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수페르코파 결승전 2차전은 레알 마드리드의 홈인 베르나베우에서 열렸다.
레알 마드리드의 입장에서는 원정 1차전에서 골은 기록하지 못했지만 무승부를 거두며 절반의 성공을 거둔 원정이었고 그 성공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오늘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경기였다.
반면 발렌시아는 원정에서 골을 넣은 뒤 무승부 이상을 거두면서 원정 다득점 원칙에 의한 승리를 원했다.
단판 승부를 통해 우승팀을 가리게 된 만큼 통로에 대기하고 있던 선수들 사이에도 살벌한 기류가 흘렀다.
“괜찮나 봐. 난 또 겁먹어서 못 나올 줄 알았는데.”
대기 통로에서 인수의 모습이 보이자 로조비치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이죽거렸다.
“왜? 내가 나오니 또 휘둘릴 거 같아서?”
“뭐라 하냐? 이 노······. 약하디약한 놈이.”
“근육까지 꽉꽉 찬 너보다는 약해도 그래도 상대하기 힘들지 않아?”
“저번 경기에서 정강이뼈를 완전히 부러뜨려야 했는데. 힘을 빼줬더니 기가 살아있어.”
“애들 보기 부끄럽지 않아?”
인수는 로조비치의 인상이 점점 험악해지자 겁을 먹은 듯이 서 있던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엄청난 덩치를 가진 선수들이 통로에서 말다툼을 하면 에스코트를 하는 아이들이 겁을 먹는 것이 당연했다.
로조비치도 인수에게만 신경 쓰다 에스코트를 하는 아이들이 온 것을 몰랐는지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아이를 달랬다.
성격이 다혈질이고 급해서 그런 거지 아이를 달래는 모습을 보니 순수한 면도 있는 듯 보였다.
주변에 있던 발렌시아의 선수들도 그런 로조비치의 성격을 아는지 농담을 던지며 당황한 로조비치를 놀리는 모습도 보였다.
***
발렌시아는 1차전에서 경기가 성공적이라 평가했는지 같은 라인업을 들고 나왔다.
레알 마드리드에서는 세도로프의 조언대로 인수 옆에 실레가 나란히 섰다.
레알 마드리드에서는 후위에 가르시아와 후베이루, 웨아를 두고 그 앞에 누네스와 니실랴, 그리고 모라타, 실레, 인수, 소아레스가 위치하고, 최전방에는 코프가 서는 3-2-4-1의 전술을 들고 나왔다.
레알 마드리드의 회장이 샨투 감독의 경질을 공언했을 때, 레알 마드리드는 더 이상 전술적 변화를 가져오기 힘들 것이라 모든 클럽이 평가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바뀐 전술을 들고 나왔을 때 모든 언론과 클럽들은 깜짝 놀라 레알 마드리드의 변화를 분석하고 있었다.
특히 세도로프 감독과 계약한 것을 아직 발표하기 전이었고 어제 훈련도 비공개였으니 다들 샨투 감독의 전술 변화에 대한 분석이 힘든 점도 있었다.
그렇기에 어제까지 전문가들이 분석한 경기 양상도, 레알 마드리드의 선발 라인업도 전부 달라진 상황에서 경기가 펼쳐지게 됐다.
그런 수페르코파 2차전은 발렌시아의 선공으로 시작됐다.
이번 경기가 시작되기 전 모든 전문가는 1차전과 마찬가지로 팽팽한 승부를 예측했고 실수를 더 많이 하는 쪽이 질 것이라 예상했었다.
축구란 종목이 그렇듯 모든 선수가 실수 없이 플레이한다면 절대 득점이 날 수 없는 종목이었고, 득점이 나지 않는다면 승부가 나지 않는 종목이도 했으니까.
그렇지만 경기 양상이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레알 마드리드는 기본적으로 경기장을 넓게 쓰는 것을 선호한다.
특히 발렌시아와 같이 미드필더진에서 강한 압박을 가하는 팀을 상대로 할 때는 더욱더 넓게 써야 수비의 간격을 벌릴 수 있었고 공간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런데 레알 마드리드의 양쪽 윙어인 모라타와 소아레스가 사이드라인이 아닌 중앙 쪽으로 파고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중앙에 서 있던 두 선수와 체인징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좁은 공간에서 일렬로 서서 빠른 속도로 패스를 주고받으며 전진했다.
마치 일렬로 전진하며 모든 것을 깨부수는 전차와 같은 모습이었다.
