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그를 지배하는 축구천재-92화 (92/200)

92화

“드디어 하나씩 풀리는 거 같던데.”

“그러는 넌 PFA 올해의 선수 후보에 오를 것 같다던데 진짜야?”

시즌 22라운드 바르셀로나 전과 23라운드 셀타 비고와의 경기가 끝난 후 인수는 영국으로 넘어왔다.

이미 지난해 9월부터 2040 유로예선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이제 막 이적한 인수는 대표팀 명단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아직 예선이었기에 팀에 적응하라는 배려차원이긴 했지만 그 후 인수가 경기에 출장하지 못하면서 대표팀에 부를 명분이 충분하지 못했다.

그러다 인수가 경기에 다시 나오기 시작했고 컨디션도 올라와 있는 상황이었기에 이번 벨기에와의 예선 경기부터 참여하길 원했다.

인수와 랭커리지 에이전시에서도 잉글랜드대표팀 차출을 반대할 생각이 없었기에 셀타 비고와의 경기가 끝나고 바로 런던행 비행기에 올랐다.

런던에 도착한 인수는 바로 집으로 향했고 집에는 이미 A매치 휴식기를 맞은 에디가 기다리고 있었다.

“올해의 선수는 모르겠는데 이달의 선수는 한 번 탔어.”

에디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담담히 말했지만 처음 선정됐다고 연락을 받았을 때 훈련장의 그 넓은 필드를 굴러다니며 기뻐했다는 소리를 이미 들은 인수였다.

“팀도 잘 나가고 있고.”

인수가 남기고 간 막대한 이적료는 소튼의 공격적인 투자를 가능하게 했다.

우선 계약이 끝나가는 코룸을 다시 새로이 3년 계약을 체결하며 묶어 두었고, 볼의 계약도 새로이 체결했다.

인수가 빈자리에 바우만과 톰슨이 잘 메워주었고 부족했던 결정력은 에디와 후퍼의 감각이 올라오며 골을 터트리고 있었다.

순위는 8위로 높은 위치는 아니었지만 이번 시즌도 빅 6에게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강등권 팀들에게 덜미를 잡히는 모습도 여전했다.

“당연하지. 내가 엄청 열심히 하고 있거든. 이적하지 않기로 한 결정이 옳았나 봐.”

인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이적하고 나서 한참 고생을 했었다. 밝고 티 없는 성격의 에디라면 더 잘 적응할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처럼 활약할 것이냐고 묻는다면 물음표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영국의 주요 언론지들에서 지난 시즌 이적에 대한 총평을 하며 에디가 이적하지 않은 것이 개인적으로나 클럽에 있어서 이득이었는지 모르겠다는 평가를 내놨었는데, 불과 몇 개월 만에 이적하지 않은 것이 가장 잘한 선택이라고 노선을 바꿨을 정도였다.

“그래서 소집은 모레인데 벌써 돌아온 이유가 내일 레딩을 가기 위해서라고?”

“응. 그동안 계속 레이만 마드리드에 왔었잖아. 나도 이제 자리 잡았으니 경기를 보러 가야지.”

“레이한테 말했어?”

“아니. 그런데 이미 알지 않을까? 입국하는데 기자들이 바글바글하던데.”

“추진력 하면 레이인데. 내일 경기가 아니었으면 당장 여기 있었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텐데. 내일 레딩에서 안 보이면 삐지겠는걸.”

인수가 마드리드로 이적하고 나서도 에디와 레이는 가끔 만나 밥도 먹고 이야기도 많이 했다.

둘이 만나면 어쩔 수 없이 주제는 인수였다.

훈련 중 쉬는 날이 생기면 마드리드로 날아갔던 레이가 시즌이 시작한 이후 거의 가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토해낸 적이 많았지만.

“그래서 레딩으로 가는 기차표 2장을 예매해놨지. 경기장 표도 예매해놓고.”

“응. 예매하는 것이 빠르긴 하지. 응? 왜 두 장이야?”

에디는 인수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다 두 장이라는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어 인수를 바라봤다.

“당연히 두 장이지. 너도 갈 거잖아. 내가 예약했는데 넌 오기 싫다고 해서 혼자 왔다고 레이에게 말해줄까?”

“아니 당연히 가야지. 갈 거야. 내일 데이트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레이를 만나러 가야지.”

“데이트? 여자친구 생겼어?”

“응? 아니. 뭐 그렇다는 거지.”

에디는 자신의 방에 있는 컴퓨터에 얌전히 잠들어있는 여자친구는 죽어도 혼자 알아야 할 비밀이었다.

***

오랜만에 직접 관전하는 레이의 경기였다.

그동안 훈련하는 시간을 쪼개서 레이의 경기는 전부 다시보기로 봐왔었다.

