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너무 하잖아.”
“니들 죽고 싶어?”
전반 15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벌써 인수가 3번이나 태클을 당했고 마린도 2번이나 당했다.
같은 지역의 그리고 같은 유스 출신의 선수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애틀랜틱 클루브였다.
그만큼 조직력과 전투력이 강했다.
‘빌바오 놈들 더럽게 경기하니까 흥분하지 마.’
‘되도 않은 것들이 괜히 라이벌이라고 죽을 듯이 뛰니까 후반까지 체력 아끼면서 선취점만 뺏기지 않으면 이겨.’
‘우승컵 가지고 병문안 와라. 심심하다.’
오랜만에 전화한 모라타는 장장 두 시간에 걸쳐 잔소리를 했다.
모라타의 전화를 받느라 인터넷 바둑에서 져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인수는 정말 잔소리라 여겼다.
그 통화를 하며 둔 바둑에서 져 9단에서 8단으로 떨어진 것 때문에 모라타를 원망해서 잔소리라 하지 않았다.
***
인수는 애틀랜틱 클루브와 경기하며 소튼이 생각났다.
유스 때부터 같이 훈련하며 눈빛만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 누구한테 패스해야 할지 알 정도로 조직력만은 대단한 팀이었다.
선수 개개인의 능력은 다른 팀보다 떨어질지 모르지만 단단한 조직력으로 무장한 상대는 까다로웠다.
특히 그 팀이 전투적으로 나올 때 더더욱.
인수가 옷에 묻은 잔디를 털며 일어설 때 주심이 선수들에게 다가왔다.
“더 반칙이 나오면 경고를 할 거야. 너희도 마찬가지야.”
“우리 인자하신 라울 님께서 왜 이리 화를 내실까요? 우리 얌전히 플레이하고 있는데요.”
아틀랜틱 클루브의 주장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주심에게 능청을 떨었다.
“너희가 무슨. 라울, 우리 꼬맹이들만 노리고 있는 거 보이잖아요.”
골대에서 인수가 반칙 당한 곳까지 꽤 거리가 있었음에도 달려온 주장 산체스가 주심에게 항의했다.
오늘 주심을 보는 라울은 라리가에서도 카드에 신중한 대표적인 심판이었다.
라리가에서 오래 활동한 만큼 선수들과 친분도 깊었고 그만큼 존경도 받았기에 선수들이 잘 항의하지 않는 심판 중 하나였다.
“그러니까 너희도 선수들한테 잘 말해. 내가 카드를 꺼낸다면 노란색보다 빨간색이 먼저 나올 거 같으니까.”
라울 주심의 단호한 말에 양 팀 주장은 선수들을 다독였다.
레알 마드리드와 아틀랜틱 클루브도 유명한 더비 중 하나여서 부상선수가 드문드문 나오는 매치였기에 주심은 단호하게 반칙에 주의를 주었다.
한다면 하는 심판이었기에 아틀랜틱 클루브의 주장도 다들 조심시켰다.
이전 경기들에서 카드를 수집한 선수들에 대해서는 더욱 주의를 주었다.
산체스가 골대까지 가야 했기에 말이 빠를 수밖에 없었지만 인수에게는 가까이 다가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당장 저쪽에서 거칠게 나오지는 못할 거야. 초반에 뚫어버려.”
인수는 산체스의 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심의 휘슬로 다시 시작된 경기는 마린이 인수에게 공을 밀어준 것으로 시작됐다.
골대까지 30여 미터가 좀 안되는 거리.
맘먹고 차면 찰 수도 있겠지만 그런 낮은 확률에 기대 상대에게 공을 넘기기보다는 차근차근 점유율을 높여가며 경기를 끌겠다는 생각이었다.
“어딜.”
인수가 공을 잡고 돌파하자 아틀랜틱 클루브 수비가 바로 따라붙었지만, 적극적인 방어는 하지 못했다.
덕분에 인수는 수비가 붙었음에도 쉽게 돌파를 했고 페널티아크까지 전진했다.
페널티아크 앞에서 인수는 공을 접어 두 명을 한 번에 따돌리고 페널티 지역까지 치고 들어갔다.
‘어차피 태클은 못 해.’
따돌려진 두 명이 다시 자신의 앞으로 오자 한 번 더 공을 접어 따돌리고 슛각을 좁히기 위해 다가온 골키퍼까지 페인팅으로 속였다.
인수가 자신을 속이고 높이 점프하자 골키퍼는 순간 손을 뻗어 인수의 발을 잡았다.
삐익.
