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또 이놈들이야. 지겹다.”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결승전 상대는 발렌시아였다.
지난 시즌 바르셀로나가 무너지며 새롭게 떠오른 강자가 지난 시즌 우승자 발렌시아였다.
지난 시즌에는 스페인 무대에서만 리그 2경기, 스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4강전 2경기, 코파 델 레이 4강 2경기 등 6경기나 됐다.
이번 시즌에는 이제 2번째 경기였지만 리그 경기가 한 경기 더 남았고, 코파 델 레이에서도 순항한다면 4강에서 만나는 대진이었다.
전통적인 스페인 왕립축구협회가 홈 앤 어웨이 방식을 고집하는 터라 챔피언스 리그에서까지 마주친다면 최대 한 시즌 8번을 맞붙을 수도 있었다.
물론 아직까지 8번까지 만난 경우는 없었지만 6경기를 만난 팀은 꽤 있었다.
바르셀로나를 포함해서 지난 시즌 발렌시아와 AT마드리드, 아틀레틱 클루브 등 상당히 많은 팀이 한 시즌에도 많은 매치를 치르는 스페인 리그였다.
“지난 1차전에서는 이기지 않았어요?”
“홈에서 하는 경기라 이기긴 했지.”
베르나베우에서 열린 1차전에서 후반 막판까지 0:1으로 끌려가다 후반 30분 발렌시아의 수비수 로조비치가 퇴장을 당하며 겨우 2:1로 역전했었다.
지난 시즌 발렌시아와 6번의 대결을 하면서 2무 4패의 결과도 있었고 지난 시즌부터 발렌시아만 만나면 경기가 잘 풀리지 않은 레알 마드리드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준비도 열심히 했잖아요.”
그동안 비공개훈련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한 것이 데드볼 상황에서의 세트피스였다.
지난 베티스전에서는 쓰지 못했지만 이번 발렌시아전부터는 코너킥과 프리킥 상황에서 세트피스를 쓸 수 있을 정도로 연습이 되어 있었다.
“나를 이용한 4, 5, 8번을 자주 써줘. 내가 완벽하게 골을 만들어 낼게.”
모라타가 이야기한 4, 5, 8번은 코프를 미끼로 해서 모라타나 소아레스가 빈공간을 파고 들어가서 골을 넣는 패턴이었다.
“상황에 봐서 써야죠. 어디까지나 코너킥과 프리킥은 내 판단에 맡긴다고 했잖아요.”
연습을 시작하기 전부터 모든 상황은 인수의 판단에 맡기기로 한 상태였기에 데드볼 상황에서의 작전은 인수의 권한이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부탁하는 거잖아. 너 이거 좋아했지. 이거 먹어.”
모라타는 언제 준비했는지 주머니에서 오렌지 환타를 꺼냈다.
탄산음료를 거의 마시지 않던 인수였지만 스페인에 와서 딱 한 번 마신 오렌지 환타는 새로운 맛이었고 그 후 일주일에 하나 정도 자신에게 상을 주고 싶을 정도로 경기를 했을 때 마시는 특별한 음료였다.
훈련을 마치고 쉬고 있던 자신에게 다가온 이유가 이거였냐는 눈으로 쳐다보자 모라타는 캔을 인수에게 넘기고 샤워장으로 향했다.
***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결승전 1차전을 앞둔 양 팀입니다. 발렌시아 대 레알 마드리드. 레알 마드리드 대 발렌시아의 경기입니다. 지난 시즌 발렌시아가 4강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잡으며 리그 우승과 함께 더블을 기록했었죠. 이번 시즌도 발렌시아가 결승까지 올라왔고 리그에서도 세비야를 잡으며 2위로 올라섰습니다. 승점 7점 차로 선두인 레알 마드리드를 추격하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발렌시아의 경기력이 전반적으로 올라와 있는 상황입니다. 레알 마드리드가 챔피언스 리그 16강에서 탈락했지만 발렌시아는 8강에 올랐고 8강의 상대도 유벤투스인 만큼 수월한 상대가 걸렸죠. 반면 레알 마드리드도 16강에 탈락하긴 했지만 그 후 경기력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만나는 상대마다 대승을 거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여름 이적시장에서 데려온 하인스 선수가 있죠.”
