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A조의 1위와 2위가 아르헨티나와 아일랜드로 결정되고 난 1시간 후 B조의 조별예선 최종전이 벌어졌다.
이미 16강 진출을 확정한 잉글랜드는 포르투갈과, 16강 진출의 경우의 수를 남겨놓은 세네갈은 사우디아라비아와 맞붙게 되었다.
잉글랜드와 포르투갈의 경기에서 잉글랜드가 승리하거나 비기면 잉글랜드가 조 1위로, 포르투갈의 경우 잉글랜드에게 지면 세네갈과 골득실을 따져야 했다. 반면 잉글랜드와 비기면 조 2위로, 이긴다면 포르투갈이 조 1위 그리고 잉글랜드가 조 2위로 통과하게 됐다.
잉글랜드 입장에서도 1위로 통과하든 2위로 통과하든 부담스런 16강이 될 것이지만, 그래도 전력상 우위를 점하고 있는 아일랜드가 차라리 나았다.
그렇다고 해도 2020년에 치러진 평가전에서 승리한 이후 계속 무승부만을 기록하고 있었기에 편한 상대만은 아니었지만.
더욱이 1위로 조별예선을 통과하면 일주일이 넘는 휴식기가 주어져 세 경기를 5일 간격으로 뛰고 있는 선수들에게 충분한 휴식을 줄 수 있었다.
그런 잉글랜드였지만 경기가 편하지만은 않았다.
한 시대를 신으로 불리며 활약했던 선수가 은퇴하고 황금유스의 시대를 맞은 포르투갈, 그들도 모두 은퇴한 후였지만 그들이 남긴 자산이 적지 않았다.
대항해시대 이후 경기가 좋았던 적이 없던 포르투갈이었기에 축구는 삶의 일부이자 전부였다.
그런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던 선수들이었기에 조 1위로 통과하고자 하는 열망도 컸다.
그런 포르투갈이었기에 처음부터 잉글랜드를 강하게 몰아붙였다.
잉글랜드의 최대의 약점이라 꼽히는 센터백의 노쇠화를 노려 포르투갈이 자랑하는 세 명의 실바가 최전방에서 공격을 주도했다.
포르투갈 최고의 골잡이라 불리는 제니아 실바가 잉글랜드의 골문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고, 안드레 실바의 후계자라 불리는 디오고 실바는 위협적인 크로스를 올렸다. 그 모든 공격을 조율하는 주앙 실바가 뛰어난 개인기를 바탕으로 좌우를 가리지 않고 찔러대는 스루패스가 잉글랜드 수비수들을 괴롭혔다.
그런 상황에서 골은 의외로 세 명의 실바가 아닌 케레치 카울의 등으로 인해 터졌다.
주앙 실바가 케이힐을 개인기로 돌파하며 중앙으로 파고든 제니아 실바에게 한 패스가 최종수비수인 카울의 등에 맞아 걸렸다.
이미 패스를 보고 골키퍼인 케인이 뛰어나온 상황이었기에 카울의 등에 맞은 공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천천히 굴러 골대로 들어갔다.
카울의 등에 맞고 방향이 바뀐 것을 본 케인과 루튼이 끝까지 쫓아가 걷어내려 했지만 두 선수는 몸의 중심을 잃었고, 공이 아주 느리게 굴렀음에도 막을 수 없었다.
전반 초반 어이없는 카울의 자책골로 1:0으로 앞서나가자 포르투갈 선수들의 사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뚫었다.
최종수비수인 네베스와 곤살로스를 제외하고 모두가 하프라인을 넘어와 이른 시간 추가골을 넣어 좀 더 유리하게 경기를 이끌어가려 했다.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는 상황에서도 단 한 번의 기회만 노리고 있던 인수는 포든이 태클로 공을 끊어내자 누구보다 빨리 달려 그대로 전방으로 강하게 찼다.
달리기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거라 믿고 있던 에디가 있었고, 에디는 인수의 기대를 저버리는 일이 없었다.
한 번에 포르투갈 진영의 중간을 넘어가는 공에 네베스와 곤살로스는 물론이고 골키퍼인 다니엘 네투까지 달려 나왔지만 한참 뒤에 있던 에디가 공을 끝까지 쫓아가 따냈다.
이미 골키퍼까지 골문을 비우고 나온 상황이었기에 에디는 침착하게 골키퍼의 키를 넘기는 로빙슛을 시도했고 공은 둥실 떠 하늘을 가르며 골문으로 향했다.
이미 에디보다 늦었다고 판단한 네베스가 공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골문으로 뛰었고 골대 근처에서 공을 걷어내는 데 성공했다.
네베스가 걷어낸 공은 사이드아웃이 됐고 공의 라인통과여 부가 골인의 기준이 되는 순간, 모든 시선은 주심에게 몰렸다.
전자기기로 바로 판독이 되는 상황이었기에 주심은 바로 잉글랜드의 스로인을 선언했다.
VAR로 다시보기를 한 결과, 공이 골라인을 완전히 넘어가기 전 네베스가 공을 걷어냈고 그 차이가 불과 1cm에 불과했다.
