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악. 늦었다.”
비행시간은 왕복 5시간 30분으로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영국에 있던 1박 2일 동안 쉴 틈 없이 움직였기에 자신도 모르게 피곤이 쌓였던 인수였다.
그렇기에 아침에 늦잠을 자서 훈련 시간이 1시간 30분밖에 남지 않았다.
레알 마드리드가 선수들에게 부과하는 벌금의 종류는 다양했다.
시즌 중 받는 휴가 기간에 마드리드 외의 지역으로 이동하려고 해도 구단에 보고를 해야 했고, 휴대폰의 무음모드를 어길 시에도 벌금, 훈련 시간에 늦을 시에도 벌금을 부과했다.
특히 훈련 시간의 지각은 그 어떠한 경우에도 봐주지 않았기에 인수는 급하게 세수만 하고 사우다드 레알 마드리드로 향했다.
“봐. 맞지. 내놔.”
인수가 훈련소집 시간 3분 전에 도착하자 사르비아는 코프에게 손을 내밀었다.
“와. 역배에 걸었다가 털렸네. 도대체 몇 명이야?”
항상 훈련장에 제일 먼저 도착하는 인수였기에 선수들이 모였을 때 인수가 없는 것에 의아해했다.
그러다가 30분이 지나고 훈련소집 시간 10분 전에도 인수가 도착하지 않자 선수들은 내기를 걸었다.
코프를 대표하는 소수파는 인수도 인간인데 늦을 수도 있다면서 지각에 벌금을 걸었고, 사르비아와 산체스를 대표하는 다수파는 인수는 인간이 아니라서 절대 늦지 않을 것이라는 쪽에 내기를 걸었다.
마드리드 고급 식당에서 선수단에 밥을 사는 내기였기에 수천 유로에 달하는 내기였다.
“내가 무슨 인간이 아니야. 사람을 로봇으로 만들고 있어?”
뒤늦게 내기의 내용을 들은 인수가 큰소리를 질렀지만 다들 무시하면서 지나쳤다.
그런 인수에게 마린이 다가왔다.
“하인스, 이 영상 봤어요?”
“훈련 중에 핸드폰을 소지하고 있으면 벌금인 거 몰라? 왜 핸드폰을 가져온 거야?”
“이것만 보고 가져다 놓을 테니까 이거 봐요.”
인수와 마린이 소란스러워지자 선수들이 하나둘 모였다.
마린이 튼 영상은 레이가 등 뒤로 오는 공을 돌려차기로 골을 넣는 장면이 반복해서 나오고 있었다.
인수가 런던에서 마드리드로 돌아와 잠에 빠져있을 무렵 레이의 골은 해외토픽이 되어 세계로 송출됐다.
특히 레이가 인수의 여자친구인 것을 아는 영국과 한국, 마드리드 지역에서는 더욱 유명세를 탔고 모든 방송 매체에서 이 장면을 토픽으로 다루었다.
특히 올해 푸스카스상 후보로 올리며 성별을 불문하는 푸스카스상에 여자 선수가 이제껏 수상한 점이 없다는 것을 들어 성차별이란 소리까지 하며 레이의 골이 수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그런 만큼 레알 마드리드의 선수들도 이 영상을 본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왜?”
모여든 선수들 중 산체스가 마린을 향해 물었다.
“몰랐어? 이 여자애 하인스 여자친구잖아.”
레이가 인수의 여자친구라는 것이 비밀이 아니었기에 선수들 중 레이를 아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중 한 명이 코프였다.
“어? 그랬어?”
레이가 인수의 여자친구인 것을 모르던 선수들이 입을 모아 소리쳤다.
“와 등 뒤에 눈이 달렸어? 어떻게 등 뒤로 지나가는 공을 찰 수 있어? 그것도 오버해드킥도 아니고 돌려차기로?”
“골키퍼가 꼼짝도 못 하잖아. 산체스 이거 막을 수 있어요?”
“내 반사신경이면 막을 수 있지 않을까? 공이 느렸잖아.”
“거짓말하지 마요. 빌바오 녀석들한테 3실점이나 한 주제에.”
“그날 내 잘못이 아니었잖아. 솔직히 말해봐. 내 탓이었어?”
산체스가 펄쩍펄쩍 뛰었지만 선수들은 무시했다.
산체스가 흔들리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보드진에서 산체스의 에이전트와 재협상을 시작했기에 산체스 역시 반발이 날카롭지는 않았다.
선수들 역시 산체스의 상황을 알고 있기에 편하게 다시 장난을 걸었다.
“근데 하인스 여자친구가 축구선수였어? 다른 영상은 없어?”
마린은 선수들의 물음에 동영상 사이트 제일 위에 있는 레이의 매드무비를 틀었다.
