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우연한 것에서 비롯된 (1)
호텔 룸의 문이 닫히자마자 여자가 남자의 목을 껴안았다. 가느스름히 뜬 눈으로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남자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혀끼리 질척하게 엉킨 소리가 고요함을 흔들었다. 성급히 정장 재킷을 벗기려는 여자의 손을 진정시키며 침대까지 안내하는 남자의 태도가 익숙했다.
뾰족한 구두 한쪽이 벗겨져 비틀거리는 여자의 등을 넘어지지 않도록 남자가 단단히 붙잡았다. 다리 사이가 은밀하게 얽혀 들었다. 그러면서 키스는 중단되지 않았고 오히려 더 깊어졌다. 커다란 창문은 하나의 프레임이 되어 화려한 야경을 작품처럼 담아냈다. 흐릿하게 그려진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하나로 포개졌다. 못 참겠는지 또다시 서두르는 기세로 옷을 벗기려는 여자를 남자가 이번엔 고개까지 떼 저지시켰다. 정돈되지 않은 상황은 불쾌하기만 했다.
“제대로 해.”
“…….”
“급할 이유 있어?”
진한 키스로 여자의 호흡은 흐트러져 있었으나 그런 여자를 지그시 내려다보는 남자는 평이하기만 했다. 살짝 번진 립스틱 자국을 엄지로 문질러 닦아 주며 남자가 여자에게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옅게 웃음 띤 남자의 얼굴이 수려했다. 여자의 눈빛이 몽롱하게 바뀌었다. 욕실이 있는 방향을 친절하게 가르쳐 준 남자의 손가락을 따라 여자의 고개가 돌아가면서 풍성하게 웨이브 진 머리와 귀걸이가 함께 물결쳤다.
도도한 성정의 여자였다. 명문 집안의 외동딸이란 걸 겸손 떨며 감추기보단 똑똑하게 자기 커리어로 활용해 데뷔하자마자 신인 시절 없이 주연 자리만 꿰찬, 잘나가는 배우가 직업이기도 했다. 여자는 뒤늦게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남자의 말처럼 급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벗겨진 구두까지 마저 신고선 완벽한 모습으로 여자가 욕실로 사라졌고, 곧 샤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닥에 떨어진 제 차 키를 줍기 위해 남자가 허리를 굽혔다. 얇은 셔츠 바깥으로 올곧게 짜인 등 근육의 움직임이 내비쳤다.
* * *
술자리가 거했다. 핸드폰을 확인하니 여배우와 사라진 제 친구에게서 아직까지 들어온 연락이 없었다. 줄기차게 욕이 내뱉어졌다. 비서가 뒷좌석 문을 열자 순간 졸음이 잊힐 만큼 차가운 공기가 한꺼번에 밀려들어 왔다. 비틀거리며 차에서 내린 겨울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가만히 서 있기도 힘든 숙취 탓인지 본가의 정원이 오늘따라 유독 광활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현관에 다다를수록 겨울의 걸음걸이가 살금살금 바뀌었다. 비밀번호 풀리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려와 잠시 굳어 있었다. 빠끔히 고개를 빼 2층을 중점으로 유심히 살폈다. 다들 자고 있을 시간답게 집안은 어디든 적막했다. 다행이었으나 아직 안심하기는 일렀다. 이제 됐다, 하며 섣부르게 마음을 놓았다가 큰코다쳤던 경험이 여럿 떠올랐다. 불과 며칠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뭐든지 마무리가 중요한 법이라고 배웠다. 처음엔 주입식으로 받아들였는데 나이를 먹어 갈수록 전적으로 동의하게 됐다. 배운 걸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 겨울이 큰 덩치를 구깃구깃 구겼다. 그딴 좀팽이 같은 꼴로 심혈을 기울인 일이란 외박한 걸 들키지 않고자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끔 현관문을 닫는 거였다. 콧잔등에 삐질 땀까지 맺혔다.
……겨우 성공했네.
완벽한 마무리에 안도하며 뒤를 돈 순간 겨울은 제자리에서 펄쩍 뛸 수밖에 없었다.
“아. 깜짝이야!”
팔짱을 낀 채 등 뒤에 누군가 서 있었다.
“버들아.”
막내였다. 아무런 인기척도 없이 대체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르겠다.
“형 때문에 깬 거 아니지?”
형제가 총 여섯이었다. 그중 서열 꼭대기를 버젓이 차지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버들이었다. 스무 살 가까이 나이 차가 나는 큰 형님까지도 버들의 눈치를 봤고 심지어 강고한 성격으로 정평이 난 대기업 회장님인 아버지 역시 장 여사 다음으로 유일하게 약해지는 인물이 바로 버들이었으니, 서열이 바닥에 깔린 것으로 모자라 현재 하지 말란 짓까지 저지른 겨울은 막내 앞에서 바짝 쪼그라들 수밖에 없었다.
“언제 일어났어?”
쌀쌀맞게 흘겨보는 버들에게 겨울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형. 지금 들어오는 거야?”
잠시 머물렀던 뉴욕에서 버들이 무사히 귀국한 게 작년이었다. 다른 형제들에 비해 유독 더 방탕하게 살아온 겨울은 그때부터 독 안에 든 쥐 신세로 전락했다. 연락 없이 자정을 넘겨 귀가하는 게 금지됐고, 납득할 만한 사정이 아닌 이상 외박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게 됐다. 본래 타고난 성격과 전혀 맞지 않는 바른 생활을 그것도 나이 서른에 하고 있자니 기가 찼다. 그렇지만 막내를 독차지해 살고 있는 이상 감안해야지 별수 없다.
겨울이 바삐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오늘의 외박 사유는 과연 납득할 만한 사정으로 볼 수 있을까. 잠시 뒤 결론에 도달한 겨울의 가슴이 당당하게 펴졌다. 비즈니스 관계자들과 가졌던 술자리였으니 외박 사유로 마땅했다.
“지금 들어오는 거 맞지?”
“보면 몰라? 지금 막 출근하려던 참이었어.”
당당하게 펴졌던 겨울의 가슴은 버들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곧장 쪼그라들었다.
“거짓말.”
