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1:0으로 레알 마드리드가 앞선 채 시작된 후반의 양상은 전반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후반 초반 안수 파티와 파울레를 제외한 나머지는 센터서클을 넘어서지 않았고 레알 마드리드의 공격의 시작인 인수에게는 전반보다 더한 압박이 가해졌다.
그러면서도 전방으로 한 번에 연결하는 롱패스를 구사하며 레알 마드리드의 수비가 함부로 올라오지 못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중간 허리가 뚝 끊긴 레알 마드리드의 패스가 원활하게 전방으로 연결되지 못하자 샨투 감독도 교체 카드를 꺼내 들었다.
안수 파티와 파울레를 막기 위해 투입했던 코디를 빼고 수비라인과 인수를 연결할 고리를 만들기 위해 팀 실레를 투입했다.
인수가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고 있을 때 공격의 물꼬를 맡고 있던 실레의 투입은 파리 생제르맹의 수비에 혼돈을 가져왔다.
인수를 밀착 마크하자니 실레가 공격을 풀어 갔고 실레를 막자니 인수가 풀려 위협적인 공격이 전개됐다.
실레 투입 1분 후 레알 마드리드는 후반 시작 이후 처음으로 찬스를 맞았다.
파리 생제르맹의 후방에서 넘어 온 공을 니실랴가 끊었고 니실랴는 바로 실레에게 패스를 연결했다.
인수를 더블 팁으로 막던 리코가 실레에게 다가갔고 실레는 바로 인수의 좌측으로 패스를 연결했다.
공과 함께 자연스럽게 몸을 돌리게 된 인수는 회전하는 힘 그대로 마리오를 뚫는 데 성공했고 공을 터치하지도 않은 채 공과 함께 패널티 아크 중앙으로 들어갔다.
공을 잡고 호흡을 고를 것이라 생각한 파리의 3백은 인수가 돌진하자 자연스럽게 인수 쪽으로 몸이 쏠렸고 마크하던 코프에게 공간이 생겼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던 인수는 아웃사이드 패스로 코프에게 밀어주었고 코프도 인수가 밀어준 힘 그대로 슛으로 연결했지만 파리 생제르맹에는 다그바가 있었다.
리그1의 최우수 골키퍼를 3년 연속 수상했고 발롱도르에서도 2년 연속 후보 30명 안에 든 세계적인 골키퍼 다그바는 코프가 슛한 방향으로 몸을 날렸고 주먹으로 골대 뒤로 넘기는 것까지 성공시켰다.
한 점을 더 내준다면 경기의 향방을 예측할 수 없던 상태에서 나온 슈퍼 세이브는 파리 생제르맹 선수들을 다시 긴장시켰고 느슨해졌던 나사를 조이게 만들었다.
후반전 처음 나온 코너킥 찬스에서 인수는 최대한 골대에 붙이는 킥을 하려 했지만 너무 힘이 들어가 골라인 아웃이 되어 버렸다.
후반 들어 가장 위험한 순간을 넘긴 파리 생제르맹은 물렸던 수비를 전진시켰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안수 파티와 파울레를 1차 저지했던 수비 중 하나를 뺐으니 자연스럽게 두 사람이 풀렸다.
거기에 물렸던 선수들이 전진하니 레알 마드리드의 수비가 꼬일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바뀐 진영에 당황한 사이 안수 파티와 파울레는 레알 마드리드의 중앙을 돌파했고 그와 동시에 양 날개를 맡고 있던 틸로 계예와 페르난데스가 사이드를 따라 전진했다.
레알 마드리드의 진영에서 벌어진 파리 생제르맹의 전진을 막지 못했고 패널티 지역에서 프리 찬스를 맞은 안수 파티가 강력한 오른발 슛을 레알 마드리드의 골대에 꽂아 넣으며 동점을 만들었다.
레알 마드리드로서는 이제 연장이라도 가기 위해서는 4골이 필요한 상황. 남은 시간은 35분으로 충분했지만 멘탈이 무너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다들 뭐해. 아직 경기 안 끝났어.”
어느새 후방까지 내려왔던 인수가 골대 안에서 공을 들고 센터서클로 뛰자 그 모습을 보던 모라타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아직 포기하지 않은 선수가 있었고, 그 선수가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가장 어린 선수였다.
레알 마드리드의 주장이면서 안수 파티가 골을 넣을 때 ‘끝났다’라는 생각을 잠시 했던 자신을 반성하며 모라타는 선수단의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모라타의 목소리를 들은 선수들은 숙였던 고개를 들었고 인수가 공을 들고 센터서클로 뛰는 모습을 보았다.
가장 어린 선수가 말도 없이 선수들을 독려하는 모습.
그리고 이기려는 의지를 본 순간 레알 마드리드의 선수들은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는 생각을 했다.
***
“든든해 보이지 않습니까?”
샨투 감독은 코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적인 클럽들이 인수를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올림픽에서 가장 어린 나이에 잉글랜드 대표팀을 이끌던 모습 때문이었다.
