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43)

실장실에 혼자 들어가라니까 같이 들어가서 적절하게 실장님의 말을 끊고 빼달라는 차정한의 말에 어쩔 수 없이 같이 들어갔다.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를 받아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기자와 통화를 한 실장님이 피곤한 얼굴로 전화기를 내려놓고 소파로 다가왔다. 그리고 사진 몇 장을 테이블 위로 놓았다. 테이블 위 사진은 오늘 기사에 실렸던 유아정의 사진들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저번에 말 나온다니까 아니라며.”

“네. 아니에요.”

“아닌데 집까지 드나들어?”

“친구 집 갔다면서요.”

“너희 집 간 거 누가 몰라? 그 집에서 네 친구까지 만났다던데. 그 친구가 누구겠어. 유현이 너지.”

내게로 향하는 시선에 맞다고 대답하자 실장님이 한숨을 푹 쉬며 내 쪽으로 아예 몸을 틀어 앉았다.

“설명해 봐. 어떻게 된 거야?”

“왜 유현이한테 물어요. 제가 설명할게요.”

“네가 제대로 말 안 하니까 그런 거 아냐. 솔직하게 말해. 일단 부인은 했는데 너 유아정이랑 만나?”

“같이 촬영할 일 있어서 몇 번 봤고, 저 다른 촬영하는 근처까지 왔다고 해서 매니저 대동하고 딱 한 번 식사 같이했어요. 그게 다예요. 자기 매니저한테 내 주소 알아보라 그러고 내가 집에 있는 줄 알고 서프라이즈 하러 왔는데, 마침 저는 갑자기 스케줄 생겨서 나갔었고, 유현이랑 마주친 거죠.”

차정한의 대답에 실장님이 나를 다시 바라보았다. 딱히 자세하게 할 말은 없지만, 있었던 일이라도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 테이블 위에 널브러진 사진을 보며 말했다.

“네. 갑자기 찾아와서… 저랑 마주쳤어요. 유아정 씨가 정한이한테 전화 걸었고, 들어가서 기다렸다가 보고 가도 되냐는 말에 정한이랑 말이 다 된 상황인 줄 알았어요. 저는 바로 집을 나와서 그 뒤에 상황은 어떻게 됐는지 잘 모릅니다.”

“그 뒤에 상황은 다시 전화가 와서 당장 나가라고 그랬고, 알았다는 대답 들었어요.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 그랬고, 그 뒤로 만난 적도, 연락한 적도 없어요. 그리고 그 아파트에 저만 사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날 만난 적도 없고, 그 시간에 저 촬영하고 있었던 거 본 사람이 몇인데요. 스태프들 다 데려다가 물어보세요.”

이야기를 들은 실장님은 대충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전혀 깊은 관계는 없지만, 사소하게 스쳐 가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전혀 터치하지 않고 마음대로 놔두는 차정한 때문에 이런 일을 겪을 만큼 겪어 더는 들을 필요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정한아. 내가 몇 번을 말해. 차라리 연애를 진득하게 하라니까? 그게 낫다고. 아이돌은 안 되는데 배우는 상관없어. 오히려 도움 된다니까. 사랑꾼 이미지 생기고? 왜 매번 제대로 만나는 것도 아닌데 냄새만 나게 일을 만들어?”

“만나 보려고 해도 못 만날 짓을 바로 하니까 만날 수가 없어요.”

“그럼 연애할 생각도 없는데 왜 자꾸 받아 줘?”

“받아 준 적도 없어요. 그냥 아무 대꾸를 안 한 거지.”

“그러니까 왜 안 해?”

“누가 나를 좋아한다는 건 좋은 거니까요. 말은 내가 좋아할 때 하는 거고.”

차정한의 나름 소신이 뚜렷한 대답에 실장님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소파 뒤로 몸을 기댄 채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다는 듯 나가라고 손을 휘휘 저었다. 나는 얼른 차정한을 데리고 실장실을 나섰다.

