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사라고사전을 무승부로 마친 레알 마드리드는 연이어 펼쳐진 리그 19라운드 에스파뇰과의 경기를 7:0으로 승리했다. 사라고사와 무승부를 기록한 것을 화풀이하는 듯 에스파뇰을 90분 내내 자신의 진영에 묶어둔 채 일방적인 공세를 펼친 레알 마드리드. 전반을 5:0으로 마치고 인수와 마린 코프를 빼고 대체 자원을 투입했지만 그 후로 2골을 더 집어넣고서야 마무리됐다.
에스파뇰과의 경기가 끝나고 3일 후 레알 마드리드는 사라고사로 이동했다. 지난 1차전에서 주전을 내보내지 않아 무승부를 거두었다고 말하고 싶었는지 세도로프 감독은 퇴장으로 빠진 니실랴를 제외한 주전 선수들을 모두 투입했다. 니실랴의 자리 또한 스타일은 다르지만 주전이나 마찬가지였던 누네스를 투입하며 전력의 공백을 최소화했다.
“다들 완벽하게 밟아주고 와. 사라고사 따위가 넘볼 수 있는 레알 마드리드가 아니라고.”
지난 에스파뇰전에 출전하고 오늘 경기는 벤치에 쉬게 된 사라비아가 목소리를 높였다. 에스파뇰전에서 오랜만에 골맛까지 보았기에 목소리는 더욱 의기양양했다.
“다들 사라비아 말 들었지. 우리 클럽 소시오께서 밟아주라고 하신다. 너희들 연봉이 다 저런 소시오들 주머니에서 나오는 거 알고 있지? 무조건 이기자고.”
사라비아의 목소리를 들은 모라타는 선수들을 모아 다시 한번 주지시켰다.
사라고사의 홈인 에스타디오 라 로마레다에서 열린 2차전에서 레알 마드리드는 자신들의 화끈한 공격축구를 선보였다. 사라고사도 그대로 밀리지만은 않겠다는 듯 반격을 시도했지만 그럴수록 레알 마드리드는 더욱 매섭게 사라고사를 밀어붙였다. 전반 20분 마린의 중거리 골을 시작으로 코프와 모라타, 인수까지 골고루 골을 넣은 레알 마드리드는 전반을 4:1로 끝마치고 후반을 맞이했다. 후반 초반 누네스의 실수로 한 골을 내주긴 했지만 바로 인수의 중거리 골로 만회한 레알 마드리드는 사라고사를 5:2로 제압했다. 리그 4라운드와 코파 델 레이 16강 1차전 연속 비겼던 사라고사를 완전히 제압한 것만으로도 충분한 결과를 얻은 레알 마드리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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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파 델 레이 8강에 진출한 레알 마드리드와 발렌시아입니다. 라리가 1위와 2위를 달리고 있는 두 팀이 20라운드에서 다시 맞붙게 되었습니다.”
“리그 1위와 2위를 달리고 있는 양 팀이라고 하지만 레알 마드리드의 독주를 막을 수 없는 2위인 발렌시아입니다. 이제 19라운드밖에 펼쳐지지 않았지만 두 팀의 승점 차이가 12점 차이죠.”
“말씀하신 대로 이제 19라운드가 끝났는데 승점이 이렇게 벌어진 시즌은 몇 차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달리 말하면 이제 20라운드가 시작되는 참이거든요. 12점 차이면 뒤집을 수 있는 승점 차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뒤집을 수 있는 점수 차이이긴 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발렌시아는 레알 마드리드보다 바로 밑에서 추격하고 있는 바르셀로나와 AT마드리드, 세비야를 먼저 견제해야 2위인 발렌시아부터 5위인 세비야까지 승점 5점 차이거든요. 특히 기세를 올리고 있는 바르셀로나의 경우 챔피언스리그를 병행하지 않기에 일정상으로도 다른 팀들보다 우위에 있죠. 자칫 멈칫하는 순간 2위의 자리도 위험한 발렌시아입니다. 이번 경기에서 어떻게든 승점을 가져와야 할 발렌시아입니다.”
“그런 발렌시아 가장 경계해야 하는 선수가 바로 하인스죠. 지난 9라운드 발렌시아와의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고 출전하는 경기마다 득점을 추가하며 리그 득점순위 1위에 올라있는 하인스. 이 하인스를 어떻게 막을지 고민해야 하는 발렌시아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겨울 이적시장이 열리고 많은 루머가 떠돌던 발렌시아였습니다. 지난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에서 하인스를 철저하게 막은 AS로마의 톨로니도 발렌시아의 영입명단에 포함됐다는 루머도 있었죠.”
