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스트-192화 (192/280)

러스트 [RUST]-192

통신을 주고받은 마루의 분위기가 변하자, 심 회장이 바로 알아챘다.

“무슨 일인가요?”

“군용 헬기가 오고 있다고 합니다.”

“군용 헬기요?”

잠시 뭔가 생각한 심 회장이 곁에 있던 여행용 가방을 마루에게 내밀었다.

“이걸 서울까지 운반해 주셨으면 합니다.”

마루가 즉각 대답하지 않자, 심 회장은 경호원들에게 증거를 인멸하라고 했다.

“부서진 흔적과 시신들 전부 날려 버려요. 빨리.”

“그렇게 하면 회장님께서 위험해 지십니다.”

“위험을 피하려고 하는 거니, 헬기가 도착하기 전에 날려요.”

“알겠습니다.”

대답하면서도 2명 가운데 한 명은 마루를 째릿 노려봤다. 마루는 어이없다 못해 그냥 귀여웠다. 심 회장이랑 사이가 좋으니까 안 썰 거라고 단정한 건지, 아니면 철이 없는 건지.

마루가 그냥 허허허- 하는 얼굴로 마주 보자, 자기가 먼저 휙-하고 고개를 돌리는 경호원이었다. 답변을 피하고 경호원과 눈싸움이나 하고 노닥이자, 심 회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군용 헬기라면 월드 그룹과 연결된 쪽일 겁니다. 아니면 직계인 민 사장이든지요. 둘 가운데 누가 오더라도 지금 이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으면 앞으로 운신하기 어려워질 겁니다.”

마루는 삐뚜름히 심 회장을 바라봤다. 꼭 마루 자신을 위해서 무리를 한다는 뜻 같지 않은가? 거참 이상하네. 그래서 경호원이 노려본 건가?

딱히 한국에서 활동할 생각이 없었지만, 생각해 보면 기순이 놈 때문에 오게 된 것 아닌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또 오게 됐을 때, 피곤해지지 않으려면 심 회장 말이 맞기는 맞았다.

애써 신분 바꿨는데 날리면 아까웠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돌아갈 수 있으면 돌아가는 게 좋았다. 그나저나 날려버리다니, 회장님 생각보다 과격했다.

“부담스러운데요?”

직설적인 마루의 말에 심 회장이 작게 미소 지었다.

“혹시나 해서 하는 일이니 너무 부담스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기엔 스케일이 큰 것 같아서 말입니다. 어쨌든 생각해 주셔서 그러신다니 감사합니다.”

“무얼요. 도울 수 있으면 도와야죠.”

“근데 대피시켜야 할 사람들이 많은데 괜찮겠습니까?”

침 뱉은 놈이 인질을 잡고 협박했던 게 떠올랐다. 경호원 2명으로 승객들을 헬기가 도착하기 전 밖으로 옮기고 대피시키긴 불가능해 보였다.

“죽은 사람들이라서 큰 문제 없을 겁니다.”

“죽었다고요? 마취가 아니라요?”

심 회장이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마취 가스와 사린 계열 가스를 섞어서 썼더군요. 처음부터 살려둘 생각이 없었나 봅니다.”

마루는 잠시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뒷목이 뻐근해지는 느낌.

“실례지만, 저들은 회장님을 납치하려고 했던 게 아니었습니까?”

죽이려고 했다면 폭탄을 터뜨려버렸으면 될 일이었다. 마루의 눈매가 가늘어지자, 심은영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해하지 마세요. 최근 공격이 잦아서, 비상시를 대비해 아트로핀 제와 중화제를 가지고 다닙니다. 제 경호원들도 모두 죽고 저 두 사람만 살아남았고요.”

“그렇습니까.”

이건 또 이것대로 문제였다. 회장이 해독제를 가지고 있다는 정보를 놈들이 알고 있었다는 소리니까.

[회장님 피하십시오. 폭파 준비 끝났습니다.]

“일단 밖으로 나가서 이야기하지요.”

마루는 심 회장의 뒤를 따라 열차에서 내렸다. 전부 죽었다고? 승객들 전부? 믿기지 않았다. 대량 살상 아닌가? 심지어 독가스를 사용한. 제정신인가?

!!!

그랬다. 집중해서 감각을 최대한 퍼뜨렸을 때. 옹기종기 모여있는 3개의 기감. 그리고 그 주변에 있던 5개의 칙칙한 느낌. 뒤쪽에 떨구고 왔던 5개의 존재감을 제외하면 살아있는 기운이 없었다.

어째서 그걸 깨닫지 못했지? 승객들 전부 죽었다는 걸 왜 몰랐을까?

[군용 헬기 5분 뒤, 도착 예정.]

김 양의 무전에 마루가 깊게 심호흡했다.

“더 멀리 떨어지세요. 위험합니다!”

저쪽에서 경호원이 손을 흔들며 피하라고 했다. 회장과 마루가 멀찌감치 떨어지자 열차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심 회장이 터지는 불꽃을 보며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월드 그룹은 대규모 원정 실패 때문에 전력 누수가 컸습니다. 사실상 시큐리티와 PMC가 거의 날아간 상황이더군요, 본래라면 이런 일이 터지기 전에 뒤쪽에서 암묵적으로 해결했었는데, 상황을 보니 막지 못하고 이렇게 뚫렸나 봅니다.”