“내가 이상한 거야?”

“뭐가?”

“사랑받는 건 좋은 거잖아.”

“…그렇지.”

“거절할 필요가 있나.”

“정확하게 말을 안 해 주면 상대가 오해하잖아. 너도 똑같은 마음일 거라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 말을 해 줘야 한다는 거지.”

엘리베이터에 탄 차정한이 턱으로 내렸던 마스크를 위로 느릿하게 올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차정한은 사랑에 관련된 감정에 대해서는 상당히 부정적이고 조금은 비틀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난 내가 좋아야 표현하고 싶어.”

“…….”

“유현이 너한테는 내가 다 말하잖아. 챙기고 싶기도 하고, 좋은 거 보면 생각 제일 먼저 나고, 기쁜 일, 슬픈 일 전부 다 너부터 생각나고….”

“…….”

“누가 보면 너랑 연애하는 줄 알겠다.”

차정한의 말에 순간 마음과 함께 몸이 다 뻣뻣해졌다. 웃으며 농담으로 말하는 그 소리에 나도 웃어야 하는데 쉽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사랑 그런 게 뭐라고 매번 난린지.”

“…….”

굳은 얼굴을 하지 않으려 애썼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게 최선이었다. 나는 얼른 엘리베이터에서 먼저 내려 동윤 형과 통화했다. 문 앞으로 차를 대고 있으니 나오면 된다는 말에 내가 먼저 나가 문을 열었다. 아직도 가지 않은 기자들이 정말 열애설이 사실이 아니냐며 셔터를 눌러댔다. 차정한은 주변을 한 번 보지도 않고 차 안으로 빠르게 들어갔다.

“많이 혼났어?”

“그렇게 많이 혼나지는 않았어요. 반응은 좀 어때요?”

“내가 계속 봤는데 대부분 진짜 아닌 것 같다고, 이렇게까지 디테일하게 부정하는 거 보면 스캔들이 난 자체가 불쾌한 것 같아 보인다고 하네. 실검 좀 머물다가 내려갈 거 같아.”

동윤 형의 말을 듣자 그제야 안도감이 어느 정도 찾아들었다. 회사에서 빠르게 반박 기사를 올린 덕분에 이번 스캔들은 그냥 해프닝 정도로 마무리가 될 모양이었다.

“하여튼 사람들은 남 열애설에 관심 참 많아. 그게 왜 궁금하지. 난 하나도 안 궁금하던데. 그게 진짜든 아니든 도대체 뭐가 달라진다고.”

“알려진 사람이니까 그런 거겠지. 화면 나오는 모습 말고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니까.”

“신기해. 남 일에 그렇게 관심이 많다는 게. 누구는 자식한테도 관심 없어서 어느 학교를 다니는지, 몇 학년인지도 모르는데. 그 누구도 생판 남한테는 관심이 많으려나.”

차정한이 말하는 그 ‘누구’가 부모님이라는 걸 알기에 쉽게 답을 고르지 못했다. 아무리 차정한이 싫어하고 끔찍하게 여기는 존재라지만, 그래도 내가 함부로 그의 편에서 말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또 고민한다.”

“…응?”

말을 고르고 있는데 내 쪽으로 스르르 고개를 기울인 차정한이 엷게 웃었다.

“고민 안 해도 돼. 답 들으려고 하는 말 아니니까.”

“…….”

“난 너만 있으면 돼.”

습관처럼 말하지만, 매번 그 말을 할 때마다 진심이 담겨 있었다. 아마 차정한은 모를 것이었다. 내가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얼마나 설레고, 또 얼마나… 무너지는지. 차정한이 무너지지 않도록 단단해지려고 노력하면서도 준비된 배신자가 나라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겉으로 내뱉을 수도 없는 무거운 숨이 자꾸만 안으로 쌓였다. 그리고 그 무거운 숨은 마음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어딘가에 꽁꽁 숨은 말들을 자꾸만 밀어냈다. 생각과 감정이 서로를 밀어낼 때마다 어김없이 두통이 찾아왔다.

