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볼은 푸레의 골이 터지자 골이 들어간 방향으로 무릎을 꿇었다. 뒤에서 침투하는 푸레를 보았고 슛 방향도 알아차렸다. 조금만 더 빨리 반응했다면 확실하게 펀칭으로 쳐낼 수 있는 골이었기에 더욱 안타까웠다. 관중들의 환호 소리 사이로 프랑스 선수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막지 못한 자책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계속 무릎을 꿇고 손으로 잔디를 움켜쥐었다.
“볼. 아직 경기 안끝 났어.”
“미안해. 내가 막을 수 있는 공이었는데.”
볼은 고개를 들지 않아도 자신을 위로하는 목소리가 인수인 것을 알았다. 경기 시작하기 전 내 뒤로 공을 보내지 않겠다고 인수에게 다짐했었다.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더욱 미안한 볼이었다.
“네가 막지 못했으면 그 누구도 막지 못했을 골이었어. 내가 아는 가장 최고의 골키퍼가 너니까.”
“…….”
“내가 아는 최고의 골키퍼가 너인데 난 너를 자주 뚫었잖아. 저 녀석도 뚫어 줄게.”
“뭐라는 거야.”
볼은 어이없는 눈빛으로 인수를 쳐다봤다. 인수의 뒤쪽으로 자신을 걱정스런 눈빛으로 보고 있는 동료들이 보였다.
“이제 고개를 들었네. 아직 경기 안 끝났어. 난 경기 전에도 지금도 말하지만, 우승컵을 들어 올리기 위해 왔어. 그리고 반드시 들어 올릴 거야. 너희도 마찬가지 아니야?”
“무조건 우승이지.”
“우리는 삼사자 군단이야. 우승은 우리한테 어울리는 말이고.”
“좋아. 가자.”
“가자. 가자. 가자.”
인수는 선수들의 파이팅을 듣고 그물에 기대어있는 공을 주웠다. 주심이 아직 세리머니를 진행하는 프랑스 선수들에게 주의를 시키는 모습이 보였다. 공을 들고 중앙으로 뛰어가며 에디와 존을 불렀다.
“뚫는 게 쉽지 않았지?”
“응. 숫자의 유리함을 잘 살리는 플레이를 하더라고.”
“앞에서 좀 더 움직여줘야 하는데 할 수 있지?”
“뭐든지 해봐야 하지 않겠어? 앞에서 수비를 내 쪽으로 더 끌어당겨 볼게.”
“너무 무리하지 마. 아직 40분 넘게 남았어. 네가 힘들다고 교체할 수 없으니까.”
인수는 존의 포부에 자제할 것을 당부했다. 이미 윙백이 교체될 것이라는 소리는 하프타임에 들었었다. 그럼 남은 교체카드는 한 장뿐이었다. 계속 동점 상황이 지속하거나 만에 하나 역전골을 허용하게 되면 케이힐이나 메슈를 빼고 공격수를 추가로 투입해야 하는 상황이 나올 수 있었다. 감독이 해야 하는 고민이지만 선수들도 자신이 어떻게 뛰어야 할지 알아야 하는 부분이었다.
“걱정하지 마. 아직 체력은 쌩쌩하니까.”
“나도 지난 경기에 쉬어서 괜찮아.”
“어차피 우리가 숫자가 부족한 상황이야. 노릴 수 있는 상황은 역습상황이고. 에디 네가 힘든 역할을 맡아줘야 해.”
“수비는 내가 너보다 잘하고. 달리기도 내가 너보다 빨라. 너나 잘해.”
“좋아.”
인수는 주심이 센터서클로 뛰어오는 것을 보고 공을 놓고 센터서클에서 빠졌다. 후반 프랑스의 골로 1:1이 된 상황. 잉글랜드의 킥오프로 경기가 재개됐다.
***
“전방부터 밀어붙여.”
“앞으로 나가.”
동점골을 넣으면서 기세가 오른 프랑스였다. 이 기세를 그대로 살려 잉글랜드를 밀어붙였다. 그러나 상대하는 선수는 현존하는 축구선수 중 키핑이 가장 좋다는 인수였다.