“진짜야. 지금 출근하는 거 맞아.”
“이렇게나 일찍?”
“형도 나름 사장님인데 일찍 출근하는 날도 있어야지.”
벗었던 구두에 발을 꿰며 겨울이 버들의 시선을 회피했다. 형 다섯 명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버들의 무기는 아마 또랑또랑하게 큰 눈일지도 모르겠다. 눈동자가 꼭 머루처럼 새까맸다. 거기다 맑고 곱기까지 하니 불량하게 살았던 저들 삶이 그대로 투영되는 것 같아 본인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겨울의 팔을 버들이 덥석 붙잡았다.
“불어 봐.”
“뭘.”
음주 측정을 하겠단 버들에게 겨울이 말귀를 못 알아들은 척 시침을 뗐다. 그럼 뭐 하나. 술 냄새가 그득하게 담긴 호흡을 버들에게 쏟지 않으려 한껏 고개를 치켜든 폼이 도둑이 제 발 저린 격이었다.
“빨리 불어.”
추궁하는 버들에게 결국 겨울이 살살 숨을 내쉬었다.
“무슨 술을 이렇게나 많이 마셨어?”
버들이 질색했다. 술 냄새가 아주 고약했다.
“일 때문에.”
“술 마시는 게 일이야?”
“일 때문에 술 마시는 게 필요했어.”
“말이나 못 하면.”
“야 인마. 형은 뭐 마시고 싶어서 마셨겠어?”
비굴하게 굴어 봤자 어차피 통하지 않으니 겨울이 원래대로 뻔뻔해졌다.
“너 용돈도 주고 먹여 살리려면 어쩔 수가 없었어.”
“나 때문에 마셨다고?”
이제야 말이 통한단 듯 겨울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냥 형이 좋아서 마신 거잖아.”
“…….”
“일한 게 아니라 여태 신나게 놀고 온 거지?”
“…….”
“안 봐도 뻔해.”
“…….”
“아무튼 빨리 들어와.”
오늘은 진짜 쫓겨나는구나 싶었는데 이게 웬 떡이지? 희희낙락하며 집 안으로 들어온 겨울이 제 슬리퍼 짝을 찾아 주고 있는 버들을 와락 껴안았다. 아이고. 내 새끼. 그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태어나자마자 여러 이유들로 온 가족의 걱정을 절로 샀기에 더 애틋할 수밖에 없는 막내였다.
“저리 가.”
술 냄새에 질식하게 생긴 버들이 버둥거리며 겨울의 품에서 벗어났다.
“속은 어때.”
“아프지.”
한심하단 듯 혀를 차면서도 버들이 제 형을 데리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여태 공부했어?”
“응.”
“잠은?”
“좀 자다가.”
식탁 위에 여러 권 펼쳐진 버들의 책을 둘러보는 겨울의 눈초리가 못마땅했다.
“잘 시간에는 좀 자.”
“아예 안 잔 것도 아닌데 뭐. 앉아.”
남들 다 잘 시간에 혼자 일어나 책 따위를 들여다보고 있으니까 키가 크다가 말았지. 176cm인 버들의 키가 객관적으로 작다고 평할 순 없으나 저를 비롯해 다른 형제들은 거뜬하게 185cm를 넘겼다 보니 한탄이 나왔다.
“아. 더 저어 줘.”
“다 저은 거야. 안에 꿀 다 녹았어.”
마시기 알맞은 온도로 타 온 꿀물을 건네주는 버들에게 겨울이 고마운 줄 모르고 귀찮게 굴었다. 겨울의 투정에 하는 수 없이 버들이 도로 티스푼을 꺼내 왔다. 그러곤 일부러 겨울의 눈앞에 대고 꿀물을 몇 번 더 휘저었다. 유리로 된 컵과 쇠로 된 티스푼이 부딪히는 소리가 쓸데없이 청량했다.
“됐지?”
“응.”
겨울이 꿀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더 타 줄까?”
“응.”
컵을 받아 가려 다가온 버들을 겨울이 다시 와락 껴안았다.
“내 새끼. 진짜 장가는 어떻게 보내지?”
제 막냇동생을 바라보는 겨울의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
“아주 아까워 죽겠네.”
“그게 무슨 뜻이야?”
“장가가지 말고 형이랑 평생 살래? 잘해 줄게.”
곰곰이 생각해 보던 버들이 인상을 썼다.
“아. 싫어.”
“그럼 형 두고 장가가겠다고?”
탁. 방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어슴푸레 남아 있던 새벽빛이 밝아 아침이 올 때였다. 카디건을 추스르며 주방으로 들어선 장 여사가 소중하고 또 귀한 막내아들을 괴롭히는 넷째 아들의 등짝을 사정없이 퍽퍽 내려쳤다.
유 회장과 장 여사는 연애결혼을 했다. 각각 외롭게 외동으로 자라 다복한 가정을 이루는 게 두 사람의 공통된 소망이었다. 이름도 미리 지어 놓으며 행복한 신혼에 젖어 들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소망처럼 집안은 북적였다. 첫째, 둘째, 셋째, 넷째…… 다섯째. 계획에 없었던 다섯째마저 소중하게 보듬으며 하늘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다. 봄 하늘, 여름 하늘, 가을 하늘, 겨울 하늘. 장 여사의 감성이 그대로 녹아들었다. 흠이 있다면 감성적인 이름과 상반되게 죄다 사내놈들이란 점이었다.
우람한 체격의 유 회장을 닮아 발육도 또래 애들보다 뛰어나고, 에너지까지 넘치다 보니 다섯 형제 때문에 안팎으로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겁이 없는 게 제일 문제였다. 높은 곳까지 기어올라 슈퍼맨이 되어 펄쩍펄쩍 뛰어내리다가 병원 신세를 번갈아 가며 지고, 자기들끼리 정한 무슨 의식인 것처럼 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줄줄이 유리창을 깨 먹었다. 생김새는 물론 단체로 유 회장의 리더십 있는 성격까지 빼다 박아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에는 늘 형제들이 앞장서 있었다. 유 회장과 장 여사는 손 꼭 붙잡고 학교로 상담하러 가는 게 한동안의 일상이었다.
