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인터뷰가 끝난 후 자유를 찾은 레이와 수아는 인수와 에디를 개 끌듯 끌고 서울 곳곳을 누볐다.
작년 여름 한국여행에 대해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강행군을 할 줄 몰랐다는 에디는 호텔에 들어올 때마다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침대에 뻗었다.
레이와 수아가 인수와 에디를 배려하겠다며 3일에 하루는 자유롭게 일정을 정하라고 하기에 호텔에서 쉬는 일정을 짰다가 8박 10일 동안 쇼핑과 먹방을 반복하는 생활을 해야만 했다.
마지막 날, 그렇게 돌아다녔으면서도 살 것을 다 사지 못했다며 수아에게 사와 달라 부탁하는 레이를 보고 인수와 에디는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두 사람은 다음 날 비행기에 올라타서도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에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영국으로 돌아와 잠시 숨을 돌린 후 셋은 다시 소튼 외각에 있는 훈련장에 모였다.
랭커리지가 특별히 모은 네 사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이것들만 먹고 살라고요?”
에디는 자신을 영양학 박사라고 소개한 벨로이치를 바라보았다.
벨로이치가 건네준 식단은 하루 세 끼는 물론이고 중간중간 마셔야 하는 음료와 간식까지 모두 적혀있었고, 세 사람이 모두 다른 식단이긴 했지만 베이스는 똑같았다.
우유와 멸치, 시금치, 콩, 브로콜리, 달걀, 과일, 그리고 닭고기였다.
거기에 중간에 마시는 음료도 과일을 베이스로 채소와 부족한 영양분을 보충하는 것으로, 재료만 봐도 맛이 없어 보였다.
“뭐가 문제죠? 에이전시에서 보내준 세 사람의 검사 결과를 토대로 성장을 도와주고 체력훈련에서 버틸 수 있도록 짠 식단인데요.”
“그래도 이것들만 먹고 살라니요.”
소튼에서 가장 잘나가는 음식점 아들인 에디였고 그런 에디의 친구들이었기에 갖가지 향신료가 들어간 음식들을 즐겨 먹어왔었다.
그런데 요리방법까지 적혀 있는 종이는 보는 것만으로도 맛이 없어 보였다.
그때 조용히 식단을 보고 있던 레이가 손을 들었다.
“난 이 훈련 참여한다고 하지 않았는데 집에 가봐도 될까요? 곧 있으면 레딩으로 돌아가야 하거든요.”
평소에도 짧은 인생 맛있는 것만 먹고 살아도 부족하다고 항상 말하고 다니던 레이였다.
더욱이 이번 훈련도 인수와 에디가 하자고 해서 인수와 좀 더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에 나온 것뿐이었다.
“이미 레딩에 확인했습니다. 뭐, 싫다면 돌아가도 되긴 하지만.”
총괄트레이너라고 소개한 브링이 말을 줄이며 인수와 에디 쪽 바라보았다.
레이의 눈이 자연스럽게 인수와 에디 쪽으로 향하자 두 사람은 강렬한 눈빛으로 같이 하자는 텔레파시를 보냈다.
‘나 죽기 싫어. 나 갈래.’
‘혼자만 살겠다고. 진짜 그럴 거야? 이 훈련이 끝날 때까지 우린 여기서 나가지도 못하는데.’
‘자꾸 그러면 네 비밀 하인스에게 털어놓는다.’
‘너 그러면 죽어. 제발 보내줘.’
‘안 돼. 같이 해야지.’
‘매일 한 장씩 보내던 하인스 사진 두 장으로 늘려줄게.’
‘진짜지?’
순식간에 수많은 텔레파시가 오고 갔고 레이는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브링은 고개를 숙인 레이를 보며 미소를 지었고 이어 세 사람에게 종이를 한 장씩 나눠주었다.
“이건 프리시즌이 시작되기 전까지 세 사람이 소화해야 할 훈련 일과입니다.”
브링이 나누어진 종이에는 일어나는 시간부터 식사 시간, 훈련 시간, 자는 시간까지 모두 30분 단위로 빽빽이 프린트되어 있었다.
“포지션이 다른 세 사람이기에 소화해야 할 훈련 내용은 다르겠지만 일과는 똑같이 돌아갑니다. 이미 수많은 선수들을 코칭한 가장 효과적인 훈련이니 믿고 따라오면 됩니다.”
“저기, 자유시간은 말 그대로 자유롭게 하면 되는 건가요?”