여자친구라고 하더라도 옆에서 이래라저래라할 수는 없었기에 ‘수고했어. 오늘 잘했어’ 정도의 말만 해주었었다.

그렇기에 직접 경기를 관전하고 서프라이즈 해주는 이벤트를 구상했는데 경기장에 들어서기 전부터 몰려든 관중 덕에 처음부터 레이에게 들키고 말았다.

“이런 모자하고 스카프로 숨겨질 거라고 생각했었어? 바보냐?”

“누가 봐도 모르잖아. 검은 머리도 잘 숨겼고 선글라스에 스카프로 얼굴까지 감쌌는데.”

“그러니까 그 변장이 더 수상하다고 내가 말했잖아. 그리고 그 덩치를 봐.”

프로축구선수인 인수와 에디는 두꺼운 옷으로 온몸을 감쌌지만 조밀한 근육들이 보였다.

레딩 여자축구 팬들이라면 인수와 레이가 연인 사이인 것을 모두 알았고, 경기장에도 직접 온 적이 있었던 만큼 또 만날 수 있을 거라 기대하는 팬도 있었다.

어젯밤부터 인터넷에는 인수가 입국했다는 기사가 떴고 아침에는 뉴스에까지 보도된 상황에서 레딩 축구장을 방문한 사람이 인수와 에디라는 것은 누구나 추리할 수 있었다.

인수와 에디는 이왕 들킨 것 답답한 스카프와 모자를 벗고 레이가 경기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오프 더 볼이 좋은 것도 아니고 움직임이 좋은 것도 아니지만 레이는 골을 넣을 타이밍을 감각적으로 잘 알았다.

상대 수비의 덩치가 자신보다 훨씬 컸음에도 악바리처럼 비집고 들어가 넘어오는 공을 어떤 자세로든지 골을 넣을 수 있는 스트라이커가 레이였다.

물론 체격적인 한계도 있었고 어쩔 수 없이 상대와 많이 부딪혀야 했기에 잔부상도 심하긴 했지만 골이 필요할 때 레딩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선수는 레이였다.

오늘 경기도 0:0의 팽팽한 승부에서 후반 30분경 레이가 상대편 수비들을 제치고 들어가 수아가 크로스한 공을 무릎으로 한 골을 넣으며 레딩이 승리할 수 있었다.

아스날 레이더스나 첼시 레이더스, 맨시티 위민 같이 단단한 스쿼드를 구축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레딩이 나름 순위권 싸움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은 수아의 크로스 능력과 레이가 골을 넣는 덕분이었다.

오늘 경기에서 레딩이 이겼기 때문인지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팬들의 얼굴이 밝았다.

관중 중 몇 명이 인수와 에디에게 다가와 싸인을 요청해 해주긴 했지만 대부분의 관중들이 눈인사만 건네고 레딩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펍으로 흩어졌다.

인수와 에디가 잠시 기다리자 그새 샤워를 마쳤는지 레이가 밝게 웃으며 걸어왔다.

“온다면 온다고 말을 하지. 경기하는 중에 깜짝 놀랐잖아.”

레이가 다가와 인수의 팔짱을 끼며 밝게 웃었다.

“서프라이즈, 하고 싶었는데 레딩 팬들의 눈이 너무 좋더라고.”

“네가 온다는 기사가 영국에 도배가 됐는데 당연히 네가 영국에 있는 걸 알았겠지. 나 보러 왔다는 것도 알 테고. 아마 오늘 경기장이 꽉 찬 것도 네가 올 수도 있다고 해서 그럴걸.”

레딩 위민의 경기장은 5000여석이 겨우 넘는, 유스들과 같이 쓰는 경기장이었다.

평상시 관중이 3000명이 넘지 않는다는 생각하면 오늘 만원 관중은 인수가 방문할 수도 있다는 기대감이 있어서란 말도 일리가 있었다.

물론 오늘 상대가 상위권 순위경쟁을 하는 아스널 레이더스라는 점도 한몫을 했을 테고.

“그래도 다시보기로만 보다 이렇게 직접 보니까 네가 얼마나 열심히 뛰는지 알겠던데.”

“와 진짜 나빴다. 내가 옆에 뻔히 있는데 하인스하고만 이야기해?”

“너야 내가 가끔 가서 밥도 먹어주고 친히 놀아주고 그러잖아.”

“와 놀아주는 거였어?”

인수는 레이와 에디의 장난이 길어지려 하자 손으로 말렸다.

“배고프다. 밥이나 먹자.”

“잠시만 수아도 나온다고 했거든. 기다렸다가 같이 먹으러 가자.”

***

“한국으로 돌아가?”

에디는 수아가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하자 깜짝 놀라 바라봤다.