머리, 발은 물론이고 허벅지, 종아리, 등은 물론이고 무릎이나 뒤통수로도 골을 넣는 레이의 모습이 보였다.
“와. 골을 이렇게도 넣는다고. 골 넣는 것만 보면 하인스보다 더 잘하는데.”
“와 골 넣는 기계네. 그냥 근처에만 떨어뜨려 주면 다 넣는데.”
마린은 선수들의 감탄사에 매드무비가 끝나자 그 영상 바로 뒤에 위치한 영상을 틀었다.
레이가 드리블하다 공에 걸려 넘어지는 모습.
골키퍼와 1:1 찬스에서 제치기 위해 공을 드리블하다 골라인 아웃을 만드는 모습.
가슴 트래핑하다 상대방에게 공을 넘기는 모습 등.
골 넣는 이외의 장면이 우스꽝스러운 효과음과 함께 흘러나왔다.
지금은 매년 훈련을 통해 좋아지고 있긴 했지만 이 영상이 만들어졌을 때는 골 넣는 것만 빼면 쓸 수 있는 곳이 없던 레이였다.
“흠. 흠. 사람이 뭐 다 잘할 수는 없지.”
“그래도 예쁘잖아. 예쁘면 용서되는 법이지.”
선수들은 그 모습을 보며 다들 흩어졌다.
“저기 하인스.”
선수들이 모두 흩어진 와중에도 끝까지 남아있던 니실랴가 다가왔다.
“왜?”
“혹시 아까 저 영상에서 네 여자친구한테 패스해 준 선수가 누군지 알아?”
직접 경기장에 가서 봤던 인수였기에 니실랴가 말한 사람이 누군지 바로 알았다.
“수아? 수아가 왜?”
“수아? 이름이 수아야? 너하고 친해?”
“뭐 레이하고 친하지. 나도 같이 밥도 먹었고. 한국 사람이라 한국에 갈 때마다 같이 다니기도 했고.”
인수가 활약할 때마다 한국에서 들어오는 협찬 문의는 더 늘어났다.
시즌이 끝날 때마다 친가에 가기 위해 한국행을 택하긴 했지만 이제는 일을 하기 위해서라도 한국에 들어가야 했다.
“한국 사람에 수아라. 오케이. 고마워.”
인수는 멀어지는 니실랴의 뒷모습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샨투 감독이 훈련장으로 나오자 급하게 뛰었다.
***
아틀랜틱 클루브와 경기를 펼쳤던 선수들이 3일간의 짧은 휴식을 마치고 훈련장에 복귀했다.
다음 날 소시에다드와의 리그 경기가 있었기에 샨투 감독은 소집 인사만 하고 황급히 카스티야의 훈련장으로 이동했다.
카스티야의 총감독인 세도로프와 내일 경기 선발 라인업과 전략을 의논해야 했다.
코치들의 주도로 스트레칭과 몸풀기가 끝난 선수들은 각자 필요한 훈련을 찾았다.
“컨디션은 좀 어때?”
인수는 마린에게 다가갔다.
“쉬었더니 괜찮긴 한데 아직 완벽한 몸 상태는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마린은 아직 부족한 스트레칭을 인수와 함께 하며 무리한 동작은 피하고 있었다.
인수는 리처드가 자신을 얼마나 생각했는지 마린을 보면서 느꼈다.
마린보다 어린 나이에 1군 경기를 뛰며 출전 시간을 제한했다.
팀이 어려웠기에 무리하여 출전을 강행한 결과 체력이 떨어진 것을 자신도 몰랐고 경기 결과도 좋지 않았기에 휴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실제로 에디는 지금도 출전 시간과 휴식을 보장받고 있었다.
“이번에 느꼈겠지만 컨디션 관리는 스스로 해야 해. 생각만으로는 풀타임 출장도 가능하고 어떤 플레이도 가능하겠지만 몸은 아니거든.”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도 출전해야 할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해요?”
“그건 자신의 몸이 할 수 있는 플레이만 해야지.”
“할 수 있는 플레이라뇨?”
“그건 네가 찾아야지. 나 같은 경우는 못 하는 것은 포기해. 어차피 못하는 수비를 더 하려고 하기보다 잘하는 패스와 슛에 체력을 더 분배하려고 하는 거지. 물론 내 움직임이 적어지면서 다른 선수들이 더 도와줘야겠지만 수비를 더 신경 쓰다가는 이도저도 안 되는 플레이가 될 수밖에 없거든.”
마린은 스트레칭을 멈추고 인수를 빤히 바라봤다.
“그걸 어떻게 판단해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만 하다 보면? 경기를 하다 보면 수없이 많은 변수가 생기잖아. 그 변수 중에 자신이 컨트롤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하는 거지. 컨트롤할 수 없는 변수를 리스크라고 하잖아. 그 리스크를 떠안을 필요는 없잖아.”
