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2/43)

내가 떠나는 꿈을 그렇게 생생하게 꾼 데는 내 책임도 있었다. 연애하고 싶다는 차정한의 말에 긍정적인 대답을 하지 못했기에 거기서 가장 큰 불안을 느꼈을 것이었다. 물론 내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괜찮다고 말해도 나의 이런 미온한 태도가 차정한에게도 꽤 큰 불안을 주고 있다는 걸 알아 버려 마음이 무거웠다. 잠들 때만 해도 나와 차정한, 누구도 외롭지 않은 밤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러다 타겠다.”

“…어? 어! 아, 나왔어?”

갑자기 들리는 차정한의 목소리에 얼른 눌어붙으려는 밥을 잘 섞었다. 맛을 한 번 보고 조금 싱거운 것 같아 소스를 조금 더 넣고 마지막으로 볶았다.

“맛있는 냄새 나.”

“앉아 있어. 계란만 부치면 돼.”

미리 부드럽게 풀어놓은 계란물을 달구어진 팬에 조심스럽게 부었다. 얇게 부쳐 금세 익는 것을 찢어지지 않게 들어 그릇에 잘 놓고, 그 위에 볶음밥을 예쁘게 덜었다. 마지막으로 밥 위에 얇게 부친 계란을 덮고, 소스를 파는 것처럼 그럴싸하게 뿌렸다.

“다 됐어.”

찢어진 곳 하나 없이 예쁘게 만들어진 오므라이스를 차정한의 앞에 놓아주고 내 것은 조금 공을 덜 들여 만들었다. 군데군데 찢어지고, 모양도 조금 흐트러졌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잘 먹을게.”

“맛있게 먹어.”

차정한은 오므라이스를 아주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나는 먹는 것도 잊고 푹푹 퍼서 잘 먹는 차정한을 바라보았다. 내가 만든 걸 잘 먹는 차정한을 볼 때마다 너무 기분이 좋아서 먹는 걸 보기만 해도 배불렀다.

“왜 안 먹고 나만 봐. 뭐… 나는 네가 나 보니까 좋지만.”

“잘 먹는 거 보니까 좋아서.”

“진짜 맛있어. 얼른 먹어. 너 카페에서 뭐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일해서 말랐어. 많이 먹고 들어가서 바로 자. 일어나면 또 먹고, 침대 옆에 아예 과자랑 그런 것 좀 놔둬. 손만 뻗으면 바로 먹을 수 있게.”

“알았어. 많이 먹을게.”

씩 웃고 다시 맛있게 먹는 차정한을 보자 잔뜩 겁에 질린 것처럼 나를 잡고 울던 얼굴이 겹쳐졌다. 온몸이 다 아플 만큼 꽉 조여드는 심장에 나는 가슴 위를 한 번 손으로 꾹 눌렀다가 떼었다.

“정한아. 이제 기분은 좀 괜찮아?”

“괜찮아. 씻으면서 생각해 봤는데 꿈 맞더라. 아니, 꿈 아니면 진짜 안 돼.”

“꿈에서 우리 싸운 거야?”

“좋아한다고 말했는데 네가 웃었어. 거짓말이라고.”

“…….”

“좋아한다는 게 뭔지는 아냐고, 아마 죽을 때까지 사랑이 뭔지 모를 거라고…. 이 여자 저 여자 다가올 때마다 여지 주고, 밀어내지도 않고, 희망 고문 하더니 이제 그 타겟이 나로 바뀐 거냐고 그러는 거야. 나 진짜 그렇게 차가운 네 얼굴 처음 봤어.”

그 말을 듣는 나도 조금 충격인데, 꿈이라지만 그 말을 직접 마주한 차정한은 얼마나 충격이었을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애처럼 굴지 말라고, 질린다고……. 이제 나 안 좋아하고 다른 사람 좋아한다고… 네가 가 버렸어. 가지 말라고 내가 막 그랬는데 넌 가고, 그때 깬 거 같은데 옆에 진짜 네가 없는 거야. 와…. 꿈 아니구나 싶은 순간 그냥 식은땀이 확 쏟아지고, 춥고… 뜨겁고… 죽을 것 같고 막…….”

