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인수는 심호흡을 크게 했다.
캄 누우.
레알 마드리드와 세비야의 경기였음에도 관중석에는 온통 꾸레들뿐인지 빨간색과 파란색 스트라이프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뿐이었다.
그들이 내지르는 응원가 또한 바르셀로나 응원가가 울려 퍼졌다. 카탈루냐인들답게 바르사에 대한 충성도 높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와 진짜 너무하네. 분명히 협회에서 레알 마드리드 팬들과 세비야 팬들을 위해 결승전 표를 분배한다고 했는데.”
거의 10만 석에 이르는 좌석을 가진 캄 누우였기에 양 팀의 팬들에게 표를 분배했음에도 거의 보이지도 않았다.
“괜히 캄 누우가 아니잖아요. 베르나베우에서 해도 마찬가지일걸요.”
인수는 투덜거리는 코프에게 대꾸하고 휘슬을 물었다가 떼는 주심을 보았다.
“와, 저기 관중석 봐. 우리가 골을 넣으면 경기장으로 뛰어나올 듯한 눈빛을 하고 있는데.”
“설마요.”
“하여튼 경기장에 신경 쓰기에도 힘든데 관중석까지 신경을 써야 하다니.”
“무시해요.”
인수와 코프가 센터서클에서 시답지 않은 말들을 주고 받고 있을 때 주심도 심판석과 대화가 끝났는지 다시 휘슬을 입에 물었다.
삐익.
주심의 휘슬로 시작된 경기. 2038-39 코파 델 레이 결승전의 시작이었다.
요즘 레알 마드리드의 경기를 철저히 분석했는지 수비하는 선수들은 처음부터 긴장을 놓지 않고 센터서클의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골키퍼 역시 앞으로 나오지 않고 골대를 지키며 센터서클을 노려보고 있었다.
코프가 가볍게 밀어준 공을 받은 인수는 공을 차 골키퍼인 산체스에게 보냈다.
천천히 상대를 끌어내며 압박하려는 전술.
지난 세비야전에서 그렇지만 세비야란 팀 자체가 압박에 능한 팀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마냥 소극적으로만 나오는 팀이었다면 리그 4위와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 올라오지도 못했다.
강약을 잘 조절할 줄 아는 팀이 세비야였다.
라리가 우승은 1회밖에 되지 않지만 유로파에서는 그 어느 팀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많은 우승을 거둔 팀이었기에 더 신중히 경기를 풀어나가기로 한 세도로프였다.
“이번 경기는 우리한테 넘기고 너희는 내년에 우승하라고.”
“마지막 경기 베티스하고 경기해야 하잖아. 설마 이번 경기에서 힘을 다 쓰고 베티스에게 지려고?”
인수가 앞으로 침입하자 세비야의 수비가 딱 붙어서 말을 걸자 인수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엘 클라시코보다는 덜 알려졌지만, 그에 못지않은 더비가 세비야 더비인 세비야와 레알 베티스와의 더비경기였다.
두 팀이 경기하면 기본으로 옐로카드 6장 이상과 레드카드가 기본적으로 나오는 경기가 펼쳐질 만큼 치열했다.
더구나 세비야 구단주가 베티스 구단주를 계단에서 밀어버린 사건이 있을 정도로 두 팀의 더비는 말 그대로 혈투였다.
“설마 같은 레알을 같이 잡아야지.”
“같은 레알이라. 그렇게 생각해?”
스페인에는 레알의 칭호를 받은 팀이 여럿 존재했다.
스페인 왕실에서 공인받은 팀들은 모두 레알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지만 그래도 레알이라면 레알 마드리드를 칭하는 뜻이었다.
“너희도 한 번 당해봐야 하지 않겠어?”
인수가 수비수와 붙어 신경전을 펼치고 있을 때 마린은 인수의 등 뒤로 공을 보냈다.
등진채 받은 패스였지만 인수는 실수하지 않고 발을 움직여 공을 자신의 앞에 떨구고 수비와 대치했다.
이미 지난 21라운드에 당해본 경험이 있어서였는지 섣불리 붙지 않고 일정 거리를 유지했다.
“입으로 그렇게 털었으면 뺏으러 와야 하는 거 아냐?”
“내가 왜?”
상대는 거리만 유지한 채 인수가 가진 공을 뺏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다만 공을 가지고 자신을 지나치지 못하게 만들려는 목적이 눈에 보였다.
“그럼 공을 넘기면 되지.”
인수는 재빨리 발을 놀려 수비의 키를 넘겨 공을 보냈다.
어느 순간 뒤로 돌았는지 마린이 인수의 공을 받고 왼쪽 사이드로 돌파하는 사라비아에게 패스했다.
