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이상하게 하지 마. 내가 지금 다른 남자 만나다가 너한테 들킨 거야? 전화 안 받은 건 미안한데, 그런 이상한 상상에 나 넣지 말아 줘. 내가 전화 안 받아서 추궁하러 온 거면 내릴게.”
조수석 문손잡이를 잡자 차정한의 몸이 조수석 쪽으로 확 기울어졌다. 차정한은 손잡이를 당긴 내 손을 잡아 놓게 하고는 문을 다시 닫았다.
“…미안해. 걱정되고 네가 나 안 봐 줄까 봐 불안해 미치겠는데 거기서 김원우가 나오니까…. 심하게 말한 거 미안해. 너 추궁하러 온 거 아니야. 데리고 가려고 왔는데… 같이 있는 거 보니까 화가 나서….”
“…….”
“난 너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동안 그새…. 김원우는 너랑 있었다고 생각하니까 속이 뒤집히잖아. 어떻게 운전하고 왔는지도 모르겠어.”
“…….”
“내가 얼마나 널 찾았는데.”
아까보다 누그러진 목소리에 괜히 마음이 쓰였다. 슬쩍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차정한이 꼭 방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주인의 눈치를 보는 강아지처럼 나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날카롭고 예민하던 눈으로 보던 차정한이랑 같은 사람이 맞나 싶었다.
“일단 집에 갈까? 여기서 계속 말하는 것도 좀 그렇잖아.”
“…….”
“집에 안 갈 건… 아니지?”
“…….”
“…나랑 끝낼 거야?”
끝내자는 것도 아니고, 끝낼 거냐고 내게 답을 구하는 건데도 마음이 따끔거렸다. 끝이라는 말은 도대체 뭘까. 일어나지도 않은 일인데 그 짧은 소리 하나에 세상은 무너질 준비를 마쳤다.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차정한은 이런 순간에도 내 말문을 막히게 했다. 나쁜 놈. 생각나는 건 그게 전부였다.
“네가 실망했다고… 그런 놈인 거 몰랐다고, 혼자 좋아할 때가 좋았다고 그래도 나 할 말 없어. 알아. 너한테 상처 안 주려고 하다가 더 크게 준 것도 알아. 알아, 유현아.”
“…….”
“아는데…. 그래도 나 너 밖에 두기 싫어. 저 새끼 집에 있는 것도 싫고, 다른 데도 다 싫어.”
“…….”
“…집에 가자, 유현아. 우리 집이잖아. 우리 같이 사는 집.”
일단 집에 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차정한의 말처럼 그 집은 이제 우리가 같이 사는 집이었다. 내가 차정한의 집에 얹혀사는 것도 아니고, 같이 살자는 차정한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여 스스로 들어간 집이었다. 우리가 얽혀 있는 동안에는 그 안에서 해결하는 게 맞았다.
“…알았어. 가자.”
대답 하나에 무너지는 것처럼 터져 나오는 차정한의 숨소리가 들렸다. 안도하는 그 숨소리에 또 마음이 따끔거렸다.
집에 가는 동안 어떤 이야기도 나누지 않았다. 딱히 대화를 할 분위기도 아니었고, 뭔가 먼저 꺼낼 수 있는 말도 존재하지 않아 그냥 길이 계속 이어지는 앞만 바라보았다. 한 번씩 차정한의 시선이 닿아오는 게 느껴졌지만, 그 시선에도 내가 할 말은 없었다.
주차장, 엘리베이터, 그리고 현관으로 들어서서도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이 침묵이 그리 불편하지 않았지만, 차정한은 불편한 것처럼 자꾸 나를 살폈다. 거실 불을 켜자 노트북과 마시지도 못한 커피가 보였다. 내가 머물렀던 자리를 보자 오전의 그 상황이 그대로 머릿속을 치고 지났다.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머리가 너무 무겁고 몸이 축 늘어졌다.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종일 움직인 것처럼 너무 피곤했다. 나는 겉옷을 벗어 소파 옆으로 놓고 벌 받는 것처럼 가만히 서 있기만 한 차정한을 바라보았다.
