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2039년 1월 영국보다 한참 아래인 마드리드였지만 전반적인 날씨는 소튼과 비슷했다.
예전에 폭설이 내려 도시가 마비된 적도 있었다고 하지만 10년 가까이 눈이 오지 않았다고 하니 소튼과 전반적으로 비슷했다.
그런 날씨와 상관없이 언론의 주목을 받고 이적한 인수는 마드리드 생활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프리시즌에 처음 만난 동료들.
소튼에서는 유스 시절부터 같이 봐왔던 동료들이 많았지만 이곳에서는 안면이 있는 선수가 거의 없었다.
월드컵 때 적으로 만났던 선수가 있었지만 얼굴을 딱 한 번 보고서는 다른 클럽으로 이적해서 떠나버렸다.
모든 것이 낯설었고 새로웠다.
처음 이적했을 때 생활을 도와준다며 오셨던 부모님이 인수가 적응을 힘들어하자 지금까지 곁에서 지켜주고 계셨지만 클럽에 적응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더욱이 인수가 힘들어하자 레이까지 시즌 중임에도 불구하고 자주 스페인까지 찾아와 인수를 달래주고 돌아갔다.
물론 언론에서는 축구도 못 하면서 여자친구까지 불러 놀고 있다는 식으로 비아냥거렸지만 스페인어를 모르는 인수는 그 모든 것을 무시하고 컨디션을 되찾는 데 주력했다.
메디컬 체크 결과는 물론이고 운동능력이나 패스, 슛, 페인팅, 드리블까지 문제 없었지만 경기에 나서면 실수를 연발했다.
컵대회와 챔스 경기까지 총 12경기에 나서 6골을 넣으면서 슛 감각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레알 마드리드에서는 시우바를 떠나보내고 영입한 인수가 그 자리를 채워주면서 득점뿐만 아니라 공격 쪽 전부를 조율하길 원했다.
그러나 프리시즌과 8월 정규시즌에 돌입해서도 인수의 패스플레이나 창조적인 플레이가 선수들 간의 호흡이 맞지 않으며 팀이 유기적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적에 따른 적응 문제라 생각한 레알 마드리드는 비교적 부담이 적은 컵대회들과 이미 상위라운드 진출을 확정한 챔스에 인수를 출전시켰지만 아직 정상적인 컨디션을 찾지 못하는 중이었다.
더욱이 18살에게 천문학적인 이적금을 안겨준 레알 마드리드의 수뇌부를 욕하는 언론까지 등장하니 부담을 느낀 레알 마드리드는 인수를 경기에서 제외시키시 시작했다.
이런 인수의 상황은 레알 마드리드뿐만 아니라 산체스 감독이 이끄는 잉글랜드 대표팀까지 영향을 미쳤다.
당장 유로 지역예선이 코앞이었다.
인수를 중심으로 팀 재편을 꾀하던 산체스 감독도 인수가 경기에 출전조차 하지 못하고 있으니 대표팀에 선발하자고 할 명분이 부족했다.
이런 사정들을 랭커리지가 중간에서 듣고 있었지만 인수에게 말을 전해봐야 부담만 가는 줄 뻔히 알았기에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만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인수가 능력이 없었으면 몰랐을까.
세기에 나올까 말까 한 재능을 가진 선수였다. 아니, 자신이 본 어떤 선수보다 재능이 출중한 선수였다.
그렇기에 여자프로축구 선수의 에이전트를 부탁했을 때도 돈이 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들어줬었다.
물론 그런 선수들이 수도 없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알았지만 월드컵이란 큰 대회에서 보인 능력만으로도 충분히 그렇게 생각될 자격이 있었다.
그러나 당장은 슬럼프를 끝내고 부활이 먼저였다.
그러기 위해 에이전트인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클럽과 대표팀에서의 압박을 선수가 직접 받게 해서는 안 되는 것뿐이었다.
“대형 클럽으로의 이적이 너무 빨랐나?”
“뭐가요?”
랭커리지의 속마음이 밖으로 나왔는지 비서가 바로 반응했다.
랭커리지는 비서의 두 눈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분명 능력이 있는 여자였지만 입이 너무 가벼웠다. 자신이 한숨을 쉰 이야기도 블로그에 실릴지 몰랐다.
“정말 그 블로그 주인이 누군지 모르는 겁니까?”
“모른다니까요. 도대체 누군지 알면 내가 먼저 반 죽여 놓을 거라니까요. 분명히 이 이야기들을 다른 곳에 한 적도 없는데 내가 한 말처럼 다 적어놓잖아요.”