“지유현 진짜 못됐다. 어떻게 그래.”

내 말에 나를 바라본 차정한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못됐지. 솔직히 넌 그럴 만하잖아. 틀린 말 하나도 없지 뭐. 나 많이 찔렸나 봐. 그 찔리던 거 꿈에서 너한테 그대로 돌려받은 거고.”

차정한을 위해 가볍게 해프닝으로 넘어가고 싶었는데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그의 얼굴을 보니 심장이 자꾸 조였다가 풀렸다가 아팠다.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있는 줄은 몰랐기에 더 그랬다.

“그런 생각은 왜 해….”

“나 너한테 일주일짜리 믿음도 못 주잖아.”

“정한아….”

“알아. 너한테 보인 게 몇 번인데. 여자들 집으로 멋대로 찾아오고, 스캔들 나도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내가 왜 그쪽 마음까지 생각하냐는 그 말을 너한테 한 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난데.”

“…….”

“일주일도 못 버틸 것 같은 사람이랑 어떻게 연애를 하겠어. 내가 그걸 알아서 그래. 널 차라리 이해 못 하고 너한테 서운하면 마음이 편할 텐데, 하나도 안 서운하고 이해가 돼서… 그래서 내가 나한테 찔려서 그래.”

반쯤 남은 오므라이스를 숟가락으로 살살 헤집은 차정한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고 웃었다. 괜찮다는 듯 웃는 얼굴을 보며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아, 이렇게 진지한 얘기 하려고 한 건 아닌데.”

“…….”

“꿈에서는 내가 너 못 잡았거든. 가지 말라고 네 이름만 불렀어.”

“…….”

“그런데 현실에서는 나 너 절대 안 보내. 절대 안 놔줄 거야. 악몽 꾸고 나니 더 그래. 너 절대 아무 데도 못 가게 할 거야. 내가 그렇게 할 거니까 괜찮아. 너 안 보낼 거니까 지금은 괜찮아졌어. 내가 잘할 거야. 내가 너 없으면 못 사는 것처럼 너도 나 없으면 못 살게 그렇게 할 거야.”

“…….”

“실망 안 시킬게.”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알았다고 말하면 되는데 자꾸 마음이 진지하게 기울었다. 평소와는 조금 달라 보이는 모습에 차정한을 내가 할 수 있는 힘껏 위로하고 싶었다. 장난스럽지도 않고, 괜찮다고는 하지만, 전혀 괜찮아 보이지가 않았다. 이렇게까지 자신의 지난 행동들을 구체적으로 말하며 후회하는 걸 본 적이 없어 더 그랬다. 말로는 이 감정을 전할 수 없을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 차정한에게 다가가 앉은 그의 머리와 어깨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네가 잊고 있는 게 있는데….”

“내가?”

“너 사랑한다고 고백한 거 나거든…. 안 놔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말라고, 나 없이 못 살게 만들 거라고 그런 말은 내가 너한테 해야지.”

품에 얼굴을 묻고 있다가 나를 올려 본 차정한이 숨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진지한 건 좋지만, 어쩐지 풀 죽은 것 같은 모습에 속상해 다시 머리를 꼭 끌어안자 차정한이 품으로 머리를 비비적댔다.

“내가 다 할게. 너 안 놓는 것도, 못 가게 하는 것도, 나 없이 못 살게 하는 것도 내가 다 할 테니까 넌 나랑 이렇게 있기만 해 줘.”

“…….”

“아니다. 있기만 하면 안 되지.”

“응?”

다시 고개를 든 차정한이 눈을 맞춘 채 내 허리를 팔로 감아 끌어당겼다. 나는 차정한의 다리 사이로 조금 더 들어가 섰다.

“사랑도 해 줘.”

이렇게 사랑스러운 차정한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마주 닿는 웃음과 서로를 꽉 끌어안은 힘에 비로소 필요 없던 감정들이 빠져나갔다.

#69

?

?

