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비 오는 날 흙냄새 (1)
버들이 재잘거렸다. 오늘 한 작업의 결과물을 황 대표에게 보고하는 중이었다. 기술적인 용어들이 섞였다. 황 대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래서 뭐. 잘됐단 거야. 어쨌다는 거야. 황 대표의 무심한 태도에 버들의 말이 점점 줄어들었다.
“내일 같이 가서 보실래요?”
“바빠요.”
“아. 그럼…… 제가 내일은 사진 찍어 올게요.”
“네.”
짧게 뚝뚝 끊어지는 황 대표의 대꾸에도 버들의 표정은 헤실헤실 풀렸다. 버들이 가방을 열어 노트와 색연필을 꺼내 왔다. 나란히 앉고 싶은 걸 꾹 참았다. 황 대표와 사선 방향에 버들이 의자를 빼고 앉았다.
“그릴 수 있겠어요?”
태블릿에 담긴 내용을 버들이 빤히 들여다봤다.
“이것도 영화에요?”
배경이 봄이다.
“황 대표님이 쓰신 거예요?”
“그릴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까칠한 황 대표의 말투에 버들이 얼른 고개를 끄덕거렸다.
“있어요!”
텅 비어 있던 노트에 윤곽이 잡히면서 곧 그림이 채워졌다. 불친절할 정도로 황 대표가 짧게 적어 놓은 내용에도 버들의 손은 머뭇거림이 없었다. 몇 되지 않는 색깔의 색연필로 버들이 그려 놓은 그림은 모자람 없이 넉넉했다.
“대표님. 아침에 친구한테 전화가 왔었는데요.”
“친구 누구?”
“정민이라고. 전에 카페에서 보신 적 있죠? 운동한다던.”
“……전화 왜 했어요?”
“아. 날씨가 안 좋아서 새벽 훈련이 취소됐대요. 할 일 없으면 전화 자주 해요. 여기는 되게 맑잖아요. 근데 서울은 흐리대요. 바람도 세게 불고.”
황 대표가 턱을 괴었다. 권태롭게 감겼다가 뜨이는 눈꺼풀에 버들의 모습이 갇혔다. 입 짧을 때부터 알아봤다. 위로 줄줄이 다섯이나 있는 제 형들과 비교해 봤을 때 버들은 크다 말았다. 저한테 딱 맞는 티셔츠가 버들의 마른 몸에는 참 볼품없을 정도로 헐렁거린다. 물기가 어려 있는 볼이 촉촉하다. 가늘고 긴 목에 저도 사내라는 듯 또렷하게 도드라진 버들의 목젖을 황 대표가 한참을 바라보았다.
고심하던 버들이 색연필 색깔을 바꿔 들었다. 그 움직인 탓인지 버들의 티셔츠가 한쪽으로 축 기울어졌다. 금방이라도 어깨가 드러날 기색이다. 저도 모르게 동요한 황 대표가 주먹을 꽉 쥐었다가 서서히 풀었다. 수영을 못 해서 그런 걸까? 두껍게만 쌓여 가는 체력을 어디에 풀어야 할지 모르겠다.
시골 촌구석이고, 단둘이다. 망설여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의자를 밀고 일어난 황 대표가 버들의 팔을 움켜쥐어 사납게 끌어당겼다. 억지로 일으켜 세워지면서 버들이 색연필을 놓쳤다. 황 대표의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게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아 버들이 서둘러 추슬렀다.
“대표님!”
“왜.”
식탁에 눕히려는 걸 버들이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다.
“그게…….”
“할 말 없지.”
“아닌데요. 할 말 있어요.”
없을 거 뻔하다. 황 대표가 쉽게 안아서 저를 식탁에 올려 버리는 것에 버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식탁은 좀……. 황 대표의 노트북을 건들 위험이 있고 그림이 구겨질 수도 있다. 눕혀지고 나면 황 대표의 몸에 깔려서 반항이 어려워진다. 반항을 하려면 지금 해야 했다. 버둥거리던 버들의 무릎이 우연치 않게 황 대표의 복근을 쳤다.
일순 주변이 싸늘해졌다. 정작 맞은 황 대표는 별 타격이 없었는데 버들은 말도 못하게 당황했다. 아프실까? 아프시겠지? 걱정이 점점 커진다. 버들이 떨리는 손끝으로 황 대표의 배를 쓰다듬었다. 단단한 근육이 만져지면서 황 대표의 힘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대표님. 아파요?”
“……너 혼나야겠다.”
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아파요?”
제 장골 근처에 닿아 있는 버들의 손을 황 대표가 치웠다.
“대표님, 있잖아요.”
“어.”
“왜 눕혀요, 저?”
왜 눕히겠어. 눕히고 싶으니까 눕히는 거지.
“아침처럼 속옷 속 보여 달라고 할 거 아니시죠?”
버들의 물음에 여유가 없다.
“바지 벗기지 마세요.”
황 대표가 잡고 있는 버들의 손목을 놓았다. 그렇다고 음습한 황 대표의 시선에서 버들이 완벽히 자유로워진 건 아니었다.
“그럼 어디 물어도 돼?”
“……아. 무실 거예요?”
버들이 선뜻 소매를 돌돌 걷었다.
“팔.”
이미 버들의 팔 안쪽은 잇자국이 난무해 너덜너덜한 걸레짝이 되어 있었다.
“다리는?”
“다리? 바지만 안 벗기면 다리도 돼요.”
유순한 얼굴이 기가 막힌다.
“목은?”
“목?”
제 목을 버들이 무심결에 만졌다.
“돼요.”
황 대표가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꼴통 새끼 진짜.
“그럼 누워.”
“대표님. 식탁은…….”
“어디 눕고 싶은데.”
황 대표를 살짝 비켜 식탁에서 내려간 버들이 부엌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바닥에 발라당 누웠다. 그 모습에 황 대표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유흥거리가 하나도 없는 시골 바닥에 장난감 하나를 손에 쥔 기분이다. 섹스 토이까지는 자격이 한참 미달이고.
느릿하게 버들의 곁으로 걸어간 황 대표가 누워 있는 버들을 확 일으켜 벽에 몰아세웠다. 일정했던 버들의 호흡이 몰려드는 긴장감으로 단박에 흐트러졌다. 황 대표가 움푹 파인 버들의 쇄골을 한참 구경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버들의 목으로 황 대표의 입술이 떨어졌다. 연약한 살갗을 뚫을 것처럼 사정없이 요동치는 버들의 맥박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버들이 질끈 눈을 감았다. 타인의 입술을 목에서 느껴 보는 건 태어나 생전 처음이었다. 떨려서 미치겠다. 다리가 절로 후들거린다. 누워 있었으면 좀 나았을 텐데. 쓰러지지 않으려고 버들의 손이 애타게 벽을 긁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 순간을 벗어나고 싶다.
버들이 날카롭게 이를 세울 황 대표를 기다렸다. 그렇지만 바람과 달리 입을 벌린 황 대표가 혀를 꺼냈다. 낯선 간지러움이 못 견딜 정도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 버들이 얼른 이를 꽉 깨물었다. 한바탕 소나기라도 퍼붓는 걸까. 황 대표가 쫀득하게 피부를 빨아들이면서 내는 소리에 꼭 온몸이 젖어 버리는 기분이다. ……아. 희미하게 신음이 샜다.
황 대표가 몸을 떼자 버들의 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런 버들의 목덜미 전체가 붉어지고 귓불까지 축축해져 있다. 꼴사납게. 가빠진 숨을 고르고 있는 버들의 머리 위로 조롱 섞인 황 대표의 비웃음이 들려왔다.
