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43)

“그쪽에서 뭐 그런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는 것 같고…. 문제는 사람이 없는데 나한테 기억은 있다는 거지.”

“…….”

“아무리 생각해 봐도 유현이 너밖에 없는 거야.”

#32

?

?

내 이름을 들은 순간 잠시 주변의 모든 소리가 다 사라졌다. 차정한이 입술을 움직이는데 잠시 소리가 들리지 않고, 눈앞이 하얗게 바랬다가 천천히 하나둘 색을 되찾았다.

“그런데 그건 말이 안 되거든. 너일 수가 없어.”

말이 안 된다는 말과 나일 수가 없다는 그 말에 차정한이 어떤 장면을 기억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차정한은 다시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는 듯 숨처럼 실소를 작게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꿈인가 봐. 진짜 술 작작 마셔야지. 얼마나 퍼마시고 정신이 나갔으면 그런 꿈을 다 꾸지. 무슨 꿈인지 차마 너한테 말도 못 하겠다.”

“그거 꿈 아니야.”

물을 마시던 차정한이 움직임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는 것을 본 뒤에야 내가 그에게 소리 내어 말했다는 것을 알았다.

“뭐가?”

나에게는 마지막 기회가 남아 있었다. 지금이라도 대충 얼버무려 이 상황을 빠져나갈 딱 한 번의 기회와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별일 아닌 것처럼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미래의 나는 지금, 이 순간을 후회하고 있을까. 짐작할 수가 없어 내가 직접 미래에 가서 생각하기로 했다. 나일 수가 없다는 차정한에게 그게 나였다고 한 번쯤은 말하고 싶었다.

“네가 기억하는 그 사람… 나 맞아.”

차정한은 내가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에 그래도 아직은 웃음이 남아 있었다.

“내가 뭘 기억하는 줄 알고 그런 말을 해. 뭔지 들으면 너 진짜 도망칠걸.”

“…키스했잖아.”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냐는 듯 조금 놀란 눈으로 나를 보던 차정한이 뭔가를 말하려고 입을 열다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물었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 겨우 입을 열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나랑 했으니까.”

“뭐?”

“네가 어디까지 기억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맞아. 네가 기억하는 거 다 맞아.”

“…다 맞아?”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의 기억 속에 단순히 키스한 것만 남아 있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차정한이 믿을 수가 없다는 얼굴로 나를 보며 굳어 버렸다. 사고가 멈춰 버린 것 같았다. 차정한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토록 붙어 다니던 13년 지기 친구와 키스를 하고, 그보다 더한 스킨십을 한 게 맞다는데 내가 아는 차정한이라면 지금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충격에 휩싸였을 것이었다.

“…….”

“…….”

우리에게 존재했던 그 어떤 정적보다 가장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말하지 말 걸 그랬다는 후회가 조금도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그에게 내가 만든 여러 가지의 비밀 하나를 말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 그다음 날 너 아팠던 거, 집에 그렇게 가 버린 거… 공과 사 구분하고, 멀어진 것처럼 대한 거 다… 그 일 때문이야?”

“그 일 때문은 맞는데… 그게 이유의 전부는 아니야.”

“너한테, 아…. 진짜 돌겠다. 너한테 내가 지금 이런 걸 물으면 안 되는데 내가 기억이 정확하게 안 나서 그래. 그날 내가 너한테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널 볼 면목이 없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네가 갑자기 왜 이러나 싶어서……. 그날 또 무슨 일 있었어? 내가 너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차정한의 너무나도 당연한 반응을 들으면 들을수록 이제 정말 더는 그를 고문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사랑이, 아무 잘못도 없다고 생각한 나의 오랜 사랑이 우리의 사이를 뒤흔들고, 차정한을 괴롭히고 있었다. 내가 만든 비밀 때문에 하얗게 질린 그의 얼굴과 충격받은 차정한이 쏟아내는 미안함 가득한 목소리에 제법 단단했던 나의 마음이 바보처럼 스러졌다.

“…우리 뭐든 서로한테는 다 말하기로 했었는데…. 내가 너한테 말 못 한 게 있어.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하나를 말 못 하니까 자꾸 비밀이 생겼어.”

“…….”

13년 동안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차정한을 향해 소리 내어 본 적이 없는 말을 이제 해야 했다. 생각은 들리지 않아서 얼마든지 해도 되는데도 그 생각조차 미안해서 내내 누르려고 애쓰기만 한 그 말을 소리 내야 한다는 게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정한아.”

