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잉글랜드 대표팀의 4강 진출은 아직 삼사자가 늙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줬으나, 결국 결승 진출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8강에서 연장까지 풀타임으로 뛴 인수와 에디는 물론이고 주전 선수들까지 모두 체력이 소진된 상황에서 끝까지 분전했지만 홈팀인 아르헨티나를 이길 수 없었다.
전반전을 통째로 쉬고 출전한 인수와 에디가 각각 한 골을 기록하긴 했지만 전반에 3실점, 후반에 2실점을 더하여 5:3의 패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다시 휴식을 취하고 프랑스와의 라이벌전을 치르기 위해 이동해야 했다.
스페인을 어렵게 꺾은 프랑스는 결승전에 진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브라질에게 아쉽게 졌고 3, 4위전에서 잉글랜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승전이 치러지기 하루 전에 열린 3, 4위전은 결승전보다 화제가 될 수 없어야 했지만 잉글랜드와 프랑스 두 팀의 라이벌전 열렸기에 화제의 중심에 섰다.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라이벌전,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라이벌전. 이번 월드컵은 끝까지 라이벌전이 열리는 대회가 됐다.
두 라이벌전 모두 지역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대칭점에 섰던 국가들이었고 그만큼 축구도 치열한 승부가 예측됐지만 소문난 잔칫집에 먹을 게 없다는 말이 있듯 치열한 경기가 되지는 못했다.
양 팀 모두 조별예선과 토너먼트에서 보여줬던 경기력을 뽐내지 못하고 잉글랜드의 2:0 승리로 3, 4위전이 마무리됐고,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결승전도 아르헨티나가 3번째 월드컵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6월을 뜨겁게 달궜던 월드컵이 끝나자 이제 선수들의 이적시장으로 자연스럽게 눈이 돌아갔다.
월드컵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여준 선수들이 차례로 유럽리그로 진출하는 한편, 기존 월척이라 부르는 선수들도 하나씩 이적 오피셜이 나오기 시작했다.
선수들의 이적은 도미노처럼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 신호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터졌다.
- 레알 마드리드의 에이스이자 심장인 아드리아누 시우바 전격 이적
- 아드리아누 시우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
- 프리미어리그를 떠나 6년간 레알 마드리드의 에이스였던 시우바 맨유로 프리미어리그 복귀
2038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실버슈를 차지한 것을 비롯하여 2035, 36년 발롱도르 연속 수상자이자 2035년 프리메라리가 최우수 선수를 차지한 슈퍼스타였다.
이제 34살의 나이로 노화가 시작됐다는 평도 있었지만 월드컵에서 절정의 기량을 선보이며 아직까지 안수 파티와 함께 최고의 축구 선수라는 타이틀을 가진 선수였다.
그런 시우바가 맨유로 이적한다는 것은 지난 이적 시즌에 안수 파티가 바르셀로나를 떠난 것과 동급처럼 취급받았다.
물론 유스부터 지난 이적시즌까지 바르셀로나 성골이었던 안수 파티와 6년 전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 시우바를 동급으로 비교하는 것이 무리이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맨유가 시우바에게 쓴 이적금이 1억 유로라는 것과 5년 계약에 주급 50만 파운드 수준으로 알려지면서 시우바가 자신의 축구 마지막을 맨유에서 보낼 것이라는 추측이 함께 보도가 됐다.
시우바의 이적은 자연스럽게 도미노가 되어 각 클럽의 주전 선수들의 이적이 가시화됐다.
특히 맨유는 시우바와 함께 세르비아 출신 윙어 타디치, 콩고 출신인 파시카까지 영입하며 기존 선수들을 노리치와 크리스탈 펠리스 등으로 이적시켰다.
에이스를 이적시킨 레알 마드리드의 이번 행보는 월드컵 골든슈 주인공이자 영플레이어상을 탄 인수를 영입을 노린 것이라는 기사들이 쏟아졌다.
지난 시즌 안수 파티의 후계자를 찾지 못한 바르셀로나와 지난 시즌 바르셀로나의 부진을 틈타 라리가 우승을 한 발렌시아도 인수에게 관심이 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라리가의 이런 행보들은 랭커리지를 강하게 압박했다.
여러 팀이 한 명의 선수를 원하는 상황에서 이적이 늦어진다면 그 팀의 선수단 구성을 망칠 수도 있었고 그로 인한 원망은 고스란히 선수에게 부담이 갈 수밖에 없었다.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도 인수와 에디는 작년 여름 훈련을 받았던 캠프에 합류한 상태였다.
