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43)

어제보다 조금 더 과감하고 급했다. 안달이 난 사람처럼 혀를 빨고 문지르는 그를 막을 수가 없었다. 서로의 타액으로 젖은 입술이 깊게 맞물릴 때마다 질척이는 소리가 났다. 거칠어진 그의 숨과 우리의 입술이 마찰하는 소리에 머리가 어떻게 될 것만 같았다. 나는 그의 팔을 잡고, 차정한과 같이 혀를 움직였다. 마주 움직인 혀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를 옭아매고 파고들었다. 아랫배가 조여들고, 자꾸만 몸이 달아올랐다.

“하으… 정, 정한아….”

그대로 입술을 살짝 뗀 차정한이 내 목덜미로 얼굴을 묻었다. 잔뜩 달아오른 입술이 목덜미를 머금고 빨아들이자 발끝까지 묘한 감각이 퍼졌다.

“하아…… 하으….”

축축하게 닿아오는 입술은 솔직히 밀어내기 어려웠다. 이대로 끝까지 가 버려도 그가 원해서 하는 거면 상관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 만큼 내게도 이 쾌락은 달콤했다. 하지만 이대로 달아오르기 쉬운 감각에 휩싸여 그가 감정을 혼동하도록 놔두고 싶지 않았다.

“…그만, 그만해.”

“하…….”

분명하게 소리 내며 어깨를 잡아 떼어내자 차정한이 흥분한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겨우 숨을 고르며 말을 알아들은 것 같은 차정한을 조금 더 밀어냈다. 순순히 뒤로 밀려난 차정한이 눈을 깊게 감으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어제 여기서 나가는 순간부터… 하, 다시 여기 올 때까지 아니, 인터뷰하는 동안에도 이 생각밖에 안 했어.”

“…….”

“네가 너무 따뜻해.”

“…….”

“…네 생각밖에 안 나, 유현아.”

“…….”

“네가 나 버릴까 봐 매일 불안해 미칠 것 같았는데… 어제는 불안하지가 않더라. 불안할 틈이 없었어.”

밀려난 것보다 더 크게 걸음을 옮겨 몸을 밀착한 차정한이 다시 입을 맞췄다. 차정한의 키스는 몹시 뜨겁고, 좋았다. 싫을 수가 없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 안달이라도 난 것처럼 달려드는데 어떻게 싫을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급하게 너무 빨리 변해가는 차정한의 대담하고 거침없는 행동에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다소 거칠었던 것과 달리 한참이나 부드럽게 내 입술을 물고, 혀를 머금으며 키스하던 차정한이 맞물렸던 입술을 살짝 떼어냈다. 씩 웃은 차정한이 두 팔로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지금 차정한이 하는 이 행동들의 흐름이 너무 낯설어 도무지 적응할 수 없었다.

“너랑 있으니까 너무 좋아. 살 것 같아.”

팔을 올려 차정한의 허리를 마주 안아야 하는지 아니면 밀어내야 하는지도 판단이 서지를 않았다. 연인 같은 행동에 연인 같은 말을 하는 차정한과 닿아 있는 순간에도 묘한 이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집에 가 봤자 너도 없는데 나 여기서 자고 갈까?”

“…뭐?”

“나까지 자기에는 방이 좁은가?”

무슨 말을 들은 건가 싶어 차정한을 떼어냈다. 방이 좁아 안 된다는 의미로 물어본 게 아닌데 차정한은 너무나도 평온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 얼굴에는 다른 감정이 없었다.

친구도 아니고 연인도 아닌 이 상황에서 어떻게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조금의 망설임과 떨림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그런 차정한을 보며 자꾸 겁이 났다.

“…이상한 소리 할 거면 가.”

몸을 떼어내고 먼저 홀로 나왔다. 어떻게든 나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자고 생각하는데 그와 닿았던 몸과 입술은 멋대로 달아올라 자꾸 나의 가장 약한 곳들을 건드렸다. 감정 위를 덮어 나를 충동적으로 만드는 감각과 마주할 때마다 그것에 더 잘 휘둘릴 차정한이 떠올랐다.

