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43)

“…응. 그래. 밥 먹자.”

“잘 자.”

나가기 전 또 머리를 한 번 쓰다듬은 차정한이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나는 밤처럼 다시 까맣게 변한 방 안에서 그의 말처럼 아무 생각도 없이 푹 자고 싶어 이불 안으로 들어가 누웠다.

“…….”

온몸에서 힘을 빼고 긴 숨을 내쉬자 몸 외에도 내내 힘이 들어가 있던 머리와 감정에서도 조금씩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

차정한의 손이 닿은 머리에서부터 어제 그가 만진 몸 여기저기가 화끈대기 시작했다. 그는 잊었지만, 나는 아직도 그의 체온조차 지우지를 못했다. 단순한 실수일 뿐이라고 여기고 넘어가면 좋을 텐데, 꼭 스무 살 때 처음으로 차정한과 키스하고 오랫동안 앓았던 그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나는 화끈대며 다시 살아나는 몸을 웅크리고 눈을 깊게 감았다. 부디 이 모든 것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기를 바라며.

눈을 뜨니 온통 어둠이었다. 진짜 밤이 된 건지, 아직 낮인데 블라인드 때문에 어두운 건지 감이 오지 않아 몸을 일으키려는데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머리는 깨질 것처럼 아프고, 이불을 덮고 있는데도 추워 어깨가 떨렸다. 정말 스무 살 때 차정한과 처음으로 키스한 뒤 아팠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라 헛웃음이 나왔다. 13년이 지난 뒤에도 이렇게 아플 일이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한 번 더 일어나려고 노력했지만, 머리도 무겁고 몸에 정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아 포기한 채 완전히 늘어졌다. 침대 안으로 확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여러 번 반복되다가 너무 추워 몸이 움츠러들었다.

“유현아.”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고 그 사이로 차정한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아직도 자는지 확인하러 온 것 같았다. 아마 저녁을 먹으러 갈 시간이 거의 다 된 모양이었다.

“유현아. 자?”

대답해야 하는데 말을 하는 것도 힘들었다. 나는 유난히 무겁게 느껴지는 입술을 들어 올렸다.

“정한아.”

“어, 깼어? 푹 잤어?”

스탠드를 켠 차정한이 침대에 걸터앉아 나를 내려보았다. 잠시 나를 살피던 그의 미간이 구겨졌다. 차정한은 바로 손을 들어 내 이마에 얹었다.

“언제부터 이래. 열나잖아. 아파?”

“조금….”

“어제 나 때문에 무리해서 그런가 보다. 병원 가자. 응급실 가.”

“그럴 정도는 아니야. 집에 약 있거든. 그거 먹고 또 자면 내일 괜찮아져.”

내가 아픈 이유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새벽에 한참이나 버스정류장에 앉아 있기도 했고, 심적으로 감정이 충돌까지 했으니 아픈 건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뭐가 괜찮아져. 이러다 밤에 더 심해지면 어떡해.”

“괜찮아…. 좀 더 자고 싶어. 나 이불 좀 더 가져다줄래? 좀 추워서….”

“알았어. 잠깐만.”

얼른 일어나 방을 나간 차정한이 곧 두꺼운 이불을 더 가져와 내 위로 덮어 주었다. 몸속 깊은 곳이 추운 기분은 가시지 않지만, 그래도 두꺼운 이불을 더 덮으니 몸이 떨리는 것은 많이 나아졌다.

“미안해…. 저녁 먹으러는 못 가겠다.”

“지금 저녁이 문제야? 왜 사과를 해.”

“종일 뭐 못 먹었을 거 아니야. 배고플 텐데….”

“지유현. 지금 그게 중요해? 좀 자고 있어. 내가 죽이랑 약 사올게.”

“아니야. 안 나가도 돼.”

“뭐가 돼. 잠깐만 혼자 있어. 빨리 갔다 올게.”

이불을 잘 덮어 준 차정한이 방을 나갔다. 나 때문에 밖에 나갈 필요 없다고 다시 말하고 싶었지만, 솔직히 그 말을 전할 기력이 없었다. 저 깊은 곳 어디인가에서 잠이 자꾸만 나를 당기는 것 같았다.

