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우연한 것에서 비롯된 (4)
뒤척거리기 한참이다. 평소라면 듣기 좋았을 바람 소리마저 거슬린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버들이 무릎으로 일어나 침대 옆 창문을 닫았다. 고요함이 천장으로부터 내려앉는다. 참으려고 했는데 한숨이 폭 나와 버렸다. 애써 감은 눈꺼풀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아까부터 계속 노력 중이지만 머릿속이 어지러우니 좀처럼 잠들기가 쉽지 않다. 숨을 크게 들이켠 버들의 가슴이 부풀었다. 후. 길게 내뱉은 숨에 부풀었던 버들의 가슴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심호흡을 여러 번 반복해 봐도 어딘가 꽉 막힌 느낌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코 아래까지 덮고 있던 이불을 버들이 긴 다리로 휘적휘적 차 내고선 대자로 뻗었다. 그러고 있길 또 한참. 결국 잠자는 걸 포기했다. 버들이 차가운 물을 틀어 오랫동안 세수를 했다. 턱 아래로 뚝뚝 고이는 물을 대충 손등으로 밀어 닦으며 숙였던 허리를 폈다.
방 안의 불을 켜자 해바라기부터 눈에 담겼다. 처음엔 한 송이였던 게 지금은 두 송이다. 하나는 황 대표가 놓고 간 거고, 하나는 황 대표가 버린 거다. 쓰레기통에 처박혔어도 샛노란 색감의 꽃은 싱그러웠다. 더럽단 생각도 못 하고 버들이 쓰레기통 속으로 기꺼이 손을 넣어 그걸 주워 왔다. 지금은 두 송이 모두 시들어 버린 상태다.
「유버들 씨.」
탁하고 낮은 황 대표의 목소리를 겨우겨우 밀어냈다. 밀어내어 생긴 빈 공간으로 황 대표의 고운 손가락이 꽉 들어찼다. 이거 아니야. 버들이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고운 황 대표의 손가락을 밀어내니까 바로 이어서 가로로 올곧은 넓은 어깨가 생각이 났다. 운동하시는 거겠지? 어떤 운동을 하시는 걸까? 시계가 채워진 황 대표의 손목을 타고 손등까지 푸르게 돋아난 핏줄이 떠올랐다. 문득 파자마 소매를 돌돌 말아 버들이 제 팔을 접어 보았다. 턱이 바들바들 떨릴 정도로 힘을 줬지만 알통이라고 할 게 전혀 없다. 황 대표의 몸과 제 몸을 비교하느라 잠깐 방심했다. 갑자기 황 대표의 모든 것들이 머릿속을 휘젓기 시작했다. 마치 도미노가 와르르 무너지는 것처럼 걷잡을 수가 없었다. 발목이, 속눈썹이, 손톱이, 코끝이……. 아아. 낙담하며 버들이 침대 위로 쓰러졌다.
애인, 있으신 건가.
* * *
도서관에 들러 필요한 책을 빌린 후 버들이 교문을 빠져나갔다.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기사가 버들을 반겼다.
“오늘은 저 알아서 갈게요.”
기사가 열어 준 뒷좌석 문에 버들이 무거운 가방만 집어넣었다.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기사가 부쩍 걱정스럽게 버들을 바라봤다.
“좀 걸으시려고요?”
“네.”
“날씨가 너무 덥지 않겠습니까.”
“아직 5월인데요.”
밝게 웃으며 버들이 대꾸했다. 차가 멀어지는 방향으로 걷다 보니까 어느덧 대학가를 벗어났다. 폭이 넓은 횡단보도를 건너자 한적한 동네가 나왔다. 아무렇게나 골목을 들락날락하던 중 웬 고등학교 앞에 다다랐다. 뚱한 표정으로 처음엔 그냥 지나쳤던 버들이 다시 돌아와 운동장이 잘 보이는 스탠드 자리에 골라 앉았다.
햇볕은 뜨겁고 모래바람은 휘날리고 있는데 공을 빼앗기 위해 몇몇이 열정적으로 달리고 있었다. 함성이 시끄럽다. 격하게 운동을 하면서도 다들 힘든 기색이 없어 보인다. 종이 울리자 학생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사라졌다.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난 버들이 어느덧 텅 빈 운동장 가운데로 들어섰다. 골대 아래에 덩그러니 놓인 낡은 공을 발끝을 툭 밀쳤다. 데굴데굴 잘 굴러간다. 담배 생각이 간절해졌다.
* * *
“형.”
겨울의 대표실 문을 열고 들어간 버들이 가방을 열어 외장하드를 꺼냈다.
“누차 말하잖아. 소중한 거면 잘 챙기고 다니라니까.”
“바로 가 봐야 할 거 아니지?”