그러던 중 여섯째가 들어섰다. 본인이 임신했단 걸 장 여사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얼떨떨했다.
자기들이 사내새끼란 걸 과시하듯 다섯 형제들은 배 속에서부터 참 유별났더랬다. 입덧도 심했고, 뻥뻥 발길질을 해 대는 통에 쉬이 잠을 잘 수 있는 날이 드물었다. 허리가 끊어질 것처럼 배가 부풀어 고생스러웠다.
하지만 여섯째는 달랐다. 임신이란 것도 병원에 정기 검진을 하러 가서 우연히 알게 됐을 정도니 말 다 했다. 14주째였다. 입덧 기간을 잠잠히 지나친 것이 참으로 놀라웠다. 배 모양도 앞으로만 볼록 나와 있었을 뿐이었다. 그대로 집에 돌아온 장 여사는 생각에 잠겼다. 그냥 지나쳤던 꿈 하나가 그때서야 몹시 심상치 않았단 걸 깨달았다. 꿈속에서 자신은 유 회장과 나란히 화원을 걷고 있었는데, 이때 유독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꽃이…… 복숭아꽃이었다.
세상에! 딸이구나, 싶었다. 새 식구의 소식은 경사였다. 딸이라니! 여동생이라니!
「축하드립니다. 아들입니다.」
태몽에는 복숭아꽃만 있었던 게 아니라 푸릇한 버드나무도 같이 우거져 있었다.
하루 빨리 만나고 싶어서 그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던 탓일까. 버들이란 이름으로 막내는 예정일보다 이르게 태어났다. 미숙아에 심장까지 약했다. 가족들을 조마조마하게 만들었던 버들은 인큐베이터에서 나와 퇴원이 가능한 시점부터 무탈하게 살이 오르기 시작했다. 보드레한 버들의 두 뺨에 생기가 감돌았다.
원래 애들은 싸우면서 큰다고 저들끼리 서슴없이 치고받던 다섯 형제들도 버들을 대할 땐 달랐다. 서로 경쟁하며 소중히 업어 키웠다. 버들은 싫다는데 뽀뽀하고, 껴안고, 스킨십이 과할 정도였다. 화목한 가정에서 사랑 듬뿍 받아 가며 버들은 모나지 않게 자라났다.
순서대로 첫째와 둘째가 결혼을 하면서 분가를 했다. 중학교를 졸업할 시기에 버들은 둘째 형이 있는 뉴욕으로 넘어갔다. 유학이라고는 하나 공부보다 더 중요하게 신경 써야 할 게 있었다.
뉴욕 생활은 3년간 이어졌다. 귀국하고 나니 때마침 입시였다.
기업을 이어야 하는 후계자로서 경영 수업이 불가피했던 다른 형제들과 달리 버들은 그런 여건을 신경 써야 할 필요가 조금도 없었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그걸 하면 됐다. 적성에 맞는 게 무얼까. 다섯 형들이 전부 활동적으로 뛰어다니고 있을 때 버들은 홀로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얌전히 놀며 시간을 보냈다. 그때 해가 지는 것도 모를 정도로 푹 빠져들었던 게 조각이었다. 돌이나 나무, 흙을 만지고 깎는 게 즐거웠다. 적성에도 잘 맞고 재능도 타고났지만 이론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 그걸 배우고자 버들은 1년 전, 조소과에 입학했다.
오늘은 오전에만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어디야. 수업 끝났어?
“응. 지금 집이야.”
겨울의 전화를 받으며 버들이 이제 막 제 방에 들어섰다.
-고생했네. 추웠지?
“차 타는데 뭐 얼마나 춥겠어.”
찬 공기에 그새 버들의 코끝이 새빨개져 있었다.
“왜 전화했는데?”
-심부름 하나 부탁해도 돼?
“또 뭐 깜박했어?”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닌 만큼 버들이 태연히 겨울의 서재로 걸음을 옮겨 갔다. 복잡한 데스크 주변을 쭉 둘러보니 어떤 심부름을 시킬지 충분히 예상이 갔다. 버들이 빨간색 외장하드를 움켜쥐었다.
-형 책상에 외장하드 있을 거야.
“빨간색? 그거 말하는 거지?”
-어. 그거.
그럼 그렇지.
-급해서. 형 회사에 지금 가져다줄 수 있어?
“알았어. 또 뭐 필요한 건 없어?”
-응. 그것만.
전화를 끊으려는데 호들갑 떠는 겨울의 목소리가 핸드폰을 타고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급한 용건인가 싶어 덩달아 급해진 버들이 왜 그러냐고 물었다.
-아직 추우니까 목도리 꼭 하고. 장갑도 끼고.
“……그런 건 내가 알아서 할게.”
-외투도 가장 두꺼운 걸로 골라 꺼내 입어.
“아. 알았다니까.”
또 뭐라고 겨울이 간섭할세라 버들이 전화를 뚝 끊어 버렸다. 성인이 되었어도 형들은 아직도 저를 애로 보는 거 같아 요즘엔 그게 가장 큰 불만이었다. 버들의 얼굴이 칭칭 휘두른 목도리에 반이나 가려졌다. 코트를 아직 벗기 전이라 번거로움이 줄었다. 가방을 챙겨 1층으로 내려오자 가사도우미와 운전기사가 동시에 아는 척을 해 왔다. 점심 식사는 어떻게 하실 건지. 어디 가시는 길인지.
“점심은 생각 없어서 괜찮아요. 잠깐 나가는 거라 저 혼자 다녀올게요.”
웃으며 대답 후 버들이 밖으로 나갔다.
꽃샘추위답게 바람이 매섭게 불었다. 3월 초에 펑펑 쏟아진 눈이 미처 녹지 않아 길이 미끄러웠다. 한 발, 한 발 넘어지지 않게 조심히 걸으며 버들이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길 따라 하얗게 피어난 목련이 눈에 띄었다. 곧 개나리와 벚꽃들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산한 도로에서 오래 기다렸다가 잡은 택시 안의 공기가 히터 때문에 텁텁했다. 답답해진 버들이 코가 나오게끔 목도리를 잡아당겼다. 김이 서려 창문 밖이 잘 보이지 않았다. 겨울의 회사는 경사가 완만한 언덕 위에 있었다. 옆으로 다른 차는 잘만 지나가고 있는데, 눈 때문에 길이 미끄러워 거기까진 못 올라간다는 기사의 걸걸한 불만에 버들이 순순히 택시에서 내렸다. 택시는 바로 다음 손님을 태우고 쌩하니 사라졌다.