사라비아 역시 마린의 패스를 받고 바로 크로스로 연결했지만 정확하게 올리지 못하고 골라인아웃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나만 막는다고 되는 게 아니야. 우리 레알은 그리 만만한 팀이 아니거든.”
인수는 마린에게 패스하고 페널티지역까지 침입했다 골라인아웃이 되자 자신을 따라온 수비수에게 말하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경기 초반이었지만 물 흐르듯 이어진 레알 마드리드의 공격에 세비야는 위협감을 느끼고 수비를 고착했다.
다만 세비야의 주 공격 루트인 왼쪽 사이드는 줄기차게 레알 마드리드를 괴롭혔다.
콜과 미라도 콤비의 공격은 세비야가 리그 4위와 코파 델 레이 결승전까지 올라오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물론 왼쪽 사이드가 강한 만큼 오른쪽을 맡고 있던 아쿠오의 침입도 무섭긴 했지만 레알 마드리드의 수비는 비교적 여유롭게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하인스.”
콜을 대인 마크하던 니실랴는 태클로 공을 뺏어내고 전방에 있던 하인스를 불렀다.
초반 마린의 패스로 공격이 진행되자 세비야는 마린에게까지 대인마크를 붙여 마린에게 공을 넘기기 부담스러웠던 니실랴는 전방에 있는 인수에게 바로 공을 넘겼다.
인수도 마린과 마찬가지로 대인마크가 붙어있긴 했지만 인수의 키핑 능력을 믿은 니실랴의 선택이었다.
니실랴의 강한 패스를 발등으로 받아낸 인수는 그대로 수비의 키를 넘기고 등진 채로 돌파했다.
공을 바라보다 순식간에 이루어진 연속동작에 인수를 놓친 수비는 인수의 유니폼을 잡아봤지만 인수는 힘으로 뿌리치고 돌파해냈다.
이제 남은 것은 최종수비수 2명뿐.
코프를 막던 수비수 두 명 중 한 명이 인수를 막기 위해 달려왔지만 인수는 가볍게 오른쪽으로 공을 밀었다.
인수가 돌파하자마자 중앙으로 침투하던 소아레스가 공을 받았고 다시 중앙으로 연결했다.
수비수가 발을 들어 공을 차단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공은 코프에게까지 연결됐다.
침착하게 골대를 향해 인사이드킥으로 밀어 넣은 코프.
전반 24분. 세비야의 골망이 출렁거렸다.
세비야의 선수들은 순간 손을 번쩍 들어 오프사이드를 주장했지만 왼쪽 사이드 깊숙이 파고들었던 사라비아를 막기 위한 수비 위치가 깊었기에 말도 되지 않는 주장이었다.
코프가 코너 깃대까지 뛰며 포효하자 캄 누우에 모여든 바르셀로나 팬들은 한목소리로 야유를 퍼부었다.
“골 넣으면 관중들이 뛰어 들어올 것 같다면서요. 도발도 적당히 해요.”
인수가 포효하는 코프의 입을 틀어막자 거칠게 고개를 흔든 코프였다.
“오라고 해. 다 이길 수 있을 거 같아.”
코프는 호기로운 말을 하긴 했지만 워낙 관중석이 가까이 있었기에 인수에게만 들릴 정도로 목소리가 낮았다.
“하하.”
인수는 또 하나 코프를 놀릴 거리가 생겼음을 알고 신나게 웃으며 레알 마드리드 진영으로 돌아왔다.
***
“오늘 아랑게스의 움직임이 너무 좋은데요.”
“라스팔마스전에서 퇴장을 당하고 2경기 출장 정지를 당했죠. 라스팔마스전 이후 레알 마드리드에 리그 경기는 두 경기가 남았을 뿐이었으니 남들보다 일찍 리그를 마감하게 된 아랑게스입니다. 그게 약이 되었는지 오늘 철저하게 미라도를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오늘 세비야가 자랑하는 콤비. 콜과 미라도가 화면에 잡히지 않은 것이 꽤 오래됐습니다.”
중계석에서는 경기장을 모두 내려다볼 수 있어 선수들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었지만 시청자들 입장에서는 카메라가 잡아 주지 않는다면 선수들의 움직임을 볼 수 없었다.
그렇기에 경기 중반부터 경기를 본 시청자라면 콜과 미라도가 출전하지 않았나 하는 궁금증이 생길 수도 있을 정도로 화면에 잡히지 않았다.