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날씨가 화창한 주말의 아침이었다.
“그럼 이따가 너 여름옷 사러 가야겠다.”
무조건 여름옷을 사 줘야겠단 겨울과 싫다는 버들이 실랑이를 벌였다. 팽팽히 맞서길 잠깐, 딱 한 벌만 사는 걸로 서로 합의점을 찾았다. 합의한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버들의 얼굴이 잔뜩 심통이 났다. 그런 버들의 모습을 옆에서 겨울이 쪼개며 바라봤다. 볼을 막 꼬집으려는 참에 김 실장이 대표실 안으로 들어왔다.
“버들아. 형 잠깐 회의 좀 하고 올게.”
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형한테 뽀뽀 안 해 줄 거지?”
“빨리 나가. 김 실장님 기다리고 계시잖아.”
쌀쌀맞은 태도로 버들이 문 쪽을 향해 턱을 까닥였다.
혼자 남겨진 회의실에서 한 시간이 흘렀다. 신문 따위들을 들춰 보던 버들이 낱말 게임을 발견했다. 볼펜을 꺼내 머리를 굴리며 빈칸을 채우는데 열중하고 있던 참이었다.
“유 대표.”
문이 열리기에 당연히 제 형인 줄 알았던 버들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유 대표, 어디 갔어요?”
오늘만큼은 회사에 나오면서 맹세코 기대란 걸 하지 않았다. 아무런 기대감 없이 갑자기 마주하게 된 황 대표의 얼굴에 여태 평온했던 버들의 마음이 금방 복잡해졌다. 손가락에 아슬아슬 걸쳐져 있던 펜이 톡 떨어졌다.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맡아지는 황 대표의 향수 냄새에 버들의 가슴이 소란스러워졌다.
“회의실에…….”
“회의실에 없던데요. 회의실에 간다고 나갔어요?”
“아뇨. 회의하러 간다고 나갔어요.”
애인, 있으시겠지?
“언제 나갔어요?”
“…….”
“음?”
“…….”
“버들 씨?”
유 대표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지만 신호만 가고 연결이 되지 않자 황 대표가 버들에게 물었다. 오랜만에 만난 황 대표를 빤히 쳐다보느라 정신이 나가 있던 버들의 입술이 슥 벌어졌다.
“……아. 한 시간 정도 됐어요. 근데 금방 온다고 하고 나간 거예요.”
버들의 말을 듣고 황 대표가 재차 겨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역시나 연결되지 않는다. 머리를 쓸어 넘기는 황 대표의 손길이 대단히 짜증스럽다. 자기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버들이 괜한 눈치를 봤다. 형은 회의하러 간대 놓고 회의실에 없으면 어쩌자는 거야. 버들이 낱말을 맞추던 신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가죽 소파에서 나는 소리를 따라 고개가 들렸다. 맞은편에 황 대표가 앉았다. 아무래도 겨울이 올 때까지 기다리려나 보다. 버들의 심장이 빠른 속도로 펄떡거리기 시작했다. 입안도 왠지 바짝 마르는 것 같고. 얼굴 전체로 저릿하게 전기가 퍼지는 것 같기도 하고.
등 뒤로 부서지는 햇살에 황 대표가 반짝반짝 빛이 난다.
“야. 너 시간이 몇이야.”
겨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는지 편편했던 황 대표의 미간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빨리 들어오기나 해.”
-나 지금 김 실장이랑 잠깐 나왔어. 갑자기 미팅 잡혀서.
“오늘 스케줄 확인 안 했어?”
-스케줄? 뭐가 있더라?
황 대표가 눈을 지그시 감으며 짧게 욕을 내뱉었다.
“나랑 소품 주문한 거 상태 보러 가기로 했었잖아.”
-아. 그거 오늘이었던가?
싸한 정적이 찾아왔다.
“장난해?”
살벌한 기운이 역력했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버들이 입 안쪽 살을 우물거렸다.
-거기 우리 버들이도 아는 곳이거든?
“버들 씨?”
-응. 거기 버들이 있지? 내 새끼 지금 뭐 하냐? 자?
들려온 제 이름에 버들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자면 깨우고.
나 안 자는데. 버들이 코를 훌쩍거렸다.
-길 안내받고, 수고했으니까 맛있는 거 사 먹여서 돌려보내.
기가 막힌다. 황 대표가 헛바람을 켰다.
-아무튼 나는 지금 못 들어가니까 그리 알고.
“너 일 이따위로 할 거야?”
-나도 지금 일하려고 나온 거야. 새끼야.
전화가 끊기면서 정적이 깔렸다.