***
“왜 이제 와.”
인수와 에디가 월드컵 참가로 캠프참여가 늦었던 반면, 레이는 이미 캠프에 들어와 있었다.
지난여름에는 눈물을 머금고 억지로 참여했다면 이번에는 자청해서 캠프에 들어온 레이였다.
훈련의 결과는 지난 시즌 성적이 증명했다.
체력적으로 좋아진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고 FA 여자 슈퍼리그에서 득점 2위, 영플레이어에 최우수 선수 후보까지 오르는 등 엄청난 활약을 한 레이였다.
물론 발밑기술이 좋아진 것도 드리블이 좋아진 것도 아니었지만 위치선정이나 순간스피드는 눈에 띄게 발전했고 로테이션 멤버에서 주전 선수로 올라가기까지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그런 효과를 온몸으로 느낀 레이였기에 시즌이 끝나자마자 랭커리지의 도움을 받아 자비로 캠프까지 열었다.
그런 캠프에 월드컵이 끝나자마자 인수와 에디가 합류한 것이다.
“우리가 놀았어? 어? 월드컵 가서 3위까지 하고 왔단 말이야.”
“누가 뭐래? 겨우 3골밖에 못 넣어 놓고서는. 우리 하인스 봐. 당당히 골든슈까지 타왔잖아. 영플레이어상은 덤이고.”
“하인스만 아니었어도 영플레이어상은 내 거였어. 아아악.”
레이는 머리를 붙잡으며 소리치는 에디를 보고 내가 이겼다는 듯 웃음을 짓다 에디를 꽉 껴안아 주었다.
“그래도 고생했어.”
“그래, 너도 혼자 고생했어.”
어린시절부터 시작된 갑을관계는 성인이 된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이어졌다.
“하인스, 고생했어. 얼굴 홀쭉해진 것 봐. 밥은 잘 먹고 다닌 거야? 시즌 다 치르고 월드컵까지 다녀오느라 힘들었지?”
어느새 에디에게서 떨어졌는지 레이는 인수의 몸 이곳저곳을 살피며 걱정했다.
“와, 저렇게 변해도 되는 거야?”
에디가 뒤에서 투덜댔지만 레이에게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괜찮아. 넌 힘들지 않았어?”
“주는 대로 먹고 하란 대로 하고 그랬지. 그리고 월드컵도 보고.”
“잘하고 있었나 보네. 이제 같이 하면 되겠다.”
“자자. 연애질은 그만하고 모여.”
세 사람의 만남을 한참 기다려주던 브링을 비롯한 코치진은 세 사람을 모았다.
“시즌 끝나고 바로 월드컵까지 뛰고 와서 피곤한 줄은 알지만 피로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도 중요한 훈련이야. 여기 일과표 있으니까 이대로 하면 돼.”
“이게 회복 훈련이라고요?”
“아니, 20분 간격으로 몸을 움직이게 되어 있는데요? 음식은 왜 또 이래.”
“이 정도면 양호하네.”
인수와 에디가 받은 시간표를 슬쩍 훔쳐본 레이가 중얼거렸다.
“양호하다고. 어디가? 나 집에서 쉬면 안 될까?”
“응. 안 돼.”
“너희도 이제 성인이니 성인답게 행동하면 안 될까? 이번 캠프는 너희 돈으로 하는 것이니 자각도 좀 하고.”
아직도 애들처럼 행동하는 세 사람을 지켜보던 벨로이치는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티격태격하는 아이들을 중재하고 나섰다.
“자자 다들 옷 정리하고 훈련 시작하자. 프리시즌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얼마나 효율적으로 몸을 만드느냐가 중요하니까.”
코치 네 사람이 자리를 뜨자 레이는 에디 쪽으로 다가섰다.
“너 진짜 이번 시즌에 이적 안 하고 세인트에 남아?”
월드컵이 끝나고 영국으로 돌아온 에디는 랭커리지에게 이적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사전에 인수와 레이는 물론이고 주변과도 전화로 상의했기에 직접 만나자 물어보고 싶었지만 코치들이 있어 입을 다물고 있었던 레이였다.
“응. 이적해서 잘 적응할 자신이 아직 없어서.”
영국 스포츠 언론은 물론이고 유럽 각국의 스포츠지도 월드컵 이후 몸값이 올라간 선수들과 이적이 예상되는 선수들의 명단을 뽑을 때, 인수와 함께 거론되는 선수가 에디였다.