“이리 와. 계속 거기 있을 거야?”
나를 본 차정한이 그제야 가까이 다가와 내가 앉는 옆으로 앉았다. 다시 이어지는 묵직하고 어색한 침묵을 먼저 깬 건 차정한이었다.
“미안해. 잘하고 싶었는데….”
사실이 아닌 거 아니까 됐다고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고 싶은데 스캔들보다 앞으로도 내게 숨겨야 할 일이 있으면 숨길 거라는 차정한의 말이 생각과 마음 여러 곳을 콱 틀어막은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뭐가 미안한데?”
드라마나 소설에서 볼 때마다 진부하다고 생각한 말을 내가 하고 있었다. 이런 진부한 말은 정말 안 하고 싶었는데 왜 사람들이 이런 상황이 닥치면 이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스캔들 난 거?”
“그것도 미안하고, 너한테 말 못 한 것도 미안해.”
“말 못 한 거 아니라 안 한 거라고 했잖아. 일부러 안 한 거잖아.”
“며칠 내내 바빴고, 너랑 시간도 제대로 못 보냈어. 새벽에 와서 잠깐 얼굴 보고 자는데 그 시간 망치기 싫었어.”
“…대신 오늘을 망쳤잖아. 어쩌면 내일도, 모레도… 망칠지 몰라.”
몸을 숙인 채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가 뗀 차정한이 조용히 긴 숨을 내쉬었다.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노트북에만 시선을 둔 채 그의 소리에 집중했다.
“스캔들 난 거 처음도 아니고, 여러 번이었잖아. 한 번도 진짜 기사 난 적 없었고,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얘기가 도는지도 알아. 너 억울한 거 내가 옆에서 다 봤고, 그런 스캔들로 그래…. 보면 나도 사람이니까 속은 상해. 아니라는 거 알아도 같이 있는 사진 같은 거 보면 싫고, 질투도 나.”
“…….”
“그런데 그건 잠깐이야. 아닌 거 아니까. 나한테 사랑한다고 한 네가 며칠 만에 그럴 사람 아닌 거 알고, 종일 나한테 연락하고, 끝나면 와서 나랑 같이 있고 싶어 하는 너…. 내가 매일 봤으니까…. 서운해도 금방 다 사라져. 어제 네가 말했으면 오늘 이 기사 봤어도 그냥 잠깐 그러고 말았을 거야.”
“…….”
“…왜 이런 엄청난 일을 다른 사람이랑 똑같이 기사로 알게 해? 전에는 안 그랬잖아. 전에는… 다 말했잖아. 너 집에 오면 나한테 다 얘기했잖아. 있었던 일 작은 것까지 전부.”
“그래, 그랬어. 그땐 친구였으니까.”
고개를 숙이고 있던 차정한이 나를 바라보았다. 차정한의 말을 순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시선을 끈질기게 이으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잘 보이고 싶었어. 오랫동안 친구였고, 내가 너한테 못 보일 것도 많이 보였고, 나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고 다 보이고, 말하고, 기댄 나 때문에 너 상처도 많이 받은 거 아니까.”
“…….”
“이제 친구 아니잖아. 그때처럼 너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고….”
“…….”
“너한테 일주일짜리 되고 싶지 않았어.”
차정한의 말에 마음이 소파 아래로 떨어졌다. 아니, 주저앉았다는 말이 더 어울렸다. 마음이 웅크리며 주저앉았다.
종일 내가 한 생각 중에 하나였다. 친구일 때는 안 그랬는데 왜 연인이 되고 난 다음에는 달라진 걸까. 별일 아니라고 그냥 쉽게 넘어갈 수 있을 일일 수도 있는데 왜 나는 전보다 더 화를 내는 걸까. 친구와 연인. 우리에게 붙은 이름이 변하며, 도대체 뭐가 달라진 걸까.
