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가 다 나네.”
차정한의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사고가 멈추고 몸이 굳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있는 말을 한 건데 그걸 그렇게 한마디로 정리해서 받아들일 줄은 몰랐기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말 듣고 나니까 어제 괜히 그랬다 싶어서 쪽팔리잖아. 지유현이 이렇게 내 생각만 하는데.”
“…당연하지. 내가 해야 할 일도 다 너랑 관련된 일이고… 또, 같이 계속 있기도 하고.”
다행히 들킨 것 같지는 않았다. 죽었다가 깨어나도 차정한은 내가 친구가 아닌 다른 쪽으로 자신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었다. 남자에게, 그것도 오랜 친구인 나에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기도 하고, 또 무엇보다도 나를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의지할 수 있고, 평생 함께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좋은 친구’이기를 원하는 차정한이 내 마음을 쉽게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차정한의 그런 부분은 나를 안심하게 하면서 또 때로는 조금 공허하게 만들었다. 알아 달라고 티를 낸 적도 없고,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차정한이 나를 사랑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 긴 혼자의 사랑은 때로 내가 말하지 않아도 상대가 조금은 눈치를 채고 다가와 주기를 원할 때가 생겼다. 사실 그건 내 마음을 눈치채 주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상대도 나를 똑같이 사랑하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헛된 바람에서 오는 감정이었다.
“내가 그래서 널 좋아해.”
“…….”
“부모라는 사람들도 자기 생각만 하고 내 생각은 안 했거든. 이유가 나였던 적이 없어. 돈, 다른 사람, 자유. 내가 매달릴까 봐, 눈 마주치면 같이 산다고 그럴까 봐 둘 다 나를 보지도 않는데 넌.”
“…….”
“이유가 다 나잖아. 기분 좋아.”
타인이 듣는다면 친구 사이에 쉽게 하기 힘든 말이라고 여길 것이었다. 지금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것들이 대부분 다 그랬다. 좋아한다고 말하고, 너밖에 없다고 소리 내고, 머리를 쓰다듬고, 뺨을 만지는 그 솔직한 표현들이 평범한 친구 사이에는 존재하기 힘든 일들이라는 걸 나도 알고 있었다. 차정한 외에 그 누구와도 이런 스킨십이나 표현은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차정한이 우정이기 때문에 내게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
앞으로도 그럴 거야. 내 감정의 모든 이유는 너일 거야. 소리 낼 수는 없지만, 생각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나는 노크에 대답하는 차정한을 보며 열리는 문소리에 긴 숨을 내쉬었다.
눈치 빠른 차정한이 절대 눈치챌 수 없는 단 하나. 그게 내 사랑이라는 게 다행이고 또……. 혼자만의 작은 불행이었다.
쇼핑은 전과 똑같은 과정으로 진행되었다. 레스토랑 몇 층 아래에 있는 곳으로 가니 퍼스널 쇼퍼가 직접 나와 차정한과 내게 인사하고 안내했다.
안에는 하나의 매장처럼 이미 입력된 내 사이즈에 맞는 옷과 신발로 가득 차 있었다. 늦가을에서 겨울에 입을 옷이다 보니 공간 자체도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으로 꾸며져 자꾸 이곳저곳으로 시선이 갔다.
차정한은 소파에 앉아 준비된 커피를 마시며 내가 옷을 입고 나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마음에 드는지 내게 먼저 의견을 물어 들은 다음 차정한은 사겠다는 의미로 직원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차정한의 옆에 서 있는 직원이 들고 있는 태블릿 PC에 수량을 체크하고, 리스트를 정리했다.
거의 열 번쯤 옷을 갈아입고 나서야 쇼핑이 끝났다. 내게 마음에 드는지 계속 묻기는 하는데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을 수가 없는 옷들이었다. 내가 혼자 찾아서 사려고 해도 이렇게 잘 어울리게 맞추지는 못할 만큼 전문가의 안목으로 고른 옷이니 내가 의견을 보탤 것도 없었다.