“…….”

나는 지금처럼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압박을 받을 때마다 머리가 아팠다. 차정한을 끌어안고 걱정하지 말라고 나는 영원히 너의 좋은 친구일 거라고 말하고 싶기도 하고 너를 사랑한다고 터뜨리고 배신자의 최후를 맞이하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늘 나의 선택은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나는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하고 대답을 미루고 또 미뤘다.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었다.

#22

?

?

‘난 너만 있으면 돼.’

차정한에게 그 말을 처음으로 들었던 어느 날이 떠올랐다. 내 열여덟 번째 생일날이었다.

‘자, 선물.’

차정한은 내 열여덟 생일에 고가의 전자기기를 선물로 주었다. 공부할 때도 쓰고, 게임이나 영화를 볼 때도 화면이 크면 좋지 않냐면서 내민 선물에 입이 다 벌어졌다. 부모님이 차정한을 집으로 초대해 같이 저녁을 먹고 케이크 촛불을 불며 평범하게 그냥 보낼 거라고 생각했고, 선물은 없어도 된다고 말을 했는데 이렇게 비싸고 생각도 못 한 선물을 받으니 뭘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놀란 얼굴로 보는 나를 보며 차정한은 돈이 많기도 하고 꼭 주고 싶어서 주는 거니까 절대 부담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내게 말했다. 솔직히 친구 선물로 그 나이에 줄 수 있는 선물은 아니라 미안하고 당황스러웠지만, 내 반응을 살피는 그 얼굴을 보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고마워. 잘 쓸게. 생각도 못 했는데…. 진짜 고마워.’

‘크리스마스 별거 아니지?’

‘응?’

‘네가 그랬잖아. 크리스마스 다음 날이라 밖에서는 크리스마스에 같이 하고 넘어갔다고.’

‘…그걸 기억해?’

‘나한테는 크리스마스보다 네 생일이 더 중요해.’

‘…….’

‘생일 축하해. 오늘 기다리느라 나한테 어제는 진짜 지루했어.’

12월 26일이 생일이라 집을 빼면 늘 크리스마스와 같이 몰아서 축하를 받는 일이 많았었다. 세상의 축제가 끝난 다음 날은 늘 조용했고, 그냥 늘 생일 당일에는 집에서 가족들과 근사한 저녁을 먹고는 했었다. 불만을 가진 적은 없지만, 어렸을 때는 내 생일이 하루만 빨라서 진짜 크리스마스였으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랬으면 세상이 반짝반짝 예쁘게 빛날 때 나도 같이 생일일 수 있을 테니까.

‘…….’

차정한은 나의 생일을 크리스마스보다 더 반짝반짝 빛나게 만들었다. 크리스마스보다 내 생일이 더 중요하다는 말을 들은 건 처음이었다. 나는 차정한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생일을 기다리느라 크리스마스가 진짜 지루했다는 내 친구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정한아…….’

나한테는 네가 더 큰 선물이라고, 네가 있어서 오늘이 정말 더 행복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어린 마음에 이런 특별한 기분으로 말을 하면 어떻게든 다 될 것만 같아 마구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내 말을 들은 차정한이 뒤돌아 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입술 근처까지 다가온 말을 다시 끌어 내렸다.

‘놀이터 갈까? 추우면 들어가고.’

‘안 추워. 놀이터 가자.’

선물을 안고 간 놀이터에서 차정한은 처음으로 내게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털어놓았다. 전에도 조금 들은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전부 듣는 것은 처음이라 내내 마음이 아팠다.

