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그를 지배하는 축구천재-98화 (98/200)

98화

20세기 위대한 복서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누구나 그럴듯한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한 대 쳐 맞기 전까지는.’

한 골을 넣은 뒤 철저히 틀어막기 위해 최전방 공격수까지 자기 진영으로 내려가 텐 백을 구사했다.

처음 패스가 자주 끊기고 중거리슛도 위력이 약한 슛들이 나오는 등 성공적이었지만 레알 마드리드가 패스보다는 개인기 위주로 수비를 돌파하자 하나씩 약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전문적인 수비수들도 뚫리는 최정상급 선수들의 드리블이었다.

그런데 전문적인 수비수도 아니고, 미드필더진이 내려와 수비를 돕는다곤 하지만 모든 선수를 막을 수도 없었기에 위력적인 중거리슛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전반 마지막 인수가 드리블 돌파를 하고 중거리슛코스가 나오자 로조비치가 급하게 뛰어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그것에 근거했다.

이제 발렌시아는 더 이상 골을 먹히지 않게 수비를 강화하거나 다시 공세적으로 나가 추가골을 기록해야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됐다.

반면 레알 마드리드는 어떻게든 더 골을 넣어 무조건 이겨야 했기에 더 공격적인 포지션으로 가야 하는지의 고민만을 남기고 하프타임에 들어섰다.

탕. 탕.

“아직 우리가 유리해. 고개 들어.”

골을 넣고 30분 동안 잘 막고 있었는데 마지막에 실수와 망설임으로 골을 먹은 것에 대해 허탈감이 라커룸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를 느낀 모레노는 전술판을 치며 선수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지지난 시즌 발렌시아에 부임하여 지난 시즌 챔피언스리그에서 8강에 오르고, 팀을 리그와 슈페르코파에서 우승시킨 신흥 명장이었다.

불과 40살에 불과했고 처음으로 맡은 팀이었지만 지난 시즌의 성공으로 모레노는 주목해야 할 감독으로 부상했고, 그런 만큼의 능력은 가지고 있는 감독이었다.

“너희는 내가 말한 전술을 성실하고 최대한으로 따른 것뿐이야.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너희는 너희의 최선을 다해. 그것만 하면 된다. 알겠어?”

모레노의 말은 발렌시아 선수들의 부담감을 덜어주었다.

성적에 대한 모든 책임은 감독이 지는 것이 맞았지만 실제로 자신이 책임지기보다는 선수들에게 떠넘기는 감독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까지 모레노가 보여준 리더십은 선수들에게 믿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후반에도 지금과 같은 수비전략으로 가지만 발레라와 라시토는 센터서클 부근에서 압박해. 미드필더진까지는 몰라도 가르시아와 후베이루, 웨아가 앞으로 나오지 못하게 만들어.”

전반에 골을 기록한 라시토와 그와 파트너를 이루는 발레라가 최전방에서 압박하면 레알 마드리드의 최후방을 맡은 세 수비수를 레알 마드리드의 진영에 묶어 둘 수 있는 효과가 있었다.

그와 동시에 오버래핑에 특화된 웨아를 수비진에 묶어둠으로써 레알 마드리드의 라인업을 꼬이게 만드는 기회가 될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공격형 미드필드 두 명에게 후반 초반 15분 동안 최대한 인수를 괴롭히라는 지시를 내렸다.

모레노도 공격형 미드필드 두 명이 인수를 완전히 막을 수 있다고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인수의 체력을 소모시키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역할을 다했다고 말 할 수 있었다.

모레노가 후반전을 위한 전술적인 문제를 지시하고 있을 때 레알 마드리드 역시 전반을 마친 선수들이 라커룸에 모였다.

“전반전은 수고했어. 다들 쉬어.”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인 샨투는 라커룸에 들어와서도 별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전반전에 펼친 전술도 자신이 아닌 세도로프의 전술이었다.

아직 세도로프의 계약이 발표되지 않았기에 라커룸에 들어올 수 없어 전술의 변화 대처가 느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아직 감독은 샨투였기에 자신이 판단하는 전반의 문제점과 후반에 대처해야 할 점을 지시했다.

“전반과 같이 수비적으로 나오겠지만 슬슬 뚫리고 있으니 전술적 변화를 줄 거야. 그렇지만 어떻게든 뚫어야겠지. 가르시아와 후베이루가 역습에 대비하고 웨아는 전진해서 누네스와 니실랴와 라인을 맞춰.”

