바지에 닦은 뒤 버들이 비닐봉지를 소중하게 오므렸다.
그러고는 둘이서 머나먼 여정을 떠났다. 물어물어 모자를 파는 잡화점에 도착했다. 잡화점답게 없는 거 없이 다 판다. 아이스크림 냉장고에 정민이 고개를 파묻었다. 저 밑바닥에서 생산이 중단된 아이스크림을 발견했단다. 여기저기 신기한 것들이 굴러다니는데 어쩐 일인지 버들은 한눈팔지 않고 모자에만 집중했다. 상체만 겨우 비춰지는 거울 앞에 서서 여러 디자인의 모자를 썼다가 벗었다가 반복한 뒤에야 지갑을 열었다.
“왜 두 개 사?”
“하나는 내 거고, 하나는 황 대표님 거.”
혹시나 하는 기대로 크게 황 대표를 불러 가며 버들이 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다. 식탁 위에 모자와 포도가 든 비닐봉지를 내려놨다.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 없이 적막한 분위기가 낯설다. 꼴깍거리며 물을 마시는 버들의 어깨가 축 처졌다.
오늘 새벽, 동이 틀 때쯤이었다. 배려 없이 황 대표가 집안의 모든 불을 켜는 바람에 눈이 부신 버들은 이르게 잠에서 깰 수밖에 없었다. 바깥이 아직 어둑어둑했다. 잠을 오래 설쳤던 통에 졸린 눈을 비비며 버들이 씻고 나왔다. 연신 하품이 터졌다. 손이 시려 습관대로 제 배꼽을 어루만지고 있던 참에 황 대표에게 잡혀 버들이 벽에 세워졌다. 평소보다 더 억센 힘으로 황 대표가 버들의 몸 여기저기를 물어뜯어 놓았다. 집중적인 부위는 귀였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엔 온갖 종류의 차가 마당에 들어와 복잡해졌다. 우글거리며 집 안으로 모여든 사람들로 공간은 금세 소란스러워졌고 정신이 없어진 버들이 뒷걸음질 치다 제 베개를 밟고 휘청거렸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버들과 달리 황 대표는 계속 느긋했다.
사람들은 황 대표가 호출한 직원들이었다. 그들이 침대 매트리스를 교체하고, 공기 청정기 필터를 갈아 끼우고, 그릇들을 새로 정비하고, 옷가지들을 걸어 놓는 동안 황 대표는 시계를 고르고, 향수를 뿌리고, 소매 단추를 채우면서 외출 준비를 끝냈다. 불안정하게 눈동자를 굴리며 버들이 황 대표의 뒤를 열심히 따라다녔지만 함께 차를 탈 수 없었다. 황 대표가 올라탄 차에 시동이 걸렸다. 바짝 붙어 비키지 않은 버들이 때문에 차가 출발할 수 없었다. 창문이 내려졌고, 황 대표가 성가신 투로 입을 열었다. 일하러 가는데 방해할 거예요? 황 대표의 그 말에 버들은 하는 수 없이 물러섰다.
황 대표가 떠나고 혼자 남겨졌던 그 순간이 머릿속에서 계속 되풀이되었다. 샤워를 하고 나와 머리를 말리던 버들이 문득 황 대표가 없는 내부를 빙 둘러보았다. 아직 머리카락이 축축한데 드라이기를 내려놨다.
……안 들키겠지?
별로 넓지 않은 공간을 버들이 활개를 치며 야무지게 돌아다녔다. 만년필 뚜껑을 뽑아 심 두께를 한참 구경했다. 괜히 냄새를 맡아 보려다가 코에 점이 찍혔다. 시계를 제 손목에 둘러 본 버들이 실망했다. 황 대표가 찼을 때는 우아하고 고상해 보이더니, 막대기 같은 제 손목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 버들이 허공에 황 대표의 향수를 칙칙 뿌렸다. 황 대표의 고정석인 식탁 의자에 앉아 보기도 했다.
“커.”
버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포장을 뜯지 않은 황 대표의 새 속옷 위에 버들이 제 새 속옷을 꺼내 와 겹쳐 올려 봤다. 사이즈가 여실히 비교된다. 진득하게 탐닉한 결과, 버들이 결론을 내렸다. 황 대표의 속옷 취향은 온통 블랙이다. 제 속옷도 온통 블랙이었다. 황 대표님이랑 나는 운명이 맞아. 벅차오르는 걸 참지 못하고 버들이 다리를 굴렀다.
그때, 갑자기 문이 덜컹거렸다. 버들이 순간 기겁했다.
황 대표가 돌아온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가슴까지 쓸어내리며 버들이 안도했다. 덜컹거렸던 문은 단순히 바람 탓이었다.
복층으로 올라가던 버들이 중간에서 멈췄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깨끗하다. 황 대표가 사용하는 침구가 푹신해 보인다. 방금까지 멀쩡했던 허리가 찌르륵 아픈 거 같다. 나도 침대에서 잘 자는데. 한 치의 거짓도 없이 곱게 자란 버들이 침울해져서는 입술을 비죽거렸다. 남자는 허리가 생명이라지? 관리 잘해야 예쁨 받는다고 했던 말을 어디서 주워들은 적이 있다. 문이 다시 한 번 덜컹거렸다. 놀란 버들이 계단에서 떨어졌다.
* * *
밤이 끝났다. 바퀴에 자갈이 깔려 으깨지는 소리가 점차 가까워진다. 정자에 앉아 허리를 바짝 낮춰 땅바닥의 갈라진 틈새를 내려다보고 있던 버들이 얼굴을 들었다. 마당 한가운데로 들어온 차 한 대가 헤드라이트를 밝혔다. 밑으로 조준된 빛이 사납게 쬐어진다. 푸르스름하게 깔려 있던 새벽안개가 주변으로 흩어졌다. 버들의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상의 없이. 시작처럼 멋대로.
차에서 내린 사람은 두 명이었다. 한 명은 황 대표였고, 다른 한 명은 운전기사 노릇을 한 수행 비서였다.
“……도련님?”
황 대표가 내리는 지시를 성실히 듣고 있던 중 비서가 우연히 버들을 발견했다.
“벌써 일어나셨습니까?”
유 대표와 공동으로 얽혀 있는 관계면 또 모를까. 정말 딱 황 대표의 업무만 보게 되어 있는 개인 비서다 보니 버들에겐 낯선 존재일 뿐이었다. 버들은 자기한테 말을 붙여 오는 인물에 큰 눈을 굴리며 경계했다.
“왜 나와 계십니까?”
버들에게 살가운 질문들만 골라 쏟아 내는 비서의 태도가 왠지 허둥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정신없어 보였다.
“그…….”
비서가 제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내 싱겁게 입을 다물었다.
“도련님.”
버들을 안심시켜 주려는 의도인지 비서가 활짝 웃었다. 그렇게 웃으면 어르신들이 사위 삼고 싶다고 칭찬을 모았다. 큰 풍채가 든든함에 한몫 더했다. 자신 있게 비서가 더 입가를 찢었다. 그러자 사색이 되면서 버들이 빳빳하게 굳어 버렸다. 실수를 깨달은 비서가 급히 웃음부터 집어치웠다.
“오해십니다!”
겁주려고 그랬던 게 아니라며 뭐라 해명하려던 비서가 황 대표에게 가로막혔다.
“이것밖에 없어서…….”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져 겨우 사탕 하나를 찾아낸 비서가 황 대표를 피해 버들에게 다가갔다. 사탕은 흔하디흔한 박하 맛이었다. 식당에서 밥 먹고 챙긴 거였는데 이거라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우물쭈물하던 버들이 사탕을 받아 갔다.
황 대표의 개인 비서가 일방적으로 버들에게 친근감을 갖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벌써 몇 개월째다. 황 대표를 향해 버들이 보낸 메시지는 고스란히 비서의 핸드폰으로 전송되는 중이었다. 오늘도 그랬다.
[날씨 어때요?]
[제가 드린 우산 갖고 계세요?]
[지금은 어디에 있어요?]
[오늘도 산책하러 가실 거예요?]
[저녁 드셨어요?]
[대표님, 혹시요. 볶음밥에 버섯 넣은 거 좋아하세요?]
[언제 와요?]
가까이에서 보게 된 버들의 인상이 참 유순하다. 비서와 버들의 눈이 마주쳤다. 어린애를 상대로 괜히 죄짓는 기분에 속이 뜨끔해진 비서가 남몰래 황 대표를 째려보았다. 유 대표의 막냇동생이 연락처를 착각한 것 같다며, 저에게 메시지를 보내온다던 그 언젠가의 보고에 여지없이 짜증을 부려 댔던 황 대표가 생생하다. 사사건건 그런 말 다 듣고 있을 정도로 자신이 한가해 보이냐면서, 월급 왜 주는지 생각해 봤냐면서.