“아, 맞다. 저녁 아직 못 먹었지? 인터뷰 때문에 그럴 시간도 없었잖아.”

“아…. 그러네.”

“나가서 뭐라도 먹을까? 나도 저녁 못 먹어서 배고프다.”

차정한의 말을 들은 뒤에야 늦은 점심으로 샌드위치 하나를 먹고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사방이 다 가려지고 막힌 공간에 둘이 있는 것보다 차라리 누군가 있는 곳이 나을 것 같기도 하고, 배고프다는 차정한을 혼자 보내기도 마음이 쓰여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나올게.”

“나도 들어가 봐도 돼?”

“…볼 것도 없어. 그냥 방 하나 있는 거야.”

나를 따라 방이 있는 곳으로 오는 차정한을 굳이 막지는 않았다. 차정한은 내가 겉옷을 챙기는 동안 방 안으로 고개만 넣어 눈으로 안을 살폈다. 살펴볼 것도 없는 방을 한 번 대충 훑은 차정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오피스텔로 다시 와. 너 쓰라고 준 오피스텔 놔두고 이게 무슨 고생이야.”

“여기도 편해. 있을 건 다 있어.”

“안 무서워? 혼자 이렇게 불 다 끄고 여기 있으면? 씻는 건 어디서 씻어?”

“건물 위에 샤워실 있어.”

내 말에 미간을 구긴 차정한이 불만스러운 숨을 몰아쉬었다. 차정한은 아마 내가 왜 고집스럽게 이런 힘든 길을 택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었다.

“다시 들어와. 한 달이라도 있어. 나 만나는 동안이라도. 한 달 동안 나 만나는 거 너도 허락했고, 그 이유면 오피스텔에 있을 수 있잖아.”

“한 달 지나서 또 상황이 달라지면 그땐 조용히 나오고?”

“누가 나가래? 난 너 나가라고 한 적 없어. 내가 너한테 나가라고 한 적 있어? 안 나가면 되잖아. 그냥 못 이기는 척 좀 살아라. 아무도 뭐라고 안 그래.”

“정한아. 나 네 눈치 보느라 나온 것도 아니고, 자존심 세우자고 나온 것도 아니야.”

“알아. 나랑 관계 끊으려고 나온 거 나도 안다고. 네가 왜 자책하는지 다 알아. 아는데 내가 괜찮다잖아. 나 너 고생하는 거 싫어.”

걱정하는 차정한의 얼굴을 보니 뭐라고 더 말을 얹어 상황을 악화시키고 싶지 않았다. 걱정은 고마운 거고, 나는 이미 걱정에 대한 답을 했으니 이 상황만 정리하면 될 일이었다. 나는 차정한의 손을 살짝 잡아 바깥으로 당겼다. 움직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차정한은 내 미약한 힘에도 걸음을 옮겨 나를 따랐다. 그가 손가락을 접어 내 손을 마주 쥐는 느낌에 조금 더 강한 열이 손에서 손목으로, 손목에서 팔을 타고 귓가까지 올랐다.

“이런 얘기 인제 그만하고 나가자. 배고파.”

“내가 너한테 할 말은 아니지만, 너도 진짜 말 안 듣는다.”

나한테 뭐라고 하는 중에도 자기객관화가 된 차정한의 말에 조금 웃음이 났다. 어이없다는 나를 보던 차정한이 작게 숨처럼 웃음을 터뜨리며 내 머리칼을 습관처럼 쓰다듬었다. 그 익숙한 흐름에 또 익숙하게 설레었다. 처음으로 웃음과 함께 숨이 제대로 쉬어지는 순간이었다.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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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 전에 카페로 찾아온 차정한은 기분이 좋았는지 자신을 알아보고 다가온 사람들에게 사인을 해 주고, 사진 요청을 하는 사람과는 사진도 같이 찍어 주었다. 한 명이 사진을 찍자 카페 안에 있던 거의 모든 테이블의 사람들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차정한의 주변으로 몰렸다. 깜짝 팬미팅처럼 변한 분위기에 당황스러웠지만,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차정한을 보니 좋기도 했다.