차정한 역시 전부 마음에 들었는지 내가 입었던 옷을 모두 구매했다. 작년까지는 너무 많다고 그를 말렸지만, 말려도 절대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내가 놀라 아무 말도 못 하도록 시계까지 몇 개를 더 사서 안기는 통에 그다음부터는 하지 말라는 건 더 하고 싶어하는 차정한을 자극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들으면 더 부담이 될 것 같아 금액을 들으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어마어마한 금액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차정한은 아무렇지도 않게 계산하고 주소 확인을 하는 직원에게 맞다며 짧게 대답했다.
퍼스널 쇼퍼와 VVIP 담당 직원 모두가 주차장까지 내려와 차 옆에 섰다. 원래라면 백화점 정문 앞으로 차가 섰을 텐데 사람들 눈에 뜨이고 싶지 않아 차정한은 직접 주차장으로 내려와 차에 올랐다. 나는 인사하는 직원들에게 묵례하고 얼른 차에 올라 조금 답답하게 뭉쳐 있던 숨을 내쉬었다. 차가 빠져나가는 동안에도 뒤에서 인사를 하고 있는 직원들이 거울에 비쳤다.
“스트레스 다 풀렸어. 역시 돈 쓰는 게 최고야.”
“넌 사고 싶은 거 없어? 네 거 사지.”
“난 진짜 사고 싶은 거 생기면 바로 사잖아. 난 너한테 돈 쓰는 게 스트레스 풀리더라.”
“너도 참 특이해.”
“특이해서 좋지?”
“그래. 좋아. 오늘 고마워. 잘 입을게.”
“네가 하는 게 얼만데 고작 그 정도에 자꾸 고맙다 그래. 누릴 건 당당히 누려. 월급도 더 준다니까.”
“지금도 많이 받거든. 내가 돈이 막 필요한 것도 아니고.”
차정한 집안에 비교할 정도는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돈 걱정을 하고 산 적은 없기에 딱히 돈에 욕심이 없었다. 늘 필요한 곳에 쓸 만큼의 돈은 충분히 있었고, 물욕이 있는 편이 아니라 돈이 있어도 딱히 쓸 일이 많이 없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오피스텔도 차정한이 얻어 주고, 의식주를 다 최고급으로 해결해 주니 정말 나는 돈을 쓸 일이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가끔 쓰는 교통비나 부모님께 드리고 싶어서 드리는 용돈이 전부였다.
“넌 뭐 그렇게 욕심이 없어.”
“그냥…. 가지고 싶은데 못 가지면 슬프잖아. 계속 생각나고. 이루고 싶은데 못 이루면 또 내내 마음에 맺히고. 그런 게 싫어서.”
“진짜 그럼 가지고 싶은 거, 뭐 이루고 싶은 거 없어?”
“…….”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은 차정한이었다. 안 된다고 10년이 넘도록 누르고 있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눌리지 않고 떠오르는 이름에 실소가 작게 터졌다.
“…없어.”
“뭐든 생기면 말해.”
“…….”
“내가 다 들어줄게.”
진심 어린 따뜻한 목소리에 눈물이 날 것 같아 괜히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둡고 짙은 창으로 불빛이 비칠 때마다 내 얼굴이 한 번씩 일렁였다.
“말만 들어도 좋다.”
“말로만 그러는 거 아닌데. 알잖아. 나 능력도 있고, 네가 원하는 건 다 해 줄 수 있어. 그럴 일 없어야 하고, 없겠지만 만약에 너 아프다고 해도 내가 다 살릴 거고, 너 위험한 일 생겨도 내가 너 구할 거야. 그러니까 욕심 좀 부리고 살아. 넌 그래도 돼.”
“…알았어.”
“대답하는 거 봐. 착해, 우리 유현이.”
