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꽉 쥔 허리가 마구 비틀렸다. 나는 차정한에게 제발 놓아 달라고 애원했다. 살갗을 파고들 만큼 꽉 내 허리를 쥐고 있던 그의 손에서 힘이 느릿하게 빠져나갔다. 손이 떨어진 자리로 여운처럼 남은 쾌감이 잔뜩 달라붙어 내내 고여 있던 쾌감과 뒤엉켰다.
나는 벌벌 떨리는 몸으로 차정한을 잡아당겼다. 아까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밀리지도 않던 차정한이 고분고분 몸을 내려 잔뜩 떨리는 내 몸을 끌어안았다. 나는 그의 어깨 위에 얼굴을 묻고 소리 내어 울었다. 내가 감당하기 너무 힘든 쾌감이 너무 무서워 그를 붙잡고 또 붙잡았다.
“하…. 괜찮아. 울지 마, 응?”
차정한은 그런 나를 달래고 또 달랬다. 그동안 늘 내가 차정한을 달래 왔기에 그의 이런 목소리와 손길을 받는 게 몹시 어색했지만, 지금 내가 기댈 곳은 차정한뿐이기에 한참이나 움직일 수 없었다.
어느 정도 숨을 고르고 진정이 되자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오던 빛이 완전히 사라진 게 눈에 들어왔다. 분명 낮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이었는데 이렇게 캄캄해졌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자 차정한이 느릿하게 몸을 떼어냈다. 엉망으로 흐트러지던 숨이 가득 찼던 자리에는 이제 조금 어색한 정적이 맴돌았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그와 했던 것들이 전부 떠올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뭇대기만 했다.
“이제 좀 괜찮아?”
“…응.”
여전히 내 위에서 내려오지 않은 채 나를 내려보는 얼굴에 맺혔던 말이 사라지고, 또 맺혔던 생각이 사라졌다. 차정한은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내내 나를 보며 부드럽게 내 머리칼을 만지고, 또 뺨을 매만졌다. 침묵 속 이어지는 다정한 시선과 손길에 자꾸 겨우 고개를 든 원래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 힘없이 흔들렸다.
“…저기.”
“응.”
“아래…….”
“아래? 아…. 뺄까?”
아직도 그와 단단히 맞물린 느낌에 숨을 쉬기도 힘들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몸 안에 차정한이 있다는 게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그냥 바로 뺄 줄 알았는데 굳이 내게 묻는 차정한이 얄미웠지만, 화낼 수도 없게 두근대는 얼굴에 내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장난이었다는 듯 차정한이 소리 내어 작게 웃으며 아래를 빼냈다. 내내 가득 차 있기만 하던 안에서 성기가 빠지자 순간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에 놀라며 슬쩍 흐트러진 이불자락을 끌어 올렸다. 차정한은 내 몸에서 내려가 옆으로 누워 나를 바라보았다.
“나 봐 줘.”
“…잘래.”
“나 보고 자.”
“…….”
“아니면 나 다시 올라가?”
몸을 다시 일으키려는 그를 진정시키고 차정한이 있는 쪽으로 몸을 틀었다. 다시 나를 보고 누운 그가 소년처럼 씩 웃었다. 아직도 얼굴에 열일곱 때의 모습이 남아 있는 게 신기했다.
“드라이브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이려고 했는데.”
“…거짓말.”
“진짜야. 키스만 하고 나가려고 했어. 그런데 닿으니까 너무 좋잖아.”
“…….”
내 머리를 아주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에 자꾸 목소리가 떨렸다. 돌려 말하는 법을 모르고 늘 이렇게 노골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차정한이 시원시원해 좋지만, 요즘은 이러다가 내 수명이 줄어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심장이 몇 번씩 쿵 떨어져도 괜찮은 걸까. 이렇게 섹스해도 되는 걸까. 또… 이렇게 좋아해도 괜찮은 걸까.
“요즘은 너랑 닿을 때마다 아, 진짜 살겠다…. 싶어. 다른 건 아무것도 중요한 게 없어. 너 없으면 나 진짜 안 되겠구나. 널 볼 때마다 생각해.”
“…….”