“말이 왜 그렇게 어려워요.”
“다 경험의 문제라는 거야. 바보야.”
인수는 멍해 있는 마린을 뒤로 하고 다른 선수를 찾아 떠났다.
***
레알 소시에다드는 심정적으로 벼랑 끝까지 몰려있었다.
아직 10경기나 남아있긴 했지만 남아 있는 경기가 험난한 길을 예고했기에 이번 레알 마드리드와의 경기는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경기였다.
특히 자신들을 상대로 카스티야 선수들을 기용했다는 것 자체가 기분 나쁘기보다는 기회로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이었다.
반면 레알 마드리드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달랐다.
지난 셀타 비고와의 경기부터 투입되기 시작한 카스티야와 후베닐 선수들을 지켜보는 눈들이 늘어났다.
세도로프 감독이 레알 마드리드의 체질을 바꾸겠다고 선언하긴 했지만 세계적인 클럽에서 그렇게 쉽게 체질을 바꿀 수는 없었다.
특히 주전급 선수들이 부상으로 장기 이탈이 현실화됐고 이번 시즌 후 이적이 예상되는 선수도 있었던 만큼 그 구멍을 메우기 위해서는 다른 큰 영입이 필요했다.
물론 감독이 말을 했기에 두세 명의 선수들은 1군 로스터에 합류할 수 있겠지만 나머지 선수들은 자신의 길을 찾아야 했다.
그런 선수들을 싼값에 영입할 수 있는 기회였고 이 경기를 통해 그 선수들이 1군에 적응할 수 있는 시험대이기도 했기에 과장을 보태어 소시에다드 팬들보다 스카우트가 많을 수도 있다는 말이 나왔다.
그런 스카우트들을 의식이나 했는지 레알 마드리드의 유니폼을 입고 나온 카스티야 선수들은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뽐냈다.
특히 3:2 승리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선수들이 주목을 받았고, 여름 이적 시장에서 카스티야 선수들이 변수로 떠올랐다.
***
“시즌 우승의 향방을 가릴 수도 있는 레알 마드리드와 발렌시아의 리그 30라운드 경기입니다.”
“레알 마드리드가 승점 10점 차이로 발렌시아를 앞서고 있긴 하지만 중요한 맞대결이거든요. 이번 경기에서 발렌시아가 이긴다면 단숨에 7점 차이로 좁혀지게 됩니다. 이번 경기를 제외하고 8경기밖에 남지 않았기에 좀 힘들기도 하겠지만 역전하지 못할 승점 차이는 아닙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만만치 않습니다.”
“발렌시아의 경기 스케줄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레알 마드리드, AT마드리드, 세비야가 모두 챔피언스리그에서 탈락했고 유일하게 남아 있는 팀이 발렌시아입니다. 발렌시아로서는 리그경기도 중요하지만 유럽대항전에 더 신경을 쓰고 있죠.”
“통계로 보면 알 수 있듯 발렌시아의 유럽대항전 우승컵은 유로파 우승 단 1회뿐입니다. 바르셀로나가 라리가 양강에서 주춤한 사이, 치고 올라온 팀들을 보면 발렌시아, AT마드리드, 세비야입니다. AT마드리드는 챔피언스 우승은 없지만 유로파 우승이 무려 5회입니다. 세비야는 말할 필요도 없이 유럽 클럽 팀 중 유일하게 영예의 배지를 달고 있는 팀이죠. 이에 반해 발렌시아는 유럽대회에서 성적이 아쉽습니다.”
“4강까지 올라간 적은 많았고 준우승도 2번이나 차지했지만 정작 우승은 못 하고 있는 발렌시아입니다. 이번 시즌은 우승을 노래하는 만큼 챔피언스리그 우승에 모든 것을 걸겠다고 제임스 림 구단주가 선언했죠.”
“자 유럽대회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고 오늘 경기에 대해 잠시 살펴보시죠.”
“레알 마드리드가 코파 델 레이 결승 진출을 위해 주전 선수들을 모두 쉬게 한 후 투입되는 첫 번째 경기입니다. 결승 진출에 실패했더라면 큰 타격이 있었겠지만 하인스 선수의 극적인 골로 결승 진출에 성공했죠. 카스티야와 후베닐 선수들로 구성해 나선 리그 경기도 1승 1무로 좋은 성적을 거뒀거든요. 여러모로 레알 마드리드에게 웃어주는 분위기입니다. 물론 발렌시아도 리그경기에서 연승을 달리고 있는 만큼 분위기가 좋긴 하지만 주중에 펼쳐지게 될 챔피언스 4강 경기를 위해 주전들을 모두 기용할 수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주전 공격수를 비롯해, 미드필더진, 수비진에서도 주전 선수들이 빠져있는 모습인데요. 경기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