인수는 훈련 중간에 있는 휴식 시간 외에 저녁 훈련이 끝난 후 있는 자유시간을 가리켰다.
한국에서 단 하루 슈퍼소니의 소개로 한국기원을 방문했었다.
항상 화면으로만 보던 프로기사들을 직접 만나 사인도 주고받았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기풍을 가진 조우진 9단에게 지도대국도 받을 수 있었다.
단 한 판, 4점을 깔고 두기도 했고 20초 바둑이었기에 한때 밀어붙이기도 했지만, 프로의 벽은 쉽게 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단 하루긴 했지만 축구를 좋아하는 프로기사들이 자신에게 사인을 받았고 연락처까지 주고받으며 쉴 때 지도대국을 두어 준다는 말까지 들어 가장 기분 좋은 하루를 보낸 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영국으로 돌아와 자신의 유니폼은 물론이고, 소튼의 상품들을 자비로 구입하여 한국기원에 보내기까지 했다.
아직 도착하지는 않았지만 은행나무로 만든 최고급 바둑판에 조우진 프로의 사인과 함께 바둑알도 보냈다는 연락이 왔다.
그 바둑판으로 실제로 두는 상상도 했었고, 인터넷 바둑도 둬야 했으니 자유시간이 누구보다 중요했다.
“훈련만으로 일정을 소화하기에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되니까. 쉬는 것도 중요하지.”
인수는 브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 정도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미 결심한 이상 다음날부터 코치들은 세 선수들을 체력의 한계까지 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난 후 세 사람은 소튼과 레딩의 프리시즌을 위해 훈련장을 뒤로했다.
***
= 나간 사람은 있지만 들어온 사람이 없는 소튼 이대로 괜찮은가.
= 중국 부호에게 넘어간 소튼 또다시 돈주머니로?
= 소튼을 인수한 양제 회장 필 바이슨 단장 유임키로
= 랄라나 감독 올 시즌 임대를 보내기로 한 선수들 모두 취소키로
인수와 에디가 개인 훈련에 매진할 무렵에도 여름 이적시장은 무척이나 활발하게 돌아갔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 역시 스타 선수들의 이적으로 선수들의 몸값이 인플레이션이 일어났고 중급 이상으로 평가받는 선수들은 물론이고 아직 긁지 않은 복권이라는 유스에 있는 선수들의 몸값까지 들썩였다.
특히 어린 선수들을 싸게 팔고 다시 비싸게 사오기로 유명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22살의 에디 휴즈를 9000만 파운드라는 이적료로 복귀시킨 것을 필두로 주머니를 풀기 시작했다.
맨체스터의 일간지들은 맨유의 레이더망이 소튼의 어린 두 선수를 겨냥하고 있다고 했지만, 랭커리지가 공식적으로 부인하며 불씨를 꺼트렸다.
그렇지만 맨유가 아닌 스페인의 투탑인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서 동시에 랭커리지와 접촉하며 인수의 이적설이 언론에 오르내렸다.
이제 여름 이적시장이 중반을 넘어서는 시점이었지만 아직은 이적하지 않겠다는 인수의 대답을 들었던지라 랄라나는 새로운 선수들의 영입에 신경 쓰고 있었다.
당장 급한 자리는 페렌츠가 맡고 있었던 수비형 미드필드였다.
페렌츠가 이적한 데다 같은 포지션에서 로테이션을 돌아주던 팝 와슨까지 이미 이적할 팀이 결정된 상황이었다.
험프 아담이 있긴 했지만 로테이션을 돌 정도지 주전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랄라나가 생각하는 전술을 인수를 중심으로 하는 패스 축구를 구사하는 것이었다.
자신에게 지도를 받으며 커 온 유스 출신 선수들은 익숙한 전술이기도 했고 그만큼 많은 활동량을 필요로 했다.
그런 활동량은 기본적으로 체력적인 문제가 뒤따랐기에 로테이션을 돌아줄 선수들이 필요했고, 그런 선수들을 영입해야 했다.
“그런 선수들이 쉽게 찾아지냐고.”
랄라나는 영국 전역, 심지어 6부리그까지 소튼의 스카우터들을 파견했다.
페렌츠와 도슨 등이 남긴 이적료가 있긴 했지만 이미 접촉 중인 선수들이 있었기에 큰 이적료를 지불하기 힘들었다.
작년 주전 골키퍼 역할을 해준 볼의 경우처럼 하부리그에서 눈에 띄는 선수들을 데려와야 했다.
