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43)

“왜?”

“아…. 너 잘 먹는 거 보니까 좋아서.”

“넌 나 먹이는 재미로 살지.”

“알면 잘 좀 먹어.”

“나도 제발 먹는 재미 좀 생겼으면 좋겠다.”

깨끗하게 먹은 것을 알아서 정리한 차정한이 다시 슬리퍼를 끌며 욕실로 향했다. 그런 차정한의 크고 마른 뒷모습이 좋아 눈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내내 바라보았다.

4시 반이 거의 다 되었을 때, 주차장에 도착했다는 동윤 형의 메시지가 울렸다. 나는 모자에 마스크까지 눌러 쓰고 나가는 차정한을 따라 집을 나섰다.

보안이 굉장히 잘 된 집이지만, 그래도 어디인가에서 누군가는 차정한을 보고 있을 가능성이 있기에 매사 조심해야 했다. 나야 어떤 일이 닥쳐도 상관없지만, 차정한은 아니었다. 짧은 거리라고 해도 절대 혼자 움직이게 해서는 안 됐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니 동윤 형이 차에서 내려 밴 문을 열어 주었다. 차정한이 내 등을 한 번 쓸며 인사하고 그 안으로 올랐다. 문을 닫은 동윤 형이 나를 바라보았다.

“어제 많이 놀랐지? 전에 무슨 잡지에서 정한이가 비싼 아파트로 이사 갔다고 실은 적이 있었는데 그걸 찾아서 알아냈나 봐. 어제 내가 아주 그 매니저 반 죽이고, 회사에도 말했어.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야.”

“저도 잘한 거 없어요. 정한이나 형한테 한 번 더 물어봐야 했는데. 죄송해요. 제가 제대로 처신을 못 한 것 같아요.”

“에이, 남 주소 알려 주고, 마음대로 밀고 들어온 사람이 잘못이지. 정한이 기분은 어때?”

동윤 형이 차에 탄 차정한을 흘끗 보고 목소리를 작게 죽여 소곤대며 물었다.

“다 풀렸어요.”

“다행이다.”

“이따 끝날 때쯤 연락 주세요.”

“그래, 알았어. 올라가.”

“네. 운전 조심하세요.”

동윤 형이 운전석에 올라타고 조금 뒤 커다란 밴이 움직였다. 나는 새까맣게 코팅되어 안이 전혀 보이지 않는 창 안을 바라보았다. 의자 뒤로 기대어 눈을 감고 있겠지만, 그래도 나는 보이지 않는 차정한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내 앞에서 차가 돌아 입구로 멀어질 때쯤 창밖으로 손 하나가 나와 흔들렸다.

“…….”

먼 곳에서 봐도 차정한의 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차가 주차장을 올라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차정한을 보니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때로 차정한의 다정함이 너무 아팠다.

* * *

차정한의 집을 정리하고 오피스텔로 가 대청소를 하고 있는데 김원우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반 애들이 모이는 자리에 이번에는 꼭 오라는 말에 확실하게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나는 나와 차정한을 같이 아는 사람들을 만나는 게 편하지 않았다. 같은 고등학교, 대학교를 나와서 내가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와 차정한이 내내 붙어 다닌 것을 알고 있고, 당연히 차정한이 유명한 배우가 된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학교 다닐 때 친구로 내내 같이 다니는 우리를 본 사람들을 오랜만에 만나면 내게 요즘 뭘 하고 사는지를 물었다. 그럴 때면 솔직히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조금 망설여졌다.

스물넷이 되던 해에 대학 잡지 커버 모델을 했던 차정한은 유명한 기획사의 제안을 받아 배우로 데뷔했다. 등장은 신선했고, 행보는 파격적이었다. 사람들은 모든 면에서 이목을 끄는 차정한을 좋아했다.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고, 차정한은 순식간에 내게서 멀어졌다.

