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레알 마드리드와 맞서는 세비야는 자신들이 낼 수 있는 최상의 수를 들고 나왔다.
그간 부상으로 3주간 나오지 못했던 에이스 빌리야타가 선발로 복귀했고 겨울 이적시장에서 데려온 독일의 신성 필리프 크로스도 선발로 출장했다.
레알 마드리드 역시 인수를 선발 라인업에 올렸고 나머지 선수들도 컨디션이 가장 좋은 선수들로 선발한 상태였다.
“하인스, 나한테 처음으로 어시스트 하기로 한 약속 잊지 마.”
레알 마드리드의 최전방 공격수이자 우크라니아 특급 골잡이라 불리는 코프였다.
5년 전 레알 마드리드로 와 두 번째 재계약을 하고 있었지만 그 동안 시우바와 안수 파티에게 밀려 득점왕을 한 차례도 하지 못했다.
안수 파티와 시우바가 이적한 지금 라리가의 득점왕을 노리고 있었지만 호랑이 없는 산에 여우가 왕 노릇을 한다고 모라타와 골을 나누어 넣고 있었다.
벌써 21라운드 경기였지만 13골에 불과한 골잡이. 골잡이는 골로 말해야 하지만 골을 넣은 수보다 어시스트가 15개로 어시스트 개수가 더 많았다.
골을 넣고 싶었던 코프는 인수가 왔을 때 환영하는 SNS를 남기기도 했지만 선수단을 이끄는 모라타와 각을 세워가면서까지 반길 수는 없었다.
더욱이 개인 훈련 때문에 프리시즌도 없이 시즌 시작 전 합류한 데다 첫 연습경기에서 주장인 모라타를 시험하는 듯한 패스를 했다.
그렇지 않아도 클럽의 특별대우에 짜증이 났던 모리타는 선수들에게 인수의 플레이를 받아주지 말라고 지시했다.
고작 플레이어 하나의 지시라기에는 레알 마드리드에서 가지는 모리타의 지분이 컸기에 선수들은 인수의 플레이에 소극적이었고 결국 경기에 출장하지 못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그 아이는 어떤 멘탈을 가졌는지 끝까지 1군에 남아 연습을 했고 자신의 플레이를 증명했다.
선수들의 견제를 이겨내고 증명한 이상 모리타도 인수를 팀원으로 받아들였고 다시 한 달이 지날 무렵 모리타는 인수가 원하는 플레이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 인수의 의도대로 플레이했던 모리타가 그날 저녁에 했던 말을 잊지 못했다.
“무서운 놈이야. 밟든지 따르든지. 둘 중 하나만 하라는 플레이를 하네. 근데 실력이 있으니까 따라야지.”
그날 이후 모리타는 인수의 의도를 읽는 데 집중했고 인수가 원하는 플레이를 함과 동시에 고집스럽게 드리블 돌파를 하던 플레이가 바뀌어 갔다.
코프 역시 인수가 찔러주는 스루패스와 킬러 패스들을 받으며 경기 당 한 골을 넣을 수 있을 거 같다는 느낌이 들었고 인수를 만날 때마다 첫 어시스트는 자신에게 달라는 의지를 표현했다.
코프가 끈질겨서인지 아니면 스트라이커에 대한 존중인지 모르겠지만 알겠다는 대답을 받았고 오늘 그걸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절대 공에서 눈을 떼지 마요. 어떤 형태로든 패스가 갈 테니까.”
레알 마드리드의 선공을 시작되는 경기.
센터서클에 코프와 함께 서 있던 인수는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주심의 휘슬로 레알 마드리드의 선축으로 전반이 시작됐다.
레알 마드리드는 초반 후방에서 전방으로 다시 후방으로 공을 돌리며 경기의 속도를 조절했다.
프리미어리그와 라리가 세계 4대 리그라고 같이 묶여 있긴 하지만 양 리그의 차이점은 분명했다.
피지컬과 스피드로 대표되는 프리미어리그와 개인기와 패스로 대표되는 라리가.
더 깊이 들어가면 클럽마다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다른 말로는 우직함과 화려함으로 대표되는 양 리그였다.
그런 차이점이 있기에 프리미어리그에서 성공을 하고 라리가로 이적한 선수들 중에 실패한 사례도 적지 않았다.
반대로 라리가에서 성공하고도 프리미어리그에서 성공하지 못한 선수도 나왔기에 인수의 플레이 하나하나가 분석대상이 됐다.
반대로 인수도 라리가에 대한 분석을 계속했다.
그 결론은 자신이 플레이하기에 편하기도 하면서 불편한 점도 있었다.
화려한 개인기와 패스를 바탕으로 플레이하기에 빈 공간이 많았고 그 공간 활용은 자신의 장기 중의 하나였다.
