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유스 때 이후로는 처음인 거 같은데.”
인수는 익숙지 않은 왼쪽 터치라인을 확인하며 발끝으로 잔디를 골랐다.
중앙으로 뛰며 사이드 윙과 크로스를 하며 윙에 위치에서 잠시 플레이를 한 적은 있어도 정식으로 윙에서 뛰는 것은 유스 이후로 처음이었다.
아니 유스때도 거의 중앙에서 뛰었지 윙으로 뛴 적은 거의 없었기에 요 몇 주 연습할 때 가끔 뛰었던 것이 전부였다.
그런 인수가 윙으로 출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사라비아의 체력적인 문제와 마르시알의 피로 누적으로 인한 휴식 때문이었다.
중앙미드필드 3옵션인 마르시알은 라요 바예카노전에서도 후반 20분 인수와 교체되어 뛰었고 레알 소시에다드전에서도 풀타임으로 뛰며 팀의 승리에 일조했다.
중앙 미드필드 3옵션인 마르시알에게 레프트 윙을 맡겨도 되겠지만 인수를 레프트 윙으로 중앙을 실레에게 맡기는 전술을 시험하기 위한 코치진의 큰 그림이었다.
***
세도로프는 인수를 윙어에 적응시키기 위해 훈련을 도왔다.
선수 시절 레프트, 라이트, 중앙을 모두 월드클래스급으로 소화하며 레알 마드리드와 AC밀란에서 뛰었을 만큼 공격형 미드필드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감독이었다.
더욱이 아약스 감독 시절 윙어들을 활용한 전술을 즐겨 사용했던 만큼 전술적인 움직임을 심어주기에도 적임자였다.
세도로프와 같이 인수의 훈련을 도운 것은 세도로프의 코치진에 합류하기로 한 로카였다.
24살의 젊은 나이였고 코치 연수를 받는 중이라 정식으로 합류하는 것은 자격증이 나오는 이후겠지만, 세도로프가 직접 면접을 통해 발탁한 인재였다.
스페인 최고 명문대인 콤플루텐세 대학에 다닐 만큼 머리도 좋았고 축구에 대한 열정도 넘쳤다.
데이터 분석을 통해 효과적인 움직임과 선수들의 장단점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었다.
그런 로카의 합류는 인수에게 또다시 성장의 계기가 됐다.
브리지, 랄라나 등 소튼에서 훈련받았을 때는 인수를 지도했던 사람은 모두 선수 출신으로, 자신들의 경험으로 만들어진 이론으로 인수 등을 가르쳤다.
물론 소튼에도 데이터를 분석해 보조하는 코치가 없지는 않았지만, 직접 코칭하지는 않았다.
그에 반해 로카는 선수을 직접 코치해본 경험도 있었고 마린을 훌륭한 선수가 될 재목으로까지 키워낸 결과도 있었다.
이런 차이 때문인지 인수는 나름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며 했던 행동들이 로카의 프로그램에서는 10%의 효율밖에 보이지 못했다.
“잘 봐요. 하인스 선수가 여기서 이렇게 움직이니까 체력의 소모가 크잖아요. 프로그램이 효율적인 방식의 움직임을 몇 가지 제시할 거예요. 가장 효율적인 움직임은 하나지만 데이터를 기반으로 뽑아낸 것이니 하인스 선수에게 안 맞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몇 가지를 제시할 텐데 가장 맞는 방법을 연습해봐요.”
“하인스 연습해봐요. 로카가 만든 프로그램 진짜 끝내줘요.”
“그래?”
같이 연습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마린의 중심 이동을 보고 놀랐던 인수였다.
수비에 자신이 없는 자신으로서는 한번 보고는 절대 막을 수 없었고, 안다고 해도 막을 수 있을지 의문이 가는 중심 이동을 통한 돌파였다.
로카는 인수의 가장 최근 경기인 라요 바예카노 전반전에 있었던 수비수와의 충돌 장면을 플레이했다.
두 선수 사이에 묶인 인수가 패스할 곳을 찾았지만 마땅한 길목이 보이지 않았고 벌어져 있던 두 선수 사이를 뚫고 나가다 수비수의 발에 걸려 넘어진 장면이었다.
크게 다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후반 마르시알과 교체된 이유 중에 하나를 차지할 만큼 아찔한 상황이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선택한 방법보다 좋은 방법이 있다고 하니 인수도 관심을 기울여 보게 됐다.
“자, 이 프로그램을 보면 하인스 선수가 중앙으로 돌파하기보다 후방으로 공을 돌리······. 응. 이상한데. 여기서 어떻게 뒤를 확인하고 뒤로 돌리지?”