「유 대표님 막냇동생님과는…….」
오늘 버들에게 메시지를 받은 비서가 혼날 거 각오하고 물었던 말이었다. 같이 산단 대답이 황 대표의 입에서 아무렇지 않게 흘러나왔다. 의외였다. 놀라움이 뒤따랐던 건 마땅했다. 저 이기적인 인간이? 다른 사람한테 자기 공간을 양보해 준다고?
비서가 나름 해석하고 있던 ‘황 대표 안에서의 버들의 위치’가 달라졌다. 이전엔 그저 유 대표의 막냇동생에 불과했다면 지금은 무려 황 대표의 동거인이었다. 암만 생각해도 대단하다. 이기적이고 성격 더러운 황 대표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니. 그 어려운 걸 버들이 해내고 있었다.
“……저기.”
“부르셨습니까.”
버들의 눈꺼풀이 잔잔하다. 침묵은 짧게 지나갔다. 고개를 숙이며 비서에게 인사하는 버들의 목이 가느다랗다. 부러 황송해하는 몸짓으로 비서가 버들에게 인사를 마주 건넸다. 무표정하게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황 대표의 표정이 금세 찌푸려졌다.
“뭐 해?”
황 대표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인 걸 비서가 알아차렸다. 더 지체했다간 황 대표의 신경만 긁는 꼴이다. 팔을 걷어붙인 비서가 차에 싣고 온 책들을 바지런히 집 안으로 옮겨 황 대표가 일러 준 기준대로 차곡차곡 책을 꽂아 넣었다. 그동안 황 대표는 담배를 피웠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황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차에 올라타기 전, 비서가 버들을 바라봤다.
“도련님. 또 뵙겠습니다.”
숨을 삼킨 버들의 입술이 벙긋거렸다. 오지 말라고 당부하고 싶은데 차가 먼저 떠났다. 마당은 다시 한적해졌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버들이 느슨하게 넥타이를 푸는 황 대표의 손길을 빤히 응시했다. 여기에 온 지 얼마나 됐다고 청바지가 아닌 반듯한 정장을 갖춰 입은 황 대표의 모습이 생소하게 다가온다. 반하고, 또 반하고. 지치지도 않는다.
“대표님. 다녀오셨어요?”
여기에선 황 대표님이랑 단둘이 있을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길을 안내하는 역할로도 황 대표님의 옆을 차지할 수가 없었다. 미련스럽게도 덩그러니 혼자 남겨졌을 때야 그걸 알아차렸다. 홀리는 와중에 안절부절못하겠고, 넋이 나가는 와중에 초조하다.
“일은 잘 끝내셨어요?”
“일? ……아.”
지극히 사적인 일이었다. 수영도 하고, 업무적으로 만날 사람들도 만나고, 정사도 나누고. 황 대표와의 거리를 천천히 좁혀 오는 버들의 머리카락이 조금 젖어 축축하게 가라앉아 있다. 소매나 바지 등 옷도 약간씩 물먹은 상태다. 아침 이슬이란 걸 황 대표가 알아차렸다. 기가 차서 한숨이 터졌다. 미련스럽다. 딱 봐도 밖에 나와 있은 지 꽤 됐다. 판판한 버들의 가슴팍과 올각거리는 목울대에 황 대표의 무심한 시선이 닿았다.
“대표님.”
피곤하니 말 섞기 싫다. 뒤돌아선 황 대표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뭐가 깨지는 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왔다. 기운 없이 한숨을 내쉬던 버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둘러 문을 열었다.
“너 왜 내 물건에 함부로 손대.”
버들이 구워 놓은 스테이크와 노인이 직접 캤다며 들고 가라 했던 버섯으로 만든 볶음밥, 포도 알맹이 다섯 개로 장식된 접시를 황 대표가 그대로 싱크대에 처박았다. 접시가 산산조각으로 갈라졌다.
“비위 약하단 말, 내가 했던 것 같은데.”
버들이 숨을 참았다.
“눈 없어? 네 손 더럽다고.”
미움받으려고 한 거 아니다.
“어제 저는 대표님 기다리다가, 바로 저녁…….”
“기다려? 기다리는 것도 자격이 있어야지. 넌 그런 거 없어.”
첫사랑이 참 모질다.
고작 하루의 외출이었다. 그마저 오롯하게 홀로 보낸 시간은 따지고 보면 얼마 되지 않았다. 수영 잠깐. 호텔 잠깐. 공적인 스케줄에는 일부러 많은 수의 직원들을 대동해 움직였었다. 독립적인 성격이면서 독단적인 걸 선호하는 황 대표에겐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그만큼 어떤 틈이나 여지를 주지 않겠단 의도가 명확했다. 조용히 흘러가던 기류는 오후가 되면서 깨졌다.
새롭게 사진이 찍히면서 스캔들이 재차 불거졌다. 장소는 백화점 명품관이었다. 정장을 갖춰 입고 팔찌를 고르고 있는 황 대표의 모습은 당연히 튀었다. 문제는 뒤쪽에 걸린 흑백 화보였다. 스캔들로 엮인 영화배우가 그 브랜드를 상징하는 대표 디자이너의 뮤즈이면서, 전속 모델이었다. 거길 그렇게 들락거렸건만 모르고 있었다. 어이가 없어서 짧게 헛웃음이 터질 지경이었다. 유 대표의 전화를 받고 기사를 확인했을 때야 벽면 전체에 그런 화보가 걸려 있단 걸 알았다. 어떤 말이 들려와도 나서서 취하는 행동이 없자 스캔들은 자연스레 관심 밖으로 물러나는 중이었다. 하지만 짧았던 외출로 겨우 잠잠해지던 불씨를 직접 키운 꼴이다. 유 대표가 내뱉는 쌍욕들을 뒤로하고 전화를 끊으면서 황 대표가 관자놀이를 짚었다. 시골에서 좀 더 머물러야 하게 생겼다. 미미하게 두통이 번진다.
개어 둔 이불 위에 얌전히 앉아 있던 버들의 눈이 놀라서 둥그렇게 커졌다. 통화 내용이 세세히 들려온 건 아니었지만, 막판에 오고가는 큰 소리만큼은 정확했다. 새로 튀어 오른 스캔들 건에 대해선 모르고, 그저 제 형과 황 대표가 서로 싸운 줄로만 아는 버들이 시무룩하게 처졌다. 겨울이 형 뭐야. 황 대표님한테 개새끼라고 하면 어떡해. 하필. 황 대표님은 금동이랑 감자 같은 새끼 개도 무서워하는데. 속상하다.
아침이 지나면서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세찬 빗방울로 인해 땅 가까이 물보라가 아스라이 일어났다. 기승을 부리던 더위도 한풀 꺾였다. 에어컨을 켜지 않아도 될 만큼 감도는 공기가 선선했다. 비 냄새가 난다. 언제쯤 비가 그치려나. 고립당한 거나 마찬가지인 버들이 기운을 잃었다. 하고 있는 작업 모두가 야외에서 이뤄지는데 비 때문에 현재 조각도도 붓도 들 수 없는 처지였다. 창가에 팔을 올리고 애꿎게 하늘만 쳐다보고 있던 버들이 뒤돌아 앉았다. 때마침 내려진 커피를 가지러 황 대표가 움직였다. 몰래 훔쳐보고 있단 걸 들키기 않기 위해 버들의 눈꺼풀이 얼른 밑으로 감겼다.
적적했던 집에는 황 대표가 돌아오면서 다시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여전히 혼자 있단 기분이 든다. 제 아랫입술을 자근자근 씹으며 버들이 못살게 굴었다. 눈동자 가득 불안함이 고인다. 저가 있는 자리에서 식탁에 앉아 작업하는 황 대표의 자리까지. 고작 몇 걸음밖에 안 되는 거리가 오늘따라 까마득하다. 버들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서울에서 돌아오자마자 화를 냈던 황 대표의 모습과 목소리가 반복되면서 펼쳐진다. 자신에게 진력난단 어조였다. 그 후부터 어떠한 대화도 주고받지 않고 있었다. 분위기가 서먹하다.
각자 식사 준비를 끝내고 식탁에 앉았다. 밥그릇에서 들린 버들의 젓가락이 휑하다. 밥풀 세 개가 들러붙어 있는 걸 입에 넣고선 버들이 느릿하게 씹었다. 조심히 황 대표를 힐긋거렸다. 여러 번 말을 붙이려고 시도했지만 기가 잔뜩 죽어 시도로만 그쳤다. 애탄다. 이러다가 황 대표와 평생 말도 못 하는 사이가 되어 버리면 어쩌나 속이 답답해진다. 다정하게 웃어 주셨으면 좋겠다.