“레알 마드리드 이야기를 하셨으니 그쪽으로 넘어가 보죠. 말씀하신 대로 하인스 선수가 출전하기 시작하면서 연승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하인스 선수의 합류 어떻게 보십니까?”
“불안한 리그 1위를 하던 레알 마드리드였습니다만 하인스 선수가 합류하면서 전력이 한층 업그레이드된 느낌이 듭니다. 특히 공격적인 면에서 상대팀을 압도하면서 공격이 최선의 수비라는 말이 있듯이 그런 느낌을 보여주고 있죠. 물론 하인스 선수의 수비 능력이 떨어지기에 전방압박면에서는 떨어지고 있긴 하지만 수비형 미드필더진을 강화하면서 그 단점을 보충하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오늘도 수비형 미드필드를 두 명이나 기용하면서 미드필더진에 힘을 많이 쓴 레알 마드리드인데 오늘 상대가 발렌시아거든요. 지난 시즌 발렌시아가 우승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두터운 미드필더진이거든요. 1-2-5-2에 가까운 전술을 쓰고 있는데요.”
“1-2-5-2이란 느낌보다는 1-7-2에 가까운 전술이라 생각합니다. 지난 시즌 돌풍처럼 등장한 27살의 수비수 안드레이 로조비치가 등장하면서 통곡의 벽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191센티미터의 큰 키와 88킬로그램의 단단한 피지컬로 제공권은 물론이고 몸싸움에도 능한 수비수로 작년 수비수 NO.1을 찍었던 선수죠. 단점이라면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한 시즌에 퇴장이 두세 번 정도 된다는 겁니다.”
“지난 리그 4라운드에서도 후반 30분에 로조비치 선수가 퇴장을 당하며 레알 마드리드가 2:1로 역전을 했거든요.”
“발렌시아 입장에서는 안타까운 퇴장이었을 겁니다. 로조비치 선수가 퇴장을 당하고 나서 항의하면서 3경기 출장금지를 당했거든요. 로조비치 선수가 없는 3경기 동안 1승 2패를 하며 선두권 싸움에서 한발 멀어질 수밖에 없었죠. 로조비치 선수의 복귀 후 다시 치고 올라와 2등이긴 하지만 발렌시아 입장에서는 두고두고 아쉽겠죠.”
“그런 양 팀의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결승전 1차전 라인업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원정팀 레알 마드리드의 라인업입니다. 골키퍼 세르히오 산체스, 페페 가르시아, 샤비 마르체나, 호베루투 후베이루, 마르셀리노 아랑게스, 누네스, 파울루스 니실랴, 하인스, 알프레도 모라타, 루카스 소아레스, 최전방에 라이안 코프가 서겠습니다. 이에 맞서는 홈팀 발렌시아의 라인업입니다. 골키퍼에 리안 스미스, 안드레이 로조비치······.”
***
미드필더진에 7명이나 배치한 발렌시아의 중원은 패스할 길목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했다.
지난 시즌부터 여러 팀들이 발렌시아를 까다롭게 생각한 것이 바로 이 중원 싸움에서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고 미드필드를 거치지 않고 롱패스를 하더라도 최후방에 있던 로조비치가 있었다.
공중볼 경합에서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던 로조비치 때문에 롱패스 작전도 잘 통하지 않았고 통하더라도 반칙을 마다하지 않은 로조비치의 플레이에 주눅이 드는 경우가 많았다.
좌우 사이드를 뚫는 전술도 많이 나왔지만 상대편 윙백 두 명은 수비수라기보다 윙어에 가까운 플레이어로 구성되어 있었고 빠른 스피드로 커버하니 그것도 만만치 않은 선택지였다.
중간에 패스가 끊기는 경우가 많이 발생하자 수비수들의 부담도 커져만 갔다.
“아, 이럴 때 에디가 있었으면 딱인데.”
인수가 아는 최고의 라인 브레이커는 에디였다.
