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네가 존이 말하던 꼬맹이구나.”
AS로마의 장신 수비수 로렌초가 주장완장을 차고 인수에게 다가왔다.
186cm 인수도 작지 않은 키였지만 로렌초는 인수가 올려다볼 정도로 큰 키를 가지고 있었다.
“존이 거기서도 내 욕하고 다녔어요?”
“뭐라고?”
로렌초는 잠시 멍했다가 크게 웃었다.
“사이 좋다고 하더니 정말인가 보네.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누구랑요? 존이랑요? 존이 사기를 잘 쳐요. 그런데 존이 잘했었나요?”
인수는 능청스럽게 로렌초를 상대했다.
지난 시즌 AS로마에서 19골을 넣으며 팀 내 최다골의 주인공이 존이었다.
그런 존이 이적하며 득점력이 떨어질 것이란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레알 마드리드에서는 AS로마의 공격력을 무시하지 않았다.
단단한 수비를 바탕으로 경기당 1골에서 2골을 뽑아내는 공격진을 가지고 있었다.
존이 있었다면 높이도 조심해야 해서 까다롭겠지만 존이 빠진 상태에서 조심해야 할건 역습밖에 없었다.
역습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공격패턴을 바탕으로 수비진들이 훈련을 했기에 레알 마드리드 선수들은 진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리그마다 우승컵 모으는 것이 꿈이라며. 존이 그러던데.”
“와 존이 그런 것도 이야기해요? 할 수 있으면 하겠다는 거죠.”
유스에서 뛸 때 꿈이 뭐냐는 말에 인수는 월드컵을 포함해서 챔피언스리그, 그리고 자신이 이적할 팀에서 모두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것이라 말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진행 중이었다.
“언젠가는 세리에도 와야 할 거 아냐. 4대 리그 우승컵은 다 가져봐야지. 우리 로마로 오는 건 어때?”
AS로마 유스 출신으로 20년 이상 로마에서만 뛰고 있는 로렌초답게 은근슬쩍 레알 마드리드 선수들의 눈치를 보며 인수에게 물었다.
“아직은 이적할 생각이 없어서요. 그리고 그런 이야기는 랭커리지에게 이야기해야죠.”
레알 마드리드는 시즌이 끝나고 랭커리지에게 인수에 대한 재계약을 원했다.
3년 남은 계약기간에 2년을 더하고 주급을 인상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의해왔다.
인수와 상의한 랭커리지는 좀 더 고민해 보겠다면서 레알 마드리드와의 협상테이블을 치웠다.
“에이전트하고도 이야기해야겠지만 중요한 건 선수의 의지 아니겠어? 한번 잘 생각해봐.”
로렌초는 다른 선수들이 다가오자 윙크를 날리며 멀어졌다.
“뭐라는 거야?”
사라비아는 상대편 주장이 인수에게 말을 거는 것을 보고 다가와 물었다.
“아니에요. 오늘 질 생각이 없다네요. 우리도 질 생각이 없는데 말이죠.”
“수비밖에 못 하는 놈들이. 오늘 뚫어버려.”
세도로프 감독은 경기 시작 전 인수와 마린을 불러 프리롤을 주었다.
‘오늘 너희들 맘대로 휘저어. 로마의 수비를 깨는 건 돌파밖에 없어. 거칠게 나올 거니까 부상은 조심하고.’
세도로프 감독은 두 사람에게 부상을 조심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유럽 4대 리그 중 가장 더티한 플레이가 난무하는 리그가 세리에 A였다.
테크니스트들의 무덤이라 불리는 세리에A이니 만큼 특별히 주문했다.
“감독님 말씀 기억하지. 저 녀석들 몸으로 부딪치고 태클을 주저하지 않으니까 조심해.”
“알았어요.”
인수는 사라비아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주심을 따라 제일 앞서 경기장으로 나갔다.
***
삐익.
주심은 인수가 태클에 걸려 넘어지자 바로 휘슬을 불었다.
전반 10분도 채 되지 않았지만 태클이 3번째였다.
“괜찮아. 미안해.”
AS로마의 수비수인 스피나초는 인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됐어.”
인수는 스피나초의 손을 뿌리치고 스스로 잔디를 짚고 일어섰다.
자신의 기를 죽이려는 듯 실실 웃으며 손을 내미는 스피나초를 밀쳐버리고 싶었지만, 상대의 도발에 말려드는 것이었다.
“저 녀석들 너무 더티하게 나오는데.”
“한번 밟아버리고 싶은데 타이밍을 잘 맞추네요.”