운전석 쪽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그걸 보지 못하고 앞을 본 차정한이 내게 손을 뻗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머리를 쓸려던 손은 내가 움직여 뺨으로 닿았다. 잠시 멈췄던 손끝이 부드럽게 움직여 능숙하게 뺨을 쓰다듬었다. 나는 그 손에 얼굴을 묻고 울고 싶어졌다.
“…….”
너만이 들어줄 수 있고, 또 너는 들어줄 수 없을 단 하나의 욕심. 아무리 다른 것을 떠올리려고 해도 끈질기게 붙어 사라지지 않는 차정한의 이름을 나는 아주 한참이나 마주했다.
13
?
?
차정한이 아침에 운동을 간 사이 딸기 주스 한 병을 꺼내 마시며 그가 보라고 준 대본과 시놉시스를 펼쳤다. 내가 이런 쪽으로 특별히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차정한에게 이 배역이 어울릴지, 이 배역이 차정한의 매력을 잘 살릴 수 있을지는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차정한은 마음이 가는 작품이 생기면 내게 대본이나 시나리오를 보여 주었다.
이번 역할 역시 전작처럼 재벌 역할인데 저번과는 결이 다른 캐릭터였다. 저번에 맡은 역할은 그야말로 로열패밀리의 도련님으로 누구에게도 굽혀 본 적이 없는 그런 캐릭터였다면, 이번에는 재벌이지만, 그 자리에 앉기까지 숱한 음모와 말들을 전부 다 이겨내고 자신의 자리를 지켜 그 과정에서 사람에 대한 믿음이나 사랑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야망 하나로 더 높은 곳을 향해 가고 싶은 그런 캐릭터였다. 사건의 스케일이나 스토리도 흥미롭고, 영화 같은 느낌이 나서 좋았다.
<사람도 믿지 않고, 사랑도 믿지 않는다. 그리고 언제든 나약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자기 자신도 믿지 않는다. 그저 앞과 위만 보고 갈 뿐이다. 재혁(미정)은 모든 것을 가졌지만, 만족할 수가 없다.>
특히 시놉시스에 적힌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차정한과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차정한이 내게 그동안 했던 말들과 비슷하기 때문이었다.
‘난 아무도 안 믿어. 믿는 순간 변하니까. 난 믿어 버렸으니까 변하는 걸 알면서도 지키려고 끌려가고, 노력하고, 비는데도 변한 뒤에는 달라지는 게 없더라.’
차정한도 사람을 믿지 않았다. 그리고 사랑도 믿지 않았다.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과 사람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탓에 다가오는 사람들을 밀어내지 않지만, 또 가까이 올 수 있도록 끌어안지도 않았다. 차정한은 자신의 영역을 마음대로 침범하는 사람들을 경멸했다.
그동안 이 집에 마음대로 찾아온 여자들 역시 같은 이유로 차정한과 인간적으로도 완전히 끝났다. 그 어떤 관계를 맺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자신의 공간에 들어왔다는 것을 차정한은 용납하지 못했다.
차정한은 종종 인간관계에 결벽증이 있다고 내게 말했다. 언젠가는 끝날 사람들과 그 어떤 감정도 나누고 싶지 않다며 늘 차갑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차정한이 내 마음을 알게 될까 봐 그게 너무 무서워 그런 이야기를 나눈 날 밤에는 늘 악몽을 꿨다. 차정한이 내게 배신자라고 화를 내는 꿈이었다.
<그래도 재혁(미정)의 마음 깊은 곳에는 언젠가 자신의 마음을 뒤흔들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아주 작은 믿음이 완전히 꺼지지 않고 남아 있다. 불씨는 언제든 살아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무리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불신하고 혐오해도 누구나 가지고 있는 불씨를 차정한도 가지고 있을 것이었다. 언제든 살아날 준비를 하고 있는 그 불씨를 차정한은 언제 발견하게 될까.