반대로 압박이 약하다는 것은 상대가 압박하는 힘을 이용해 돌파하는 자신의 장점이 약해질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 세비야의 수비였던지라 돌파는 약해지더라도 키패스는 더욱 빛이 났다.
양쪽 윙어를 모두 사용하면서 운동장을 폭넓게 가져가자 세비야의 수비도 그에 맞추어 많이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수비의 간격이 벌어지자 자연스럽게 중앙이 빌 수밖에 없었고 그 약점을 레알 마드리드의 선수들은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넓어진 중앙에서 중거리슛이 나오기 시작하자 미드필더진이 페널티 지역까지 내려와서 수비를 도와줬고 자연스럽게 전반 내내 세비야의 진영에서 공방이 이어졌다.
경기 시작 전만 하더라도 양 팀이 팽팽한 경기를 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득점은 나지 않았지만 레알 마드리드가 일방적으로 공세를 펼친 전반이 되고 말았다.
***
“숨 가쁘게 진행됐던 전반이 끝났습니다. 0:0의 스코어지만 전반은 레알 마드리드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경기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셨는지요?”
“리그 1위와 2위의 맞대결이고 전반기에 2:2로 팽팽한 경기를 했던 양 팀이다 보니 이번 21라운드도 팽팽한 경기가 될 것이라 예상하는 사람이 많았죠.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전반전에는 레알 마드리드의 일방적인 경기였습니다. 우선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경기장을 넓게 썼던 레알 마드리드의 공격진의 움직임이 맞아떨어졌습니다. 20라운드까지 레알 마드리드의 양쪽 윙어는 윙어라기보다 중앙공격수라고 해야 옳지 않나 할 정도로 공격시 중앙으로 치고 들어오는 모습을 보여줬거든요. 그리고 크로스를 올리는 것은 양쪽 윙백들이 올라와서 올렸습니다. 특히 이번 시즌 레알에서 가장 많은 골을 터트린 선수가 모라타인 것을 보면 어떤 움직임이었는지 잘 알 수 있죠. 그런데 오늘 경기에서는 양쪽 윙어 모두 사이드 깊숙이 파고드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윙백들이 올라와 윙어의 뒤에서 공을 받아줘도 중앙으로 침투하는 모습보다는 사이드에서 수비를 끌고 다니는 모습을 많이 보여줬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중앙의 수비가 얇아지고 중거리 슈팅이 나오기 시작하자 자연스럽게 미드필더진과 공격진들이 주저앉는 도미노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레알이 필드를 넓게 사용했는데 그 중심은 하인스 선수가 있었죠?”
“그렇습니다. 처음 압박 수비를 하지 않았던 세비야의 수비수들이 윙어들이 공을 가지고 있지 않았음에도 압박하는 수비를 펼쳤거든요. 그런데도 하인스의 패스는 윙어들이 잡기 편한 곳으로 정확히 떨어졌어요. 그리고 반대로 윙어들이 크로스를 올리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뒤로 돌릴 때도 하인스가 정확히 공을 키핑했죠. 하인스 선수가 프리미어리그에서나 월드컵에서 많은 골을 기록했지만 그보다 먼저 자신의 진가를 보여준 플레이가 패스와 키핑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경기에서 그 모습을 확실히 각인시켰다고 봐야죠.”
“그런데도 레알은 골을 기록하지 못했습니다. 그건 어떻게 보십니까?”
“세비야가 몸을 던져가며 수비를 한 덕이라고 봐야겠죠. 골이라고 생각됐던 슛들이 몇 개나 나왔지만 그때마다 골키퍼를 비롯한 세비야의 선수들이 몸을 던져 막았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하인스의 킬패스를 받은 코프가 하프발리슛을 했는데 세비야의 선수들이 몸을 던져 골라인아웃을 만들어냈죠. 그런 헌신들이 없었더라면 아마 몇 골은 나오고도 남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럼 세비야의 입장에서 이야기해보죠. 세비야는 후반전에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요?”
“하인스에 대한 철저한 마크가 필요할 겁니다. 오늘 경기에서 공이 있을 때보다 없을 때 더 무서운 모습을 보인 하인스거든요. 오프 더 볼에서의 움직임이 레알 선수들에게 하인스에게 공을 돌리기 편하게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세비야에서 레알 선수들의 체력을 많이 소비하게 만들었냐고 물으면 그것도 아니라고 대답하겠습니다. 공이 거의 세비야 진영에서 돌아 두 번의 역습을 제외하고는 움직임이 거의 없었거든요. 세비야에서는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죠. 자신들의 체력은 소모됐는데 레알 선수들의 체력은 소모시키지 못했고, 하인스를 막기 위해 수비 움직임이 좋은 선수가 필요한데 그렇게 되면 공격이 약해질 수밖에 없고요. 어떤 답을 내놓을지는 후반을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해설위원님 말처럼 세비야는 어떤 해답을 가지고 나올까요? 저희는 잠시 쉬었다 세비야와 레알 마드리드의 리그 21라운드 경기 후반전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캐스터는 해설자의 긴 전반전 평가를 듣고 나서야 겨우 헤드셋을 벗었다.