기분 나쁜 표정으로 황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버들의 뺨이 달아올랐다.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황 대표가 저에게 말을 걸 것 같으니까 기분이 팔랑팔랑 나부낀다. 그러나 제 예상과 다르게 황 대표는 문 쪽으로 향했다.
……뭐야. 분명 급한 일 같았고, 나한테 말을 걸 거라고 생각해서 마음의 준비도 끝내 놨는데. 제자리에 서 있던 버들이 황 대표가 대표실 문을 열자 서둘러 움직였다. 그 바람에 소파 장식에 허벅지를 부딪쳤지만 아파할 틈도 없었다.
“황 대표님.”
제 앞을 가로막은 버들을 황 대표가 무심히 내려다봤다.
“저…….”
버들이 띄엄띄엄 말을 했다.
“죄송해요.”
“…….”
“전에 엘리베이터에서 제가 발목 만졌잖아요. 그리고…….”
떠오른 기억에 황 대표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에요?”
거리가 좁혀진 만큼 황 대표의 향수 냄새 역시 가까워졌다. 문득 메신저 프로필 창에서 보았던 바닷가의 풍경이 떠올랐다.
“제가 필요한 거 맞죠? 통화 내용이 들려서요.”
버들의 커다란 눈이 순하다.
“아니요.”
거절인지 부정인지 딱 자른 황 대표의 말이 아쉬움을 남겼다. 저를 스쳐 지나가 버린 황 대표를 버들이 뒤쫓았다.
“황 대표님.”
뒤를 쫓다 보니 어느새 황 대표의 대표실 앞까지 와 있었다. 황 대표의 대표실은 별채처럼 독립된 곳에 위치해 있었다. 다시 외출하려는 건지, 대표실 안에서 겉옷만 챙겨 들고 나온 황 대표와 마주했다.
“……싫으세요?”
“…….”
“해바라기, 싫어하세요?”
버들에게로 무심한 황 대표의 눈길이 닿았다. 나지막한 황 대표의 한숨이 유독 가슴에 맺히듯 들려왔다. 지금 좀 바빠서. 버들을 스쳐 지나가려는 황 대표의 뒤로 다시 질문이 들려왔다.
“대표님. 좋아하는 꽃, 따로 있으세요?”
황 대표가 잠시 걸음을 멈췄다. 좋아하는 꽃, 따로 있냐고? 질문이 웃겼다.
“있으면요.”
나긋한 어조였다.
“좋아하는 꽃으로 선물하고 싶어서요.”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확인하며 황 대표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버들이 안달을 냈다.
“저한테 꽃을 왜 선물하고 싶어요?”
궁금해서가 아니라 졸졸 따라오는 게 귀찮으니까 적당히 말을 돌려 떼어 내려고 물은 거였다.
“……꽃 선물하면 안 돼요?”
“안 된다는 것보단 이상하잖아요.”
“뭐가요? 뭐가 이상해요? 해바라기가요?”
“아니. 버들 씨가.”
버들의 눈이 올곧게 자신만을 향해 있다. 들러붙는 게 거머리가 따로 없다.
“보통 관심 있는 사람한테 꽃 선물하지 않아요?”
“…….”
“버들 씨 남자잖아요. 나도 남자고.”
“…….”
“동성한테 꽃 선물하는 거 징그럽지 않아요?”
황 대표가 걸음을 멈췄다. 버들이 팔을 잡은 탓이었다. 탁. 버들을 뿌리친 황 대표가 인상을 구겼다. 원래부터 물기가 많은 버들의 까만 눈이 촉촉하게 일렁거리더니 차라리 환하게 웃어 버렸다.
“그냥, 저는…….”
제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가 버리는 황 대표의 뒷모습을 버들이 물끄러미 바라봤다.
* * *
조막만 한 글씨들로 카페 메뉴판이 빽빽하다. 주문을 끝내고 카드를 돌려받은 뒤 버들이 한쪽으로 비켜섰다. 미리 빨대를 챙겨 음료를 기다리는 동안 카페 내부를 둘러보았다. 점심시간이 갓 지난지라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운 좋게 버들이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음료가 잘 섞이도록 빨대를 흔들자 큰 조각으로 들어가 있던 레몬에서 씨가 분리되었다. 엄청나게 시다.
황 대표님은 신 거 잘 드실까?
가는 곳만 가고 먹는 것만 먹는다는 황 대표의 성향이 문득 떠올랐다. 식재료의 상태에 따라 오늘은 어떤 게 괜찮다며 매니저가 권해 주는 메뉴를 흔쾌히 주문하는 제 형과 달리 황 대표의 주문은 일정히 고정되어 있었다. 생고기에 가깝게 살짝만 구워진 스테이크와 와인, 디저트로는 항상 커피를 시켰었지.