차정한이 초등학생이던 때에 차정한의 부모님은 이혼하셨다고 했다. 그 이혼 과정 중 누구도 어린 차정한을 양육하고 싶어 하지 않았고, 결국, 차정한은 친가로 보내졌다. 다행히 손자를 아끼고 사랑하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았고, 차정한의 친가가 꽤 알려진 기업을 운영하고 있어 금전적으로도 넘치게 누리며 살았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자신을 거부하던 부모님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기에 차정한은 늘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 같다고 말했다.

‘외로워서 그런 거래. 할아버지도 그러시고, 할머니도 그러시고…. 친구란 놈들도 다 그러더라. 내가 외로워서 그런 거라고.’

‘…….’

‘애정 결핍이래, 나보고.’

‘…….’

‘맞는 것 같아. 사랑은커녕 날 데려가는 게 끔찍하다는 말이나 내내 들었는데 멀쩡할 리가 없지.’

‘…….’

‘그래서 난 사랑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해. 부모도 자식을 사랑하지 않고, 자식도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데… 어떻게 남을 사랑해.’

‘…….’

‘난 그런 거 안 믿어. 없는 거니까. 존재할 수가 없어.’

빈 놀이터에 그네가 천천히 움직이는 소리만 울렸다. 나는 발로 모래를 괜히 헤집으며 아까 고백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유현이 너는 믿어.’

‘…….’

어둠 속에서 눈이 마주쳤다. 마주한 차정한의 눈동자 안에서 그가 말하는 믿음이 뭔지 너무나 확실하게 보았다. 차정한이 내게 바라는 건 퇴색하기 쉬운 사랑이 아니라 노력만 하면 평생도 지킬 수 있는 우정이었다.

‘네가 계속 나 믿을 수 있게 나도 잘할게.’

‘어떻게 거기서 더 잘해.’

‘…….’

‘난 너만 있으면 돼.’

차정한이 손을 뻗어 내 머리칼을 부드럽게 헝클였다. 그 손길에도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차정한을 배신하면 안 된다고, 내가 친구 이상으로 좋아하는 걸 알면… 실망할 거라고 되뇌고 또 되뇌어도 시작되어 버린 출처가 분명한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내내 닿아 오는 차정한의 시선과 손길에 빛을 더하며.

* * *

차정한과 유아정의 스캔들은 반나절 만에 사람들에게 시들한 소식으로 변했다. 양측 모두 너무나 확실하게 반박을 하고, 특히 차정한 쪽에서 디테일한 당일의 일정까지 풀며 극구 부인을 해 버린 이상 모두의 흥미가 떨어지는 건 당연했다. 그렇게 한 주가 지나자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모두가 잊은 일이 되었다.

“네 생일 다가오네.”

“한 달도 더 남았는데 뭐.”

“올해는 뭐할까. 부모님 모시고 근사한 데에서 저녁 먹고, 우리는 술 한잔할까. 아, 선물은 뭐 사지. 뭐 필요한 거 없어?”

“없어. 내가 필요한 게 뭐가 있어.”

“그러지 말고 생각해 봐. 차 어때. 차 보러 갈까?”

“내가 지금 차가 뭐 필요해. 나중에 필요하면 사면 되지.”

“그러면…. 뭐가 좋지.”

고민하는 차정한에게 정말 필요한 게 없다고 말했지만, 차정한은 말로만 알았다고 하고 계속 뭔가를 고민했다.

“매년 네가 우리 부모님까지 생각하고 모시고 저녁도 먹고 하잖아. 그거면 충분해.”

“그건 당연한 거고. 너희 부모님이 나한테 얼마나 잘해 주셨는데. 내가 그거 잊으면 사람도 아니지. 그러니까 가지고 싶은 거나, 하고 싶은 거나 뭐 그런 거 있으면 생각했다가 말해 줘. 다 들어줄게.”

“…알았어. 생각해 볼게.”

내 대답을 들은 뒤에야 차정한은 시선을 거두었다. 유명 다큐멘터리 내레이션 녹음을 위해 준비된 대본을 읽는 그의 옆모습을 보다가 나도 시선을 거두었다. 조금, 아주 조금 더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의 오해를 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내일은 같이 안 가도 돼. 쉬고 있어. 요즘 너무 데리고 다녔다.”