대답할 말을 빠르게 찾지 못해 바라만 보는 나를 보며 웃은 차정한이 다가와 내 뺨에 깊게 입 맞췄다. 그리고 아주 다정하게 나를 끌어안았다. 꼭… 차정한과 사랑하는 사이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자고 갈 거지.”
“…내일 가게 오픈도 해야 하고, 밤에 갈게.”
“아침에 일찍 가면 되잖아.”
“…그래도.”
“여기 너만 없고, 다 그대로 있어. 네가 두고 간 옷, 네 방, 네 칫솔, 네 슬리퍼….”
“…….”
“너만 있으면 돼. 다시 전처럼 돌아갈 수 있어, 우리. 친구가 아닐 뿐이야.”
차정한은 내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나를 더 꽉 끌어안았다. 민다고 밀릴 차정한이 아닌 것을 알고, 또 나도 정신이 가물가물해 그냥 눈을 감았다.
“아침에 같이 씻고, 아침도 같이 먹고 내가 데려다줄게. 그러니까 오늘은 아무 데도 가지 말고 나랑 있어.”
“…….”
“나랑 있어 줘, 유현아.”
차정한은 어떤 연애를 할까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어차피 그 상대가 나일 가능성은 없기에 궁금해하다가 생각을 멈추었지만, 잠들기 전 닿아오는 따뜻한 차정한의 목소리와 나를 쓰다듬는 손길, 움직일 수 없도록 꽉 가둔 팔에서 그는 어쩌면 가지고 싶어 불안해하는 연애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와 섹스하고 그의 품에서 잠드는 지금도 그의 연애 상대가 나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나치게 따뜻하고, 또 지나치게 나와 닿는 것에 의미를 두며, 또 지나치게 나를 배려하는 차정한이… 낯설었다.
#57
?
?
아침에 일어나 몸을 일으키는데 온몸이 부서질 것처럼 아팠다. 과격하다는 말이 어울릴 만한 섹스를 했으니 당연한 거겠지만, 그래도 그 정도가 심해 반쯤 몸을 일으키다가 다시 누워 버렸다. 허리와 다리 사이가 특히 아팠다.
내 움직임을 느꼈는지 잠에서 깬 차정한이 잠이 묻은 눈을 감으며 다가와 내 뺨에 입 맞췄다. 생각하지 못한 차정한의 행동에 놀라 몸이 더 굳었다. 차정한은 나를 끌어안듯 잡아 일으켜 앉혔다. 너무나도 거침이 없는 스킨십에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아파?”
“…어, 조금. 움직이면 괜찮아질 거야.”
“카페 일할 수 있겠어?”
“그럼. 할 수 있어. 나 먼저 좀 씻을게.”
침대 아래로 내려가 두 발에 힘을 주고 서는데 그대로 몸이 쑥 내려갔다. 바닥으로 주저앉기 전 차정한의 팔이 먼저 나를 잡아 세웠다. 다리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나는 차정한의 도움을 받아 침대에 걸터앉아 다리를 두드렸다.
“내가 씻겨 줄게.”
“…뭐?”
“제대로 서지도 못하면서 혼자 어떻게 씻어.”
“어제 힘 빠진 채로 자고 바로 일어나서 그래. 괜찮아.”
“뭐가 괜찮아. 같이 씻자. 내가 다 해 줄게.”
“아니, 아니야. 안 그래도 돼.”
“뭐 어때.”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면서 뭐 어떻냐고 묻는 태연한 얼굴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나는 어느 정도 힘이 들어간 발로 몇 번 바닥을 두드리고 일어났다. 일어나는 건 괜찮은데 완전히 몸을 세우자 허벅지 안쪽으로 축축한 것이 흘러내리는 느낌이 났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왜 그래?”
“…아니야. 나 씻고 올게.”
“잠깐만. 이거….”
내가 본 곳을 차정한도 봤는지 그의 손이 다가와 허벅지 안쪽을 문질렀다. 그의 손에 묻은 하얀 액을 보니 머리가 다 아찔했다. 내내 들지 않던 수치심이 한꺼번에 후폭풍처럼 밀려들었다.
“아…. 내가 안에 해서.”