2층에서 내려와 화장실을 가려던 정민이 우연히 버들을 발견했다. 햇빛 때문인지 버들의 머리카락이 투명한 은빛으로 반사되고 있다. 점심을 배 터지게 먹은 뒤로 졸음이 쏟아지던 중이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정민이 번뜩 화색을 되찾았다. 앞에 앉아도 되냐고 물으면 싫다면서 당연히 툭툭거리겠지? 뻔뻔한 표정으로 정민이 버들의 앞쪽 의자를 빼 털썩 주저앉았다. 혼자 뭔가를 끼적거리고 있던 버들의 시선이 앞쪽으로 향했다. 깜박거리는 속눈썹에 의아함이 담겨 있다. 빤히 저를 응시해 오는 버들의 시선이 머쓱한지 정민이 헛기침을 터트렸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아는 척 안 해?”
“여기 내가 맡은 자리거든? 다른 데로 가.”
“그렇게 아는 척할 거면 하지 마.”
정민이 눈살을 모으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네가 오해할까 봐 미리 말하는데.”
오해? 버들의 고개가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였다.
“너 따라다니는 거 아니다. 내가 너보다 여기 먼저 와 있었어. 증거로, 나 주문할 때 너 없었거든. 아무튼. 화장실 가려다가 너 보여서 와 본 거야.”
결백을 주장하기엔 너무나 뜬금없을뿐더러 심하게 제 발 저린 어투였다. 주절주절, 늘어놓는 정민의 말을 멀뚱히 듣고만 있던 버들이 응, 단조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해를 하고 있지 않단 건 정말 다행이나 뭐든 별생각 없단 게 뻔히 드러나는 버들의 얼굴 표정이 읽혔다. 정민이 콧잔등을 긁적거렸다.
“할 말 끝?”
“응.”
쫓아내는 것도 귀찮은지 다시 고개를 숙인 버들이 샤프를 움직였다. 어차피 버들이 쫓아내도 뻗댈 생각이었던 정민이 힐긋 버들의 노트를 훔쳐봤다. 자기가 써 놓고도 잘 못 알아볼 정도로 악필인 입장에서 버들의 거침없는 손길은 늘 신기했었다. 뭘 그리는 거지? 사람인 거 같은데. 연예인인가? 아니면 만화 캐릭터?
그사이 헤어스타일이 전부 완성되었다. 명암까지 줘서 꽤 근사하다. 오. 소리는 내지 않고 정민이 입모양으로만 감탄을 내뱉었다. 이어 이목구비를 채울 차례다. 버들의 손목 움직임이 조심스럽다. 신중히 그려 넣은 선 하나에 버들이 확 인상을 썼다. 뭐가 마음에 안 든 건지 지우개로 벅벅 지워 없애 버렸다.
“뭐 그려?”
“너는 몰라도 돼.”
“왜?”
“너는 모르는 사람이니까.”
정민이 눈을 흘겼다.
“나는 몰라도 되고, 나는 모르는 사람이 대체 누군데?”
“우리 형 친구.”
깔끔하게 떨어진 버들의 대답에 곧장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음. 그렇지. 너희 형 친구면 내가 당연히 모르는 사람일 테지? 몰라도 되는 사람이기도 하고. 여상한 중얼거림에 버들이 콧등을 찌푸렸다.
“보지 마.”
형 친구 그림이 뭐라고. 손으로 노트를 가리는 버들의 모습이 새치름하기 짝이 없다. 흥, 정민이 콧방귀를 꼈다. 어차피 궁금하지도 않거든? 투덜거리면서도 꿋꿋하게 자리를 지켰다.
“형 친구를 왜 그려?”
“내 마음이야.”
톡 쏘는 게 얄밉다.
“나도 그려 줘.”
“싫어.”
“왜? 나도 그려 줘.”
“그럴 시간 없어.”
“형 친구 그릴 시간은 그럼 어디서 난 건데?”
노골적으로 째려보는 정민의 시선에도 버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흥. 재차 콧방귀를 뀌며 정민이 아예 그림에서 시선을 거뒀다. 대신 버들의 한쪽 귀와 드러난 목 부근을 빤히 바라봤다. 하얀 피부가 새빨갛다. 다른 계절이라면 인기가 많았을 창가 자리가 한산한 이유는 통유리로 된 인테리어 탓이었다.
“너 안 더워? 안쪽으로 자리 옮겨.”
마침 시계를 확인하고 있던 버들이 이제 곧 가 봐야 한다며 주변에 늘어놓은 노트와 필기구 등을 챙기기 시작했다. 가방 지퍼가 활짝 열려 있어 속이 훤히 내보였다. 뭐가 가득하다. 야무지게 지퍼를 올리는 버들의 손목이 유독 가느다랗게 비쳐진다. 정민이 눈썹 끝을 긁었다.