식탁 의자에 앉은 황 대표가 태연히 버들을 쳐다봤다. 몽롱한 시선의 버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속이 긁혔다. 자신과 똑같은 샴푸를 쓰는 건데 버들의 머리카락에서 나는 냄새가 다소 생소하게 다가왔다.
황 대표가 색연필 케이스를 버들이 있는 방향으로 내던졌다. 케이스 소재가 철이었다. 바닥에 뒤집혀 떨어지면서 큰 소리가 났다. 충격에 버티지 못하고 약한 색연필 심이 여러 개 부러졌다.
“와서 일해.”
“어때요?”
여태 그리고 있던 그림을 버들이 황 대표 쪽으로 밀어 보여 줬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버들은 계속 재잘거렸다. 꼭 새가 지저귀는 것과 느낌이 비슷했다. 시끄러웠단 뜻이다. 버들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주로 황 대표가 쓴 시나리오로 만들어진 영화에 관한 것이었다. 어떤 영화의 어떤 장면에서 느꼈던 감동과 감상을 버들이 꾸미지 않고 털어놓았다. 허투루 보지 않았나 보다. 주인공의 감수성에 빠져들지 않은 이상 그냥 지나칠 수 있을 법한 장치들을 발견해서는 왜 그랬는지 의도를 물어 오기까지 했다. 그게 꽤 흥미로웠다.
전에도 똑같은 생각을 했었다. 꼭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 같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과 개천의 구조를 보며 황 대표가 턱을 끄덕거렸다.
“잘 그리네.”
버들이 찰나 숨을 참았다. ……잘 그리네? 칭찬이었다. 황 대표에게 칭찬을 받다니.
웃음을 참지 못하고 미소를 띤 버들의 얼굴을 황 대표가 물끄러미 바라봤다. 티끌 없이 맑았던 버들의 목에 핏줄이 터져 진한 자국이 만들어졌고 한쪽 귓불은 빨려서 퉁퉁 부어 있다. 그래도 좋단다.
“버들 씨.”
“네?”
“너처럼 살면 세상 참 쉽겠어요.”
“뭐가요?”
“생각이 없잖아. 멍청해서.”
생각 많은데. 생각이 넘쳐 나서 어제 새벽까지 잠도 설쳤는데.
“남자 뒤꽁무니나 따라다니고.”
“……여기는, 제가 따라오고 싶어서 따라온 거 아니에요. 형이 가래서…….”
“넌 내가 아닌 다른 사람한테도 팔이건 다리건 목이건 물라고 대 줬을 거야.”
버들이 노트 귀퉁이를 내려다봤다.
“저 아무나한테 안 그래요.”
옅게 버들이 웃었다. 무리해서 웃은 탓에 어색해 보인다.
“저는 대표님, 좋아해요.”
울렁거리는 마음을 붙잡고 버들이 고백했다.
“그렇게 살면 가족들한테 안 미안해요?”
“……제가 대표님 좋아하는 게, 가족들한테 미안해야 할 일이에요?”
“응. 당사자인 나한테는 무릎 꿇고 빌어야 할 일이고. 너 예뻐해 주는 가족들한테는 미안해야 할 일이고.”
“왜요?”
“뻔뻔하네. 호모 새끼가.”
큰 눈이 어룽어룽해졌다. 손가락을 얽으며 버들이 차분히 숨을 가다듬었다.
“대표님.”
자리를 뜨려던 황 대표가 버들을 내려다봤다.
“아까 저 보고 웃으셨어요.”
기가 막힌다.
“내가 언제 널 보고 웃어.”
“웃으셨어요, 방금. 얼마 안 됐어요.”
“너 보고 웃은 적 없어.”
“제가 그림 보여 드렸을 때 웃으셨어요. 다정하게.”
“……다정하게?”
황 대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또 저 그림 잘 그린다고 칭찬해 주실 때도 분명 대표님 웃었어요.”
버들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전에도 저 보고 웃으신 적 많아요.”
표정에 어떠한 변화도 없이 황 대표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유 대표 동생이기에 몇 번 웃어 준 걸로 지랄이다.
황금빛 노을이 방 안 전체에 내려앉았다. 구불거리는 버들의 머리카락 끝자락에도. 황 대표의 수려한 얼굴에도. 서로의 눈길이 조용히 충돌했다.
“사랑해.”
순간 달콤하고 낮은 음색이 주변을 물들였다. 버들의 목덜미 전체가 달아올랐다. 손끝까지 옥죈다.
“뭐, 이런 말 기대해요?”
“…….”
“행여나 너 좋아한단 말 꺼내는 건 그냥 너랑 한 번 자 보겠단 뜻이고.”
“…….”
“그럴 일은 평생 없을 거야. 내가 머리에 총 맞지 않는 한.”
이 세상에 나랑 자고 싶은 여자가 반이고, 내가 자고 싶은 여자가 반이다. 그런데 굳이 사내놈을?
돌아서는 황 대표의 태도가 냉랭했다. 복층 계단까지 갔다가 부엌이 있는 쪽으로 황 대표가 고개를 돌렸다. 버들이 목을 더듬거리고 있었다. 더러운 손바닥에 저가 만들어 놓은 자국이 가려졌다. 불쾌하다. 멋대로 만지라고 만들어 놓은 자국이 아니었다. 배알이 꼴린 황 대표가 기껏 버들이 주워 놓은 색연필을 바닥으로 쓸어 버렸다. 버들이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두 시간 정도 지났을 때 버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이 넘어가는 목구멍이 따끔거린다. 분명 한 공간에 두 사람이 있는 건데 혼자 있는 것처럼 적막하다. 버들이 색연필을 주웠다. 서른세 개여야 하는 색연필이 서른두 개뿐이다. 노란색이 없다. 해바라기의 색이라 아껴 쓸 정도로 애정이 큰 색깔이다. 어디 갔지? 버들이 열심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장식장이 의심된다. 버들이 무릎을 꿇고 아래의 좁은 틈을 살폈다. 저만치 굴러 들어간 색연필이 보인다. 다행이다, 찾아서.
버들의 어깨가 축 처졌다.
아무리 노력해도 손이 닿지 않는다.
깨끗한 밤하늘에 콕콕 박혀 있는 별들이 선명하다. 별똥별인지 잇따라 큰 빛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버들이 뒤척거림을 멈추었다. 에어컨 바람 때문인지 온몸이 시리다. 잠도 오지 않는다.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끔 조심하며 버들이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훅 끼치는 자연 바람이 뜨겁다. 버들의 고개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서울이었다면 또 모를까. 이렇게나 늦은 시각에 집을 나왔다고 한들 갈 만한 곳이 없다. 고요하다. 가로등 조명마저 희미한 시골이었다.
버들의 눈길이 물끄러미 닿은 곳은 마당에 세워진 작은 정자였다. 잠시 제 모습을 점검했다. 버클을 채우고 지퍼를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소용없다. 황 대표에게 빌려 입은 바지가 금방 허벅지를 타고 벗겨지게 생겼다. 버들이 허리춤을 야무지게 움켜쥐었다. 한 발씩 떼는 버들의 걸음이 위태롭다. 바지 길이가 길어 질질 끌리는 탓도 있었고, 운동화 뒤를 편할 대로 꺾어 신었기 때문이었다.
정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버들이 두 다리를 쭉 뻗었다. 그새 해져 버린 바지 밑단이 흙으로 엉망이 됐다. 어차피 흙은 또 묻을 테니까 대충 털다가 말았다. 기둥에 허리를 기대니 편하다. 시골이라 그런가. 새 울음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아침저녁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들려온다. 도시의 여름이 만약 유화라면, 시골의 여름은 왠지 수채화처럼 느껴진다.