그 1cm로 포르투갈의 영웅이 된 네베스. 그러나 아직 경기는 전반 중반이었고 잉글랜드에게 공격권이 있었다.
“자책하지 마. 상대가 잘한 거야.”
인수는 주심의 판정에 고개를 숙인 에디에게 다가갔다.
“좀 더 세게 찼더라면.”
“그럼 골대를 벗어났겠지.”
“달려오는 골키퍼를 제치고 침착하게 골을 넣었더라면.”
“그럼 뒤에서 수비가 너를 괴롭혀서 골 찬스가 나지 않았을 수도 있어.”
“하지만 결국 안 들어갔잖아.”
“또 넣으면 되지. 안 그래?”
인수가 에디를 위로하고 있을 때 잉글랜드의 선수들이 에디의 주변에 다가와 있었다.
“그렇지. 넣으면 되지.”
“내가 넣어줄게.”
“그럼 내가 패스해줄게. 정확히 크로스 올려.”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던 잉글랜드는 에디의 슛으로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꿨다.
팀의 막내인 인수와 에디가 만들어내려고 했던 것이,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쫓아가 골까지 연결했던 것이 선수들을 자극했다.
너무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코치박스에 나가서 선수들을 다그쳐야 하나 고민했던 산체스 감독도 선수들의 눈빛이 바뀐 것을 읽고 벤치에 앉아 경기를 주시했다.
일방적으로 밀리던 경기 양상은 이제 비등한 수준까지 올라오긴 했지만 동점골은 쉽게 터지지 않았다.
반대로 일방적으로 공격하던 포르투갈도 단 한 번의 역습에 수비진을 단단히 구축했지만 여전히 노쇠한 잉글랜드 수비진을 괴롭히며 추가골을 노리고 있었다.
1:0의 팽팽한 승부에 균열을 만든 건 포르투갈의 세 명의 실바였다.
인수의 패스를 받은 바질이 개인기로 우측 라인을 뚫다 수비에 걸렸고 그 공이 한 번에 주앙 실바에게 연결됐다.
주앙 실바가 침착한 플레이로 디오고 실바에게 패스했고 좌측 라인을 완전히 뚫어낸 디오고 실바의 크로스가 잉글랜드 문전으로 올라갔다. 제니아 실바가 수비수에게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뛰어 올라 헤더로 슛한 골이 케인이 막지 못할 곳을 통과하며 추가골을 만들어냈다.
전반 종료 직전 터진 추가골은 에디의 슛으로 살아났던 잉글랜드 선수들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다들 분위기가 왜 그래요. 아직 경기 끝난 것이 아니잖아요.”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전송되는 중계에 ‘잉글랜드가 그럼 그렇지.’라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선수들에게까지 영향이 미칠 때도 인수는 라커룸을 바쁘게 돌아다니며 밝은 표정을 유지했다.
“내가 패스하고 슈가 딱 넣으면 한 골 따라가면 되고. 어. 벨링엄이 나한테 패스해주면 내가 중거리 슛을 하면 동점골이고 에디가 크로스를 올려서 바디가 발리로 넣으면 역전이네. 안 그래요?”
선수들을 어떻게 다독여야 하나 고민하며 라커룸으로 걸어오던 산체스 감독은 라커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인수의 목소리와 함께 쾅쾅거리는 소리가 섞여 있는 것이, 선수들 앞에서 직접 패스하는 시늉과 슛을 하는 시늉을 같이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감독인 자신의 역할이 선수들을 다독이며 사기를 불어 넣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대신하는 선수가 있어 감독의 짐을 약간이나마 덜어낼 수 있었다.
더군다나 그 선수가 팀의 막내급 선수였고 프리미어리그의 득점왕이기도 했으니 선수들도 한결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라커룸의 문을 열려는 것을 멈추고 그대로 뒤로 돌았다.
지금 들어가 봐야 선수들에게 다른 작전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지금은 선수들을 믿는 것밖에 없었다.
잉글랜드의 선축으로 시작된 후반전은 소튼 콤비의 공격으로 시작됐다.
킥오프가 되자마자 빠르게 에디에게 패스한 인수는 에디와 2:1 패스를 주고받으며 포르투갈의 왼쪽을 뚫었다.
2:0으로 앞서고 있었던 데다 후반이 막 시작됐던 터라 아직 정비가 되지 않은 포르투갈 선수들은 두 사람의 침투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오른쪽으로 밀고 들어오는 잉글랜드 선수들도 마크해야 했다.
순식간에 왼쪽 페널티라인 끝에서 에디의 패스를 받은 인수는 포르투갈 수비를 앞에 두고 에디에게 패스하는 시늉으로 수비의 중심을 무너뜨리고 중앙으로 한번 접었다.
단 한 번의 페인트로 수비를 벗겨낸 인수에게 골문까지 이어지는 길이 열렸고 인수는 그대로 발을 휘둘렀다.