그 불씨가 살아나면 차정한의 차갑고 외로운 마음 안에도 사랑이라는 것이 생겨날 것이었다. 낯설겠지만, 그래도 차정한은 그 사랑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은 그런 거니까. 믿지 않고, 바라보지 않아 낯설어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시작되는 거니까. 나는 차정한의 오랜 친구로 차정한이 꼭 아주 깊은 사랑을 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늘 부족하고, 그래서 더 외로웠던 그 마음이 사랑으로 꽉 차기를 빌었다.
“…….”
13년 동안 짝사랑한 상대를 나와 붙이지는 못하고, 타인과 사랑을 나누며 행복하기 바라는 내가 어이없고 조금 우스워 실소가 터졌다. 분명 웃음인데 하나도 웃기지 않았다.
“시놉 어때? 대본은 봤어?”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드니 다가오는 차정한이 보였다. 들어온 줄 몰랐는데 갑자기 소리가 들려 조금 놀랐다. 내 생각에 소리가 없어 정말 다행이었다.
“응, 보고 있는데 캐릭터 좋은 것 같아. 너도 잘 살릴 것 같고, 이 캐릭터가 네 매력을 더 보여 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할까?”
“응. 네가 이 연기 하는 거 보고 싶어.”
“알았어. 회사에서도 다 했으면 좋겠는 분위기더라고. 감독, 작가 다 시청률 보장되는 분들이고, 남들은 하려고 줄 서도 못 하는 거잖아.”
“그렇지. 저번에 이 작가님 인터뷰 봤는데 그때 말한 차기작… 어, 지금 이 작품이겠지? 이미지에 딱 맞는 배우가 있어서 그 배우라고 생각하고 쓴다고, 꼭 그 배우가 해 줬으면 좋겠다고 하시던데, 너인가 봐.”
“나한테 제일 먼저 준 거라고는 하더라. 작가 픽이라고.”
물을 꺼내 한 모금 마신 차정한이 앉아 있는 내 어깨 위로 손을 얹었다. 묵직하게 실리는 힘에 올려 보자 아침부터 다정한 웃음이 얼굴 위로 뚝 떨어졌다.
“내년 1월부터 촬영이라고 한 것 같은데… 괜찮을 것 같아. 한다고 해야겠다. 고마워, 봐줘서.”
“잘할 거고, 잘될 거야. 씻고 와. 아침 먹자.”
“알았어.”
욕실로 가는 차정한을 보다가 일어나 간단히 볶음밥을 만들었다. 이 볶음밥 역시 내가 넣고 싶은 것을 넣고, 소스도 이것저것 아무렇게나 섞어 만드는 거지만, 차정한은 이 정체 모를 볶음밥을 아주 좋아했다. 정체는 알 수 없지만, 솔직히 맛은 괜찮았다.
볶음밥을 나눠 담고 식탁에 두는데 진동이 울렸다. 화면을 보니 ‘누나’라는 두 글자가 보였다. 서로 바쁘다 보니 꽤 오랜만에 온 전화라 얼른 받자 정신이 하나도 없는 누나 목소리가 들렸다.
“응, 누나.”
- 유현아. 오늘 정한이 바빠? 너도 오늘 같이 다녀?
“아니. 오늘은 나 안 가는데, 왜? 무슨 일 있어?”
- 됐다! 살았다! 알바 하는 애가 지금 엄마 편찮으시다고 갑자기 연락이 와서. 점심시간 전에 와서 오늘 장사 좀 도와주라. 나 혼자 안 되는 거 알잖아.
“알았어. 늦어도 열한 시까지는 갈 수 있을 거야.”
- 그때 오면 돼. 어, 손님 왔다. 끊어. 이따 보자.
“응. 이따 봐.”
내가 통화하는 걸 본 차정한이 다가와 앉았다. 나는 얼른 그의 앞으로 수저를 놓아주었다.
“유주 누나?”
“응. 알바생이 지금 연락 와서 오늘 못 나간다고 했나 봐. 오늘 일 좀 도와 달라고.”
“누나 카페 잘 된다더니 바쁘신가 보네.”
“근처가 다 회사라 점심시간에 몇백 잔은 나가나 봐.”