차정한은 집에서 나가서 차에 타자마자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나는 소파에 앉아 차정한과 계속 별 내용은 없지만, 이어지는 톡을 주고받았다. 샵에 도착하고, 메이크업을 받는 중에도 차정한은 내게 이것저것 말을 걸었다. 귀찮지는 않지만, 청소도 해야 하고, 나도 나갈 준비를 해야 해서 바로바로 답을 하기 힘들었다.

씻고 나온다고 미리 말을 하고 30분 정도 씻고 나오자 톡이 백 개도 넘게 쌓여 있었다. 나는 드라이어를 든 채 차정한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마지막에는 메이크업을 다 하고, 머리까지 만진 차정한의 사진이 있었다. 오늘은 팬들이 좋아하는 ‘작정한’ 스타일이었다.

머리를 말리고 침대에 걸터앉아 또 한 30분을 톡만 했다. 촬영장에 도착해서 이따 시간이 나면 전화한다는 차정한에게 촬영 잘하라고 답하고, 얼른 옷을 갈아입었다. 누나가 오려면 아직 시간이 꽤 남았지만, 미리 집에 가서 기다리기로 했다. 생일 이후로 처음 뵙는 거라 그냥 부모님과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보내고 싶었다.

현관을 나서는데 진동이 울렸다. 차정한인가 싶어 확인하니 김원우였다. 꽤 오랜만에 보는 이름이라 엘리베이터에 타며 전화를 받았다.

- 야, 지유현. 살아는 있냐?

“오랜만이네. 넌 잘 살고 있고?”

- 야, 말도 마. 진짜 내가 일 때려치우든가 해야지. 진짜 요즘 살 맛이 안 난다. 너도 그렇고 다른 놈들도 그렇고 다 바쁜 척하고 연락도 없고.

“난 진짜 바빴어.”

- 차정한 뒤치다꺼리하느라?

“끊을까.”

- 알았어, 알았어. 안 해. 차정한 뭐 드라마 한다며? 그래서 너도 요즘 바빠?

차정한 이야기가 안 나올 수 없다는 건 알지만, 매번 이렇게 차정한 때문에 내가 뭔가 꼭 손해를 보는 것처럼 타인이 말할 때마다 기분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전혀 손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왜 옆에서 내가 선택했던 길을 깎아내리는 건지 솔직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누나 카페 일 좀 대신 하느라 바빴어.”

- 아, 맞아. 누님 카페 하시지. 그럼 차정한 매니저 일은 이제 관둔 거야?

“응. 요즘은 안 해.”

- 싸웠냐? 갈라선 거야? 와, 그렇게 붙어 다니더니…….

“미안한데 안 싸웠고, 안 갈라섰고, 지금도 같이 지내.”

- 그쯤 했으면 그냥 결혼해라.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김원우의 목소리에 웃음이 났다. 나는 택시에 올라 집 주소를 말하고, 계속 뭔가를 말하는 김원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 아, 내일 시간 되냐?

“내일? 응. 약속 없어.”

- 형님 생일이시다. 밥에 술까지 살 테니까 참석만 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아, 맞다. 너 이쯤 생일이지. 그래, 알았어. 장소랑 시간 톡으로 보내 줘.”

- 야, 차정한 달고 나오지 마라. 걔 나 싫어해. 나도 별로고.

“정한이 촬영으로 바빠서 어차피 시간 없어.”

괜히 차정한을 안 좋게 말하는 게 싫어 나도 불퉁하게 대답했다. 김원우는 그런 내 반응을 아는지 모르는지 듣던 중 반가운 말이라며 자꾸 심기를 건드렸다. 그 뒤로 몇 마디 의미 없는 말들이 이어지다가 누가 왔는지 김원우는 장소와 시간을 내일 낮에 톡으로 알려 주겠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었다.