솔직히 겉으로는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친구였던 엿새 전과 지금, 우리는 쭉 이어진 같은 시간을 지내고 있고, 뭐가 달라졌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바로바로 이게 달라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친구였던 때부터 친구가 아니라 새로운 이름을 가진 지금, 이 순간까지 우리의 시간은 쭉 이어지고 있으니까. 그 이어진 시간 안에서 하루 동안 생긴 우리의 극적인 변화를 찾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아마 이 일이 없었다면 오늘도 알지 못했을 것이었다. 우리 사이에 달라진 게 뭔지. 왜 우리는 친구일 때도 하지 않은 이런 다툼을 하는 건지.
“…일이 벌어진 이상 내 책임도 없다고 할 수 없고….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고 실망할 것 같아서….”
“…….”
“날 사랑한 시간을 네가 후회하게 될까 봐 무섭더라.”
“…….”
“네가 질리면 어쩌지. 사귀고 보니까 별거 없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이 생각만 들어. 너한테 진짜 좋은 사람 되고 싶어. 잘 보이고 싶고, 네가 날 더 사랑했으면 좋겠고….”
“…….”
“나 없으면 안 되게 하고 싶은데….”
우리에게 달라진 건 연애가 시작된 동시에 끝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친구에서 연인이 되며 생기는 자연스러운 감정이겠지만, 처음으로 마주한 이 불안감은 우리 모두에게 낯설고, 위협적인 것이었다.
“…미안해. 잘하고 싶었는데 내가 다 망쳤어.”
작게 떨린 숨이 흐트러지고 차정한은 다시 고개를 숙여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풀 죽은 목소리에 또 마음이 흔들렸다.
“너랑 일주일 만나려고 내가… 생각하고, 또 생각한 줄 알아?”
“…….”
“너 사랑한 거 후회 안 한다고 했잖아. 이런 일로 너한테 질릴 거면 처음부터 시작도 안 했어. 너 나한테 좋은 사람이고, 널 볼 때마다…. 아직도 설레.”
고개를 든 차정한이 나를 바라보았다. 내게서 떼지 못하는 그 눈동자를 보니 그냥 안아 주고 싶었다. 안 해도 될 생각과 고민을 하느라 일을 이상하게 만든 차정한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 지금도… 너 없으면 안 돼.”
“…….”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래. 앞으로도… 그럴 거야.”
“…정말?”
“들어야 알아, 그걸 꼭?”
“…들어야 알지. 넌 나만큼 말 안 하잖아. 술 마셔야 하고.”
혼날 말을 한 것처럼 눈치를 본 차정한이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이런 순간에도 눈에 담는 자체로 온몸이 심장으로 변한 것처럼 두근대는 나를 차정한은 알까.
“내가 화났던 건 스캔들이 아니라 네가 앞으로도 나한테 필요하면 말 안 한다고 한 거…. 그거 때문이야. 내가 모르는 차정한의 시간이 하나씩 생기고 쌓일 거 아냐….”
“별일 아니니까. 아무 의미도 없고, 네 기분만 상하게 할 일이니까.”
자꾸 별일 아니라고 하는 차정한의 말에 풀리려고 했던 마음이 다시 조여들었다. 별일인지 아닌지 혼자 결정해 고집스레 말하는 차정한을 이해하면서도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나도 친구들 만나거나 할 때 말 안 할래. 네가 별로 안 좋아하는 일이고, 친구 만나는 의미 외에는 없으니까. 별일 아니잖아.”
“그럼 앞으로도 김원우 그 새끼 집에 말도 안 하고 가고 그런다는 거야?”
“어. 나한테는 아무 의미 없어. 넌 알면 아까처럼 화낼 거 아냐. 그러니까 굳이 말 안 하고 몰래 다니면 되는 거 아냐?”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나 미쳐 죽으라고 그러는 거지?”
“똑같은 거잖아. 별일 아닌 일 서로 기분 상하지 않게 알아서 말 안 하는 거.”