인수는 자신을 둘러싼 선수들을 살폈다. 동점골을 넣었던 푸레와 시코. 수비형 미드필드의 완성형이라 불리는 푸레였고 발재간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시코. 인수는 발바닥으로 공을 긁으며 두 선수를 노려보았다.
계속 공을 긁는 인수를 두고볼 수 없다는 듯 달려드는 시코. 인수는 공을 반대편으로 옮기는 것만으로 시코의 시도를 무산시켰다. 시코가 열어준 틈으로 존에게 패스하고 두 사람 사이를 가르고 뛰쳐나갔다. 인수가 두 선수를 제친 것을 본 존은 공을 인수에게 돌리고 자신도 전방으로 뛰었다.
“달려들지 마. 중앙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기만 해.”
“전방으로 돌리게 만들지 마.”
인수는 자신을 막아서는 프랑스 선수들을 보고 바로 뒤로 한발 물러서 반대편 사이드로 크게 열어줬다. 왼쪽 사이드에서 공간을 파고드는 에디. 인수가 패스한 공을 발로 트래핑을 했지만 크게 튀어 골라인을 넘어가고 말았다.
“미안해.”
“아냐. 한 번에 성공할 것이라 생각 안 했잖아. 이대로만 가자.”
인수와 에디는 서로 엄지손가락을 올리며 뒤로 물러났다.
***
“푸레의 골이 터진 이후 바로 이어진 공격에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브라운 선수의 트래핑에 아쉬움이 있었는데요.”
“축구는 90분 동안 양 팀이 수없는 공방전을 벌이게 됩니다. 그중에 성공하는 공격은 극히 낮은 확률이죠. 이런 시도가 계속되어야 합니다.”
“하인스의 키핑에서 존과의 2:1패스 그리고 왼쪽으로 열어주는 판단까지 이런 흐름은 프랑스가 알아도 막지 못하거든요. 특히 역습이 이루어지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럴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번의 수비가 중요합니다.”
푸레의 슛이 골이 될 때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던 콜이었다. 하프타임 때 워드프라우스가 말했던 팽팽한 실이 끊어질 때가 바로 실점했을 때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선수들을 다독이며 파이팅을 불어 넣은 인수가 있었다. 아직 20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선수. 그 어린 선수에게 주장을 달아준 레쉬포드 감독이 새롭게 보였고 그런 선수를 보유하고 있는 레알 마드리드가 부러워졌다. 무너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 분위기 반전을 시킬 수 있는 선수는 그 어느 감독이라도 부러워할 만한 선수였다.
이어진 프랑스의 공격. 중앙선 부근에서 공을 잡은 푸레는 선수들의 움직임을 살피며 두베르네에게 공을 넘겼다. 두베르네가 시코에게 넘겨준 공. 시코는 바로 오른쪽을 파고드는 주아멜에게 공을 넘겼다. 후반 초반과 똑같은 상황. 다른 것이 있다면 핸더슨이 앞으로 나서는 것이 아니라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프랑코가 중앙을 비우고 우측 사이드로 빠지더라도 주아멜과 겹치는 동선이 될 것이 뻔했다. 주아멜은 중앙으로 넘기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시코에게 공을 돌렸다. 두베르네에게까지 돌아간 공. 왼쪽 사이드도 열기 힘든 상황. 대신 슬금슬금 중앙으로 파고드는 르마가 보였다. 두베르네가 중앙으로 찔러준 공. 루마가 타이밍을 잡고 터닝슛을 했지만 공이 하늘로 뜨고 말았다.
“방금도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어떤 자세이든 바로 슛으로 가져갈 능력이 있는 르마거든요.”
“다만 중앙을 비워주지 않으니 푸레가 파고들 틈이 없었죠. 핸더슨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중앙이 쉽게 열리지 않습니다.”
“여기서 레쉬포드 감독 교체카드를 꺼내듭니다. 핸더슨과 케일을 모두 빼고 베이어와 산타가 들어옵니다.”
