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감기가 걸리거나 할 느낌은 아닌데 그냥 몸이 조금 피곤했다. 여기저기 쑤시듯 아프기도 하고, 양쪽에 멍든 걸 확인했던 허리도 움직일 때마다 아파 앉았다 일어나는 것도 조심해야 했다. 물론 다리 사이도 여전히 미약하게 욱신댔다.
몸이 자꾸 늘어져 카운터 옆 기다란 바에 이마를 대고 잠시 엎드렸다. 눈을 감자 아침에 내 눈으로 본 멍든 허리가 떠올랐다. 세상에 얼마나 손힘이 세면 그렇게 허리에 멍이 들 수 있는 걸까. 이따 씻을 때 보게 될 텐데 솔직히 보기가 무서웠다. 아침보다 색이 더 진해져 있을 것을 떠올리니 안 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이마로 진동이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들고 한쪽에 놓아둔 휴대폰을 들어 얼른 전화를 받았다.
“응, 정한아. 끝났어?”
- 어, 지금 끝나고 나왔는데 와…. 갇혀서 일하는 사이에 이게 다 뭐야. 스태프들이 눈 장난 아니라고 하긴 하던데… 진짜 장난 아니다.
“아침부터 계속 내렸어. 기사 보니까 빙판길 조심하래. 기온 떨어져서 다 동파되고 난리인가 봐. 거기에 눈까지 와서 길도 미끄럽고. 그러니까 오늘은 오지 말고, 동윤 형이 데려다주면 들어가서 쉬어.”
- 너 보지 말고 집에 혼자 있으라고? 싫어.
“내일 보면 되잖아. 위험하게 무슨 운전을 해서 와.”
- 그럼 형한테 카페에 내려 달라고 할게. 그럼 되지?
“갈 때는 어떻게 가려고….”
- 택시 타도 되고…. 뭐….
차정한이 갑자기 목소리를 낮춰 귓속말하는 것처럼 소곤댔다. 나는 왜 갑자기 목소리를 작게 하나 싶어 귀를 더 기울였다.
- 너랑 자고 가도 되고.
차정한이 내 귀에 입술을 대고 속삭이는 것 같은 느낌에 귓가가 화끈거렸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차정한이 작게 웃다가 동윤 형에게 카페에 내려 달라고 말했다.
- 도착하면 딱 마감 시간이겠다. 오늘 홍보 영상 촬영만 하는 줄 알았는데 이것저것 뭐 할 게 많더라. 이렇게 늦게 끝날 줄 몰랐는데.
“피곤하겠다.”
- 그래서 너 보러 가잖아. 금방 갈게.
“응. 조심해서 와.”
전화를 끊고 마감 준비를 시작했다. 8시 반부터 이미 손님이 하나도 없기에 오늘은 이대로 마감하면 될 것 같았다.
홀 청소를 먼저 싹 하고, 주방까지 깨끗하게 치우고 나니 밴이 들어오는 게 보였다. 나는 딱 마시기 좋게 적당히 식은 차가 든 종이컵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추운데 왜 나와? 그렇게 얇게 입고.”
“아, 이거 형 드리려고. 잠깐만.”
차 안에서 인사하는 동윤 형에게 따뜻한 차를 내밀었다. 고맙다는 형과 가볍게 인사하는데 차정한이 옆에서 내 에이프런을 슬쩍슬쩍 잡아당겼다.
“조심히 가세요, 형.”
꿋꿋하게 인사하고, 밴이 가는 것을 본 뒤에야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나를 따라 들어오며 문을 잠근 차정한이 문을 가리는 블라인드를 아래로 쭉 내렸다. 나는 그 옆쪽으로 돌며 블라인드를 하나씩 내렸다.
차정한이 블라인드를 내리는 내 뒤를 따라다녔다. 그리고 마지막 블라인드를 내렸을 때, 나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아침에 현관에서 그랬던 것처럼 몸을 꽉 결박하듯 감싸고 배 위에서 겹쳐진 그의 두 팔에 몸이 또 굳었다.