지나치게 유치하고 진부한 말이었다. 연애를 하면 이렇게 되는 걸까. 드라마나 영화에서 많이 봤던 그 새로울 게 하나도 없는 말을 내가 하고 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저 말밖에 할 말이 없다는 것도 이제 알았다.
#81
?
?
“…돌겠네, 진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차정한이 창으로 다가갔다. 멋진 야경이 보이는 창가로 간 차정한이 그 창으로 고개를 숙여 기댔다. 머리로 몇 번 창을 두드리다가 다시 이쪽으로 온 그가 다시 옆으로 앉았다.
“오늘 기사 안 터졌으면 지금도 나는 모르고 있었을 거야. 내일도 몰랐을 거고 앞으로 내내 몰랐겠지.”
“…….”
“그게 너무 서운해. 멀어지는 것 같아.”
“너랑 멀어지려고 그런 거 아니야. 난 더 잘해 보려고…….”
“…그래서 지금 어떻게 됐는지 봐. 낮에 전화했을 때부터 계속 싸우기만 하잖아.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야? 나한테 네 얘기 안 해 줄 거야? 난 계속 그럼 이렇게 기사 보고 알아야 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미안하다는 말 들으려고 하는 말 아니잖아. 생각해 보고 말해 줘. 내일 다시 얘기해.”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울 일도 아니고, 이런 일에서 울어 모든 걸 흐지부지 만드는 것도 싫었기에 서둘러 전에 내가 쓰던 방으로 갔다. 문을 닫고 침대에 앉아 눈을 감은 채 심호흡했다. 울지 말아야지, 울지 말아야지. 주문처럼 외며 지나치게 감정적이던 마음을 짓눌렀다.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안 좋은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고,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은 다 똑같은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차정한의 마음도 어느 정도는 이해하지만, 남의 연애가 아닌 나의 연애이기에 그걸 이해한다고 끄덕이며 상황을 덮고 싶지 않았다.
“…….”
마음을 누르고 갈아입을 옷을 들고 방을 나섰다. 차정한은 들어왔을 때의 모습 그대로 같은 자리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시선이 닿았지만, 그냥 지나쳐 욕실로 들어갔다. 씻는 동안에도 생각이 맺혔다가 흘러내리고, 또 맺혔다가 흘러내리는 것을 반복했다. 이건 나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무엇 하나 또렷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머리까지 다 말리고 나갔을 때도 차정한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더 보고 있으면 지금보다 마음이 더 약해져 다가가고 싶을 것 같아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요즘 내내 같은 방, 같은 침대에서 자다가 이렇게 혼자 방에 있으니 너무… 조용하고 기분이 이상했다.
밖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에 귀를 기울이다가 뭐 하는 건가 싶어 불을 끄고 침대 안으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완벽한 어둠 속에서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청했지만, 소모가 심해 피곤한 정신은 도무지 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꾸만 불이 붙어 감고 있던 눈이 떠졌다. 나는 한참이나 잠들지 못하고 몸만 뒤척였다.
‘…잘 보이고 싶었어. 오랫동안 친구였고, 내가 너한테 못 보일 것도 많이 보였고, 나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고 다 보이고, 말하고, 기댄 나 때문에 너 상처도 많이 받은 거 아니까.’
잘 보이고 싶었다는 목소리가 많고 많은 생각 중 가장 위로 갑자기 떠올랐다. 나는 완전한 어둠과 마주하며 눈을 떴다. 잠이 하나도 오지 않아서 눈을 억지로 감고 있는 것보다 이렇게 뜨는 게 더 편했다.
‘너한테 일주일짜리 되고 싶지 않았어.’
차정한은 어제 내게 우리 오늘 며칠이냐고 물었었다. 사귄 지 5일째라는 그 말이 차정한의 말문을 더 막았을지도 몰랐다. 일주일도 되지 않았으니까.
“…….”