마감 직전 손님들이 나가기 직전까지 사인을 다 해 주고, 사진까지 다 찍어 준 차정한이 꼭 직원처럼 카페에 많이 와 달라며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앞으로도 많이 와 주세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익숙하게 안에서 문을 잠그고 입구 불까지 끈 차정한이 카운터로 다가와 몸을 앞으로 쭉 빼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가 특별히 예약했다는 저녁을 먹으러 가기로 한 게 떠올랐다.

“가자. 예정에도 없던 팬미팅을 했더니 정신이 다 없네.”

“알았어. 옷만 갈아입고 올게.”

“응. 내가 블라인드 내릴게.”

“고마워.”

씩 웃으며 창 쪽으로 걸어가는 그를 보며 에이프런을 풀었다. 블라인드 내려가는 소리에 안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겉옷을 걸쳤다. 홀로 나오자 카페 안 블라인드를 다 내린 차정한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얼른 문 쪽에 선 그에게 다가갔다.

“가자.”

“잠깐만.”

출입문에도 쳐진 블라인드를 올리려는 순간 차정한이 내 손을 잡아 저지했다. 왜 그러나 하고 고개를 들자 다가오는 얼굴에 숨이 멈추었다.

“아까 다 나만 보는데 너만 나 안 봤어.”

“…….”

“미치겠더라….”

“…….”

“난 너 보러 온 건데, 넌 나 안 보고.”

내 얼굴을 양손으로 쥔 차정한이 그대로 급한 사람처럼 입술을 머금었다. 나는 눈을 감고, 입속으로 파고드는 그의 혀를 향해 내 혀를 살짝 먼저 움직였다. 맞물린 입술 사이로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숨이 터지고, 뒤섞였다. 나는 차정한의 숨을 삼키며 그와 키스했다.

어둡고 조용한 카페 안으로 젖은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숨이 한 번씩 터지는 소리가 울렸다. 나는 차정한의 힘에 밀려 자꾸만 뒷걸음쳤다. 차정한은 갈증이 난 사람처럼 굴었다. 얼굴을 쥐고 있던 손이 귓가로 움직여 귓불을 매만질 때마다 묘한 감각이 턱과 목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아…. 정한아, 음, 흣….”

창가에 있는 바까지 밀려 등이 닿았다. 차정한은 입술에서 턱을 타고 목덜미로 미끄러져 내려가 입술을 묻었다. 피부에 뜨거운 숨이 닿아 물리는 순간 탄성 같은 숨이 터졌다. 말려야 한다는 머리와는 다르게 몸은 자꾸만 그런 차정한을 끌어당겼다. 달아오른 감각은 너무나도 쉽게 이성적인 감정을 무너뜨렸다. 나는 차정한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그를 달랬다. 확 밀거나 떼어냈다가 그보다 더 빠르게 달려들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하….”

내 목덜미에 파묻고 있던 얼굴을 든 차정한이 조금 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와 섹스할 때 처음 봤던 흥분한 얼굴과 비슷한 모습이라 말을 해야 하는데 자꾸 밖으로 나오지 않고 목 뒤로 넘어갔다. 나는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가야지. 늦겠다.”

“…….”

“특별히 예약까지 한 거라며…. 응?”

“…후회 중이야.”

“…….”

흥분이 묻은 눈을 감아 심호흡한 차정한이 나를 끌어안았다. 요즘 차정한은 나를 찾아오면 늘 나를 끌어안고, 키스했다. 우리가 늘 이랬던 것처럼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거침이 없었다. 나만 이 상황을 아직도 낯설어하고, 떨려 하는 것 같아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그를 볼 때마다 기쁨보다 불안감이 더 컸다.

“가자. 배고프겠다.”