아무래도 방송 중에는 중립적으로 해설해야 했고 속마음을 전부 이야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헤드셋을 벗고서야 본심을 털어놓는 경우가 많았다.
“하인스 어때요? 기존에 있던 선수들과 기 싸움을 했다는 소리가 많던데.”
잉글랜드 블로거의 글을 본 사람들은 모두 하인스가 기존 레알의 주전들과 기 싸움을 벌였다는 소리가 많았다.
시간이 지나고 경기가 시작되기 전까지 그 말이 정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모라타가 만만한 선수가 아니잖아. 스페인 최고의 싸움닭이 그냥 고개를 숙였다고? 분명히 기 싸움이 있었을 텐데 오늘 움직임만 봐서는 하인스의 의도대로 움직여주고 있잖아. 솔직히 잘 모르겠어. 오늘 움직임만 봐서는 하인스에게 완전히 제압당한 모습이었는데.”
스페인 최고의 클럽 중 하나인 레알 마드리드.
그 명성만큼이나 유스 시스템도 잘 갖춰진 클럽이었지만 유스를 올려 적응시키며 키우기보다 다른 클럽에서 우수한 선수를 사 오며 유스는 타 클럽에 팔아버리는 것으로 유명한 클럽이었다.
그런데 그런 클럽 유스로 커서 데뷔하자마자 1군에서 뛰었던 선수가 모라타였다.
실력도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려는 그 성격 자체가 특징이었던 선수답게 레알뿐만 아니라 대표팀에서도 가장 많은 옐로카드를 적립한 선수로도 유명했다.
쉽게 말하면 성격이 아주 더러웠다.
그런 모라타였기에 처음 시우바와도 사이가 좋지 못했고 압도적인 실력으로 밀린 후에야 상대의 실력을 인정하긴 했지만 선수단을 휘어잡고 있는 것은 모라타였다.
레알의 분위기를 알고 있던 전문가들은 카리스마가 있는 감독이 와서 모라타를 제어해야 한다는 말도 많았지만 레알의 수뇌부에서는 부드러운 성품인 샨투 감독을 3년째 맡기고 있었다.
샨투 감독 부임 첫 번째 해에 리그 우승과 챔피언스 우승을 하며 더블을 하긴 했지만 그 후 리그 우승도 없었고 챔피언스도 4강에 오른 것이 전부였기에 말들이 많은 상황이었다.
“중앙이 비어서 모라타가 중앙으로 움직일 줄 알았는데 끝까지 자기 자리를 지키더라고요. 그런 모습 거의 처음 본 것 같은데.”
“나도 모라타 경기 많이 중계해봤지만 저렇게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은 처음 본 것 같아. 골 욕심도 많아서 프리킥은 물론이고 페널티킥까지 독점했었는데.”
“와,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요? 화장실도 못 갔는데 선수들이 입장하고 있네요.”
“아 빨리 다녀오면 안 될까? 터질 거 같은데.”
“저도요.”
두 사람은 빨리 다녀오라는 제작진의 대답에 사타구니를 잡고 화장실로 뛰기 시작했다.
***
세비야도 하프타임 동안 연구를 많이 했는지 미드필더진에 변화를 주어 인수를 전담마크하게 했다.
세비야의 전술이 바뀌자 인수와 레알도 유기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경기는 복잡하게 흘러갔다.
인수는 왼쪽 윙어를 맡고 있던 모라타와 오른쪽 윙을 맡는 파라데스와 계속 포지션을 체인지하며 세비야의 수비진을 괴롭혔고, 후반 10분이 지날 무렵 세비야의 수비수가 겹치며 인수에게 공간이 생겼다.
인수에게 공간이 생긴 것을 안 중앙수비수가 몸을 날려 슈팅 코스를 막아봤지만 인수는 자신이 슈팅하기보다 페널티 지역 안으로 공을 밀었고 그 종착지에는 이미 대기하고 있던 코프가 있었다.
세비야의 골키퍼가 코프가 빈 것을 보고 재빨리 뛰어나와 슈팅 각도를 좁혔지만 코프가 골키퍼 다리 사이를 보고 공을 찼고 이 경기의 첫 번째 득점이 터졌다.
제대로 대처하지도 못하고 있을 때 첫 번째 골이 터지고 5분 후 인수와 자리를 바꾼 모리타가 중앙을 파고들어갔고, 인수의 크로스를 헤더로 연결해 추가점을 기록했다.
연속해 터진 둑은 더 이상 레알의 힘을 막을 수 없었고, 후반전 종료 휘슬이 울릴 때는 5:0이란 스코어가 만들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