“날마다 하는 놈들이니까 지들 다칠 건 다 아는 거겠지. 그나저나 뚫을 만해?”
코프는 인수와 마린을 모두 보며 물었다.
주심은 10분도 되지 않은 시간에 세 번이나 태클을 한 스피나초에게 주의하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열리는 챔피언스리그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경기였기에 주심도 가장 베테랑 주심이 배정됐고 양측에도 주심이 특별히 주의를 시킨 경기였다.
그런 경기에서조차 경고성 태클이 계속 나오고 있는 것을 주심이 강하게 선수들에게 당부하고 있었다.
“마린. 패스 나한테 다 넘겨. 드리블은 내가 다 할게. 내가 너한테 공 넘기면 넌 코프한테 넘기기만 해.”
세 번이나 넘어지긴 했지만 점점 태클 타이밍이 잡히고 있었다.
다음번에는 태클을 피할 수 있을 확신이 들었다.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상대에게 카드를 먹일 만한 반칙은 얻어낼 수 있을 거 같았다.
“괜찮겠어요?”
“상대는 지역수비를 하고 있어. 뚫으면 공간이 생길 수밖에 없어. 나를 막으로 오면 수비가 헐거워질 거야.”
마린이 걱정하는 투로 물었지만 인수는 괜찮다는 듯 마린의 어깨를 두드렸다.
“네가 찰 수 있으면 차. 내가 공간은 만들어 볼 테지만 저 녀석들 수비가 보통이 아냐.”
“알았어요. 경기 시작하죠.”
주심이 스피나초에게 주의를 다 주었는지 인수에게 다가와 경기를 시작하라는 신호를 주었다.
다시 맞붙은 인수와 스피나초.
인수는 공을 앞으로 내밀며 스피나초를 자극했다.
처음 두 번은 인수의 도발에 걸렸지만 이제는 더 이상 속지 않겠다는 듯 자세를 낮추고 인수의 움직임을 살폈다.
인수는 슬슬 발로 밀고 나가며 스피나초와의 거리를 좁혔다.
지난 세 번 모두 이 행동 다음에 좌우로 빠져나가는 인수를 막기 위해 태클을 했던 스피나초였다.
인수는 이번에도 발등으로 공을 살짝 띄운 후 지난 세 번보다 더욱 빠르게 스피나초를 지나쳤다.
아까와 같은 움직임이었지만 이번에는 더욱 속도를 올리며 스피나초가 손을 뻗어도 닿지 못할 정도를 유지하며 빠져나가는 인수. 그걸 막기 위해서는 다시 태클해야 했지만, 이번에는 뒤에서 태클해야 하는 각도였다.
이미 구두로 강한 경고를 받았던 스피나초였기에 뒤에서 태클한다면 무조건 카드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빠져나가는 인수를 내버려 두기에는 자신의 뒤가 너무 텅 비어 있었다.
자신들의 수비력을 믿기에 지역방어의 선택한 AS로마였다. 그러나 이미 뒤로 물러서며 촘촘해진 수비진이 있었지만, 자신의 뒤는 바로 페널티지역이었다.
로렌초가 있긴 했지만 레알 마드리드의 주득점원인 코프를 전담으로 마크하고 있었기에 빠르게 반응하기 힘들었다.
“내가 맡을게.”
스피나초가 뚫리자 바로 로렌초가 앞으로 나서며 인수와 코프 사이의 패스 길목을 막아섰다.
로렌초가 길목을 막자 눈을 돌려 마린을 확인했지만 마린도 마크하는 수비 때문에 공을 쉽게 받을 위치가 아니었다.
순식간에 판단한 인수는 스피나초와 로렌초가 다가오기 전에 한 발 더 치고 들어갔다.
로렌초가 발을 뻗어보았지만 이미 페널티지역이었기에 위험한 태클은 할 수 없었다.
로렌초에게 방해를 받긴 했지만 바로 다음 발을 내딛는 것으로 중심을 잡은 인수는 각을 좁히며 다가오는 골키퍼를 피해 옆으로 공을 밀었다.
골키퍼가 급하게 손을 뻗어 막아보려 했지만 공은 스쳐 지나갔고 로렌초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상태가 된 코프가 가볍게 인사이드로 밀어 골망을 철렁였다.
극단적인 수비 전술로 나온 AS로마는 선취점을 내주자 벤치를 바라보았다.
원정경기였기에 동점으로 마무리하고 나머지 경기에서 승점을 쌓을 목적이었던 AS로마는 감독의 선택을 기다렸다.