“예전 생각난다. 그때는 매일 밤새우면서 현장에서 대기하고 그랬는데. 사흘 만에 집에 들어오면 소파에 앉았다가 잠들고, 깨서 보면 너도 내 옆에서 자고 있고….”

“맞아. 진짜 힘들었지. 처음부터 주연으로 분량도 많고 해서 적응하기도 전에 촬영 스케줄은 빡빡하지, 배우들은 텃세에 너 없었으면 나 진짜 관뒀을걸.”

“기특해라.”

장난치듯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자 차정한이 내 쪽으로 조금 더 고개를 기울여 쓰다듬기 편하게 해 주었다. 이럴 때는 정말 영락없이 온순한 큰 강아지 같아 가득 끌어안고 싶었다.

“내일 뭐 할 거야?”

“글쎄. 아직 모르겠어. 주안 선배가 한번 보자고 해서 내일 전화해 볼까 싶어.”

“주안 선배? 최주안?”

“응. 우리 과 선배 이름까지 기억해?”

“너 그 선배랑 엄청 붙어 다녔잖아.”

‘엄청’이라는 말에 힘을 주며 말한 차정한이 조금 불만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배울 점이 많고, 좋은 선배라 여러 일을 같이 한 건 맞지만, 딱히 저렇게 ‘엄청’ 소리를 들을 만큼 붙어 다닌 기억은 없어 조금 억울했다.

“뭘 얼마나 붙어 다녔다고…. 다른 사람들은 다 나 보면 너랑 붙어 다녔다고 그래. 드라마나 광고에서 너 보면 내 생각나고, 나 보면 네 생각나고 한다더라.”

“나랑은 당연한 거지. 그런데 너 그 최주안이랑도 계속 같이 다녔어. 도서관 가도 같이 있고, 너희 과방 가도 같이 있고, 너희 집에도 있었잖아.”

“…누가 들으면 단둘이 있었는지 알겠다. 과제 하느라 다 온 거잖아.”

“아무튼 너랑 누가 뭘 한다고 하면 거기 늘 최주안이 있었어. 내가 알아.”

“좋은 선배야. 도움도 많이 되고. 그리고 이번에는 만나는 이유가 있거든.”

“뭔데.”

“결혼하신대. 청첩장 준다고 해서 만나는 거야.”

“그래? 언제?”

“이번 달 말에.”

차정한이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연락해 만나는 이유를 이해해서 나오는 끄덕임이었다. 이걸 왜 일일이 다 말하고 납득시키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내게 닿는 세세한 관심이라 생각하니 충분히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내가 어디를 가고, 누구를 만나든 전혀 관심이 없는 것보다는 좋은 거니까.

“내일 만나게 되면 말할게. 동윤 형한테 들어 보니 내일 녹음만 하면 된다고 해서 걱정은 없지만, 혹시 나 필요하면 바로 전화해.”

“알았어. 다큐 은근 어려워. 발음 잘해야 되는데. 펭귄, 펭귄. 한 번 들어 볼래?”

“응. 해 봐.”

“남극의 해가 밝았습니다. 어, 이른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이는 무리가 있는데요. 네, 바로 황제펭귄입니다. 아침부터 바삐 어디를 가는 걸까요?”

목소리가 워낙 좋아서 뭘 말하든 그 소리에 흠뻑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세상에서 이렇게 펭귄 이야기를 듣기 좋게 하는 사람이 또 존재할까. 내가 생각하면서도 너무 팔불출인가 싶어 웃음이 다 났다.

“어때, 목소리 톤이랑 발음 괜찮은 거 같아?”

“응. 진짜 듣기 좋아. 더 해 줘. 더 들을래.”