인수는 공중에서 중심을 잡지 못해 어깨부터 떨어졌고 주심은 휘슬을 크게 불며 페널티마크를 찍었다.
그러면서 인수의 발을 잡은 골키퍼를 향해 빨간색 카드를 내밀었다.
“라울, 그저 반사적으로 손이 나간 거잖아요”
“고의가 아니었어요.”
골키퍼와 아틀랜틱 클루브의 주장은 즉각 항의했다.
“이미 돌파한 이후였어. 그리고 발이 안 걸렸으면 공이 들어갈 확률이 높았고. 그래도 VAR체크는 하도록 하지.”
라울 주심은 VAR을 보고 와서도 마찬가지로 페널티킥과 레드카드를 번복하지 않았다.
“그래도 레드카드는 너무 하잖아요.”
주장이 다시 한번 항의해봤지만 라울 주심은 대꾸 없이 골키퍼의 퇴장을 명령했다.
***
“괜찮아?”
“괜찮아요.”
아틀랜틱 클루브의 골키퍼가 퇴장을 당했으니 골키퍼 교체까지는 시간이 좀 있었기에 인수는 천천히 목과 발목을 돌리며 몸 상태를 점검했다.
공중에 뜬 상태에서 어깨부터 떨어졌기에 의료진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지만, 인수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발목도 괜찮고 어깨도 아프지 않아요.”
“좋아. 그래도 조심해. 아프면 바로 이야기하고.”
의료진이 인수를 점검하고 라인 밖으로 나가자 동료들이 다가왔다.
“괜찮은 거 맞죠?”
“크게 떨어지던데.”
“안 아파?”
“뒈지게 아파요.”
인수는 다들 다가와서 물어보는 말에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럼 검사받아야 봐야죠. 떨어질 때 이상했다니까요.”
인수의 말에 마린이 벤치를 향해 몸을 돌리려고 하자 소아레스가 마린의 몸을 잡았다.
“하인스 말 농담이야. 농담하고 진담은 좀 구분하라고.”
“그래. 저 녀석이 얼마나 지 몸 챙기는데. 조금만 아파도 교체해 달라고 했을 거야.”
“휴. 다행이다.”
마린은 인수의 장난이라는 말에 안심했다.
“놀랬잖아요.”
“그런데 누가 찰 거야?”
사라비아는 골키퍼가 들어올 채비를 마치자 주위를 둘러보았다.
레알 마드리드 페널티킥 전담 키퍼는 모라타였지만 부상 이후 페널티킥 전담을 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코프 찰래요?”
“아니 네가 얻은 기회니까 네가 차는 것이 낫지 않겠어?”
“뭐하면 내가 차도 되고.”
“넌 좀 가만히 있어.”
소아레스가 앞으로 나서자 코프는 발로 차는 시늉을 하며 말렸다.
연습 때 소아레스의 페널티킥 성공률은 50%를 밑돌았기에 팀원 누구도 소아레스가 차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키커 앞으로.”
페널티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감이었기에 이미 거절한 코프를 뒤로 하고 인수가 앞으로 나가 주심에게서 공을 받아 페널티마크에 놓았다.
‘항상 차왔잖아. 그대로만 차자.’
인수는 침착하게 오른쪽 상단 구석을 보고 강하게 찼고 골망을 출렁였다.
***
골키퍼의 퇴장으로 수적 우세까지 가져온 레알 마드리드는 공세를 이어갔다.
“경기장 넓게 써.”
“서로 목소리 높이고.”
아틀랜틱 클루브 역시 원정이지만 남아있는 2차전을 위해 몸을 던져가며 공세를 받아냈다.
전반 30분이 지났을 무렵 인수가 마크를 벗어남과 동시에 마린의 스루패스가 인수에게 이어졌다.
처음 예상보다 좀 더 길긴 했지만, 골라인을 나가기 전에 뒤꿈치로 중앙을 향해 공을 살려냈다.
인수 페널티지역 깊숙이 들어가자 수비들도 자연스럽게 인수에게 몰렸다.
인수가 패스한 공은 수비수의 발에 걸리지 않았고 외곽에서 들어오는 소아레스의 발에 걸렸다.
소아레스의 슛이 하늘 높이 솟구쳐 골로 연결되지는 않았지만 아틀랜틱 클루브의 수비들은 또 다른 패턴에 신경이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왼쪽 윙에서 사라비아가 크로스를 신경 쓰다 갑자기 마린의 스루패스가 나왔고 거기에 소아레스가 중앙으로 치고 들어왔다.