“…생각으로만 깨달으면 안 될까.”
“아… 그럼 저번에도….”
“…….”
저번에 혼자 뒤처리를 하느라 꽤 곤란했던 기억이 났다. 다른 것보다도 내가 내 안에 손가락을 넣는 자체가 힘들어 거기서 시간을 꽤 잡아먹었다.
“왜 말 안 했어.”
“나도 씻기 전까지 몰랐어.”
“아…. 진짜 거기까지는 생각도 못 했는데. 미안해. 내가 다 해야 되는 건데. 가자.”
“아니, 아니야. 내가, 내가 할게. 정한아. 내가 할 수 있어.”
자꾸 아니라는 말만 반복해서 나왔다. 솔직히 지금 아니야, 괜찮아, 정한아 외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저 말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이고, 해야 할 말이기 때문이었다.
“부끄러워서 그래?”
“그럼 안 부끄러워? 나 지금 너랑 이런 얘기 하는 것도 진짜 미치겠거든.”
“우리 사이에 부끄러울 게 뭐가 있어.”
우리 사이가 뭔데? 하마터면 예민하게 내뱉을 뻔했다. 나는 조금 날카로워진 생각을 누르며 욕실로 향했다. 차정한이 그런 나를 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됐다는데 왜 그래. 나 진짜 너한테 그런 거 보이기 싫어.”
“내가 한 거잖아. 모르고 있었으면 몰라도 알아 버렸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
“…말도 진짜 안 듣는다.”
“이번만 안 듣고 다음부터는 잘 들을게.”
씩 웃은 차정한이 그대로 나를 뒤에서 잡아 밀며 욕실로 들어갔다. 나는 이제 반은 포기한 상태였다. 다른 고집이면 몰라도 저런 차정한의 고집은 내가 꺾을 수가 없는 걸 오랜 세월을 거치며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여기서 더 안 된다고 해 봤자 시간 낭비였다.
“…….”
샤워부스 안으로 들어가 서자 차정한이 나를 따라 들어와 뒤에 서며 문을 닫았다. 어제 뒤에서 얼굴이 보이지 않는 상태로 섹스했던 게 생각나 손끝이 저릿했다.
“앞으로 몸 숙여 봐. 옳지.”
꼭 말 잘 듣는 애한테 하듯 칭찬한 차정한이 샤워기를 들고, 따뜻한 물을 틀었다. 숨소리가 너무 크게 들릴 만큼 조용해 어색했었는데 그 자리에 물소리라도 섞이니 좀 살 것 같았다.
“어…? 유현아.”
“…왜 그래?”
“너 허리 멍들었어.”
“허리?”
차정한의 말에 몸을 펴고 허리를 내려 보니 정말 양쪽 다 푸르스름하게 멍이 들어 있었다. 차정한이 내내 세게 쥐었던 바로 그 부분이었다. 이러다 살갗을 뚫고 손가락이 들어올 만큼 힘이 세다고 느끼기는 했지만, 그 손자국대로 멍이 든 것을 보니 할 말이 없었다.
“미안해. 내가 너무 세게 잡았나 봐. 앞으로는 조심할게.”
앞으로는? 당연하다는 듯 다음을 말하는 것에 기분이 묘하게 가라앉았다. 분명 좋아야 하는데 단순히 좋아할 수가 없었다.
“자, 다시 숙여 봐.”
“…….”
나는 다시 허리를 구부려 몸을 숙였다. 바로 차정한의 손가락이 들어오는 느낌에 넘어질 것 같아 얼른 벽을 두 손으로 짚었다. 아, 역시 끝까지 말리고 혼자 욕실에 들어와 문을 잠갔어야 했다. 차정한을 향해 몸을 뒤로 빼고 치부를 보이는 꼴이라니 정말 죽고 싶었다.
“…아….”
절대 소리를 내지 않으려 참다가 손가락이 깊게 확 들어오는 순간 숨과 뒤섞인 소리가 흘렀다. 나는 다시 아플 만큼 입술을 깨물었다. 차정한의 손가락이 들어갔다가 안을 긁으며 나올 때마다 발끝에 힘이 들어갔다.
“다 됐어. 저번에 어떻게 혼자 했어.”