“대표님. 비 내리는 날씨, 좋아하세요?”
버들의 목소리가 작다. 그러면서도 애써 쾌활함을 흉내 냈다.
“오늘은 시원한 거 같아요.”
“…….”
“서울, 다녀온 건 어떠셨어요?”
“…….”
“비는 언제 그칠까요?”
“…….”
말 한 마디 듣는 게 너무 어렵다.
“오늘 못한 작업, 내일 열심히 할게요. 그림이랑 조각.”
빗소리가 막막해진다. 버들이 물끄러미 제 손을 바라봤다. 원망스럽다. 손등은 부르텄고 갈라진 손톱엔 멍이 든 부분도 있다. 왜 이걸 스스로 더럽다고 못 느끼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살았을까.
“대표님…….”
식사를 끝낸 황 대표가 먼저 자리를 떴다. 버들이 설거지를 끝냈다. 여전히 비가 내리는 중이다. 잡화점에서 사 온 모자를 버들이 만지작거렸다. 하도 만져 댄 탓인지 테두리에 새겨진 무늬가 해지려고 한다. 볼록하게 올라온 실밥을 버들이 문질렀다. 디자인이 똑같은 모자 두 개를 신중히 저울질하며 비교했다. 상태가 더 좋은 게 물론 황 대표의 선물이다. 황 대표라면 뭐든 아깝지가 않다.
노트와 색연필을 품에 안은 버들이 조심스레 황 대표가 있는 식탁으로 걸어갔다. 의자를 빼는 것도 조마조마하다. 목구멍을 휘젓고 침이 넘어갔다. 대화를 하는 건 너무 큰 바람이었던 걸까. 지금은 그저 황 대표의 눈길이 실수라도 괜찮으니까 저한테 한 번이라도 스쳤으면 좋겠다.
사각사각, 종이를 스치는 색연필 소리와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섞였다.
“황 대표님. ……화 많이 나셨어요?”
나지막한 버들의 한숨 소리가 거치적거린다. 만질 거면 원래대로 해 놓고 들키지나 말든가. 만년필은 거꾸로 꽂혀 있었고 시계와 향수는 각도가 약간 틀어져 있었다. 남들은 모르고 넘어갔을 정도의 사소한 차이가 예민한 황 대표의 눈에는 전부 티가 났다. 안팎으로 난리다. 밖은 스캔들, 안은 유 대표 새끼로.
비가 퍼붓는 중인 하늘이 검다. 아까부터 혼자 좀 있고 싶은데 날씨가 이래서 버들을 쫓아낼 수가 없었다. 시든 잎사귀처럼 처져 있는 버들을 남겨 두고 황 대표가 계단을 밟았다. 침대에 누웠다. 두통이 나아지지 않는다.
하루 종일 내릴 것 같았던 비는 다행히 얼마 뒤 그쳤다. 구름 사이로 밝게 햇볕이 쬔다. 동시에 서늘함은 온데간데없이 여름다운 기온으로 올라갔다. 다시 에어컨이 작동됐다. 나갈 준비를 하는 황 대표를 보며 버들이 울적해졌다.
“나와.”
황 대표의 말을 따라 버들의 몸이 엉거주춤 일으켜졌다.
“산책 갈 거니까 앞장서.”
화 풀리신 건가?
“……대표님.”
“산책 가기 싫어요?”
“아니요!”
버들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렸다. 황 대표가 제게 말을 건 목소리가 화내기 전과 똑같았다. 다행이다. 연신 버들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말로 다행이다. 난데없는 타이밍에 확 풀려 버린 긴장감으로 신발을 신던 버들이 휘우듬하게 흔들렸다. 황 대표보다 먼저 버들이 현관을 빠져나갔다. 시골은 시골이었다. 균일하지 않은 바닥에는 비 때문에 크고 작은 웅덩이가 여러 개 만들어졌다. 이리저리 잘 피해 황 대표와 산책을 잘 다녀와야겠단 사명감으로 버들이 불타올랐다.
“야. 너는…….”
황 대표가 말을 잃었다.
“왜요?”
“너 방금 뭐 만졌어?”
“지렁이요.”
황 대표가 무서워할까 봐 흙 위에 누워 있는 지렁이를 집어 저만치 던져 버렸다. 무슨 일인가 싶은지 버들이 황 대표의 턱 아래까지 바짝 다가갔다. 안 그래도 지렁이를 보고 식겁했는데, 그 지렁이를 잡아 던진 버들의 행동으로 인해 황 대표는 이미 사색이 된 채였다.
“너는 만질 게 있고 안 만질 게 따로 있는 거지. 그걸 왜…….”
황 대표가 말을 하다가 말았다. 천진하게 버들이 눈을 깜박였다. 어렸을 적부터 땅 파면서 놀았다. 비가 내린 뒤의 흙은 감촉이 부드러워 더 좋아했다. 지렁이건 달팽이건 버들에겐 익숙한 애들이었다. 멀뚱히 서 있는 버들의 손목을 황 대표가 움켜잡았다. 그대로 다시 집 안으로 끌고 가 욕실로 집어넣었다.
“손 씻고 나와.”
“네.”
말 걸어 주는 게 기쁜 버들이 웃었다.
“대표님, 저요.”
“한 번 더 씻어.”
“네.”
말도 가로막히고 욕실 밖으로 나오려는 것도 가로막혔다. 버들이 순순히 세면대 앞에 섰다.
“거품 더 내.”
뒤에서 들려온 황 대표의 명령을 버들이 곧장 실행에 옮겼다. 손 세정제를 듬뿍 덜어 내 몽글거리는 거품을 잔뜩 만들었다. 양손이 마치 하얀색 장갑을 낀 것 같다. 그걸 황 대표에게 보여 줬다. 그 정도면 됐단 듯 황 대표가 턱을 끄덕였다. 그 무언의 허락에 버들이 또 웃음을 지으며 손을 헹궜다.
다시 나와서 걷고, 걷고 또 걷다 보니까 개울이 나왔다. 비가 내려서 물이 불어났나 보다. 콸콸 힘차게 흐른다. 밟고 건너가라고 듬성듬성 놓인 돌덩어리가 고정되지 않아 물살에 흔들렸다. 멈춰 있는 버들을 황 대표가 지나쳤다. 황 대표를 따라 버들도 서둘러 돌덩이에 발을 올렸다. 황 대표는 아무렇지 않게 건너가고 있는데 저는 중심을 잡는 게 너무 어렵다. 결국 한쪽 발이 물속에 빠져 버렸다. 차라리 잘됐다. 무릎까지 오는 높이의 물을 버들이 휙휙 발로 차듯 걸었다. 무심코 뒤를 돌아본 황 대표가 어이없어했다. 종알종알, 버들이 수다를 떨었다.
“앞으로 저, 대표님 물건 안 만져요. 절대로!”
반성 많이 했다. 길가에 잠시 쉬었다 갈 수 있도록 나무로 된 벤치가 놓여 있었지만 물이 잔뜩 스며들어 있어 앉을 수가 없었다. 새가 푸드덕 날갯짓하며 날아올랐다. 반동이 생긴 나뭇잎에 촘촘하게 매달려 있던 빗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빠르게 피한 황 대표와 달리 버들이 그걸 홀딱 뒤집어썼다.
“유버들!”
현관 앞을 서성거리고 있던 정민이 산책하고 돌아온 버들을 발견하고선 이름을 크게 외쳤다.
“여기는 웬일이야?”
“놀려고 왔지. 왜. 안 돼?”
“약속 안 했잖아.”
“꼭 약속을 하고 놀아야 하냐? 어차피 같은 곳에 있는데.”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정민이 버들과 황 대표를 흘겨봤다. 두 사람 사이에 버들이 끼어 있는 꼴이다. 무덤덤한 황 대표의 눈빛이 버들을 외면했다. 아까 버들이 들려줬던 수다 속에 운동한단 친구의 이야기가 껴 있었다. 우연히 만났다고. 우연히 정민의 할아버지 포도 농장이 여기였다고. 거듭 ‘우연’을 강조했었다.
저와 놀려고 불쑥 찾아온 정민에게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지 모르겠는지 버들의 도톰한 입술이 우물쭈물했다. 이제 막 황 대표님이랑 화해해서 단둘이 더 붙어 있고 싶은데……. 정민에게 딱히 신경 쓰지 않고 황 대표가 안으로 들어갔다. 자동으로 황 대표의 뒤를 따라가려던 버들이 멈칫했다.