새로운 구단주가 이적 자금을 내주는 것은 힘들어도 선수들이 남긴 이적료는 모두 이적료로 써도 좋다는 말을 했기에 한숨 놓기는 했지만, 얇은 스쿼드를 보강하는 일은 요원했다.
“아담, 피터스 스카우터님 전화.”
한참 고민에 빠져 전화가 오는지도 몰랐던 랄라나는 피터스의 전화라는 말에 황급히 받았다.
소튼의 스카우트팀장인 피터스는 본머스에 있던 자신을 스카우트하여 소튼 유스로 영입한 스카우터였다.
랄라나뿐만 아니라 워드프라우스, 월콧, 베일까지 그의 선택을 받은 선수는 축구계에 어느 정도 이름을 알릴 정도로 선수를 보는 눈이 좋은 스카우터였다.
분명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도 충분한 사람이지만 자신은 스카우터가 천직이라며 아직까지 스카우트팀장의 자리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피터스, 아담이에요.”
“전화 좀 빨리 받아. 젊은 놈이 느려터져서는. 그러니까 그 발재간을 가지고 부상이나 당하지.”
“이제 나도 감독이거든요. 그리고 찾았어요?”
랄라나는 더 대화를 끌어봐야 자신이 당할 것이 뻔했기에 재빨리 용건으로 화제를 돌렸다.
“선수가 그렇게 쉽게 찾아질 거 같아? 우선 유스에 한 명 보내놨어. 자신은 스트라이커를 하고 싶어 하는데 윙백 체질이야. 성격이 웨인하고 똑같아. 잘 키우면 쓸 만한 풀백은 될 듯싶어.”
“유스도 중요하지만 당장 주전자리가 급해요. 수비형 미드필더 중에는 쓸 만한 녀석이 안 보이나요?”
“그렇지 않아도 네셔널리그에 쓸만한 녀석이 있다고 해서 가보는 중이야. 워드프라우스가 확인했다는데 직접 봐야 알지.”
이제는 완전히 해설가 겸 방송인으로 활동 중인 워드프라우스는 영국 전역을 돌며 축구 강의도 하고 있었다.
워낙 달변가에다 유머가 있었던지라 강의도 인기가 많았기에 많은 선수들을 만나봤고, 쓸만한 녀석이 보이면 피터스 스카우터에게 연결을 시켜주기도 했다.
“제임스의 눈이면 믿을 만하죠. 확인하고 연락 주세요.”
“그래. 고생해.”
피터스는 처음 소튼에 입사해 립헤르 구단주 밑에서 의욕적으로 활동했을 당시가 생각났다.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구단을 인수한 지 1년 만에 사망하고 말았지만 립헤르 가문이 소튼을 맡고 있었을 때가 더 높은 곳을 노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그 후 구단을 인수한 구단주들은 소튼을 돈주머니로밖에 생각하지 않았고, 투자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성적은 감독이 알아서 해야지. 난 내 일이나 해야겠다.”
피터스는 워드프라우스가 말한 네셔널리그의 스톡포트로 향했다.
두 개의 맨체스터가 자리한 그레이트맨체스터주에 있는 도시였지만 이미 완성된 선수들을 선호하는 그들이었기에 자신이 찾는 선수에게 침을 바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
그렇게 프리시즌이 다가오면서 소튼에서 오피셜이 하나씩 보도되기 시작했다.
= 에레디비시 명문 에이트호번의 중앙미드필더 한스 바우만 1800만 유로에 소튼행
= 스톡포트 미드필더 제리 톰슨 300만 파운드에 소튼행
= 크리스 블럼, 임대 대신 소튼 2군 골키퍼로
= 나이지리아 대표팀의 조르단 아사모아 1200만 유로에 소튼행
연속된 소튼으로의 이적은 걱정했던 팬들의 우려를 깡그리 날려주었다.
비록 새로 영입한 선수들의 활약은 두고 봐야 했지만 한스 바우만은 독일 분데스리가의 명문팀들이 노리고 있다는 언론들의 보도가 있을 만큼 뛰어난 실력을 가진 선수였다.
더욱이 조르단 아사모아는 2034년 월드컵에서 나이지리아의 4강을 이끌었던 선수로, 부상으로 인한 기량하락이 눈에 보인다는 평가였지만 메디컬 테스트를 통과한 만큼 기대해도 좋다는 말이 많았다.
기존에 있던 선수들과 새로운 선수들이 랄라나 감독 아래 프리시즌을 맞이할 훈련에 돌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