“발렌시아 지역지에서 톨로니를 집중보도하면서 시작된 루머죠. AS로마가 챔피언스리그에서 탈락하며 AS로마에서 톨로니를 이적시킬 수 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다음 경기들에 출전한 톨로니가 기복이 있는 모습을 보이며 협상들이 지지부진하다는 소식이 들렸죠.”
챔피언스 조별리그 5차전에 선발출장하여 인수를 거의 완벽하게 막아냈던 톨로니. AS로마에서는 새로운 수비 핵심으로 쓰기 위해 계속해서 선발 기회를 주며 경기에 출전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정상급 선수들을 상대로는 잘 막아내다 평범한 플레이에 뚫리는 모습을 보이며 이적금 협상이 원활하지 못했다. 인수를 막아내며 협상에 뛰어들었던 다른 구단들 중에는 톨로니의 다른 경기 모습을 보고 로마를 떠난 구단까지 있을 정도였다.
“오랜 역사만큼 많은 이야기를 써 내려간 양 팀. 앞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쌓아 나가게 될 이번 경기에서 어떤 모습을 보일지 같이 지켜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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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좀 천천히 해주면 안 될까? 우리가 많이 급해서 말이야.”
지난 시즌부터 벌써 5번째 맞붙는 인수와 발도르였다. 발렌시아 수비의 핵심이자 스페인 대표팀의 수비 핵심인 발도르는 번번이 인수에게 뚫리며 자존심을 있는 대로 구겼다. 그런 발도르가 전반 시작 휘슬이 불린 순간부터 인수에게 어깨를 들이밀었다.
“여기가 에스타디오 데 메스타야도 아니고 그렇게 거칠게 나와서 살아남을 수 있겠어요? 저기 관중석의 눈들이 안 보여요?”
인수는 거칠게 달라붙는 발도르를 슬쩍 피하며 눈으로 관중석을 가리켰다. 몇 번의 증축을 하며 9만 석 가까이까지 늘린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경기장에 레알 마드리드 팬들이 가득 차 있었다. 물론 발렌시아의 팬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레알 마드리드 팬들에 비해 모래밭의 한 줌의 모래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작은 규모. 그럼에도 발도르는 기가 죽지 않았다.
“이런 스페인의 경기장에서 내가 기죽을 거라 생각했어? 그래도 스패니쉬 아르마다의 선장이 난데 말이야.”
스페인 대표팀의 별명 스패니쉬 아르마다는 바로 무적함대를 뜻했다. 한때 대서양을 지배했던 스페인의 자랑 무적함대. 그 무적함대의 주장을 선장이라고 칭했다. 그리고 현 무적함대의 선장이 발도르였다.
“그 무적함대를 침몰시킨 것이 우리 잉글랜드였네요. 삼사자에서 맞서게 된다면 또 침몰시켜 드리죠.”
“해볼 수 있으면 해보든지.”
레알 마드리드는 초반부터 거칠게 밀고 나오는 발렌시아의 수비를 피해 공을 뒤로 돌렸다.
“패스 하나하나에 의지를 담아. 의미 없는 패스는 하지 마.”
공이 가르시아에게까지 돌아오자 세도로프 감독은 코치석에 서서 목소리를 높였다. 자신이 말해주지 않아도 레알 마드리드에서 뛰는 선수들이라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순간의 방심이 불러오는 실수를 하는 순간 위험에 처할 수 있었기에 세도로프 감독은 계속 후방으로 공이 올 때마다 소리를 질렀다.
세도로프 감독의 외침이 신호탄이 되었는지 가르시아의 패스가 단 한 번에 모라타 쪽을 향했다. 레알 마드리드 후방으로 공이 넘어가 발렌시아 수비의 간격이 벌어졌을 때 한 번에 전방으로 넘어오는 패스를 노린 가르시아. 약간 긴 패스를 잡으러 모라타가 터치라인 끝까지 달려보았지만 긴 패스는 터치라인 아웃이 되고 말았다. 레알 마드리드에게는 아쉬운 패스였지만 발렌시아로서는 자칫 위험한 상황을 맞을 뻔 했던 상황이었다.
바로 이어지는 스로잉 공격에서 발렌시아는 니실랴의 허점을 뚫었다. 전방에서 후방으로 넘어가는 공격의 흐름을 끊기 위해 니실랴가 앞으로 나왔을 때 한 박자 빠른 패스를 통해 니실랴의 수비를 무시했다. 순간 니실랴와 후방 수비에 빈 공간이 생겼고 빠르게 자리 잡은 발렌시아의 공격수들이 중거리 슛을 때려보았지만 높이 뜨고 말았다.