“형이 아니라 나를 먼저 봐야지. 왜 형만 봐.”
“…형 여기까지 오셨는데 인사 안 할 수는 없잖아.”
“아는데, 다 아는데 그래도 너한테 내가 제일 첫 번째였으면 좋겠어.”
“…….”
“내가 얼마나 종일 보고 싶었는데….”
연인… 같았다. 끌어안는 두 팔이 아침보다 더 자연스러웠다. 어제의 섹스 때문일까. 섹스 전에도 차정한은 다정했지만, 지금과는 또 조금 달랐다. 지금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연인의 이름을 가진 것처럼 느껴졌다.
“유현아, 넌 나 안 보고 싶었어?”
목덜미로 목소리가 번졌다. 나를 끌어안은 채 고개를 내린 차정한이 목덜미와 귓가, 뺨에 가볍게 키스했다.
“…….”
내 귓가에 조금 더 길게 머물던 차정한이 배 위에 있던 손을 하나 들어 내 턱을 어깨 쪽으로 돌렸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키스였다. 차정한이 카페로 나를 찾아오고 난 뒤로 우리는 만날 때마다 키스했다. 닿지 않는 순간이 없고, 늘 뜨거웠다.
차정한은 내 입술을 부드럽게 물었다가 놓으며 장난쳤다. 입술을 댄 채 씩 웃다가 그제야 조금 급한 듯 파고들어 혀를 옭아맸다.
뒤에서 나를 끌어안은 채 어색하게 있는 내 손을 잡아 올린 차정한이 꼭 혀가 움직이는 것처럼 손가락을 만지기 시작했다. 혀가 내 입속에서 움직이는 감각과 손가락 사이로 차정한의 손가락이 얽혀드는 감각이 뒤섞이며 숨이 달아올랐다.
“하아….”
깊게 엉켜 있던 혀가 풀리고, 부드럽게 입술이 몇 번 더 맞물렸다가 떨어졌다. 차정한이 팔을 풀어내며 나를 돌려세웠다.
“뭐 따뜻한 거 만들어 줄까?”
“지금도 너랑 있어서 넘치게 따뜻해.”
자연스럽게 내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가락을 밀어 넣어 꽉 쥔 차정한이 의자를 하나 빼서 나를 먼저 앉히고, 옆으로 앉았다. 요즘 나와 차정한은 매일 너무나 똑같았다.
말을 할 때도 차정한은 내 손을 놓지 않았다. 자신의 큰 손에 내 손을 가두듯 잡고 다른 손으로 내 손가락을 하나씩 장난스럽게 건드리거나 손가락끼리 얽어 쥐는 것을 반복했다. 그의 손이 내 손가락 사이를 문지르며 얽힐 때마다 말이 한 번씩 끊겼다. 이 상황이 이상하고, 당황스러워도 나는 그의 손길에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차정한은 그런 내 얼굴을 보며 씩 웃거나, 장난기 전혀 없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 뒤에는 어김없이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자고 갈까?”
요즘 차정한이 내게 하는 말의 대부분은 나와 닿고, 마주하는 것들에 대한 것이었다. 나와 닿아서 좋고, 닿아서 따뜻하고, 또 닿아서 살 것 같다는 그의 말을 들을 때마다 감정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차정한은 나와 닿고 싶은 그 감정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물론 사랑하면 스킨십을 하고 싶은 게 맞지만, 우리가 친구일 때도 차정한은 내게 닿는 것을 좋아했었다. 그는 손에 닿는 따뜻함에 휩싸여, 가장 중요한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의 닿음은 사랑 때문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그 사실을.
“…나랑 자고 싶어?”
“응.”
말이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차정한은 나도 같은 생각이라고 느낀 건지 그대로 다시 다가와 입술을 머금었다. 요즘 차정한은 말보다 행동이 우선이고, 우리는 대화가 줄어들고 스킨십만 늘어나 있었다.
분명 뭔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59
?
?
