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스트 [RUST]-207
라이저 제약.
다수의 특허를 보유하고 있는 초거대 제약회사. 제약, 질병 관련 음모론이 터질 때마다 한발 걸쳐진 회사가 라이저 제약이었다.
“포획에 실패했다는 말입니까?”
[···현실적으로 놈을 잡는 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네.]
“생포가 어려우면 시체라도 보내주셔야지요.”
[시체를 온전히 확보하는 것도 사실상 어려워.]
이게 무슨 말일까? 라이저 제약 회장 기스 라이저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미합중국에서 불가능한 일이 있다? 그 표정을 읽었는지, 영상 통화 속 인물이 설명을 덧붙였다.
[놈을 백업하는 해커가 만만치 않아. 주변 CCTV를 장악해서 놈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것 같아. CCTV를 아주 무력화시켜 버리거나, CCTV가 없는 곳에서도 마찬가지야. 어떤 방식인지 알 수 없지만, 놈이 매복을 알아채고 대응했네. 방아쇠를 당기기도 전에 당해 버렸어.]
미사일을 쏴서 잡는 방법은? 직접 직격시키지 않고 주변에 터트려서 폭발압력으로 전투불능으로 만들거나, 죽이는 건? 여차하면 놈이 있는 건물을 붕괴시켜 죽인 뒤, 발굴하면 되는 일 아닌가?
[···놈이 있는 빌딩도 복잡해, 단순한 빌딩이 아니라 요새야. 해병대와 육군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미사일 요격체계에 근접 미사일 방어체계까지 갖추고 있더군. 그걸 뚫고 벙커버스터라도 박아 넣으려면 대놓고 군사작전을 펼쳐야 하는데 그건 불가능해.]
“그럼 놈을 유인하면 되는 일 아닙니까?”
영상 속 인물이 헛웃음을 쳤다.
[누가 자길 노렸는지 정보를 넘겼는데도, 무시한다더군. 따로 유인할 방법이 없어.]
“······.”
생각해 보자.
정예 병력을 소대 단위로 잡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치자. 인간을 초월한 능력에 관심이 있는 세력이 그를 잡아 생체실험하려고 했다. 그는 자신을 노린 자들을 격퇴하고, 그 세력이 누군지 알게 됐다.
질문.
그는 어떻게 할까요?
무력은 충분하다. 인간을 초월한 신체능력이 있다. 그럼 어떻게 하겠는가? 당연히 자기를 노린 세력을 응징하지 않겠는가? 잠입하든, 습격하든, 반격하지 않겠는가?
근데 그러지 않고 집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는단다.
이게 무슨 병신 같은···
“놈의 거처에 침투하는 건 어렵습니까?”
[······.]
“먹고는 살아야 할 테니, 식료품 구하러 나올 때를 노린다거나, 택배 배송을 노리는 것은···.”
답답한 마음에 이야기를 꺼냈지만, 저쪽은 전문가였다. 기스 라이저 자신이 생각한 것을 저쪽이 생각하지 못했을 리 없었다.
[그 미친놈이 자급자족 시스템을 구축해서 의미 없네.]
“예?”
[필요한 식자재를 스마트 팜에서 자급자족하고 있기도 하고, 비축해 놓은 물자가 흘러넘쳐서 택배도 시키지 않더군.]
그러니까 굶겨서 나오게 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배달이요.’ 초인종 누를 일도 없다는 소리였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도시에 있어 애초에 폭격은 미친 짓이지만, 그래도 폭격을 한다면? 지하에 있는 모듈 원전은 어쩔 건데? 방사능이 새면?
바로 옆이 디트로이트 강이고 양쪽으로 이리 호(Lake Erie)와 세인트 클레어 호수(Lake St Clair)였다. 그러니까 모듈 원전에 문제 생기면 디트로이트를 비롯한 인근 지역 상수도는 절단 난다는 소리.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비상 서버실, 데이터 센터 만들어 놓은 것도 날아가고 중고라고 하더라도 신기술 집약된 슈퍼컴퓨터와 빌딩에 파견 나간 연구인력들도 같이 사라진다는 의미였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빌딩을 공격?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을뿐더러 문제 터지면 책임은 누가? 어이가 없었다. 모듈 원전이라니. 그게 왜 거기 들어가 있어? 빌어먹을.
설마 그 새끼가 그걸 다 생각해서 넙죽넙죽 자기 빌딩에 시설 들여놓은 것이 아닐까?