일주일짜리라는 그 말이 너무 아팠다. 남이 차정한을 안 좋게 말하는 것도 싫지만, 차정한이 자신을 낮춰 말하는 것도 싫었다. 귓가에 맴도는 일주일짜리라는 말을 떨치고 싶었다. 나는 베개 끝을 구부려 귀를 막았다. 그래도 이명처럼 떠도는 소리는 내내 사라지지 않았다.
밤새 내가 뒤척이는 소리에 조금도 잠들지 못했다. 오 분에 한 번씩 시간을 확인하다가 새벽 다섯 시가 넘었을 때 더는 견디지 못하고 침대를 벗어났다. 켜켜이 쌓인 피로가 머리를 묵직하게 짓눌렀다.
이불을 반듯하게 펼쳐 정리하고 방을 나섰다. 연한 커피라도 한 잔 마시면 정신이 들 것 같아 부엌으로 가는데 익숙한 모습에 걸음이 멈췄다. 어제 씻으러 갈 때 봤던 모습 그대로 차정한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순간 너무 놀라 고인 숨이 작게 터졌다.
“…….”
“…….”
내가 나오는 소리를 들었는지 고개를 든 차정한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조금도 움직이지 못한 채 그를 보다가 다가갔다.
“왜 벌써 일어났어.”
낮게 잠긴 차정한의 목소리가 적막한 새벽의 거실을 가르며 울렸다. 코트만 벗었을 뿐, 차정한은 어제 봤던 모습 그대로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러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확 조여들었다. 차정한은 때때로 내가 생각지도 못할 만큼 깊은 생각에 빠지고는 했다.
“…왜 이러고 있어. 저번에도 그러더니 또 밤샌 거야?”
차정한은 대답 대신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새벽과 어울리는 짙은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싸우고 난 다음에는 내가 이러고 있든지 말든지 그냥 모른 척하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야? 왜 다들 그러잖아. 싸운 다음 날 어색해하고, 화 풀리기 전에는 투명인간 취급하고. 뭐가 그렇게 착해. 내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는데 벌써 화 풀린 거야?”
“…그건 그거고, 너는 너니까.”
“…….”
“걱정되는데 어떻게 모른 척을 해.”
가만히 얼굴을 보던 차정한이 손을 뻗어 내 손을 덮었다. 밤새 몇 번이나 필요했고, 또 몇 번이나 그리웠던 차정한의 체온이 닿자 어수선하던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사랑은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나를 차분하게 만들었다.
“내가 생각을 잘못했어.”
“…….”
“유현이 네 말이 맞아. 순간을 지키려고 멀리는 못 봤어. 어제 너랑 너무 좋았던 그 순간이 나한테는 너무 중요했거든. 깨고 싶지 않았어. 사랑하는 너랑 보내는 시간이 너무 좋아서… 지키고 싶었어.”
“…….”
“알겠지만, 유현이 넌 내 모든 처음이야. 널 보면서 사랑이라는 말이 따뜻해졌고, 믿고 싶어졌고… 제발 끝나지 않기를 바라게 됐어.”
“…….”
“너 없으면 나 정말 죽어. 진짜… 나 죽어, 유현아.”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안에서 들리는 차정한의 목소리가 너무 아팠다. 정말 죽을 것 같은 목소리라 그를 잡고 싶었다. 나는 내 손등을 덮은 그의 손을 향해 천천히 손을 뒤집어 마주 쥐었다.
“…끝이라는 말에 가까워질 수 있는 모든 건 다 보이기 싫었어. 네가 실망하고, 아파하고, 날 미워할 수 있는 건 다 숨기고 싶었어.”
“…….”
“난 그러면서 너한테는 아무것도 숨기지 말라고, 다 말하라고 그랬지. 알아, 이기적이고, 말도 안 된다는 거.”
“…….”
“다시는 서운하게 안 할게. 나한테 실망했지. 화낼 자격도 없으면서 너한테 화만 내고…. 아, 나 진짜 미쳤나 봐.”