깜빡 또 잠이 들었다가 깨보니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아까보다 춥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던 발소리가 방으로 가까워졌다. 베드테이블 위에 뭔가를 얹어 들어오는 차정한을 보며 몸을 일으켰다. 아까는 조금도 힘이 들어가지 않더니 지금은 일어나 앉는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누워 있어. 내가 해 줄게.”

“괜찮아. 그게 다 뭐야?”

“죽이랑 어, 레몬티랑 약도 사 왔어. 일단 이것부터 먹어. 먹어야 약 먹고 또 자지. 물도 따뜻하게 가져왔어.”

“…고마워.”

“뭐가 고마워. 당연히 해야지. 전복죽 사 왔는데 이거 먹을래? 혹시 싫을까 봐 호박죽도 사 왔어.”

“이거 먹을게. 너는?”

“난 걱정하지 말고 얼른 먹어.”

솔직히 입맛은 없었지만, 직접 나가서 죽까지 사 온 차정한을 속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 숟가락을 들어 조금씩 몇 입 죽을 먹었다. 아프기는 진짜 아픈 건지 맛도 잘 느껴지지 않고, 음식 냄새가 조금 역하게 느껴져 겨우 다섯 숟가락밖에 넘기지 못해 미안했다.

“이거 치울게. 아프면 원래 비위 약해지잖아.”

차정한은 얼른 죽을 치우고 레몬티를 내 앞으로 놓아주었다. 다행히 달고 새콤해서 따뜻한 레몬티는 마시기가 훨씬 좋았다.

“그건 괜찮아?”

“응…. 맛있어.”

“다행이다. 그거 먹고 좀 지나서 약 먹고 푹 자. 내일도 스케줄 없어서 다행이다. 있었어도 취소해야지.”

“많이 아픈 것도 아닌데 뭐.”

“그래도 아픈 널 두고 내가 어딜 가.”

“…….”

“너 아프면 진짜 아무것도 못 하겠어. 네 생각밖에 안 나.”

열일곱의 차정한이 잠시 그의 얼굴 위에서 흔들렸다. 교복을 입고 있고, 어른보다 소년에 더 가까운 느낌이라는 것을 빼면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집에 있어도 너 걱정돼서 아무것도 못 해.’

나는 그날 차정한에게 반했다. 사랑에 빠졌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다. 나는 그날 내게 말하는 차정한을 보며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그리고 오늘, 사랑을 조금씩 끝내야 한다고 마음먹고 바보처럼 아파 버린 오늘…. 나는 하릴없이 차정한에게 또 설레 버렸다. 아픈데 이렇게 달콤하고 다정한 기분일 수 있는 걸까. 차정한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들을 모두 가능하게 만들었다.

#29

?

?

“아무 걱정하지 말고 며칠 푹 쉬어. 잘 먹고, 잘 자고 그래야 낫지.”

“…그럴게. 나 감기 같은데 내 옆에 오지 마. 그러다 옮아.”

“이렇게 같이 있다고 안 옮아. 그리고 좀 옮으면 어때. 원래 옮기면 빨리 낫는다잖아.”

차정한의 말을 듣는 순간 어제 그와 키스한 게 떠올랐다. 입술을 틈 하나 없이 맞물린 채 혀를 문지르고, 마주 머금으며 뒤섞인 타액을 목 뒤로 넘겼던 것을 떠올리니 눈을 맞출 수가 없었다. 차정한의 앞에서는 절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하고, 웬만하면 컨트롤이 잘 됐었는데 아파서 그런 건지, 이제 정말 하나둘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건지 숨겨지지 않았다.

“…누가…….”

“응?”

“누가 이렇게까지 해…. 걱정하고, 죽에 약에… 다 사 왔으면 됐지. 옮아도 괜찮다는 사람이 어디 있어.”

“진짠데. 나 옮아도 돼. 너 아픈 것보다 내가 아픈 게 나아.”