“……잠깐만.”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는 잠깐을 이번에는 내가 먼저 말했다. 차정한은 안달이 난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의 마지막 이름이 친구도 사랑도 아닌 섹스만 하는 파트너가 될 것 같아 괴로웠다. 차정한은 분명 너무나도 쉽게 달아오르는 감각에 빠져 있었다. 그가 나한테 원하는 게 이런 거라도 있어 다행인 건가 생각하다가 관두었다.
“왜.”
다시 내 턱을 그러쥔 차정한이 얼굴을 가까이했다. 가라앉았던 기분과 불편함, 그리고 차정한을 향한 낯선 감정들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한 달 동안 감각에만 이끌려 가다가는 나도 차정한이 온기만을, 그 온기라도 놓치고 싶지 않아 매달리게 될 것 같았다.
“나랑 또 뭘 하고 싶어?”
“키스.”
입술에 가볍게 키스한 차정한의 어깨를 잡아 의자에 제대로 앉혔다. 차정한은 왜 그러냐는 듯 궁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랑 자고 싶고, 키스하고 싶고… 또?”
“손도 잡고 싶고, 같이 있고 싶어. 여행도 가고 싶고, 쉬는 날에 전처럼 너랑 아무것도 안 하고 뒹굴뒹굴하고 싶기도 해. 그러다가 같이 밥도 먹고, 같이 영화도 보고, 또 졸리면 같이 자고…. 하고 싶은 거 많지. 그걸 어떻게 다 말해.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한 달 지나고 말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지금 하는 게 맞는 것 같아.”
“무섭게 왜 그래.”
차정한이 나를 달래듯 테이블 위에 놓인 내 손을 잡아 부드럽게 쥐었다. 나는 그 손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요즘 너는 인사보다도 키스를 먼저 해.”
“…….”
“닿고 싶었다는 말을 자주 하고, 나랑 닿는 게 너무 좋다는 말도 많이 해. 그래서 요즘 우리는 말보다 그냥 그렇게 닿아 있는 시간이 더 많아. 어제도 그렇고.”
“…….”
“섹스가… 싫었다는 거 아니야. 싫을 리가 없지. 좋았어. 좋았는데 좀 무서워. 한 달 뒤에 그냥 아무 말도 서로 안 하고… 계속 섹스만 할 것 같아서 그게 무서워.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
“유현아.”
“…외로워서 날 찾는 것 같아. 내가 없으면 허전하고, 견디기가 힘들어서.”
저번처럼 내 말을 듣고, 자신도 모르던 사실을 알아 버려 충격받은 얼굴을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외로워서…. 내가 필요한 거고.”
“…….”
“…나랑 닿고, 키스하고… 섹스할 때마다 외롭지 않은 거지.”
“…….”
“나도 너랑 하는 거 좋아. 다 좋은데… 이러다 보면, 이렇게 나도 오늘만, 오늘만… 하다 보면… 한 달 뒤에 너랑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관계가 되어있을 것 같아.”
“섹스 파트너?”
차마 입으로 소리 낼 수 없는 말을 차정한의 목소리로 들으니 머릿속이 엉망이 되었다. 엉망이 된 머릿속에서 생각이 무너지니 마음까지 따라 와르르 무너지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솔직히 우리한테 한 달은 유예일 뿐이야.”
“…….”
“시간을 번 거지, 내가. 끝내려는 너를 붙잡고 한 달이라는 시간을 겨우 얻어낸 거야.”
“…….”
“시간은 지금도 가고 있고, 나도 그 시간의 끝이 무서워. 한 달 동안 내가 뭘 얼마나 너한테 보여 줄 수 있을까, 너랑 뭘 얼마나 할 수 있을까 그 생각만 하면 자는 것도 아까워.”
“…….”
“그래, 나 너랑 자고 싶어. 처음 잤을 때도 좋았고, 어제는 진짜 눈 뒤집히게 좋았어. 종일 그 생각만 나더라. 네가 나한테 매달리던 거, 너랑 닿던 거…. 나 너랑 키스하는 것도 좋아. 그래, 인사보다 키스를 먼저 해. 하고 싶어 미칠 것 같아서 어쩔 수가 없어.”