발렌시아의 두터운 미드필더진이 패스를 받은 선수를 둘러싸기도 전에 이미 그 선수의 발에서 공이 떠난 이후였기에 라인을 유지하는 것도 힘들었다.
양 사이드를 전혀 쓰지 않는 중앙만 고집하는 레알 마드리드의 공격형태에 발렌시아의 수비들은 중앙으로 몰릴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럽게 겹쳐지는 선수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 틈을 양 사이드에서 치고 나오는 선수들이 후방에 있던 후베이루와 웨아였다.
수비력은 아랑게스보다 떨어지지만 오버래핑만은 더 낫다는 평가를 받는 웨아가 인수의 패스를 받고 바로 크로스를 올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발렌시아에는 최후의 보루인 로조비치가 있었다.
코프를 향하는 크로스를 헤더로 커트하자 발렌시아는 바로 역습으로 이어갔다.
양 윙백이 모두 발렌시아의 진영으로 올라와 있어 레알 마드리드의 진영에는 세 명의 수비수밖에 없었고 그 수비수들조차 센터라인까지 진출해 있었다.
후방에서 길게 레알 마드리드 진영으로 연결된 공.
발렌시아의 공격진이 그 공을 향해 죽을 듯 뛰었지만 산체스 역시 골문을 비우고 뛰어 나왔고 공격진이 공을 잡기 전에 사이드로 걷어낼 수 있었다.
산체스가 걷어 낸 공을 잡은 건 발렌시아의 감독인 모레노였다.
“하인스가 중심이야. 하인스를 중점으로 마크해.”
모레노는 스로인을 위해 다가온 선수에게 조용히 지시했다.
지난 시즌 더블을 기록한 감독답게 한 번이었지만 레알 마드리드의 전술을 파악하고 바로 대응할 수 있는 지시를 내리는 모레노였다.
시간이 더 길게 있었다면 쉽게 깰 수 있는 전술 지시를 내릴 수 있겠지만 아직 경기 중이었다.
하프타임 때를 기약하며 당장은 공격의 중심인 인수를 막으라는 간단한 지시밖에 내릴 수 없었다.
발렌시아의 공격이 무산이 되고 다시 레알 마드리드의 공격이 시작되자 모레노 감독의 지시를 들은 선수들은 인수를 철저하게 막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세도로프에게 지시를 받은 인수는 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좁은 공간에 세 명의 수비가 자신을 막는 상황.
패스의 길목을 절묘하게 막고 있는 선수들이었기에 이미 원터치 패스는 끊겼고 그대로 전진할 수밖에 없었다.
오른발로 잡고 있던 공을 왼발로 옮길 때는 발렌시아의 수비도 속지 않았지만, 다시 왼발에 있던 공을 오른발로 옮김과 동시에 치고 나가자 수비 한 명이 중심을 잃고 공간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아직도 자신의 앞을 막아선 선수가 한 명 더 있었고 뒤에서도 다른 사람이 따라오고 있었다.
패스할 길목이 열어 다른 선수를 찾았을 때는 이미 모두들 마크를 당하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인수가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앞을 막아선 선수를 등지며 발바닥으로 공을 긁어 띄운 후 수비의 키를 살짝 넘기면서 돌파했을 때 자신의 앞에는 로조비치가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다친다고 했지.”
로조비치는 달려오는 기세 그대로 인수에게 어깨싸움을 걸어왔다.
연달아 드리블을 하느라 중심이 흐트러진 상태에서 로조비치의 어깨를 마주한 인수는 그대로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주심은 단순 몸싸움으로 판단하고 인플레이를 선언하자 로조비치는 바로 전방으로 길게 연결했다.
다시 한번 산체스가 뛰어 나왔지만 이번에는 발렌시아의 공격수가 먼저 공을 소유했고 레알 마드리드의 골문은 텅 빈 상태였다.
골대에서 35미터 거리에서 골문으로 찬 공은 수비수가 걷어내기 전에 골문 안으로 사라졌고 원정팀인 발렌시아가 선취점을 기록했다.
***
“발렌시아가 먼저 선취골을 기록합니다. 로조비치선수가 롱패스로 한 번에 찔러준 공을 정확히 처리한 노바 선수였습니다.”
“하인스가 수비수 세 명을 제칠 때까지만 해도 레알 마드리드의 찬스였거든요. 그런데 발렌시아에는 로조비치가 있죠. 어깨싸움으로 하인스를 밀어내고 공을 소유한 상태에서 정확히 노바에게 연결해 줬습니다.”