사이좋게 지내고 싶은데, 황 대표를 생각하자 입술이 부풀며 한숨이 터졌다. 더운 숨이 앞머리를 건드렸다. 버들이 아까부터 뻐근했던 제 가슴께로 손을 가져갔다. 누굴 좋아한다는 게 정말로 쉬운 일이 아니구나. 마음이 자꾸, 자꾸, 자꾸 커져서 큰일이다. 상대방은 제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데 나 혼자서만 안달을 내고 앞서 나간다. 속도는 어떻게 늦추는 거지? 크기는 어떻게 줄이는 거지? 제어하는 방법을 여전히 깨닫지 못한 채다. 감정을 깨닫고, 고백을 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웃어 주길 바라고. 딱 그뿐이라 소소하고, 소박할 줄 알았더니 전혀 아니었다. 험난하고, 어렵고, 괴롭고, 위험하고, 고생스럽다.
밤이 깊어진다.
“……나빴어.”
혼자 내뱉은 투정이 금방 소멸됐다.
「그렇게 살면 가족들한테 안 미안해요?」
가족들 얘기는 왜 해. 버들의 눈썹이 침울하게 처졌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공연히 서글퍼진다. 버들의 집에선 결혼이란 곧 평생 독립을 의미했다. 집 떠나는 게 싫으니까 장가는 진짜 가고 싶지 않았다. 엉뚱한 걸로 고집을 부려 겨울이 형이 귀찮게 굴거나 문득 혼자 있고 싶어질 때면, 황 대표님이랑 저만 알고 있는 작업실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면 되지 않을까?
지금 당장 아무나 들어가 살아도 문제가 없을 만큼 깔끔히 관리가 되고 있던 오피스텔을 떠올렸다. 황 대표님 인테리어 취향은 어떻게 될까? 자주 들락날락할 예정이니까 곳곳에 식물을 배치해야겠다. 그러면 은연중에 맴돌고 있던 삭막함이 가실 거다. 아, 빨리 서울 가고 싶다. 그래서 작업실 꾸미고 싶다.
버들이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동안 어느덧 새벽이 찾아왔다. 팔에 맺힌 이슬을 톡톡 손끝으로 튕겼다. 조금은 개운한 공기가 코밑에 스며들어 온몸으로 퍼진다.
황 대표님을 좋아하는 건, 가족들과 전혀 상관없다.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가까이 가고 싶은 거고, 닿고 싶은 거고, 보고 싶은 거다. 아주 당연한 일로 가족들한테까지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버들이 무릎을 세워 끌어안았다. 좋아한다고 고백하기 전에 좋아해도 되는지 황 대표님에게 먼저 물어볼 것을 그랬나. 감정들이 갈팡질팡하다. 제 스스로 던진 물음표에 버들이 입술을 불퉁하게 삐죽거렸다.
……좋아하지 말라며 거절당했다고 한들, 뭐. 그렇다고 여유로운 몸짓과 권태로운 분위기의 황 대표에게 반하지 않았을 거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분명 지금처럼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거다.
노란색 색연필 따위 필요 없다.
* * *
황 대표의 숨소리가 거칠다. 30분가량 짧게 계획했던 조깅이 2시간을 넘어섰다. 생소한 곳이니 돌아오기 쉽게 무조건 직진만 했다. 그게 실수였다. 직진한 길이 올곧지 않고 구불구불거렸다. 비슷비슷한 집들과 고만고만한 골목들까지 더해 길을 잃고야 말았다. 고즈넉한 시골 마을 전체를 싸잡아 황 대표가 힐난했다. 그는 한참 만에야 가까스로 펜션에 도착했다.
마당에 나와 있던 버들이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호흡을 가다듬느라 황 대표의 상박근이 거세게 들썩거리고 있었다. 여태 운동을 하다 온 건 황 대표였지만 버들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한 황 대표의 모습에 버들의 가슴이 도근거렸다. 마주친 눈빛을 피해 버들이 고개를 돌렸다. 어딜 가나 했더니 조깅하고 오셨구나. 트레이닝복을 보고 얼추 예상은 하긴 했었다. 다음엔 따라가야지.
침묵이 겸연쩍게 느껴진다. 빨랫감을 너는 중이었다. 하고 있던 일을 마저 끝내기 위해 버들이 빨랫줄을 향해 나머지 한 팔을 뻗었다. 번갈아 가며 허리를 붙잡아 고정하고 있던 손이 모두 사라지면서 바지는 뜻밖에 완벽한 자유를 찾았다. 차마 어쩌지도 못할 사이였다. 버들의 발목까지 주르륵 바지가 흘러내렸다.
“…….”
“…….”
바람이 휭 불었다. 허벅지부터 무릎까지. 새하얗고 가느다란 버들의 다리가 그대로 드러났다. 황 대표의 시선이 더디게 그걸 훑어 내렸다. 무심결에 허벅지 안쪽을 골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눈에 보이면 만지고 싶고, 손을 대면 감촉을 더 상세히 느끼고자 입에 넣고 싶어진다.
“아!”
뒤늦게 정신을 차린 버들이 얼른 바지를 추켜올렸다. 박시한 티셔츠가 중심은 가리고 있었으나, 그건 결코 위로가 되지 못했다. 버들이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황 대표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변태.”
소리는 내지 않고 입모양으로만 저를 비난한 황 대표가 안으로 들어갔다.
씻고 나온 황 대표가 스테이크를 구웠다. 홀로 식사를 하는 황 대표의 사선 방향에 버들이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만이 고요함을 비집고 틈을 냈다. 버들이 지우개 가루를 잘 모아 휴지통에 버리고 돌아오는 동안 황 대표는 빈 접시를 싱크대에 넣으며 커피를 내렸다.
“식사는.”
“스승님 댁에서 먹었어요.”
버들이 색을 칠하며 싱겁게 대꾸했다.
오후에 회사 사람들이 다녀갔다. 최대한 조용히 다녀갈 요량이었는데 황 대표에게 딱 걸려 혼쭐이 났다. 스캔들 건에 대해 족쳐 물을 줄 알았더니, 황 대표는 현재 촬영하고 있는 영화에 관련해서만 언급했다.
회사 직원들이 놓고 간 제 짐을 확인하던 버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 겨울이 형 진짜. 있는 거 보내 주면 되는데 겨울이 또 낭비를 잔뜩 했다. 전부 새로운 옷에 새로운 물건들이었다. 포장도 안 뜯겨 있다. 이걸 몽땅 꺼내 정리해 놓기엔 펜션이 터무니없이 좁았다. 재벌 집 막내 도련님이 로션을 들고 갈팡질팡했다. 어디에 놓지? 한 번도 켜 본 적 없는 텔레비전 위에 올려 뒀는데 암만 봐도 별로다. 맨발로 욕실에 들어간 버들이 수납장을 열었다. 황 대표의 면도기 옆에 제 로션을 세워 놓고 이어 짐 속에서 전동칫솔을 꺼내 왔다. 일회용 칫솔은 꽂아 놓기만 하면 황 대표님이 버려 버렸었는데 이건 안 그러겠지? 안 그랬으면 하는 바람이다. 부스럭거리며 버들이 오래된 서랍 깊숙이 속옷을 숨겼다. 옷 같은 건 필요할 때마다 꺼내면 되니까 박스째로 구석으로 밀어 버렸다.
황 대표가 턱을 괴었다. 굉장히 바빠 보이는 버들의 등을 무연한 눈초리로 좇았다. 어느덧 제 물건들 사이로 타인의 물건들이 어지럽게 섞였다. 불쑥 불쾌한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유버들 씨.”