이어폰을 뺀 버들이 장갑을 찾았다. 집을 나오기 전 분명 챙겼던 것 같은데 이상했다. 장갑을 늘 넣어 두는 가방 앞쪽이 텅 비어 있었다. 추위에 약한 체질이라 버들의 손끝 주변이 벌겋게 변했다. 따끔따끔했다. 감각이 더 둔해지기 전에 버들이 재차 손가락을 말았다가 폈다.
“금방 도착한다니까.”
짜증 섞인 목소리에 버들이 고개를 들었다. 통화를 하며 앞서 걷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가로로 곧게 뻗은 어깨가 넓었다.
“10분. 응.”
가는 방향이 같았다. 그때였다. 남자의 코트 주머니에 아슬아슬 꽂혀 있던 머플러가 나풀거리며 떨어졌다. 남자의 어깨를 타고 내려간 버들의 시선이 머플러로 향했다. 그걸 눈치채지 못했는지 전화를 끊은 남자의 걸음에는 전혀 지체가 없었다. 몇 발자국 더 걸어가자 버들의 발끝 아래 머플러가 닿았다.
“저기요.”
저를 부르는 소리에 걸음을 멈춘 정우가 뒤돌았다. 귀찮아서 무시하고 싶었지만 제 성격이 어떤지 모르는 사람들은 몸에 손을 대면서까지 아는 척을 하려는 경우가 있어 방어 차원으로 굳어진 반응이었다.
“이거 떨어뜨리셨어요.”
희뿌옇게 입김이 퍼졌다.
“받으세요.”
버들이 주워 든 머플러를 내밀었다.
“그쪽 거 맞죠?”
“아닙니다.”
단호하게 부정한 뒤 정우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당황한 버들의 눈이 빠르게 깜박였다. 분명 주머니에서 머플러가 떨어지는 걸 직접 봤다. 더 멀어지기 전에 버들이 서둘러 정우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거 그쪽 거 맞아요.”
오르막길 위쪽에 서 있는데도 남자를 올려다보기 위해 버들의 턱이 살짝 들렸다. 저에겐 익숙한 시선 처리였다. 제 형들만큼이나 남자가 컸다.
“받으세요.”
정우가 인상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거 버려 줄래요?”
“……버려요?”
혹시 잘못 들었나 싶을 만큼 남자의 음성이 무척 차분해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둘 사이로 바람이 지나갔다. 숱 많은 버들의 곱슬머리가 바람이 부는 방향대로 사정없이 휘날렸다. 가만히 서 있는 버들에게 안 보이냐는 식으로 정우가 턱을 까닥였다.
“더러워졌잖아요. 그죠?”
그러니 더 귀찮게 굴지 말란 뜻이었다.
“아! 혹시 이거 묻은 거 때문에 그래요?”
저를 비켜 가려는 정우를 따라 버들도 왼쪽으로 움직였다.
“이거 빨면 없어질 텐데…….”
혼잣말처럼 버들이 중얼거렸다. 눈에 젖은 흙이 묻은 머플러 끝자락이 조금 지저분했다. 고작 이것 때문에 버리기엔 머플러 상태가 좋아서 아까웠다. 또 일기예보에선 한동안 머플러가 필요할 만큼 낮은 기온이 계속될 거라고 그랬다.
“제가 털어 드릴게요.”
머플러에 묻은 흙을 열심히 털어 내고 있는 버들의 손끝이 꾀죄죄했다. 정우의 인상이 짙어졌다. 오늘따라 여러모로 짜증 나는 일만 생겼다.
겨울이 운영하는 회사 사옥은 한옥으로서 그 일대에선 단연 눈에 띄었다. 전래 동화 속에서 나올 법한 표현대로 고래만 한 집채에 대문까지 으리으리했다. 그새 가빠진 숨을 정리한 뒤 버들이 카드키를 가져다 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제 본가만큼이나 널찍한 정원이 펼쳐졌다. 하늘을 배경 삼은 기와가 고급스러운 풍경을 자아냈다. 처마 아래에 다양한 크기로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고드름에선 쉴 새 없이 물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건물 뒤쪽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오자 버들의 눈이 커졌다. 이윽고 황금빛 털을 휘날리며 강아지 두 마리가 앞다퉈 뛰어왔다. 격하게 흔들리는 꼬리가 금방 떨어져 나가게 생겼다. 두 다리를 들고 껑충껑충 뛰면서 반가움을 표현하는 강아지들은 못 보던 사이 더 자란 것 같았다. 버들의 얼굴이 해사해졌다.
“잘 있었어?”
강아지 두 마리의 머리를 버들이 번갈아 가며 쓰다듬었다.
“옷 누가 사 줬어?”
춥지 말라며 강아지에게 입혀 놓은 털 조끼가 그렇게 앙증맞을 수가 없다. 워낙 활발하게 움직이는 탓인지 조끼에 매달린 모자가 살짝 삐뚤어져 있었다. 그걸 버들이 차례로 단정히 만져 주었다.
“오셨습니까.”
“강아지 옷 너무 귀여워요.”
강아지들의 주인은 비서였다. 반려동물을 키워도 되는 아파트에 살고 있기는 하나 대형견으로 자라날 강아지들을 위해 전원주택 쪽으로 이사를 계획 중이라고 그랬다. 사옥의 정원이 넓으니 이사 전까지 강아지들을 잠시 기를 수 있도록 편의를 봐주기로 한 걸로 아는데 그게 벌써 3개월 전이었나? 아무튼. 그 기간이 길어질수록 버들은 환영이었다.
비서와 인사를 나눈 버들은 겨울이 있는 대표실로 향했다.
“형. 나 잠깐만.”
