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43)

갑자기 얼굴 아래로 쑥 들어오는 얼굴에 놀라 고개를 들자 차정한이 소리 내어 웃었다. 가까이 의자를 붙여 한 번씩 다리가 스쳤다. 나는 다리를 오므린 채 움직이지 않으려 애썼다.

“고개 숙이지 마.”

“…….”

“나 좀 봐, 유현아. 나 너 보러 온 거야. 얼굴 좀 보여 줘.”

“…….”

“나 너 보고 싶었어. 너 없으니까 집에 들어가기도 싫어. 집도 텅 비었고, 오피스텔도 텅 비었고… 너 전화는 안 받고, 나 너 나가고 없는 오피스텔에서 밤새 있었어.”

춥고 무서울 만큼 적막한 그곳에 혼자 밤새 있었다는 말에 마음이 확 조여 들었다. 그런 곳에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그가 밝고 따뜻한 자신의 집을 놔두고 거기에 밤새 있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당연히 갔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더 마음이 아팠다.

“왜 그랬어…. 안 무서웠어? 추웠을 텐데.”

“알고 싶었어. 네가 나한테 없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

“마음까지 텅 비어 버리더라.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무서웠어. 네가 진짜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는 걸 보고 나니까 진짜 돌아버릴 것 같고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은데…. 무섭더라. 진짜.”

“…기댈 곳이 없어졌다고 생각해서 그런 거 아닐까.”

딱히 소리 내려고 한 말은 아니지만, 소리를 냈다고 후회할 말도 아니었다. 나는 차정한이 나의 사랑에 중심을 맞춰 자신의 감정을 오해하지 않기를 바랐다.

“예전에 그랬었잖아. 넌 기댈 곳이 없었다고. 그래서 다른 사람한테 어떻게 기대는지도 모른다고.”

“기억나. 네가 내 말 듣고 안아 줬지. 몸에서 힘 빼 보라고 하면서.”

우뚝 선 차정한은 몸에 힘을 푸는 것도 잘하지 못했다. 혼자 쓰러지지 않으려고 늘 몸에 힘을 준 채 주변을 경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차정한을 안고 한참이나 등을 토닥이자 조금씩 그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한참 뒤에야 차정한은 힘이 빠진 몸으로 내게 온전히 기댔다. 나보다 큰 몸에 그를 버티고 있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무게를 온전히 끌어안고 있다는 게 좋아 두근거렸다.

“이제 그럴 수 없어서 무서웠을지도 몰라. 네가 알지 못하는 게 꼭 사랑이 아닐 수도 있어. 같은 시간을 보내고, 서로를 봤어도 느끼는 게 다를 수도 있는 거잖아. 같이 있다고 다 똑같은 감정을 가지게 되면… 세상에 짝사랑이라는 말이 왜 있겠어.”

마지막 말에는 조금 웃음이 따라 흘렀다. 차정한은 그런 나를 가만히 조금 불만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왜?”

“사랑이 아니었으면 좋겠어?”

“어…?”

“혼자 사랑하다가 그냥 이대로 끝나는 게 가장 좋은 거야? 넌 내가 널 사랑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아. 사랑일 수도 있다고 말해도 되는 거잖아. 그런데 유현이 너는 자꾸 내가 지금 착각하고 있는 거라고 말해.”

정곡을 찔려 버렸다. 나를 너무나도 정확하게 간파해 버렸다. 차정한이 알지 못하는, 궁금해하는 그 감정이 나를 향한 사랑이라면 물론 좋겠지만, 아닐 가능성이 더 크기에 나는 애초에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를 방어하는 것이었다. 사랑이 아니었다는 결과를 마주해도 큰 상처를 받지 않도록.

“다른 건 다 긍정적이면서 지금 나한테만 부정적이지.”

“…….”

“너랑 이제 이런 상의 안 할래. 내가 결정한 대로 할 거야.”

“…….”

“넌 네 감정에 책임지고 나는 내 결정에 책임지면 되는 거잖아.”