대답이 없어 한 번 더 부르려는 순간 욕실 바깥으로 버들의 얼굴이 빠끔히 내밀어졌다.
“대표님 저 부르셨어요?”
“…….”
“아, 전 저 부르신 줄 알고. 잘못 들었나 봐요.”
황 대표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부르신 건가? 아닌 건가? 긴가민가하나 보다. 큼지막한 버들의 눈이 황 대표를 향해 슴벅거린다. 다시금 황 대표의 손가락이 까닥였다. 버들이 그 앞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가까이 와요.”
“…….”
“더 가까이.”
“…….”
주춤거리는 버들이 답답해 황 대표가 손목을 잡고 잡아당겼다. 황 대표의 배려 없는 힘에 잡힌 손이 아릿했다.
“이거 네 옷이야?”
네. 작게 대답을 흘린 버들에게 닿은 황 대표의 눈길이 매섭다. 본인 옷을 입은 거라는데 사이즈가 크다.
“버들 씨. 살 빠졌어요?”
귓가가 화끈거렸다. 황 대표가 살 빠졌냐고 물어볼 때마다 쑥스럽고 낯간지럽다. 버들이 고개를 흔들었다.
“안 빠졌어요?”
“잘 모르겠어요.”
버들이 웃었다. 여기는 내 방도 아니라서 체중계도 없고, 중얼거린다. 느슨히 황 대표의 힘이 풀리자 버들이 손목을 비틀어 빠져나왔다. 그때였다. 황 대표가 불쑥 버들의 골반을 쥐어 왔다. 발바닥까지 빠른 속도로 전기가 관통했다. 소스라치게 놀란 버들이 펄쩍 뛰며 뒤로 물러났다. 그래 봤자 나약한 움직임이었다. 황 대표의 단단한 팔이 버들의 등 뒤를 감았다. 움푹 파인 버들의 등골이 만져지자 황 대표가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욕을 지껄인 뒤 황 대표가 자기 다리 사이로 버들을 더 바짝 끌어당겼다. 아찔해진 버들이 순간, 황 대표의 어깨를 짚었다. 너무 가깝다. 가슴팍에 황 대표의 코끝이 닿기 직전이다.
“……아.”
버들의 골반을 잡고 있는 황 대표의 커다란 손에 그악하게 힘이 들어갔다. 버들의 아랫배가 움찔거렸다. 황 대표가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올려다본 버들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다. 바들바들, 미약하게 떨기 시작한 버들이 느껴졌다.
황 대표가 버들을 뒤로 돌려 세운 뒤 옷을 걷었다. 동그란 눈을 크게 뜨며 버들이 숨을 헉, 삼켰다. 꼭 머리 위로 번개가 내리친 기분이다. 혹시나 황 대표가 옷을 벗길까 버둥거리며 버들이 얼른 옷자락을 붙잡았다. 다리가 풀리기도 했고, 또 황 대표의 손을 피하려다 보니까 바닥에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었다. 황 대표의 발등을 깔고 앉은 버들이 헐떡거렸다.
눈이 마주쳤다.
“너 살 빠졌어.”
* * *
메일로 도착한 촬영 영상을 황 대표가 확인하는 중이었다. 버들이 그런 황 대표와 에어컨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추워. 손과 발이 너무나 시리다. 그렇지만 함부로 에어컨을 끄면 안 될 것 같다. 하는 수 없이 버들이 체온이 높은 배꼽 근처를 만지작거렸다.
“그림 다 그렸어?”
촬영 영상을 전부 확인한 황 대표가 버들에게 물었다.
“아. 금방 다 그려요.”
버들이 다시 색연필을 들었다. 사각사각, 종이에 색연필이 마찰되는 소리가 듣기 좋다.
“여기요.”
버들이 그린 그림마다 황 대표의 마음에 들었다. 작정하고 찾아봐도 지적할 만한 데가 없다. 샘플이 이 정도라니. 과분할 지경이다. 결과물에만 치우쳤던 황 대표의 관심이 그림을 그리는 과정으로 번졌다. 버들이 무슨 생각을 하면서 그림을 그리는 건지 궁금하다.
“이걸로 캔버스 작업해요.”
“오늘부터요?”
“작업량 기간 맞추는 건 버들 씨가 결정하는 거고.”
“아. 그럼 내일부터 할게요.”
버들의 입가에 웃음이 감돌았다. 무작정 황 대표의 옆에 있는 게 아니라, 황 대표에게 도움이 되고 있단 게 흡족하다. 버들이 색연필을 단숨에 정리했다.
“어디 가요?”
“조각하러 가요.”
신발을 신고 버들이 나갔다. 햇볕이 가장 뜨겁다는 오후 두 시경이었다.
노인의 집과 가까이 다가갈수록 사나운 기계음이 들려왔다. 직접 가서 확인한 기계음의 정체는 톱이었다. 톱질하며 큰 바위를 분리하는 노인의 옆에 찰싹 붙어 있는 버들이 보인다. 돌가루가 튀는지 버들의 눈이 가늘게 뜨이기도 했다. 순간, 황 대표의 속이 울컥했다. 아니, 유버들 저게 어떤 집 새끼인 줄 뻔히 알면서 저따위로 위험한 일을 시킬 수 있어. 노인과 버들은 오랫동안 숙련되어 위험할 게 전혀 없는 상황이었지만 황 대표의 인상은 무섭게 일그러졌다.
“유버들!”
이름을 크게 불러도 기계음에 묻혀 듣지 못 했는지 버들이 여전히 노인을 돕고 있다. 빠르게 걸어간 황 대표가 버들의 뒷덜미를 낚아채 작업 중인 바위에서 멀찍이 떼어 놨다.
“대표님?”
황 대표가 노인을 노려봤다. 갑자기 나타난 황 대표의 분위기가 왜인지 심상치 않다. 스승님과 황 대표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는 버들의 눈동자가 불안함을 띤다. 검버섯 핀 노인의 볼이 노기로 떨렸다. 부엌으로 제 스승님이 사라지자 버들이 얼른 황 대표의 팔을 붙잡았다. 또 애꿎게 소금을 뒤집어쓸까 싶어 바깥으로 황 대표를 잡아끌었다.
“여기는 웬일이세요?”
버들의 얼굴을 황 대표가 잠시 응시했다.
“저 데리러 왔어요?”
치미는 화의 출처를 모르겠다.
“……근처에 슈퍼 있어요?”
가까스로 황 대표가 차분히 성질을 억눌렀다.
“아. 뭐 필요하세요? 제가 사다 드릴게요.”
“같이 가요.”
“같이? 조금 멀어요.”
“괜찮으니까.”
황 대표의 채근에 버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 금방 일 끝…….”
“지금 앞장서요. 앞치마 벗고.”
황 대표의 말을 따라 버들이 팔을 뒤로 꺾어 앞치마 매듭을 풀었다.
“밥 먹었어요?”
“네.”
“아침 말고 점심.”
“먹었어요.”
갑자기 평소 안 묻는 걸 추궁하자 버들이 신경 쓰이는 눈치다.
“버들아.”
벗어 둔 앞치마를 보고 노부인이 따라 나왔다.
“아. 저 슈퍼 다녀올게요. 혹시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밥도 안 먹고? 밥은 먹고 가지.”
심부름을 시키더라도 애 밥은 먹이고 시켜야지. 황 대표를 힐긋거린 노부인의 시선엔 딱 그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나중에 먹을게요.”
버들의 목소리가 바닥을 기었다.
“아까도 나중에 먹는다고 그랬잖아.”
“……슈퍼 다녀와서 꼭 먹을게요.”
“어제부터 아무것도 안 먹어서 어째.”
거짓말한 게 이런 식으로 들통날 줄 몰랐다.