“주심에 따라 반칙을 선언할 수도 있었던 충돌 상황이었는데요.”
오늘 중계를 맡은 캐스터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말 그대로 주심의 성향 차이에 따라 다르겠습니다만 길목을 막은 것도 아니고 공의 진행 방향에 먼저 어깨를 집어넣은 것처럼 보였거든요. 연속된 드리블 기술을 쓰다 보니 몸의 중심이 흐트러져 있어 넘어진 것이라 판단했을 겁니다. 더욱이 레알 마드리드의 전술은 역습에 아주 취약한 전술입니다. 중앙을 두껍게 해서 돌파하고 양 사이드는 오버래핑한 윙백에게 맡긴다는 전술인데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후방이 약해집니다. 그렇지 않아도 역습에 최적화된 전술을 펼치는 발렌시아를 상대로 이런 전술을 가지고 온 전술적인 실패라고 봅니다.”
오늘 해설을 맡은 이는 레알 마드리드를 가장 강도 있게 비판하던 사람이니만큼 평가도 박할 수밖에 없었다.
“샨투 감독이 강하게 보조심에게 항의하고 있습니다.”
“너무 강한 항의는 보기에도 좋지 않습니다. 판정의 문제는 주심에게 맡겨야 하는 것이 맞죠.”
해설을 맡은 이가 강하게 발언하고 있을 때 공은 다시 센터서클로 이동한 후였다.
***
“미안해.”
“아냐. 2골 넣으면 되는 거잖아.”
발렌시아가 이미 한 골을 넣은 상태여서 무승부가 된다면 발렌시아의 우승으로 수페르코파가 끝나게 됐다.
레알 마드리드가 우승을 하기 위해서는 2골이 필요했고 반드시 이겨야 했다.
이미 발렌시아는 최전방 2명까지 모두 자신의 진영으로 물러서 있었다.
남은 75분 동안 레알 마드리드의 공세를 철저하게 막아내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좁았던 공간이 더 좁아져 있었고 그 공간을 뚫어야 하는 과제가 생겼다.
인수는 하늘을 보며 길게 심호흡을 해보았다.
“가자. 한 번에 안 뚫리면 두 번에 뚫으면 되고 두 번에도 안 되면 세 번에 하면 되지.”
“그래. 천천히 가자. 시간 많잖아.”
‘마음이 급해지면 공이 발에서 멀어지게 된다.’
자신에게 드리블 테크닉을 알려준 랄라나 감독이 제일 먼저 한 말이었다.
침착하게 공을 소유하다 보면 상대가 먼저 다가서게 되고 다가서는 상대에게는 빈틈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유리몸이긴 했지만 랄라나가 거친 프리미어리그에서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살아남은 이유이기도 했다.
레알 마드리드의 일방적인 공세이긴 했지만 발렌시아의 수비도 만만치 않았다.
공이 몸에서 멀어진다 싶으면 태클로 공을 걷어냈고 거친 반칙이 아니라면 휘슬을 불지 않았던 주심의 성향을 파악하고 거친 몸싸움을 걸어왔다.
전반 40분이 지나가고 있던 상황 실레의 패스를 받은 인수는 자신의 앞을 막아선 선수가 다가서자 사이드를 향해 공을 몰다 다시 중앙으로 파고들며 수비들을 자신에게 끌어들였다.
두 명의 수비가 자신 앞을 막아서자 재빨리 모라타에게 공을 넘긴 후 두 선수 사이를 파고 들었다.
모라타 역시 인수가 두 선수 사이를 뚫고 나오는 것을 보고 리턴을 해주었고 몇 발자국을 더 다가서자 페널티라인 근처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페널티라인 근처에서 반칙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이미 주지하고 있었던 발렌시아였기에 수비수들이 주춤할 수밖에 없었고, 슛할 공간을 내주면 안 된다는 것을 안 로조비치가 재빨리 인수에게 다가섰지만 이미 로조비치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던 인수였다.
로조비치가 나온 빈틈으로 찔 준 공은 코프에게로 향했다. 로조비치의 마크를 받던 코프는 그가 사라지자 노마크가 됐고 후방에서 온 공을 180도를 터닝슛으로 연결했다.
골잡이란 명성답게 코프의 골은 발렌시아의 골대를 찢었고 전반이 끝나기 전 레알 마드리드는 1:1 동점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