언제 이렇게 생각을 다 하고 온 건지 말에 끼어들어 그러지 말라고 할 틈이 없었다. 차정한은 의자를 조금 더 가까이 내가 있는 쪽으로 끌어 몸을 가까이 붙였다.

“나 좀 봐 달라니까.”

“…지금까지 봤잖아. 늦었는데 얼른 가. 내일 스케줄 있을 거 아니야. 곧 드라마도 들어갈 텐데…. 준비할 것도 많잖아.”

“바빠질 거야. 바빠지면 그땐 너 나 보고 싶어도 많이 못 봐. 그러니까 지금 볼 수 있을 때 많이 봐.”

너무 가까워질 것 같아 얼굴을 피하는 내 앞으로 다시 차정한의 얼굴이 가깝게 다가왔다. 이러다 터질 것처럼 뛰는 심장박동을 들킬 것 같아 몸을 일으키려는데 차정한이 얼른 내 팔을 잡아 다시 앉혔다. 의자에 주저앉아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니 지나치게 가까운 곳에서 눈이 마주쳤다.

“넌 잘 지냈어?”

“…응.”

“나 없는데도?”

“…응.”

“진짜?”

“…….”

“너 거짓말하는 거 다 티나.”

차정한이 아직도 쥐고 있는 팔이 화끈거렸다. 너무 뜨거워서 이대로 팔이 녹아 사라져도 모를 것 같았다. 다시 일어나서 가야 하는데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가까운 곳에서 닿아오는 그의 목소리와 눈빛을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었다.

“…….”

“…….”

차정한만큼 잘 지내지 못한 내게로 그가 조금 더 가깝게 다가왔다. 입술이 닿으려는 순간 나는 고개를 조금 돌렸다. 차정한이 내 팔을 잡지 않은 손을 들어 그런 내 턱을 부드럽게 잡아 다시 원래 자리로 데려갔다.

“우리 이제 친구 아니라며.”

그대로 입술이 맞물렸다. 따뜻한 입술이 포개지며 그의 입술이 벌어졌다. 내 턱을 쥔 채 살짝 누른 그가 내 벌어진 입술 사이로 파고들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멈춘 내 혀를 옭아매었다. 힘을 주어 뒤엉켰다가 이내 부드럽게 빨리는 것에 발끝에 힘이 들어갔다. 술에 취한 것도 아니고, 내가 부탁한 것도 아닌데 내게 먼저 키스하는 차정한이 너무 비현실적이라 꿈을 꾸는 것 같았다.

“…하아…….”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과 함께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맞물렸던 입술이 떨어지고, 열이 잔뜩 모인 입술로 서늘한 공기가 달라붙었다. 귓가에 들리는 거친 숨이 그대로 조금 더 가깝게 쏟아졌다. 눈이 다시 마주치는 순간 차정한은 안달이 난 사람처럼 내게 달려들었다. 거칠게 맞물린 입술은 틈 하나 없이 완전히 맞붙어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하으… 그, 그만….”

밀어내도 다시 맞물리고, 고개를 돌려도 다시 내가 온 쪽으로 다가와 집요하게 겹쳐졌다. 강하게 빨아들이다가 나를 달래기라도 하듯 혀끝을 살살 머금고 문지르는 느낌에 결국, 밀어내려던 손으로 그를 붙잡았다. 그의 고개가 기울며 입술이 더 서로에게 깊게 벌어져 맞물렸다. 나는 눈을 감은 채 뺨을 쓸어내리는 그의 손길과 입속을 완전히 녹일 것처럼 구는 그에게 집중했다.

“…으응……,”

혀끝을 문질러 주다가 빨아들일 때마다 온몸이 움찔거렸다. 차정한도 내가 그렇게 해야 기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는지 내가 조금만 뒤로 물러나려고 해도 혀끝을 살짝 깨물며 빨아들였다. 목에서 앓는 것 같은 소리가 자꾸 흘러 창피해 귀를 막고 싶었다.

“하아… 하으…….”

“하….”