“저 사람이랑 어디 갔다 와?”
정민이 성큼성큼, 버들의 곁으로 거리를 좁혔다.
“저 사람이 뭐야. 대표님한테.”
“저 사람이 나한테도 뭐 대표님이냐?”
“그래도. 어른이시잖아. 우리보다 아홉 살 많아.”
버들이 정민을 혼냈다.
“너 바지는 왜 그래?”
정민의 지적에 버들이 제 차림을 확인했다. 무릎까지 닿았던 개울의 높이만큼 바지가 젖어 있었다. 운동화도 마찬가지였다.
“나 잠깐만 씻고 올게.”
기다릴 거니까 빨리 나오란 정민의 말이 등 뒤로 남았다. 시간이 걸리는 샤워는 어쩔 수 없이 미뤄야 했다. 다리를 깨끗하게 씻고 세수까지 끝낸 버들이 편한 트레이닝 바지로 갈아입었다. 새 신발을 꺼내야 돼서 버들은 겨울이 보내 준 박스를 활짝 열었다. 운동화나 슬리퍼 좀 보내 주지. 이게 뭐야. 형은.
밖으로 나온 버들이 잊지 않고 젖은 운동화를 햇볕이 잘 드는 벽에 기대 세웠다.
“여기서 놀 거 있어?”
“없지.”
“놀자며.”
“그게 꼭 중요하냐?”
할 게 없으니 결국 나란히 정자에 앉았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하나로 덩어리졌다. 한 놈은 근육질 몸에 할머니 꽃무늬 티셔츠를 입고 있고, 한 놈은 읍내에 나가서 멋 잔뜩 부리라고 친형이 보내 준 새까만 정장 구두를 트레이닝복에 신고 있었다. 꼴이 두 배로 가관이었다.
“형은 내일 여기 탈출한다.”
“탈출? 가는 거야?”
“넌 멀었냐?”
“난 언제 나갈지 몰라. 황 대표님 갈 때 나도 가는 거라.”
자꾸만 황 대표를 짝꿍처럼 묶는 버들이 얄미워 정민이 양껏 노려보았다.
“아쉬워 좀 해라.”
“그럼 안 와, 이제?”
“왜? 형이 왔으면 좋겠냐?”
“넌 형도 아니면서 왜 자꾸 아까부터 형이래?”
“왔으면 좋겠냐고.”
“응.”
버들이 말끝에 “됐지?”만 안 붙였어도 완벽히 기뻐할 수 있었을 거다.
“훈련 없거나 쉴 때 올게.”
“그래라.”
“야, 씨. 그게 무슨 말투야?”
옥신각신하면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러다 문득 보고 싶은 영화가 떠올라 버들이 정민에게 “너도 본 적 있어?” 하고 물었다. 안 그래도 내일 그 영화를 보러 갈 예정이란 정민의 일정이 부러운지 버들의 큰 눈이 반짝였다. 정민이 주워들은 줄거리를 줄줄 말해 줬다. 고개까지 끄덕이며 버들이 주의 깊게 들었다. 그러다 결정적인 반전 부분을 말해 주기 직전, 정민의 주둥이를 간발의 차로 막을 수 있었다. 손바닥을 치워 주자 숨이 막혔는지 정민의 얼굴이 조금은 붉었다. 영화의 장르는 여름답게 스릴러였다. 재밌을 것 같아 벌써 기대된다.
태블릿을 들여다보던 황 대표가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밖에서 버들의 웃음소리가 타고 넘어왔다. 찰나 기분이 묘해졌다.
해가 지는데도 자꾸만 더 오래 뭉개고 있으려는 정민을 버들이 겨우겨우 돌려보냈다.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하고 나온 버들의 몸이 나긋나긋해졌다. 좋은 향기 풀풀 휘날리며 바닥에 앉아 머리를 말리는 중인 버들을 황 대표가 멀거니 응시했다. 축 처져 있던 머리카락이 버석하게 건조가 될수록 민들레 홀씨처럼 부푼다.
“유버들 씨.”
“네?”
버들이 얼른 드라이기 전원을 껐다. 황 대표가 턱을 까닥였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그게 뭘 뜻하는지 알아차린 버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까이 다가온 버들을 잡아 황 대표가 버들의 목 칼라를 젖혔다. 피부에 황 대표의 손이 닿자 버들이 흠칫거렸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황 대표의 시선이 움푹 파인 버들의 쇄골에서 저가 남겨 놓은 울혈을 찾아냈다. 이어 버들의 팔 안쪽도 확인했다. 멍으로 남아 있는 흔적을 엄지손가락으로 힘을 줘 누르자 아픈지 버들이 콧잔등을 찌푸렸다. 그러면서도 황 대표를 뿌리치지 않는다.
“저 좋아해요?”
“……좋아해요.”
버들의 기다란 속눈썹이 나풀거리듯 깜박였다.
“좋아해요. 많이.”
품고 있는 감정을 꼭꼭 감춘 다음 조금씩 보여 줘야 팽팽히 줄다리기도 할 수 있는 건데 멍청하게 모든 패를 내놓은 채였다. 그것도 모자라는지 버들은 어떻게 하면 좋아하는 감정을 겉으로 더 드러낼 수 있을까 고심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은 버들의 마음을 단어 하나로 표현해 보자면 구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황 대표가 버들을 밀었다. 버들이 흐트러진 제 옷차림을 묵묵히 정리했다.
“버들 씨. 안 자요?”
버들은 한참을 황 대표의 맞은편에 앉아 그림에 몰두했다. 마무리만 남아서 얼른 끝내고 싶었다.
“대표님은요?”
“나는 이따가.”
“저도 이따가 잘 거예요.”
서로의 시선이 마주쳤다. 먼저 외면한 쪽은 황 대표였다. 황 대표가 멈추고 있던 손을 키보드에 올렸다.
“대표님. 궁금한 게 있는데요.”
버들이 영화에 대해 물었고, 황 대표가 답해 줬다. 영화를 중점으로 대화가 흘렀다. 그러면서 둘의 의견이 벌어지기도 하고 좁혀지기도 했다. 버들의 입가가 웃을락 말락 한다. 황 대표가 화를 내면서 얹힌 것 같았던 속이 지금은 함께 산책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면서 완전히 평온해졌다.
그사이, 그림이 완성됐다.
“대표님. 이거…….”
쭈뼛거리면서 버들이 노트를 내밀었다.
“하늘색 해바라기가 어디에 있어.”
노란색 색연필을 잃어버렸지만 괜찮다. 꽃잎이 하늘색으로 칠해졌지만 어쨌든, 황 대표가 해바라기란 것을 알아봐 준 것만으로도 버들은 충분했다.
“대표님. 앞으로도 저랑 친하게 지내요.”
……친하게? 언제 친하게 지냈다고 ‘앞으로도’야. 단물 빠지면 뱉어 버릴 껌이다.
버들의 눈이 휙 접히면서 환하게 웃었다.
-내 새끼, 왜 전화 안 받는 거야?
유 대표가 황 대표를 닦달했다.
“네 새끼 아까 밥 먹는다고 나갔어.”
-누구랑?
“누구겠어.”
-스승님이랑? 아. 술 먹이실 거 같은데.
스승님이 부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혼자 식사를 하게 해서 죄송하다며 나가기 전 버들이 미적거렸다. 황 대표가 시계를 확인했다. 밤 열 시가 넘어간다.
-버들이 잘 보살펴라.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살 빠지나 안 빠지나 잘 감시하고.
“그러니까 그걸 왜 내가 감시해야 하냐고.”
갑자기 유 대표가 목소리를 근엄하게 깔았다.
-황 대표. 나 할 말이 있다.
할 말 있으면 해 보라고 했다.
-내 새끼, 왜 전화 안 받는 거야?
“…….”
술을 마시다 못해 아예 술독에 빠졌다가 나온 모양이었다. 주정뱅이가 된 유 대표가 같은 말을 벌써 여덟 번째 반복해 주절거리고 있었다. 상대해 주고 있는 시간이 아깝다. 그대로 황 대표가 전화를 끊어 버렸다. 혀 굴러가는 유 대표의 상태를 봐선 다음 날 저한테 전화를 해 민폐를 끼쳤단 것도 기억 못 할 게 뻔했다. 하루의 외출로 소희와 불거졌던 스캔들은 연예인 공식 커플의 결별 가십으로 인해 예상보다 빠르게 가라앉고 있는 중이었다. 운이 좋았다.