“책 좀 빼고 다녀. 안 무거워?”
“다 필요한 건데 어떻게 빼고 다녀?”
“그게 다 필요한 거라고?”
“곧 시험인데 너 날짜도 모르지?”
감히 나를 멍청이 취급하다니. 정민과 버들이 서로 못마땅한 눈초리를 나란히 주고받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버들이 가방을 멨다.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순간 휘청거린 몸을 보며 정민이 그냥 지나치지 못하겠는지 쯧, 혀를 찼다.
“이거 더 마실 거야?”
반쯤 남은 음료를 향해 정민이 턱을 까닥이며 묻자 버들이 고개를 흔들었다. 대신 버려 주겠단 정민에게 버들이 괜찮다며 혼자서 깔끔히 주변 정리를 끝냈다. 곧 수업이다. 대충 손을 흔들고 가 버리려던 버들이 아, 뭔가 물어보고 싶은 게 떠올랐는지 다시 정민의 앞에 와서 섰다.
“뭔데?”
갑자기 저를 빤히 바라보는 버들의 맑은 눈에 정민이 순간 당황했다.
“너 남자한테 꽃 선물해 본 적 있어?”
말문이 막힌 정민이 입만 달싹거렸다.
“어? 있어? 없어?”
“……없는데. 그런 건 왜 물어보는 거야?”
“그럼 남자한테 꽃 선물 받으면 어떨 것 같아?”
“음……. 누가 주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내가 주는 거야.”
“…….”
말끝을 흐린 것으로도 모자라 또렷한 대답을 들려주지 않는 정민의 앞에서 버들이 답답해했다. 지금 출발하지 않으면 수업에 늦을 수도 있다. 버들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궁금한 걸 알아내지 못했지만 하는 수 없이 정민을 지나쳐 카페를 빠져나갔다.
한참 동안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던 정민이 바깥을 살폈다. 이미 버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제야 비틀비틀 계단을 올라 자기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뭐야? 화장실 간다고 사라지더니 상태가 구려진 채 돌아온 정민에게 왁자지껄한 관심이 쏟아졌다. 빨간 얼굴로 정민이 의자에 푹 퍼질러졌다.
* * *
버들이 석고에 스케치를 끝냈다. 작은 크기라 작업에 속도가 붙는다. 스케치대로 깎아 내고, 세부 특징을 찾아 자세히 틈을 팠다. 사방으로 석고 가루가 날린다. 작게 기침을 터트리며 버들이 앞치마를 벗었다. 계절이 여름으로 짙어지면서, 정체 모를 풀벌레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창틀에 걸터앉아 풍경을 감상했다. 담배 생각이 났지만 집에서 피울 순 없으니 버들이 인내했다.
버들은 계획했던 작업 양까지 끝내 놓은 뒤 갈아입을 옷을 챙겨 씻을 준비를 했다.
욕실 문을 열자 뜨거운 수증기가 바깥으로 뿜어져 나왔다. 진득하게 목욕을 끝내고 나온 버들이 현기증에 잠시 비틀거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흐물흐물 녹을 거 같다. 침대에 누워 가지런히 모은 손을 배 위에 올렸다.
꽃 선물이 그렇게 이상한가. 남자가 남자에게 꽃 선물하면 안 되는 건가.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엉킨 생각들이 어렵다. 한쪽 다리를 굽히자 가운 사이가 벌어지면서 버들의 동그란 무릎이 드러났다. 가만히 눈을 깜박거리고 있던 버들이 머플러를 꺼내기 위해 옆으로 몸을 굴려 서랍을 열었다. 사소한 뒤척거림에 버들의 허벅지가 훤히 내보여졌다. 피부가 희다.
버들이 머플러를 얼굴 위에 덮었다. 아낀다고 아꼈는데 향수 냄새가 많이 사라졌다.
「보통 관심 있는 사람한테 꽃 선물하지 않아요?」
관심? 아주 많다. 대단할 정도다. 그래서 황 대표와 제 모습들을 하나하나 비교하게 된다. 황 대표의 분위기를 닮고 싶다. 닮는 게 힘들다면 감히 흉내라도 내고 싶다. 흉내 내는 게 어렵다면 갖고 싶다.
향수 냄새를 맡고 있자니 황 대표의 웃는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목소리도 듣고 싶고.
비로소 버들이 제 감정을 완전히 받아들였다. 어쩐지 코끝이 시큰거렸다.