한참이나 이어지는 키스에 더는 숨을 참기가 힘들어 그를 밀어냈다. 거부가 아니라 숨 때문에 밀어내는 것을 알았는지 순순히 밀려난 차정한이 밭은 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숨이 차고 심장이 빠르게 뛰는지 막 천둥이 치는 것처럼 저릿저릿한 감각이 가슴에서 번져 나갔다. 나는 숨을 채 고르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얼른 차정한에게서 멀어졌다.

“…가.”

겨우 말을 뱉고 카운터 안으로 도망가 쪼그려 앉았다.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서 방까지 갈 수가 없었다. 나는 무릎 위로 얼굴을 파묻은 채 엉망으로 터지는 숨을 참으려 애썼다. 목 뒤가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뒤에야 숨이 가라앉았다.

“유현아.”

거친 숨이 사라진 다정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내려앉았다. 나는 계속 쪼그려 앉아 무릎 위로 얼굴을 파묻은 채 대답하지 않았다.

“내일 또 올게. 내일도 오고 모레도 오고, 스케줄 있어도 끝나면 올게.”

“…….”

“누나 한 달 뒤에 온다며. 그동안 네가 여기 대신 맡아 하는 거고.”

“…….”

“한 달만 나 피하지 말고 만나.”

“…….”

“그럼 답이 나오겠지. 내가 너랑 뭘 하고 싶은지, 우리한테 생길 마지막 이름이 뭔지.”

“…….”

“갈게. 내일 보자.”

멀어지는 발소리에 무릎에 묻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잠갔던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고, 곧 문에 달아 둔 작은 종소리가 울렸다. 나는 완벽하게 고요해진 공기와 마주하며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와 닿은 입술이 아직도 너무 뜨거웠다. 괜히 입술을 꾹꾹 깨물며 일어났다. 문을 다시 잠그러 가 잠금장치를 채우는데 문밖에 세워진 차에서 손 하나가 쑥 나왔다.

“…….”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인사한 차정한의 차가 그제야 카페 앞을 빠져나갔다. 나는 멀어지는 차 꽁무니를 조금이라도 더 보려고 고개를 기울이다가 그런 내 모습을 깨닫고 눈을 감았다.

‘한 달만 나 피하지 말고 만나.’

그의 목소리가 입술처럼 뜨거운 머릿속을 마구 울렸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차가운 유리문에 머리를 눌렀다. 꽁꽁 얼 것처럼 차가운 기운이 금세 머리를 타고 내려갔지만, 입술은 여전히 뜨거웠다. 복잡한 머릿속 유일하게 분명한 사실은 단 하나였다.

“…….”

친구도 아니고 연인도 아닌, 관계의 이름을 잃은 차정한과 키스했다는 것 단 하나.

#51

?

?

저녁 일곱 시부터 마감할 때까지 유명 신문사의 중요한 인터뷰 촬영을 위해 당일에 급히 카페를 통으로 빌릴 수 있겠냐는 연락이 왔다. 종종 카페를 통으로 빌려 촬영을 하거나 하는 경우가 꽤 있다고 들어 누나에게 전화를 하니, 가격과 어떻게 진행을 하면 되는지 알려 주었다.

가능하다는 답을 들은 사람은 몇 번이나 내게 고맙다고 말했다. 원래 가기로 했던 곳과 문제가 생겨 눈앞이 캄캄하던 차에 추천을 받아 한 연락이라고 했다. 좋아하는 목소리를 들으니 덩달아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다.

전화를 끊고 나니 오늘도 찾아오겠다고 말한 차정한이 떠올랐다. 몇 시에 올지는 모르지만, 어제와 비슷한 시간에 온다면 인터뷰 중이라 안에 들어올 수도 없을 것이었다. 헛걸음하지 않게 자초지종을 말해 주는 게 좋을지 잠시 생각하다가 관두었다. 오지 말란다고 안 올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한 달만 나 피하지 말고 만나.’

어제 차정한에게 그 말을 들은 뒤부터 계속 같은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 만나자는 말의 의미가 어쩐지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다를 것 같았다. 나야 그를 향한 감정이 사랑이니 설레는 쪽으로 생각을 하게 되지만, 차정한에게 만나자는 말은 말 그대로 매일 얼굴을 보자는 의미일 것 같았다.