“……그냥 했어. 이제 다 했으면… 나가.”
“잠깐만.”
차정한이 ‘잠깐만.’이라고 말할 때마다 심장이 철렁했다. 나는 내 몸을 잡아 돌려세운 그와 마주했다. 나를 가만히 보던 그가 내 몸을 조금 더 돌려 유리 벽으로 밀어 세웠다. 체온보다 차갑고 딱딱한 느낌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난 이제 네가 잠깐만이라고 할 때마다 조마조마해.”
“이번에는 진짜 잠깐만.”
몸을 바짝 붙인 차정한이 고개를 숙여 내 목덜미로 얼굴을 묻었다. 배 위로 느껴지는 그의 발기한 성기에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차정한은 내 목덜미와 어깨를 입술로 지분거리며 몸을 더 밀착했다.
“…아…….”
이렇게 노골적으로 좋아하는 사람과 닿아 있는데 침착할 방법이 없었다. 흥분해 잔뜩 발기한 것을 내 몸에 비비는 그의 본능적인 행동에 숨이 뜨거워졌다. 나는 무슨 용기인지 손을 움직여 차정한의 성기를 쥐었다. 내 손이 닿자 차정한이 목덜미 위로 긴 숨을 쏟아냈다. 고개를 든 그가 얼굴을 제대로 보기도 전에 급히 입술을 겹쳤다.
“음… 으응…….”
이 상황이 지나치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야릇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입안을 가득 채우고 헤집는 그의 혀를 마주 머금으며 조금 더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하….”
내 뺨을 감싸 만지던 큰 손이 내려가 발기한 내 성기를 쥐었다. 그의 손에 갇힌 순간 온몸으로 열이 확 올랐다. 나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가 움직이는 대로 손을 움직였다. 그가 끝을 쥐고 귀두를 문지르면, 나도 똑같이 그의 귀두를 엄지손가락으로 문지르고, 그가 기둥을 쓸어 올리면, 나도 그의 기둥을 쓸어 올렸다. 내가 느끼는 이 쾌감을 차정한도 똑같이 느끼고 있다고 생각하니 젖은 입술이 열기로 자꾸 말랐다.
“아…. 유현아….”
열기에 젖은 차정한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나는 그가 빠르게 흔드는 것을 따라 손을 움직였다. 맞닿은 몸과 귓가로 흐르는 그의 목소리, 그 목소리가 빚어내는 것이 내 이름이라 마음이 터질 것 같던 순간 아랫배를 타고 확 올라온 쾌감이 심장을 건드리고 머리 위까지 올라갔다. 손이 축축했다. 나와 비슷하게 사정한 차정한이 다시 고개를 기울여 깊게 키스했다.
“하아… 하으, 하…….”
너무나도 뜨겁고 긴 차정한의 ‘잠깐만.’에 아침부터 정신이 쏙 빠진 것만 같았다. 이대로는 카페고 뭐고 무책임한 유혹에 빠질 것 같아 그를 떼어냈다.
“…더는 안 돼. 나 카페 가야 해.”
“알았어. 말 들어야지.”
“…빨리도 듣는다.”
“듣지 말까?”
“차정한.”
“알았어. 나가잖아. 나가, 지금.”
지금 나가는 중이라고 샤워부스 문을 열고 나를 본 차정한이 입술을 올려 웃었다. 어떻게 저렇게 거침없을 수 있을까. 이 상황에서 조금도 떨리지 않는 얼굴로 나를 보고, 몸을 대고, 웃는 차정한이 궁금했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속을 한번 들여다보고 싶었다. 너는 어쩌면 그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냐고 묻고 싶었다.
“…….”
아니. 어쩌면 나는 이미 그 이유를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냥 모르는 척을 하는 것일 뿐. 생각이 깊어지면 굳이 아침부터 마주하고 싶지 않은 우울한 이유들을 만날 것 같아 얼른 샤워기를 들었다. 몸으로 쏟아지는 따뜻한 물이 꼭 차정한의 손길 같기도 하고, 목소리 같기도 해서 씻는 내내 마음이 울렁거렸다.