“얼른 다녀올게요.”
난감해진 버들이 황급히 노부인에게 인사하고 황 대표를 지나쳤다. 황 대표가 천천히 버들의 뒤를 따라 걸었다. 바람이 뒤에서 앞으로 부는 중이었다. 옷자락이 버들의 몸에 달라붙어 마른 걸 여실히 드러냈다. 짜증 난다. 왜 나랑 있을 때 살이 빠지고 지랄이야.
유 대표가 곁에 앉아 참견해야지만 마지못해 음식을 입에 넣고 삼키던 버들이 떠오른다. 그때 체중이 감소한 거야 내 알 바 아니고. 나랑 있을 때 마르니까 추후 유 대표가 내 탓이라며 애먼 책임을 뒤집어씌울까 봐 역정이 나는 건지도 모르겠다.
부리부리한 인상의 장승을 지나쳤다. 마을 어디쯤 오니 소란스럽다. 버들이 속눈썹을 깜박였다. 장이 서는 날인가 보다.
“대표님. 혹시 뭐 사실 거예요?”
법석거리는 버들의 호기심을 황 대표가 알아차렸다. 사람 많은 곳은 질색이라 장 구경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슈퍼까지 더 걸어가느니 차라리 시장에서 필요한 것을 사는 게 시간도 단축되고 나을 것 같다. 먼저 장이 선 곳으로 걸어가는 황 대표의 뒤를 버들이 서둘러 뒤따라갔다. 길도 좁고, 비릿한 냄새도 나고. 피곤한 황 대표가 제 선택을 후회하며 미간을 구겼다.
“대표님. 빈대떡 좋아하세요? 제가 사 드릴까요?”
“너 앞 좀 보고 걸어.”
사방팔방에 정신이 팔린 버들은 앞을 똑바로 보지 않아 사람들에게 치이기 일쑤였다.
“아. 혹시 칡즙 드셔 본 적 있으세요? 저거 엄청 쓴데 몸에는 엄청 좋대요. 제가 사 줄게요. 먹고 갈래요?”
“…….”
“황 대표님. 병아리콩이 뭔지 아세요? 저거 잠깐만 보고 가면 안 돼요? 신기할 것 같은데…….”
“…….”
“저기서 부침개도 파나 봐요. 저는 녹두전 좋아해요. 대표님은요? 좋아하는 종류로 제가 다 사 드릴게요!”
참다못한 황 대표가 걸음을 멈췄다.
“야.”
“네?”
“너 내 옆에 서 있지 좀 마.”
“…….”
동행인처럼 보이기에 버들의 몰골이 심히 엉망이었다. 아, 진짜 거슬리네.
“야.”
“네?”
황 대표와 거리를 벌리고 멀어지던 중인 버들이 움찔거렸다.
“너 얼굴에 뭐 묻었어.”
거울 볼 틈도 주지 않은 게 누군데. 부루퉁해진 채 버들이 볼을 매만졌다. 전혀 닦이지 않고 오히려 검은 게 더 짙어졌다. 황 대표가 인상을 찌푸렸다. 내려뜨린 시선에 들어온 버들의 손이 지나칠 정도로 더럽다. 욕이 다 나온다. 가까이 다가가자 버들이 피하려 들었다. 아랑곳하지 않고 황 대표가 제 쪽으로 버들을 잡아당겼다. 두 사람의 옆으로 엿장수가 지나갔다. 금방 정신이 팔린 버들의 고개가 쨍강거리는 가위 소리를 따라 돌아갔다. 환장하겠다.
“너 집에서 이러는 거 알아?”
버들이 한숨을 삼켰다. 또 가족 얘기 하실 건가?
“제가 황 대표님 좋아하는 거요?”
“……그걸 집에서 알아요?”
“겨울이 형밖에 모르는데…….”
“진지하게?”
“그 정도까진 아니에요.”
“동성 좋아하는 게 자랑이야? 다른 데 가서 말하고 다니지 마.”
네. 버들이 낮게 대답했다. 다른 데 가서 말하고 다닐 생각, 처음부터 없었다.
“유버들.”
시무룩하게 가라앉은 꼴통 새끼를 보고 있자니 절로 한숨이 샌다. 집에서 톱으로 조각하는 거 아는지 모르는지 꼬치꼬치 물을 바에 황 대표는 그냥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귀하디귀한 보물일 줄 알았더니 알고 보면 그냥 집에서 내놓은 새끼가 아닌지 모르겠다. 황 대표가 버들을 똑바로 직시했다. 숙여 들려는 버들의 턱 아래를 붙잡아 살짝 위쪽으로 들었다.
황 대표에게 턱이 잡힌 버들의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 빳빳하게 굳어 버린 채 버들이 속눈썹만 하염없이 깜박거렸다. 샘물이 고인 것처럼 눈동자가 맑기도 하다. 이것도 다 멍청해서 그런 거라며 황 대표가 인상을 썼다.
“눈 감아.”
“왜요?”
“감아. 빨리.”
질끈 감긴 버들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제 셔츠 소매로 황 대표가 버들의 얼굴을 닦아 줬다. 기왕 닦아 줄 거면 좀 살살 닦아 주지. 사정없이 벅벅 문지르는 바람에 버들의 하얀 얼굴이 얼룩처럼 붉어졌다. 딱 그 부위만 체온이 뛰었다. 눈을 뜸과 동시에 황 대표가 멀어졌다. 각이 진 어깨가 넓다. 가만히 멈춰 선 버들이 코를 훌쩍거렸다. 황 대표가 닦아 준 제 볼을 하루 내내 만졌다.
오일장에서 황 대표가 구입한 건 쌀이었다.
* * *
씻고. 머리를 말리고. 외출 준비를 끝냈다. 오늘도 날씨가 맑다. 신발을 신고 막 나가려는 버들을 황 대표가 붙잡았다.
“밥 할 줄 알아요?”
“할 줄 알아요.”
“그럼 해.”
부잣집 막둥이에서 갑자기 주인집에 얹혀사는 업둥이 신세가 되어 버린 버들이 군말하지 않고 팔을 걷어붙였다. 쌀을 담아 씻을 만한 그릇을 찾느라 버들의 고개가 두리번거렸다. 찬장 제일 꼭대기에서 마땅한 걸 찾아냈다. 그 아래에 선 버들이 팔을 쭉 뻗었다. 닿지 않았다. 176cm는 결코 작은 키가 아니다. 긍지를 갖고 다시 힘껏, 있는 힘껏, 버들이 팔을 뻗어 보았다. 역시 닿지 않았다. 소파에 권태롭게 앉아 유 대표가 보내온 서류들을 확인하던 황 대표가 버들의 하는 양을 지켜봤다. 버들이 까치발을 들었다. 중심 잡는 모습이 어째 좀 아슬아슬하다. 움푹 파인 버들의 아킬레스건이 도드라졌다.
깔짝거리던 버들이 슬쩍 뒤를 돌아봤다. 황 대표님은 저보다 키가 훨씬 크니까 쉽게 그릇을 꺼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서류를 보는 황 대표에게 방해가 될까 봐 버들이 부탁하는 걸 망설였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버들의 시선이 자신에게서 달아나자마자 황 대표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릇을 꺼내 달라고 버들이 부탁해도 들어줄 요량이 전혀 없었다.
“대표님. 의자 써도 돼요?”
“…….”
“의자 잠깐만 밟고 닦아 놓을게요.”
“…….”
대꾸 좀 해 주지.
“…….”
“…….”