다시 원래 내가 알던 차정한처럼 돌아와 씩 웃은 그가 내 손을 잡아 문으로 이끌었다. 문 위로 내려온 블라인드를 올리려는 나를 저지하고, 직접 올려 문을 연 차정한이 내 허리를 감싸며 먼저 나가게 했다. 뭔지 모를 이질감에 걸음을 옮기자 그가 조수석 문을 열고 내가 탈 때까지 기다렸다.

“타. 춥다.”

조수석으로 오르자 그의 몸이 안으로 쑥 들어와 안전벨트를 채워 주었다.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내가 할 수 있다고 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운전석에 오르는 그를 바라보았다.

“첫 촬영은 언제야?”

“다음 주 목요일. 내일은 대본 리딩.”

“다음 주부터 바빠지겠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래도 저 감독님은 인간적으로 가능한 스케줄로 촬영하셔서 크게 걱정은 안 해.”

“빨리 보고 싶다. 재밌을 것 같아.”

“그 차정한 기다리지 말고, 지금 나나 좀 봐 줘. 연기하는 내가 좋아, 지금 내가 좋아?”

“…넌 가끔 진짜 이상한 거 물어보더라.”

신호에 걸려 선 차정한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손을 뻗어 내 뺨을 매만진 그가 대답을 꼭 듣겠다는 듯 다시 물었다.

“넌 연기하는 내가 더 좋지? 그 안에서는 멋있는 역만 하니까.”

“연기하는 너랑 지금 운전하는 너랑 다른 사람처럼 말하네.”

“사람은 같은데… 음, 그 안에 속성이 좀 다르지. 내가 진짜 그 캐릭터 같은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니까. 말 그대로 연기잖아. 그런 척하는 거.”

“네가 좋으니까 네가 연기하는 캐릭터도 다 좋은 거야.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지….”

대답 대신 손을 뻗어 내 손을 쥔 차정한이 씩 웃었다. 당연한 것을 꼭 말로 들어 확인받고 싶어 하고, 확인받으면 애처럼 좋아하는 것을 볼 때마다 귀여우면서도 조금 마음이 아팠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늘 추측하며 살아야 했던 내가 모르는 차정한의 어린 시절이 짐작되기 때문이었다.

“진짜 열심히 해야겠다. 네가 나 더 좋아하게.”

차정한을 더 좋아한다는 건 어떤 걸까.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이렇게 온 마음을 가득 채우고, 보고만 있어도 세상이 다 차정한으로 물드는데… 여기에서 어떻게 더 좋아할 수 있을까. 손이 닿는 느낌 하나만으로도 심장이 이렇게 쿵쾅대는데. 아마 차정한은 모를 것이었다. 내 마음이 도대체 어느 정도인지.

“안 막히니까 금방 오네.”

낮에는 30분 정도 걸릴 거리를 밤이라 그런지 15분 만에 올 수 있었다. 아직 영업 중이기는 해서 주차해 주시는 분에게 차를 맡기고 차정한과 안으로 들어갔다. 차정한은 아까 카페에서처럼 문을 먼저 열어 나를 들어가게 해 주고, 또 안내를 받아 방으로 들어갈 때도 내가 먼저 신발을 벗고 들어갈 수 있게 배려했다.

이랬던 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차정한의 이 배려는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는 마음이 묻어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뭔가 자연스럽지가 않고 조금은 부자연스러웠다.

“여기 오랜만에 온다.”

“그러게. 전에 오기로 했는데 나 아파서 못 왔었지.”

“아, 맞아. 그때 오려고 했다.”

차정한이 미리 주문을 해 두어 그런지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식탁 위로 음식들이 가득 놓였다. 따뜻한 솥밥에 맑은국과 찌개, 갈비구이와 생선구이, 나물들과 잡채, 부침개까지 커다란 한 상을 가득 채운 것들을 보니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별로 없던 식욕이 조금 돌았다.

“많이 먹어. 넌 알아서 챙겨 먹는다고 하는데 얼굴 살 빠졌어.”