물과 탄산수, 맥주, 프로틴 음료가 전부인 냉장고 안을 보니 한숨이 저절로 흘렀다. 차정한의 냉장고는 내가 늘 채웠다지만, 정말 이러고 집에서 어떻게 사나 싶을 만큼 심각했다. 집에서는 정말 마시는 것 외에는 무엇도 먹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게 뭐야. 어떻게 먹을 게 하나도 없어?”
“집에서 뭐 잘 먹지도 않아. 너 나간 뒤로 그냥 잠만 자거든. 집에 들어오기 싫어.”
“그래도… 이건…. 쉬는 날에는? 굶어?”
“꼴 이런 거 아니까 형이 나 들어갈 때 샐러드 같은 거 주기도 하고, 운동에 도움 된다고 생각하면서 프로틴 마시고 뭐….”
“언제까지 이렇게 비워 두고 지낼 거야. 여기 있는 거 다 떨어지면 그땐.”
내 말에 가까이 다가온 차정한이 아직도 냉장고 손잡이를 잡고 있는 나를 현관으로 데려갔다.
“그전에 다시 오면 안 될까?”
“네 냉장고 채우러?”
어제 얼마나 급히 벗고 들어왔는지 아무렇게나 마구 널브러진 운동화에 발을 하나씩 넣는데 등 뒤로 따뜻함이 확 끼쳤다.
“너 없는 집 싫어.”
“…….”
“뭘 어떻게 해도 추워. 따뜻하지가 않아.”
공기는 서늘하고 뒤에서 나를 안은 그의 팔은 뜨거웠다. 나는 내 몸을 감싸고 배 위에서 겹쳐진 그의 두 팔을 내려보며 굳어 버렸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연인의 모습 같아 당황스러웠다.
“…이러다 늦어. 배고프다며.”
동문서답을 하며 나는 그의 팔을 풀어냈다. 반쯤 들어간 발을 운동화 안으로 깊게 밀어 넣고 어제 떨어뜨린 책 봉투를 들어 먼저 문을 열고 나섰다. 곧 차정한이 내 뒤를 따라 집을 나섰다.
“줘, 무겁잖아.”
어제와 똑같았다. 차정한은 내가 든 구겨진 책 봉투를 가져가 들었다. 묘한 불편함이 심장을 콕콕 찔렀다. 거기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차정한은 엘리베이터 문을 팔로 누른 채 나를 먼저 타게 하고, 또 내리게 했다. 조수석 문을 열어 주는 것은 당연하고, 안전벨트를 채우고, 문을 닫는 것까지 너무나도 당연한 수순인 것처럼 행했다.
“핫케이크 먹으러 가자. 너도 좋아하잖아.”
“응. 거기도 오랜만이네.”
“그러게. 우리 거기 빠져서 아침에 잠 부족한데도 깨서 매일 가고 그랬는데. 눈도 못 뜨고 먹고.”
“맞아. 그렇게 맛있는 핫케이크 처음 먹어 봤어. 아직도 처음 먹었을 때 너무 맛있어서 놀랐던 거 생각나.”
“우리 한 입 먹고 놀라서 눈 마주쳤잖아.”
입이 짧은 차정한도 맛있다고 세트로 나온 것들을 싹 다 비운 곳이라 나는 그 가게를 더 좋아했다. 맛도 있지만, 차정한이 잘 먹는 걸 보는 게 너무 좋았다.
“오늘은 마감 때쯤 갈 수 있을 것 같아. 오후에 이번 드라마 홍보 영상 찍거든. 대충 멘트나 따는 줄 알았더니 제대로 하는지 의상까지 다 입고 오래서 좀 길어질 것 같아.”
“그 감독님 엄청 꼼꼼하시다고 하더라. 전작들도 보니까 홍보 영상부터 뭐 하나 대충 찍은 게 없더라고. 홍보 영상도 영화 같아.”
“너 홍보 영상도 백 번 볼 거지.”
“홍보 영상은 백 번까지는 안 봐. 한… 오십 번?”
진짜라 그렇게 말한 건데 차정한은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소리 내어 웃으며 내게 손을 뻗었다. 너무나 당연하게 뺨에 닿는 부드러운 손길에 조금도 웃을 수가 없었다.
