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코파 델 레이 4강 2차전 아틀랜틱 클루브는 어떻게 하면 인수를 묶어둘 수 있을까에 대한 해답을 얻은 듯 보였다.
일정 반경을 그리고 그 반경 안에 들어오면 공이 없는 상태에서도 몸싸움으로 괴롭혔고 반경에서 벗어나면 철저히 경계하는 모습을 취했다.
경기 초반이었지만 인수에 대한 경계에 마린도 쉽게 공을 줄 수 없었고 의미 없이 공을 돌리다 공을 뺏기는 모습이 자주 연출됐다.
처음 그런 모습을 보였음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던 샨투감독은 아틀랜틱 클루브의 골이 들어가자 벌떡 일어섰다.
마린이 전방으로 공을 돌리지 못하고 오버래핑한 웨아에게 돌린 공을 뺏긴 이후에 벌어진 일이었다.
웨아의 빈자리에 아틀랜틱 클루브의 주전 공격수인 페차가 파고들었다.
완전히 열려버린 레알 마드리드의 오른쪽 공간을 막기 위해 마르체나가 달려가 보았지만 페차의 페인팅에 속았다.
마르체나를 제친 페차는 중앙까지 파고든 후 다시 앞을 막아선 가르시아까지 페인팅으로 속여냈다.
이제 활짝 열려버린 레알 마드리드의 골문.
페차의 슛을 산체스가 손을 뻗어 막아보았지만, 살짝 궤적을 비틀었을 뿐 골로 연결되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아직 두 골이나 앞서고 있지만 원활하게 연결이 되지 않고 있는 패스가 문제였다.
마린의 실력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지만 문제는 경험이 적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중앙에서 경기를 풀어나가지 못하고 있으니 후방에서 마린에게 공을 주기 꺼려졌고 한 번에 전방으로 연결하다 끊기는 상황이 계속 발생했다.
계속 답답한 상황이 계속되자 마린이 공을 잡으면 무리한 드리블을 하게 되고 드리블까지 막히게 되자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후베이루.”
샨투 감독은 코치석에 선 채 두 손을 모아 가장 가까이 있던 후베이루를 불렀다.
“마린에게 침착하라고 해. 성급하게 하라고 하지 마.”
후베이루가 물을 마시는 도중에 귀에 대고 소리 높였다.
샨투는 긴 지시는 힘들지만 간단한 지시를 내리고 코치박스까지 물러서라는 대기심의 제지를 받고 천천히 물러섰다.
주장인 모라타가 있었으면 모라타가 먼저 나섰겠지만, 지금은 이렇게 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후베이루가 두 손을 모아 크게 소리를 치려고 할 때 인수가 먼저 마린에게 다가서 등을 때렸다.
“왜 눈앞이 깜깜해?”
“네?”
“경기장 넓잖아. 왜 네 앞만 보냐고. 눈도 좋은 녀석이 왜 좁게 보고 있어.”
인수는 골키퍼의 던지기로 경기가 재개되자 황급히 마린의 곁을 떠나 공을 받은 선수를 향해 뛰었다.
마린은 자신을 때리고 떠나가는 인수의 등을 바라봤다.
평소에도 어깨가 넓다고 생각했지만, 오늘따라 인수의 어깨가 더 넓어 보였다.
마린은 자신의 뺨을 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희미하게 보였던 선수들과 관중들이 뚜렷하게 보였다.
‘지금은 할 수 있는 것만 하자.’
인수와의 대화 이후 마린의 표정이 변하자 샨투 감독은 눈빛을 반짝였다.
“뭐라고 했을 거 같아?”
“네? 뭐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순식간에 치고 들어오는 아틀랜틱 클루브의 공격을 지켜보던 수석코치는 샨투 감독의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하인스가 마린에게 다가가서 뭐라고 했을 거 같아?”
샨투 감독도 경기장에서 눈을 떼지 않고 다시 한번 물었다.
“정신 차리라고 했을 거 같은데요. 천천히 하라고요.”
경기장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감독이 할 수 있는 일은 한정적이었다.
그렇기에 주장을 임명하는 것이고 베테랑이라 부르는 선수들을 기용했다.
그런데 인수는 고작 19살, 마린과 겨우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선수였다.
샨투 감독은 복잡한 머리를 흔들며 경기에 집중했다.
마린이 정신 차리면서 레알 마드리드의 전방압박은 아틀랜틱 클루브를 거세게 밀어붙였다.
후방부터 차근차근 공세를 이어가던 아틀랜틱 클루브의 수비진은 급하게 전방으로 공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레알 마드리드의 수비진에는 니실랴가 있었다.
아틀랜틱 클루브의 공격진과 공중볼 경합을 통해 공을 따낸 니실랴는 바로 전방으로 공을 보냈다.
