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조별리그 1차전을 4:1로 잡은 잉글랜드는 2차전을 위해 오덴세로 이동했다. 덴마크 프로축구리그 오덴세BK의 연고지이기도 했다. 이번 유로를 개최하며 에너지 파크의 관중석을 개축하여 2만 2천 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구장으로 만들었다.
“이놈의 잔디는 아무리 밟아도 적응이 안 되냐.”
“그러게. 이러니 홈팀만 유리하다는 소리가 나오지. 어제 체코랑 한 경기 봤지?”
“우크라이나와 경기할 때와는 전혀 딴판이던데. 이런 잔디에서 패스하면서 공을 어떻게 딱 발 앞에 멈추게 할 수 있냐고.”
“하인스는 하던데.”
어제 있었던 A조 3번째 경기 홈팀인 덴마크와 체코의 경기가 있었다. 첫 번째 경기인 우크라이나와의 경기에서는 몸이 아직 안 풀렸다는 에릭센 감독의 말을 증명하듯 체코를 가볍게 3:0으로 누르고 조 1위로 치고 나갔다. 아직 잉글랜드와 우크라이나의 경기가 열리지 않았기에 경우의 수는 많았지만 8강 진출에 한 걸음 더 앞서나갔다. 그런 덴마크와의 경기보다 더욱 놀라고 있는건 인수의 잔디 적응력이었다. 아직 잉글랜드 선수들이 잔디에 적응하고 있을 때 인수는 벌써 적응이 끝났는지 자신의 플레이를 보여주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적응했냐고 물어보니까 왜 적응이 안 되냐고 되묻던데.”
“괴물 같은 놈. 우리가 다 지 같은 줄 안다니까.”
“그런데 에디도 적응이 끝난 거 같던데. 슬라이딩 태클하는 데 주저함이 없어. 아무리 잔디가 뻣뻣해 긴 타이즈를 입었다지만 태클이 끝난 후 바로 일어서는데 자연스럽던데.”
“자자, 잡담할 시간에 한 번이라도 더 잔디를 밟아. 지난 경기처럼 패스미스를 계속하지 말고.”
“어차피 이번 대회가 끝나면 폐기하기로 했다면서요. 공이 발에 딱 달라붙는 느낌이 좋아서 몸이 기억할 거 같은데.”
“그래봐야 너만 손해야. 다시는 나오지 않을 공이니까.”
3일 동안 9경기가 펼쳐졌는데 총 21골이 터졌다. 가장 큰 원인으로는 바로 반발계수가 올라간 축구공이 지목되었다. 선수들이 잔디에 적응이 되는 3라운드가 되면 더 많은 골이 나올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다. 피파에서 규정된 최대허용치까지 올린 반발계수를 가진 공인구. 유럽축구연맹은 이번 공인구선정에 실패를 인정하고 피파에 반발계수조절을 건의하기로 한 상태였다.
“우크라이나 선수들도 1차전을 뛰어봤으니 잔디에도 적응이 됐을 테고?”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수석코치도 수비 쪽에 신경을 쓰고 있고요.”
“다행인 점은 지난 경기에서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던 크레토가 컨디션이 올라오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인스가 크레토에게 찔러주는 패스도 잘 받아내고 있고요.”
“뭐 크레토도 세리에에서는 잘해왔잖아. 곧 프리미어리그로 복귀한다는 소리도 있고.”
“설마 맨유가 크레토를 다시 사려는 겁니까? 맨유에서 피오렌티나로 이적할 때보다 적어도 10배는 더 줘야 할 텐데요.”
크레토가 피오렌티나로 이적할 때 에이전트 수수료를 포함해 모두 900만 파운드에 이적했었다. 그러나 지금 크레토의 평가액은 적어도 8500만 파운드에 달할 정도였다. 지난 시즌에 이어 이번 시즌에도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하지 못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거액을 들여 크로테를 다시 데려올 것이라는 루머가 퍼지긴 했지만 확인된 정보는 아니었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레쉬포드 감독은 맨유의 레전드 선수 출신이었다. 지금도 맨유 구단과 친밀하게 지내고 있었으니 그런 소식을 듣지 않았냐는 코치의 물음이었다.
“나도 정확히는 몰라. 그런 소리가 있다는 거지. 존은 어때? 골 넣고 세리머니하다가 삐끗한 발목은 괜찮은 거야?”
“살짝 잘못 디딘 거라고 합니다. 의료진에서도 하룻밤 얼음찜질이면 괜찮아진다고 했고. 오늘 경기에 출장시켜도 문제없다고 합니다.”
“아직 어린 선수들이라 그런지 너무 분위기에 휩쓸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인스가 경기장에 있을 때는 알아서 잘 눌러주고 있긴 하지만 하인스가 빠지니 그런 기질이 너무 보이던데요. 실점한 상황도 그렇고요.”