물론 사이가 서먹해지거나 한 건 아니었다. 이곳저곳 차정한을 원하는 곳이 많아지기 시작하며 학교에 제대로 나오지 못했고, 하루에 얼굴 한 번 보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자연스럽게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던 차정한을 딱딱한 화면 속에서 보는 건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다.

#06

?

?

유명한 작가의 <가을밤>이라는 미니시리즈 남자주인공으로 캐스팅되었다는 걸 인터넷 기사로 봤을 때는 처음으로 거리감이 느껴졌다.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면 심심찮게 보이는 연예인들의 소식들 사이에 늘 나와 같이 있던 차정한의 이야기가 있는 건 정말 너무나도 낯선 일이었으니까.

한참이나, 정말 한참이나 그 기사 제목 속 차정한의 이름을 바라봤었다. 볼 때마다 마음이 울렁이고 조여들었다.

‘지유현, 왜 이렇게 늦게 다녀?’

집에 들어가면 혼자 땅이나 팔 것 같아 정처 없이 아무 곳이나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늦게 돌아간 집 앞에는 차정한이 있었다.

‘정한아….’

‘전화는 왜 안 받아.’

‘전화?’

휴대폰을 꺼내 보니 배터리가 나가 꺼져 있었다. 차정한의 기사를 보다가 배터리가 한 자리로 떨어져서 집어넣었던 기억이 났다.

‘미안해. 꺼져 있네.’

‘기다렸잖아.’

‘…….’

‘세 시간이나.’

차정한은 참는 걸 싫어했다. 굳이 인내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고 내게 늘 말했었다. 그런 차정한이 나를 세 시간이나 집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동안 멀어진 것 같아 울렁대고 가라앉았던 마음도 결국, 사랑이라는 듯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미안해. 얼른 들어가자.’

더운 것도 싫어해서 내내 여기 서 있느라 무척 힘들고 짜증이 났을 텐데도 차정한은 조금도 내게 화내지 않았다. 집으로 들어가 얼른 에어컨을 켜고, 차가운 이온 음료를 주자 단숨에 비운 차정한이 나를 잡아 앉혔다.

‘유현아.’

‘응.’

‘나 너 없이 안 되겠어.’

‘…….’

고백 같은 모양의 말에 숨도 쉬지 못하고, 눈도 깜빡이지 못한 채 차정한을 바라보았다. 차정한은 그런 나를 가만히 보다가 말을 이었다.

‘너 없으니까 불안해.’

‘…….’

‘나 너 없이 못 살잖아. 혼자 아무것도 못 하고.’

‘…….’

‘나랑 같이 있어 줘.’

사랑의 의미가 아니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지만, 같이 있어 달라는 차정한의 말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덤덤하지 못하고, 차정한의 말 하나, 눈동자의 움직임 하나에도 심장이 떨어지던 때라 더 그랬다. 물론 지금 그 말을 듣는다고 해도 나는 차정한과 함께했을 것이었다. 내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으니까.

그때부터 나는 차정한과 거의 함께 지냈다. 차정한의 소속사에서는 나의 존재에 의문을 가졌지만, 시간이 지나며 소속사에서도 나를 비공식적인 차정한의 멘탈 케어 매니저로 생각하고 월급을 주고, 또 존중해 주었다.

말이 거창하지만, 사실 하는 일은 그냥 차정한과 시간을 보내는 일이었다. 스케줄이 끝나고 오면 먹고 싶다는 걸 같이 먹고, 차정한의 쌓인 이야기를 들었다. 내 이야기가 듣고 싶다면 들려주고, 드라이브가 하고 싶다고 하면 같이 드라이브를 나갔다. 나는 차정한의 남은 최소한의 일상이 사라지지 않도록 지키는 일을 하고 있었다.