“티 많이 나? 난 잘 모르겠던데.”

“눈으로 보는 것보다 만져 보면 확 티나.”

“…….”

“너보다 내가 잘 알아, 그건.”

그의 손이 내 얼굴을 매만지던 느낌이 살아나 뺨과 귓가가 뜨거웠다. 당황한 걸 티 내고 싶지 않아 얼른 밥을 공기로 조금 덜어 헤집었다.

“뜨거우니까 조심해.”

“…응.”

밥을 굉장히 오랜만에 먹는 것 같았다. 대충 끼니를 때울 것들을 먹다 보니 이렇게 제대로 밥상을 차려 먹을 일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오랜만에 먹는 따뜻한 밥은 아주 맛있었다. 차정한도 잘 먹는 걸 보니 더 좋았다.

“촬영 시작하면 밤샘은 안 하겠지만, 그래도 늦게 끝날 때 있을 텐데 그런 날은 보러 가지 말까? 너 잘 텐데 깨우기도 그렇고.”

“나 깨우는 게 문제가 아니라… 너 피곤하니까 가서 쉬어야지. 늦게 끝나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다음 날 촬영을 어떻게 가. 아침에 바로 할 때도 있을 텐데.”

“한 달이 얼마나 짧은데.”

“…….”

“그렇게 시간 안 맞아서 너 몇 번 보지도 못하고 한 달 휙 가 버리면 안 되잖아.”

“…올 수 있으면 와. 피곤한데 참고 오지는 말고. 난 원래 늦게 자기도 하고, 괜찮으니까 너 괜찮은 것부터 생각해.”

“난 너 보면 피곤한 것도 다 풀려. 알잖아. 너 있어서 버티고 찍는 거. 많이 귀찮게는 안 할게. 얼굴만 보고 가도 돼.”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차정한이 귀찮았던 적이 없었다. 차정한이 뭘 어떻게 해도 그건 전혀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내가 그의 시간을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내게는 전부 다 좋은 일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밤이든 새벽이든 그게 언제든 차정한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건, 나를 보러 차정한이 온다는 건 내게 귀찮은 일이 될 수가 없었다.

“알았어. 늦는 날에 미리 알려 줘.”

기다릴게. 라는 말이 입술을 간질였다. 어려운 말도 아니고 힘든 말도 아닌데 늘 감추고 사는 게 너무나 당연하고 익숙해서 그런 건지 이 별것 아닌 말이 입술의 문턱을 넘는 게 힘들었다.

“…기다릴게.”

문턱을 넘었지만, 형편없게 작은 목소리였다. 어쩌면 차정한이 듣지 못할 만큼 그렇게 작았다. 괜히 민망해져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그를 바라보았다. 나를 빤히 보고 있는 차정한을 보니 차가 물들인 따뜻함이 귓가와 목 뒤까지 번져 올라갔다.

“너 진짜 예쁘다.”

“…….”

“아무도 주기 싫어.”

“…….”

“내가 다 가질래.”

할 수만 있다면 이 방 어디인가로 숨고 싶었다. 얼굴이라도 손에 파묻고 차정한의 시선을 피하고 싶기도 했다. 그만큼 부끄럽고 심장이 너무 크게 뛰었다. 온몸이 다 쿵쿵 울릴 만큼 너무 소리가 커서 차정한도 이걸 다 듣고 있을 것 같았다.

“나 그래도 요즘은 좀 사랑이 뭔지 알 것 같아.”

“…….”

“나만 보고 싶은 거 맞지. 나만 가지고 싶고, 누구도 보여 주기 싫고. 계속 생각나고, 보고 싶고… 보면 키스하고 싶고, 닿고 싶고… 네가 나 안 보면 죽을 것 같은 거 맞지.”

“…….”

“확실하게 알았다고는 말 못 해. 네가 친구였을 때도 난 네가 나랑만 친했으면 좋겠고, 다른 친구 보러 간다고 하면 싫었거든. 친구인데도 너 어디 가두고 못 나가게 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 적 있었어.”