저가 왔단 걸 겨울에게 알린 뒤 버들이 찾은 곳은 화장실이었다. 꽁꽁 얼어붙었던 손에 뜨거운 물이 닿자 전기가 퍼지듯 저릿했다. 페이퍼로 물기를 제거한 뒤 가방을 열었다. 짐이 하나 늘었다. 진회색의 머플러. 그걸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버들의 속눈썹이 길었다.
유 회장은 물론 위로 다섯이나 있는 제 형들까지 외모가 잘난 편이라 웬만한 연예인을 보고도 별생각이 안 드는 게 사실이었다. 그러니 생소했다. 머플러 주인을 보고 잘생겼단 감탄이 제일 먼저 들었으니까. 그것도 무의식중에.
“지워지려나.”
흐르는 물에 버들이 머플러를 가져갔다. 아까 질척한 흙이 묻은 자국을 털어 보려고 노력했지만 왜인지 그럴수록 더러운 자국은 큰 범위로 번져 버렸다. 얼마나 난감했었는지 모른다. 저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시선이 무던히도 차가웠다. 침묵이 지속되는 중 어쩐지 사과를 해야 할 것 같아 막 입을 열었을 때였다. 남자가 웃었다. 냉혈한 인상이 바뀌는 건 삽시간이었다. 거기에 홀려 저도 모르게 남자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봤다. 나지막한 음성으로 남자는 쓰레기통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 줬다. 친절하고 상냥했다.
……아. 친절하고 상냥했던 게 맞긴 한 건가? 애매했다.
건조기의 뜨거운 바람에 머플러를 바싹 말린 뒤 상태를 꼼꼼하게 확인했다. 지저분한 자국은 처음에 비해 많이 흐려지긴 했으나 완벽히 지워지지 않았다. 버들이 콧잔등을 찌푸렸다. 어차피 머플러가 깨끗해져도 남자가 그렇게 가 버려 원래의 주인에겐 돌려주지 못하겠지만 이게 뭐라고 속상했다. 머플러를 차곡차곡 개켜 가방에 집어넣었다. 아무래도 집에 가서 세제를 이용해 차분히 닦아 봐야겠다.
대표실로 들어온 버들을 보며 겨울이 빙글댔다.
“내 새끼.”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왜?”
“부르지 말라면 부르지 마.”
“내 새끼를 내 새끼로 부르지 못하고.”
“나 집에 가 버린다.”
협박을 하면서도 버들은 고급스러워 보이는 가죽 소파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코트도 벗어 걸었다.
“고마워서 어쩌지?”
버들은 집에서 잘 챙겨 가지고 온 외장하드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새삼.”
“아니야. 진짜 고마워서 그래. 이거 진짜 소중한 거라.”
“소중한 거면 잘 챙겨서 다녀.”
새파랗게 젊어 가지고. 꿍얼꿍얼 제 건망증을 걱정하는 버들을 보며 겨울이 코로 웃었다. 사실 외장하드에 들어 있는 서류들은 전부 별거 아닌 것들이었고, 중요한 거라고 해도 비서를 시켰으면 됐다. 그런데도 굳이 점심때에 맞춰 주기적으로 버들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이유는 맛있는 걸 사 먹이고 싶어서.
결혼한 첫째와 둘째, 학위 때문에 외국에 나가 있는 셋째, 현재 군 복무 중인 다섯째. 다섯 형제들 중에서 버들에 대한 애정도가 유독 극성맞은 게 겨울이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식새끼’란 말을 총각의 입장에서 충분히 공감하고 있을 정도이니 거의 중증이었다.
“코트 저게 제일 두꺼운 거야?”
버들의 옆자리로 이동해 앉으며 겨울은 점심 식사 후 잠깐 비는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지 멋대로 정해 통보했다.
“너 옷 사러 가야겠다.”
“일주일 전에도 옷 샀잖아.”
“그래. 그건 일주일 전에 산 옷이고.”
“집에 옷 넘쳐 나거든?”
“형한테 자꾸 말대꾸할 거야?”
노크 후 비서가 버들을 위한 차를 내왔다. 중국에서 공수해 온 화차였다. 티 포트에 커다란 꽃봉오리가 폈다.
“옷 많은데 왜 자꾸 사려고 해.”
“야, 인마.”
“왜.”
“형이 뭐 아무 남자한테나 옷 사 줄 사람처럼 보여?”
그래 보였다.
“너니까 옷도 사 주는 거지.”
“두꺼운 코트를 왜 사? 곧 봄이거든?”
“그럼 봄옷 사러 가자.”
“아, 진짜.”
버들은 웃는 겨울이 얄미워 째려보다가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소리에 핸드폰을 꺼냈다. 과 동기들과 몇몇 후배, 선배들이 끼어 있는 채팅 그룹이 있는데 이름을 봐도 누가 누군지 잘 모르겠다. 저녁 몇 시쯤 어디서 놀고 있을 거니 올 수 있는 사람들은 오란 내용이 공지로 띄워졌다. 다들 친한 건지 주고받는 메시지만으로 왁자지껄했다. 전공이 같다 보니 어쩌다 그룹 채팅에 초대를 받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여태 채팅은 물론 모임에도 단 한 번 참여해 본 적이 없었다.
어깨를 슬쩍 기울인 겨울이 버들의 핸드폰 화면을 엿보았다.
“아!”
다짜고짜 볼을 꼬집힌 버들이 들고 있던 핸드폰을 놓쳐 버렸다.
“까져 가지고.”
“놔!”
“밤늦게 어딜 놀러 가겠단 거야?”
누가 놀러 가겠다고 했다는 거야? 억울했다.
“놀러 갈 거면 형이랑 같이 가.”
“형이 거길 왜 가?”
“너만 보내기 불안하니까 그러지.”
“놀러 간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지금 내 핸드폰 몰래 훔쳐본 거지!”
“훔쳐보다니. 보이니까 본 거지.”
양심 없는 겨울이 남은 버들의 한쪽 볼마저 꼬집었다. 말랑말랑했다.
“유버들.”
“왜.”
“너 형한테 이게 무슨 짓이야.”
버들이 참지 않고 겨울의 귀를 덥석 움켜잡은 터였다.
“좋은 말 할 때 놔라.”
“형부터 놔.”