걸어오는 말은 전부 무시하면서 황 대표는 버들이 어떻게 하는지 지켜봤다. 찬장 아래에서 팔을 허우적거리던 버들이 번쩍 떠오른 생각에 밖으로 뛰어나갔다. 금방 되돌아온 버들의 손에는 어디서 주워 온 건지 콩 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그걸 찬장을 향해 내던졌다. 그 바람에 겹쳐져 있던 냄비들이 전부 다 와르르 쏟아지면서 큰소리가 났다. 난리 통 속에 버들이 태연한 모습으로 원하는 걸 골라냈다. 황 대표가 헛웃음을 켰다. 황당하다.
“어디 가서 성격 좋단 말 못 듣죠?”
갑자기 들린 황 대표의 목소리에 버들이 휙, 뒤를 돌았다. 근처까지 황 대표가 걸어왔다. 시끄럽게 해서 화를 낼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닌가 보다. 버들이 안도했다. 주변에 흩어진 냄비들을 황 대표가 원래 있던 곳에 집어넣었다. 어지럽혀져 있는 건 딱 질색이다.
“진짜 할 줄 알아요?”
“밥이요? 저 잘해요.”
자신 있게 말한 버들이 이내 쌀을 조물조물 씻었다.
그림을 그리다가 취사가 완료됐단 알림에 밥통을 열었다. 윤기가 좌르르 흐른다. 주걱으로 휘젓다가 손에 묻은 밥풀을 버들이 오물거리며 먹었다. 스테이크만 드시더니 쌀을 드실 때도 있구나. 황 대표에 관해 새로운 걸 알게 됐다. 버들이 밥을 소담스럽게 퍼 담은 밥그릇을 식탁 위에 올려놨다. 김이 모락모락 핀다.
“그럼 다녀올게요.”
“……어딜.”
“스승님 댁에요.”
“조각하러 가는 거야?”
“네.”
웃는 버들의 눈꼬리가 휙 휘어졌다.
“밥도 안 먹고 무슨 조각이야.”
“스승님 댁에 가서 먹으면 돼요.”
운동화를 구겨 신고 있는 버들의 뒷덜미를 붙잡아 황 대표가 식탁으로 데려갔다.
“앉아.”
“…….”
“앞으로 내가 보는 데서 식사해요.”
황 대표가 협박처럼 말했다. 버들이 숟가락을 들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입맛이 없었다. 그리고 황 대표가 몸 여기저기를 세게 물어 올 때마다 소리를 내지 않고자 이를 꽉 깨물고 버텼던 통에 입안이 조금 헐기도 했다. 겨우 한 수저 떴다. 모래알을 씹는 것 같다.
“대표님도 드세요.”
“네가 한 밥을 어떻게 먹어.”
“……제가 한 게 어때서요.”
아까 쌀을 씻을 때 황 대표의 눈빛을 언뜻 봤다.
“제 손, 더러워서요?”
버들이 주춤거리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뜯기고 갈라진 손톱이 감춰졌다. 나른한 황 대표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저 비위 약해요.”
온종일 조각만 하고 돌아온 버들이 가족들에게 차례차례 안부 전화를 돌렸다. 장 여사와는 무려 50분이나 통화했다. 핸드폰이 뜨끈뜨끈하다. 버들이 겨울의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뭐야. 아까도 부재중이더니 지금도 부재중이다. 버들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철없는 형이 사고치고 다니기 전에 감시해야 하는데. 분명 나 없는 틈을 타 마음대로 외박을 해 대며 아주 살판이 났을 것이다.
일찍 다니란 메시지를 버들이 겨울에게 전송했다. 전화는 받지 못하지만 메시지는 확인할 수 있는지 이윽고 겨울에게서 온갖 색색별 하트로 꽉 찬 화면이 답장으로 날아왔다. 버들의 턱 아래에 작게 호두가 생겼다. 난리가 난 하트들이 무슨 뜻인지 알쏭달쏭하다. 일찍 다니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형. 어디야?]
[돈 버는 중이야.]
그럼 회의 중이라 전화를 못 받나?
[회사야? 회의하고 있어?]
[어떻게 알았어?]
[형은 내 손바닥 안이야. 집에 일찍 들어가.]
[뽀뽀나 하자.]
대화의 흐름이 못마땅한지 버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집에 일찍 들어가겠단 대답을 겨울이 이리저리 피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때 사진이 도착했다. 버들의 기다란 속눈썹이 빠르게 깜박거렸다. 뭘까 싶어 곧바로 사진을 확대했다. 겨울의 글씨체로 서류 귀퉁이에 뭔가 적혀 있었다. 자필 편지라니. 겨울이 형……. 그간 떨어져 있던 핏줄에게 그리움과 애틋함이 섞였다. 그렇지만 그 찡한 감정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 편지는 영국에서 시작됐고 넌 앞으로 넷째 형과 일곱 번 뽀뽀를 하지 않으면 삼대가 재수 없을 줄 알아라.]
열 받아. 답장을 보내려는데 핸드폰 화면이 갑자기 새까매졌다. 배터리가 아슬아슬하더니만.
무릎으로 걸어간 버들이 핸드폰에 충전기를 연결시켰다. 뉴욕에 있었던 3년보다 여기 시골에서 머물고 있는 며칠이 훨씬 더 오래된 기분이 든다. 문득 제 방에 숨겨 놓고 온 보물들이 생각났다. 대표님 주려고 산 머플러와 대표님이 주신 치즈케이크 리본에 먼지가 쌓이진 않았을까 걱정이다. 그렇다고 남에게 확인해 달라고 부탁하는 건 싫다. 사진이라도 찍어 올 걸 그랬네.
고개를 돌려 바라본 창밖으로 어둠이 번지고 있었다. 노곤한 버들이 일찍 이불을 깔고 누워 베개를 벴다. 처음엔 벽을 보고 누웠다가 스리슬쩍 방향을 돌렸다. 버들의 눈에 황 대표가 담겼다.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는 황 대표의 자세가 바르다. 정민이 전에 소개팅시켜 준다면서 이상형이 뭐냐고 물었던 적이 있는데 앞으로 유치하다고 피할 게 아니라 자세가 바른 사람이라고 대답해야겠다. 구체적인 이상형이 생기자 난데없는 수줍음이 몰려든다. 옅게 지어진 웃음을 감추고자 버들이 얇은 이불을 코밑까지 끌어당겼다.
댕글댕글한 큰 눈을 차분히 굴리며 버들이 황 대표를 탐구했다. 각 잡힌 정장 차림 대신 이곳에서의 황 대표는 편해 보이는 셔츠나 얇은 여름용 니트, 청바지를 갖춰 입는 편이었다. 실내에만 있어도 샤워 후 향수를 뿌리는 모습에 얼마나 두근거렸는지 모르겠다. 버들의 눈길이 언뜻 보이는 황 대표의 발목에 고정됐다. 코피가 날 것처럼 섹시하다. 얼마나 지났을까. 황 대표가 두드리는 키보드 소리가 귓가에서 멀어진다. 아련해지는 기분이라 눈꺼풀에 힘을 줘 봤지만 얼마 버티지 못했다. 고개가 외로 깊숙이 기울여지면서 버들이 결국 스르륵 잠에 빠졌다.
황 대표가 노트북을 밀었다. 소음 때문에 집중력은 이미 흐트러진 상태였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보다 훨씬 작은 버들의 숨소리에 황 대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목표했던 작업량을 마치지 못한 채 결국 날을 새고야 말았다. 다음 날 씻고 나온 버들을 잡아 황 대표가 벽에 가뒀다. 꿈도 꾸지 않고 잘 자고 일어나 기분 좋았던 버들의 하얀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화풀이로 목과 귓불을 황 대표가 함부로 씹어 대는 동안 버들이 소리 내지 않으려 끙끙거렸다.