스물넷부터 서른이 된 지금까지 햇수로 7년 동안 차정한의 옆에서 함께 있었다. 조금의 후회도 없고, 내게는 너무나도 좋은 시간이었다. 안을 자세히 보면 아프고 순간순간 위기가 되는 시간도 분명 있었겠지만, 내가 사랑하는 차정한의 옆에 있을 수 있고, 그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것 하나로도 내게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친구들은 이런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차정한이랑 같이 일을 하고 있다고 말을 하면 그럴 줄 알았다면서 나를 한심하게 보았고, 차정한이 나를 이용하고 부려먹고 있다며 안 좋은 추측을 쏟아냈다. 나는 그게 싫었다. 알지도 못하면서 떠들고, 차정한을 나쁘게 말하는 게 싫어 그런 모임에 되도록 나가지 않았다. 차정한은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

김원우의 메시지에 뭐라고 답을 보내야 할지 망설이다가 그냥 나중으로 미뤘다. 당장 다음 주가 바빠 안 간다고 하기도 그렇고, 갈 것처럼 여지를 주는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청소기와 휴대폰을 내려 두고 보다 말았던 <가을밤> 다음 회차를 틀었다. 이미 수도 없이 봐서 대사와 장면, 차정한의 표정 디테일까지 다 외울 정도지만, 볼 때마다 보이지 않는 모습들이 보여 좋았다.

<사랑해. 내가 사랑해서 그래.>

지금보다 훨씬 어린 차정한이 눈물 맺힌 눈동자로 저에게 등을 보인 상대에게 고백했다. 사랑한다고, 사랑해서 그러는 거라고.

<매달려서 미안해. 그런데 어쩔 수가 없어.>

“…….”

<괴롭히고 싶지 않은데… 잊으려고 노력하는데…. 사랑이 끝나지를 않아.>

사랑에 빠진 차정한도 사랑을 연기하는 저 모습과 똑같을지 궁금했다. 다가오는 모든 사람들을 마다하지는 않지만, 그들과 닿는 것도 깊게 엮이는 것도 싫어하는 차정한은 어떤 사람과 어떤 사랑을 하게 될까.

“…….”

사랑에 빠진 너를 보면 나는 숨겨야만 하는 이 감정을 그만둘 수 있을까. 차정한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그게 가능하기는 할까. 질문은 쏟아지는데 나는 단 하나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질문의 답은 화면 속 차정한, 아니 서해진이 하고 있었다.

<어떻게 끝내야 하는지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어.>

곧 도착한다는 동윤 형의 메시지에 얼른 물을 끓였다. 평소에는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정한과 같이 올라오는데 오늘은 형이 위까지 같이 올라온다고 해서 내려가지 않아도 됐다.

씻고 나와 적당한 온도로 마실 수 있게 끓는 물을 따르고 안에 차정한이 좋아하는 차 티백을 넣자 물이 예쁜 붉은 색으로 물들었다. 너무 진해지지 않도록 적당히 우러나오는 걸 보고 있는데 비밀번호 눌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얼른 현관으로 달려갔다.

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차정한과 눈이 마주쳤다. 내가 웃자 무표정하던 차정한의 얼굴에도 웃음이 약하게나마 번졌다. 웃는 걸 보니 기분이 괜찮은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있었네.”

“응. 아까 왔어.”

“착해.”

슬리퍼를 신은 차정한이 손을 들어 내 뺨을 한 번 무심히 쓸며 옆을 지났다. 손이 닿은 뺨이 화끈거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잠시 잊고 허둥댔다. 차정한은 식탁 위로 휴대폰과 지갑을 아무렇게나 놓고 냉장고를 열어 생수를 한 병 꺼냈다.

“집에 왔는데 네가 있어야 우리 집 같아.”

“촬영, 촬영은 어땠어?”

“분위기 괜찮았어. 스태프들도 친절하고.”

“어떤 컨셉으로 찍었어? 궁금해.”

“아, 사진 몇 장 찍어 왔는데. 폰에 있어. 봐.”

식탁 위에 놓인 휴대폰을 들자 잠겨 있던 화면이 풀렸다. 차정한은 내 얼굴로도 휴대폰 잠금이 풀리도록 등록을 해 줬었다. 물론 내가 차정한의 휴대폰 잠금을 직접 푸는 적은 별로 없지만, 한 번씩 이렇게 허락을 받고 풀 때마다 내 얼굴이 여기 등록되어 있다는 게 어색하게 느껴졌다.