‘지금부터는 내가 있을게. 내가 움직이고, 내가 너한테 갈게.’

늘 생각하는 거지만, 차정한은 내 기준에서 어떻게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 싶은 그 ‘저런 말’을 굉장히 잘했다. 친구 사이에 소리 내어 표현하기 부끄럽거나 조금 과하다 싶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때마다 당황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건 늘 나의 몫이었다.

“…….”

한 달 동안 만나자는 말을 거절해도 나는 차정한이 찾아오는 이상 그를 볼 수밖에 없었다. 누나가 올 때까지 꼼짝없이 여기를 지키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그래 보자고 말을 할 수도 없었다. 한 달 뒤가 너무 무섭기 때문이었다.

한 달 동안 봐도 달라진 게 없다거나 어제처럼 휩쓸려 그와 닿다가 아무 이름도 없이 스킨십만 할 수 있는 사이가 될지도 몰랐다. 역시 노력해 봐도 친구 이상의 감정은 생기지 않는다는 결말의 가능성이 가장 크기에 굳이 그걸 확인하러 발을 떼고 싶지 않았다. 멀리서 봐도 이렇게 잘 보이는데, 굳이 가까이 가서 보고 들을 필요는 없었다.

“저, 형! 이거 컵이 깨진 것 같은데 버리면 되는 거죠?”

생각 안으로 파고드는 아르바이트생, 현우의 목소리에 나는 얼른 컵을 받아들었다. 현우의 말처럼 미세하지만 분명 입술이 닿는 곳이 깨져 거칠거칠한 느낌이 났다.

“응, 깨진 것 맞는 것 같아. 버려야겠다.”

“티도 안 나는데 아깝긴 하네요.”

“지금은 티가 안 나지만, 이러다가 금이 쫙 가고, 깨져 버려. 내가 버릴게.”

“네.”

딱 나와 차정한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겉으로는 깨진 게 티가 나지 않아 만나고 또 만나다 보면 금이 확 가서 처음의 예뻤던 모습을 알아볼 수도 없게 확 깨져 버릴 우리를 보는 것 같아 너무 무서웠다. 나는 얼른 가장자리가 깨진 컵을 카운터 아래 깊숙한 곳으로 치웠다.

여섯 시에 카페를 완전히 비워야 해서 세 시쯤 다섯 시 반까지만 이용할 수 있다는 양해 말씀을 적어 문에 붙이고, 주문하는 손님들에게도 전부 사정을 이야기했다.

마지막 손님이 다섯 시 반에 가게를 비우고 나는 혼자 카페를 전부 청소했다. 쓰레기를 다 치워 내놓고, 손님들이 두고 간 컵과 트레이도 전부 정리했다. 의자를 반듯하게 넣고, 흐트러진 테이블까지 전부 각을 맞춰 정리하고 나니 카페 밖으로 커다란 차가 들어왔다.

가장 먼저 안으로 들어와 유명한 신문사 이름을 대며 기자라고 밝힌 여자가 내게 명함을 내밀고, 악수를 청했다.

“여기도 안 된다고 했으면 오늘 인터뷰 펑크 날 뻔했어요. 정말 고맙습니다. 오늘 인터뷰 잡힌 분이 펑크 나면 다시 모시기도 힘든 분이거든요. 배우 차정한 씨 아시죠?”

“네?”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나도 모르게 조금 큰 소리로 되물었다. 기자와 카메라를 세팅하던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았다. 얼른 이 상황을 수습해야 했기에 아무렇게나 나오는 말을 내뱉었다.

“아… 차정한 씨가 오신다니까 좀 놀라서요….”

“여기 사실 차정한 씨가 추천하신 곳이거든요.”

“…네?”

“오전에 원래 진행하려고 한 곳에 사정이 생겨서 캔슬이 된 거예요. 그래서 완전 멘탈 나가서 여기저기 섭외하려고 하는데 장소가 너무 좁거나, 오래됐거나, 프랜차이즈는 또 좀 그렇고…. 안 되겠다 싶어서 연락을 드렸었거든요. 장소 섭외에 갑자기 문제가 생겨서 오늘 인터뷰 그냥 신문사에서 해야 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더니 여기를 알려 주셨어요.”