소파에 몸을 기대고 힘을 빼자 차정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한참이나 그가 들려주는 남극의 펭귄 이야기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이런 다큐멘터리가 나올 수 있게 펭귄이 존재해 감사한 밤이었다.

#23

?

?

녹음하러 가는 차정한을 주차장까지 같이 내려가 보내고 올라오며 최주안 선배에게 오늘 시간 괜찮은지 메시지를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늘 저녁에 대학 선후배들과 안 그래도 만나기로 했다며 그때 나오라는 전화가 왔다. 나오는 사람 이름들을 들어보니 다들 잘 지냈던 동기, 선배들이라 반가웠다. 7시까지 만날 약속을 잡고, 해야 할 일들을 익숙하게 시작했다. 청소를 하고, 클리닝 맡길 옷들을 전부 정리해 수거하러 온 직원에게 맡겼다. 원래도 어질러질 일이 없는 공간이지만, 청소를 하고 나면 더 반짝반짝 차정한과 어울리는 곳이 된 것 같아 좋았다.

차정한의 집에서 쉬어도 되지만, 차정한이 없는 집에 혼자 머무르며 쉬는 건 몇 년이 지나도록 편하지 않았다. 그가 이런 내 생각을 알면 몹시 서운해하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람이 없는 버스정류장으로 가서 여전히 그대로인 차정한의 광고사진을 마주하고 앉았다. 전보다 조금 더 쌀쌀해진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나는 긴장하지도 않고, 조마조마한 마음을 하지도 않은 채… 차정한을 편하게 바라보았다. 마음껏 눈을 맞추고, 또 마음껏 함께했다. 버스 몇 대가 지났는지 또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차정한과 함께 있으면서 헤집어진 마음들이 조금씩 원래대로 돌아왔다. 들키지 않으려고 감정을 감추는 순간부터 늘 따라붙는 불안도 없고, 자책도 없었다. 이렇게 딱딱한데,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따뜻한 손길로 나를 쓰다듬지도 않는데… 이 딱딱한 차정한이 더 편했다.

‘와, 네 광고 걸렸어!’

‘신기하다. 길에 내 얼굴이 다 걸리고.’

마스크나 모자를 쓰지 않아도 그렇게 쉽게 사람들이 바로 알아보지는 못하던 데뷔 초, 같이 길을 걷다가 처음으로 차정한의 얼굴이 나온 광고를 본 적이 있었다. 우리는 길에 서서 사진을 찍기도 하고, 한참이나 밤을 밝히는 익숙한 그 얼굴을 함께 바라보며 웃고 또 한참을 떠들었다.

‘이러다가 진짜 어디를 봐도 다 너만 나오는 거 아니야?’

‘그럴지도 몰라. 나 하고 싶은 건 어떻게든 다 하잖아. 마음만 먹으면 오래 안 걸릴걸.’

차정한은 농담처럼 말했지만, 나는 그의 자신만만한 그 말이 아주 빨리 이루어질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 하루가 다르게 여기저기 차정한이 나오기 시작했고, 몇 달 뒤에는 어디를 봐도 전부 차정한이 보였다. 나는 그게 좋으면서도 모두가 보고 있는 차정한을 나만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 같아 자꾸 마음이 오므라들었다.

모두가 그를 사랑했다. 외로움을 많이 타고, 사랑의 자리가 텅 빈 차정한에게 사람들의 사랑은 큰 위로가 됐을 것이었다. 까다로운 그가 힘든데도 이 일은 해내는 이유도 사람들에게 받는 관심과 사랑이 좋기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수록 차정한은 더 빛나고, 멋있어졌다. 그중에는 나의 사랑도 분명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보여 버리면 더 보이고 싶어질 것 같아 숨기고 또 숨겼다.

“…….”