나의 말은 삐딱했고, 그의 말은 늘 그랬던 것처럼 곧았다. 지금까지의 모든 일을 기억하는 나는 차정한에게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하고 있었다.

“물 식었다. 다시 따뜻하게 가져올게.”

“그냥 둬.”

“따뜻한 물 마셔야 좋아.”

“그냥 마실래.”

차정한이 쥔 컵을 고집스레 잡고, 옆에 놓인 약을 입에 넣었다. 차정한은 기어이 식은 물을 마시는 나를 바라보았다. 기분이 나쁠 법도 한데 전혀 그런 기색 없이 보는 눈을 보자 금세 미안해졌다.

“…챙겨 준대도 난리네 싶지.”

“알면 됐어. 아프니까 봐주는 줄 알아. 치우고 올게.”

장난스럽게 말한 차정한이 씩 웃으며 베드 테이블을 들고 방에서 나갔다. 꼭 열일곱 살 때 우리 집에 매일 와서 하나하나 전부 다 해 주던 차정한을 보는 것 같아 자꾸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래서 아픈 게 싫었다. 아프면 약해진 몸을 따라 마음까지 약해져 꼭 이렇게 감정에 이리저리 휩쓸리고는 했다. 아무래도 오피스텔에 가서 혼자 있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옆에 있을 테니까 푹 자.”

“뭘 옆에 있어. 너도 가서 쉬어.”

“갑자기 더 아플 수도 있잖아.”

“…네가 보고 있는데 어떻게 푹 자.”

“그런가. 그럼 자는 거 보고 나갈게.”

“정한아.”

감정에 휩쓸린 말을 내뱉을 것 같아 잠시 숨을 삼켰다. 마음에 걸린 말의 조각들이 힘을 잃고 밑으로 떨어졌다.

“…나 혼자 잘게. 아프면 너 부를게. 그러면 되잖아.”

차정한은 나를 가만히 보다가 손을 뻗었다. 크고 따뜻한 그의 손이 다시 내 이마를 덮었다. 약을 먹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별로 달라질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차정한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이마와 뺨을 부드럽게 덮으며 열을 체크했다.

“꼭 불러.”

“응. 그럴게. 걱정하지 말고 너도 쉬어. 저녁도 먹고…. 굶지 마.”

“알았어. 아픈 너를 걱정해야지 무슨 내 저녁을 걱정해.”

“…….”

나한테는 내가 아픈 것보다 네가 굶을까 그게 더 걱정이니까. 감정이 잔뜩 묻은 말이 또다시 위로 올라오지 못하고 아래로 가라앉았다. 차정한이 그런 나를 눕히고 어깨까지 이불을 올려 잘 덮어 주었다.

“스탠드 끌까?”

“…응.”

“잘 자. 새벽이든 언제든 아프면 나 바로 불러. 나 잔다고 혼자 참고 그러면 나 진짜 화나.”

“알았어. 너도 저녁 꼭 먹어. 안 먹으면 나도 화나.”

“지유현 넌 뭔 애가… 아플 때도 이렇게 착해.”

부드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은 차정한이 다시 잘 자라고 말하며 스탠드 불을 껐다. 나는 완전히 찾아든 어둠 속에서 그가 방 밖으로 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방 밖에서 잠시 찾아들었던 빛까지 사라지자 방 안은 내 머릿속처럼 온통 새까맣게 변했다.

“…….”

언제인지는 몰라도 차정한이 잠들면 오피스텔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전부였다. 이곳에서는 마음대로 아플 수도 없고, 그 아픔이 건드려 열에 들뜬 감정들도 숨길 수가 없었다. 혼자, 완벽히 혼자 있고 싶었다. 차정한을 떠올려도 죄가 되지 않도록 잠시라도 완전히 고립되어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걸 차정한이 알면 서운해하고 절대 안 된다고 하겠지만, 그래도 나는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차정한이 없는 곳으로.