차정한이 어디가 어때서 그러는 걸까. 잘 알지도 못하면서 차정한에 대해 마음대로 말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가서 하나씩 다 잡고 우리 정한이는 그런 사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전에는 안 좋은 댓글이 달리면 거기에 하나하나 반박 댓글을 달기도 했었다. 하루는 내가 아무리 정정을 하고, 정확한 팩트를 말해 줘도 자기가 듣고픈 쪽으로 해석을 하는 게 답답하고 화가 나서 눈물이 다 났다.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아 울면서 댓글을 다는데 씻고 나온 차정한이 그런 내게 다가와 댓글들을 쭉 보더니 내가 쓰던 말을 지우고 한 줄을 적었다.

그래 넌 믿고 싶은 대로 믿어.

그걸 끝으로 노트북을 덮은 차정한이 서럽고 답답해 우는 나를 보고 고개를 막 기울여 애교를 다 부리며 웃었다. 평소에는 잘도 화내고 까칠하게 굴더니 이런 일에는 화도 안 내고 웃는 차정한을 보니 더 화가 나고 속상해 한참이나 울었다. 차정한은 그런 나를 달래며 말했다.

‘어차피 사람들은 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되어 있어. 네가 애쓸 필요 없어. 너만 울고, 너만 다치고, 너만 화나잖아, 지금. 저거 단 새끼는 지가 이겼다고 좋아할걸.’

‘넌 화도 안 나?’

‘나지. 널 울렸는데.’

차정한은 내 눈물을 닦아 주며 등을 토닥이고 또 토닥였다. 나를 울게 해서 화난다는 그 말에 심장은 이미 곤두박질쳤고, 사랑은 모습을 드러내려 마구 몸집을 키웠다.

‘저런 것들한테 네 감정 주지 마.’

‘…….’

‘싹 다 고소하면 그만이야. 당연히 합의는 없고.’

‘…….’

‘감히 우리 유현이를 울려. 내가 다 혼내 줄게.’

장난기가 섞인 다정한 목소리와 표정이 아직도 눈앞에 선명했다. 그날 이후 나는 차정한에 대해 멋대로 해석하고, 말하는 댓글을 봐도 더는 울지 않았다.

차정한은 그렇게 결정적인 순간에 나보다 더 의연하고 어른스러웠다. 종종 그에게 생각지도 못한 위로를 받고, 울다가도 결국, 차정한 덕분에 웃었다. 그렇게 속이 깊고 나보다도 생각이 단단한 차정한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성격이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싫었다. 김원우나 다른 동창들도 그래서 만나는 게 불편했다.

“…….”

그래도 생일이라는 걸 알아 버린 이상 나간다고 해 놓고 안 나갈 수도 없고 조금 걱정이었다. 부디 내일 차정한의 촬영 스케줄이 빡빡한 날이기를 바랄 뿐이었다.

* * *

부모님 것은 물론이고 나와 차정한 선물까지 잔뜩 사 온 누나 덕분에 양손이 무거웠다. 잘 어울릴 것 같은 셔츠나 니트 같은 것을 볼 때마다 안 살 수가 없었다며 누나는 옷을 하나씩 꺼내 다 보여 주었다. 나는 그 옷을 보면서도 내게 어울리는 생각보다 차정한에게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먼저 했다.

집까지 데려다준다는 누나와 매형의 말에 나는 얼른 택시를 잡았다. 장거리 비행으로 피곤할 텐데 나까지 더 피곤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누나는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다며 나를 안고 등을 토닥였다. 나는 피곤할 두 사람을 더 붙들면 안 될 것 같아 얼른 택시에 올랐다.

가족들이랑 저녁을 먹느라 휴대폰 확인을 못 한 사이에 메시지가 스무 개도 넘게 쌓여 있었다. 부재중 전화도 있었는데 그 역시 차정한이었다. 평소라면 받을 때까지 전화를 했겠지만, 내가 집에 가족들과 있다는 것을 알기에 더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전화를 해 볼까 하다가 촬영 중일 것 같아 참았다. 아마 또 여유가 있을 때 다시 톡을 보내거나 전화를 할 것이었다. 차정한이 일할 때는 내가 먼저 거는 것보다 차정한이 거는 것을 받는 게 나았다. 혹시라도 내가 촬영에 방해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막히지 않아 차정한의 아파트까지 아주 빠르게 도착했다. 나는 두 손 가득 빵빵한 쇼핑백을 하나씩 들고 택시에서 내렸다.