지난 시즌 레알 마드리드에 두 줄 수비를 세우던 팀을 상대로 샨투 감독이 자주 선보였던 전술이었다.

두 줄 수비에 막혀 공이 빠져나오더라도 니실랴와 당시 니실랴의 파트너였던 코디 데 융, 그리고 웨아가 후방에서 전방으로 향하는 공을 차단하는 것과 흘러나온 리바운드 공을 전방으로 넘겨주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전술이었다.

오버래핑에 능한 웨아의 가장 큰 장점인 순간 스피드를 활용하는 전술로, 웨아의 체력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유용한 전술이었다.

“전방에서 최대한 휘저어 줘야 해. 모라타. 네 전문이잖아. 사이드에서 돌파해.”

“넵.”

“소아레스, 너도 사이드 돌파해. 양쪽에서 정신 못 차릴 정도로 움직여. 그리고 중앙에서 해야 할 일은 잘 알겠지?”

“네.”

샨투 감독이 레알 마드리드에서 경질을 당하기는 했지만 세계적인 명장 중 하나였고, 그렇기에 레알 마드리드라는 클럽을 맡을 수 있었다.

다음 클럽을 위해서라도 이번 시즌 성적이 중요했다.

***

샨투 감독의 예측대로 발렌시아는 계속 수비에 집중하면서도 두 명의 최전방 공격수의 라인을 센터서클까지 올리는 전술로 변환했다.

그러면서 한가지 예상치 못했던 것이, 공격형 미드필드 두 명이 공의 유무와 상관없이 인수에게 붙었다는 점이었다.

오프 더 볼의 움직임을 강요하면서 인수의 체력을 빼놓으려는 생각임을 알았지만 당장 인수의 움직임이 없으면 전방으로 퍼진 레알 마드리드의 연결고리가 사라지는 것이니 샨투 감독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인수가 두 명의 선수에 묶이자 가장 먼저 라인을 올린 사람은 니실랴였다.

웨아가 자신의 라인까지 올라오고 미드필드들이 인수를 마크하자 니실랴가 앞으로 나가며 인수 대신 실레와 호흡을 맞췄다.

인수가 본격적으로 합류하기 전 레알 마드리드의 공격라인을 조율했던 두 사람이었던 만큼 창의적이지는 못해도 안정적인 움직임에는 문제가 없었다.

“모라타.”

니실랴의 패스를 받은 실레는 바로 공을 사이드를 돌파하고 있는 모라타에게 연결했다.

전반 내내 중앙으로 돌파했기에 수비수의 반응이 늦어 여유롭게 공을 받았지만 실레에게 공이 떠난 순간 수비수보다 한발 앞서 있었기에 오프사이드가 선언됐다.

측면을 완전히 뚫린 발렌시아로서는 다행한 일이었지만 중앙만을 고집하던 레알 마드리드의 전술이 바뀐 것을 확인했고 거기에 맞추어 다시 수비라인을 조정했다.

중앙의 공간이 생기기 시작하자 인수와 실레의 이동 반경이 더욱 넓어졌고, 레알 마드리드 선수들은 좁은 공간이었지만 좀 더 여유롭게 공을 소유하고 패스할 수 있는 길이 늘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휘슬을 잘 불지 않는 데다 카드를 잘 꺼내지 않는 주심의 성향을 믿고 거칠게 몸을 부딪쳐오는 발렌시아의 선수들이었다.

베르나베우에 모인 8만여 명의 관중이 그런 주심을 향해 야유를 보냈지만, 주심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자신의 판단을 믿으며 경기를 진행했다.

그런 일방적인 공격과 거친 몸싸움의 양상은 15분이 가까워지자 갑작스럽게 변화했다.

인수의 체력을 소모하게 하려고 인수보다 더 뛰며 차단하던 선수의 체력이 떨어져 발걸음이 늦어졌고, 인수에게 향할 수 있는 패스의 길이 열렸다.

자신에게 온 패스를 전방으로 차며 두 명의 수비를 따돌린 인수의 앞에는 또 다른 수비가 나타났기에 인수는 공을 몰고 페널티아크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이미 인수 옆에는 실레와 실레를 마크하고 있던 수비가 있었고 인수는 실레에게 가볍게 공을 넘기는 척하며 그 두 사람을 지나쳤다.

인수를 마크하던 수비와 실레를 마크하던 수비의 동선이 얽혀 넘어졌고 인수의 앞이 완전히 트였다.

바로 슛을 때릴 수도 있었지만 인수는 페널티지역으로 완전히 진입했다.