“응.”

“…나.”

“…….”

사랑이라는 말을 차정한의 앞에서 그를 향한 말로 담아 본 적이 없어 쉽게 소리가 나지 않았다. 사랑이라는 말을 배우지 못한 사람처럼 혀끝에 맴도는 아주 달콤하고 또 아주 쓴 말을 뱉지도 삼키지도 못한 채 물고만 있었다.

“유현아. 나한테 다 말해. 내가 당연히 알아야지. 내가 너한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사랑해.”

“어…?”

“…나 너 사랑해.”

너무 오래 숨어 있어 입술의 문턱을 넘지 못하던 말이 덜컥이며 그 경계를 넘었다. 너무 작지도 또 너무 크지도 않은 소리였다. 분명하게 말한 사랑이 아직도 입술에 남아 있었다.

“…….”

“…….”

차정한은 가만히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이 잔뜩 뒤섞여 있었다. 충격과 놀라움, 의아함, 부정…. 나는 그의 감정에서 배신감을 마주할 것만 같아 얼른 시선을 내렸다.

“유현아. 너 지금…….”

“…미안해.”

“이제는 미안하다고? 도대체 난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다시 정확하게 말해 봐.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내가… 널 사랑해, 정한아.”

“…….”

“네가 모르기를 바랐어. 끝까지… 말 안 하고 좋은 친구로 너랑 오래오래… 같이 있고 싶었어. 그럴 수 있을 줄 알았어. 이건 어디까지나 나 혼자 가진 일방적인 감정이니까, 나만… 나만 잘하면 되는 거잖아. 그래서 잘할 수 있을 줄 알았어. 친구끼리도 너무 친하고 가까우면 그런 감정 들 수 있다고도 하고, 시간 조금 지나면 그냥 그때 그랬지…. 그렇게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어.”

차정한의 굳은 얼굴을 보니 겁이 났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이럴 줄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는데 생각과 현실은 너무나도 달랐다. 현실이 예상보다 훨씬 더 무서웠다.

“그런데… 그게 이제 잘 안 돼….”

“…….”

“…네가 너무 좋아…….”

“…….”

“너한테 자꾸 바라는 게 생겨….”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네가 너무 좋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이렇게 이기적으로 기쁠 수 있는 일인지 처음 알았다. 생애 최초의 고백이 모든 것을 망가뜨리고 있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나는 정말 이기적이게도 너무 좋았다.

“나 진짜 미쳤나 봐…. 이제 살 것 같아. 나 너한테 말해서 너무… 좋아.”

차정한에게 내 사랑을 말해 너무 좋은데, 이제 정말 다 끝이라는 생각에 또 너무 슬펐다. 너무 좋아서, 또 너무 아파서 눈물이 마구 났다. 그걸 참아낼 힘이 하나도 없어 나는 차정한의 앞에서 바보처럼 울어 버렸다.

“…좋은데 왜 울어.”

“내가 널… 속이고 있었잖아. 혼자 비밀 만들고, 감정 다 속이면서… 내 속 시원하다고 이렇게 너한테 말하는 내가 너무… 끔찍해.”

“…….”

“미안해…. 미안해, 정한아…. 속여서 미안해……. 나는 너한테 이러면 안 되는데….”

“울지 마. 너 울어도 지금 나 정신이 없어서 아무것도 못 하니까 울지 말라고.”

울지 않으려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자꾸만 턱과 입술이 떨렸다. 울지 않으려고 해도 눈물이 뺨을 타고 마구 흘러내렸다. 그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고개를 숙였다. 꽉 쥐고 있어 구김이 간 바지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좋은 친구로 정말 오래오래 같이 있고 싶었는데….”

“…….”

“나는 널 배신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도 했는데…….”

“…….”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해.”

“…….”

나의 존재조차 불편할 그의 앞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차정한이 여기에 어떤 마음으로 나를 데리고 왔는지 알기에 모든 것을 망치고 혼자 나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굳은 그의 얼굴을 보는 게 무섭고 아파 도망치듯 혼자 나서는 내가 여전히 너무나도 끔찍했다.