섹스 파트너라는 말에 충격이 컸던 건지 솔직히 차정한의 말이 곱게 들리지 않았다. 겨우 얻은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한 많이 섹스하고 싶다는 말로만 들렸다.
“내가 얼마나 너한테 미쳤는지 알아?”
“…….”
“섹스 파트너 될까 봐 무섭다는 널 보면서도 나 너랑 키스하고 싶어.”
“……너 진짜 안 되겠다.”
나는 차정한을 잡아 일으켰다. 대단한 힘이 아닌데도 차정한은 순순히 내게 잡혀 일어나 문까지 끌려갔다. 블라인드를 걷고, 문을 열었다. 아직도 바깥에는 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가. 우리 진짜 안 보는 게 낫겠다.”
바깥으로 나가는 차정한을 보다가 문을 닫고, 다시 블라인드를 내렸다. 편하지 않은 머릿속이 화끈거리고 몸을 갑자기 움직여 그런지 여기저기가 욱신댔다. 우리가 앉았던 의자를 정리하고 조명을 전부 끈 뒤에 방으로 들어갔다.
울고 싶을 줄 알았는데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그냥 처음부터 이렇게 될 가능성이 가장 컸다는 생각이 전부였다. 어쩌면 나는 알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처음 내가 차정한에게 자자고 말을 하고, 차정한이 내 말을 들어주었을 때부터 이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차정한은 나여야 한다고 말하지만, 내가 없으면 그의 외로운 마음을 결국, 다른 누군가가 채워 줄 수 있을 것이었다. 내가 사랑을 소리 낸 순간부터 친구와 연인 그 무엇도 될 수가 없었다. 알면서, 다 알면서 차정한을 떨칠 수가 없어서,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그의 손길을 놓을 수가 없어서 여기까지 와 버렸다. 차정한의 잘못이 아니라 다 나의 잘못이었다.
“…….”
섹스 파트너. 기우에 생각만 하는 거랑 직접 듣는 것은 정말 너무나도 달랐다. 나는 차정한이 정확하게 소리 내던 그 말을 내내 떠올렸다.
한 달이라는 시간, 차정한의 말처럼 결정을 뒤로 미룬 그 시간을 나 역시 뿌리치지 못했다. 그와 끝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끝’이라는 말이 너무 무겁고, 날카로웠기 때문이었다.
‘시간은 지금도 가고 있고, 나도 그 시간의 끝이 무서워.’
차정한이 말한 것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가고 있었다. 함께 있을 수 있어 너무나도 소중하고, 또 끝을 향해 가고 있어 너무나도 조마조마한 그 시간이.
그렇게 꼬여서 차정한을 보냈으면 마음 편하게 있어야 하는데 조금도 편할 수가 없었다. 앉아도 불편하고, 서도 불편했다. 책을 보려고 펼쳐도 글 한 줄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인드 컨트롤 책은 정말 괜히 산 게 확실했다.
“…….”
차도 없는데 택시를 불러 갔을까. 눈도 오는데 너무 아무 준비도 없이 내쫓은 건 아닌지 이제야 걱정이 됐다. 저질렀으면 웬만하면 후회하지 않는 성격인데 오늘은 조금 후회가 됐다. 차정한이 추위에 약하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서로에 대해 잘 모르면 걱정거리가 줄어들 텐데 우리는 서로를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래서, 차정한을 너무 잘 알아서 더 변해 가는 그의 행동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그동안 익숙한 차정한의 모습이 아직도 내 앞에 선명히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지끈대는 머리로 넋을 놓고 있다가 이러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주방으로 나가 작은 불 하나를 켜고 찻물을 올렸다.
“…….”
물이 끓는 동안 카운터에 두고 들어갔던 휴대폰을 확인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내가 안 것은 아직도 눈이 오고 있다는 것과 차정한을 그렇게 내보낸 지도 한 시간이 지났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눈이 이렇게 하루 종일 오는 걸까. 궁금하기도 하고, 속이 답답하기도 해서 문으로 가 블라인드를 반쯤 걷었다. 정말 흩날리는 눈이 문밖으로 보였다. 그리고…….