황 대표를 떠올리며 보내는 시간이 부쩍 늘어났다. 시험지를 받아 든 순간에조차 황 대표 생각이 났다. 황 대표님은 공부 잘하셨을까, 궁금해하는 제 모습이 심각한 수준이란 걸 버들은 인정했다. 다행히 시험 문제는 쉬웠다. 가장 먼저 시험지를 제출한 버들이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기지개를 길게 켰다. 마지막 시험까지 잘 본 것 같다. 이게 다 황 대표 덕분이다. 시도 때도 없이 황 대표 생각이 나서 잠도 별로 안 잤다. 그 시간에 책을 보며 공부했고.
“보고 싶어.”
버들의 작은 목소리가 바람에 묻혔다.
* * *
“아. 왜 전화 안 받지?”
유 대표가 핸드폰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가한가 봐?”
“누구? 나?”
제 가슴을 콕 찌르며 되묻는 유 대표에게 황 대표가 인상을 구겼다. 앞에는 영화관 확보 계약서가 두둑하게 쌓여 있었다. 오랫동안 깨알 같은 글씨들을 들여다보고 있던 터라 둘 다 눈이 피로했다.
“버들이 오늘 시험 끝나서 영양 보충시켜 줘야 돼.”
“알아서 먹겠지. 일하는 중이니까 그 핑계로 중간에 빠질 생각 마라.”
“알아서 안 먹으니까 내가 이러지.”
“애냐?”
“보고도 모르겠냐? 내 새끼 아직 애야.”
몇 번을 봐도 다 큰 사내놈이었기에 황 대표가 동의하지 않았다. 제 팔을 잡았던 지저분한 버들의 손이 떠오르면서 급격하게 기분이 불쾌해졌다.
“너 진동 오잖아.”
유 대표가 턱짓으로 황 대표의 핸드폰을 가리켰다. 황 대표가 뒤집어 놨던 제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발신인은 소희였다. 진짜 끈질기다. 무심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종료시켰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짧았던 휴식이 끝났다. 김 실장과 함께 들어온 영화사 관계자들과 회의가 이어졌다.
“맛없어?”
“아니.”
“그럼 팍팍 먹어.”
“노력 중이야.”
사옥 근처의 서점에 들렀다가 우연히 황 대표를 발견했다. 서점에는 황 대표만 있는 줄 알았는데 제 형도 같이 있었다. 당황스러웠다. 진심으로 황 대표밖에 안 보여서 겨울이 아는 척을 해 왔을 때야 제 형이 있단 걸 알아차렸다. 우물쭈물하다가 겨울에게 덥석 붙잡힌 버들이 레스토랑까지 끌려왔다.
“마실 거 더 시켜 줄까?”
충분하다며 버들이 고개를 내저었다.
“뭐가 충분해. 탄산 마셔도 뭐라고 안 할게.”
“그럼…… 그냥, 탄산수.”
“오렌지 주스 마셔.”
“형 마음대로 시킬 거였으면서 뭐 하러 물어봐?”
“오렌지 주스 마실 거야, 사과 주스 마실 거야?”
“……오렌지 주스.”
“거봐.”
득의양양한 채로 겨울이 오렌지 주스를 주문했다. 버들의 포크가 접시 위를 갈팡질팡했다. 데친 브로콜리를 입에 넣자 볼이 볼록 튀어나왔다.
“과일 더 먹을래?”
“내가 알아서 먹을게.”
겨울이 바지런히 버들의 식사에 참견했다.
“시험은 잘 봤어?”
응, 대답한 버들을 기특하단 듯 겨울이 한껏 치켜세웠다. 제 맞은편에 앉아 있는 황 대표를 버들이 조심스레 힐긋거렸다. 손등을 타고 팔뚝으로 이어진 황 대표의 푸르른 힘줄에 금방 볼이 달아올랐다.
“나 잠깐만.”
울리는 전화에 겨울이 양해를 구했다. 급히 서두르는 통에 겨울의 다리가 테이블을 세게 건드렸다. 그 바람에 테이블 귀퉁이에 놓여 있던 황 대표의 차 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걸 목격하고 저만치서 걸어오는 서버보다 버들의 행동이 훨씬 더 빨랐다. 벌떡 일어난 버들이 바닥에 떨어진 황 대표의 차 키를 낚아채듯 주워들었다. 황 대표가 그쪽은 보지도 않고 미간을 구겼다.
“여기요.”
버들이 내민 차 키를 받아들이는 대신 황 대표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원래 열쇠가 있던 자리로 거기에 놓으라는 뜻인가 보다. 순순히 말을 듣고 버들이 제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황 대표님.”
말간 눈빛으로 버들이 황 대표를 바라봤다.
“잘 지내셨어요?”
“…….”
“저 그동안 시험 기간이라, 공부해야 돼서 회사에 못 갔어요.”
“…….”
“며칠 전에 보름달 예쁘게 떴었는데.”
“…….”