밤새 혼자 이곳에 있었을 걸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고, 너무 미안했다. 안 그래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나도 어제는 너무 속이 상하고 감정이 이리저리 튀어 차정한을 혼자 있게 했다. 차정한이 그걸 얼마나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지 알면서 혼자 둔 건 명백한 내 잘못이었다.
“나도 미안해…. 더 차분히 얘기했으면 되는데, 나도 화가 나서…. 전에는 이 정도 아니었는데…. 우리 이제 진짜 친구 아닌가 봐.”
“…….”
“…내 거 뺏기는 것 같고, 정한이 너는 내 건데, 다른 사람이 너 좋아해서 그렇게 찾아가는 거 보니까 질투도 나고, 싫고…. 좋게 얘기했어도 되는데 나도 괜히 더 화냈어. 미안해.”
“유현이 네가 왜 사과해. 내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잘못한 건데.”
“…혼자 두고 방에 가서 미안해. 나도 너 없어서 한숨도 못 잤어. 나 이제 진짜 너 없으면 못 자나 봐, 정한아.”
못 잤다는 내 말에 차정한이 조금 놀란 눈으로 바라보다가 내 손을 꽉 쥐고 몸을 일으켰다. 나는 일어난 차정한을 올려 보았다.
“재워 줄게.”
나는 얼른 고개를 젓고 다시 차정한의 손을 당겨 옆으로 앉혔다. 차정한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걱정은 내가 해야 하는데 오히려 나를 걱정하는 그 얼굴을 보니 괜히 몸 여기저기가 화끈댔다.
“나 말고 네가 좀 자야 하는 거 아냐?”
“난 뭐 이동하면서 눈 붙여도 되고.”
손을 쥔 채 차정한이 엄지손가락을 살살 문질러 내 손등을 문질렀다. 자꾸 차정한이 있는 쪽으로 몸이 기울었다. 어스름한 서광 속에서 시선이 뒤엉켰다. 이 시간에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묘한 뜨거움이 손끝과 귀 끝,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
“…….”
새벽부터 이런 생각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끝도 없이 빨려드는 시선과 닿은 체온에 조금 더 닿고 싶어졌다. 생각이 스치자마자 순식간에 새빨간 감각들에 불이 켜졌다. 이런 상황에 섹스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니…. 솔직히 조금 당황스러웠다.
“어, 잠깐만.”
하지만 생각은 진동 소리와 함께 멈추었다. 차정한은 테이블 위에 둔 휴대폰을 들어 이름을 확인하고 전화를 받았다.
“어, 형. 알았어.”
간단히 통화를 마친 차정한이 나를 보며 아쉽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형 지금 출발했다고.”
“아…. 새벽 촬영이랬지. 진짜 못 자고 가서 어떡해.”
“괜찮아. 빨리 씻어야겠다.”
내 손을 한 번 쥐었다가 놓은 차정한이 거실을 벗어났다. 차정한이 닿았던 손이 홧홧했다. 모든 열이 이곳으로 몰렸다가 몸 여기저기로 예고도 없이 튀어 자꾸 다리가 오므라들고, 발끝이 바닥에 문질렸다. 나는 괜히 큰 쿠션을 하나 들고 그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아침부터 이게 뭐 하는 건가 싶었다.
씻고 나온 차정한은 겨우 모자만 눌러 쓰고 바로 현관으로 나갔다. 마스크를 한쪽 귀에 건 차정한이 신발을 신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일찍 끝날 것 같기도 한데 잘 모르겠다. 이따 전화할게.”
“…응.”
“재워 주고 싶었는데.”
다정하게 웃는 얼굴이 오늘따라 조금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살짝 피곤해 보이는 모습이 겹쳐져 이상하게 묘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나는 마스크를 쓰려는 차정한의 팔을 잡고, 먼저 다가가 가볍게 입 맞췄다. 맞물린 입술이 살짝 떨어지자 차정한이 고개를 조금 기울여 다시 깊게 파고들었다. 내 얼굴을 감싸는 크고 따뜻한 손과 단숨에 머릿속이 흐물흐물해질 만큼 나를 파고든 차정한의 체온에 자꾸 몸이 기울었다. 붙잡고 가지 말라고 조르고 싶을 만큼 간절했다.