로카는 자신의 노트북을 흔들며 프로그램이 잘못됐는지 확인하기 시작했다.
“뒤로 돌릴 수 있는 타이밍이 있었어요. 적 진영으로 더 파고들기 위해 돌파를 선택했을 뿐이죠.”
100미터가 넘는 피치였지만 주변 선수들의 움직임은 수시로 머릿속에서 업데이트하고 있었다.
분명 그 상황에서 뒤에 대기하던 누네스에게 연결할 수 있는 길이 있긴 했다.
그러나 뒤로 연결한 다음 다시 앞으로 나오기 위해서는 또다시 여러 차례 패스가 이어져야 자신에게 공이 돌아올 것을 알기에 인수는 전진을 택했을 뿐이었다.
“그럼 후방 패스라는 전제조건을 지워볼게요.”
로카는 인수의 대답을 듣고 다시 프로그램을 손댔다.
수비 두 명 사이로 빠지는 것보다 페인트로 한 명을 속이고 열린 쪽 사이드로 빠지는 법, 뒤꿈치로 공을 옮겨 공을 더 소유한 다음 수비수들이 더 다가올 때 빠른 속도로 빠져나가는 법, 인수가 빠졌던 드리블보다 한 발 더 빠르게 했을 때는 수비수가 발을 걸 타이밍이 나오지 않았을 거란 분석까지 몇 가지 패턴이 제시됐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최선의 타이밍에서 움직였다고 생각하고 돌파했지만, 프로그램은 그렇지 않았다.
“한번 해보죠.”
인수는 프로그램이 제시한 페인팅을 시도해보았다.
“아뇨. 그게 아니에요. 좀 더 코어에 힘을 주고 상체를 6도 정도 더 움직여야 해요.”
로카는 카메라로 찍은 모습을 프로그램에 대조해보고 고쳐야 할 점을 지시했다.
“여기서 6도 정도 더 움직이라고요?”
인수는 로카의 말에 상체를 더 움직였다. 평소보다 큰 움직임에 휘청거리긴 했지만 쓰러질 정도는 아니었기에 중심을 잡고 로카를 바라봤다.
“확실히 하체운동이 잘되어 있어서 중심이 잘 잡혀요. 이 녀석보다 훨씬 몸의 중심을 낮출 수 있을 거 같아요.”
로카는 옆에서 인수의 훈련을 지켜보던 마린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며 웃었다.
마린 외에도 자신의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선수들에게 접근해봤지만 자신과 자신이 만든 프로그램을 믿지 못하고 다시 자신이 하던 방식대로 하다 그대로 도태되는 선수들이 많았다.
그런데 인수는 그 자체도 이미 최정상급 선수이면서도 제시된 훈련법에 토를 달지 않고 따르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거기에 세도로프가 합류해 윙에서 쓸 수 있는 전술을 훈련하니, 인수의 전술 이해의 폭이 훨씬 넓어지는 계기가 됐다.
***
“하인스.”
오랜만에 코파 델 레이 8강에 오른 레알 베티스와의 8강 1차전도 전반 종료를 얼마 남겨두고 있지 않았다.
인수의 돌파로 선취점을 따낸 후, 인수를 막느라 수비가 엷어진 중앙에서 실레의 스루패스를 받은 최전방 공격수인 소메도가 추가점까지 따냈다.
리그 경기에 연속해 풀타임 출전했던 코프 대신 출전한 소메도가 오랜만에 골맛을 보았고 인수 반대편 사이드에서 뛰던 소아레스의 골까지 3:0으로 여유롭게 이기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인수에게 기회가 왔다. 인수를 마크하느라 중앙이 번번이 뚫리니 실레에게 수비수가 붙은 사이, 인수에게 1:1 돌파 찬스가 왔다.
‘내가 하던 패턴에서 6도 정도 더 몸을 기울여도 중심을 잡을 수 있다고 했지.’
2주간의 훈련으로 평소 습관처럼 굳어진 드리블 방식이 바뀔 리 없었지만, 인수는 의도적으로 드리블을 하며 몸의 중심에 신경 썼다.
실전에서 훈련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은 아니지만 3:0으로 앞서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과감하게 치고 나갔다.
평소보다 더 기울어진 몸 때문인지 공을 빼내고 크게 휘청거렸고 다시 공을 잡지 못한 채 사이드 아웃이 되고 말았다.
다행히 사이드 아웃이 됐으니 상대에게 역습을 내주지는 않았지만 사이드 아웃이 되지 않았더라면 아찔한 순간이었다.
“훈련 때 하던 그 드리블이지? 실전에서 해보려고?”
인수와 함께 훈련하던 실레는 인수의 드리블을 보고 바로 눈치채고 가까이 다가왔다.