잠들지 않고 있으려고 했는데 약 기운이 돌아 나도 모르게 의식이 흐려졌다. 열에 흠뻑 젖은 사람처럼 축 늘어진 몸으로 눈을 떴을 때는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추워서 몸이 떨리는 건 멎었지만, 여전히 머리는 깨질 것처럼 아프고 몸은 축축 늘어졌다.

몸을 일으켜 겉옷 하나를 꺼내 대충 걸쳤다. 휴대폰과 지갑을 아무렇게나 주머니 안으로 욱여넣고 살짝 문을 열어 밖을 보니 거실이 텅 비어 있었다. 벌써 자나 싶어 조심스럽게 거실 쪽으로 나가 차정한의 방을 보니 침대도 비어 있는 게 보였다. 조금 더 귀를 기울이니 욕실 안에서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틈을 타 조용히 집을 빠져나갔다.

자기 전에 내가 괜찮은지 방에 와 본다면 빨리 들킬 것이고 이미 다녀간 뒤라면 아침까지는 들키지 않을 것이었다. 어느 쪽이든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들킬 수밖에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그런 사이였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가장 중요한 곳에 서서 누구보다도 먼저 서로를 파악하고 관찰하는 그런 사이. 차정한이 내가 집에서 나갔다는 걸 모르고 넘어갈 일은 없다는 말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할 거고, 화를 낼지도 몰랐다. 이유를 말할 때까지 나와 말을 섞지 않을 수도 있고, 어이가 없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었다. 나는 차정한에게서 잠시라도 도망치고 싶어 혼자 집을 뛰쳐나와서도 차정한의 반응을 상상하고 있었다.

솔직히 몸 상태가 좋지 않아 큰길에서 택시를 잡아탔다. 오피스텔 이름을 말하고 등을 기대자 진동이 울렸다. 생각보다 훨씬 빨리 알아차린 차정한의 이름을 보자 작게 숨이 터졌다. 피한다고 없어질 일도 아니고,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도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진동을 몇 번 견디다가 전화를 받았다. 받자마자 차정한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아 왔다.

- 지유현, 너 어디야? 지금 밖에 나간 거야? 왜, 무슨 일 있어? 너 진짜 나갔어?

“응, 나왔어.”

- 집 밖으로 그 몸을 하고 나갔다고? 왜. 무슨 일인데.

“오피스텔로 가서 쉬려고….”

- 너 지금 오피스텔…. 하….

기가 막힌다는 듯 숨을 내쉰 차정한이 잠시 말을 잇지 않았다. 나는 그의 침묵 속에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두통이 더 심해지고 있었다.

- 갑자기 오피스텔은 왜.

생각이 뒤엉키고, 불순한 감정들이 열과 함께 떠올라 자꾸만 네가 닿을 때마다 잊고 기억하지 말아야 할 순간들을 떠올린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를 가장 화나게 할 말을 해야만 했다.

“너 아프면 안 되잖아. 내일 지나면 당장 계속 바쁘고, 인터뷰에 화보에… 스케줄이 몇 갠데.”

- 지금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감기 옮을까 봐 이 밤에 그 몸을 하고 혼자 나 씻는 사이에 도망쳤다는 거네? 내가 고맙다고 할 줄 알고 그래? 감기 안 걸리게 해 줘서 고맙다고 할까?

“…화내지 마.”

- 너 진짜 지금 이게 말이 되는 일이야? 안 옮는다고 했지.

“…나는, 정한아. 내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어. 나만 그런 거 아니잖아. 동윤 형도 그렇고, 스태프들도 그렇고 아플 때는 너 옮을까 봐 다른 사람 나오잖아. 당연한 거야. 나 때문에 정말 너 아프기라도 하면 나는 마음 편해?”

- 그래서 기어이 그렇게 혼자 말도 안 하고 도망치듯 가니까 지금은 마음 편해?

하나도, 정말 하나도 편하지 않았다. 불편하고, 아프고, 괴롭고, 또 불편하고 계속 아프고, 너무 괴로울 만큼 답답했다.

“그래, 편해. 그리고 아프면 혼자 쉬고 싶을 때 있잖아. 나도 그냥 오늘은 나 혼자 좀 쉴게.”