“…아… 네.”

“배우분이 추천한 곳이니 뭐 믿고 질렀죠. 검색해 보니 차정한 씨 단골 카페라고 글도 나오더라구요. 인테리어도 진짜 모던하게 잘하셨어요.”

차정한이 여기를 추천했다는 말에 하마터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한숨을 내쉴 뻔했다. 정말 너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 생각이 전부였다.

“아, 대략적인 타임라인 말씀드릴게요. 여섯 시 반쯤 차정한 씨 도착하실 거고, 인사 나누다가 일곱 시부터 인터뷰 시작할 예정입니다. 음료는 차정한 씨 오시면, 한 번에 다 주문해서 만들어 주시면 됩니다. 혹시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쿠키나 이런 것도 있나요?”

“…네. 쿠키랑 케이크 같은 것도 있습니다.”

“드실지는 모르겠는데 그래도 저녁 시간이고, 구색 맞추는 게 보기 좋으니까 예쁘게 놓을 수 있는 핑거푸드 위주로 몇 가지 세팅 부탁드립니다.”

“네…. 알겠습니다.”

내게 가볍게 묵례한 기자는 같이 온 스태프들과 여기저기 각도를 봐 가며 가장 잘 나올 수 있는 곳을 찾아 카페를 돌아다녔다. 나는 카운터 안으로 들어가 손으로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쿠키와 한입에 넣을 수 있는 작은 페이스트리 같은 것들을 꺼내 접시에 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밴이 카페 앞에 섰다. 동윤 형이 차에서 내려 문을 열자 말끔하게 차려입은 차정한이 내려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차정한은 나를 보고 웃으며 고개만 살짝 숙여 인사했다. 아는 척을 해서 좋을 것이 없기에 나도 고개만 조금 숙여 인사했다.

커피와 핑거푸드를 테이블 위에 세팅하고, 카운터로 빠져 조용히 한쪽에 앉아 차정한과 기자가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 들으려고 듣는 게 아니라 이곳에 존재하는 소리가 둘의 목소리뿐이라 어쩔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방에 들어가 있고 싶은데 언제 나를 찾을지 몰라 그럴 수도 없어 괜히 원두 찌꺼기만 포크로 꾹꾹 눌렀다.

다행히 카운터에서 바로 보이는 자리가 아니라 조금 편하게 있을 수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는데 계속 들려오는 차정한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인터뷰가 진행되고 끝날 때까지 내내 그 소리와 마주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카페 안으로 울리는 기자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카운터로 다가온 기자가 내게 다시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아 악수하며 조금 굳었을 얼굴을 펴 웃었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사진도 너무 잘 나오고, 여기 와서 하라고 오늘 아침에 그렇게 난리가 났었나 싶을 정도로 좋았어요.”

“좋으셨다면 다행입니다. 인터뷰 나오면 꼭 챙겨 볼게요.”

“네, 정말 고맙습니다. 다음에 기회 되면 또 연락 드려도 되죠?”

“그럼요.”

장비들을 정리해 나가는 스태프들과도 한 번 더 인사를 나눈 뒤에야 카페 안이 조용해졌다. 나는 바깥에서 기자와 인사하고 다시 들어오는 차정한을 바라보았다.

“…뭐 하는 거야, 이게.”

“장소가 필요하다잖아. 거기 신문사 건물 가기 싫단 말이야. 싫어하는 기자도 있고, 전에 거기서 인터뷰할 때 너무 별로였어. 그래서 여기 추천한 거야. 거기는 장소 섭외해서 좋고, 나는 끝나고 바로 너 봐서 좋고.”

“미리 말이라도 해야지. 놀랐잖아. 너 온다고 그래서.”

“미안해.”

“…….”

“화내지 마, 잘못했어. 앞으로 다 말할게.”

카운터 안으로 팔을 뻗은 차정한이 내 손가락을 가볍게 쥐었다. 닿는 순간 어깨까지 확 치고 오르는 저릿한 감각에 얼른 손을 빼자 차정한이 빠져나간 내 손끝을 빤히 바라보았다.