엘리베이터 문을 열어 주는 직원에게 고개도 들지 못하고 숙인 채 인사하고 닫히는 문을 바라보았다. 다리에서 자꾸 힘이 빠져 벽으로 붙은 안전 바를 붙든 채 어지러워 눈을 감았다. 차정한에게 폭탄을 던지고 나 혼자 살겠다고 여기 이렇게 나와 도망치고 있는 내가 싫어 자꾸 속이 울렁였다. 할 수만 있다면 나의 이 끔찍함과 이중적인 모든 것들을 다 토해내고 싶었다.

호텔을 나와 찬 바람과 마주하자 그래도 조금 정신이 들었다. 큰길로 나가 방향도 보지 않고 걸음이 닿는 곳으로 걸었다.

차정한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서 속이 시원한 줄 알았는데 시원한 게 아니라 아예 속이 통째로 다 비어 버린 것이었다. 차가운 바람이 그대로 몸속으로 파고들어 내가 하루아침에 망가뜨려 텅 빈 곳을 헤집었다. 바람이 너무 날카로워 빈 곳 여기저기를 마구 난도질했다.

여러 생각이 마구잡이로 모든 곳을 아프게 때리며 파고들었다. 차정한의 충격받은 얼굴과 웃는 얼굴, 굳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얼굴까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가 마음으로 내려가 나를 원망했다. 나는 조금도 더 걷지 못하고 근처에 있는 빈 정류장으로 가 주저앉았다. 남은 힘과 체온 같은 것이 발아래로 전부 빠져나가는 것처럼 어지럽고, 식은땀이 났다. 감당하지도 못할 짓을 저지른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감정의 주인인 나도 감당하지 못하는 일을 갑자기 이 모든 것과 맞닥뜨린 차정한이 감당할 수 있을지 덜컥 이제야 겁이 났다.

“…….”

몇 대의 버스가 서고, 몇 명의 사람들이 타고 내리며 나만 빼고 세상이 원래대로 움직였다. 나는 모두가 떠나고 다시 혼자 남은 정류장에서 여전히 그대로 멈춰 있었다.

#33

?

?

고통스러웠다. 나의 고통이야 당연히 내가 견뎌야 할 몫이지만, 차정한을 너무 고통스럽게 만들고 혼자 빠져나온 것 같아 그게 가장 마음이 쓰이고 아팠다. 나를 믿고 얼마나 의지했는지 잘 알기에 더 그랬다. 머릿속이 온통 차정한이었다.

“일어나.”

갑자기 내 앞으로 다가와 선 사람을 확인하기도 전에 목소리가 닿아 왔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 얼굴을 보기 전에 차정한이라는 것을 알았다. 앞에 차가 서 있고, 그는 운전석에서 내려 내 앞에 서 있었다.

“…알아서 갈게.”

“나도 알아서 가게 놔두려고 했는데 안 되겠어서 다시 온 거야.”

“…….”

나는 차정한을 외면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바보처럼 보고만 있는 나를 예민한 눈으로 내려 본 차정한이 내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정한아.”

“불편한 상황인 거 아는데 입 닫고 데려다만 줄 테니까 그냥 타. 더 불편하게 만들지 말고.”

이 상황에서 차정한을 더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가 이끄는 대로 조수석에 올랐다. 차정한은 여전히 예민한 눈으로 나를 살피며 운전석으로 가 올라 말없이 차를 몰았다.

“…….”

몇 가지의 말이 떠올랐지만, 하나도 소리를 타고 흐르지 못했다. 차정한 역시 오피스텔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피스텔 앞에서 나는 인사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차에서 내렸다. 문을 닫자마자 그의 차가 멀어졌다. 이제 내가 새롭게 받아들여야 할 모습이라 멀어져 완전히 차가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오피스텔로 올라와 불도 켜지 않고 아무렇게나 침대에 주저앉았다. 여기에 누워 자던 아침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그래도 지금 내가 한 이 모든 일을 반복하게 될까.

“…….”

13년 동안 놓쳐 누군가에게 보일까 두려워 두 손으로 꽉 쥐고 있던 끈을 놓아 홀가분하기도 하고, 가볍기도 하지만, 너무나 당연하게 내가 늘 손목에 걸고 있던 우정의 끈도 같이 놓쳐 버려 내 두 손은 이제 텅 비어 있었다.

차정한과 나는 이제 어떤 이름을 가지게 될까. 너무나도 안정적이고 생각만 해도 늘 마음이 따뜻해지던 친구라는 이름이 사라진 그 자리에… 어떤 다른 이름이 새겨질까. 아는 사람? 친구였던 사이? 남?

“…….”