차정한은 내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감기를 옮길 것 같다는 말보다 혼자 쉬고 싶다는 내 말이 더 서운할 거라는 걸 알기에 아무 말도 더 보탤 수가 없었다.

“정한아.”

- …….

“…정한아.”

- …….

“…끊었어?”

- 아니.

“몸은 처지는데… 너 옮을까 봐 신경은 쓰이고…. 자꾸 그러니까 잘 쉬지도 못 하겠어서 그래. 간다고 말하면 넌 가게 안 할 거고… 그래서 그랬어.”

- 약이라도 가지고 가든가.

돌아오는 대답은 원망이 아니라 또 나에 대한 걱정이었다. 울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제 코너를 돌기만 하면 오피스텔이었다.

“…약 먹었으니까 오늘은 그냥 잘게. 자고 나면 멀쩡할 거야.”

- 내일은 가도 돼?

“…….”

- 내일도 혼자 있고 싶어?

“일어나서 어떤지 보고…….”

- 알았어. 도착은 했어?

“…응. 지금 다 왔어.”

- 최대한 빨리 올라가서 따뜻한 물 한 잔 마시고 자.

한 번씩 철이 아직 안 든 것처럼 굴다가도 이럴 때면 언제 우리 정한이가 이렇게 커졌나 싶었다. 전이라면 벌써 집에서 나와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오피스텔로 왔을 것이었다. 지금처럼 이렇게 하고픈 말을 다 누르고, 보이고 싶은 감정을 다 숨긴 채 긴 전화 통화를 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럴게.”

- 들어가, 그럼. 끊는다.

택시에서 내려 차가운 공기와 마주하는 순간, 끊는다는 그의 말이 너무 무서웠다. 이게 꼭 차정한과의 마지막 통화가 될 것 같기도 하고,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을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어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못한 채 그를 불렀다.

“정한아!”

-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다쳤어?

“…….”

이어지는 나에 대한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에 숨이 탁 터져 나왔다. 세상이 빙빙 돌고, 어지러워 그냥 여기 주저앉고 싶었다.

- 넘어졌어? 왜 말을 안 해. 왜 그러는데, 응? 유현아.

“…아니야. 괜찮아.”

- 놀랐잖아.

“미안해.”

- 미안한 줄은 알아?

“…알아. 내가 이상한 짓 한 것도 알고, 너 화난 것도 알아. 화났으면서 나 아프다고 참는 것도 알고… 다 알아. 미안해.”

- ……알면 빨리 들어가서 따뜻한 물 마시고, 방 따뜻하게 하고 자. 집 추울 거 아냐. 이불은 두꺼운 거 있어?

누그러진 목소리에 코끝이 뜨거워졌다. 이렇게 공기가 차가운데도 코끝과 눈가가 뜨거운 게 너무나도 잘 느껴졌다. 나는 울지 않으려 애쓰며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이불 있어. 전에 네가 사 줬잖아.”

- 일어나면 어떤지 말해 줘.

“알았어…. 너도 쉬어.”

- 지유현 없는 집에서 나도 맘껏 편하게 잘 거야. 그러니까 너도 나 없는 데서 푹 자고 맘껏 쉬고 아프지 마. 진짜 끊는다. 잘 자.

그의 잘 자라는 말을 들으며 집으로 들어왔다. 문 닫는 소리에 그 목소리가 혹시 묻힐까 싶어 일부러 그가 전화를 끊은 다음에 문을 닫았다.

차정한의 생각처럼 온기가 없는 집으로 들어와 따뜻해지도록 온도를 지나칠 만큼 높게 올리고 이불 안으로 들어가 그대로 눈을 감았다. 핑핑 도는 머릿속과 여전히 맺혀 사라지지 않는 차정한의 체온이 발끝부터 예고도 없이 여기저기를 맴돌며 자꾸만 감정의 불씨를 던졌다.

“…….”