“응. 점수 차이도 여유 있고 몸에 익히려면 실전에서도 써봐야 하니까.”
인수가 윙에서 활약을 한다는 것은 실레에게도 해가 될 일이 아니었다.
인수가 정식으로 합류한 이후 주전이었던 실레는 로테이션 맴버로 밀려났다.
다시 주전 자리에 올라서기 위해 훈련을 하고 있었지만 자신이 발전한 만큼 인수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더욱이 28살인 자신은 지금이 전성기였지만 상대는 이제 20살이었다.
다음 시즌이 시작하기 전 이적을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주장인 모라타가 부상으로 이탈했다.
모라타의 부상으로 급하게 윙이 필요해진 레알 마드리드는 인수를 윙어로 기용하기로 했고 자신이 주전이 될 찬스가 왔다.
인수가 윙어로 자리를 잡으면 이적하지 않고도 중앙에서 주전으로 뛸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것이었다.
“해보고 싶은 대로 해. 뒤에서 받쳐 달라고 할게.”
“고마워.”
***
후반에 들어서도 인수의 사이드돌파 시도가 계속됐고 성공할 때도 있었지만 실패할 경우가 더 많았다.
다행히 하프타임 때 인수의 훈련을 내용을 듣고 이해해준 니실랴가 인수의 뒤를 받쳐주었고 막아준 덕분에 큰 위기 상황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계속된 돌파로 찬스를 만든 인수가 페널티지역 바깥에서 쏜 중거리슛으로 한 골을 더 만들어 냈고 기습적인 오른쪽 돌파를 한 소아레스의 스루패스로 실레가 한 골을 추가하며 5:0이라는 안정적인 스코어로 1차전을 마칠 수 있었다.
2차전은 원정경기로 치러야 하는 데다 여러 가지 시험적인 전술을 써볼 계획을 하고 있었기에 1차전 대승은 라인업을 더 과감하게 가져가도 된다는 뜻이었다.
그와는 별개로 인수는 2골이나 넣었음에도 각종 언론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중앙에서 안정적인 패스와 돌파를 보여줬고 기습적인 중거리슛과 드리블 돌파에 이은 슛을 자주 보여줬지만, 윙에서는 그런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는 평이었다.
물론 윙에서 첫 출전이라는 점이란 걸 고려하더라도 연습경기가 아닌 코파 델 레이 8강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준 것이 프로답지 못하다는 분석도 많았고, 드리블을 할 때 자주 중심이 무너진 것을 보고 컨디션을 조절해 줄 필요가 있다는 말도 있었다.
레알 마드리드에서는 그런 언론들의 평에 공식적으로 반론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아직 세도로프의 감독 선임에 대한 발표도 시즌 후로 미뤄두고 있었는데 인수의 포지션 변경을 돕고 있는 사람이 세도로프라고 밝힐 수 없는 노릇이었다.
더욱이 포지션 변경 훈련을 한 지 2주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경기에 뛰게 한 것도 레알 마드리드의 무리수였다.
친 레알 마드리드 스포츠지라면 문제없이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반 레알 마드리드 스포츠지가 더 많은 스페인이었다.
괜한 이야기로 선수들을 흔들 수도 있었기에 조용히 침묵을 지키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한 보드진의 판단이었고 논란이 가중되는 동안에도 인수의 훈련은 계속됐다.
***
“터치라인을 잘 활용해. 눈감고도 라인을 따라 공을 굴릴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해.”
“사이드 윙어라면 당연히 돌파뿐만 아니라 크로스도 올릴 수 있어야지. 소메도는 키가 크지도 않고 점프력도 좋지 않아서 타켓맨을 할 정도는 아니지만 코프는 타켓맨 역할도 잘하는 선수야. 코프와 호흡을 맞춰. 네 패스에 상대를 맞추려고 하지 말고 상대의 호흡에 네 패스를 맞춰야 해. 킬패스도 마찬가지잖아. 킬패스를 높이 띄운다고 생각해.”
“네 친구인 브라운이 뛰는 장면이야. 터치라인뿐만 아니라 골라인까지 가지고 놀잖아. 너도 그것을 잘 알고 있으니 브라운을 많이 활용했고. 좌우 모두 브라운 정도까지 된다면 네 몸값은 더 높아질 수밖에 없어.”
로카와 훈련하면서도 세도로프의 윙 강의는 계속됐다.
터치라인, 골라인을 활용하는 방법과 중앙 미드필드와의 크로스는 물론이고 오른쪽 윙을 맡고 있는 선수와도 체인지를 하며 인수의 활용도를 더욱 높여 나가는 세도로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