가끔 과거를 되짚어갈 때가 있다. 그때 숨기지 않았더라면 지금 어떻게 됐을까. 그가 배우 제안 받았다는 말을 했을 때, 반대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내가 팔을 다치지 않았더라면 지금 너와 같은 방향의 우정을 가지고 있을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분명 뭔가는 달라졌을 것이었다. 이미 우리의 관계가 끝났을 수도 있고, 그저 그런 친구가 되었을 수도 있고, 나 역시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로 차정한을 대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매번 내 앞에 주어진 선택지를 보고도 외면했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13년째 차정한을 사랑하고 있고, 돌아보는 방법도, 또 앞을 보는 법도 몰랐다. 사방이 꽉 막힌 나의 보일 수 없는 죄책감 가득한 사랑 속에서 숨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

“…….”

고작 할 수 있는 건 이렇게 차정한의 딱딱한 광고를 보며 잠시 마음을 푸는 것뿐이었다. 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어떤 감정을 보여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차정한을 한참이나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가오는 타야 할 버스에 올랐다.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나의 자리를 보고 싶지 않아 나는 버스가 출발할 때까지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 * *

오피스텔에서 책을 좀 보고 쉬다가 동윤 형에게 저녁까지 녹음이 길어질 것 같다는 연락을 받았다. 낮에 집에 오면 보고 가려고 했는데 저녁에 온다니 이따 밤에나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동윤 형 같은 공식적인 메인 매니저는 아니지만, 그래도 내 개인 일을 보려고 차정한이 있을 때 나가는 건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다. 그게 늦게 온다니 차라리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집에서 쉬다가 준비를 하고 막힐 것 같아 다섯 시 반쯤 집을 나섰다.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만, 평일 이 시간이면 퇴근과 맞물려 굉장히 막힌다는 것을 알기에 조금 과하더라도 빨리 나오는 게 마음이 편했다.

택시를 타면 30분 정도 걸리고, 버스를 타면 40분 정도가 걸리지만, 이런 시간에 택시를 탔다가는 한 시간도 더 걸릴 것 같아 오피스텔 앞에 서는 아직은 자리가 있는 버스에 올랐다. 내가 타는 곳은 회사가 밀집된 곳의 역이 아니라 자리가 있었지만, 큰길로 나가 설 때마다 말도 안 될 만큼 사람들이 버스에 올랐다. 다섯 정거장이 지난 뒤에는 탈 공간이 조금도 없어 버스는 사람을 더 태우지도 못했다.

[정한 : 나 이제 끝났어 아는 감독님 만나서 저녁 먹고 가려고]

휴대폰 화면이 반짝이며 차정한의 이름이 나타났다. 혼자 집에서 또 아무것도 안 먹고 대충 자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래도 저녁을 먹고 온다니 마음이 놓였다.

[힘들었겠다 저녁 맛있게 먹어]

[난 지금 약속 장소 가는 중인데 엄청 막혀]

[정한 : 최주안이랑 둘이 만나?]

[아니 다른 사람들이랑 오늘 만나기로 했다고 해서 다 같이 만날 것 같아]

[정한 : 과모임 됐네]

[그러게 갑자기 그렇게 됐어]

[정한 : 늦어?]

[늦을 일 없을걸 주안 선배도 술 안 마시고 다들 그냥 밥만 먹고 헤어질 것 같은데]

[정한 : 알았어 늦으면 연락해 데리러 갈게]

데리러 온다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늦은 시간에 차정한이 운전을 하고 오는 건 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늦지 않으면 될 일이고, 됐다고 하면 마음이 쓰일 것 같아 그냥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보낸 감독님 오셨다는 메시지를 끝으로 나는 휴대폰을 다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거의 움직이지 않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과할 만큼 빨리 나온 건 정말 최고의 결정이었다. 버스로 40분이면 올 거리까지 1시간 반이나 걸려 도착했다. 7시까지 만나기로 한 그 시간에 정확하게 도착해 안으로 들어가니 먼저 온 동기 한 명이 나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졸업하고 몇 번 보기는 했지만, 올해 들어서는 처음 보는 거라 무척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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