서른 살, 스물한 살의 기 싸움이 환장하게 유치했다. 팽팽히 대립해 봤자 어차피 결과가 뻔히 정해진 싸움이었다.
……아. 버들의 엄살에 놀란 겨울이 먼저 떨어져 나갔다. 그때만 노리고 있던 버들이 겨울의 귀를 쭉쭉 잡아당기며 응징했다. 추운데 기껏 심부름까지 해 줬더니!
간신히 버들의 손아귀에서 겨울이 벗어났다. 어찌나 세게 힘을 줬는지 귀에 뜨거움이 몰려들었다. 가차 없는 새끼 같으니라고. 불만에 퉁퉁거리면서도 제 막냇동생을 향한 겨울의 눈빛이 마냥 유했다.
“몇 시까지 놀 거야?”
버들이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나도 몰라.”
“놀러 안 나갈 거야?”
“응.”
“왜. 형이랑 가자. 계산만 하고 형은 빠질게.”
고개를 내젓는 버들의 옆구리를 겨울이 쿡쿡 찔렀다.
“왜 자꾸 찔러.”
“왜 자꾸 찌르겠냐.”
뾰족한 버들의 반응이 귀여워서 자꾸 건들게 됐다. 나 좀 내버려 두라며 갑자기 입을 다문 버들을 겨울이 간질이기 시작했다. 피하려 발버둥 치다 보니 점점 뒤로 밀려나게 된 버들이 어느덧 소파에 완전히 눕고야 말았다. 구겨졌던 버들의 눈가가 휙 휘어졌다. 억지로 간질여도 간지러운 건 간지러운 거였다. 생리적인 웃음을 참지 못하고 버들이 터트렸다. 그때였다. 노크도 없이 대표실 문이 벌컥 열렸다.
심기가 불편하단 게 여과 없이 드러난 표정으로 서 있는 정우와 겨울의 눈이 부딪쳤다. 그대로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린 황 대표를 겨울이 크게 불렀다. 한숨을 내쉬며 황 대표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겨울은 구겨진 제 막냇동생 옷을 펴 주느라 여념이 없었다.
“끈적끈적하게 뭐야. 회사로 여자 불러도 돼?”
대놓고 쏘아붙인 황 대표의 말이 너무 터무니가 없어 겨울이 콧방귀를 꼈다.
“왜. 그러면 안 되냐? 넌 출근도 늦게 해 놓고.”
“안 되기로 서로 못 박았지 않았냐?”
“부르기만 했어. 누가 뭘 해?”
“귀 빨렸네. 빨간 거 보니.”
버들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여자라고 오해받은 적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그럴 때마다 시무룩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버들이 일부러 고개를 빳빳하게 세웠다. 이러면 내 목젖이 보이겠지?
“버들아, 인사해라. 여기는 다른 대표 형.”
다른 대표 형? 버들이 그제야 황 대표를 향해 시선을 들었다. 아!
“그리고 이쪽은 우리 집 막내.”
황 대표 역시 버들을 보고 미세하나 분명 놀란 기색을 비쳤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태연한 얼굴로 돌아간 황 대표는 버들을 본체만체하며 곧장 공기 청정기로 향했다. 전원을 누르는 손길에서 신경질이 다분했다.
“정말 근처에 있었나 봐?”
“전화로 출근하는 중이라고 그랬잖아.”
편하게 대화를 주고받고 있는 두 사람의 관계는 동갑내기 친구이기도 했고, 함께 회사를 운영하는 공동 대표이기도 했다. 그걸 알게 된 버들의 큼지막한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두 번 다시 못 만날 줄 알았던 머플러 주인을 형 친구로 소개받게 되다니 전혀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가방에 고이 넣어 둔 머플러를 떠올린 버들이 속으로 안도했다.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아서 무조건 다행이었다.
“너 또 차 버리고 왔냐?”
개인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차를 찾아 놓으란 황 대표의 지시를 들은 겨울이 황당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답도 안 나올 정도로 심각한 길치인 황 대표가 대꾸 없이 인상을 찌푸렸을 뿐이다. 커피 잔을 들자 주변으로 진한 원두 향이 물들었다.
“아. 근처 도로 확장 공사 때문에?”
오늘부터 확장 공사가 시작돼 출입이 불가하게 된 도로는 하필 황 대표가 회사에 오고 갈 때 고정으로 이용하는 도로였다. 어쩔 수 없이 새로운 경로를 찾아야 했을 거고, 길치답게 황 대표는 그대로 길을 잃어버렸을 게 뻔했다. 아니, 그러면 애초에 그 자리에서 비서를 부르든가 하지. 그것 좀 기다리는 시간이 귀찮다며 차를 버려 버리는 황 대표의 성질머리가 아무리 친구라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택시 탔겠네?”
“어디서 나 지켜보고 있었어?”
“꼭 봐야 아는 거겠어?”
이런 적이 한두 번이었어야지. 한심하단 듯 황 대표를 향해 쯧, 혀를 찬 겨울이 버들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러고선 훈계조로 나불거렸다.
“버들아. 넌 커서 저딴 어른 되면 큰일 난다. 알겠지?”
저딴 어른이 어때서. 버들이 황 대표를 힐긋거렸다. 내리깐 황 대표의 속눈썹이 참 고왔다. 그래서 자꾸만 시선이 끌렸나 보다.
“점심은.”
겨울이 황 대표에게 물었다.
“별로 생각 없어. 일 얘기나 해. 급한 거 있다면서.”
두 사람의 대화에 자리를 피해 주려고 슬그머니 일어난 버들을 겨울이 풀썩 주저앉혔다.
“어디 가려고.”
“……집.”
“점심 먹고 가.”
“집에서 먹으면 돼.”
“형이 맛있는 거 사 주고 싶어서 그러지.”
“괜찮아. 형 바쁜 거 같은데.”
곤란한 표정으로 버들이 겨울과 황 대표를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별로 배가 고프지도 않건만 그런 제 사정이야 안중에도 없이 바지 자락을 붙잡고 늘어진 제 형의 진상에 버들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차분한 황 대표와 겨울을 절로 비교하게 됐다. 둘이 이렇게나 다른데 진짜 친구 맞아?