“커피가 맛있기는 하더라. 나도 오늘 일정 없으면 가는 건데.”
“다음에 같이 가자.”
“그래. 누나 본 지도 진짜 오래됐네. 카페 개업 때 보고 못 본 것 같아.”
우리 가족에게 차정한은 거의 또 다른 아들이나 마찬가지였다. 고등학교 3년 내내 붙어 다니고, 학교만 끝나면 같이 집으로 온 차정한을 부모님은 물론이고, 누나도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그렇게 다 같이 저녁도 많이 먹고 하다 보니 내가 없어도 우리 부모님과 우리 집에서 식사를 할 만큼 가까워졌다.
“누나한테 안부 전해 줘.”
“그럴게.”
“밤에 보자.”
“응. 이따 보자.”
준비를 마친 차정한과 주차장까지 내려가 멀어지는 밴을 보고 얼른 다시 집으로 올라와 카페에 갈 준비를 했다. 깔끔한 셔츠를 골라 입고, 차정한이 사 준 그리 두껍지 않은 재킷을 골라 입었다. 내가 쓰는 옷장 네 칸이 꽉 찰 만큼 가득 걸리고, 놓인 옷들을 보니 부지런히 입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빼곡하게 걸린 옷들을 하나씩 다 괜히 만져 보았다. 차정한이 보고 골라 준 거라고 생각하니 이렇게 걸려 있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졌다.
카페에 들어서자 누나가 어서오세요, 인사를 하다가 나를 보고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몇 달 만에 봐서 그런지 반가워 웃음이 절로 났다.
“왔어? 왜 이렇게 오랜만에 보는 것 같지?”
“오랜만이야. 여름에 보고 처음.”
“우리 유현이 누나 안 보고 싶었어?”
아가한테 말하는 것처럼 말하는 누나를 보니 웃음이 터졌다. 웃는 나를 보고 따라 웃은 누나가 등을 두드리며 카페 안쪽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나는 얼른 누나가 준 에이프런을 앞에 하고, 밖으로 나갔다. 먼저 손을 깨끗하게 씻고, 손님들이 다 마시고 두고 간 컵과 접시 같은 것들을 정리하고, 부스러기나 음료가 묻어 지저분해진 것을 알아서 닦자 누나가 다가와 기특하다는 듯 등을 두드렸다.
“너 그냥 나랑 일하자. 정한이만큼은 못 줘도 잘해 줄게. 말 안 해도 이렇게 잘하는 직원을 어디서 뽑아. 너희 매형도 너 눈독 들여.”
“시간 되는 날은 다 되니까 필요할 땐 언제든 전화해.”
“알았어. 이제 손님 밀려들 거야. 정신없겠지만, 잘 끝내자.”
“응.”
누나 말처럼 점심시간이 시작되자마자 사람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전에 경험해 본 적이 있어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사이에 더 소문이 난 건지 카운터에 주문을 하려는 사람들이 스무 명도 더 서 있었다. 한 명을 받는 사이에 두 명이 늘고, 음료가 한 건 나가면 그사이에 세 건의 새 주문이 또 쌓였다.
나는 정확하게 주문을 받고, 누나는 계속 음료를 만들었다. 정말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바쁘게 움직이며 계속 주문을 확인하고 같이 만들 수 있는 음료를 만들면서 따로 스팀을 해야 하는 까다로운 음료들을 시작했다.
1시가 지난 뒤에야 사람들이 줄어들고, 한산해졌다. 11시 반부터 1시까지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어떻게 일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사이에 얼굴이 핼쑥해진 것 같은 누나가 내 앞으로 음료를 한 잔 내밀었다.
“이거 마셔. 진짜 정신 하나도 없다.”
“여기 카페가 몇 갠데 여기만 이렇게 와?”
“커피 맛있다고 소문이 났어. 저번에 방송에도 나왔잖아. 그리고 정한이 단골 카페라고 누가 올렸나 봐. 그 뒤로 난리야. 뭐… 바쁘긴 한데 좋은 일이기는 하지.”