“…정말 그게 농담이 아니었다는 거야?”

“이것 봐. 그걸 아직까지도 농담이라고 생각하니 내 진심을 몰라 주지. 나 농담한 거 아니고, 장난친 거 아니라고 전에도 말했잖아.”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차정한이 보라는 듯 한숨을 쉬고 턱을 괸 채 나를 바라보았다. 그 예쁘고 매끄러운 눈동자가 좋아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다.

“알았어…. 농담 아니야.”

“절대 너 안 놓칠 거야. 내 옆에서 멀어지게 안 할 거야. 내가 꼭 그렇게 할 거야. 그러니까 유현아.”

“…응.”

“나 사랑해 줘.”

“…….”

“마음 접으려고 노력하지 말고, 숨기려고 하지 말고 아까처럼 나한테 너도 다 말해 줘. 기다린다고 한 것처럼 그렇게. 응?”

다정한 웃음으로 부탁하는 그를 보니 너무 떨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겨우 고개만 끄덕였다. 차정한은 그것으로도 충분했는지 씩 웃으며 기분 좋은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마음속 출처 모를 걱정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가 웃어 좋은 밤이었다.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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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근처라 일요일에는 문을 닫는 덕분에 조금 늦잠을 자고, 일어날 수 있었다. 오늘은 집도 몇 군데 보러 다니고, 서점에 들러 읽을 책을 몇 권 사서 들어올 계획이었다.

카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오피스텔 몇 개를 보고, 어느 정도 괜찮기만 하면 바로 계약을 할 생각이었다. 이 방에 있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확실히 나의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 여전히 조금 불편했다.

차정한이 남겨 둔 메시지 27개에는 오늘 중요한 촬영이 있어 저녁때쯤 끝날 것 같다는 말과 같이 저녁을 먹고 드라이브를 하자는 말이 적혀 있었다. 나는 그에게 촬영 잘하고 오라는 답을 남기고 카페를 나섰다.

부동산에서 나온 분과 살펴본 오피스텔 세 곳은 나쁘지는 않지만, 가격에 비해 썩 만족스럽다고는 말할 수 없는 곳이었다. 차정한이 마련해 줬던 오피스텔에 살아 내 눈이 너무 높아진 건 아닌가 생각하고, 최대한 현실적으로 보려고 했지만, 그래도 뭔가 부족한 점이 너무 눈에 잘 보였다.

한 곳은 주변에 모텔 같은 곳이 많아 별로 분위기가 좋지 않았고, 또 한 곳은 전에 살던 사람이 집을 어떻게 쓴 건지 담배에 찌든 냄새가 문을 열자마자 확 끼쳤다. 그리고 마지막 오피스텔은 구조가 별로라 평수에 비해 공간이 너무 좁게 보였다.

집 구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눈으로 보고 나니 정말 쉽게 구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매물이 나오면 연락을 하겠다는 부동산업자분과 인사를 나누고 헤어져 근처에 있는 큰 서점에 들렀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집 때문에 심란해서 그런 건지 밥 생각이 없어 그냥 바로 책들을 구경했다.

소설 몇 권과 마인드 컨트롤에 좋다는 책 한 권을 계산하고 서점 1층에 있는 카페에 가서 아주 연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키고 앉아 산 책을 읽었다. 마인드 컨트롤에 좋다는 책 안에 쓰인 말들은 전부 나도 다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알고는 있지만, 쉽게 실천할 수는 없는 이야기들을 내내 보다가 중간쯤 덮었다. 책을 아무리 보고, 이렇게 해야지 생각만 한다고 달라지는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생각은 쉽지만, 실천은 늘 너무 어려웠다.

“…….”

연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그냥 창밖을 지나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다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 걸까. 한 번쯤은 그 생각을 읽고 싶었다. 답이 나오지 않는 일이 있을 때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것을 해결하려 어떤 노력을 하는지 여러 이야기를 듣고 싶을 때가 있었다.