“안녕히 가세요.”

기사님께 인사를 하고 문을 팔꿈치로 밀어 닫았다. 제법 무거울 정도라 쇼핑백을 고쳐 쥐는데 눈앞으로 손 두 개가 쑥 다가왔다.

“이게 다 뭐야?”

놀라서 고개를 드니 차정한이 나를 보고 씩 웃었다. 이 시간에 여기 있을 리가 없는데 분명 차정한이었다.

“촬영 일찍 끝났네?”

“감독님이랑 이혁준이랑 싸우고, 어수선해서 일찍 접었어.”

“왜 싸웠어?”

“이혁준이 발 연기 해서 다시 찍어야겠다고 하는데 그걸 왜 다시 찍냐고 대들다가. 그거 미쳤지. 자세가 안 돼 있어. 그래서 감독님 뚜껑 열리고, 스태프들 다 화나서 조명 감독님에 촬영 감독님에 다 나와서 한마디씩 거들고…. 와, 진짜 살벌했어.”

“넌 뭐 말 거들고 한 거 아니지?”

“난 저만치 떨어져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처럼 얌전히 대본 외웠어.”

예전이라면 먼저 나서서 이혁준에게 그따위로 하면 안 된다고 했을 텐데 그동안 그렇게 굳이 앞장서서 상황을 키울 필요도 또 시작한 사람도 아닌데 독박을 쓸 필요도 없다고 수도 없이 말한 보람이 있었다. 나는 자유로워진 손으로 차정한의 모자 위를 쓰다듬었다.

“잘했어. 이제 진짜 다 컸다.”

“크기는 진작 컸지. 키도 너보다 크고, 손도 너보다 크고, 또…….”

“…또?”

말을 흐리는 걸 보니 뭔가 불안했다. 차정한은 별로 살피는 것 같지도 않게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 내 얼굴 앞으로 고개를 숙이며 불안하게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었다.

“또 뭐가 큰지는 나보다 네가 더 잘 알잖아.”

“…이, 이상한 말 좀 하지 마.”

“왜, 뭐가 이상한 말인데. 뭐가 큰데? 나 뭔지 말 안 했는데 왜 그래. 어, 나 못 보네. 왜 다른 데 봐? 무슨 생각을 하면 눈을 피해? 어, 얼굴 빨개졌다.”

차정한이 말을 하면 할수록 귓가가 뜨거워지고 체온이 확 올랐다. 나는 짓궂은 말은 다 해 놓고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천진하게 웃는 차정한을 조금 노려보다가 뒤돌았다.

“데이트하자.”

등 뒤에서 또 예상하지 못한 말이 들렸다. 귓가에 머물던 뜨거움이 몸속으로 확 스며들어 이제 심장이 미친 듯 뛰기 시작했다.

“…뭐?”

“나 너랑 데이트하려고 기다린 거야.”

“…아…….”

그러고 보니 차정한이 여기 나와 있던 게 자연스럽지 않기는 했다. 보통 동윤 형이 주차장으로 꼭 들어가 세워 주고 가는데 차정한이 여기 있다는 것은 일부러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밖에 설명이 되지 않았다.

“차로 한 바퀴 돌자. 내일도 오후 촬영이거든. 상황 안 좋으면 밀릴 수도 있고.”

“여기서 얼마나 기다린 거야? 추운데….”

“한 시간쯤?”

“한 시간이나? 톡 보내지. 왜 기다린다는 건 안 보냈어. 난 너 촬영 중인 줄 알고….”

“어머니 아버지랑 시간 보내는데 내가 기다린다고 하면 너 마음 불편할 거 아냐.”

한 번씩 불쑥 튀어나오는 차정한의 속 깊고 어른스러운 순간에 나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심장이 조각난 것처럼 막 이곳저곳으로 떨림을 퍼뜨렸다.

“이건 뭔데 이렇게 무거워?”

“아…. 누나가 우리 선물이라고 옷을 주더라고. 예쁜 거 볼 때마다 우리 생각나서 다 산 거래. 똑같은 거 두 벌씩 있어.”