“지유현이 오십 번 볼 영상이니까 더 열심히 찍어야겠다. 혹시 늦어지면 연락할게. 아마 너 마감하기 전에는 끝날 거야.”
“…응.”
차정한은 내 뺨을 만지던 손을 내려 다리 위에 놓인 내 손을 자연스럽게 쥐었다. 나는 내 다리 위에 놓인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차정한에게 이 ‘닿음’은 어떤 의미일까. 이 연인처럼 자연스러운 흐름을 그냥 기뻐만 해도 모자라야 정상 아닐까. 내가 너무 심각하게 혼자 이러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애썼다.
“…….”
하지만 이 닿음은 내가 너무나도 잘 아는 것이었다. 내 머리를 쓰다듬고, 내 다리에 머리를 대고 누워 잠을 청하던 차정한의 행동과 같은 곳에 존재했다.
“…….”
차정한의 이 따뜻한 ‘닿음’이 사랑이 아니라 결핍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 묘하게 가라앉던 마음이 덜컹댔다.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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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정한과 브런치를 먹고 카페로 가는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올겨울 들어 처음 보는 눈이라 좌우로 요란하게 움직이는 와이퍼 사이로 흩날리는 눈에 자꾸 시선이 갔다.
“올해 처음 내리는 거 아닌가.”
“저번에 한 번 왔다는 뉴스 본 적 있어.”
“넌 그때 봤어?”
“못 봤어.”
“그럼 우리 첫눈 같이 보는 거네.”
“…그러게.”
왜 사람들이 첫눈에 의미를 부여하는지 알 것 같았다. 물론 올겨울 처음 내리는 눈은 아니지만, 우리가 함께 보는 첫 번째 눈이라는 게 좋아 자꾸 보게 됐다.
“들어가. 이따 전화할게.”
“응. 눈 오는데 운전 조심해.”
“저기 누가 오는데. 여기 오는 건가?”
“아…. 알바생.”
머리 위를 가리고 이쪽으로 뛰어오는 아르바이트생을 본 차정한이 나를 바라보았다. 뭔가 묻고 싶은 게 있는 얼굴이었다.
“…왜?”
“친해?”
“누구, 현우?”
“아, 이름이 현우야?”
뭔가 조금 전과는 달라진 분위기에 이게 뭔가 싶었다. 꼭 내가 김원우나 다른 친구, 후배, 선배, 동기들을 만나러 갈 때 보이는 반응과 비슷해서 조금 어이가 없기도 했다.
“응. 현우. 휴학 중이래. 등록금 버느라 일하나 봐.”
“그런 사적인 것도 다 아는 사이야?”
“뭐 그렇게 사적인… 건 아닌 것 같은데.”
“넌 무슨 말 했어?”
“어?”
“쟤가 너한테 휴학을 했네, 등록금을 벌어야 하네 그런 얘기 할 때 너도 뭔가 네 정보를 쟤한테 줬을 거 아냐. 무슨 이야기 했냐고.”
취조하듯 묻는 차정한은 생각보다 진지했다. 대답하지 않으면 안 가고 계속 붙잡아 둘 것을 알기에 최대한 기억을 더듬었다.
“음……. 그냥 누나 가게라 대신 봐주기로 했다, 한 달 정도 있을 거다, 커피 내려준다고 그래서 카페인에 약해서 연하게 마셔야 한다? 뭐 그 정도?”
“커피 연하게 마시는 것까지 말했어? 그거 엄청 사적인 얘긴데. 취향에 대한 거잖아.”
“차정한.”
“…….”
“좀 억지인 거 알지?”
“아, 몰라. 아는데 모르고, 알아서 더 짜증 나.”
의자 뒤로 몸을 확 기댄 차정한이 굉장히 불만스러운 얼굴로 앞만 바라보았다. 나는 그런 차정한을 보다가 안전벨트를 풀었다.
“운전 조심해.”
“쟤한테 나랑 잔 것도 말해.”
“뭐?”
“나랑 친하다고도 말해. 넌 아무한테나 잘해 주더라.”