“그만큼 니실랴와 아랑게스가 두 선수를 철저하게 막고 있습니다. 니실랴가 체력이 좋은 선수이긴 해도 전반이 얼마 남지 않는 지금 벌써 8킬로 가까이 뛰고 있거든요. 니실랴의 평균이동거리가 9.8킬로인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오버페이스인지 알수 있죠.”
“단순히 생각해도 후반까지 버틸 수 있는 체력이 될지요?”
“아마 세도로프 감독이 니실랴에게 따로 주문을 했을 겁니다. 니실랴가 빠지더라도 레알 마드리드에는 누네스라는 신예가 있거든요. 포르투갈 출신의 중앙수비수였지만 이번 시즌 수비형 미드필드로 성공적으로 변신했죠.”
“그럼 후반전에는 누네스의 모습이 보이겠군요. 계속 공격이 끊기고 있는 세비야로서는 니실랴에 이어 누네스까지 투입된다면 암울할 것 같습니다. 주심이 휘슬을 입에 물었습니다. 전반 24분 코프의 골로 1:0으로 앞선 레알 마드리드입니다. 전반전 어떻게 보셨습니까?”
“레알 마드리드는 1:0이란 스코어가 아쉬울 겁니다. 코프의 골 이후 유효슈팅 숫자만 5개나 되거든요. 슈팅 숫자는 13개에 이를 정도로 일방적으로 세비야를 밀어붙였지만, 골키퍼의 선방과 위력적인 슛들이 골대를 비껴가며 추가골을 기록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세비야는 전반 1:0으로 끝내며 후반전을 기대할 수 있는 스코어가 되었습니다.”
“세비야가 후반전에는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할까요?”
“콜을 괴롭히던 니실랴가 바뀐 순간이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수비형 미드필드로 성공적인 변신을 하긴 했지만, 시즌 중에 바꾼 덕분에 아직 스피드가 중앙수비수일 때의 스피드거든요. 콜이 전반에 많이 뛰긴 했지만, 세비야가 이기기 위해서는 누네스를 스피드로 눌러야 할 겁니다. 물론 레알 마드리드에서도 잘 알겠지요.”
“그럼 레알 마드리드와 세비야의 후반전 경기로 돌아오겠습니다.”
***
후반 시작은 전반전과 비슷한 양상이 계속됐다.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레알 마드리드와 막기 급급한 세비야.
그 분위기가 바뀐 것은 해설자의 예상대로 니실랴가 누네스로 바뀌고 난 후였다.
세비야에서도 가장 빠른 스피드를 자랑하는 콜이 누네스를 번번이 따돌리며 공을 잡았다.
오랜만에 소유하는 공이었는지 정확한 패스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점점 소유하는 횟수가 늘어나며 패스의 정확도가 올라가고 미라도와 아쿠오에게 정확히 패스가 되었다.
아직은 잘 막아주고 있긴 했지만, 세비야의 공격이 점점 날카로워지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느끼고 있었다.
“하인스.”
마린은 자신을 막아선 선수를 돌파하지 못하고 공을 인수에게 넘겼다.
인수 역시 점점 정확히 공을 차단하는 모습을 보이는 수비를 따돌리지 않고 파고든 마린과 패스를 주고받으며 수비를 뚫었다.
“이번엔 무조건 넣어야 해.”
세비야가 만만한 팀이 아니었기에 이번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따라잡힐 수도 있는 경기장의 분위기.
인수는 더욱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파고드는 마린에게 패스를 해야 하는 타이밍. 수비는 그것을 생각하고 인수가 파고드는 길목을 막았다.
수비의 예측과 다르게 인수는 마린에게 패스하는 대신 마린의 등 뒤를 통과하여 오른쪽 사이드로 드리블했다.
마린을 막고 있는 수비수가 절묘하게 스크린을 해주는 상황. 인수의 눈에 골대가 크게 보였다.
패널티지역 밖이었지만 이 정도 거리면 충분했다.
인수의 발이 크게 휘둘러지고 인수의 슛을 세비야 골키퍼의 손을 쳐내며 골망을 흔들었다.
골키퍼의 손을 쳐 낼 정도로 강력한 슛.
골망이 흔들리는 것을 본 인수는 코너로 뛰며 주먹을 불끈 쥐어 하늘 높이 들었다.
점차 레알 마드리드의 눈에 코파 델 레이 우승컵이 보였다.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라리가에 이어 시즌 세 번째 우승컵.
유럽 리그에서는 일찌감치 탈락하긴 했지만 최강팀이란 것을 증명하는 경기였다.
후반 세비야가 추격하는 골을 터트리며 분전했지만 후반 종료 전 인수의 두 번째 골이 터지며 레알 마드리드는 3:1로 코파 델 레이 우승을 확정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