“커플티네. 유주 누나가 뭘 좀 안다니까. 다음에 어머니 아버지 뵈러 갈 때 똑같은 거 입고 가자.”

“…그건 좀.”

“왜. 나랑 커플티 입는 거 싫어?”

“그게 아니라…. 집에서는 몰라도 입고 나가고 하는 건 좀…….”

“아, 집에서 둘이 있을 때만 입자고? 알았어.”

그런 의미로 말한 건 아닌데 아무래도 차정한의 화법에 말려든 것 같았다. 차정한은 이미 그렇게 결정이라도 난 것처럼 웃으며 한 손으로 그 무거운 봉투를 두 개 다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내 손을 잡았다.

“하나 줘. 무겁잖아.”

“주차장까지만 가면 되는데 뭐. 유현이 넌 내 손 잡아. 왜 손에 힘 안 줘.”

나는 코트 소매 아래로 내 손을 쥔 차정한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 내가 손을 잡자 그제야 차정한은 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동안에도 차정한은 손을 놓지 않았다. 손을 잡고 가는 게 조금 어색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해서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차정한이 혼내듯 내 손을 더 꼭 가두며 쥐었다.

쭉 세워진 차 중에서 오늘은 눈에 잘 뜨이지 않는 세단을 선택한 차정한은 트렁크에 옷이 든 봉투들을 넣고 조수석에 타는 나를 보다가 문을 닫았다. 그리고 얼른 운전석으로 올랐다.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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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없는 한적한 대교 위를 달리니 속이 탁 트였다. 드라이브와 잘 어울리는 노래가 차 안으로 울려 퍼지고 살짝 연 창밖에서 들어오는 차가운 공기에 너무 기분이 좋았다.

너무 안이 추운 것 같아 창을 닫는데 진동이 울렸다. 음악 소리 사이에서도 그걸 들은 건지 차정한이 흘끔 내 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김원우의 이름이 쓰인 것을 보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내일 장소와 시간을 알려 준다더니 예약을 바로 한 건지 식당 이름과 시간이 적혀 있었다. 차정한은 누구한테 온 건지 묻고 싶은 것처럼 나를 흘끔대면서도 먼저 묻지 않았다.

“김원우야. 내일 생일이래.”

“와, 내일이 김원우 생일이야? 정보 한 번 투머치 하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결혼기념일을 김원우가 아는 거랑 비슷한 수준인데. 그래서 생일이라 뭐 내일 노래라도 해 달래?”

“생일이니까 밥 산다고 내일 나오래.”

“뭐? 너 불러내는 방법도 가지가지네. 가지 마. 나도 내일 생일이야. 내일은 내가 너 더 좋아할 거거든. 널 더 좋아하는 나로 다시 태어난 생일이니까 가지 마.”

말에 막힘이 하나도 없었다. 원래도 말 잘하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얼마나 말을 잘하는지 억지 가득한 말인데도 어쩐지 일리가 있게 느껴질 정도였다.

“전에도 그냥 생일 소소하게 챙기고 했잖아. 선물 같은 건 안 하고 모여서 밥 먹고, 술도 한잔하고.”

“김원우는 한 달에 한 번씩 생일이 돌아오는 것 같은데. 그리고 그거 생일엔 꼭 내가 일이 없어. 간만에 집에 있는데 너는 김원우 만나러 나가고, 나 혼자 기분 잡쳐서 있던 기억이 아직도 가시지를 않았는데 또 생일이야?”

“시간 빠르지.”

“아무튼, 안 돼.”

“…왜. 내일 간다고 했어.”

“왜냐니. 안 되니까. 너 가는 거 싫어.”

차정한은 앞을 본 채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솔직히 차정한이 싫다는 일은 안 하고 싶었지만, 이미 약속을 했고, 친구들을 매일 만나는 것도 아니고 몇 달에 한 번 만나는 건데 이 정도는 차정한이 이해해 줬으면 좋겠는 마음도 있었기에 나도 조금 더 버텼다.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말하면 안 갈게.”

“날이 춥잖아.”