‘이제까지 수비를 달고 공을 달라고 하더니 이제 정신 차렸나 보네.’
마린의 컨디션 때문에 니실랴의 공이 바로 좌우 윙으로 갔던 것에 비하면 이번에는 마린에게 향했다.
정신은 차렸지만 1차전에 비하면 확실히 자신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깨달은 마린이었기에 패스를 받기 쉬운 위치에 있던 사라비아에게 공을 넘겼다.
소아레스가 공격에 특화된 윙이라면 사라비아는 공을 키핑할 수 있는 능력과 안정감이 있었다.
마린의 기대답게 두 명의 수비수가 앞을 막아섰음에도 소아레스는 여유롭게 공을 소유하다 뒤를 받치기 위해 들어온 인수에게 공을 넘겼다.
인수가 공을 받자 아틀랜틱 클루브의 수비는 바로 몸싸움을 걸어왔다.
지난 1차전은 베르나베우였지만 이곳은 홈인 에스타디오 산 마메스였다.
홈 어드벤티지는 분명히 있었고 반칙이 선언될 만한 몸싸움도 주심은 휘슬을 불지 않고 넘어갔다.
인수는 자신에게 몸싸움을 걸어오는 상대를 피하면서 바로 마린에게 공을 넘긴 후 중앙으로 치고 들어갔다.
인수의 공을 받은 마린은 바로 중앙으로 공을 찔러주었고 인수는 자신을 막아서는 수비를 피해 코프에게 공을 보냈다.
인수의 공은 수비수의 발을 피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코프의 발에는 걸리지 않고 그대로 골라인 아웃되고 말았다.
그러나 처음으로 정상적으로 공격에 돌아갔다는 것에 의의가 있었고 아틀랜틱 클루브가 편하게 공세를 펼치던 것을 막는 역할도 가져왔다.
특히 원정에서 한 점도 내지 못했던 아틀랜틱 클루브입장에서 레알 마드리드에서 한 골이라도 성공하게 되면 현실적으로 힘든 경기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양 윙백도 함부로 오버래핑하기 힘들었고 수적 우세를 통한 점유율 축구를 구사하던 흐름이 끊기고 말았다.
소강상태로 접어든 경기는 전반 후반까지 이어졌다가 레알 마드리드의 패스미스가 기폭제가 됐다.
소아레스가 웨아에게 연결한 공이 아틀랜틱 클루브의 전방압박에 못 이겨 전방으로 보낸다는 공이 중간에서 끊기고 말았다.
공을 끊어낸 아틀랜틱 클루브의 중앙 미드필드인 알바레즈는 바로 페차에게 공을 연결했다.
아직 레알 마드리드의 수비진이 자리 잡지 못한 상태에서 페차에게 공간을 내주었고 페차는 바로 슛으로 이어갔다.
쏜살같이 쏘아진 공은 레알 마드리드의 구석을 찔렀고 전반이 끝나기 직전 2:0의 스코어가 만들어졌다.
***
쾅.
라커룸에 들어서던 산체스는 골키퍼 장갑을 벗어 자신의 라커에 던졌다.
전반에만 2골을 내준 경기는 최근에도 거의 없었기에 화가 끝까지 치솟았다.
“무슨 짓이야?”
뒤따라 들어오던 사라비아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아직 경기가 끝난 것도 아니고 하프타임에 불과했는데 주장 완장을 차고 있는 산체스가 벌인 행동을 묵과하기 힘들었다.
“내가 뭘?”
“적어도 완장을 차고 있으면 생각하면서 행동해야 할 거 아냐?”
“그래서 난 화도 못 내는 거야?”
레알 마드리드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두 사람의 고성에 모두가 얼어있었다.
평소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의 두 사람이었던지라 라커룸에 있던 선수들 모두 얼음처럼 굳었다.
“뭘 그리 열 내고 그래요. 자자 물부터 마셔요.”
인수는 환하게 웃으며 두 사람의 손에 물통을 쥐여주며 구석으로 이끌었다.
“경기하다 보면 이런 경기도 있고 저런 경기도 있는 법이잖아요.”
“와 누가 보면 30살 넘은 노인네가 하는 말처럼 들린다.”
산체스는 인수가 쥐여준 물을 마시고 인수의 말에 대꾸했다.
“그러게 완전 노인네라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화가 나 있는 거야?”
사라비아도 인수가 준 물을 마시고 난 후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이번 시즌이 중요하다는 건 알고 있잖아. 그런데 전반부터 2골이 먹힌 데다 후반도 어려울 것 같으니까 말이야.”
산체스는 레알 마드리드와 2040년까지 계약되어 있었다.