그렇다고 양쪽 윙을 신경 쓰기에는 중앙 공격수 코프의 한 방이 있었다.
더욱이 코프와 인수는 몰아넣는 능력까지 있었으니 최소한의 실점으로 1차전을 끝내야 하는 아틀랜틱 클루브에게 난제를 주었다.
골킥으로 아틀랜틱 클루브의 공격이 시작됐지만, 수비에서 올라오지 않은 선수들 탓에 바로 레알 마드리드에게 공격권을 넘겨줬다.
모든 선수가 자신의 진영에서 수비 라인을 짠 아틀랜틱 클루브는 올라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다시 시작된 레알 마드리드의 공격.
마린의 발에서 떠난 공은 사라비아에게 향했다.
사라비아가 잡기 전 이미 수비가 붙었기에 다시 뒤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천천히 해.”
샨투 감독은 이미 유리해진 경기였지만 서둘지 말라는 주문을 계속 소리쳤다.
공이 터치라인 밖으로 나가 잠시 경기가 멈췄다.
“나랑 자리 바꾸자.”
“자리를요? 저 스트라이커 자리에 서본 적이 없는데요.”
마린은 자신과 자리를 바꾸자는 인수의 말에 목소리가 높아졌다.
“조용히 이야기해. 그냥 자리 체인지로 앞만 막아줘. 스크린 플레이할 수 있지?”
“뭐 그 정도야. 왜요?”
“수비가 나올 생각이 없잖아. 중거리슛이라도 좀 쏴줘야 나오지.”
“알았어요.”
인수의 신호를 받은 마린은 그대로 공을 끌고 중앙으로 치고 들어갔다.
마린과 위치를 바꾼 인수가 마린에게 공을 넘겨받았고 마린이 스크린을 해준 순간 한 발 더 치고 나가 노마크 찬스를 만들었다.
살짝 골대까지 연린 틈을 향해 강하게 중거리슛을 날렸고 골키퍼의 선방으로 막히긴 했지만 수비를 앞으로 끌어냈다.
좌, 중앙, 우는 물론이고 중거리슛까지 이어진 공격은 아틀랜틱 클루브 수비의 혼을 빼놓았고 경기가 끝날 때는 3:0의 스코어가 만들어졌다.
***
“와 11:10으로 싸웠는데 겨우 3:0으로 이긴 거야?”
경기가 끝나고 MOM 인터뷰까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인수는 레이의 전화를 받았다.
“와 얼마나 끈질긴지 정말 치를 떨 정도였어. 너도 봤다며.”
재일과 제니퍼가 이미 영국으로 떠나 큰 저택에 혼자 지내게 될 인수에게 매일같이 레이가 전화를 걸었다.
그날 있었던 이야기, 자기가 경기를 뛰었던 이야기, 소튼의 상황들을 계속 전해줬다.
이미 에디에게 들었던 이야기도 있었지만 레이하고의 대화는 항상 즐거운 인수였다.
“아 맞다. 바둑 8단으로 떨어졌다며. 9단으로 다시 만들었어?”
바둑에 하나도 관심이 없던 레이지만 인수가 모라타 탓에 8단으로 떨어졌다는 소리를 30분 넘게 들었던 터라 기억에 남아있었다.
“아니. 3연승을 더해야 올라가는데 잘 나가다가 꼭 한 판씩 진단 말이야.”
“그래서 아직 9단으로 못 올리고 있는 거야?”
“요즘 매일 같이 마린하고 같이 훈련을 하다 보니 잘해야 한 판 정도밖에 못하기도 했고.”
“여름에 같이 온다던 그 꼬맹이?”
인수는 레이가 꼬맹이라고 하니 순간 당혹한 감정이 느껴졌다.
자신과 한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은 마린이었다.
거기에 체격이 약간 왜소하긴 했지만 키는 181cm로 에디보다 컸다.
“그러고 보니 우리랑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데 꼬박꼬박 존대하네. 그러니까 더 어리게 느껴져.”
“네가 이미 자리를 잡고 있으니 그럴지도 모르지.”
“하여튼 여름에 영국에 같이 갈게. 착하고 성실하니까 같이 훈련하기도 좋을 거야.”
“뭐 나야 꼽사리잖아. 너랑 에디가 훈련비용을 다 지불하는데 나야 감사하지.”
“당연한 거 가지고 그래. 이제 잘 거야?”
“응. 자야지. 시즌 끝나면 스페인에 놀러 갈게.”
남자 리그보다 짧은 여자 리그였기에 리그 종료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 몸조심하고. 잘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