사진이 저장된 곳으로 들어가자 차정한이 찍어 온 몇 장의 사진이 보였다. 부드럽고 장난기 넘치는 모습과 강하고 차가워 보이는 두 컨셉이 대조되어 꼭 다른 사람을 보는 것만 같았다.

“넌 뭐가 더 마음에 들어? 난 센 게 좋던데.”

“난 다 좋아.”

“너한테 뭘 묻는 내가 잘못했다. 뭐가 그렇게 다 좋아. 내가 그렇게 좋아?”

“…어?”

무슨 말을 들은 건가 싶어 고개를 들자 화면 속 차정한이 내 앞,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놀란 내 얼굴을 보니 재밌는지 차정한이 조금 더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순간 정말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서자 차정한이 물러선 나보다 조금 더 가깝게 다가왔다. 이러다가 정말 얼굴 어디인가가 닿을 것 같아 자꾸만 나는 뒷걸음치고, 차정한은 그런 나를 놀리며 다가왔다.

“자꾸 도망가네. 왜, 나한테 뭐 찔리는 거 있어?”

“찔릴 게 뭐가… 뭐가 있어. 장난 좀 치지 마. 자꾸 왜….”

“도망 안 가면 되잖아.”

“네가 자꾸 오는데 어떻게 안 가.”

“대답하면 되잖아. 내가 그렇게 좋으냐니까?”

얼른 이 상황을 장난으로 확실하게 만들어 끝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심장 뛰는 소리를 차정한에게 들킬 것 같았다. 아니, 그걸 들키지 않는다고 해도 당황한 얼굴이나 어쩔 줄 모르는 어색한 행동에서 차정한이 이상함을 느낄 것이었다.

“그, 그럼 내가 내 배우… 좋아하지 누굴 좋아해. 원래 매니저가 그런 거야. 뭘 해도 다 예뻐 보이지….”

“진작 그렇게 말하면 되지. 뭘 그렇게 놀라서 도망가.”

“갑자기 얼굴… 가까이하니까 놀랐잖아.”

“별 걸 다 놀래. 우리 사이에.”

씩 웃은 차정한이 내 머리를 한 번 습관처럼 쓰다듬고는 방으로 향했다. 나는 그의 손길이 닿았다 떨어진 머리 위를 괜히 한 번 만지고 식탁으로 가 진해진 차 안에서 티백을 빼냈다.

차정한이 말한 ‘우리 사이’는 친구였다. 13년 지기 친구.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속을 알고, 눈빛만 봐도 기분을 단숨에 파악할 수 있는 그런 가장 가까운 친구. 나는 너무나도 잘 아는 그 사실을 다시 한번 되뇌었다. 요즘의 나는 한 번씩 그 생각을 넘으려고 했다.

씻고 나온 차정한은 내가 내민 머그를 받아 마시기 좋게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또 내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나는 차정한의 이런 친밀감에서 오는 다정한 스킨십이 곤란하면서도 좋았다.

“오늘 어땠어?”

스케줄이 끝나고 돌아온 차정한은 내게 늘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 물었다. 솔직히 매일 뭔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만큼 복잡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기에 내가 전하는 이야기들은 죄다 시시콜콜한 일상이었다.

“대청소하는데 잃어버렸던 이어폰이 백팩에서 나왔어. 분명 없었거든.”

“그거 봐. 내가 가방에 있을 거라고 했지. 너같이 조심성 있는 애가 밖에서 잃어버렸을 리가 없다니까.”

“다시 사야 하나 했는데 잘 됐어. 또…. 또……. 딱히 얘기할 게 없는데.”

“그냥 무슨 생각을 했는지 지나다가 뭘 봤는지 그런 거.”

“…….”