자꾸 한숨만 나고, 지루했다. 하루가 너무 길어서 뭘 해야 하나 생각을 해도 잘 떠오르지 않았다. 다시 책을 보려고 해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자꾸 창밖만 멍하니 보게 됐다.

[정한 : 어디야? 나 끝났어 빨리 끝났지]

[정한 : 너 빨리 보러 가려고 혼신의 연기를 펼쳤거든]

[정한 : 오랜만에 해 떴을 때 너 보겠다]

갑자기 연이어 울리는 진동에 메시지를 확인하니 차정한이었다. 여유롭고 심란한 일요일에 차정한의 메시지를 보니 무척 반가웠다. 나 역시 차정한 없이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책 사러 한영문고 왔다가 거기서 커피 마시고 있어]

[정한 : 카페 근처 한영문고?]

[응 거기]

[정한 : 30분쯤 걸릴 거래 도착하면 전화할게]

[알았어]

차정한이 온다는 말에 조금 축 처졌던 기분이 좋아졌다. 책을 전부 봉투에 넣고, 커피도 트레이 위에 놓았다. 왔다는 연락이 오면 언제든 바로 정리하고 나갈 수 있게 준비를 하고, 내내 휴대폰만 바라보았다. 집 때문에 심란했던 게 아니라 아무래도… 차정한이 보고 싶었던 것 같았다.

20분 정도 지났을 때 코너만 돌면 된다는 차정한의 전화에 얼른 컵을 정리대에 놓고 바깥으로 나갔다. 누가 봐도 연예인이 타는 밴일 거라고 생각하게 되는 큰 밴이 앞으로 섰다. 나는 능숙하게 그 문을 열고 안으로 올랐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차정한 얼굴에 너무 길게 느껴졌던 하루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녕, 유현 씨. 자주 보니 좋네.”

“형 안녕하세요.”

“난 유현 씨 일 이제 전처럼 같이 안 한다고 해서 정한이랑 대판 싸운 줄 알고 진짜 조마조마했는데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지.”

동윤 형의 말을 듣던 차정한이 내 손을 잡아 가져갔다. 손가락 사이로 차정한의 손가락이 문질리며 들어와 얽히는 순간 형에게 말하려던 답을 전부 잊어 잠시 헤맸다.

“아…. 저, 저희 안 싸워요. 크게 싸울 일도 없고.”

“원래 오랜 친구가 싸우면 쉽게 안 풀리거든. 서로 너무 잘 아니까 자존심 때문에 말할 타이밍을 놓치기도 쉽고, 약점 건드리기도 쉬우니까. 둘은 진짜 잘 지냈으면 좋겠어. 그런 친구 하나 있고 없고가 얼마나 다른데.”

“…네. 그럴게요.”

차정한이 내 손을 꽉 쥐었다가 놓는 것을 반복했다. 조일 때는 손가락이 스치며 꽉 맞물리고, 풀릴 때는 스르르 손가락 사이에서 빠져나가듯 문질렸다. 동윤 형에게 보일 리는 없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손을 빼려고 해도 차정한은 고집스럽게 놓아주지 않았다.

“…정한아.”

작게 그를 부르며 다시 손을 빼려 움직이자 차정한은 아예 고개를 저으며 잡은 손에 더 힘을 주었다. 나는 포기하고 그의 집까지 갈 수밖에 없었다.

차정한은 아파트 주차장으로 들어가 동윤 형이 내리는 것을 본 뒤에야 손을 놓아주었다. 내 몸에 달린 내 손인데 꼭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너무 뜨거웠다. 나는 괜히 손을 다른 손으로 꾹꾹 누르며 차정한을 따라 차에서 내렸다.

“난 갈게. 둘이 재밌게 놀아.”

차에 다시 올라 손을 흔드는 동윤 형에게 인사하고, 밴이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차정한은 그 꽁무니를 보고 있는 내 손을 잡아 자신의 차들이 있는 쪽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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