스피드도 좋았고 호흡도 잘 맞았기에 눈빛만 주고받아도 알아서 빈공간을 찾아 들어갔다.
모라타와 소아레스도 스피드가 있는 윙어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발렌시아의 윙백들을 떨굴만한 순간스피드가 좋은 것도 아니었기에 빈공간을 열어주는 패스도 선택하기 힘들었다.
전반 30분이 지나도록 레알 마드리드는 슛 한번 제대로 때려보지 못하고 있던 상황.
15분 만에 니실랴의 패스가 인수에게 향했다.
인수가 니실랴의 패스를 받은 순간 인수 주변의 발렌시아의 선수 세 명이 인수를 감쌌다.
‘와, 지치지도 않나.’
스페인 특유의 압박플레이는 그렇지 않아도 활동량이 많은 미드필더진에게 더욱 가혹했다.
물론 발렌시아라고 해도 90분 내내 그런 플레이를 할 수는 없었지만 현재까지는 숨막히게 수행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세 선수를 살피며 인수는 몸을 돌리며 발등으로 가볍게 공을 차올려 수비수 뒷공간으로 넘겼다.
인수의 움직임에 신경을 쏟다 자신의 머리 위로 뜬 공을 확인한 순간 인수가 세 명의 수비를 뚫었고 발렌시아의 골대를 향해 달렸다.
거의 최전방에 있던 자신이 세 선수를 제쳤으니 이제 앞에 남은 건 로조비치와 골키퍼인 스미스뿐이라 생각한 인수는 더욱 빠르게 공을 향해 쫓았다.
‘내가 빠르다.’
인수가 공을 향해 거의 다가섰을 무렵 최종 수비수인 로조비치가 다가왔지만 미세하게 인수가 빠른 순간, 인수는 공을 접어 로조비치를 따돌리려 했다.
“어딜.”
로조비치는 인수가 공을 접는 것을 보고 바로 태클을 했다.
이미 인수가 공을 접은 상태인지라 공이 발에 가리긴 했지만 여기서 놓치면 골키퍼밖에 남지 않는다는 걸 아는 로조비치는 과감하게 태클을 시도했고 인수를 넘어뜨릴 수 있었다.
삐익.
인수가 넘어지자마자 주심이 달려와 로조비치의 반칙을 선언하고 위험한 플레이는 자제하라고 로조비치에게 구두로 경고했다.
“위험했잖아요. 카드 안 줘요?”
로조비치의 플레이가 위험한 플레이라고 확신했던 모라타는 반대편 사이드에서부터 달려와 주심에게 따졌다.
“발이 높지는 않았어. 카드를 줄 만한 상황이 아니야.”
“그래도 뚫렸으면 골키퍼와 1:1 상황이었어요. 위험한 플레이는 아니더라도 결정적인 찬스를 반칙으로 막았잖아요.”
발렌시아의 홈구장 에스타디오 데 메스타야에 모인 관중들은 계속 항의를 하는 모라타에게 야유를 쏟았고 모라타의 목소리도 그에 따라 높아졌다.
“위험했지만 경고를 줄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는 판단이야. 더 이상 항의하면 모라타 너라도 경고를 줄 거야.”
모라타가 항의하는 도중에 선수들이 인수의 곁으로 모였다.
“괜찮아?”
“발을 들고 들어오지는 않더라고. 괜찮은 거 같아.”
인수는 자신을 걱정하는 선수들에게 빙그레 미소를 지어주고는 차인 쪽 발을 잔디에 몇 번 굴렀다.
크게 욱신거리는 느낌도 없었고 살짝 피했던 터라 몸의 중심만 무너졌었다.
로조비치에게 경고를 먹이지 못한 것이 아쉽긴 했지만 한 번 뚫었으니 언제든 뚫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필드 중앙이긴 했지만 골대와 32미터는 넘어 보이는 거리이기에 직접 슛을 하기에는 무리인 상황.
약속된 세트피스를 하려 했지만 상대에는 제공권을 괴물 로조비치가 있었다.