“······.”
[······.]
그렇게 영상 통화가 끝났다.
기스 라이저는 헛웃음만 나왔다.
저번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다는 소린가? 갑갑하지 않나? 아무리 빌딩이 넓다고 하더라도 갇힌 기분일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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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한 느낌. 속이 확 뚫리는 기분.
촤아아악-
물살을 헤치며 나가는 모습. 힘차게 수영하던 마루가 물에서 연어처럼 솟구쳤다. 요즘 들어 신체능력이 미세하게 변하는 느낌이라서 운동을 좀 했더니 정답이었다.
‘수영장도 그렇고 시설을 짱짱하게 넣기를 잘했어.’
최신식 영화관, 실내 암벽등반시설, 노래방, 실내 골프장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체육 시설이 있었다. 소싯적 제법 비싸다 싶은 시설에서 운동해봤던 마루였지만, 작심하고 시설을 꾸며 놓으니 역시 미국. 클래스가 달랐다.
“물에는 안 들어가냐?”
“귀찮음.”
수영복을 입고 빈둥거리는 김 양이 칵테일을 홀짝거리고 있었다. 근데. 간호사가 보이지 않았다. 음- 마루는 잠깐 간호사의 풍성한···.
“간호사는?”
“병원.”
“병원? 거길 왜 갔어? 혼자 간 거야?”
“국토안보국 애들이랑.”
국토안보국 요원들이 책임지고 간호사의 안전을 보장하기로 했다고 한다. 의료인력이 부족하기도 했거니와, 빨리 의사가 되고 싶다는 간호사의 강한 의욕 때문이었다.
마루는 좀 그랬다. 자기한테 말도 안 하고 갔다는 소리 아닌가? 그렇다고 따지기도 뭐 했다. 간호사랑 사귀는 것도 아니니까. 국토안보국이 경호하는 게 미덥지 못하다고 하기도 그렇고.
“설마 네가 괴롭혀서 나간 건 아니겠지?”
“?”
김 양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것처럼 쪽-소리를 크게 내며 칵테일을 마셨다. 절대 간호사를 교육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저 간호사의 학구열이 높았을 뿐이었다. 응.
“적당히 해라 적당히.”
“안 괴롭혔음.”
단지 품행 교정을 조금 했을 뿐. 감히 어디서 바운스를. 응.
“운동은 안 할 거냐?”
“하고 있음.”
숨쉬기 운동. 단전호흡이라고 하기도 하지. 은근 힘듦.
그런 생각을 읽었는지, 마루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김 양은 슬쩍 선글라스를 끼고 고개를 돌렸다.
아니. 꼭 몸만 운동하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그 뭐라고 하더라? 맞다. 심상 수련이라는 것도 있다고 했다.
처음에 백정이 빌딩을 한다고 할 때, 반대하지 않기를 잘했다 싶었다. 건물은 짓기 나름이고 꾸미기 나름이라고 한다지만, 백정 타워 완전 마음에 들었다.
특히 밖으로 나가지 않고 원스톱으로 다 할 수 있다는 거.
정말 멋진 생각이었다.
안 나감. 좋음.
웅- 웅- 마루의 폰이 울렸다.
“네. 그런데요.”
[···□□?···□□···]
살짝 작게 들리는 목소리, 국토안보국 덴 브라운 국장의 목소리였다. 칵테일을 마시며 온실처럼 유리로 된 천장을 바라봤다. 2월 중순 밖은 차가운데, 이 안은 따뜻했다. 그냥 좋았다.
통화가 끝났는지, 마루가 김 양을 불렀다.
“너 좀 나갔다 와야겠다.”
아니. 왜? 어째서?
미국은 50개 주와 하나의 특별구로 구성된 국가다. 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50개의 작은 나라가 모여 만들어진 국가라는 의미다.
외국인들은 자주 잊지만, 미국은 합중국(United States, U.S.)이라는 사실. 그래서 그런지 미국의 체계는 조금 독특했다. 주마다 적용되는 법이 다른 예도 있고, 같은 범죄에 형량이 다른 사례도 있을 정도니까.
대체로 주(States)가 있고 그 아래 카운티(County)가 있다. 카운티 아래 도시(City)가 있고 타운(Town)이 있고, 별도의 독립 도시가 있기도 하고, 마을(Village)도 있다.
당연히 규모에 따라 제공되는 행정 서비스의 차이가 있기 마련이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치안과 같은 행정력의 차이는 확연히 다른 결과를 가져왔다.