마주 보고 앉아 식사를 하는 도중이었다. 젓가락 끝을 쪽 빨며 버들이 황 대표의 접시를 힐긋거렸다. 고깃덩어리가 나이프 끝에 찔려 정갈하게 썰어진다. 황 대표를 부를까, 말까 망설이면서 버들의 입술이 몇 번이나 달싹이다가 닫혔다. 앞으로 대표님이랑 집에서 끼니를 챙겨 먹겠다고 하니 노부인이 이것저것 밑반찬들을 싸 주셨다. 솜씨 좋게 밑간을 해 무쳐 준 나물이 새콤하다. 고기의 질감과 제법 잘 어울릴 것 같다. 황 대표에게 맛있는 걸 권하고 싶어 버들이 우물쭈물했다.
둘 다 남자라고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있었다. 웅? 어쩌다가 버들의 발끝에 황 대표의 발끝이 스쳤다. 둘 다 맨발이라 서로의 체온이 적나라했다. 버들이 놀라서 황급히 무릎을 오므렸다. 태연해 보이는 황 대표를 바라보며 버들의 눈이 깜박거렸다. 대표님 다리가 어디까지 오는 거지? 궁금한 걸 직접 해소하기 위해 버들이 고개를 꺾어 식탁 아래를 쳐다봤다. 딴짓하느라 전혀 줄어들지 않는 버들의 밥그릇을 보며 황 대표가 인상을 썼다. 주먹으로 똑똑 식탁을 두드렸다. 감정 따라 소리가 까칠했다. 스프링에 매단 인형처럼 버들의 허리가 바로 세워졌다.
“밥 먹어.”
“……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먹기 싫다. 버들이 밥알을 세는 동안 황 대표의 식사가 끝났다.
“다 드셨어요?”
버들이 화색을 띠며 물었다. 먼저 황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나길 기다렸다가 슬쩍 식탁을 치울 예정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황 대표가 꿈쩍을 하지 않는다. 완벽할 줄 알았던 계획이 틀어지면서 버들의 눈썹이 축 처졌다. 시선이 마주쳤다. 황 대표가 팔짱을 끼자 버들의 손가락 사이에서 젓가락이 비틀렸다. 버들이 밥에 물을 말자 황 대표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대표님.”
“나한테 말 걸지 말고 밥이나 먹어.”
짜증 내며 황 대표가 말을 잘랐다.
“……네.”
황 대표의 감시 아래 버들이 어쩔 수 없이 꾸역꾸역 밥 한 공기를 비워 냈다. 그게 한 시간이 걸렸다. 황 대표가 커피를 내렸다. 진한 커피 맛만큼이나 원두 향이 짙다. 그게 안정제 역할을 해 주는 것 같다. 한결 침착해진 기분으로 황 대표가 잔을 내려놨다. 양치를 하고 돌아오자 버들이 싱크대 앞에 서 설거지를 하는 중이었다. 거품을 잔뜩 낸 수세미를 들고 주걱에 달라붙어 있는 밥풀까지 참 세심하게 닦아 없앤다. 어디서 난 건지 새빨간 고무장갑까지 끼고 있다. 꼴이 우습다.
“버들 씨.”
“네?”
버들이 뒤를 돌아봤다.
“자존심 안 상해요?”
업둥이 노릇을 자처하는 재벌가 막둥이를 황 대표가 조롱했다. 느리게 깜박거리는 버들의 눈빛이 순하다. 황 대표의 물음에 아니라고 대답하는 대신 거품이 모자란 것 같아 수세미에 좀 더 세제를 묻혔다. 다시 설거지에 집중하려는데 문득 의문이 든다. 자존심? 웬 자존심? 멀뚱한 얼굴로 버들이 갸웃거렸다. 설거지를 하는데 무슨 자존심까지 찾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건 내가 사용한 숟가락이고. 이건 황 대표님이 사용한 접시고. 대체 어디서 자존심을 찾아야 하는 거지?
계속 궁금해하며 버들이 황 대표의 식기들은 더 꼼꼼하게 설거지했다. 사랑하는 장 여사를 위해 직접 장을 보고 재료를 손질해 상을 차리는 유 회장을 보면서 자라났다. 여섯 형제에겐 그게 몹시 당연한 일이었다.
“황 대표님.”
버들이 황 대표를 바라봤다.
“좋아해요.”
눈빛이 오고 갔다.
버들이 끼고 있는 고무장갑 끝에서 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아주 많이, 좋아해요.”
바닥에 거품 섞인 물웅덩이가 작게 생겨났다. 그걸 황 대표가 손으로 지적하자 버들이 허둥거리며 티슈를 가져와 닦았다.
* * *
열흘이 흘렀다. 열 밤 자면 데리러 온다던 겨울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이게 다 너를 위해서야. 거기 있으면서 너 맑은 공기 듬뿍듬뿍 마시라고.’ 전화 너머로 겨울이 당당했다. 황 대표랑 조금이라도 더 오래 있고 싶은 버들은 처음으로 뻔뻔한 제 형의 성격이 반가웠다. 스승님 댁에서 얻어 온 동그란 의자를 버들이 그늘진 처마 밑에 가져다 놨다. 물감 냄새가 독해 예민한 황 대표가 싫어할까 봐 실내에서 작업해도 되는지 애초에 묻지도 않았다.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제 그림 작업실이 버들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는 이틀에 불과했지만 작업에 속도가 붙었다. 하얗기만 했던 캔버스가 빈틈없이 채워지는 중이다. 잠깐 고개를 들어 버들이 두껍게 뭉쳐 있는 구름을 감상했다. 평화롭다. 좋은 풍경에 너그러운 마음이 든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마당으로 황 대표가 나왔다. 구름은 버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잘난 남자는 어김없이 오늘도 잘났다. 바닥에 나타난 그림자마저 훤칠하다.
황 대표가 가까이 다가오자 버들이 무의식중에 의자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런 버들의 어깨를 황 대표가 눌렀다. 긴장이 되는지 버들이 작게 “왜요?” 이유를 물었다.
“아……. 여기는 그러니까…….”
그림이 얼마만큼 진행이 되었는지 확인하러 온 고용주에게 버들이 ‘여기는, 저기는’ 그림의 구조를 설명했다. 버들의 어깨 뒤에 서 있던 황 대표가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앞쪽으로 몸을 숙였다. 귀 옆으로 바로 황 대표의 얼굴이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킨 버들의 목이 올각거렸다. 은은하게 황 대표의 향수 냄새가 맡아진다.
……떨려.
“버들 씨. 그림이 왜 필요한 거 같아요?”
그림이 주인공에게 끼치는 중요성을 이해시키고자 황 대표가 입을 열었다.
황 대표의 말을 듣고 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자기가 느꼈던 생각을 말하기도 했다. 겉으로만 맴돌던 두 사람의 대화가 어느 순간 주인공의 감정으로 연결됐다. 캔버스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버들이 생각에 잠겼다.
“그럼 해피 엔딩이 아닌 거예요?”
의외다.
“저는 주인공이 행복하게 끝나는 줄 알았어요. 사실은 비극이었네요.”
표면적으로 해피 엔딩으로 보이게 쓴 시나리오를 버들이 완벽히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앞으로 나올 그림이 기대된다. 일하기 좋은 파트너다, 고리타분한 노인네에 비하면 훨씬. 황 대표의 시선이 버들의 옆얼굴로 향했다. 보드라워 보이는 볼이 보동보동하다.
“대표님, 그럼 제가 그린 그림이 진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거네요?”