“지켜. 철저하게 역습을 노리고 당장은 지켜.”
레알 마드리드와 AS로마가 소속된 E조는 아약스와 클럽 브뤼허와 묶여있었다.
벨기에 퍼스트 디비젼1에 소속된 브뤼허는 치열한 조별 예선을 뚫고 올라왔다. 조별 예선을 뚫을 정도로 안정된 조직력을 갖추긴 했지만, AS로마가 신경 쓸 정도의 팀은 아니었다.
모든 전문가의 예상대로 레알 마드리드와 AS로마와 아약스 중 한팀이 16강에 올라갈 것으로 예상했다.
전반 초반에 실점한 만큼 포기할 때가 아니긴 했지만 현실적인 고민을 시작해야 했다.
“뒤로 돌려. 뒤에서부터 만들어나가.”
오늘도 코치석에 나와 선수들에게 소리치던 세도로프 감독이 공을 잡은 니실랴에게 소리쳤다.
AC밀란에서 선수 생활과 감독까지 하며 많이 상대해 본 AS로마였다.
선수들은 다 바뀌었지만 경기하는 스타일 자체는 크게 변하지 않았기에 그 본질을 잘 알았다.
니실랴는 세도로프 감독의 말을 듣고 골키퍼에게 공을 돌렸다.
레알 마드리드가 골키퍼에게까지 공을 돌렸지만 자신의 진영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AS로마.
“천천히 숨돌리면서 나가. 한 번에 뚫어.”
산체스는 가르시아에게 공을 넘기며 소리쳤다.
아랑게스와 후베이루가 앞으로 나간다면 좀 더 패스가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겠지만 역습상황에서 위험할 수 있었다.
AS로마와 상대하기 직전 작전회의에서 세도로프 감독은 패스로 상대의 지역방어를 뚫기보다 인수와 마린의 개인기로 돌파할 것을 주문했다.
그렇기에 자신들의 역할은 어떻게든 인수와 마린에게 공을 넘기면 그 둘이 해결할 것을 기대야 했다. 만약 둘이 차단당한다면 다음 상황에서 펼쳐질 상대의 역습을 막아내는 것이 자신들의 역할이었다.
“니실랴.”
니실랴에게 연결된 패스는 이번에는 사라비아 쪽을 향했다.
이제까지 AS로마를 흔들던 돌파는 인수가 담당했기에 수비의 신경이 인수 쪽에 쏠렸고 자연스럽게 양사이드에 대한 수비가 느슨해졌다.
터치라인을 따라 골라인까지 돌파한 사라비아는 중앙으로 크로스를 올렸다.
사라비아의 크로스는 로렌초의 헤더에 클리어됐지만 마린이 리바운드의 위치를 선점했다.
떨어지는 공을 그대로 걷어찬 공을 날카롭게 AS로마의 골대로 향했고 골키퍼가 겨우 펀칭으로 골라인 아웃을 만들었다.
“잘했어.”
인수는 골키퍼의 선방에 막히긴 했지만 자신감 있게 찬 마린과 하이파이브를 했다.
상대에게 역습의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 공격진의 역할이었고 마린은 그 역할을 충분히 수행해냈다.
인수는 코너로 천천히 걸어갔다.
상대는 세리에A에서도 가장 큰 수비수들을 보유한 팀이었다. 가르시아와 마르체나가 키가 크긴 했지만, 로렌초와 비교하니 머리 하나 차이는 있어 보였다.
문전으로 띄워주는 것을 포기한 인수는 눈길을 돌려 외곽 사이드를 보았다.
마린과 후베이루, 사르비아가 대기하고 있는 후방은 문전보다 여유 있는 모습이긴 했지만 바로 슛으로 가져가기에는 수비수들의 위치가 너무 좋았다.
인수는 손을 들어 손가락을 쫙 폈다.
인수의 사인에 맞춰 문전에 대기하던 코프와 가르시아, 마르체나가 두걸음 물러섰다.
레알 마드리드의 장신들이 뒤로 물러서자 로렌초를 비롯한 AS로마의 수비수들도 따라붙었고 약간의 공간이 생겼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바로 슛을 가져간 인수.
골키퍼 키를 넘어 먼 쪽으로 향한 공은 AS로마 골포스트를 맞고 골라인 아웃됐다.
골포스트를 맞고 골라인아웃되긴 했지만, 상대에게 역습을 내줄 위험에서 벗어난 레알 마드리드는 재빨리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