그런데 에디가 이적하지 않기로 함에 따라 이번 주 내로 랭커리지가 소튼 보드진과 에디의 재계약을 추진하기로 한 상태였다.
“적응이고 말고가 어디 있어. 뭐 네 선택이니 네가 알아서 할 일이고. 하인스 넌 확정된 거야?”
“응. 마드리드와 협상하기로 했어.”
“결국은 레알 마드리드네. 하인스 네가 멀어지다니 슬퍼.”
레이는 말은 슬프다고 했지만 얼굴은 슬픈 표정이 아니었다.
여자프로축구 선수로서 레딩에서 뛰고 있긴 하지만 연봉은 겨우 4만 파운드에 불과했다.
그것도 새로 연봉계약을 하며 팀에서 다섯 손가락에 드는 연봉이었고 최상급 여자 선수라고 해봐야 30만 파운드가 넘지 않았다.
이번 캠프도 인수와 에디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레이가 버는 연봉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레이가 축구 이외에도 스페인어와 독일어,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것도 여자축구 선수로서의 한계를 몸으로 느끼고 있어서이기도 했다.
“자주 놀러 와. 비행기 타고 4시간이면 올 수 있잖아. 시즌이 끝나면 이렇게 같이 훈련도 하고.”
“야 너희들만 하려고 해. 나도 끼워달라고.”
“어차피 넌 소튼에 있을 거잖아. 좀 빠져있어.”
에디는 두 사람의 말에 끼어들다 레이의 말을 듣고 조용히 자신의 짐을 정리했다.
***
소튼과 재계약을 한 에디의 소식은 빠르게 오피셜로 전해졌다.
이적이 확실시된다고 했던 전문가들도 소튼과의 재계약을 두고 갑론을박이 계속됐지만 선수 본인이 선택했다는 이야기에 주전 자리가 확실한 곳에서 더 성장할 것을 기대한다는 결론을 지었다.
에디의 재계약과 함께 다시 인수의 이적이 수면 위로 올라왔지만 랭커리지의 에이전시는 아직 공식적인 입장을 내고 있지 않았다.
다만 랭커리지 비서에게 얻었다는 정보로 이적할 팀은 정해졌고 연봉과 수당 같은 세부 사항이 확정되지 않아 발표가 늦어지고 있다는 최신정보가 블로그를 통해 전해졌다.
팀이 확정됐다는 소식에 네티즌들은 빠르게 수사하여 그 팀이 레알 마드리드라는 것까지 밝혀냈다.
레알 마드리드는 이미 밝혀졌으니 랭커리지와의 협상을 빠르게 마무리 짓고 공식 오피셜로 인수의 영입을 확정 지었다.
5500만 파운드. 유로로는 6500만 유로에 가까운 엄청난 금액.
역대 유스뿐만 아니라 이번 시즌 통틀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대형 이적이었다.
혹자는 이제 18살 유스인데 그렇게 큰돈을 써도 되냐는 말이 많았지만 월드컵 골드슈의 주인공이자 프리미어리그 득점왕이란 타이틀이 그 금액을 가능케 했다.
랭커리지는 이적금 5500만 파운드 외에 주급 10만 유로와 출전수당과 득점 수당, 어시스트 수당까지 끌어냈다.
대신 바이아웃 금액을 레알 마드리드가 원하는 1억 2천만 유로에 협의하며, 레알이 인수를 이적시키면 적어도 지금 지출한 금액의 2배 가까운 이익을 낼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다.
18살 선수가 터트린 대형 계약은 스페인과 영국 언론에 크게 보도되며 인수의 인지도를 한층 높였다.
이번 이적으로 주변에서 시끄러울 때도 인수는 에디와 레이와 함께 체력 훈련에 집중하느라 다른 곳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협상은 이미 랭커리지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한 후였고 소튼보다 훨씬 경기가 많을 레알 마드리드에서 뛸 체력을 만드는 것이 먼저였다.
오피셜이 나온 이상 마드리드로 이동해 메디컬 체크를 비롯한 입단식을 가져야 했지만 모든 행사는 인수의 훈련이 끝나고 난 후로 미뤘다.
마드리드에서도 인수의 훈련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레알 마드리드의 메디컬 체크에서 문제점이 발견된다면 이미 오피셜을 띄운 상태에서 큰 망신이 될 수도 있었지만 선수를 배려한 큰 양보였다.
그렇게 훈련을 이어간 인수는 브링을 비롯한 코치들 모두 엄지를 치켜세우고서야 스페인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