“…….”
문에 기대고 있는 뒷모습이 보였다.
“…….”
내가 아는 뒷모습. 나의 차정한.
“…….”
“…….”
블라인드 올라가는 것을 느꼈는지 차정한이 뒤를 돌아보았다. 더는 차정한을 혼자 추운 곳에 둘 수 없어 얼른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춥게 왜 그러고 나와.”
한 시간을 이 추위에 있어 놓고 지금 막 나온 내가 추울까 봐 걱정하는 차정한을 보자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너 진짜, 진짜… 나한테 왜 그래…. 정한아. 너 진짜 왜 그래…. 네가 지금 내 걱정을 왜 해. 여기서 왜 안 가고 이러고 있어….”
“억울해서.”
“…….”
“갈 때 가더라도 네 오해는 풀고 가려고.”
“그럼 열어 달라고 하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생각 정리가 필요했어. 생각이 너무 많아서 추운 줄도 몰랐어. 그러니까 울지 마.”
내 손을 잡는 차정한의 손이 너무너무 차가웠다. 내 손은 따뜻한데 차정한의 손은 차가워서 너무 마음이 아팠다. 속상해서 정말 죽을 것 같았다.
“계속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 너랑 자고 싶어서 내가 이러는 건지. 너랑 하고 나니까 눈 뒤집히게 좋아서 나 혼자 연애 감정이라고 착각하고, 한 번 더 자려고 수작 부리는 건가… 그 생각을 했고, 네 말처럼 내가 오랫동안 외로워서, 속이 텅 비어서 습관처럼 너라도 필요해서 이러는 건가 그 생각도 했어.”
“…….”
“유현아.”
“…….”
“요즘 내 하루는 널 보러 가는 그때부터 시작해.”
“…….”
“그 시간만 기다려. 널 만나러 가는 그 시간만.
차정한의 눈동자가 젖어 들었다. 물기 어린 그 눈동자가 나를 피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여태까지 내가 본 모든 시간의 차정한 중 가장… 진지한 얼굴이었다. 진심. 나는 그가 소리 내는 모든 말에 담긴 진심과 마주했다.
“맞아. 나 마음이 비었어. 한 번도 거기가 꽉 찼던 적이 없었어. 마음이 가득 찬다는 게 뭔지 몰랐거든. 그런데….”
“…….”
“너는 항상 거기 있었어. 유현이 네가 있어서 외로운 줄도 몰랐어.”
“…….”
“네가 나 살게 한 거야.”
“…….”
“나한테 지긋지긋하게 듣던 말이지. 너 없으면 안 돼. 너만 있으면 돼. 너 없이 내가 어떻게 살아. 다 똑같은 말이잖아. 날마다 그 말 들으면서 13년을 보냈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입버릇처럼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지. 친구일 때 하던 말을 지금도 하면서 행동만 친구를 벗어나니 네가 헷갈리고, 기분 상하는 것도 당연해. 그걸… 바보같이 지금 생각하면서 알았어.”
시선이 조금도 어긋나지 않았다. 차정한은 내 눈을 보며 이 추위 속에서 생각했을 것들을 하나씩 침착하게 소리 내어 말했다.
“유현이 너랑 그러는 게 좋아서… 너무 좋아서 정신 못 차리고 그랬던 건데 네 입장에서는 내가… 이런 말 좀 그렇지만, 네 몸에 미쳐서 달려드는 것처럼 보였을 것 같기도 해.”
“…….”
“앞으로 안 그런다는 말은 못 해. 그건 거짓말이니까. 난 너랑 닿고 싶어. 너랑 키스하고 싶고, 자고 싶어.”
“…….”
“같이… 있고 싶어.”
“…….”
“너니까.”
“…….”
“지유현이니까. 너 아니면 아무 의미 없어.”