후반이 시작하고 단 13초 만에 터진 인수의 만회골은 인수가 왜 프리미어리그의 득점왕이었는지를 증명하는 골이었고, ‘잉글랜드는 안 돼.’라는 세간의 시선을 바꾸는 골이었다.
인수와 에디의 콤비플레이가 얼마나 파괴력이 있는지에 대한 증명이자 자신들을 영입하고 싶은 팀은 돈을 싸 들고 오라는 소리 없는 외침이었다.
후반 13초 만에 터진 골은 2:1로 앞서가는 포르투갈의 분위기도 급하게 만들었다.
포르투갈 대표팀의 감독인 주앙 무티뉴가 코치석까지 뛰쳐나와 천천히 하라고, 흥분을 가라앉히라고 했지만 세대교체가 된 젊은 포르투갈 대표팀 선수들은 쉽사리 안정되지 않았다.
중간중간 끊기는 패스가 나왔고 그때마다 위기를 맞았지만 벤피카의 영웅인 다니엘 네투의 환상적인 선방으로 골을 내주지는 않았다.
자신들의 공격이 계속해서 끊기고 주앙 무티뉴의 시기적절한 선수교체로 점차 안정을 찾았지만 분위기를 탄 잉글랜드의 파상공세를 막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후반 중반이 넘어가는 시점 다시 인수의 발에서 공격이 시작됐다.
이번엔 에디가 아닌 교체되어 들어온 대런 바디와 2:1 패스로 오른쪽을 뚫어냈다.
계속 왼쪽을 고집했던지라 포르투갈의 선수들도 갑작스런 방향 전환에 허둥지둥했고 바디는 오른쪽 공간을 완전히 열었다.
그 누구의 방해를 받지 않고 크로스를 올린 바디였지만 공이 길었고 반대편에 대기하던 에디에게 패스하듯 연결됐다.
바디의 크로스를 막기 위해 문전에 모여 있던 선수들이었기에 에디 역시 수비수의 방해 없이 페널티 지역으로 공을 몰고 들어왔고, 혼잡한 상황에서 슛을 하지 못하고 공을 뒤로 돌렸다.
에디의 패스를 받은 인수는 선수들이 너무 몰려 틈이 보이지 않았지만 헤리어 슈에게 연결되는 단 하나의 라인을 보았고 좁은 공간이었지만 정확하게 슈의 발밑으로 패스했다.
갑작스럽게 다가온 공이었지만 슈도 침착하게 공을 골대로 돌려놨고, 이미 인수가 공을 찬 방향으로 몸을 날렸던 네투도 슈가 돌려놓은 공을 막지 못했다.
결승골을 노리며 양 팀의 선수들이 끝까지 뛰었지만 경기는 그대로 종료되고 두 팀의 무승부로 잉글랜드가 조 1위, 포르투갈이 조 2위로 16강 전에 진출했다.
***
월드컵 조별리그 3차전 첫 번째 날에 4팀이 정해졌고 하루가 지날 때마다 4팀씩 모두 16개 팀이 가려졌다.
A조는 월드컵 개최국인 아르헨티나와 본선에 나올 때마다 16강 이상의 성적을 거둔 아일랜드가 다음 라운드에 진출했고, B조는 잉글랜드와 포르투갈이, C조에서는 브라질과 함께 가장 많은 우승을 한 독일과 검은 돌풍의 한 축인 가나가, D조에서는 최종전에서까지 승점이 같았지만 골득실 차이로 순위가 갈려 브라질이 조 1위, 대한민국이 조 2위로 통과했다.
E조는 스페인과 우루과이가, F조는 멕시코와 크로아티아가, G조는 프랑스와 나이지리아가 일본과 미국을 눌렀고, 마지막 H조는 스웨덴과 오스트레일리아가 16강 진출을 확정 지었다.
다돌 올라갈 만한 팀이 올라간 결과에 월드컵 사상 가장 이변이 없는 조별리그라는 평가가 나왔지만 브라질과 끝까지 조 1위를 다툰 대한민국의 분전은 큰 주목을 받았다.
2년 전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주역들이 나선 월드컵이기에 16강에 진출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평가도 있었지만, 끝까지 조 1위를 다툴 것이라 예상한 이는 없었다.
그리고 또 한 팀 주목을 받은 곳은 2년 전 유로예선에서 탈락하며 이제 새로 임플란트까지 해서 끼워 넣은 이빨도 다 빠졌다고 평가받았지만 조 1위를 한 삼사자 군단이었다.
특히 마지막 포르투갈과의 경기에서도 한 골을 넣어 조별리그에서만 5골을 몰아넣으며 순식간에 골든슈 후보가 된 인수와 동점골을 넣은 아스널의 스트라이커인 헤리어 슈, 그리고 대회 최연소 출전자인 에디까지 주목받았다.
2020년 승리하기 전까지 35년 동안 승리가 없었고, 2020년 승리 이후 다시 18년간 승리가 없었던 아일랜드와의 16강전이 남아있었기에 회의적인 시선도 있었지만. 일주일 동안의 휴식이 체력 소모가 컸던 주전 선수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예상은 모두가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