로조비치의 헤더로 처음으로 찾아온 찬스는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한 번 뚫렸던 경험이 있어서인지 발렌시아의 선수들은 인수를 막을 때 더욱 신경을 썼고 아까와 같은 플레이로 뚫기는 무리였다.
전반 종료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인수는 전방에 있는 코프에게 다가섰다.
“후방에 공이 넘어오면 스크린 좀 걸어줄 수 있어?”
“왜 롱패스가 쉽지 않다는 건 알잖아.”
“해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그래.”
이미 전반 추가시간도 거의 다 된 시간. 이번 레알 마드리드의 공격으로 전반이 끝날 확률이 높았다.
“알았어.”
코프가 고개를 끄덕이자 인수는 후방에 있는 누네스에게 손짓했다.
전방으로 찔러주는 패스는 니실랴가 더 좋았지만 공중으로 길게 넘겨주는 패스는 누네스가 더 정확했다.
인수의 사인을 받은 누네스는 전방으로 길게 넘겼다.
이미 전반에 두세 번 시도했지만 번번이 로조비치에게 막혔던 패턴이었기에 이번에도 로조비치가 먼저 공이 떨어지는 위치에 자리 잡았고 그 뒤를 코프가 같이 경합하는 상황이 됐다.
그리고 어느새 쳐져 있었던 인수가 로조비치를 앞에서 막아서 앞뒤로 에워싸는 형태가 됐다.
순간 당황한 로조비치였지만 이미 이런 경험이 많았다.
인수의 어깨를 가볍게 누르며 공중으로 떠서 안전하게 같은 편 선수에게 헤더로 넘기려고 했을 때 동시에 떠오른 코프가 편한 플레이를 방해했다.
뒤에 코프가 있다는 것을 알긴 했지만 자신보다 키도 작고 점프도 낮은 상대이기에 신경 쓰지 않았지만 뒤에서 방해하니 제대로 헤더를 맞추지 못했다.
롱패스가 나왔을 때 자신이 뒤에서 출발해서 오프사이드는 아니었던 상황인지라 다음 플레이를 위해 재빨리 공이 떨어진 위치를 찾았을 때는 이미 인수가 공을 향해 뛰던 상태였다.
주변에 발렌시아 선수들이 있긴 했지만 인수가 한발 앞서 있던 상황이었기에 로조비치는 인수의 뒤를 열심히 쫓았다.
자신에게 달려드는 발렌시아 선수들을 피해 공을 접고 몸을 돌린 순간 로조비치가 태클로 달려들었고 인수는 순간 공을 앞을 자신의 발로 막았다.
삐익.
로조비치의 태클은 인수의 발을 가격했고 인수가 공중에 떠서 쓰러지자 바로 주심이 다가왔다.
로조비치의 축구화에 달린 스터드와 인수의 신가드가 부딪히는 소리가 크게 났기에 주심은 바로 주머니에서 옐로카드를 꺼냈다.
“저 녀석이 진행 방향을 막았다고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로조비치는 주심이 카드를 꺼내 들자 억울하다는 듯 항의했다.
“그래도 발이 높았어. 신가드와 부딪히는 소리가 났는데.”
“왜 노란색이에요. 아까도 구두 경고를 줬고 위험한 플레이를 계속하는데 빨간색이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요?”
로조비치와는 반대로 모라타가 다시 달려와 주심에게 처벌의 수위가 낮다며 항의했다.
크게 항의하는 두 선수를 말리느라 주심을 둘러싸고 레알 마드리드와 발렌시아의 선수들이 모여들었고 경기가 잠시 중단됐다.
“괜찮아? 소리가 엄청 크게 났는데. 신가드가 깨졌잖아.”
레알 마드리드의 의료진은 인수가 넘어지자마자 바로 달려와 인수의 양말을 내리며 상태를 확인하고 신가드가 깨진 것을 보고 놀랐다.
“괜찮아요. 아프지는 않아요.”
특수 유리섬유와 폴리우레탄으로 만든 신가드가 깨질 정도에 살짝 혈흔까지 보였으니 의료진은 아프지 않다는 인수의 말을 무시했다.
인수가 바로 의료진에 의해 경기장 밖으로 이송되고 전반이 종료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