무슨 말을 듣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너무 꿈 같은 말이라 눈물이 떨어지는 자리가 다 얼얼했다. 차정한은 쥐고 있던 내 손을 들어 자신의 코트 안으로 가져갔다. 이 추위 속에서도 따뜻한 그의 심장이 뛰는 게 느껴졌다. 내 손이 닿자 심장이 아주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나도 널 보면 이렇게 떨려.”
“…….”
“좋아해.”
세상이 전부 멈추고, 나도 멈추었다. 오직 차정한의 심장만이 쿵쿵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세게 뛰었다. 좋아해. 차정한이 내게 좋아한다고 말했다.
“처음이야. 좋아한다고 말한 거.”
“…….”
“말하고 싶은 적 한 번도 없었거든. 설렌 적도 없고, 떨린 적도 없었어. 사람들이 다 나무토막 같았어. 나도 마찬가지야. 그런 내 눈에 너만… 유일하게 살아 움직였어.”
“……정한아.”
“너를 따라 움직이면 나도 살아 있는 것 같았어. 그래서 널 그렇게 찾았나 봐. 지금도 마찬가지야. 한 번도 고백 같은 거 해 본 적이 없는데… 안 하고는 못 버티겠어.”
깊게 눈을 감았다가 뜬 차정한이 다시 나와 눈을 맞췄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고, 마음은 아플 만큼 꽉 조였다가 풀리는 것을 반복했다.
“너를 꿈꿔.”
“…….”
“너랑… 사랑하고 싶어.”
사랑. 나는 차정한이 소리 낸 사랑을 마주 보았다. 내가 감히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더 설레고, 두근거리는 차정한의 사랑이… 나를 향해 있었다.
“너 아니면 누구도 싫어. 내가 이렇게 말해도 아직 못 미덥겠지만, 내가 믿을 수 있게 할게. 네가 진심인 거 알도록, 불안하지 않게 내가 잘할게. 그동안 보인 게 있으니 안 믿는 것도 당연해. 내가 다 만회할게.”
“…….”
“그러니까… 유현아.”
“…….”
“나 버리지 마.”
대답을 해야 하는데, 나도 차정한에게 다 말해야 하는데 눈물만 차올랐다. 나는 겨우 팔을 벌려 꽁꽁 언 차정한을 끌어안았다. 내 체온을 전부 그에게 주고 싶었다.
“내가… 내가 널 왜 버려…….”
형편없게 울음 섞인 목소리가 흘렀다. 차정한은 내 대답을 끌어안는 것처럼 두 팔로 나를 가득 끌어안았다. 내가 따뜻하게 해 주고 싶었는데 차정한이 나를 더 따뜻하게 하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나만 힘들고, 나만 낯선 게 아니었다는 것을.
내가 이 감정을 처음 마주했던 날처럼 차정한도 낯설고, 불안했을 거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내가 한참을 고민하고, 편할 수 없었던 것처럼 차정한 역시 낯선 사랑에 고민했을 것이었다. 처음이라 어렵고, 그게 나라서 더 조심스러웠을 차정한을 헤아리지 못했다. 내 감정이 너무 크고 무거워서, 그걸 지고 있기도 힘들다는 이유로 차정한의 마음과 행동을 가볍게 생각했다. 나만큼 무거워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미안해…. 미안해, 정한아….”
“그 말 말고 다른 말해 주라.”
“…….”
“너한테 또 듣고 싶어.”
“…….”
“…날 사랑한다는 말.”
그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내게는 모든 순간을 지배하는 감정이니까. 숨과 같은 그 말을 내 감정의 지배자에게 소리 내는 것은 떨리고, 설레는 일이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나를 가득 끌어안은 차정한이 잘 들을 수 있도록 그의 귓가에 고백을 소리 냈다.
“…사랑해.”
다시 소리 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 그 말, 나의… 이 순간을.
#60
?
?