대도시, 카운티 중심 도시 같은 곳은 주 방위군과 경찰들이 미리 대기하고 있어 초기 소요사태를 진압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보다 작은 도시나 타운, 마을 단위까지 완벽하게 통제하기는 어려웠다.
안타깝게도 변이 바이러스 사태에서 통제가 어렵다는 말은, 전염됐다는 의미였다.
“근데. 왜?”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인가? 우리는 그냥 백정 타워에서 편히 쉬고 있으면 되는 일 아닌가? 갑자기 나갔다가 오라고? 내가? 김 양이 눈을 부라렸다.
씁-
어디서 눈을.
마루의 기파에 밀린 김 양이 부릅떴던 눈을 살짝 아래로 내리깔았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했다.
“아니. 왜?”
진짜로. 어째서? 무엇 때문에.
“칼 준데.”
그건 백정 거잖아. 그럼 백정이 가야지! 자기가 할 일을 미루는 것임? 그런 백정이었음?
“총도 진짜 쌔끈한 걸로 준다더라.”
“···무슨 총인데?”
마루가 슬쩍 휴대폰을 건넸다.
화면에 보이는 총. 확실히 처음 보는 총이었다.
슥- 스크롤을 내리니 아직 상용화되지 않은 총이었다.
그러니까 초 레어템.
살짝 솔깃한 김 양의 귓가에 마루의 유혹이 한 방울 더 떨어졌다.
“새로 협찬받은 것도 실전 한 번 뛰어야지.”
아 맞다. 이번에 새로 받은 협찬.
실전을 뛰지 않았으니까 한 번쯤 뛰기는 해야 하는데.
“이왕에 실전 뛸 거 받으면서 뛰면 좋잖아.”
“···흐응.”
나가서 뭘 하라고?
“일단. 몇 군데 돌면서 정리할 상황이면 정리하고, 생존자들을 규합해 달라고 하더라.”
“정리?”
“그래. 정리.”
‘기회가 생길 때마다 정리를 해줘야 깨끗해지지.’
어쩐지 뒤끝이 진하게 느껴지는 마루의 혼잣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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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융끼융-
폴짝폴짝-
좋아. 관절 기동은 확실히 부드러워졌다.
괴물들이랑 싸울 때, 7.62mm 화력은 좀 약했다. 신형은 12.7mm로 키워서 좋았다. 배터리팩 용량도 커져 가동시간도 늘어서 조금 넉넉하게 움직일 수 있었고 배터리 교체도 훨씬 간편해졌다. 장갑과 출력도 전 모델과 비교했을 때 확연히 좋았다.
“이상 없음.”
[디스플레이에 목적지 표시합니다.]
후드의 목소리와 함께 화살표 표시가 떴다. 어둠을 틈탄 김 양이 거리로 사라졌다. 그 뒤를 일렁이는 공간이 살며시 따랐다.
타다다다닥-
키보드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주요 도로 CCTV가 화면에 잡혔다. 텅 빈 도로엔 간간이 교통사고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6마일. 노스 빌리지 근저 도로에 사고 차량이 방치.”
[알았음.]
다른 지역과는 달리, 디트로이트 인근 지역은 방치된 곳이 많았다.
치안통제에 투입된 주 방위군의 숫자가, 다른 곳보다 확연히 적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디트로이트 인근 지역에는 변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자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대부분 총을 가지고 있는 디트로이트 사람들이기에, 역설적이게도 일방적으로 감염자들에게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다만 개인이나 마을 단위로 막을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뇌와 심장을 파먹고 똑똑해지기 시작한 변종들에 대항하기란 쉽지 않았다.
“노스 빌리지 북쪽 변종 흔적 발견.”
[확인함.]
김 양이 흔적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타다다다닥-
‘이쪽은 변종을 잡을 때까지 여유가 생겼고. 그럼 미끼를 물었는지 볼까요.’
후드가 대형 상황판을 쪼개 빌딩 내부를 살폈다. 내부 CCTV 영상 저장, 내부 통신 도청이 동시에 이뤄졌다.
[치지직- 킴이 나갔습니다.]
[···인질로 잡으면, 블라디···]
[자동방어를 뚫기 어렵···]
‘생각보다 많네.’
후드는 빌딩 밖으로 연락하는 자들을 하나씩 분류했다.
아마도 오늘 밤엔 일이 좀 많아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