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4월의 마지막 날. 레알 마드리드 선수단은 발렌시아와의 혈투를 마치고 이틀의 휴식만을 취하고 리버풀로 향하는 전용기에 탑승했다. 이틀의 휴식 만에 풀릴 경기가 아니었지만 이미 짜인 스케줄은 어쩔 수 없었다.
“그제 졌어야 했어.”
“네?”
리버풀로 향하는 비행기. 세도로프 감독의 혼잣말을 들은 수석코치는 놀란 눈으로 세도로프 감독을 바라봤다.
“아냐. 길지 않은 비행이지만 자라고.”
경기를 뛰는 선수들도 피곤할 테지만 코치진의 피로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쌓였다. 그중에서도 감독을 보좌하는 수석코치는 세도로프 감독 대신 선수들의 컨디션과 훈련 일정까지 모두 챙겨야 하는 위치였다. 그런 만큼 쉴 수 있을 때 쉬어야 했는데 자신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반응하는 모습이 안타까운 세도로프 감독이었다.
“네. 뭔가 필요한 게 있으시면 깨우십시오.”
수석코치는 세도로프 감독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는지 안락한 좌석에 몸을 기대어 눈을 감았다. 레알 마드리드의 전용기인 만큼 긴 비행에도 선수들의 피로가 누적되지 않게 모든 편의시설이 되어 있었다. 선수와 스태프 각자에 맞추어 제작된 좌석은 물론이고 전용 쉐프는 물론이고 승무원과 스태프도 일류로 구성되었다.
세도로프 감독은 옆자리에서 눈을 감은 수석코치를 보며 자신도 눈을 감았다. 어차피 일정은 짜여 있고 자신은 그 일정에 맞추어 전술과 선수들을 기용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전술을 충분히 소화할 만한 선수들이 뒤에 있었다.
***
“꽤 쌀쌀한 5월의 리버풀입니다. 따뜻한 마드리드에 있다 영국에 오니 춥게 느껴지는군요.”
“확실히 그렇죠. 마드리드 시내에는 반팔을 입지 않은 사람을 찾기 힘들었는데 이곳에는 반팔을 입은 사람이 없죠. 기온도 기온이지만 항구도시인 리버풀인만큼 바람 때문에 더 춥게 느껴집니다.”
“레알 마드리드는 리버풀이라는 강팀을 상대해야 하지만 날씨와도 싸워야 하는 이중고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오후에 열리는 경기였다면 좀 덜 했겠지만 오늘 경기는 해가 지고 난 이후인 7시에 경기가 시작되죠. 해가 떨어진 이후인 만큼 더 춥습니다. 평소와는 다른 환경에 몸이 굳지 않아야겠죠.”
“3일 전 있었던 발렌시아와의 경기를 극적으로 비긴 레알 마드리드 아니겠습니까?”
“양 팀의 팬들이 모두 감정의 기복이 심한 경기였죠. 양 팀 모두 챔피언스리그 4강 경기를 앞두고 있는 경기였던 만큼 더욱 크게 느꼈을 겁니다.”
레알 마드리드는 리버풀과의 경기가 발렌시아는 맨체스터 시티와의 4강 경기를 앞두고 펼쳐진 경기였다. 특히 발렌시아의 경우 리그 우승이 물 건너간 상황에서 코파 델 레이나 크게는 클럽 첫 챔피언스리그 우승컵을 가져와야 한다는 생각이 컸다. 그렇기에 코파 델 레이 결승전 상대이자 같은 챔피언스리그 4강팀인 레알 마드리드를 한번 잡아야 할 필요가 있던 경기였다.
“그런 경기에서 5:5 동점 경기가 나왔습니다. 발렌시아 입장에서는 1명이 더 많은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막판 동점을 내줬는데요.”
“발렌시아도 전반 3:1 상황에서 5:4까지 역전을 한 순간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겁니다. 후반 5분이 남았을 때 텐백을 할 정도로 승리에 대한 열망도 높았고요. 결국 레알 마드리드의 에이스 하인스의 코너킥골이 동점을 만들었죠. 바로 이어진 발렌시아의 마지막 공격에서 마지막 교체로 투입된 소메스가 태클로 공격을 차단하며 경기가 끝났지만 가장 임팩트가 큰 모습은 코너킥골이었죠.”
“찾아보니 하인스가 이미 소튼 시절 코너킥골을 기록한 적이 있더군요.”