“왜 이래. 여기 집 아니거든.”
“형이랑 점심 먹을 거야, 말 거야. 응?”
까닥하다간 바지가 벗겨지게 생긴 버들이 더 버티지 못하고 점심 먹고 가겠다며 억지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제야 흡족한 얼굴로 겨울이 버들을 놓아주었다. 불시에 그 꼴을 지켜보게 된 황 대표가 문득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너 뭐 하냐.”
“뭐가.”
버들을 대할 때와 다르게 겨울이 정색한 채 대답했다. 같이 사업하는 파트너로서 서로 원치 않을 때조차 붙어 다닐 일이 많았기에 황 대표 역시 유 대표의 유명한 막냇동생 사랑을 모를 수가 없었다. 매번 혀 짧은 소리로 통화하는 것만 듣다가 실제로 그 모습을 보게 된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정말 가관이었다. 나잇값이건 사회적 지위건 몽땅 날려 먹은 유 대표의 꼴값에 황 대표가 속으로 질색했다.
“잠깐만.”
갑자기 걸려 온 전화를 받으며 겨울이 잠시 자리를 뜨자 둘만 남겨지게 되었다.
황 대표와 시선이 부딪히기 직전 버들이 제 무릎께로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단순히 형 친구로 끝난 사람이라면 이러지 않을 텐데, 머플러가 상기되다 보니 황 대표를 의식하게 됐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버들을 천천히 훑어 내리는 황 대표의 눈빛이 서늘했다.
……내 새끼라고? 앳되고 뽀얗다. 감상은 그걸로 끝이었다. 아무리 집안의 막내라지만 저렇게 다 큰 사내새끼를 물고 빤다는 게 황 대표의 머리로선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버들아.”
통화를 끊고 돌아온 겨울이 버들을 불렀다.
“밖에서 잠깐만 기다려 줄래? 일 얘기만 끝내고 점심 먹으러 가자.”
“응.”
버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제 코트와 가방을 챙겨 들었다. 머플러는 깨끗하게 세탁해서 돌려주겠다고 미리 말을 해 두는 편이 나으려나. 버들의 발이 문 앞에서 머뭇거렸다. 살짝 고개를 뒤돌려 황 대표를 바라봤다. 왜 나한테 아는 척을 하지 않지? 아까 분명 나를 알아본 것 같았는데. 선뜻 입이 열리지 않는 버들이 끝내 황 대표에게 말을 걸지 못하고 대표실을 나갔다.
“급한 일이 대체 뭐야?”
버들이 나가자 황 대표가 겨울에게 본론을 물었다.
“너 그날 술자리에서…….”
겨울 역시 냉랭하게 표정을 굳힌 채 본론을 깠다.
“말해.”
“소희랑 잤어?”
“술자리가 어디 한둘이었어?”
황 대표가 인상을 찌푸렸다.
“소희는 기억해? 아. 소희란 이름이 어디 한두 명이었어야지.”
겨울이 방금 전 황 대표의 말을 빗대 빈정거렸다.
“여배우 소희. 너 잤어?”
정재계 집안에서 태어난 둘은 당연히 물려받아야 할 기업에 딱히 관심이 없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기업을 물려받으면서 마치 그에 합당한 대가라도 되듯 이래라저래라 할 간섭이 싫었다. 일찍이 따로 독립한 둘은 엔터테인먼트 사업체로 크게 성공했다.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을 만큼 자본력이 탄탄하게 갖춰진 상황에서 머리 회전이 빠르고, 사업 수완까지 좋은 두 남자가 뭉쳤다 보니 처음부터 어려움이 없었다.
황 대표가 시나리오를 구성하면 그걸 토대로 유 대표가 상품화를 시켰다. 본전만 뽑아도 어디냐는 요즘같이 어려울 때 손익 분기점을 거뜬하게 넘기는 영화로 제일 먼저 거론되는 것이 두 사람의 작품이었다. 흥행이 보장되다 보니 돈과 사람이 같이 엉겨 붙었다. 대본을 받아 보기 위해. 또 투자를 하기 위해.
“배우들이랑 되도록 어울리지 말라니까.”
겨울의 조언에 황 대표가 콧방귀를 뀌었다.
“작품 때문에 서로 잔 거 아니야.”
“그렇겠지. 소희 위치 정도면.”
“그럼 뭐가 문제야.”
“혹시나 질 낮은 헛소문이 돌 수도 있으니까 애초에 책잡힐 일은 만들지 말자고.”
비서가 자리를 비웠는지 보이지 않았다. 코트에 남은 팔을 마저 끼우며 버들이 정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강아지 두 마리가 어쩐 일인지 묶여 있었다. 넙죽 엎드려 있는 모습이 왠지 뛰어놀지 못해 기가 죽어 보였다. 버들을 발견한 강아지 두 마리가 벌떡 일어나 꼬리를 흔들었다. 누가 묶었지? 왜 묶어 놨지? 생각을 멈춘 버들이 우선 목줄부터 풀어 주었다. 덕분에 다시 자유를 얻게 된 강아지들이 활개를 치며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그걸 보며 흐뭇해하던 버들이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한 핸드폰을 꺼냈다. 집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
“유버들! 들어와!”
통화를 끝내고 나자 타이밍 좋게 안쪽에서 겨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유 회장님 집에 오셨대.”
“아. ……아버지?”
“같이 점심 먹자고 전화 하셨어. 집에 갈 거지?”
사무실로 들어와 버들이 한 말에 현재 유 회장에게 혼날 거리가 한두 가지가 아닌 겨울이 갑자기 바쁜 척 굴었다. 그 옆에서 빨리 집에 가자며 버들이 재촉했다. 아무 서류나 부산스럽게 뒤적거리고 있던 겨울이 짐짓 심각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버들아.”
“응?”
“형이 급한 일이 있단 걸 깜박했네.”
겨울의 비루한 변명을 옆에서 듣고 있던 황 대표가 코로 비웃었다.
“급한 일? 아까까진 같이 점심 먹자고 그랬잖아.”
“형이 돈 많이 벌잖아. 그래서 급한 일도 갑자기 막 생기고 그래.”
“바빠?”
“응.”