「주인공이 여자였어요? 저는 남자인 줄 알았어요.」
오전에 휘둥그레진 눈으로 버들이 했던 말이 상기됐다. 붓을 빼앗아 던져 버렸다. 넌 시나리오를 어떻게 이해했냐며 혼을 냈었다. 황 대표의 유려한 손가락이 식탁 위를 느리게 두드렸다. 감정을 끌고 가는 주인공이 남자라면 영화의 색깔이 확연하게 달라진다. 황 대표의 시선이 식탁에 펼쳐진 버들의 색연필로 향했다. 괜찮을까 미심쩍었던 물음에 황 대표가 괜찮을 것 같단 답을 내렸다.
욕조에 몸을 담그고 나오자 자정이다. 발소리가 접근했다. 이윽고 열린 문에 누군가 고개를 내밀었다. 당연히 버들인 줄 알았는데 버들의 스승이었다. 계약서를 통해 갑과 을이 확실하게 지정되어 있는 사이였지만 기본적인 예의조차 서로에게 차리지 않았다. 서로를 향한 적대감이 적나라했다.
딱히 오고 가는 인사 없이 침묵이 지속되는 중이다. 씻고 나온 황 대표는 현재 청바지만 입고 있던 터였다. 가슴과 복근, 상박근, 장골들이 또렷했다. 느긋한 태도로 황 대표가 머리 위로 티셔츠를 집어넣었다.
“버들이 좀 옮기세!”
노인의 호통에 황 대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언젠가 들어 봤던 말이었다. ‘스승님이랑? 아. 술 먹이실 거 같은데.’라던 유 대표의 말이 겹쳐졌다. 설핏 본 노인의 얼굴이 붉다. 누가 봐도 저 얼굴은 거하게 취기가 오른 상태다. 자기 할 말만 끝내 놓고 노인이 쾅 문을 세게 닫고 가 버렸다. 콧방귀 뀐 황 대표가 와인을 꺼냈다. 버들이 어디서 누구랑 술을 처마시든 말든 저와 상관없다. 잔을 채운 적색의 술이 매혹적이다. 마시려고 입으로 가져간 잔을 황 대표가 도로 놓았다. 한숨이 샌다. 유 씨 형제 새끼들이 쌍으로 뭐 하는 짓들인가 모르겠다. 황 대표가 유 대표 개인 비서의 번호를 찾았다.
“유 대표한테 연락 없었나요?”
-아. 이미 집으로 모시고 가는 중입니다.
역시 문제는 버들이었다. 당사자인 버들은 모르고 있는 술버릇을 황 대표는 알고 있었다.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여길세!”
노인의 집으로 가는 길 도중 큰 나무 아래 평상이 놓여 있었다. 거기에서 거한 술판이 벌어졌던 모양이다. 상 위에 나뒹굴고 있는 술잔이 여러 개다. 발에 채인 술병을 황 대표가 내려다봤다. 막걸리다.
어떠한 위기의식도 없이, 쌕쌕거리며 대자로 누워 잠든 버들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열이 받는다. 숨을 들이쉬고 뱉을 때마다 버들의 배가 오르락내리락 움직였다. 기가 막힌다. 옴폭 파인 버들의 배꼽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우선 버들의 옷자락을 잡아 당겨 배부터 가리는 황 대표의 표정에서 신경질이 노골적으로 나타났다. 노인은 아침에 해장시키게 버들을 보내라는 말을 남기고 이리 휘청 저리 휘청 불안한 걸음으로 사라졌다.
둘만 남겨졌다.
보름달이 휘영청 밝다, 하필.
“너 배꼽 이 사람 저 사람 다 봤겠다, 아주.”
종아리 부근을 툭 찼지만 버들은 깊게 잠들었는지 깨어날 기미가 없어 보인다. 아주 환장하겠다. 달빛에 불그스름한 버들의 볼이 비춰졌다. 대체 누구한테 처음 술을 배웠는지 한심스럽다. 술을 얼마나 마시건 집 찾아갈 때까지는 온전하게 정신 붙들고 있어야지. 쯧. 절로 혀가 차 진다.
황 대표가 축 늘어진 버들의 팔을 잡아 몸을 일으켜 세웠다. 고개부터 뒤로 꺾이더니 쓰러질 것처럼 기운다. 그런 버들을 황 대표가 확 잡아당겼다. 마른 몸이 제 품속으로 폭 안겨 들었다. 순간 전체적으로 퍼진 연한 느낌에 황 대표가 움찔거렸다.
……사내새끼가 몸이 왜 이래.
풀벌레 소리가 청량하다. 황 대표가 고개를 꺾어 버들의 얼굴을 바라봤다. 어떻게 할까. 버리고 혼자 가 버릴까 하다가 버들의 무릎 뒤로 팔을 넣어 번쩍 안아 들었다. 체중이 감소한 탓에 버들이 지난번보다 더 가볍다. 버들의 엉덩이가 아래로 쑥 빠지려고 해서 몇 걸음 가지 못했다. 아, 새끼. 진짜. 하나면 하나, 열이면 열 전부 거추장스럽다. 그대로 멈춰선 황 대표가 버들의 팔을 제 목에 감게 했다. 마냥 다정함을 베푸는 손길은 아니었다. 거칠었다. 버들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위로 살짝 뜨였다가 금방 도로 감겼다.
“안아.”
“…….”
“놓고 가 버리기 전에.”
“…….”
힘이 빠지던 버들이 가까스로 황 대표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제야 황 대표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간간히 버들의 몸을 추슬렀다. 술에 잔뜩 취해 제정신이 아닌데도 떨어질까 봐 무서웠는지 그럴 때마다 버들이 아등바등 난리였다. 마음껏 지랄해 보라는 듯 황 대표가 화를 삭이며 잠시 여유를 줬다.
보이니까.
그래. 보이니까.
황 대표의 입술이 버들의 목에 잠시 닿았다가 떨어졌다. 평소처럼 사납게 이를 세우지 않았다. 말 그대로 입술만 닿았다가 떨어졌을 뿐이었다. 버들에게선 옅게 풀 냄새가 났다. 그 냄새에 이끌려 다시 목덜미로 얼굴을 내렸다. 닿아 오는 코끝이 간지러운지 버들의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었다. 피하려 드는 나약한 움직임에도 봐주는 법 없이 황 대표가 집요히 굴었다. 의외다. 불쾌함보다 앞서는 것들이 있다. 청아하면서, 깨끗하면서, 부드러우면서. 딱 한 가지로 정의 내릴 수 없는 단어들이 떠다녔다.
……근데. 왜 풀 냄새가 나는 거야. 술 마신 거면 술 냄새가 나야지.
“풀밭에서 구르기라도 했나.”
……응. 혼잣말 뒤로 바람 빠진 버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대답인지, 그냥 헛소리인지 모르겠다. 황 대표가 둥글게 위로 말린 버들의 긴 속눈썹을 바라보았다.
“굴렀어?”
“응…….”
“풀밭에서?”
“……응.”
황당하다. 황 대표가 옅게 코로 웃었다.
“풀밭에서 왜 굴렀어?”
그저 통통한 버들의 입술이 달싹였을 뿐이었다. 작게 재채기 후, 한참이 지나서 또 “응.”이란다.
“그냥 굴렀어?”
“……응.”
황 대표의 입가가 저도 모르게 온화해졌다.
방에 불을 켜지 않아 달빛에만 의존해야 했다. 바닥에 누워 자고 있는 버들을 소파에 앉아 황 대표가 가만히 응시했다. 한쪽 다리를 여유롭게 꼬았다. 근처의 리모컨을 가져와 에어컨을 끄자 기계음이 사라지고 버들의 숨소리만이 적막을 흔들었다. 슬슬 공기가 뜨겁게 달궈진다. 황 대표가 와인을 음미하며 목구멍으로 넘겼다. 급할 게 전혀 없었다. 두어 시간이 지났다. 버들이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더워.
버들의 손가락이 꼼지락거리면서 아주 힘겹게 바지 단추를 푸르고, 지퍼를 내렸다. 버들이 펼치는 어설픈 스트립쇼를 관람하며 황 대표의 눈꺼풀이 느릿해졌다. 더위에서 벗어나기 위해 버들이 꾸물거리면서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바지를 내리고, 이어 속옷도 내렸다. 황 대표의 눈이 가느스름하게 뜨였다. 털이 없어 보드라운 버들의 다리 사이와 순해 보이는 살덩이가 여전했다.
돌연 버들이 몸을 뒤집었다.
소복하게 솟은 하얀 엉덩이가 토실토실하다.