원래도 내가 다른 친구들을 만나면 너는 친구가 너무 많아, 다른 애들이랑 친하게 지내지 마, 친구는 인생에 한 명이면 된다더라 같은 말을 서슴지 않고 했던 것을 알아 그런지 이런 말과 반응이 익숙했다.
가만히 놔두면 혼자 알아서 괜찮아질 것을 알기에 내리려다가 그래도 운전하고 갈 차정한을 풀어 주는 게 좋을 것 같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손을 그에게 뻗었다. 손과 손이 닿는 건 아무렇지 않을 때도 됐는데 나는 아직도 내가 먼저 차정한에게 닿는 게 너무 어렵고, 떨렸다.
“내가 제일 잘하고 싶은 건 늘 너야.”
“…….”
“그것도 몰라?”
“…알아.”
금세 풀려 미소 짓는 얼굴을 보니 풀어 주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시 한번 그의 손을 두드렸다.
“눈 많이 온다. 운전 조심해. 알았지?”
“…알았어. 이따 전화할게.”
“응.”
“아, 문.”
내리려고 몸을 트는데 차정한이 깜빡했다는 듯 안전벨트를 푸는 소리가 났다. 나는 얼른 내리려는 차정한의 팔을 잡았다.
“정한아.”
“응?”
“…눈 오는데 뭘 내려. 그냥 가. 밤에 보자.”
못내 아쉬운 눈으로 보는 차정한을 보다가 혼자 차에서 내렸다. 뒷좌석에 있는 책 봉투까지 꺼내고 문을 닫자 차정한이 창을 열었다. 나는 몸을 조금 숙여 안에 있는 차정한에게 손을 한 번 흔들었다.
“가.”
“먼저 들어가. 너 들어가는 거 보고.”
“…응.”
먼저 카페 안으로 들어가 현우와 인사하고 밖을 보자 그제야 차가 주차장에서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눈 속으로 차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눈이 많이 와서 그런지 맑은 날보다 손님이 조금 덜했다. 점심때는 사람이 여전히 많기는 했지만, 평소처럼 정신이 쏙 빠질 정도는 아니었다. 날씨가 궂으니 밖으로 나오지 않는 사람이 많은 모양이었다.
대설특보라는 안내 메시지가 오고, 일기예보를 확인하니 새벽까지 눈이 온다고 되어 있었다. 카페 앞에 나가 눈을 쓸고 몸을 웅크리며 들어온 현우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조심스럽게 닦았다.
“와, 올겨울은 눈 잘 안 오나 보다 했더니 한꺼번에 오네요.”
“그러게. 진짜 많이 온다.”
“이런 날은 손님 거의 없어요. 저 예전에 알바하던 카페도 보면 비 오고, 눈 오고 하는 날에는 손님이 반으로 줄더라구요.”
“어쩔 수 없지 뭐. 나도 날씨 안 좋으면 굳이 밖에 나가기 싫으니까. 이따 또 쌓이면 내가 나가서 쓸게.”
“아니에요. 제가 해야죠. 형은 사장님 대신인데.”
“사장님 대신이니까 더 잘해야지. 아까도 네가 했잖아. 춥지. 뭐 따뜻한 거 한 잔 만들어 줄까?”
“네! 음, 저 핫초코요.”
“알았어.”
우유를 스팀하며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눈이 휘날리는 바깥을 바라보았다. 밤이 되면 쌓인 눈이 얼어 운전하기 힘들 텐데 이따 끝났다고 연락이 오면 그냥 집에 가서 쉬라고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물론 말을 들을 거라는 자신은 없었다.
현우에게 핫초코를 주고, 마른걸레로 문 근처 바닥의 물기를 닦았다. 우산과 신발에서 물이 떨어져 한두 명만 들어와도 금세 바닥이 젖고, 지저분해졌다.
한 시간에 한 번씩 밖에 나가 카페 앞에 쌓인 눈을 쓸고 또 쓸어 길을 냈다. 현우가 퇴근하고 혼자 남아서도 내내 눈을 치우고, 바닥을 닦다가 시간이 다 가 버렸다. 손님이 적어 나름 여유롭기는 한데 어제 몸을 많이 써서 그런지 움직일 때마다 몸 여기저기가 조금 아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