“…….”

“…….”

손끝을 보는 게 뭐라고 부끄러운지 모르겠지만, 발가벗은 걸 보이는 것처럼 이상해서 손끝을 접자 차정한의 시선이 얼굴로 올라왔다. 차정한은 나와 눈을 맞춘 채 카운터 안으로 들어왔다.

“왜, 왜 들어와….”

“친구라면 키스하고 싶은 생각도 안 드는 게 맞는 거지.”

“…….”

“그런데 나 너 보니까 하고 싶어.”

“…미쳤어?”

“그건 나중에 생각할게.”

그대로 내 얼굴을 한 손으로 감싼 차정한이 고개를 기울였다. 나는 그의 어깨 너머로 전화를 받으며 다가오는 동윤 형을 보며 얼른 그의 팔을 잡아 카운터 아래로 내렸다. 영문도 모른 채 다리를 구부려 앉아 숨게 된 차정한이 나를 올려 보았다. 다행히 동윤 형은 전화를 받으며 다른 곳을 보느라 이 상황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그래, 내가 다시 전화할게. 어, 그래. 들어가.”

전화를 끊으며 들어온 동윤 형이 나를 보며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나는 내 다리에 닿아 느껴지는 차정한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형을 보고 웃었다.

“형, 오셨어요?”

“응.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어째 살이 좀 빠진 것 같네.”

“…저는 잘 지냈어요. 저녁은 드셨어요?”

“응, 간단하게 먹고 왔어. 그런데 정한이는?”

“…네? 아……. 정한이는….”

아래에서 불빛이 반짝였다. 나는 슬쩍 시선을 내려 아래에서 휴대폰을 보고 있는 차정한을 확인했다. 형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동윤 형이 있는 쪽에서 진동이 울렸다.

“아, 이 녀석 또 빠져나갔네. 갑자기 약속 생겨서 갔다고 퇴근하래. 이거 또 술 진탕 마시고 유현 씨 찾는 거 아니야?”

“…설마요. 저번에 저랑 약속했어요. 다시는 그렇게 안 마신다고.”

차정한이 손을 올려 내 허리에 묶인 에이프런 매듭을 당겼다. 제법 단단하게 허리에 감겨 있던 것이 힘없이 풀려 차정한의 손으로 넘어갔다. 고작 옷 위에 두르고 있던 에이프런 하나가 벗겨졌을 뿐인데 꼭 옷이 다 벗겨진 것 같은 기분에 귓가가 다 뜨거웠다.

“그럼 다행이지만. 아, 여기 커피 맛있다며. 나 저거 헤이즐넛 라떼 한 잔 주라.”

“아… 네!”

카드를 꺼내는 형을 얼른 말리고 우유를 데웠다. 차정한은 나를 보며 다리가 아프다는 듯 무릎을 두드리는 시늉을 했다. 나는 최대한 집중해서 라테를 만들어 동윤 형에게 내밀었다.

“향 좋다. 난 이게 제일 좋더라. 잘 마실게, 고마워. 가 봐야겠다. 회사 들렀다 가야 하거든. 또 봐.”

인사하고 뒤도는 동윤 형을 따라 카운터에서 나가는데 차정한이 가지 말라는 듯 내 다리를 붙잡았다. 나는 얼른 차정한을 떼어내고 밖으로 나가 밴이 카페를 완전히 떠나는 것까지 보고 겨우 숨을 뱉어냈다. 정말이지 10분도 안 되는 시간이 몇 시간은 되는 것처럼 너무 길게 느껴졌다.

“…못 살아, 내가.”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잠시 머리를 식히고 다시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조금 절룩이며 카운터 안에서 나오는 그를 보자 다시 긴 숨이 흘렀다.

#52

?

?

내내 마음을 졸인 걸 생각하니 솔직히 조금 미워 일단 가게 문을 잠그고, 블라인드를 다 내렸다. 온 카페를 돌며 정리를 하는 동안 내내 차정한의 시선이 닿아 왔지만, 한 번도 보지 않았다.