* * *
잠은 서서히 깼다. ……답답해. 버들의 인상이 잔뜩 찌푸려졌다. 귓가 바로 옆에 매미 무리가 모여 있나 보다. 우렁찬 울음소리에 곧 고막이 찢어지게 생겼다. 작렬하는 햇볕이 발등에서 느껴진다. 겨우 눈을 뜨긴 했지만 정신머리는 여전히 혼탁했다. 코앞에 웬 나무 기둥이 있다. 오랫동안 골똘히 바라보고 나서야 나무 기둥의 정체가 정자란 걸 알아차렸다.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는지 버들의 눈동자가 여태 멍하다.
곧, 왜 이리 답답한지 알아차렸다. 김밥처럼 몸 전체가 이불에 돌돌 말려 있어서 꿈틀거리는 것조차 쉽지 않다. 한참 낑낑거리고 나서야 버들이 이불 밖으로 어렵사리 팔 하나를 빼냈다. 부스스하게 일어나 앉은 버들의 몰골이 말이 아니다. 머리가 폭탄을 맞은 것처럼 산발이다. 무심코 배를 문질렀다. 언제 얼마나 마셨더라. 숙취로 속이 엉망이었다. 괴롭게 신음하던 버들이 이마를 바닥에 붙이고 고꾸라졌다.
그때였다. 자갈 밟히는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느껴진다. 버들의 허리가 다시 꼿꼿하게 세워졌다. 조깅을 끝내고 돌아온 황 대표와 눈이 정통으로 마주쳤다. 까칠한 눈초리에 버들은 기가 죽어 퉁퉁 부은 눈꺼풀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대화 없이 몇 초가 흘렀다. 무언가 어색하고 민망하다.
“저…….”
꽉 잠겨서 터진 제 목소리에 버들이 화들짝 놀랐다. 그러고 있는 사이 집 안으로 들어간 황 대표의 뒷모습에서 쌩하니 찬바람이 부는 것 같다. 현관문이 쾅, 닫혔다. 다급히 황 대표를 쫓아가고 싶은 버들이 정자 밑을 내려다봤다. 어떤 신발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는 건 술에 취해 맨발로 여기까지 걸어온 걸까? 못 살겠다. 왜 하필 잠들어도 여기서……. 끝도 없이 펼쳐질 것 같은 한탄을 버들이 우선 멈췄다. 이불을 품에 끌어안고 집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운동을 끝낸 직후라 그런가. 고작 물병 뚜껑을 돌려 따는 건데 황 대표의 손등에 굵은 핏줄이 불거졌다. 강인해 보이는 목덜미를 훑고 내려오는 땀방울에 주책없이 심장이 뛴다. 어떻게 된 게 매일매일 새롭게 홀딱 반하게 된다. 황 대표의 눈치를 살살 살피며 버들이 이불을 개켜 제자리에 뒀다.
“대표님. 저 먼저 씻어도 돼요?”
조심스레 버들이 물었다. 그쪽은 쳐다보지 않고 황 대표가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했다. 얼마 뒤 씻고 나온 버들이 욕실 앞에서 굳었다. 황 대표가 땀에 젖은 운동복 상의를 막 벗은 참이었다. 사소한 움직임에도 근사하게 짜인 근육들이 사납게 꿈틀거렸다. 젖은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던 수건 양쪽 끝을 턱 아래로 끌어 모아 버들이 붉어진 얼굴을 감췄다.
“저, 대표님!”
제 쪽으로 가까이 다가온 황 대표를 버들이 불렀다.
“왜.”
“……아니에요.”
황 대표가 버들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기분이 오묘하다. 자기가 사용하고 나온 욕실에 바로, 그것도 반 누드인 상태로 황 대표가 들어간다니까 아랫배가 다 근지럽다. 그게 아지랑이처럼 번져 발바닥까지 찌릿하다.
“몸에 열도 많은 새끼가.”
욕실 문을 닫자마자 황 대표가 욕을 내뱉었다. 한여름에 덥지도 않은지 버들은 매번 뜨거운 물로 씻었다. 환기시킬 틈을 주지 않아 좁은 욕실 공간에는 사우나처럼 수증기가 가득하다. 찬물이 나오게끔 레버를 반대 방향으로 꺾었다.
부드러운 하얀 거품이 황 대표의 갈라진 등을 가로질러 다리 사이를 휘감았다. 수건을 꺼내다가 언뜻 스친 걸 황 대표가 다시 자세히 바라봤다. 젖은 칫솔모 두 개가 서로 맞닿아 있다. 그냥 지나치지 않고 황 대표가 굳이 버들의 칫솔과 제 칫솔을 멀찍이 떨어뜨려 놓았다. 바닥에 던지지 않은 것만으로 많이 참아 준 거다.
머리를 말리던 중인 버들이 욕실 밖으로 나온 황 대표에게 쪼르르 다가갔다. 똑같은 샴푸를 쓰는데 느낌이 다르다. 황 대표에게 풍기는 냄새를 맡느라 버들이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사용한 수건을 대충 식탁 의자에 걸쳐 놓고 버들을 향해 황 대표가 돌아섰다.
“대표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퍽이나 안녕히 주무셨겠다.
“술버릇이 없어?”
날카로운 황 대표의 어조에 버들이 움찔거렸다.
“제 술버릇이요?”
“정말 본인 술버릇이 없다고 생각해요?”
“저 진짜 술버릇 없어요.”
말간 버들의 얼굴이 뭐 잘한 게 있다고 오늘따라 맹랑하다.
“술에 취해 있는데 그걸 어떻게 구별해.”
“구별은…….”
“같이 술 마신 사람들한테 술버릇 있단 말 못 들어 봤어요?”
“네. 그런 말 못 들어 봤어요.”
눈을 지그시 감고 황 대표가 잠시 숨을 골랐다.
“잘 생각해 보고 다시 대답해요.”
황 대표의 말을 따라 버들이 곰곰이 머리를 굴렸다. 몇 분이 지났다.
“잘 생각해 봤어요?”
“네.”
“그럼 대답해.”
“술버릇 없어요. 저.”
“생각 덜했네.”
마지막, 권태로움이 묻어나는 황 대표의 질책에 버들이 눈을 깜박였다. 버들의 맑은 눈동자에서 억울함이 뚝뚝 흐른다.
“저 술 마셔도 집에 잘 찾아가고…….”
황 대표가 화를 가까스로 억눌렀다.
“집에 잘 찾아왔어요?”
정자에서 깨긴 했지만 남의 집 정자가 아니지 않나. 게다가 이불도 덮고 있었고. 버들이 좀 더 자신감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나요? 어떻게 집에 왔는지?”
“……나요, 기억.”
황 대표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동시에 뽀얗고 둥글었던 버들의 엉덩이가 눈앞에서 펼쳐졌다. 깜빡깜빡, 저를 올려다보는 버들의 긴 속눈썹을 보고 있자니 기가 막힌다.
“솔직하게 말해. 너 기억 안 나지.”
“……네.”
버들이 웃었다. 억지로 끌어당긴 입매가 어색하다 못해 바들바들 떨리기까지 한다. 어떻게든 웃음으로 상황을 모면하려고 했지만 제 형들과 달리 황 대표는 전혀 끄떡없다. 참 쉽지 않은 남자다.
배를 문지르고 있는 버들의 손에 황 대표의 눈길이 닿았다. 당연히 속 쓰리겠지.
“가서 해장하고 와요.”
“어디서요?”
“너 스승님 집.”
“아. 대표님도 식사하고 계세요. 저 금방 다녀올게요.”
속이 어지간히 쓰리나 보다. 바로 뛰쳐나간 버들을 보며 황 대표가 미간을 찌푸렸다. 고작 몇 시간 전이다.
「……하지 마.」
허벅지 중간쯤 걸쳐졌던 바지와 속옷은 버들이 야무지게 발길질을 해 댔던 통에 발목에 달랑달랑 매달려 있었다. 그걸 입혀 주려고 몸에 손을 댄 것뿐인데 버들이 눈살을 구기며 중얼거렸다. 토실토실하게 살집이 모여 있던 버들의 엉덩이 촉감이 지금도 손바닥에 잔잔히 남아 있는 것 같다. 우악스런 힘으로 골반을 쥐고 몸을 돌리자 뭐가 불편한 것인지 버들이 칭얼거렸다.
「응……. 하지 마.」
「나라고 하고 싶어서 네 수발들고 있는 줄 알아?」
짜증 섞인 목소리가 터졌다. 유 대표 동생만 아니었다면 진짜로 갈아 버렸을 거다.
「입히지 마. 더워…….」
「다 내놓고 있기에 이거 너무 부끄럽지 않겠냐?」
몽글한 귀두 끝을 톡톡 건드리자 버들의 아랫배가 바짝 수축했다. 한 줌이란 말을 버들의 성기를 보고 이해했다. 하찮다, 진짜. 버들의 발목에 걸려 있는 속옷을 허리까지 끌어올렸다.