차정한을 카페 안 방으로 데리고 들어와 이불을 완전히 몸에 둘러주었다. 그리고 내가 마시려고 끓였던 찻물을 다시 데워 큰 컵에 가득 따뜻한 차를 담아 가지고 들어왔다. 이불을 여미고 추워하던 차정한은 내가 들어가자 얼른 허리를 펴고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나도 본 것을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이거 마셔. 방 온도도 제일 높게 올렸으니까 금방 따뜻해질 거야.”
“고마워.”
차정한은 두 손으로 머그를 들고 살짝 불어 한 모금을 마셨다. 하얗다 못해 얼어 창백해진 얼굴을 보니 속상해 자꾸 한숨이 나왔다. 나는 의자를 끌어 침대 앞으로 놓고 앉았다. 차정한이 그런 나를 보며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거기 말고… 여기 올라와. 침대 좁고 좋네.”
“좁고 좋다고?”
“좁으니까 붙어 자야 할 거 아냐. 다른 데는 뭐 잘 데도 없는 것 같은데.”
“난 바닥에서 자면….”
“이불도 없는데 무슨 바닥에서 자. 빨리 이리 와. 와서 나 안아 줘.”
“…넌 그런 말을 어떻게….”
“안아 줘. 따뜻하게. 응? 유현아.”
씩 웃는 얼굴을 보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차정한의 말이 다 맞았다. 이 방에 침대가 아니면 잘 공간이 없고, 바닥에서 잔다고 해도 여분의 이불이 없어 불가능했다. 나는 잠시 머뭇대다가 일어나 차정한의 옆에 걸터앉기만 했다. 차정한이 머그를 책상에 놓고 얼른 몸을 감싸고 있던 이불을 열어 나를 끌어당겼다. 나는 순식간에 그 안으로 끌려들어 갔다.
“네가 들어오기만 해도 따뜻해.”
“…….”
나는 몸을 틀어 차정한을 끌어안았다. 마주 보고 끌어안는 게 가장 좋지만, 앉아 있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 차정한을 마주 보고 끌어안으려면 내가 차정한 다리 위로 올라가 앉아야 하는데 솔직히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어설프게 옆에서 살짝 끌어안았다.
“불편하게 그게 뭐야.”
“…안아 달라면서.”
차정한이 씩 웃으며 자신의 허벅지 위를 손바닥으로 탁탁 두드렸다. 거기로 올라오라는 의미라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다시 나갈래?”
“너무해. 안아 줄 거면 제대로 안아 줘야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 자. 갈아입을 옷… 아!”
차정한한테 내 옷은 좀 작겠지만, 그래도 갈아입을 게 내 옷뿐이라 그것이라도 주려고 일어나는데 몸이 확 앞으로 기울었다. 순간 놀라 눈을 질끈 감았다가 더 이상 몸이 움직이지 않을 때 슬쩍 뜨니 웃고 있는 차정한이 보였다. 그와 마주 보고 침대에 누웠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가긴 어딜 가. 아무 데도 가지 마.”
“…….”
“나 아직 춥단 말이야.”
마주치는 눈이, 나를 보고 있는 그 눈이 너무 예뻐서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차정한은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보고만 있는 게 불안했는지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처럼 나를 이리저리 바라보았다.
“…나 또 뭐 잘못했어?”
“응?”
“왜 아무 말도 안 해…. 불안하게.”
“…예뻐서.”
내 대답에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차정한이 이내 씩 웃으며 몸을 바투 붙였다. 좁은 침대 위에서 몸이 확 닿은 순간 손끝으로 열이 맺혔다.
“그럼 예뻐해 줘야지.”
보기만 해도 가끔 모든 걸 잊고 넋을 놓게 되는 잘생긴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같이 침대에 누운 적도 있고, 잔 적도 있지만, 이렇게 하나의 베개 위에 같이 누운 적은 처음이었다. 익숙하지만, 늘 비현실적일 만큼 잘생긴 얼굴이 다가오자 묘한 긴장감에 배 속이 울렁였다. 눈을 맞추기가 부끄러워 괜히 시선을 내리며 이불자락만 만지작대자 차정한이 내 턱을 부드럽게 잡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