“응. 지도자 코스를 생각하고 있는데 대학원도 다녀야 하고 연수도 받아야 하니까.”

짧다면 짧을 수도 있는 여자축구선수의 수명이었다.

자신이야 대학리그에서 주목을 받아 국가대표도 되었고 한국 여자리그 경험 없이 바로 영국으로 스카웃되었기에 협회 외에는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꿈인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한국으로 돌아가 대학원을 다니며 코치 연수를 같이 받고 인맥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에이전트하고도 상담한 결과 한국에서 지도자를 하고 싶으면 한국에서 뛰면서 인맥을 쌓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 후였다.

“영국에서도 할 수 있잖아.”

“의사소통은 할 수 있지만 대학원을 다닐 만큼은 아니라서.”

“코치를 하는데 대학원을 왜 다녀?”

에디와 수아가 이야기하는 도중 인수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인수 자신도 축구선수의 길을 선택하며 정규과정밖에 졸업하지 않았다.

이는 에디와 레이도 마찬가지였고 주변에 있는 선수들도 대학까지 나온 선수들은 없었다.

물론 대학축구팀이 1부리그인 프리미어리그까지 올라온 적은 있지만 학업과 축구를 병행했을 뿐이지 축구를 하려고 대학을 들어간 선수들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수아는 대학까지 축구를 하고 졸업하고 영국으로 넘어왔다는 소리를 듣고 놀랐던 적이 있었는데 대학원까지 가야 하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흠. 인수 넌 한국계니까 알려나 모르겠네. 혹시 학연, 지연, 혈연이란 소리 들어본 적 있어?”

인수가 고개를 흔들자 수아는 말을 이었다.

“한국에는 학연, 지연, 혈연이란 소리가 있어. 학연은 말 그대로 출신학교 때문에 묶이는 거고, 지연은 출신 지역에 따라 묶이고, 혈연은 같은 친족을 따라 묶인다는 말이야.”

“그게 축구랑 무슨 상관인데?”

생전 처음 들어보는 소리에 세 사람은 동시에 수아에게 물었다.

“쉽게 설명하면 내가 A라는 학교에서 축구를 배우고 나서 클럽의 아주 높은 자리에 올라갔어. 그럼 그 A라는 학교 출신의 선수들을 끌어줄 수 있겠지. 그게 학연이야. 아니면 B라는 지역 출신이야. 그럼 B 출신의 선수들을 더 기용할 수 있고, 조카나 친구 아들, 딸을 기용할 수 있는데 그게 혈연이야.”

“그러니까 그게 축구랑 무슨 상관이야. 자기가 잘하면 되잖아. 원래 축구는 잘하거나 잘 가르치면 되는 거잖아.”

“흠. 만약에 A라는 선수가 포츠머스에서 축구를 배웠거나 그 출신이야. 그런데 그 선수가 잘한다고 소튼에서 스카웃을 할까?”

“당연히 데려와야지. 포츠머스에서 무슨 축구를 배운다고 그래. 가르치는 것은 소튼에서 더 잘 가르칠 수 있어. 워드프라우스만 봐도 알잖아. 포츠머스 출신이지만 우리 세인트의 레전드라고.”

수아는 에디의 말을 듣고 고개를 흔들었다.

분명히 보이지 않은 차별이 영국에도 있었지만 세 사람은 인정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하여튼 한국에는 그런 게 있어. 그래서 적어도 하나쯤은 챙겨야 하지 않겠어? 영국에서 오래 축구선수를 하며 은퇴할 수 있겠지만 지도자가 될 수는 없으니까.”

“영국에서 하면 되잖아. 자료라면 세인트에서 얼마든지 구해줄 테니까.”

수아를 강하게 만류하는 건 의외로 에디였다.

“영국에서 코치수업을 받고 라이센스를 따면 영국에서 지도자 생활을 해도 되잖아. 요즘 코치들 중에는 여자들도 많으니까. 영국이라면 대학원을 안 다녀도 되잖아.”

말이 앞서는 에디이긴 했지만 지금 말하는 투는 말만 앞서는 모양새가 아니었다.

“레딩 위민에서 재계약하자고 했다며 재계약을 하고 그 조건에 라이센스를 딸 수 있게 도와달라는 조항을 포함시켜 달라고 하면 되잖아.”

진지한 눈으로 강하게 만류하는 에디를 보며 수아도 진지하게 다시 고민했다.

가끔 만났던 에디이긴 하지만 항상 장난스럽고 어린아이 같은 모습만 봤지,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다음날 인수와 에디는 세인트 조지 파크로 이동해야 했기에 네 사람은 밥만 먹고 헤어졌다.

레딩에서 소튼으로 넘어오는 40분 동안 인수는 에디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에디도 무엇을 생각하는지 조용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