……어쩔 수가 없었다. 부들부들한 버들의 성기를 손에 쥐었다. 벌써 두 번째였다. 순종적인 느낌이 여전했다. 오른쪽? 왼쪽? 어느 방향으로 갈무리해 정리해 줘야 하는지 모르겠다. 휘어진 부분도 없이 곧아 짐작도 어려웠다. 으……. 입가로 얇은 숨소리를 내며 버들이 반사적으로 제 팔을 잡아 왔다. 도톰한 입술이 자꾸 옷을 벗겠다며 보챘다. 기껏 입혀 줬더니만. 진짜 사람 돌아 버리게 만드는 술버릇이 아닌가 싶다.
「유버들 씨.」
버들의 볼을 손가락 두 개로 모았다. 입술이 꽃봉오리처럼 볼록해졌다.
「일어나 봐.」
하지 마, 입히지 마, 버들의 반말이 걸렸다. 혹시나 싶었다. 혹시나, 나인 줄 모르나?
「……대표님.」
작게 뜬 눈이 금방 사르륵 감겼다. 어쨌건 말을 놓는 게 괘씸하긴 하나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지 않고, 저를 정확히 알아봤단 것에 마음이 놓였다. 버들이 덥다고 자꾸만 바지 지퍼에 손을 가져다 대니 에어컨을 도로 작동시켰다. 뜨겁게 달궈졌던 공기가 서늘해질 때까지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는 동안 버들의 이마에 송골송골하게 맺혀 있는 땀을 입김으로 불어 식혀 줬다. 잠잠해진 버들을 내려다보는데 울컥 짜증이 치솟았다. 바지와 속옷을 더 못 벗게, 배꼽도 만지지 못하도록 이불로 멍석말이를 해 버들의 팔을 압박시켜 바깥으로 들고 나갔다. 그리고 정자에 버렸다. 그런데, 뭐? 집을 잘 찾아가?
-어.
“목소리 봐라.”
한심하단 어조로 황 대표가 인상을 썼다.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유 대표가 쌍욕을 지껄였다.
-기왕 전화한 거 내 새끼 좀 바꿔 봐.
“네 새끼. 지금 밥 먹으러 갔어.”
-밥? 칭찬해 줘야겠네.
남들 다 챙겨 먹는 끼니가 뭐라고 칭찬을 해.
-버들이 잘 있어?
“네가 물어보면 되잖아.”
-내가 물어보면 무조건 잘 있다고 하니까 그렇지.
“진짜로 잘 있으니까 그렇겠지.”
-잘생긴 넷째 형아 보고 싶다, 뭐 그런 말은 안 하고?
대답할 가치가 없다. 입을 다물자 핸드폰 너머에서 유 대표의 한숨이 길게 흘러들어 왔다.
-집에 버들이 없으니까 휑하다. 슬슬 날짜 잡아 보자.
슬슬 잡아 보잔 날짜는 서울 복귀다. 유대표가 스캔들 때문이 아닌, 집에 자기 새끼가 없어 휑하단 걸 이유로 들먹거렸다. 술이 덜 깬 모양이다.
-내가 꿀물 타서 마시니까 맛이 없어. 버들이가 타 주는 꿀물이 진짜 맛있는데.
정작 네 새끼도 현재 꿀물을 처마셔야 하는 상태라고 빈정거리고 싶은 걸 참았다.
-아무튼. 황 대표. 네 옆구리에 버들이 끼워 보낸 건 너 좋으라고 그런 게 아니야. 이참에 좋은 공기 마시면서 쉬고 오라고 보낸 거지. 그러니까 잘 먹이고, 잘 재우고…….
유 대표의 주둥이가 쉬지 않고 나불거린다. 어떻게 된 게 영양가라곤 전혀 없는 말뿐이다. 고개를 양쪽으로 꺾자 목에서 뚝뚝 소리가 났다. 무감한 얼굴로 황 대표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유 대표.”
-나 아직 할 말 끝난 거 아니거든.
“우리 영화 촬영 얼마쯤 진행됐지?”
-중반은 넘었어. 준비 다 된 상태에서 촬영 들어간 거니까.
“그거 뒤집어엎자.”
-뭐?
삽시간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그래.”
유 대표가 금방 진지해진 말투로 뭘, 얼마나, 어떻게 뒤집자는 뜻인지 물었다. “주인공부터.”라고 황 대표가 대꾸했다. 두 대표 사이에서 잠시 아무런 말이 오가지 않았다. 각자 머릿속이 복잡했다. 반드시 계산해야 하는 것들 위주로 생각들이 스쳤다. 관자놀이를 짚었을 유 대표의 모습이 뻔히 그려졌다. 주인공을 교체하는 것. 이미 찍어 둔 필름을 버리는 것. 새로 촬영에 들어간다는 것. 모든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영화에 투자한 투자자들의 반응도 염두에 둬야 한다. 결단을 내리긴 했으나 대표 입장으로서 저 역시 벌써부터 골치가 아픈 건 마찬가지였다.
-위약금은 계약금의 세 배야.
“그거 전부 회수할 수 있는 돈이야.”
엔터테인먼트로 사업을 키우는 초반이라 돈이 물처럼 빠져나가고 있었다. 양쪽 모두가 재벌이었지만 기업을 물려받는 대신 단독으로 회사를 설립해 집안과 별개인 삶을 자유로이 누리고 있었다. 장단점이 물론 나눠졌다.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서 서로 합이 잘 맞는 사이였다. 사업 수완 역시 나란히 빛을 발했다. 계산 또한 정확한 편이었다. 둘 다 손해 보는 장사 따윈 하지 않았다.
-황 대표.
“확실해. 실패 없을 거야.”
영화를 새로 찍는다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금전적 문제를 떠나서 한창 엔터테인먼트 브랜드를 키우고 있는 시기란 게 아무래도 조심스러웠다. 더 나은 환경에서 일하게 해 주겠노라 파격적인 제안을 걸며 여기저기서 배우들을 빼 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회사에서 하루아침에 주인공을 교체해 배우를 자르게 된다니. 그때 발생될 파장에 대해, 그리고 어떻게 수습하면 좋을지에 대해 미리 대책을 고민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과 사람의 연결이다. 무엇보다 신뢰가 우선이었다. 대중들의 평가 잣대 역시 고려해 봐야 한다.
“시나리오는 크게 바뀌지 않을 거야.”
지금보다 더 바빠질 게 분명한 유 대표가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 * *
해장국을 몇 번 떠먹은 게 다다. 제 스승님은 속이 다 풀린다면서 시뻘건 고추기름이 둥둥 떠다니고 있는 국물을 벌컥벌컥 들이켰지만 버들의 숟가락은 영 맥을 못 추었다. 오히려 뭘 삼키면 삼킬수록 속 쓰리는 게 강해진다. 간이 별로 되지 않은 나물 몇 가닥을 꾸역꾸역 집어 먹은 걸로 식사를 끝냈다.
아. 황 대표님은 식사하셨을까? 떨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보고 싶어서 큰일이다. 메시지라도 보내 볼까 싶었으나 귀찮게 하는 거 같아 관두었다. 핸드폰에 저장된 황 대표의 번호를 버들이 빤히 쳐다봤다. 구름이 커다랗게 뭉쳐 유유자적 하늘을 가른다.
노부인을 도와 설거지를 한 뒤 버들이 조각도를 집어 들었다. 잠시 짬이 생겼다. 버들이 그늘에 털썩 주저앉았다. 염색물 먹은 천을 짜고. 조각도 하루 온종일 하고. 가장 고생하고 있는 손끝의 피부가 엉망진창으로 벗겨지고 있다. 갈라진 틈이 새빨갛다. 제 손가락을 버들이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바라봤다. 손이 깨끗했더라면 황 대표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이 훨씬 많았을 거다. 더러운 제 손이 못내 아쉽고 서러움을 당긴다. 엉덩이를 털며 버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인이 산책하면서 따 둔 자두가 잘 익었다. 벌이 꼬일 정도로 달큼한 냄새가 퍼진다. 버들이 자두 두 개를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하나는 내 것. 하나는 황 대표님 것.
“대표님. 이거, 드실래요?”
돌아오자마자 황 대표를 향해 버들이 손바닥을 펼쳤다.
“자두에요. 달아요.”
황 대표의 손가락에서 볼펜이 회전했다.
“네가 봐.”
건성으로 턱을 까닥였다.
“너 손 더러워, 안 더러워.”
“……더러워요.”
“손 씻었어?”
씻었다. 많이.
“나 바쁘니까 건드리지 마라.”