나야 늘 네 생각만 하지. 농담과 진담의 경계에 걸친 말이라 입술 근처에도 올라오지 못하고 말은 곧 사라졌다.

“원우가 모임 나올 거냐고 물어서 답 못 했어.”

“그 새끼도 진짜 끈질기네. 눈치가 그렇게 없어? 아니면 나 엿 먹이고 싶은 건가.”

“그게 왜 널 엿 먹이는 거야.”

“지금 네가 나랑 붙어 다니는 게 싫다는 거 아냐.”

“그게 왜 그렇게 튀어.”

“너같이 순둥이들은 몰라. 너처럼 착하고 바르고 말랑말랑한 생각만 하는 사람은 눈치를 못 챈다니까.”

차정한은 나를 아주 많이 오해하고 있었다. 내 마음과 머릿속을 본다면 기가 막혀 아무 말도 못 하거나 배신감에 치를 떨지도 몰랐다.

“내가 또 김원우 같은 부류를 잘 알지. 자꾸 나 들먹이면서 너 빼내려고 하는데 그대로 두면 안 되겠어.”

“그냥 3학년 때 애들 모이는 건데… 그렇게 악의 있고 그런 게 아니라.”

“그래서 넌 어때. 가고 싶어? 안 갈 거야?”

“일 있으면 안 가는데, 만약에 일이 없는 날이면… 괜히 거짓말하기가 그렇잖아.”

“오케이. 그럼 그날 내가 일이 있으면 깔끔하게 안 가는 거고, 일 없으면 같이 가.”

아무렇지도 않게 같이 가자는 차정한의 말에 순간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말을 찾지 못했다. 김원우가 했던 말처럼 차정한은 같은 반은 아니었지만, 나와 3학년 때 같은 반이던 애들 중 대부분은 차정한과도 같은 반이었다고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같이 가서 내가 돈도 내고, 분위기도 정리할게.”

“…뭐 그래도 되지. 애들이랑 다 알잖아.”

“다 알지. 뭐 나 모르는 사람 없을 거고, 나도 너희 반 애들 다 알아. 그렇게 하는 거다?”

“…응. 그러자.”

깔끔하게 정리를 한 차정한이 차를 마시며 텔레비전을 틀었다. 나는 이리저리 돌아가는 채널을 보며 진심으로 그날 차정한의 스케줄이 잡히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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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히 바란다고 다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일상적인 일까지 이루어지지 않을 줄은 몰랐다. 금요일 모임인데 차정한은 딱 목요일까지 스케줄이 있다가 금요일 하루를 쉬게 되었다. 일부러 그렇게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정말 기가 막힌 우연이었다.

김원우에게 차정한도 가도 되냐고 물었더니 생각보다 쿨하게 당연히 와도 된다는 긍정적인 반응이 나왔다. 걔가 왜 오냐고 뭐라 할 줄 알았는데 그래도 김원우가 어른이 되기는 된 모양이었다.

사람들과 스케줄 이외에 만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고, 불편한 걸 싫어하기에 이런 자리에 나간다고 할 줄 몰랐는데 차정한은 진심인 사람처럼 굴었다. 심지어 나보다 먼저 준비를 하고 나와 빨리 나오라며 나를 재촉했다.

“누가 보면 네 모임에 내가 가는 줄 알겠다.”

“넌 내 모임에 안 데려가지.”

“왜?”

“내 주변에 제대로 된 놈이 없어. 그런 놈들한테 내가 널 왜 데려가. 꿈도 꾸지 마.”

방송에 나갈 때만큼 꾸미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틀이 좋아 그런지 차정한은 정말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아마 얼굴을 다 가리고 길을 걸어도 사람들이 키와 스타일만 보고도 연예인이라고 생각하며 돌아볼 만큼 멋있었다.

주차장으로 내려간 차정한은 자신의 주차구역에 세워진 여러 대의 차 중 한 대를 골라 문을 열었다. 그리고 조금 멀찍이 선 내게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장소가 어디야?”