“밥도 못 먹을 정도로?”
“응. 어쩌지?”
아쉽기는 하나 버들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하면서 배고프지 않겠어? 샌드위치라도 사다 줄까?”
급한 일이 생겼단 게 거짓말인지 모르고 걱정을 쏟아 내는 제 막냇동생을 겨울이 껴안았다.
“유 대표. 너 회사에 계속 있을 거야?”
황 대표가 툭 물었다.
“응. 일이 쏟아져서.”
겨울이 측은한 척 대꾸했다.
“그럼 네 차 내가 가져간다.”
키가 큰 두 대표가 나란히 섰다.
“형. 그럼 나 먼저 집에 가 있을게.”
“응. 기사님 바깥에 계셔?”
“나 택시 타고 왔어.”
버들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겨울이 황 대표의 앞을 가로막았다. 황 대표의 손에는 이미 겨울의 차 키가 들려 있었다.
“황 대표님.”
“…….”
“길 잃고 차 버리고 오신 황 대표님.”
“…….”
“내 차 빌려 가는 황 대표님.”
황 대표가 눈살을 찌푸렸다. 겨울이 말을 마저 이었다.
“가는 길에 내 새끼, 집 앞에 좀 모셔다 줘.”
버들이 얌전히 조수석에 올라탔다. 이내 시동이 걸렸다. 서로 주고받는 대화 없이 침묵이 감돌고 있어 침을 삼키는 것도 괜히 조심스러웠다. 그러한 분위기가 집에 갈 때까지 쭉 이어질 줄 알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사옥을 출발한 뒤로 경로를 이탈했단 기계음이 잦아 차 안은 조용할 틈이 없었다.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핸들을 꺾던 황 대표가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내비게이션이 알려 주는 100m 앞이나 300m 앞을 길치인 황 대표가 가늠하지 못해 헷갈리는 중이었다.
“유버들 씨.”
“……네?”
갑자기 제 이름이 불리자 꼬여 있던 가방끈을 풀던 버들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저도 모르게 손을 올려 가만히 귓바퀴를 만지작거렸다. 나지막한 톤으로 제 이름을 불렀던 황 대표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귓가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 같다. 유버들 씨라니. 전혀 특별할 게 없는 제 이름 석자가 낯설게 들려오더니 그 여운이 참 오래도록 간다.
“집에 어떻게 가는지 알아요?”
“알아요.”
아까 지나쳤던 허름한 약국이 또다시 정면에 보이자 인상을 쓴 황 대표가 차라리 내비게이션을 꺼 버렸다.
“설명해 줄래요?”
손가락으로 방향을 짚어 가며 버들이 황 대표에게 길을 설명했다.
“이쪽 골목?”
“아니요. 한 블록 더 가셔야 돼요.”
종종 눈이 마주쳤다.
“여기 맞아요?”
“네.”
“그리고?”
핸들을 쥐고 있는 황 대표의 손을 무심코 바라본 버들이 넋을 잃고야 말았다. 짧게 다듬어진 손톱이 말끔하고, 손가락 하나하나 곱다. 속눈썹도 곱더니 다 고우시네. 버들의 두 눈에 황 대표는 온통 고운 사람이라고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그 전까지 어떤 모양인지 의식하지 않으며 살았던 제 손톱과 황 대표의 손톱을 문득 비교해 봤다. 아무래도 전공이 전공이다 보니 조각하느라 손톱이 상할 대로 상해 있었다.
“버들 씨?”
“네?”
“어디로 가요?”
서둘러 정신을 차린 버들이 주변을 살펴 대답했다. 황 대표가 꾸준히 존대를 써 주고 제 이름을 높여 불러 주고 있단 것에 속이 다 울렁거린다. 어느새 집 앞이었다. 안전벨트를 푼 버들이 가방을 챙기면서 황 대표를 힐긋거렸다. 다음 일정을 위해서 황 대표는 핸드폰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손목에 채워진 시계가 황 대표의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 황 대표에게 말을 붙이기 전 긴장한 버들이 아랫입술을 혀로 핥았다. 형이랑 같이 사업하는 친구니까…….
“제가 뭐라고 부르면 돼요?”
황 대표의 눈썹이 순간 꿈틀거렸다. 바래다 달랬고, 바래다 줬다. 이로써 제 할 일은 전부 끝냈다. 그런데 빨리 안 내리고 뭐 하는 건지 모르겠다. 인상을 쓴 채 황 대표가 버들을 쳐다봤다. 귀찮고, 길바닥에서 버린 시간은 아깝고. 그런 감정들이 뒤섞여 있는 황 대표의 눈빛은 감사나웠다.
“안 내려요?”
“내릴 건데…….”
말과 달리 미적거린다.
“대표님이라고 부르면 돼요?”
결심했단 듯 버들이 물었다.
“유버들 씨.”
“네?”
“저한테 월급 받아요?”
친절한 어조였지만 눈치 빠른 사람들은 바로 알아차릴 정도로 선 긋고 있는 태도가 분명했다.
“……그럼 뭐라고 불러요?”
황 대표가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네가 나를 부를 일이 앞으로 뭐가 있겠냐며 쏘아붙이고 싶은 걸 유 대표 동생이라고 하니 애써 참았다.
“제 이름이 궁금한 거예요?”
“……네. 성은 알아요.”
“성은 알아요?”
“황 씨……. 겨울이 형이 황 대표님이라고 말해서.”
버들의 목소리 끝이 바닥을 기었다. 자그맣게 한숨을 내쉰 황 대표가 지갑을 열었다. 제 개인 번호가 아니라 수행 비서 연락처가 찍힌 명함을 꺼내 건넸다. 버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차에서 내린 버들이 얼른 명함에 찍힌 이름부터 확인했다. 뭔가 들뜬다. 아, 맞다. 바래다줘서 고맙단 인사를 하지 않았단 게 떠올랐다. 하지만 돌아보았을 땐 이미 늦었다. 빠른 속도로 저 멀리 차가 사라지는 중이었다. 아쉬움이 감돈다. 그러고 보니 머플러 얘긴 꺼내지도 못했네.
“황정우.”
소리 내어 뱉어 본 이름의 발음이 단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