가타부타 다른 말을 덧붙이는 대신 버들이 자두를 들고 나왔다. 정자에 앉아 한참 자두를 만지작거렸다. 한 입 베어 물자 새콤한 즙이 흐른다. 제 몫으로 들고 온 자두는 먹고, 황 대표에게 주려고 들고 온 자두는 모자 속에 담았다. 버들의 한쪽 볼이 씨앗으로 인해 볼록해졌다. 자두가 생각보다 더 맛있어서 한숨이 깊게 잠겨 들었다.
점심때가 됐다. 물을 마시는 척하며 버들이 황 대표의 접시를 살폈다. 역시나 스테이크다. 아무리 좋아하는 음식이라도 매번 저렇게 먹으면 물리지 않을까. 버들이 코를 훌쩍거렸다.
“대표님. 스테이크 말고 또 좋아하는 음식 있어요?”
“…….”
“저 요리 잘하는데…….”
“…….”
“아니면, 저희 학교 근처에 맛있는 밥집 많이 있거든요.”
“…….”
“우동 좋아하세요? 새로 생긴 우동 전문점이 있는데, 맛있어요.”
“…….”
“거기서 우동 먹다가 어떤 남자랑 여자랑 뽀뽀하는 것도 본 적 있어요.”
“…….”
“칸막이가 쳐져 있어서 그런가? 대표님. 저랑 가 보실래요?”
……우동 전문점에서 뽀뽀라니. 아예 무시하며 반응을 보이지 않으려고 했건만 구질구질한 부분에서 절로 인상이 써졌다. 황 대표가 나이프를 한쪽에 내려놓고 버들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수작 부리지 마.”
“……네.”
버들의 눈썹이 처졌다. 황 대표는 바위고, 저는 꼭 계란 같다. 계란으로 아무리 쳐 봤자 바위는 흔들리지 않는다. 누구라도 빤히 알고 있던 사실이다. 생각에 잠긴 버들이 밥알 몇 개를 느리게 씹었다.
식사를 거의 끝마칠 때쯤 자리에서 일어난 황 대표가 와인과 함께 잔을 두 개 꺼내 왔다. 와인을 따른 잔 하나를 버들이 있는 쪽으로 내밀었다.
“저 주시는 거예요?”
언제 처져 있었냐는 듯 버들의 눈썹이 나비처럼 살아났다. 이거 만져도 되나. 황 대표가 허락해 주길 버들이 얌전히 기다렸다. 황 대표가 제 잔에도 와인을 채웠다. 바깥은 아직 대낮이었다.
“마셔.”
“감사합니다.”
두근거린다. 버들이 와인 잔을 들었다.
“야, 너…….”
황 대표의 말이 끊겼다.
“네?”
버들의 잔이 텅 비었다. 한 번에 와인을 다 마셔 버린 뒤 입술을 혀로 축이고 있다.
“그걸 왜 한 번에 마셔.”
“저희 형이 그랬는데요.”
“누구. 유 대표?”
“네. 겨울이 형이 술은 원래 끊어 마시는 거 아니래요.”
황 대표가 이유를 물었다.
“복 나간대요.”
욕을 하는 대신 황 대표가 다시 버들의 잔에 와인을 따랐다. 따라 주는 즉시, 버들의 고개가 다시 한 번 뒤로 확 꺾였다. 황당해서 한숨이 절로 터진다. 왜 유 대표가 버들을 옆구리에 끼고 밥을 먹이고 잔소리를 퍼붓는지 알겠다. 버들의 빈 잔에 황 대표가 다시 와인 병을 기울였다.
“유버들 씨.”
“네?”
“옆으로 와요.”
잔을 들고 잠시 주춤거렸던 버들이 눈치를 보며 황 대표의 옆자리에 앉았다. 좋아하는 사람 옆에 앉은 것만으로도 설레는 감정이 휘날린다. 좋은 걸 숨기지 못하고 버들의 입가가 나긋나긋해진다.
“마셔.”
또 확 잔을 꺾는다. 황 대표가 그런 버들의 손목을 잡아 말렸다. 놀란 버들이 재채기를 터트렸다.
황 대표가 버들의 잔을 들고 일어났다. 오늘 쓴 식기는 전부 모아 그대로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양치 후 노트북을 켰다. 작업을 하려고 했으나 손이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황 대표가 턱을 괴었다. 제 옆자리에 버들이 한쪽 팔을 베고 잠들어 있었다. 숨소리가 안정적이다. 술을 가르쳐 주는 사이, 와인 한 병이 금방 비워졌다. 꾸벅꾸벅 졸더니 그대로 쓰러진 버들을 보며 황 대표의 미간이 좁혀졌다. 살이 왜 자꾸 빠지지. 버들의 등에 뼈가 도독도독하다. 제 새끼 잘 보살피란 유 대표의 억지에 세뇌라도 당했나. 아니면 흐릿한 술기운 탓인가.
황 대표가 가만히 버들의 등을 쓸어내렸다. 커다란 황 대표의 손바닥에 버들의 등이 전부 가려질 것처럼 말랐다. 엎드려 있던 버들이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황 대표의 인상이 좀 더 짙어졌다. 버들의 턱을 붙잡고 다시 제 쪽을 보게끔 고개를 돌려놓았다. 술이 올라 버들의 볼만 동그랗게 붉다. 술도 마시지 못하는 게. 속이 꿈틀거린다.
버들을 안아서 황 대표가 이불에 내려놨다. 잠시 뒤, 배꼽을 만지작거리는 버들을 아침처럼 이불에 말아 정자에 옮겨 뒀다. 제정신이 박혀 있으면 자꾸 집이 아닌 다른 데서 눈뜨는 걸 심각하게 인지해 앞으로 술 안 마시겠단 다짐이라도 하겠지.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고 있긴 하나 완벽하게 집중이 되지 않는다. 바깥에서 차 경적 소리가 짧게 울렸다. 황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큰 창문을 열어 뒀다. 시야 정면으로 정자에 누워 잘 자고 있는 버들이 보인다.
버들이 별 무게 없이 흘린 그 말로 인해 영화를 새로 구상하게 됐다. 주인공이 여자에서 남자로 바뀌었다. 그러니까 남자와 남자가 감정을 연기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장르 자체가 바뀌었다.
“대표님…….”
의외로 금방 깬 버들이 머쓱한 얼굴로 이불을 품에 안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이리 와.”
수정할 건 수정해야 하고, 보충할 건 보충해야 한다. 유 대표는 유 대표의 나름으로. 황 대표도 저 나름으로. 각자 할 일을 하며 정신없이 보낼 며칠이 예고된다. 황 대표가 버들에게 여러 가지를 물었다. 눈을 깜박거리며 버들이 황 대표의 질문에서 느끼는 바를 대답했다. 남성들 간의 로맨스를 그려야 하는데, 곁에 호모 새끼가 있어서 천만다행이다. 따로 인터뷰를 하거나 자료 조사를 할 시간이 그만큼 단축되는 거니까.
대화 도중 웃는 버들의 얼굴이 순하다. 황 대표도 마주 웃어 줬다. 버들은 현재 이용할 가치가 있는 단물 밴 껌이었다. 물론 단물이 전부 빠지면 필요 없으니 곧바로 뱉어 낼 거다.
노을이 진다. 운동화 앞코를 바닥에 툭툭 차며 버들이 바깥으로 나왔다. 정자 끝과 끝에 버들과 황 대표가 앉았다. 버들의 몸 방향이 아예 황 대표를 향해 틀어져 있다. 흡연하는 황 대표를 버들이 침이라도 흘릴 것처럼 바라보았다.
“저, 대표님……. 담배 저도 하나만 주시면…….”
그제야 황 대표의 고개가 버들을 향해 돌아갔다.
“…….”
“…….”
제 형한테, 아니 제 형을 비롯해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며 버들이 손바닥을 벌렸다.
“펴 본 적 있어요?”
“오래전부터 폈어요.”
의심스런 눈빛이었지만 황 대표가 담배 케이스를 열었다. 라이터와 함께 담배 하나를 정자 위에 내려놨다. 그걸 입술 사이에 물고 버들이 라이터를 달칵거렸다. 그 모습이 물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오래전부터 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닌 모양이다. 의외다. 황 대표가 담배를 껐다.
“황 대표님.”
좋아하는 사람에게 몹시 잘 보이고 싶다. 그래서 잘하는 걸 보여 주기로 했다.
“어때요?”
버들의 표정이 해맑다.
“저 이거 아무한테나 안 보여 줘요. 태어나서 처음, 대표님한테만 보여 주는 거예요!”
……하. 꼴통 새끼. 이거 진짜.
버들이 담배 연기로 만든 도넛이 뭉게뭉게 하늘 위로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