“이름 알려 줬는데, 내가 주소 찍을게. 고깃집이라고 하던데….”

“고기? 환기 잘 되려나.”

“되지 않을까. 아, 여기 있다.”

내비게이션에 김원우가 알려준 고깃집 이름을 적자 하나가 나왔다. 40분 정도 걸린다는 안내와 함께 차가 움직였다.

“애들 진짜 오랜만에 본다. 원우 빼고는 졸업하고 거의 본 적이 없어.”

“그러게. 그 원우도 안 봤으면 더 좋았을 텐데.”

“원우한테 왜 그래.”

“원래 친구는 하나면 돼. 넌 친구가 너무 많아.”

차정한은 내가 다른 누군가와 어울리는 것을 대놓고 좋아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친해진 뒤부터 한 번도 그걸 숨기거나 빙빙 돌려 말한 적이 없었다. 내가 다른 애랑 같이 뭔가를 하거나 그러면 꼭 지구가 멸망한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정한이 너랑 제일 오래 같이 있잖아. 다른 애들은 진짜 가끔 보는 거고.”

“친구 납치해서 가두면 뉴스에 나오나.”

“나올 수 있는 모든 매체에는 다 나오지.”

“그건 나중에 은퇴하고 해야겠다.”

잠시 찾아든 침묵 뒤에 같이 웃음이 터졌다. 작게 울리는 웃음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모르게 뒤섞였다. 차정한은 한 번씩 이렇게 엉뚱하면서도 진심이었으면 좋겠는 말들을 해서 나를 웃기고, 또 헤집었다.

차가 조금 막혀 10분 정도 늦게 도착했다. 발렛을 해 주는 분에게 키를 맡긴 차정한이 내려 내가 오는지 한 번 돌아보고는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얼른 그 뒤를 따라서 안으로 들어가니 익숙하지만, 10년의 세월이 묻은 얼굴들이 보였다.

“오랜만이다.”

인사는 나보다 차정한이 먼저 했다. 얼굴을 가리지 않은 차정한이 안으로 들어가 애들 앞에 서서 인사하자 웃음과 말소리가 뒤섞여 있던 한쪽이 갑자기 확 조용해졌다. 다들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로 차정한을 올려보며 굳어 있었다.

“차정한?”

애들 중 한 명이 차정한의 이름을 부른 순간 하나둘 차정한에 대해 이야기하며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누구도 차정한에게 너는 여기 왜 왔냐는 말을 하지 않았다. 역시 다들 같은 반으로 기억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야! 너 드라마 나오는 거 보고 얼마나 놀랐는데!”

“그랬어? 반갑다. 유현아, 뭐해. 여기 앉아.”

반응들이 재밌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해서 구경꾼처럼 보고 있었더니 그런 나를 차정한이 당겨 옆으로 앉혔다. 거의 다 10년 만에 보는 애들이라 인사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반갑고 꼭 예전 학생 때로 돌아간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나온 애들이 꽤 많아 인사를 나누는 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 거기에 다들 왜 모였는지는 잊고 차정한에게 질문 공세를 해대서 꼭 차정한의 팬미팅에 온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고 다소 어색했던 분위기가 완전히 풀리니 조금씩 다른 이야기가 섞이기 시작했다.

열심히 일 이야기를 하고, 돈 벌기가 힘들어 죽겠다던 박영진은 벌써 술에 많이 취한 건지 조금 풀린 눈과 빨개진 얼굴로 크게 웃다가 나와 차정한을 바라보았다.

“와, 너희는 아직도 둘이 붙어 다니는 거야? 여기도 같이 나타날 줄은 진짜 몰랐다! 설마 같이 일하고 그런 건 아니지?”

가장 듣지 않기를 바랐던 질문은 역시 가장 먼저 터져 내게 닿았다. 부끄러운 일도 아니고, 말하지 못할 일도 아니지만, 옆에 차정한이 있어 그런지 조금 더 신경이 쓰였다.

“맞아. 정한이랑 같이 일해. 매니저… 같은?”