“흔치는 않지만 전혀 나오지 않는 골이긴 합니다. 경기 막판이었기에 레알 마드리드는 산체스 골키퍼까지 코너킥에 참여할 정도였거든요. 조금 과장한다면 좁은 페널티지역에 하인스를 제외한 20명의 선수들이 몰려있는 상황이었죠. 그런 상황에서 코너킥을 골대로 찰 것이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겁니다.”
“그런 두 팀이 모두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팀을 상대로 4강 경기가 펼치게 됩니다. 이번 시즌 결승전은 5월 30일 독일 알리안츠 아레나에서 펼쳐지게 되지 않습니까? 분데스리가 최고의 명문클럽인 바이에른 뮌헨의 홈구장에서 결승전이 펼쳐지게 되는데 4강에 분데스리가 팀이 없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죠.”
“라리가에서 두 팀, 프리미어리그에서 두 팀이 올라온 시즌은 정말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예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가 최고의 리그로 평가받고 있을 때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가 최고의 팀 자리를 놓고 다툴 때가 있었거든요. 거의 30년 전이죠. 그때 이후로 이런 대진이 짜인 것은 오랜만입니다.”
“그럼 오늘 펼쳐질 레알 마드리드와 리버풀의 경기 어떻게 예상하십니까?”
“이미 선발 라인업이 나왔죠. 레알 마드리드는 원정경기임에도 불구하고 공격적인 라인업을 들고 나왔습니다. 수비형 미드필드에 니실랴를 투입하면서 후방에 있는 수비수들과 전방에 있는 공격수들 간의 연결고리를 튼튼하게 만들었거든요. 양쪽 윙백에도 가야와 웨아를 투입하며 오버래핑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죠. 이번 시즌 가야와 웨아를 투입할 때는 누네스를 투입하여 쓰리백을 형성하며 수비를 보강하기도 했지만 세도로프 감독 이번에는 니실랴를 투입하여 더욱 공격적인 라인업을 들고 나왔습니다.”
“발렌시아전에서 퇴장을 당한 가야 아닙니까? 이제 18살의 어린 선수를 퇴장당한 다음 경기에 바로 투입하는 강수를 두었는데요.”
“어제 있었던 징계위원회에서 앞으로 리그 3경기 출전 금지를 내렸거든요. 36라운드 세비야전부터 38라운드 테베리페전까지 출전하지 못하는 가야입니다. 어제 징계위원회가 끝나고 가진 인터뷰에서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며 큰 멘탈은 회복된 것으로 보였거든요. 오늘 경기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지켜봐야 하겠습니다.”
“리버풀의 제라드 감독. 오늘도 역시 제임스 케인 골키퍼를 선발로 내세우며 4-1-2-3의 포메이션을 들고 나왔습니다. 상당히 공격적이라 평가받는 세도로프 감독보다 더욱 공격적인 전수이죠.”
“그렇습니다. 제라드 감독이 리버풀의 지휘봉을 잡고 지금까지 고수해온 4-1-2-3의 전술. 양쪽 윙백들이 적진 깊숙이 오버래핑을 하며 양쪽 윙어와 중앙의 공격수가 득점하는 폭발적인 공격력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시즌에도 경기당 3.6점을 기록하며 프리미어리그에서 최고의 득점력을 선보이고 있는 리버풀입니다.”
“라리가 최고의 득점력을 가진 레알 마드리드와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득점력을 가진 리버풀. 말 그대로 창과 창의 대결이 펼쳐질 리버풀의 홈구장 안필드입니다. 홈팀인 리버풀의 선공으로 챔피언스리그 4강 첫 번째 경기가 펼쳐집니다.”
***
“살살하자고.”
“뭘 살살해. 그쪽이나 살살하세요. 제라드 감독님 눈빛이 이글이글 타고 있는데.”
인수는 대표팀에서 자주 만났던 리버풀의 케인을 비롯한 선수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번 시즌 프리미어리그에서 아슬아슬하게 1위를 달리고 있는 리버풀. 지난 시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우승을 내줬기에 이번 시즌 다시 우승을 노리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멘체스터 시티와 우승을 경쟁하고 있었다. 이제 4경기를 남겨두고 승점 1점 차. 누구도 우승을 장담할 수 없는 아슬아슬한 경쟁을 이어가고 있었다.
다만 맨체스터 시티도 리버풀과 같이 혹독한 일정이라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양 팀 모두 FA컵 8강에서 탈락해 4강과 결승이라는 부담은 없었지만 남은 일정이 녹록지 않다는 점도 누가 우승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네 친구한테 4일 후에 살살 해달라고 말 좀 전해주지 않을래? 유로파리그는 확정 지었잖아.”