“내일 날 풀리나 봐.”

“늦게 들어올 게 뻔하니까.”

“내가 애도 아니고…. 늦게 들어와도 새벽에 막 들어온 적도 없었어. 그거 때문에 너 속 썩인 적도 없고.”

“전화, 메일, 문자에 톡까지 생겨서 연락하기 쉬운 시대에 살면서 굳이 만날 필요가 있을까. 톡으로 기프티콘이나 한 장 보내 줘.”

“…실패.”

“아… 씨발.”

핸들을 손바닥으로 소리 나게 내리친 차정한이 한숨과 함께 욕을 내뱉었다. 운전하는 그를 바라보자 차정한이 신호에 멈춰 서며 나를 바라보았다.

“너한테 한 거 아니야. 논리적으로 이유 못 댄 나한테 한 거야.”

“이번에는 벌써 간다고 말을 해 버려서 안 가기가 좀 그래. 다음에는 네가 싫다면 안 갈게.”

“생각해 볼게. 일단 뭐 좀 마시자. 열 냈더니 목말라.”

옆으로 보이는 공원 근처 카페 주차장으로 차를 세운 차정한이 안전벨트를 풀었다. 나는 얼른 그런 차정한의 손을 잡았다.

“들어가서 마실 거야?”

“사서 공원 갈까? 밤이라 사람 없고 좋을 텐데.”

“그러자. 내가 사 올게. 여기 있어.”

차정한이 내리기 전에 얼른 먼저 내려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목마른 차정한을 위해 평소에 즐겨 마시는 탄산수와 그냥 생수 한 병을 사고, 추운 공원에서 산책하며 마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같이 주문했다. 나는 따뜻한 애플티를 골랐다.

“계산해 드리겠습니다.”

“아, 이것도 같이 주세요.”

계산대 옆에 놓인 큰 초코 쿠키와 마카다미아 쿠키도 하나씩 집어 같이 계산했다. 별로 복잡하지 않은 주문이라 그런지 바로 나온 음료 캐리어를 들고 카페를 나섰다.

차 문을 열자 차정한이 손을 뻗어 커피와 종이봉투를 받아들었다. 커피가 쏟아지지 않게 그의 손으로 잘 간 것을 본 뒤에야 차에 올랐다. 나는 종이봉투 안에서 탄산수와 물을 꺼내 차정한에게 보여 주었다.

“뭐 마실래?”

“뭐가 많네.”

“공원에서 마시기에는 따뜻한 게 좋은데 너 목마르다며. 그래서 탄산수랑 물 사 왔어. 먼저 마시라고.”

손에 들린 물을 골라 가져간 차정한이 다른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이러는데 내가 널 어떻게 안 좋아해.”

차정한의 말은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어떻게 너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 생각은 차정한을 보며 내가 그동안 내내 한 것이었다. 이렇게 다정한 너를, 이렇게 따뜻한 너를, 웃는 게 예쁜 너를, 습관처럼 나를 찾아 다가오는 너를. 차정한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수히도 많았다. 내가 내내 생각했던 그 말을 차정한에게 듣는 날이 오다니…. 비현실적이었다.

물을 몇 모금 들이켜는 차정한을 보다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얼른 시선을 내려 종이봉투 안에 있는 쿠키를 꺼내 콘솔 박스 안으로 놓았다. 괜히 잘 놓인 따뜻한 컵을 만지작대는데 차정한이 몸을 기울였다.

“눈 마주치면 한 번씩 꼭 이렇게 피하지.”

목소리가 너무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내 턱을 쥐어 살짝 올리는 차정한의 손길을 따라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미소 지은 차정한이 가볍게 입술을 마주했다.

차정한의 입술이 조금 장난스럽게 내 아랫입술을 살짝 물어 늘렸다. 혀는 섞이지 않고 입술만 몇 번이고 맞물리는 키스에 나도 차정한의 입술을 같이 머금었다. 서로의 입술을 물었다가 놓으면 조금 더 깊게 맞물렸다. 깊고 젖은 키스가 아닌데도 충분히 뜨겁고… 두근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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