“내가 다 잘못했어. 그러니까 나 좀 봐.”

“…나 정리하고 들어가서 쉴 거야. 그러니까 가.”

마지막 블라인드를 내리고 카운터로 오는데 차정한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눈을 맞추지 않자 고개를 기울여 눈을 맞춘 그가 내 팔을 양손으로 아프지 않게 힘주어 쥐었다.

“왜 자꾸 가라 그래. 난 너 보러 온 건데. 아까는 인터뷰하느라 못 보고, 갑자기 형 들어와서 못 보고 이제야 제대로 보는데 가라고 그러지 마. 너랑 오늘 있었던 얘기도 하고, 몇 시간… 아니, 한 시간이라도 있고 싶어.”

내 팔을 쥔 차정한의 손을 잡아 내리고 그에게서 조금 물러섰다. 차정한은 떨어져 서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기 오는 건 그래…. 내가 말릴 수도 없고, 오지 말라도 내 말 안 들을 거 아니까… 네 마음대로 해. 난 누나랑 약속한 게 있어서 누나 올 때까지는 여기 꼼짝없이 있어야 하고, 너는 계속 오고… 하면 만날 수밖에 없지.”

“…….”

“오지 말라고는 안 할 테니까… 오늘처럼 놀라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 무슨 일인지 나도 미리 알고, 생각 정리할 시간은 줘야지.”

“알았어. 그럴게. 그럼 나 한 달 동안 만나는 거다?”

그 만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궁금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나는 내가 느끼는 대로 생각하면 되고, 차정한은 자기가 생각한 의미로 행동하면 될 일이었다. 그에게 확답 같은 것을 받을 필요는 없었다. 내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자 차정한이 웃으며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리고 아까 카운터에서처럼 안 했으면 좋겠어. 문도 안 잠그고, 블라인드도 안 내렸는데… 그러다가 누가 너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그런 생각은 안 들었어? 동윤 형이 볼 수도 있었어.”

“…그러게. 그런 생각을 전혀 못 했네. 조심할게, 앞으로. 들키면 나만 곤란한 게 아니라 너까지 피해 보는 거니까.”

그래도 말을 알아들어 다행이었다. 앞에 선 그를 옆으로 살짝 피해 카운터 안으로 들어가 한쪽에 놓인 에이프런을 손으로 말아쥐었다. 허리를 묶고 있던 매듭을 차정한이 풀었던 게 떠올라 괜히 몸 여기저기가 홧홧했다.

“그럼 지금은 해도 돼?”

주문할 것처럼 내 앞으로 와서 선 차정한이 카운터를 두 손으로 짚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뭐?”

“문도 잠갔고, 블라인드도 다 내렸잖아.”

장난이라고 생각하기에는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입가에 웃음은 머금고 있지만,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에이프런을 쥔 손만 괜히 쥐었다 폈다 하는 것을 반복했다.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카운터를 사이에 둔 채 있던 차정한이 다시 안으로 들어와 내게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뒤로 밀린 걸음에도 차정한이 더 빨랐다. 제대로 얼굴을 보고 눈을 마주친 순간 입술이 마주했다. 내 몸보다 큰 그의 몸에서 나오는 힘이 밀려 자꾸만 뒷걸음이 쳐졌다. 나는 픽업데스크까지 밀려가 그 빈 곳을 양손으로 잡고, 거의 그 위로 반쯤 눕혀졌다. 차정한이 그런 내 허리를 한 팔로 감아 확 앞으로 당겼다. 휘감겨 있던 혀가 풀리며 몸이 앞으로 맞붙었다.

“…흣….”

내 다리 사이로 그의 다리가 파고들고, 몸이 조금 더 깊게 포개졌다. 차정한은 금세 달아오른 내 숨을 전부 머금기라도 할 것처럼 틈을 주지 않았다. 숨을 쉬기 힘들어 어깨를 밀어내도 겨우 한 번 헐떡일 시간을 줄 뿐, 다시 내 목덜미를 감싸고 깊게 혀를 옭아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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