비서는 정말 화가 난다는 듯 씩씩거리며 대답했다.
정말 꼭 숨겨야 할 이야기는 없는 블로그. 그러면서도 은근슬쩍 가려운 곳도 긁어주는 블로그였기에 랭커리지도 그 주인을 찾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알았어요. 오늘 오후에 특별한 일 없죠? 그럼 난 스페인으로 넘어갑니다. 급한 일 있으면 연락 주시구요.”
랭커리지가 바쁘게 자신의 방을 나서자 비서는 어질러진 서류들을 정리했다.
***
인수의 부진은 영국과 스페인의 자칭 전문가들에 의해서 다루기 딱 좋은 소재였다.
- 큰 금액을 받고 이적한 만큼 부담감을 이기지 못했다.
- 월드컵에서의 활약과 지난 시즌의 활약은 플루크였을 뿐 검증되지 않은 선수를 영입한 결과이다.
- 지난 시즌 처음으로 풀타임을 뛰고 휴식기간도 없이 월드컵에 나가 체력이 회복되지 않은 탓이다.
- 영국과 스페인은 전혀 다른 문화를 가진 곳이다. 음식, 음악, 종교 모든 게 다른데 적응하는데 1시즌 이상은 걸릴 것이다.
모든 전문가나 축구를 다루는 블로그들에서 각기 나름의 분석을 내놓자 사람들의 시선은 한 블로그에 모였다.
인수가 유스일 때부터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할 때까지 정확히 분석했고 정보력도 넓은 주인이 운영하는 블로그였다.
파워블로그가 되면 TV쇼에 출연하며 초심을 잃는 블로거도 있었지만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광고도 받지 않는 블로그였다.
그렇게 한 달, 두 달이 지날 무렵 블로그에 글이 올라왔다.
***
2039년 1월 11일 하인스가 19살 생일을 맞았네. 생일 축하해. 하인스.
지난해 유스 사상 최대의 이적금을 받고 레알 마드리드로 간 후 적응에 실패하며 경기에도 출전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네.
그렇다고 하인스의 컨디션이 완전히 무너졌느냐는 근본적인 물음에는 단연코 ‘노’라고 대답할 수 있어.
최근 레알 마드리드에서 발견하지 못한 부상이 있는지를 검사했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고 발표했고 하인스의 기본 운동 능력치 검사 결과도 작년보다 오히려 좋아진 결과를 얻었지. (첨부 : 하인스 기본 운동 능력치)
그때 측정한 신장이 0.3피트나 자랐는데도 몸은 이미 그 신장에 맞추어서 만들어져 있다고 봐야 하는 결과야.
그럼 하인스가 가장 어려워하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하지.
많은 전문가들은 부담감을 제일 많이 이야기하던데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생각해.
월드컵에서 골든슈와 영플레이어상을 받은 선수야.
그 큰 무대에서 국가를 대표해서 출전한 선수가 받는 부담감보다 클까 생각하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
스페인으로 출발할 때 하인스가 말했지.
기대되고 설렌다고.
부담감을 가지는 선수가 말할 수 있는 인터뷰가 아니지.
물론 ‘스페인에 도착해 선수단에 합류한 다음 부담감을 느낄 수 있지 않느냐.’라고 말한다면 내가 할 말은 없지.
그냥 그 사람들은 자기가 믿고 싶은 사실을 말해주는 블로그로 찾아가.
여긴 내가 들은 것을 바탕으로 내 생각을 말하는 곳이니까.
그 다음 많이 나오는 문제가 ‘지난 시즌 처음으로 풀 시즌을 경험하고 월드컵까지 출전하여 충분한 휴식과 기초운동을 하지 못했다.’라는 말이 많은데 그것도 아니라고 생각해.
운동 능력치 검사가 그걸 말해주고 있고 지난해 하인스를 도와준 운동 코치가 브링이야.
-브링 : 일반인은 모르겠지만 운동선수들이나 클럽에서 가장 영입하고 싶어 하는 체력훈련 코치이고 비시즌 때마다 미국과 유럽을 돌아다니며 선수들의 컨디션을 관리해주는 코치야.
브링이 하인스와 에디(에드워드 브라운의 애칭) 모두 완전히 회복했다라고 말했을 만큼 완벽한 몸 상태에서 출국했지.
레알 마드리드에서 하인스를 영입하고도 소집을 늦춰준 것이 바로 브링 때문이라면 믿음이 가겠지?