아주 위험한 순간까지는 아니었지만 서로 공방을 한 번씩 주고받고 난 후 양 팀은 서로의 빈틈을 찾는 지루한 탐색전이 펼쳐졌다. 양 팀 모두 무리한다면 치열한 공세를 펼칠 수 있겠지만 이 경기 이후도 생각해야 했다.
레알 마드리드와 발렌시아 모두 코파 델 레이 8강에 올랐다. 이 경기가 끝나는 바로 3일 후 다시 시작되는 코파 델 레이 8강 1차전. 레알 마드리드는 이번 시즌 언더독이라 불리는 지로나를 만났다. 라리가2의 팀으로 8강의 당당히 한자리를 차지한 지로나. 단판 경기도 아니고 홈 앤 어웨이로 치러지는 일정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만났으니 힘이 빠질 만도 했지만 한번 해보겠다는 인터뷰를 당당히 남겼다. 반면 발렌시아는 가장 만나기 싫었던 AT마드리드를 8강에서 만났다. 1월 23일 AT마드리드와 코파 델 레이 1차전, 1월 26일 리그 21라운드, 1월 30일 코파 델 레이 3연전을 치르게 될 발렌시아. 다음 경기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일정이었다.
“제길. 누가 일정을 짜놓은 거냐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며 단 일격에 레알 마드리드의 숨통을 끊어 버리고 싶었던 발렌시아의 감독은 거칠게 바닥을 걷어찼다.
“AT마드리드와 연속 3연전이야 그럴 수 있다고 하지만 그 경기가 끝난 후 바로 라스팔마스 원정이라니. 이런 일정을 어떻게 소화하라는 거야.”
“감독님. 저기 기자들이 감독님을 찍고 있는데. 진정하시죠.”
“아니. 어떻게 진정하란 소리야. 도대체 라스팔마스나 테네리페 같은 팀을 라리가에서 받아주면 안 되는 거 아냐?”
발렌시아의 감독은 지난밤부터 하던 소리를 고장 난 녹음기처럼 반복했다. 클럽이 가장 힘든 시기가 1월부터 3월까지였다. 그런 힘든 기간에 팀 또한 자신 마음대로 풀리지 않으면 모든 감독이 느끼는 감정을 공유했다. 물론 팀 분위기가 좋은 감독은 제외하고.
“하인스.”
잠잠했던 공격의 시작은 인수의 발에서 시작했다. 초반부터 자신을 밀어붙이던 발도르를 크루이프턴으로 떨쳐낸 인수. 평소 잘 쓰지 않던 드리블 기술인 크루이프턴을 꺼내든 인수는 당황해하는 발도르를 뒤로 한 채 발렌시아의 진영을 뚫었다. 언제까지 당황해할 수는 없었기에 수비들이 인수에게 다가왔을 때 수비가 빈 공간을 찾아 뛰어든 마린이 손을 들었다.
인수에게 넘어간 패스를 자신의 발 앞에 가두는 것을 성공한 마린. 수비가 자신을 향해 뛰어 오자 바로 중앙으로 공을 밀었다. 인수가 앞에 막아선 선수를 따돌리고 전진하던 상황. 발렌시아의 중앙수비수는 마린의 스루패스를 막기 위해 슬라이딩을 했다.
“악.”
슬라이딩한 수비수의 발에 걸린 것은 공이 아니라 그 공을 먼저 잡은 소아레스의 발이었다. 수비수의 사각 지역에서 소아레스가 달렸기에 수비수가 보지 못하고 소아레스의 발을 걷어찼다. 다행이 발을 높이 든 것이 아니라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페널티 지역 안이었기에 레알 마드리드의 페널티킥이 주어졌다.
레알 마드리드의 코너킥과 프리킥, 페널티킥을 전담하는 키커는 인수였지만 인수는 소아레스에게 그 기회를 양보했다. 소아레스가 가져온 기회이기도 했지만 이번 시즌 하인스와 코프의 득점력이 폭발하면서 아직 9골밖에 터트리지 못한 소아레스였다. 이번 골을 넣으면 두자리수의 득점을 기록하는 만큼 그 기록을 위해 양보한 인수였다.
인수가 양보해준 기회를 침착하게 성공시킨 소아레스.
그 골을 기점으로 지지 않으려 공격적으로 변한 발렌시아와 그런 발렌시아를 받아치기 위해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는 레알 마드리드의 치열한 몸싸움이 계속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