“아무래도 무리가 있더라도 하인스가 빠지면 슈를 기용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잉글랜드 대표팀의 유일하다시피 한 30대 선수가 헤리어 슈였다. 지난 아르헨티나 월드컵에 선발되어 교체 출장을 하면서도 2골을 기록했을 정도로 좋은 모습을 보여줬었다. 이번 시즌 아스널에서 11골을 터트리긴 했지만, 인수와 존의 하위호환이라는 평가에 지난 경기에서도 벤치를 달구다 출전하지 못했었다. 지난 경기에서 인수와 교체되어 투입된 샤네가 어시스트를 기록했었다. 그러나 샤네가 기복이 있는 만큼 슈의 출장도 고려해야 했다.
“경기 시작 전에 슈를 체크해 봐. 이번 시즌 많이 뛰었으니 생각지도 못한 부상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알겠습니다.”
***
“우리의 에이스 오랜만이지?”
“뭐가 우리의 에이스얘요. 이제 우리 같은 팀도 아닌데.”
“와, 그렇게 차갑게 나오기야? 우리가 같이 지낸 세월이 얼마인데.”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뒤풀이가 끝나고 처음으로 만난 인수와 코프. 이미 같은 조에 편성되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서로 다른 유니폼을 입고 만나니 색다른 기분이었다.
“이제 앞으로 같은 팀이 될 일이 없잖아요. 거기서 은퇴할 나이까지 뛴다면서요.”
“생각이야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거잖아.”
“에구. 그러세요.”
인수는 코프의 말에 비꼬아 대답했다. 처음 레알 마드리드에서 떠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최대한 설득했던 인수였다. 그러나 코프가 20대 초반 다친 무릎이 문제였다. 20대 후반까지도 어찌어찌 버티면서 뛰었지만 30대가 되니 경기가 끝나고 나면 아이싱을 해도 아픈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최전방 공격수인 코프에게 가해지는 압박을 이겨내기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다. 그래서 고향 팀인 우크라이나로 돌아가 은퇴 후 지도자 생활을 한다는 말에 인수도 더 이상 설득하는 것을 포기했었다.
“하여튼 이번 대회가 내 마지막 국가대표대회인데 살살하자.”
“입에 침은 발랐어요?”
“입에 침은 왜?”
“한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어요.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하라고. 월드컵까지 뛰고 은퇴할 거라고 나한테 말했으면서 마지막이라니.”
“내가 너한테 그런 말을 했어? 아. 그래도 같은 팀이었는데 살살하자고.”
“알았어요. 해트트릭만 할게요.”
“너. 그러지…….”
코프가 인수를 잡으려고 할 때 인수는 이미 주심의 뒤를 따라 경기장에 입장하고 있었다. 양 팀의 국가가 끝나고 사진 촬영까지 끝나자 코프는 다시 인수와 마주했다.
“너, 두고 본다. 누가 해트트릭을 하나 보자고.”
“화이팅이요.”
***
코인토스로 선공을 잡은 잉글랜드. 존은 센터서클 외각에서 공을 기다리는 인수에게 공을 넘기고 바로 우크라이나 진영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와 맞추어 에디와 크레토까지 뛰자 인수가 드리블로 가볍게 코프를 제쳤다.
“하인스 막아. 패스는 무시하고 돌파할 각만 주지 마.”
인수가 자신을 가볍게 제치고 달리자 코프는 인수가 알아듣지 못하게 우크라이나어로 동료들에게 소리쳤다. 이미 경기장에 들어오기 전 동료들에게 인수가 좋아하는 플레이를 주지시켰으니 잘 막아줄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인수의 앞을 막아선 두 선수를 가볍게 제치고 더 깊숙이 파고들자 더 큰 목소리로 외쳤다.
“양쪽 사이드 막아. 중앙보다는 사이드로 도는 것을 좋아해.”
“중앙에 뛰어 들어온 선수는 봐야 할 거 아냐. 다들 집중해.”
인수는 우크라이나 선수들이 소리치며 움직이는 것을 보고 오른쪽으로 공을 접었다. 인수가 공을 접는 것을 보고 바로 왼쪽으로 따라붙는 모습에 인수는 다시 오른쪽으로 한 번 더 치고 들어간 후 바로 중거리슛으로 이어갔다.
경기 시작 1분 만에 나온 인수의 중거리 슛. 20미터가 넘는 꽤 먼 거리였지만 힘이 제대로 실린 공이었기에 우크라이나 골키퍼의 손가락을 꺾고 골망을 흔들었다. 시작하자마자 일격을 얻어맞은 우크라이나였지만 잉글랜드를 상대로 실점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다시 우크라이나의 킥오프. 침착하게 공을 뒤로 돌리며 잉글랜드 선수들을 끌어냈고 한 번에 중앙으로 깊숙이 찔렀다. 생각보다 많이 구른 공에 코프가 열심히 뛰어봤지만 공은 잉글랜드 최종수비수 콜이 가볍게 따냈다. 코프가 다가오기 전 잉스에게 패스한 콜. 잉스가 다시 전방으로 공을 보냈지만 메슈의 트래핑이 길어 우크라이나 선수가 다시 공을 따냈다.