누나가 만들어 준 에이드를 마시니 이제야 조금 살 것 같았다. 누나는 배고프겠다며 햄 치즈 파니니를 따뜻하게 데워 주었다. 따뜻할 때 바로 먹어 그런지 굉장히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정한이 요즘 진짜 잘나가더라. 내 주변에도 다 정한이 좋다고 난리야. 걘 안목도 좋더라. 어떻게 하는 것마다 드라마고 영화고 다 재밌어?”
“그래서 별명이 믿고 보는 정한이잖아. 정한이 나오면 무조건 재밌다고.”
네 시가 지나자 그제야 카페 안이 한가해졌다. 누나는 지금이 가장 애매한 시간이라며 이때 제대로 쉬어 놓아야 저녁 장사도 잘할 수 있다며, 포스 앞으로 의자를 당겨 앉았다.
#14
?
?
“넌 요즘 어때?”
“나? 나야 뭐 정한이 바쁘면 나도 바쁘고, 정한이 쉬면 나도 쉬고.”
“넌 옛날부터 아주 뭐만 물으면 다 정한이지. 둘이 하도 붙어 다녀서 나중에 같이 뭐 사업이라도 하려나 했더니, 사업은 아니지만, 같이 일하기는 하네, 진짜.”
“그러게…. 내가 연예인 매니저 일을 할 줄 누가 알았겠어. 누나도 몰랐지.”
“당연히 몰랐지. 일은 어때. 힘들지 않아?”
“전에는 정한이 스케줄 다 같이 다니니까 체력적으로도 좀 힘들고 그랬는데… 요즘은 정한이가 같이 가자는 것만 가고, 그 외에는 쉬어. 힘들 거 하나도 없어.”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누나를 가만히 보자 누나가 말없이 싱긋 웃었다. 굳이 듣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언제까지 매니저 일을 할 건지 묻고 싶은 것이었다. 알지만, 굳이 누나가 묻지 않기에 나도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부모님이나 누나나 어릴 때부터 내게 뭔가를 강요한 적이 없었다. 알아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잘하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지만,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며 사는 게 가장 좋은 일이라고 늘 말씀하셨다. 그래서 내가 취업이 아니라 정한이랑 같이 일을 하고 싶다고 말씀을 드렸을 때도 반대하지 않으셨다. 체력적으로나 또 정신적으로나 힘든 일이 될 수 있으니 여러모로 잘 챙기라는 말씀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게 벌써 6년째였다. 스물넷이던 차정한과 나는 서른이 되었고,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차정한과 함께였다. 나는 전혀 불만도 없고, 일에 보람을 느끼지만, 부모님이나 누나의 입장에서는 더 늦으면 내가 새로운 다른 일을 무엇도 할 수 없을까 봐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나는 가족의 걱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걱정은 되지만, 내가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하는 그 마음까지도 전부 알고 있었다.
“힘든 일 있으면 누나한테 다 말해. 알았지?”
“알았어. 근데 나 힘든 일 진짜 없어. 알잖아. 나 은근 단순해서 일 있어도 금방 잊고, 기분 나빴어도 좀 지나면 혼자 다 풀리는 거. 스트레스 잘 안 받아.”
“알지. 아는데 그래도 가끔 뭔가 털어놓고 싶을 때도 있잖아. 정한이한테 다 하긴 하겠지만, 정한이한테 말하기 좀 그런 일도 있으니까. 그럴 때 누나한테 말하라는 거지. 나도 너희 매형한테 말하기는 좀 그럴 때 있거든. 나는 그럴 때마다 너한테 말하잖아.”
“나도 생기면 누나한테 말할게.”
누나는 늘 따뜻하게 나를 걱정했다. 그래서 더욱 진짜 속마음을 말할 수가 없었다. 이건 차정한에게도 말하지 못하지만, 누나나 부모님에게도 말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누구에게도 소리 낼 수 없지만, 부끄럽지도 않고, 없애고 싶지도 않은 감정은 자꾸만 자라났다. 나도 이 감정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알지 못했다.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지면, 숨기려고 해도 나를 삼킨 채 터져 나올 것이었다.