따뜻한 물을 마시고 자랬는데…. 그의 말대로 하고 싶지만, 다시 침대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갈 힘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차정한이 말하던 따뜻한 물을 내내 떠올리며 조금 더 캄캄한 곳으로 기울어졌다. 공기는 차갑고, 생각은 뜨거운 밤이었다.

#30

?

?

눈을 뜨니 정오가 지나 있었다. 꿈을 몇 개나 꾼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아직 조금 머리가 무겁고 몸이 늘어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새벽처럼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이 없는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오래 자서 몸이 더 아프게 느껴지는 기분에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땀도 나고 찝찝해 빨리 씻고 싶었다. 따뜻한 물로 씻고 좀 정신을 차리면, 그래도 어제보다는 컨디션이 나아질 것 같았다.

너무 오래 씻으면 또 어지러울 것 같아 그냥 평소처럼 따뜻한 물로 씻고 나와 또 따뜻한 바람으로 머리칼을 말렸다. 끈적한 땀과 함께 몸에 붙어 있던 상념들이 조금 씻겨 나가기는 한 건지 그래도 머리가 새벽보다는 덜 무거웠다. 이번 일도 그냥 이렇게 조금 다른 쪽의 해프닝으로 지나 보낼 수 있는 건가 싶었다.

다시 침대로 가 아무렇게나 빠져 옆으로 놓인 휴대폰을 보니 차정한의 메시지가 몇 개 와있었다. 아침 아홉 시부터 한 시간 정도 텀을 두고 하나씩 온 메시지는 전부 나를 향한 걱정으로 가득했다.

[정한 : 좀 괜찮아? 춥지는 않고?]

[정한 : 아직도 많이 아프면 진짜 병원 가자 일어나면 말해 줘]

[정한 : 일부러 많이 안 보내려고 노력 중인데 어려워 아직 자? 괜찮은 거 맞지?]

[정한 : 일어나면 점이라도 하나 보내 줘]

30분 전에 온 마지막 메시지를 읽고 일어나서 씻고 나왔다고 답을 보내자 메시지 창에 들어와 있는 건지 바로 읽은 차정한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보고도 놀랄 만큼 빠르게 온 전화에 놀라 얼른 전화를 받았다.

“응, 정한아.”

- 괜찮은 거 맞아? 열은 내렸어? 추운 건?

“어제보다 다 괜찮아졌어.”

- 다행이다. 너 집에 먹을 거 아무것도 없지. 괜찮아졌다고 나은 거 아니야. 약도 더 먹고, 밥도 잘 먹어야 해. 지금도 혼자 있고 싶어?

“…그 말이 서운했구나.”

- 대답이나 해.

“올 수 있으면 와…. 같이 점심 먹자.”

- 들어간다, 그럼.

“응?”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도 전에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뭐지? 생각이 정리가 되지도 않았는데 문이 열리고 휴대폰을 귀에 댄 차정한이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소파에 앉은 채 허리만 겨우 곧추세우고 멍하니 차정한을 바라보았다. 그런 나를 보며 다가온 차정한이 휴대폰을 내렸다. 그리고 여전히 귀에 휴대폰을 댄 채 보는 내게 손을 뻗었다. 나는 그가 내 손을 잡아 내리는 것에 고분고분 손을 내리며 아직도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머리를 움직이려 애썼다.

“뭘 그렇게 놀라.”

“…밖에 있었어?”

“그래.”

“언제부터?”

“그게 뭐가 중요해.”

차정한은 들고 있는 종이봉투를 소파 앞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죽을 꺼내 부엌으로 가려는 그의 팔을 얼른 잡아 세우자 차정한이 나를 흘끔 바라보았다.

“왜.”

“언제부터 기다렸냐니까.”

“혼내게?”

“…아니.”

“그럼 왜. 그게 뭐가 중요한데.”

“나한테는 중요해.”

“솔직하게 말할까. 대충 안 혼날 만큼 줄여서 말할까.”

“어차피 거짓말도 못 하잖아.”