로조비치 앞을 막아주던 중앙수비수 두 명은 서로 얽혀 넘어져 있었기에 로조비치는 다시 인수에게 다가갔다.

이미 전반 인수를 막기 위해 가다 코프에게 일격을 맞긴 했지만 당장은 인수의 진격을 멈출 필요가 있었다.

더욱이 인수가 전진하자 발렌시아의 골키퍼인 스미스도 슛각을 좁히기 위해 앞으로 나오고 있었고 로조비치도 인수의 발만 보고 있었던지라 서로를 체크하지 못하고 부딪히고 말았다.

두 선수가 부딪힌 것을 확인한 인수는 가볍게 공을 띄워 발렌시아 골문 안으로 집어넣고는 세리머니 없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당장은 서로 맞붙은 적이지만 같은 스포츠를 하고 있었고 로조비치와 스미스가 부딪히는 순간 큰 비명이 났기에 당장 기뻐하기보다 경기를 중단시키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한 인수였다.

그런 인수의 생각을 알았는지 발렌시아의 의료진이 급하게 투입됐고 두 선수를 살피기 시작했다.

먼저 넘어진 두 수비수는 일어서 있었고, 문제는 뒤늦게 부딪힌 로조비치와 골키퍼인 스미스였다.

두 선수를 확인하던 의료진은 벤치를 향해 두 손을 교차해 엑스자를 그려보았다.

발렌시아의 최후방 보루 두 선수의 부상은 발렌시아뿐만 아니라 유로예선을 준비하던 이탈리아와 평가전을 준비하던 미국에게도 큰 타격이었다.

두 선수가 모두 들것에 실려 나가고 새로운 골키퍼와 선수가 나오며 어수선한 상황이 정리되자 경기는 4분 만에 재개됐다.

로조비치와 스미스의 부상은 발렌시아의 전략을 완전히 파괴해버렸다.

후반 초반부터 인수를 마크하며 체력을 다 쓴 공격형 미드필드도 교체해 주어야 했고 한 골을 더 따라가야 하는 상황에서 더 이상 교체할 카드도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발렌시아는 이미 무너졌고 불과 5분 후에 인수의 패스를 받은 모라타의 추가 골까지 터졌다.

샨투 감독은 후반 25분이 지나기 전 마크를 뚫느라 고생한 인수와 실레를 교체하고 다시 5분이 지난 후에는 전반전 오버래핑을 많이 한 웨아까지 교체했다.

전반 이른 시간에 발렌시아의 골이 터지면서 발렌시아가 유리했었지만 경기가 끝날 때는 5:1이란 스코어가 기록될 만큼 레알 마드리드의 대승이었고, 인수가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 이후 첫 우승이 되었다.

이벤트 성향이 강한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였지만 인수가 클럽에서 맞는 첫 우승에다 지난 시즌 무관이었던 레알 마드리드가 다시 우승컵을 들며 바르셀로나와 함께 수페르코파 최다 우승클럽이 된 것은 덤이었다.

이날 가장 화제가 된 것은 역시나 인수의 골이 터진 장면이었다.

실레와 위치를 체인지하며 두 명의 수비를 얽히게 하고 난 다음 바로 슛을 하지 않고 페널티 지역으로 파고들며 로조비치와 스미스까지 충돌하게 만들고 난 후, 넘어진 두 사람의 너머로 로비슛을 한 장면은 온갖 매체에서 리플레이됐다.

혹자는 선수들이 비명을 지르며 넘어져 있었는데 그 위로 공을 띄워 골을 기록하고 싶냐는 비난도 있었지만, 결승전 우승을 위해 골을 기록할 필요성이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인수를 옹호하는 여론도 있었다.

특히 인수가 골을 기록한 이후 세리머니 없이 자리를 비켜주며 의료진이 들어올 수 있게 만드는 장면까지 주목받으며 스포츠맨십도 훌륭한 선수라는 여론도 있었기에 인수를 비난하는 여론은 금세 화력을 잃고 말았다.

특히 발렌시아의 감독이 골을 넣고도 세리머니 없이 바로 의료진이 들어올 수 있게 해준 인수를 칭찬하는 인터뷰를 하자 비난하는 쪽 사람들은 자신의 댓글을 지우기 시작했다.

정밀검사 결과 로조비치는 4개월, 스미스는 3개월의 치료과정이 필요하다는 진단이 내려졌고, 리그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쫓아오던 발렌시아는 동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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