어쩌면 그 어떤 이름도 붙일 수 없을지도 몰랐다. 친구라는 그 이름을 먼저 배신한 건 나니까. 그런 주제에 차정한과 나 사이에 다른 이름이라도 붙기를 바라는 건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끝까지 이기적인 내가 너무 무서웠다.

최선, 차선. 그리고 최악과 차악. 오늘 나의 이 고백은 네 가지 중 어떤 이름을 가지게 될까. 하나 확실한 것은 내가 차정한의 최악이라는 것, 그것 하나였다. 그래서 울 자격도 없는 나는 최악인 나를 보고 혼자 가지 못해 다시 돌아온 차정한을 떠올리며 한참을 울었다.

그래도 내게는 차정한이 있어 최악도, 그리고 차악도 될 수 없는 밤이었다.

* * *

밤새워 뒤척이다가 겨우 잠이 들었는데 너무나도 선명한 꿈과 마주했다. 나는 다시 레스토랑에 가 있었다. 차정한은 내 맞은편에 너무나도 낯선 얼굴로 앉아 나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정한이 내게 보이던 다정하고 따뜻한 얼굴, 때때로 보이는 장난기 가득한 눈, 결국, 환하게 웃어 버리던 그 기분 좋은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잔뜩 가라앉아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차정한이 너무 무서워 고개를 숙이고 싶었지만,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나를 사랑해?’

되묻는 목소리도 차가워 온몸이 얼어붙었다. 차정한은 듣지 말아야 할 말을 들은 사람처럼 잔뜩 경멸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다시 대답해 봐. 유현아. 날 사랑해?’

덜덜 떨리던 입술이 벌어졌다. 대답하고 싶지 않았지만, 내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사랑해….’

‘어쩌지. 난 너 사랑하지 않는데. 그런 생각 한 번도 해 본 적 없어.’

너무나도 정확한 소리를 낸 차정한이 내게서 시선을 거두고 일어났다. 방을 나가는 그를 보다가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나 얼른 문을 열고 따라 나갔지만, 그 어디에도 차정한은 없었다. 나는 그대로 주저앉아 울었다. 내가 상상한 가장 아픈 끝을 마주해 너무 괴로웠다. 꿈인데 꼭 현실인 것처럼 마음이 너무 아파 가슴 위를 꽉 누르고 잘 쉬어지지 않는 숨을 확 뱉어낸 순간 눈이 뜨였다.

“…….”

얼굴과 몸이 흠뻑 젖은 느낌에 다시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몸을 일으켰다. 가까운 곳에서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전화는 꼭 받아야 한다는 습관적인 생각에 얼른 휴대폰을 찾아 동윤 형의 이름을 확인하고 화면을 눌렀다. 오늘 차정한의 스케줄이 두통처럼 머릿속으로 번졌다.

“네… 형.”

- 괜찮아?

“네?”

- 며칠 휴가 냈다면서. 아파서 낸 거 아니야?

차정한이 형에게 그렇게 말을 한 모양이었다. 하나씩 우리 사이에 존재하던 것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렇게 바로 그의 일상에서 내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마주하자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맞아요. 조금… 몸이 안 좋아서요. 형한테 먼저 말씀드렸어야 하는데 죄송해요.”

- 아니야, 아니야. 뭐가 죄송해. 아픈데 누구한테 말하면 어때. 정한이가 얘기 다 했어. 나야 겉으로만 케어 하지만, 정한이 안팎으로 챙기고 멘탈 관리까지 하니 유현 씨 힘들 만도 하지. 아무리 오랜 친구라도 사람이 사람을 케어 한다는 거 쉬운 일 아니잖아.

“…….”

- 아무 걱정하지 말고 며칠 푹 쉬어. 정한이는 내가 잘 케어 할 테니까. 유현 씨 걱정 많이 되는지 표정이 안 좋더라.

차정한의 표정이 왜 좋지 않은지 알기에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확 조여들었다. 내 감정이 너무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 같아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고마워요, 형.”

- 푹 쉬고, 건강하게 다시 봐. 어, 정한이 나온다. 끊을게.

“네…. 들어가세요.”

내가 그에게 내 마음을 말하는 순간 일어날 모든 일이 하나씩 진행되고 있었다. 그 고백과 동시에 친구라는 이름을 잃게 된다는 것도, 차정한의 곁에 더는 있을 수 없다는 것도 다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마주하는 게 상상보다 훨씬 더 아팠다.