“한 번에 찔러 길더라도 찔러야 해.”
전방으로 다시 뛰어 들어가는 코프. 잉글랜드 수비수들이 오프사이트 트랩을 썼지만 괜히 최정상급 공격수가 아니라는 듯 오프사이드 트랩을 돌파했다. 코프가 돌파하는 것을 보고 골문을 비우고 앞으로 뛰어나온 볼. 잔디에 바운드되며 공이 빨라졌기에 볼이 넘어지며 공을 가슴에 끌어안았다.
“좋아. 이렇게 하라고.”
비록 슛은 차지 못했지만 좋은 기회를 얻었던 우크라이나. 코프는 다시 우크라이나 진영으로 돌아가며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이제 첫 번째 시도였고 아직 시간은 많았다. 아무리 잉글랜드라고 하지만 분명히 기회가 생길 터였다.
***
전반 35분. 서로 좋은 기회들이 몇 번씩 찾아왔지만 골을 넣는 것에는 실패한 양 팀이었다. 에디가 왼쪽 사이드를 완전히 뚫고 올린 크로스를 존이 강하게 헤더를 했지만, 우크라이나 골키퍼의 선방에 막히고 말았다. 골키퍼의 선방에 힘을 얻었는지 이어진 공격에서 바로 기회가 찾아왔다. 중앙수비수 케이힐의 패스미스로 찾아온 공격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전방의 코프에게 연결하는 것까지 성공한 우크라니아. 코프는 바로 중거리슛를 때렸지만, 볼이 주먹으로 공을 펀칭해 골라인 아웃을 만들었다. 이어진 코너킥 찬스. 키가 큰 우크라니아 중앙수비수들까지 모두 잉글랜드 페널티지역으로 올라왔다. 오른쪽 코너에서 올라온 코너킥. 워낙 선수들이 몰려 있었기에 누구의 머리를 맞았는지도 모르게 공이 뒤로 흘렀고 그 공을 왼쪽 윙백인 케일이 잡았다.
“앞으로 보내.”
케일이 공을 잡는 것을 보고 전방으로 뛰기 시작한 인수. 인수의 목소리를 들은 케일은 바로 전방으로 길게 공을 찼다. 잉글랜드 진영에서 한번 바운드가 된 공은 중앙선을 넘어 두 번째 바운드가 됐고 그 공을 향해 뛰어가는 인수와 우크라이나 수비수가 있었다.
“내놔.”
인수가 공을 잡기 전에 공을 처리하려고 슬라이딩 태클까지 시도한 수비수. 인수는 수비수의 발을 보고 뛰어오르며 공의 밑동을 살짝 차올렸다. 생각보다 굴러가는 공이었지만 공을 잡을 수 있는 선수는 인수뿐이었다. 인수가 공을 잡자마자 막아서는 우크라이나의 두 수비수. 인수는 왼쪽 사이드를 뚫는 에디에게 패스했다. 뒤에 우크라이나의 윙백이 따라붙고 있긴 했지만 에디와의 간격이 점점 벌어졌다. 중앙을 향해 방향을 튼 에디. 인수가 중앙에 있었고 우측에는 크레토까지 달려오고 있었기에 수비수들의 반응이 늦었다.
골키퍼까지 앞으로 나오면 슈팅각을 좁혔지만 강하게 슈팅을 한 에디. 골키퍼의 무릎을 맞긴 했지만 골이 되기에는 충분한 슈팅이었다.
삐익.
주심이 골을 인정하고 2:0으로 벌어진 잉글랜드와 우크라이나. 전반 막판 인수가 다시 단독드리블로 얻어낸 프리킥을 성공시키며 3:0으로 전반을 마쳤다.
후반. 하프타임에 각성이나 한 듯 코프가 30미터가 넘는 거리에서 찬 공이 잉글랜드의 골망을 갈랐다. 그 후에도 코프가 분전했지만 잉글랜드는 수비수를 보강하며 버텼고 3:1로 승리를 가져왔다.
“와 좀 살살하자니까.”
“해트트릭은 안 했잖아요.”
“그래도 두 골이나 넣었잖아.”
“코프가 해트트릭했으면 동점이었네. 코프가 잘못한 거지.”
“에휴. 어린애를 때릴 수도 없고. 덴마크전 꼭 이겨야 해. 그래야 우리가 올라갈 확률이라도 있으니까.”
아직 3차전이 남았지만 조별리그 2연승으로 8강행을 확정 지은 잉글랜드. 1무 1패가 된 우크라이나는 3차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동시에 열리는 잉글랜드와 덴마크전을 기다려야 했다. 덴마크가 3:0으로 체코를 꺾은 만큼 우크라이나도 체코를 다득점으로 꺾어야 했지만 이미 여러 번 상대해 본 체코였기에 코프는 자신이 있었다.
“알았어요. 남은 게임 힘내봐요.”
인수는 코프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3차전이 열릴 코펜하겐으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