당시 잉글랜드 대표팀의 주장인 케인이 있었고 최고참이었던 루튼이 있었지만 누가 뭐래도 금메달까지 목표 의식을 심어준 것은 인수였다.
그때 당시 16살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고 그때마다 케인과 루튼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경기 중에는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 후 아르헨티나 월드컵 때는 어느 축구 전문기자가 ‘인수를 당장 잉글랜드 대표팀의 주장이라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라는 칼럼을 썼을 정도였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18살의 소년인 인수에게 천문학적인 이적금을 배팅한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나도 순간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경기장에 있는 다른 이들의 생각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트리거인가.”
총의 방아쇠를 뜻하는 단어인 트리거.
트리거의 동작으로 인해 총알이 발사되기에 가장 중요한 부품이기도 했고, 또 어느 한 동작으로 인해 연속 동작이 자동으로 실행되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트리거요? 그렇군요. 하인스의 행동으로 선수단의 눈빛이 바뀌었으니까요. 트리거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아직 늦지 않았지. 더 이상 수비만 할 수는 없잖아. 사라비아 준비시켜.”
레알 마드리드의 주전 윙이었다가 모라타가 주전으로 부상해 로테이션 자원으로 남은 제아르드 사라비아.
충분히 다른 팀으로 이적할 수도 있었지만 고향인 마드리드를 떠나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32살인 지금도 로테이션 자원으로 남아 있는 레알 마드리드의 충신이라 할 수 있었다.
주로 출전하는 포지션은 윙어였지만 왕성한 활동력과 적극적인 수비 가담 능력, 볼 경합, 패스 차단까지 만능 플레이어로 쓸 수 있었다.
레알이 이번 시즌 시우바가 떠났음에도 1위를 할 수 있는 숨은 공로자이기도 한 사라비아였다.
“니실랴를 빼고 사라비아를 투입하자고. 얼마나 걸려?”
“적어도 5분? 정확한 건 사라비아의 상태를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때 뒤에서 두 사람을 이야기를 듣던 체력코치가 앞으로 나섰다.
“사라비아는 이미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몸풀기가 거의 끝났을 겁니다.”
체력코치의 말대로라면 후반 시작했을 때부터 천천히 몸을 움직여서 풀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감독이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경기의 방향과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에 대한 준비를 해 놓는 것이 일류 클럽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선수들의 행동이었다.
“좋아. 준비가 끝나는 대로 니실랴와 교체해.”
경기는 선수들이 뛰는 것이고, 경기가 시작되고 난 후에 감독의 역할은 선수들이 자신의 기량을 다 할 수 있게 보조해주는 것이라 믿는 샨투 감독이었다.
아직 교체카드가 한 장이 더 남긴 했지만 앞으로 경기는 더 치열해질 것이기에 아직은 남겨두어야 했다.
***
3분 후 교체할 것이라는 사인을 받은 니실랴는 자신의 남은 체력을 다 쏟기로 결심했다.
90분 경기, 더 나아가 120분 경기를 준비하고 나선 경기에서 아직 60분밖에 뛰지 않았기에 체력은 충분했다.
하인스의 패스가 모라타에게 연결이 되고 모라타의 크로스가 골키퍼에게 막힌 후 공이 전방으로 한 번에 넘어오자 니실랴는 낙하지점을 파악해 힘차게 뛰어올랐다.
니실랴의 헤더가 새로 투입된 실레에게 연결되었고 실레는 바로 인수에게 공을 넘겼다.
“실레, 들어가.”
인수가 말하기 전부터 이미 실레는 오른쪽 패널티 코너로 뛰고 있었기에 인수는 힐패스로 정확히 실레 앞으로 공을 떨궈줄 수 있었다.
패스하자마자 인수 역시 왼쪽 패널티 코너로 달리기 시작했고 인수를 막던 마리오의 반응이 한발 늦으며 실레가 다시 리턴한 공을 편하게 잡을 수 있던 인수였다.
이미 3백이 다 자리 잡은 상황.
인수와 골대 사이에 틈이 없게 만들었다고 생각했지만 인수는 크게 발을 휘둘렀다.
인수의 중거리슛을 경계하던 수비가 몸을 날려 슛코스를 막았지만 발이 공을 때리는 소리가 크지 않았고 인수의 의도대로 공은 둥실 떠 코프에게 연결됐다.
소튼 시절 인수가 코룸에게 주던 패스와 같은 패스.
코프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공을 보고 놀라긴 했지만 이미 인수가 공이 갈 것이니 집중하라 말했던 상황이기에 파리 생제르맹의 선수들이 반응하기 전에 슛을 할 수 있었고, 그 슛은 파리 생제르맹의 그물을 갈랐다.
파리 생제르망이 골을 넣은 지 4분 만에 골을 넣으며 2:1로 다시 앞서나가는 레알 마드리드였지만 이 승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적어도 3골이 더 필요한 상황이었다.
공이 골대에 들어갔기에 경기는 센터서클에서 새로 시작됐다.
파리 생제르맹에게 맡기면 공이 센터서클로 가는 시간도 있었기에 인수는 파리 생제르맹 선수들이 거칠게 반응하는 것에도 개의치 않고 골대로 들어가 직접 공을 들고 센터서클로 향했다.