“그거 알려 드리려고 메시지 보냈었거든요. 보셨죠?”
“…….”
“드시고 있는 거, 맛있어요?”
“…….”
“저도 나중에 먹어 보려고요. 와인이랑 같이.”
“…….”
“저기, 황 대표님.”
일방적인 침묵이 사나웠지만 버들이 움츠러들지 않았다.
“저는 계속…… 꽃 선물하고 싶어요.”
어이없단 황 대표의 시선이 버들에게 닿았다.
“왜요.”
처음 되돌아온 반응이었다. 그 반응이 부드러운 어투라 버들이 화사하게 웃으며 안도했다.
“강아지 무서워하시죠?”
“…….”
“전에도 말씀드렸었는데, 안 무섭게 제가 매번 강아지 잡아 드릴게요.”
“…….”
“방금처럼 열쇠 떨어지면 첫 번째로 주워 드리고 또…….”
황 대표의 한숨에 버들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러니까, 버들 씨가 왜요.”
침을 삼킨 버들의 목이 올각거렸다. 긴장된다. 버들이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큰 힘이 들어간 터라 손톱이 하얗게 짓눌렸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뭐든지 다 해 드리고 싶고……. 그리고 제가 드릴 수 있는 거면 어떤 거든 황 대표님께 드리고 싶어요.”
황 대표가 코웃음을 쳤다.
“진짜 저한테 관심이라도 있어요?”
“……있다면요?”
“징그럽다니까.”
며칠 전 자신이 품고 있는 황 대표를 향한 감정이 어떤 의미인지 확고히 깨달았다. 촉촉이 일렁거리는 눈빛처럼 버들의 가슴속은 한없이 투명했다. 같은 남자지만 소중해진 사람을 향해 쓸데없는 자존심을 내세우거나, 저울질을 한다거나, 다른 색깔로 덧칠해 회피하지 않았다. 황 대표라면 일절 아까운 것도 없을 거 같다. 수수히 미소 지은 버들이 천천히 심호흡했다. 그리고 기꺼이 제 마음을 남김없이 탈탈 털어 보여주었다.
“좋아해요.”
* * *
귓가 근처에서 뒤집혀 푹 퍼질러 있던 버들의 손가락이 조금씩 꿈틀거렸다. 가물가물한 정신이 서서히 맑아진다. 눈꺼풀 위로 빛이 쪼이고 귀가 뜨였다. 참새가 짹짹 비명 지르는 소리가 소란스럽다. 배꼽까지 말려 올라간 파자마 상의 끝을 버들이 아래로 잡아당겼다. 더듬거리며 베개의 행방을 찾았다. 오늘도 어김없이 침대 아래로 굴러떨어져 있는 베개를 주워 가슴팍에 끌어안고선 버들이 창문이 있는 방향대로 몸을 굴렸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 밖이 훤하다. 아침인 줄 알았는데 대낮이었다. 다른 때와 다르게 몸이 가뿐하다. 제대로 푹 잤다. 아마 황 대표를 알고 난 이후로 처음이었다.
* * *
회의가 뻑뻑하게 휘몰아쳤다. 패잔병 같은 몰골로 직원들이 우르르 빠져나갔다. 난장판이 된 회의실에 두 대표만 남겨졌다. 에어컨과 공기청정기 같은 가전 기기가 작동되는 미세한 소음을 제외하면 대체로 조용했다. 데스크 위 처참히 널브러져 있는 배우들의 사진과 프로필이 곧 휴지 조각으로 갈릴 운명을 앞뒀다. 이런 잔인한 새끼. 유 대표의 삿대질과 욕설, 그 어떤 비난에도 황 대표는 꿈쩍을 하지 않았다.
며칠에 걸쳐 신중하게 골라 놓은 배우들이었다. 하지만 제 작품 속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면서 황 대표가 단칼에 퇴짜를 놓았다. 기껏 회의한 보람도 없이 다시 원점이다. 외모야 작품 때마다 늘 심사숙고했던 부분이었다. 하지만 이번 작품엔 주인공의 전반적인 감정을 내레이션으로 녹일 거라 목소리까지 깐깐하게 점수를 매기고 있는 중이었다.
황 대표가 바라는 배우의 조건들을 읽어 보던 유 대표가 코로 비웃었다. 지랄하네. 가뜩이나 하늘 꼭대기에 눈이 달려 있는 새끼가 작정하고 따질 거 다 따지다 보니 배우 캐스팅에서 좀처럼 속도가 붙지 않고 있다. 외모가 훌륭하면 분위기가 약간 구릴 수도 있는 거고 분위기가 완벽하면 목소리가 좀 깰 수도 있는 거지.