“우선 수비를 안정시키겠다는 레쉬포드 감독의 의중이죠. 어차피 핸더슨과 케일이 있어라도 오버래핑이 쉬운 상황은 아니었으니까요.”
“그래도 오버래핑이 좋은 선수가 있는 것과 아닌 것에 대한 프랑스 선수들이 받는 압박이 다를 텐데요. 역습상황에서 핸더슨과 케일이 오버래핑을 해봤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레쉬포드 감독의 선택.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지켜봐야 할 듯싶습니다.”
프랑스의 파상공세는 계속됐다. 인수와 에디가 중간중간 패스의 활로를 찾고 있었지만, 프랑스의 수비는 인수와 에디에게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다시 한번 시작된 프랑스의 공세. 시코는 중앙에서 잉스를 등진 채 몸의 중심을 낮춘 프랑코에게 공을 보냈다. 중앙에 혼잡하게 모여있는 양 팀의 선수들. 프랑코는 잉글랜드 수비들 사이의 틈을 보았고 그 라인을 따라 공을 보냈다. 그 끝에는 페널티지역 바로 외곽에서 기다리는 두베르네가 있었다. 후방에서 뛰어드는 푸레를 같이 보고 있었기에 오른쪽 골포스트 쪽이 열린 상황. 두베르네는 프랑코의 패스를 바로 슛으로 가져갔다.
다시 잔디를 밟고 뛰어오른 볼. 주먹을 말아쥐고 날아오는 공의 타이밍에 맞추어 힘껏 내질렀다. 볼의 주먹에 맞은 공은 골대를 크게 벗어나 관중석으로 향했다.
“프레스턴 볼. 다시 잉글랜드를 위기에서 구해냅니다. 전반 초반 골을 먹은 이후 벌써 3번째 슈퍼세이브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후반 32분이 지나가고 있는 현재 잉글랜드 선수들 중에 가장 눈에 띄는 선수를 고르라면 당연 프레스턴 볼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세 번의 슈퍼세이브 모두 골이 될 수도 있는 슛이었거든요. 프랑스는 볼이 정말 얄미울 겁니다.”
“볼의 슈퍼세이브로 잉글랜드 선수들이 다시 자신감을 보이는 점도 놓칠 수 없는 포인트입니다. 후방의 골키퍼를 믿고 자신감 있게 수비하고 있거든요. 방금도 두베르네를 막고 있었다면 푸레에게 중앙을 파고들 수 있는 공간을 내줄 수 있었거든요. 볼의 슈퍼플레이도 있었지만 메슈가 오른쪽을 노릴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해설자들이 볼을 칭찬하고 있을 때 프랑스는 코너킥을 준비했다. 오른쪽 코너킥. 프랑스의 전담 킥커인 시코가 중앙으로 높게 공을 올렸다. 잉스와 콜, 그리고 존의 높이가 좋다고 하지만 르마와 프랑코의 위치선정도 좋았다. 이번 경기 처음으로 높이 찬 코너킥. 시도는 좋았지만 볼이 그 궤적을 읽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볼이 앞으로 먼저 나와 정면으로 강하게 펀칭했다. 볼의 주먹을 맞고 강하게 튕겨 나간 공을 잡은 것은 인수였다.
“하인스. 달립니다. 중앙을 막아서는 선수가 단 둘입니다.”
“왼쪽 사이드를 브라운 선수가 뚫고 있거든요. 에드워드 브라운이 빠른 만큼 에디를 막지 않을 수 없습니다. 후방에서 대기하던 주아멜과 푸레가 하인스와 에디를 막아서고 있습니다.”
“하인스 푸레를 뚫어냅니다. 순식간에 푸레가 제쳐집니다.”
“푸레 몸의 중심을 너무 낮췄어요. 하인스가 제일 잘 사용하는 드리블 기술이 라 크로케타거든요. 라 크로케타를 쓸 거로 생각하고 몸의 중심을 낮추고 있었는데 하인스 레인보우 킥을 구사했어요.”