슬슬 재계약을 해야 할 시기가 다가오는데도 클럽에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에이전트를 보내 재계약에 대한 이야기를 해봐도 감독 선임이라든지 클럽 내부사정을 이유로 재계약 이야기를 피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스페인 대표팀에서나 레알 마드리드에서도 슬슬 다음 골키퍼를 키워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었다.
자신은 아직 전성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대표팀이나 클럽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데다 재계약 문제도 쉽게 풀리지 않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다른 선수들과 이야기하면서 풀 수도 있겠지만 대표팀 동료에다 가장 마음이 맞았던 모라타는 장기부상으로 이탈 중이었다.
커리어를 위해서나 다음 계약을 위해서라도 리그 우승과 코파 델 레이 우승이 필요했기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한 것도 있었다.
“산체스 나를 봐요.”
인수는 산체스를 잡고 자신을 향하게 몸을 돌렸다.
“심호흡 크게 하면서 들어요. 스페인 넘버원 골키퍼는 산체스예요. 누가 뭐라도 그걸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자신을 더 믿어요.”
산체스는 인수의 말에 허탈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직 앳된 얼굴인 인수였다. 자신보다 10살이나 어린 인수에게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괜한 웃음이 터졌다.
“그래. 누가 뭐래도 내가 스페인의 넘버원이지.”
“그래요. 차분하게 심호흡하면서 쉬어요. 난 또 이야기할 사람이 있어서 이만.”
산체스는 자신을 다독이고 돌아서는 인수의 등을 보며 수많은 감정이 교차했다.
인수는 산체스의 감정을 신경 쓸 새도 없이 라커룸 구석에 머리를 박고 눈을 감고 있는 마린에게 다가섰다.
“야.”
“네.”
마린은 그 자세 그대로 힘없이 대꾸했다.
“왜 그러고 있어. 거북목 된다.”
인수가 말을 이었지만 마린은 고개를 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왜 지금 지고 있는 것이 너 때문인 것 같아?”
“그렇잖아요. 처음부터 정신을 못 차려서 그런 거니까.”
“네가 뭔데?”
“네?”
마린은 인수의 혹독한 평가에 고개를 들었다.
“네가 뭔데 너 하나 때문에 지고 있어야 하냐고 묻는 거잖아.”
“그래도…….”
마린은 말을 하려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말끝을 흐렸다.
“우리 모두 때문이지 너 한 사람 때문이 아니야. 우리 팀에서 나 때문에 졌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사람뿐이야. 안 그래요? 코프?”
조용한 라커룸이었기에 인수의 말이 모두에게 잘 들렸다.
“내가 왜. 뭘 어쨌다고 내 책임이야.”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물을 마시다 내뿜은 코프였다.
“여기서 주급이 제일 많잖아요. 주급 많이 받는 사람이 책임져야죠.”
“그래. 내 책임이야. 지고 있는 건 내가 밥값도 못해서 지고 있는 거야.”
코프는 인수의 눈짓을 받고 난 후 자처해서 자폭했다.
라커룸에 돌아오자마자 산체스와 사라비아의 고성에 얼어붙었던 분위기가 코프의 자폭에 모두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풀렸다.
이런 분위기에서 코치들과 전반을 분석한 샨투 감독이 들어왔다.
원정에서 턱밑까지 추격당하자 무거울 줄 알았던 라커룸의 분위기가 나쁘지 않자 이상했지만 나쁜 일은 아니었다.
“자 다들 편히 쉬어. 이기고 있는 쪽은 우리야. 다급해하지 마.”
샨투 감독이 선수들을 다독이는 발언을 했지만 분위기가 더 좋아지지는 않았다.
큰 기대를 가지고 한 말도 아니었기에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후반전에는 좀 더 수비적으로 가기로 하지. 마린 어때?”
“잘 모르겠습니다.”
“계속해서 경기를 뛰어서 그래. 눈으로 다 보이고 머리로는 할 수 있는 플레이라고 하는데 몸의 컨디션이 따라주지 못하니까 엇박자가 나오는 거야.”
마린은 샨투 감독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반박할 말 없이 사실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뛰어. 컨디션은 쉬면 정상적으로 돌아올 거니까. 마린 대신 누네스가 들어가.”
샨투는 마린에게 시선을 거두고 인수를 쳐다봤다.
“하인스 중앙에서 공 배급에만 신경 써. 그러다 기회가 보이면 알지?”
“넵.”
“누네스, 후반 시작과 함께 들어간다. 니실랴와 짝을 맞추어 수비 쪽에서 많이 뛰어줘.”
“알겠습니다.”
“좋아. 후반에는 우리가 왜 레알 마드리드인지 빌바오 녀석들에게 보여주라고.”
샨투 감독의 말이 끝나자 후반을 위해 라커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