“날 너무 잘 알아. 아홉 시쯤 왔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고 부엌으로 간 차정한이 죽을 데웠다. 나는 얼른 시간을 확인했다. 내가 일어났을 때가 벌써 정오가 넘어 있었고, 지금은 한 시 반이 거의 다 되어 있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아홉 시라는 그의 말이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아홉 시부터 지금까지 문밖에서 기다린 거야?”

“자꾸 왜 물어.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

“들어와야지. 비밀번호도 알면서 왜 밖에서 그러고 있어.”

“네 허락 받고 들어가려고.”

“뭐?”

“깨면 연락한다고 했잖아. 연락받고, 내가 가도 되는지 너한테 물어보고, 가도 된다고 하면 들어가려고.”

“혼자 있고 싶다고 했으면?”

“이것만 두고 집에 가는 거지.”

“…….”

차정한을 사랑하지 않는 방법을 알고 싶었다. 그의 따뜻한 우정에도 이렇게 사랑으로 설레는 내가 싫었다.

“그럼 전화를 하지.”

“잘 텐데 깨면 또 안 되잖아. 그래서 일부러 톡도 참고 참다가 확인차 한 번씩만 보낸 거야.”

전자레인지에서 죽통을 꺼낸 차정한이 뜨거운지 손끝을 한 번 문지르고 그릇에 반 정도 옮겨 담았다. 솔직히 인내심도 별로 없으면서 지금까지 밖에서 들어오지 않고 어떻게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싶었다.

“그런 얼굴 할 거 없어. 내가 오고 싶어서 온 거고, 기다리고 싶어서 기다린 건데 왜 네가 그렇게 미안한 얼굴을 하고 있어. 알잖아. 나 너 아프면 집에 혼자 있어 봤자 아무것도 못 한다니까. 그냥 하는 말 아닌데 그걸 안 믿더라.”

“…이러니까 다 우리보고 유난이라고 하지.”

“유난이면 어때서. 꼭 친구 없는 것들이 그러더라. 얼른 먹어. 죽집 사장님이 평생 끓인 전복죽 중에 오늘 이게 제일 맛있게 됐다고 하셨어. 내가 사진도 찍고, 사인도 했거든.”

죽을 한 숟가락 뜬 차정한이 내 쪽으로 먹기 좋게 밀어 주었다. 나는 그 숟가락을 들어 그가 덜어 온 죽을 차정한이 보는 앞에서 전부 비웠다.

“그래도 어제보다는 잘 먹네. 약도 가져 왔으니까 좀 이따 먹어.”

“알았어. 너도 점심 먹어야지.”

“배고프면 뭐라도 먹을게. 걱정하지 마. 아, 그런데 여기 진짜 오랜만에 온다. 올 초에 이 밑까지만 왔다가 너 태우고 간 뒤로 온 적이 없네.”

내가 대부분 차정한의 집에 가 있기 때문에 차정한은 이 오피스텔에 올 일이 사실 거의 없었다. 올 초에 내가 잠시 필요한 것을 가지러 오피스텔에 들렀고, 차정한이 그런 나를 주차장에서 픽업해 데려간 적이 있었다. 그러니 집 안에 들어온 건 올해 들어 처음이었다.

“내가 널 너무 귀찮게 해?”

“그게 무슨 말이야. 갑자기….”

“너한테 뭐라고 하는 거 아니고, 새벽에 너랑 전화 끊고 생각해 보니까 정말 13년이나 지났는데, 그동안 내가 널 너무 귀찮게 했나 싶어서.”

“왜 그런 생각까지 해.”

“난 너랑 있는 게 좋아서 그냥 계속 좋았거든. 유현이 네가 있으면 나 혼자서는 못할 것 같던 일도 할 수 있게 되고, 네가 잘한다 그러면 더 잘하고 싶고, 너한테 내가 진짜 자랑스러운 친구가 되고 싶어서 힘들어도 한 번 더 참고 그랬어.”

차정한은 별로 심각하지 않은 목소리로 내게 그냥 스쳐 가는 이야기를 하듯 말했다. 덤덤하고 무겁지 않아서 마음을 긁지는 않지만, 자꾸 마음이 쓰이고, 안아 주고 싶은 그런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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