“…….”
언젠가는 차정한을 사랑하는 나의 이 마음이 나를 감싸고, 내가 그 사랑 안에서 허우적댈 것만 같았다. 나갈 곳은 그 어디에도 없는 감정에 머리끝까지 빠지는 기분은 어떨까. 그래도 그저 좋을 것만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내가 답이 없게 느껴졌다.
저녁부터 마감까지 일하는 직원이 곧 온다는 말에 나는 싱크대에 담가 둔 컵과 접시들을 닦았다. 누나는 자기가 한다고 했지만, 매일 할 텐데 내가 있을 때까지 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앉아서 쉬라는 말에 역시 동생밖에 없다며 뒷머리를 쓰다듬은 누나가 의자에 앉았다.
“알바생 오면 나가서 저녁 먹자. 누나가 맛있는 거 사 줄게. 오늘 진짜 고생한다, 우리 유현이.”
“이게 무슨 고생이야. 누나가 매일 고생이지.”
쌓인 컵과 접시를 전부 설거지해서 물기를 닦아 바로 쓸 수 있게 잘 정리까지 하자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매형 전화가 와서 받으러 안으로 들어간 누나를 보다가 마지막으로 플라스틱과 종이 쓰레기를 정리해 봉지를 묶는데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하루 사이에 입에 붙은 ‘어서 오세요.’ 인사를 하는데 카페 안 여기저기에서 놀란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사진 찍는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웅성대는 소리가 나는 것에 무슨 일인가 싶어 얼른 손을 씻고 포스기 쪽으로 몸을 돌렸다.
“주문하시겠…….”
말이 다 나오기도 전에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카운터 앞에 선 차정한이 나를 보며 고개를 기울이고 웃었다. 여기 올 줄은 정말 몰랐기에 바보처럼 말도 못 하고 눈만 겨우 깜빡였다. 이제야 사람들이 놀라던 소리와 셔터 소리가 왜 났는지 이해했다.
“정한아….”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 왔어. 저녁 먹고 너 데리고 가려고. 놀랐어? 누나는?”
“아…. 전화 받으러 안에.”
카페 안에 있는 몇몇 테이블을 채운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차정한에게 몰려들었다. 오해를 사거나 말도 안 되는 말이 돌 상황은 전혀 아니지만, 그래도 괜한 노파심에 목소리를 작게 줄여 속삭였다.
“사람들이 보는데 괜찮아?”
“뭐 어때. 누구 데리고 온 것도 아니고. 그리고 여기 내 단골이라고 나오던데.”
그때 전화를 끊고 나온 누나가 차정한을 보고 반가움과 놀람을 담은 목소리를 냈다. 나보다 더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의 다소 호들갑스러운 해후에 웃음이 났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온다고 말도 안 하고!”
“유현이 데리고 가려구요.”
“저녁은?”
“먹어야죠. 누나 나가실 수 있어요?”
“그럼. 알바생 곧 올 거야. 안 그래도 너 잘 지내나 보고 싶었는데 잘 왔어.”
웃는 차정한을 보니 꼭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우리 집에 자주 와서 가족과 친해졌던 그때의 차정한을 보는 것만 같았다. 자신의 집보다 우리 집을 더 좋아하고, 한 번도 바닥에서 자 본 적 없을 것 같은 차정한이 내 방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워 잠들기 전까지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던 그때가 떠올라 조금 그리워졌다.
저녁 식사는 몹시 즐거웠다. 밝고 늘 즐거운 누나 덕분에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근사한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언제든 시간 나면 오라는 누나를 집까지 태워 준 차정한은 밴에서 내려 누나가 들어갈 때까지 보며 인사했다. 누나에게 잘하는 차정한을 보니 고맙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