“…….”

이미 벌어진 일이기에 되돌릴 수는 없었다. 나는 어제의 고백을 후회해서는 안 됐다. 단순히 그에게 내 마음을,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어 고백한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순수하지 못한 마음으로 그를 대하고, 오랫동안 약속을 어기며 비밀을 만든 나의 퇴색된 우정을 소리 낸 것이었다. 더는 차정한을 속이고 싶지 않아서, 내 기분을 살피며 나를 달래려고 애쓰는 그에게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키스한 것을 어렴풋이 기억하며 내게 그날에 대해 묻는 차정한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또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다.

거짓이 거짓을 낳고, 그 거짓이 쌓여 여기까지 와 버렸다. 차정한이 내 말을 듣고 하얗게 질린 것도, 생각을 정리할 수 없는 것도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었다. 나와 함께 스케줄을 갈 수 없는 것 또한 당연했다. 내가 다 예상한 반응이면서 직접 겪으며 아픈 것은 나 혼자 감당할 몫이었다.

지끈대는 머리에 눈을 감는데 다시 진동이 울렸다. 다시 든 휴대폰에는 ‘주안 선배 결혼식’이라는 일정 알람이 떠 있었다. 완벽하게 잊고 있었던 일정에 머리가 조금 더 아파 왔다. 이런 상태로 가서 온전히 축하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지만, 못 간다고 가지 않는 건 더 예의가 아닌 것을 알기에 침대에서 벗어났다.

욕실로 들어가 거울을 보니 얼굴이 정말 엉망이었다. 울다 자기도 했고, 꿈에서 울며 현실에서도 같이 운 건지 눈가가 붉고, 부어 있었다. 씻고 준비를 하는 동안 나아지기는 하겠지만, 거울 속 내 모습은 차마 나도 마주하기 힘들 만큼 엉망이라 고개를 숙였다. 차정한에게 이런 얼굴을 보이지 않아 정말 다행이었다.

* * *

단정하고 깔끔해서 결혼식 같은 자리에 잘 어울리는 옷을 입고 도착한 최주안 선배의 결혼식장에는 아는 얼굴들이 많았다. 워낙 많은 사람과 친한 선배라 그런지 선배에 동기, 후배까지 익숙한 얼굴들이 많아 한 명씩 인사를 하고, 안부를 나누는 것도 꽤 오래 걸렸다.

인사를 나누다가 식을 놓칠 지경이라 얼른 안으로 들어가 동기들과 한 테이블에 앉아 행복한 선배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입장할 때부터 행진을 할 때까지 선배는 내내 웃었다. 그런 선배를 보며 식장 안에 있는 사람들도 전부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식이 끝나고 동기들과 피로연이 열리는 곳으로 올라갔다. 자리에 앉자 코스로 피로연 음식들이 나와 하나씩 놓였다. 그동안 나누지 못해 잔뜩 쌓인 이야기가 여기저기에서 즐겁게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물 한 모금도 넘기기 힘들어 음식에는 조금도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왜 안 먹어?”

“어제 좀 체한 것 같아서.”

“그랬어? 어쩐지 좀 아파 보이더라. 너 차정한이랑 일한다며. 차정한이 일 너무 많이 시키는 거 아냐?”

“아니야. 난 요즘 별로 하는 일도 없어. 정한이가…….”

차정한의 이름을 소리 내는 순간 목이 막혔다. 눈동자가 뜨거워져 얼른 즐겁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며 여기가 어디인지 상기하고 또 상기했다. 선배의 결혼식 피로연장에서 울었다는 말을 절대 듣고 싶지 않았다.

“…정한이가 알아서 다 잘해. 그리고 매니저 형이 다 같이 다니셔서 난 힘든 거 없어.”

“아, 그 매니저가 또 있어? 난 네가 다 하는 줄 알았지. 걔 진짜 잘나가더라. 우리 학교 출신 연예인이야 많지만, 그렇게 내가 아는 동기가 뜨니까 진짜 신기한 거야. 아직도 화면에서 차정한 볼 때마다 신기하다니까. 넌 안 그래?”

“나? 난 뭐….”

“하긴 넌 차정한이랑 지긋지긋하게 붙어 다녔으니까 우리랑 좀 느낌이 다르겠다. 안부 전해 줘. 차정한이랑 그때 술 몇 번 마신 기억나는데 걔도 기억하려나? 왜 그때 걔가 너 기다린다고 밖에 있어서 우리가 불렀잖아. 그래서 같이 술 더 마시고.”