그리고 에디가 지금 소튼에서 보여주는 활약을 보면 브링의 회복훈련은 완벽했다고 생각해.
-에디 : 19경기 선발출장 1경기 교체출장 15골 13어시스트 (팀 내 득점 순위 공동 2위, 어시스트 순위 1위)
그다음 전 시즌과 월드컵의 활약이 플루크가 아니냐는 말은 무시할게. 대꾸할 가치가 없어.
뭐 스페인 문화에 대한 적응이라면 좀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지금 하인스는 마드리드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적응이라 말할 것도 없다는 말을 했지.
스페인어도 의사소통은 할 수 있을 만큼 늘었고 듣기만은 완벽하다고 말했으니까. (기사자료 첨부)
그럼 나에게 ‘하인스가 무엇이 문제냐.’라고 묻는데 난 문제 없다고 생각해.
소튼에서 뛰었던 하인스는 팀 동료가 거의 모두 소튼 유스 출신이었고 에이스로 성장해서 에이스 역할을 수행했던 선수지.
잉글랜드 대표팀도 산체스 감독이 밝혔듯 하인스가 에이스였어.
팀이 하인스 중심으로 돌아갔지.
물론 대표팀에 벨링엄이라는 스타가 있었지만 결국 필드의 분위기나 라커룸의 분위기를 주도한 것은 하인스였다는 것을 산체스 감독이 여러 번 강조했던 바가 있어.
그런 선수가 레알 마드리드라는 클럽으로 이적을 했어.
3살짜리 아이한테 물어도 알만한 클럽이고 전 세계를 통틀어도 한 손 안에 드는 클럽이지.
그런 클럽에 있는 선수들의 면면을 봐.
스페인의 에이스 모라타, 사라비아, 사발은 물론이고 미국 대표팀의 에이스 테일러 웨아, 우크라이나 특급 골잡이 코프 등 하인스보다 이름값이나 몸값이 높은 선수들이 즐비하지.
하인스의 장점은 선수단의 분위기를 이끌면서 주도적으로 플레이할 때 나타나. (영상자료 첨부)
그런데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해서 리그 경기에서 보여준 모습은 다른 선수들에게 맞춰주면서 능동적인 플레이가 나오지 않았어. (영상자료 첨부)
반대로 컵대회나 16강 진출이 확정된 챔스 경기에서는 주전 선수들이 빠지고 로테이션 멤버가 나오니 그 플레이가 살아났지. (영상자료 첨부)
첨부한 영상들을 보면 확연히 보이지.
결국 선수단의 주도권 싸움 중이라고 생각해.
하인스의 플레이를 인정하고 선수단이 그 플레이를 받아주느냐 아니면 하인스가 그 선수들을 실력으로 자신의 밑으로 깔고 자신의 팀으로 만드느냐의 문제만 남은 거야.
그리고 그 결과는 곧 나올 거야.
내 포스팅이 늦어진 이유야.
그럼 또 다른 이슈로 찾아올 때까지 축구 잘 즐겨.
***
1월 어느 날 밤에 한 블로그에 갑자기 포스팅 된 글은 순식간에 화제의 중심으로 올라섰다.
그동안 다른 선수들에 대한 포스팅은 계속 됐었음에도 불구하고 침묵을 지키고 있던 인수에 대한 포스팅이었고, 평소 주말에 올리던 포스팅이 평일 밤에 올라왔다.
그동안 자체 엠바고를 한 것인지 공개되지 않았던 기본 운동 능력치 변화도 상세하게 첨부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레알 마드리드에서 이번 주말 리그 21라운드 세비야와의 경기에 인수가 선발 출전한다고 발표한 이후였다.
리그 우승을 두고 레알 마드리드, 세비야, 발렌시아, AT마드리드가 치열하게 승점 경쟁을 하는 중에 중요한 경기인 세비야와의 경기에 선발로 나선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하나는 인수가 레알 마드리드에 완전히 적응하여 전력상승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을 경우가 있었다.
다른 하나는 욕만 먹고 있는 상황에서 인수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면서 이번 시즌 후나 빠르면 지금 열려있는 겨울 이적시장에서 상품으로 내놓을 수도 있다는 분석도 있었다.
그런 분석들에 대해 레알 마드리드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차에 영국의 블로그에 관련 글이 포스팅되었으니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었다.
레알 마드리드와 세비야의 21라운드는 1, 2위 대결뿐 아니라 인수의 부활에 대한 관심으로 집중도가 높아져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