“오늘 3골 차이로 져주면 전해줄게요. 에디한테 부탁해야 하는데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어요?”
“집어치워. 그냥 이기고 말지.”
“잘해보자고요.”
확장에 확장을 거듭해 6만 5천여 석이 된 안필드.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많은 이야기가 있는 구장이었다. 특히 제라드 감독 부임 이후 우승컵을 착실하게 쌓아가고 있었지만 빅이어만큼은 가져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 팬들은 제라드 감독에서 국내용 감독이라는 딱지를 붙일 만큼 빅이어에 대한 갈망이 높았다.
“이번 시즌에는 우리가 우승할 테니 얌전히 비키라고.”
“해보자고요.”
친분이 있는 선수들 간의 대화만큼이나 경기는 초반부터 빠른 속도로 전개됐다.
선축을 가져간 리버풀. 양쪽 윙백인 빌리와 토마스가 레알 마드리드의 진영으로 빠르게 침투했다. 중앙으로 이동한 윙어들과 빠르게 2:1 패스를 통해 돌파해 들어갔다.
“걷어내. 다들 자기가 맡은 자리 고수해.”
경기가 시작되기 전 리버풀의 빠른 공격 속도에 대해 충분한 수비전술을 지시했던 세도로프 감독이었다. 로카의 프로그램에 리버풀 선수들의 데이터와 레알 마드리드 선수들의 데이터를 입력해서 돌린 결과 가장 좋은 전술을 도출해냈다. 그 결과를 가지고 세도로프 감독이 현장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낸 수비 전술. 0점으로 막아내지는 못하지만 리버풀의 패스 길목을 차단한 수 있는 가능성은 만들었다.
“앞으로 보내.”
빌리가 공을 잡았을 때 55퍼센트의 확률로 최전방 공격수인 샬리에게 패스하는 경향이 높았다. 안전하게 오른쪽 윙어인 토레에게 패스하는 확률도 34퍼센트나 됐지만 공격적인 선수이다 보니 한 번에 중앙으로 연결하는 패스 빈도가 더 높았었고 가르시아는 샬리에게 향한 패스를 끊어냈다.
가르시아가 끊어낸 공을 니실랴에게 연결하자 레알 마드리드의 양쪽 윙백인 가야와 웨아가 달리기 시작했다. 4-1-3-1-1의 날카로운 창과 같은 레알 마드리드의 이번 시즌 전술. 그 전술이 살기 위해서는 중앙을 번갈아 가며 맡고 있는 인수와 마린의 패스 연결이 중요했고 두 선수는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해 내고 있었다. 더욱이 윙백들의 오버래핑이 활발하며 공을 뒤로 돌릴 여유까지 있었다.
“하인스.”
니실랴의 패스를 받은 마린은 바로 전방에 있는 하인스에게 연결했다. 오버래핑한 상대의 윙백들이 돌아오지 못한 상황. 레알 마드리드의 역습은 두 번의 패스로 인수에게까지 연결됐다.
이미 소튼 시절, 그리고 대표팀에서 인수를 경험했던 리버풀의 볼란치는 바로 인수에게 붙어 돌파를 막아냈다.
“디아즈? 아까 분명 하프라인에 있었는데. 언제 온 거예요?”
“방금 왔지. 그냥 공 넘겨주고 너희 진영으로 돌아가. 뭘 힘들게 공을 끌고 있어.”
리버풀의 볼란치인 티아고 디아즈. 전문 수비수답지 않게 빠른 발과 상대를 물고 늘어지는 독기가 있어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인 레쉬포드가 가장 사랑하는 수비형 미드필더였다. 더군다나 대표팀 연습에서 인수를 가장 많이 상대해본 수비수가 디아즈였다. 그런 디아즈가 인수를 마크하니 인수도 쉽사리 돌파가 어려웠다.
“그럼 패스하면 되지.”
인수에게 시선이 쏠려있을 때 코프가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인수가 바로 찔러준 패스를 받은 코프. 페널티지역 외곽이었지만 노마크 상태였기에 강한 중거리슛을 날렸다.
“어딜.”
비록 대표팀에서 은퇴하긴 했지만 아직도 쌩쌩한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케인. 자신이 왜 잉글랜드의 골키퍼를 맡았었는지 그리고 지금도 리버풀의 골키퍼를 맡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듯 가볍게 날아 코프의 공을 잡아 앞으로 넘어졌다.
서로 날카로운 공격을 주고받은 두 팀. 이제 시작이라는 듯 서로의 골문 안에 공을 넣기 위해 전진하고 또 전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