파리의 파르크 데 프랑스였더라면 괜한 분란을 일으켰다며 경고를 먹을 수도 있지만 이곳은 베르나베우였다.
인수가 공을 직접 운반하자 파리 생제르맹의 선수들도 시간을 더 끌 수 없었고 경기는 다시 재개됐다.
수비에 익숙지 않던 인수였지만 파리 생제르맹을 거칠게 압박했고 그런 모습을 보던 레알 마드리드의 선수들도 각기 맡은 선수를 거칠게 압박했다.
레알 마드리드의 압박 속에 공은 다시 골키퍼까지 연결되었고 골키퍼는 롱킥으로 공을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낙하지점에는 니실랴와 교체되어 들어온 사라비아가 자리 잡고 있었고, 사라비아가 공을 소유하며 레알 마드리드는 다시 공세를 이어갔다.
사라비아가 왼쪽으로 열린 공간을 열어주자 모라타가 코너까지 뛰어 공을 살렸고, 달려드는 수비를 피해 한 번 접으니 크로스를 올릴 공간은 나왔지만 패널티 지역에서 대기하고 있는 레알의 선수들이 없었기에 다시 공을 실레에게 공을 돌렸다.
실레가 공을 받고 봤을 때는 이미 파리 생제르맹의 수비가 다 자리를 잡은 후였기에 앞으로 나온 사라비아에게 공을 돌렸고, 사라비아는 다시 수비에게 공을 연결하며 공세의 호흡을 조절했다.
아직도 3골이나 더 넣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이미 자리를 잡은 상대로 무리한 공격을 펼치다가는 역습을 당할 수도 있었기에 현명한 판단이었다.
공을 뒤로 돌리는데도 파리 생제르맹의 선수들은 올라오지 않고 자리만 지켰다.
3골만 먹지 않는다면 8강 진출 확정이었다.
3골을 먹힌다고 하더라도 연장이었고 연장이 끝나면 승부차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승부차기라고 하지만 파리 생제르맹의 수호신은 최고의 골키퍼 중 하나인 다그바였기에 불리할 것 없는 승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파리 생제르맹이 더 이상 올라오지 않자 레알 마드리드의 마음이 급해졌고 무리한 공격으로 이어질 수 있었지만, 인수는 자신에게 온 공을 철저히 키핑하며 차분하라는 손짓을 보냈다.
손짓은 차분히 하라는 뜻이었지만 인수의 발은 공을 굴리며 쉴 새 없이 파리 생제르맹의 빈틈을 찾고 있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교체해서 들어온 실레까지 밀착수비가 붙어있는 상황.
공을 뒤로 돌려야 하나 싶을 때 교체해서 들어와 아직 체력이 쌩쌩한 사라비아가 움직였다.
밀착수비를 하느라 비어있는 공간이 생길 수밖에 없었고, 유유히 들어온 사라비아에게 재빨리 공을 돌리자 공을 받은 사라비아는 패널티 지역까지 공을 몰고 들어갔다.
수비형 미드필드로 들어온 사라비아가 패널티 지역까지 침투할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던 수비들은 급하게 움직였고 인수와 실레에게 가해지는 압박이 느슨해졌다.
인수는 마리오를 제치고 중앙으로 돌파했고 인수가 달리는 것을 본 사라비아는 가만히 공을 밀어 인수에게 연결했다.
사라비아가 준 공에 터치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방향을 전환한 인수에게 골문까지의 길이 열렸고 패널티 지역 안에서 슛했다.
이미 패널티 지역 안이었기에 반칙을 할 수도 없었던 수비들 사이로 공이 사라졌고 순간 공의 방향을 잃은 다그바는 움직일 수도 없이 골을 허용하고 말았다.
이제 남은 골은 2골이었고 남은 시간은 추가시간을 생각한다고 해도 12분 정도였다.
인수는 허탈한 표정을 짓는 파리 생제르망 선수들을 피해 공을 들고 다시 센터서클을 향해 뛰었다.
12분에 2골이란 숫자가 압박으로 다가섰지만 레알 마드리드의 선수들은 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인수가 있었다.
다시 시작된 경기.
파리 생제르맹은 철저하게 공을 돌렸고 시간을 끌기 위한 작전으로 돌입했다.
아직 3장의 교체 카드도 남아 있었기에 파리 생제르맹의 감독은 공이 사이드로 나가면 선수들을 준비시키며 시간을 끌었다.
주심이 사이드로 나가는 선수들을 재촉했지만 선수들은 시간을 끌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옐로카드를 받지 않을 정도로만 움직였다.
다시 시작된 레알 마드리드의 공격에서 코프의 패스를 받은 모라타가 한 골을 추가했지만 더 이상 골을 넣지 못하고 4:1로 경기가 마무리됐다.
두 경기 합산 스코어는 6:5.
한 골 차이로 파리 생제르맹은 8강으로 올랐고, 레알 마드리드는 실로 오랜만에 16강에서 챔피언스 무대에서 내려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