“…응. 그랬었지.”

“나 차정한 우리 과인 줄 알았는데 아니라 그래서 진짜 놀랐잖아. 매일 너 기다리고 우리 과방 오고 그래서 그랬나. 난 당연히 우리 과인 줄 알았지.”

같은 과였던 윤지환의 말에 다른 이야기를 하던 동기들이 하나둘 말을 얹기 시작했다. 다들 차정한이 같은 과인 줄 알았었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하며 웃는데 나는 조금도 웃을 수가 없었다.

“진짜 우리가 아주 징글징글하다고 하긴 했지만, 나이 드니까 그런 친구 하나 있는 게 진짜 부러운 일이더라. 얼마나 좋아. 척하면 척이고, 언제 불러도 나와서 술 한잔할 수 있고.”

“…….”

나는 어제 그런 친구에게 내가 해 온 거짓말과 숨겨 온 것들을 전부 고백했다. 그리고 친구라는 이름을 잃어 가고 있었다.

“언제 시간 나면 한번 동기 모임 같이 나와. 워낙 바쁘기는 하겠지만.”

“…….”

그 약속조차도 할 수 없었다. 다시 얼굴을 볼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윤지환은 대답하지 못하는 나를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야, 유현아. 너 괜찮아? 너 쓰러질 것 같아.”

“괜찮아. 잠깐만….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닿아 오는 시선을 뒤로한 채 도망치듯 피로연장을 빠져나가 비상계단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소란한 곳에서 고요한 곳으로 와 혼자 되는 순간 숨이 쏟아졌다. 지금은 혼자니까 울어도 되지만, 누구에게도 운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아 문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자꾸 왈칵 넘치는 감정을 누르고 또 눌렀다.

내가 지금까지 아는 모든 사람은 전부 차정한을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도, 또 대학교 때 사람들도 전부 나를 보면 차정한 이야기를 하고, 차정한을 보면 내 이야기를 했다. 늘 같이 다니는 우리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

그런 차정한에게 내가 얼마나 큰 상처를 준 건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늘 나를 최우선으로 생각한 내 친구에서 그 친구라는 이름을 빼앗아 버렸다. 차정한이 무엇 때문에 상처 받았는지 많이 아팠는지 알면서 그 똑같은 일을 내가 저질러 버린 것이었다. 숨기고, 내내 말하지 않다가 더는 숨길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 내 마음이 편하자고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차정한에게 고백이라는 그럴싸한 말로 포장된 말들을 던져 버렸다.

차정한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끝이 날까.

“…….”

제발 차정한에게 괴롭지 않은 끝이었으면 좋겠다. 나는 어떻게 되어도 좋으니 부디 우리의 13년을 한순간에 쑥대밭으로 만든 나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내 앞으로 와서 섰던 그 착하고 여린 나의 친구가 많이 고통스럽지 않기를.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34

?

?

당연한 일이지만, 차정한에게서는 그 어떤 연락도 오지 않았다. 내가 차정한이었다고 해도 내게 연락하지 않았을 것을 알기에 서운함이나 그런 감정은 일절 없었다. 그저 미안하고 걱정이 됐다. 하지만 내게는 그를 걱정할 자격이 없었다.

하루하루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알 수가 없고,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정리할 수가 없었다. 내가 먼저 차정한에게 연락을 해서 사과를 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그가 정리하고 있는 이대로 가만히 또 조용히 그의 삶에서 사라져야 하는 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오피스텔에서 보름 동안 밖으로 나가지 않고 생각만 하다 보니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오늘이 무슨 요일이고 며칠인지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나는 블라인드를 온 집에 친 채 생각하고, 잠드는 것을 반복했다.

새벽 같은 시간에 하루를 시작하듯 씻기도 하고, 대낮에 하루를 접으며 잠이 들기도 했다. 한 번씩 시간을 확인하는 건 휴대폰에 남은 차정한의 흔적을 볼 때였다. 새벽 네 시에 씻고 나와 소파에 앉아 보름 전에 끊긴 그와의 메시지를 매일 확인했다. 위로 올리며 아무것도 모르던 시간에 나누었던 그 다정하고 설레는 그의 흔적들을 보며 시간 대부분을 보냈다. 처음 며칠을 너무 많이 울어서 그런지 이제는 눈물도 나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