깊게 맞물려 잔뜩 침범당한 느낌이 좋았다. 나의 영역을 온통 채우는 차정한의 온기가 좋아 자꾸만 나가야 하는 그를 잡고 늘어졌다. 차정한은 그런 내 뺨을 매만지며 몇 번이나 깊게 키스해 주었다.
달아오른 숨이 떨어진 입술 사이로 흘렀다. 차정한의 입술이 뺨에 깊게 눌렸다가 떨어지는 느낌에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가 천천히 놓아주었다. 떨어지면서도 다시 끌어안고 싶은 마음이 자꾸 충동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마스크를 쓰고 내게 인사하며 나가는 차정한을 보다가 소파로 돌아와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아 길게 누웠다. 머리 위에 있는 쿠션을 가져오려고 손을 올렸는데, 쿠션이 아니라 부드러운 것이 잡혔다. 나는 손에 잡힌 것을 그대로 쭉 당겨 가져왔다. 그것은 차정한이 벗어 둔 코트였다.
“…….”
코트를 얼굴 가까이에 대자 차정한의 향이 확 다가왔다. 평소 차정한이 쓰는 향수와 섞인 그의 체향에 몸에서 힘이 더 쭉 빠졌다. 조금 전 진짜 차정한을 끌어안았을 때 나던 향이 짙게 나서 머릿속도 흔들리고 마음도 흔들렸다. 나는 코트를 차정한처럼 끌어안고 조금 더 얼굴을 파묻었다. 꼭 차정한이 옆에 있는 것 같아 심장이 미친 듯 뛰기 시작했다.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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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정한의 코트를 안은 채 잠이 든 모양이었다. 눈을 떠 보니 한 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따뜻하고 애틋하기까지 한 차정한의 코트에 얼굴을 한 번 더 파묻듯 끌어안았다가 놓고 일어났다. 자고 일어난 나도 이렇게 피곤한데 잠도 못 자고 스케줄을 하고 있을 차정한을 떠올리니 안쓰러웠다. 부디 오늘 촬영이 빨리 끝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촬영장에 도착했다는 말부터 이상하게 하나도 안 피곤하다는 말까지 몇 개 쌓인 메시지를 보며 욕실로 갔다. 자고 이제 일어났다는 답을 보내고 옷을 벗었다.
그래도 씻고 나니 정신이 들었다. 시리얼에 우유를 붓고, 식탁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실시간 검색어는 하루가 지나서 그런지 완전히 다른 내용으로 바뀌어 있었다. 차정한을 검색해 들어가니 지금까지 늘 그랬던 것처럼 스캔들은 허위사실이며 전혀 아무런 감정도 없는 연기자일 뿐이라며 지나칠 정도로 딱딱하게 선을 그은 기사 제목들이 보였다. 나는 기사 제목만 몇 개 보다가 얼른 내가 찾으려던 자료들을 검색했다.
워낙 기획사에서 하는 일도 많고, 내가 정확하게 어떤 쪽을 알아봐야 할지 판단이 제대로 서지 않아 실장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두 번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은 실장님의 반가운 목소리에 조금 긴장했던 마음이 풀렸다.
실장님과 한참이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전화로 다 하기에는 부족해 모레 자리를 만들기로 했다. 꼭 같이 일했으면 좋겠다고 몇 번이나 제안하는 실장님의 목소리를 들으니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두근댔다.
전공을 살려 즐겁게 일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차정한의 매니저 일을 하며 겪은 일이나 직접 참여했던 일도 꽤 많았기에 무슨 일이든 즐겁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실장님에게 온 약속 날짜와 시간, 장소를 보고 얼른 답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