관자놀이를 엄지 끝으로 압박하며 유 대표가 들고 있던 볼펜을 내려놨다. 다리를 꼰 채 비스듬히 몸을 기울여 뭔가를 들여다보고 있는 황 대표를 빤히 응시하기 한참이다.
“얼굴이 좀 까칠해 보인다?”
직전까지 평온했던 황 대표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아. 시비 거는 거?”
“그럼. 할 일도 많고 바빠 죽겠는데 설마 내가 네 걱정하겠냐?”
“신경 꺼. 잠 설쳐서 그런 거니까.”
“너 예민해서 원래 잠 잘 설치잖아.”
순간 속이 날카롭게 긁히면서 부아가 치밀었다. 밤? 잘 새운다. 잠? 잘 설친다. 하지만 다른 날도 아닌 어제 만큼은 얼굴이 까칠해질 정도로 잠을 설쳐야 했던 이유로 타고나길 예민한 성질머리 탓만 하기엔 오류가 있다.
갑작스레 매서워진 황 대표의 눈길에 못마땅하단 듯 유 대표가 혀를 쯧, 찼다.
“남자가 둥글둥글할 줄도 알아야지. 음? 나 봐. 보고 느끼는 점 없어? 내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인기가 많은 이유가 뭐겠어? 잘생기고 돈 많은 거? 인정. 하지만 결정적인 필살기란 게 있지. 그중의 하나가 바로 포옹력이란 거야. 어떻게 생각해, 황 대표?”
훈계를 가장한 자기 자랑을 혼자서 묻고 답하며 잘도 입을 털고 있는 유 대표를 황 대표가 외면했다. 천 냥 빚을 지고 당당히 말로 갚을 놈이 분명하다.
“왜 무시해?”
유 대표가 곧장 황 대표에게 감사납게 따졌다.
「저는 계속…… 꽃 선물하고 싶어요.」
유 대표의 말마따나 충분한 포옹력을 발휘했다고 본다.
「좋아해요.」
잠을 설쳤던 이유로 유 대표에게 연대 책임을 씌우고 화를 내도 타당한 것인지 헷갈린다.
「대표님.」
「…….」
「……있잖아요.」
「…….」
「황 대표님.」
맑은 눈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모범생이라더니. 유 대표가 헛소리한 거였네.」
냉랭한 황 대표의 태도에 달싹거리던 버들의 입술이 일순 잠잠해졌다. 도로 주워 담을 능력도 없으면서 괜한 말을 지껄여 댄 것에 신경질이 났다. 아무나 다 반갑다며 꼬리 치는 개새끼처럼 어느 순간 자신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기 시작한 버들의 눈빛이 찝찝하고 거슬렸다.
「더 나가면 사고 치는 거니까 얌전히 있어요.」
「……제가 대표님 좋아하면 사고 치는 거예요?」
「유 대표한테 사고 치는 거지.」
「저 막 장난치고 하는 성격 아니에요…….」
「그럼 유 대표가 알아도 돼요? 버들 씨, 남자 좋아하는 거?」
조막만 한 머리가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통화를 하러 나갔던 유 대표가 자리에 돌아왔고, 껄끄러운 식사가 마저 이어졌다. 차가 나오기 기다리는데 팔 쪽의 옷이 살짝 잡아당겨졌다. 내려다본 버들의 얼굴이 침착했다.
「……좋아해요.」
다시 떠올린 그 상황에 황 대표가 헛웃음을 켰다. 상황 자체만 떼어 놓고 보면 익숙했다. 하룻밤 상대들에게 사랑한단 말을 듣는 것도, 또 사랑한단 말을 하는 것도 인색하지 않으니까.
같은 거 달린 사내새끼한테 좋아한단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었던 건 엄연히 친구의 동생이기 때문이었다. 나름 최선을 다해 차린 예의였다. 전혀 연관 없는 관계였다면 소름이 돋자마자 바로 쌍욕부터 튀어 나갔을 거다.
* * *
교수님 목소리보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잡담에 버들의 집중이 모아졌다. 학교 근처에 작업실을 마련했는데 차 끊기면 와서 자고 가도 좋단다. 나도 작업실이 있다면 어떨까?
……야한 생각이 났다. 귓불이 빨개진 채 버들이 가방을 열었다. 사옥 근처 서점에 들려 구매한 책은 서울 관광에 관련된 잡지였다. 사계절 특성에 맞춰 둘러볼 곳이 참 많다. 꽂히는 부분을 골라 형광펜으로 꼼꼼히 표시해 뒀다. 가는 곳만 가고, 먹는 것만 먹는다는 황 대표님과 함께 좋은 곳도 많이 찾아다니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으러 다니고 싶다. 생각만으로도 행복해지는 그런 날이 꼭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