그래서 돈을 주는 거다. 황 대표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동시에 버들의 입가가 나긋해졌다. 어딘가에서 벌이 날아왔다. 매미가 목청껏 울어 대고 있고, 바람이 적당히 살랑거리는 한낮이었다.
-그래서 안 미안하다고?
뒤를 꺾어 신은 운동화를 질질 끌면서 버들이 흙길을 걸어갔다. 노부인의 심부름으로 간장을 사러 가는 중이었다. 발에 뭐가 걸려서 보니 나뭇가지다. 그걸 주워 흔들었다.
“왜 미안해야 돼, 내가?”
-너무하네. 친구끼리. 방학이라고 놀아 주지도 않고. 연락도 항상 내가 먼저 하고.
“넌 체대 애들이랑 놀면 되잖아.”
-같은 예체능끼리 서로서로 어울리면 좋지.
버들이 간지러운 눈가를 주먹으로 문질렀다.
-놀자.
“나 못 노는데.”
-야. 나도 오늘은 못 놀아.
“나는 당분간 못 놀아.”
-당분간이 언젠데?
황당한 듯 정민이 되물었다.
“그냥. 당분간이 당분간이지.”
또렷하게 대답해 주지 않은 건 회피가 아니라 진짜 몰라서였다. 오해하고 삐쳤는지 정민의 수다가 뚝 끊겼다. 통통한 입술을 모아 버들이 오물거렸다.
“진짜야. 나 서울 아니란 말이야.”
-그럼? 어딘데?
“일하러 왔어.”
-아. 아르바이트? 전에 말했던?
“응.”
그제야 정민의 목소리가 다시 밝아졌다.
-나도 지금 일하러 가는 중이야.
“일? 어디로?”
-시골 할아버지 댁. 훈련 쉬는 날에 노동을 해야 하다니. 이게 뭐냐?
앞쪽에서 흙먼지가 뭉게뭉게 일어났다. 덜컹거리며 작은 마을버스가 굴러 오고 있었다. 버들이 길 한쪽으로 비켜섰다.
“시골 할아버지 댁이 어딘데?”
-말해 주면 어딘 줄 아냐?
언젠가 얄미웠던 버들의 말을 정민이 따라 하며 크게 웃었다.
“끊어.”
-야, 씨. 말해 줄게. 끊지 마.
“안 궁금해. 끊어.”
-야. 유버들.
“끊으라니까. 전화비 많이 나와.”
버들의 옆으로 버스가 지나갔다. 다시 슈퍼로 향하는데 뒤에서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별생각 없이 버들이 뒤를 돌았다. 버스 정류장도 아닌데 멈췄던 버스가 요란스레 엔진을 울리며 막 출발했다.
“유버들?”
커다란 인영이 눈앞을 가로막았다. 정민이었다. ‘네가 왜 저 버스에서 나와?’, ‘네가 왜 이 시골 바닥에 있는 거야?’ 서로의 눈빛이 각각 의문을 담은 채 감겼다가 뜨였다. 여태 귀에 대고 있는 버들의 핸드폰을 정민이 대신 가져가 꺼 주었다.
“할아버지 댁이 여기야?”
산도 있고, 강도 있고, 계곡도 있다던. 전에 동기 녀석들이랑 떠들썩하게 잘 놀다가 왔단 곳이?
기다란 한쪽 다리를 황 대표가 접었다. 욕조의 폭이 심하게 좁다. 이게 무슨 꼴인지 싶다. 잇새로 욕설이 터졌다. 욕조에 팔을 걸치고 앉아 있던 황 대표가 머리맡에 뒀던 와인 잔을 집어 들었다. 천장을 향했던 고개를 똑바로 세웠다. 정면에 뭐가 있다. 그 순간, 얄팍하게 남아 있던 안락함마저 송두리째 흔들렸다. 황 대표의 손에서 빠져나온 와인 잔이 욕조 속으로 가라앉았다.
“대표님!”
황 대표가 가운 끈을 매듭지었을 때 버들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아!”
버들이 얼른 눈부터 가렸다.
“아무것도 안 봤어요!”
가운 틈새로 가슴 근육 다 봐 놓고 버들이 거짓말을 쳤다. 헐레벌떡 집에 돌아온 이유는 황 대표에게 들려줄 말이 많았기 때문이다. 우연히 만난 정민이 얘기도 해 주고 싶고, 노부인에게 배운 가지 볶음 조리 방법도 알려 주고 싶고, 오늘 스승님과 함께 작업한 조각의 진행 사항도 보고해야 하고.
“대표님…….”
눈을 가리고 있던 손바닥을 버들이 슬며시 내렸다.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황 대표를 차마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겠다. 갓 씻고 나온 황 대표의 모습에 심장이 난동을 부려 댔다. 진짜 변태가 따로 없다. 그런 제 속마음을 감추고자 버들이 아랫입술을 말아 물며 신발을 벗었다. 욕실로 걸어가려는 버들의 앞을 황 대표가 불쑥 가로막았다.
“문 열지 마요.”
“왜요?”
“안에 뭐 있어. 경찰 불러야 돼.”
“네?”
경찰이란 말에 버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아무튼 열지 마.”
돌가루를 뒤집어쓴 채였다. 찝찝해서 당장 씻고 싶었다. 황 대표의 눈치를 살피던 버들이 욕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아무것도 없는데요?”
“……아무것도 없어?”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황 대표의 손가락이 삐끗거렸다. 액정에는 정말 112가 찍혀 있었다. 핸드폰을 내려놓고선 황 대표가 욕실 안을 들여다봤다. 버들의 말처럼 욕실은 잔잔한 기운만 감돌고 있었다. 무슨 일이시지? 상황을 설명해 주길 바라며 버들이 빤히 황 대표를 쳐다봤지만, 황 대표의 입은 과묵했다. 갈아입을 옷을 챙겨 버들이 후다닥 욕실 안으로 들어가 샤워를 끝냈다. 뜨거운 물에 발갛게 익은 볼로 버들이 코를 훌쩍거렸다. 황 대표는 어느덧 옷을 갈아입은 채였다. 황 대표님이 계속 가운을 입고 계시면 어쩌지? 변태처럼 안 보이려면 눈을 어디에 둬야 하지? 샤워하는 동안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던 걱정거리는 한낱 쓸데없는 거였다. 황 대표가 버들을 응시했다. 그림은 밖에서 그린다지만 미술 용품들은 집안에서 보관하기 때문에 그윽하게 물감 냄새가 났다.
“야!”
황 대표가 기겁했다.
“너 손에 그거 뭐야!”
경찰을 부르려고 했던 정체가 버들의 부르튼 양손에 포박되어 있었다.
“개구리요.”
“갖다 버려!”
“이거 때문에 아까 대표님 놀라신 거예요?”
“말 안 들려? 갖다 버리라니까!”
개구리는 매우 작았다. 겨우 엄지손가락 반만 했다.
“이거 안 물어요.”
버들은 다가갔고, 황 대표는 물러났다.
“유버들!”
버들이 사색이 된 황 대표를 위해 얼른 개구리를 방생하고 돌아왔다. 당장 손 씻으란 황 대표의 말도 순순히 따랐다. 강아지도 무서워하시고. 개구리도 무서워하시고. 전에 강아지도 못 덤비게 내가 붙잡아 드렸었는데.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뭔가를 해냈단 생각에 버들이 뿌듯해졌다. 버들이 황 대표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대표님. 여기에 저랑 있어서 다행이죠?”
젖은 버들의 머리카락이 향기롭다.
“저랑 평생 같이 있으면, 강아지랑 개구리 무서워하셔도 돼요. 제가 잡아 드릴게요!”
황 대표가 어이없어했다. 강아지? 개구리? 그런 환경 자체를 만들지 않을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