“와, 진짜 대박. 듣기만 해도 대단하다. 그럼 매일 보겠네?”

“응, 거의 그렇지.”

“진짜 얘네 답이 없다, 와. 말만 들어도 질려. 너희도 진짜 유별나고 지긋지긋한 우정이다. 어디 상 없냐. 이런 애들 상 줘야 되는데.”

좋게 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하고 묘하게 비꼬는 것처럼 들리기도 해서 얼른 화제를 돌리고 싶었다. 내가 지긋지긋하지 않은데 아무리 친구여도 남에게 지긋지긋한 우정이라는 말을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안 질리고 안 지긋지긋한데.”

생각 속에 머물던 말이 들리는 것에 내가 나도 모르게 말해 버렸나 싶어 고개를 드니 애들의 시선이 내가 아니라 차정한에게 닿아 있었다.

“너희 예전부터 그러더라. 나랑 유현이가 같이 다니면 유별나다 그러고, 지긋지긋하지도 않냐 그러고 꼭 그렇게 말하던데 왜 그렇게 보여?”

“너희가 좀 유별나기는 하잖아. 뭐만 하면 지유현, 어딜 가도 지유현, 아주 너 입에 지유현, 지유현 붙이고 살고, 지유현 쟤도 정한이, 정한이, 정한이 타령만 해댔잖아. 그게 벌써 10년 전이고, 지금까지 그런다는데 그게 정상이냐.”

“정상이 아니면 뭔데.”

점점 낮게 내려가는 차정한의 목소리에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물론 무례한 말이 먼저 나왔으니 다툼이 생길 수도 있지만, 차정한은 이런 분위기에 노출되어 휘말리면 절대 안 됐다. 이미지가 생명인 배우기도 하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에 구설수에 오를 일을 만드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나는 얼른 차정한의 팔을 잡았다.

“정한아, 가자.”

“잠깐만 안 싸워. 나 술도 안 마셨고, 화난 것도 아니야. 쟤가 말을 이상하게 하잖아. 궁금해서.”

차정한은 나를 안심시키고 다시 앞에 앉은 박영진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리며 싸늘하게 식는 눈빛을 보니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아니, 화내지 말고 들어 봐. 내가 학교 다니면서 너희 같은 애들을 못 봐서 그래. 남자애들 누가 그러냐고.”

“그래, 처음부터 그렇게 말해야지. 취했다고 할 말 못 할 말 못 가리고 말하면 오해하잖아.”

박영진은 웃으며 손을 들어 차정한에게 비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웃으며 이번에는 나를 바라보았다.

“야, 유현아. 너 뭐 믿고 쟤 따까리 하냐. 네가 뭐가 아쉬워서. 너 집도 잘 살고, 어? 학교도 잘 나와, 뭐가 아쉽다고 그러고 살아. 배우 수명 길어 봤자지. 너 빨리 살길 찾아. 쟤 일 끊기면 넌 뭐 먹고 살래.”

이 자리에 오는 게 아니었다. 차정한이 와서 생긴 일도 아니었다. 내가 여기 오는 순간 차정한과 내가 붙어 다녔다는 것을 아는 애들은 차정한 이야기를 꺼냈을 거고, 결국, 이렇게 됐을 것이었다. 나는 내 말이 차정한에게 해가 될까 봐 말도 편하게 할 수가 없었다. 내 말 한마디로 오해라도 생기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나를 본 차정한이 소리 내어 웃으며 박영진을 바라보았다.

“내 일 끊기기 전에 네 일부터 끊길 것 같은데. 네 노후나 걱정하고, 네 앞길이나 찾아. 유현이는 내가 먹여 살릴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분위기는 완전히 망가졌고, 애들은 차정한이 아니라 박영진에게 그만하라고 화를 냈다. 다들 박영진이 말도 안 되는 시비를 걸었다는 걸 알고 있어 그래도 다행이었다. 차정한은 싸해진 주변을 한 번 둘러보다가 나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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