“다른 말로 사포라고 하죠. 푸레가 낮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기에 자신의 키를 넘어가는 공을 지켜만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인스 계속 달립니다. 전방에는 도르맹과 다쿠르. 단 둘뿐입니다. 프랑스 선수들이 하인스에게 따라붙지 못하고 있습니다.”
“공을 달고 달리는 하인스의 스피드는 상위권이죠. 급하게 두베르네와 프랑코가 뛰어오지만 아직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앞을 막아서는 도르맹을 라 크로케타로 젖혀내는 하인스. 도르맹 자신이 마지막인 것을 알고 하인스의 유니폼을 잡아챕니다. 하인스의 뛰어나가는 힘과 도르맹이 잡는 힘에 이기지 못하고 길게 찢어지는 유니폼. 주심은 양손을 앞으로 뻗습니다.”
“당연한 판정이죠. 이미 젖히고 골키퍼만 앞두고 있는 하인스거든요. 도르맹에게는 추후 판정이 내려지게 되겠죠.”
“앞으로 뛰쳐나오는 다쿠르. 하인스의 길목을 막기 위해 앞으로 몸을 던져 가로막습니다. 하인스. 하인스 다쿠르가 몸을 던지는 것을 보고 가볍게 공을 띄웠습니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공. 골라인을 넘어섭니다. 골입니다. 골. 하인스. 후반 35분 도망가는 골을 터트립니다.”
“하인스를 영리한 선수라고 하죠. 다쿠르가 몸을 날릴 것을 알았다는 듯 칩슛으로 마무리 지었습니다.”
“주심. 골을 선언하고 바로 도르맹에게 달려가 카드를 꺼낼 준비를 합니다. 노란색 카드가 나옵니다.”
“내심 빨간색 카드가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요. 하인스가 넘어지지 않았고 골까지 기록했으니 옐로카드로 끝난 것 같습니다.”
“냉장하게 잘 판정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보다 하인스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첫 번째 레이보우 킥으로 푸레를 제치고 불과 한 걸음 만에 그 공을 다시 잡아냈어요. 바로 2미터 앞에 도르맹이 서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조금만 더 길었어도 경합이 되는 공이었거든요. 그럼 힘들 수도 있었는데 정확히 컨트롤해냈습니다.”
“하인스의 유스 시절 감독이 잉글랜드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꼽히던 지금 소튼의 감독인 랄라나 감독이었거든요. 하인스와 에드워드 브라운이 인터뷰마다 언급하는 두 사람 중 한 명인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일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도 소튼 유스 출신의 웨인 브릿지였죠? 이런 선수들을 키워 낸 두 사람도 대단합니다.”
“주심이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를 보고 있습니다. 추가 시간도 이제 지났거든요.”
“주심, 추가 시간이 지났으면 바로바로 휘슬을 불어야죠. 프랑스가 공격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중계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 목소리를 들었다는 듯 주심은 휘슬을 길게 불어 길었던 90분 경기를 마쳤다.
“잉글랜드 유로에서 첫 우승을 합니다. 레쉬포드 감독이 선임될 때만 해도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았던 대표팀이었거든요. 그런데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첫 우승을 가져왔습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레쉬포드 감독을 비롯해 코칭 스태프 그리고 지금 경기장에 쓰러져있는 선수들과 벤치에 있는 선수들까지 정말 고생했어요.”
“우리가 대표팀에 있을 때도 정말 가져오고 싶었던 유로 트로피거든요. 그 트로피가 드디어 잉글랜드에게 오게 됐습니다.”
애슐리 콜과 워드프라우스는 정말 감격스러운지 눈이 벌게져서 소리를 높였다.
“뛰어 내려가 누워있는 선수들에게 마사지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입니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정말 고생하셨어요.”
인수와 잉글랜드 선수들은 환호하는 관중들의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는지 하늘을 보고 누운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짧은 기간 6경기를 모두 치러야 했던 선수들. 모든 선수가 승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