위험한 정보가 입수되면 선제공격하고 그랬을 거다. 김 양이 그런 일에 동원됐을 테고, 아마 최 전무, 유 이사 쪽도 그런 계통이었겠지.

“월드 그룹도 그렇고 저희 쪽도 여력이 없다 보니, 방어하기에도 급급한 거죠. 상대방이 작정하고 이런 식으로 나오면 당할 수밖에요.”

마루는 입을 꾹 다물었다. 심 회장은 그런 불편한 마음을 읽기라도 하듯, 읊조렸다.

“현실적으로 모든 것을 정부가 관리하긴 힘들어요. 이건 일본도 마찬가지고, 중국도 똑같습니다. 그 많은 사건을 전부 공무원들이 감당하기 힘든 게 현실이기도 하거니와, 각국이 민간 기업이나 폭력 조직을 이용해서 서로 견제했기 때문이죠.”

한국만 하더라고 그랬다. 공식적으로 집계된 숫자만 200만이 넘는 외국인들, 불법체류자까지 생각한다면 250만이 넘을지 모르는 상황. 그마저도 코로나로 대거 감소한 숫자였다. 그 많은 사람을 어떻게 관리하고 감독하겠는가?

일반인으로 위장하고 들어온 산업스파이들은? 첩자들은? 범죄자들은? 사건이 터져도 한참 전에 터졌고, 일이 커져도 진작에 커진 상황이었다.

일반인들에게 감춰진 세계가 있을 뿐,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정말 쥐어짜고 쥐어짜서 간신히 대응하고 있었다. 마른 수건 짜듯이 쥐어짜도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생기면 어쩌겠나? 돌려막기를 하는 수밖에.

외교 분쟁이 될 여지가 있거나, 처리해야 하는데 문제가 생길 법한 사건들을 외주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월드 그룹에게, 일본은 샬롯을 비롯한 그룹들에게, 중국은 흑룡회나 삼합회 관련 회사인 크리스털에게.

그렇게 암묵적인 균형이 어느 정도 잡혀 있었는데, 여러 사건 때문에 균형이 깨지고 말았고 그 결과 이런 참사가 벌어지게 됐다.

일본은 어떤 의미로든 망했고, 한국은 빈집이 되었으며, 중국은 오랜만에 힘을 과시하고 있었다. 당연히 한국의 경계는 중국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 틈을 타, 지금 같은 사고가 터진 것이었다.

“앞으로 더 위험해 질 겁니다. 한국은.”

중국은 기회를 노릴 것이다. 가져가고 싶은 것들이 한국에 많았으니까. 일본을 되살리겠다는 자들도 마찬가지, 재건이라는 명분 아래 오늘보다 더 심한 일도 거리낌 없이 할 것이고.

다른 여러 국제 조직들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이 침 발라 놓은 일본에 다이렉트로 갈 수 없으니, 밀항하고자 한국에 들어올 것이고, 한국에 온 김에 뽕 뽑으려 하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국제 범죄조직들 사이에서 맛집으로 통하는데, 향후 인기 폭발 확정이었다.

“가방 안에 뭐가 있어서 이 난리입니까?”

“짐작하시다시피, 연구자료 원본과 다양한 샘플, 자료들이죠.”

“아까 그 반투명한 막은요?”

“차원이 다른 기술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마루는 심은영의 실없는 소리에 피식- 웃고 말았다.

차원이 다른 기술 맞기는 했다. 노크하듯 칼로 찔러봤었는데, 마치 충격을 흡수하는 것처럼 반응했으니까.

“샬롯 타워로 가져가면 되는 겁니까?”

“아니요. 강남에 있는 본사로 가져오시면 됩니다.”

“그럼 서울에서 뵙죠.”

“네. 본사에서.”

궁금한 게 많았지만, 아는 게 병이었고, 남 걱정할 때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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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가는 고속버스 안, 뉴스에서는 긴급속보가 보도되고 있었다.

[KTX 열차 사고, 단순 열차 사고가 아닌 테러 가능성.]

[계획적인 범죄 가능성 있어.]

[단독보도. 현장을 통제했던 경찰관들의 증언.]

어라?

예상외였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서라도 숨길 줄 알았는데, 뉴스 속보를 보면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니면 일이 너무 커서 숨길 수 없다고 판단했거나.’

사망자가 너무 많이 나왔다. 투입된 경찰과 경찰특공대에게서도 순직자가 다수 나왔고. 김 양이 옥상에서 재워버린 저격수들도 상황을 대충은 알고 있을 테니, 정직이 최선의 정책일 수도.

[···사인이 폭발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현재까지 부검한 결과를 보면 희생자들의 주요 사인은 사린 계열 가스로 보입니다.]

[사린가스는 1990년대 도쿄 지하철 가스 테러에 사용된 대량살상 무기로···]

[이번 KTX 열차 사고가 계획적인 테러에 의한 사고라는 주장이 있는 가운데···]

[현재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자면 테러범들은 테러를 성공한 뒤 자폭.]

[지문감식과 유전자감식 결과 테러범들은 일본인으로 추정된다고 하죠?]

[그렇습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와 특별수사대의 수사 결과 범인들은 일본에서 밀입국한 자들도 밝혀졌습니다.]

[···그렇다면 테러범들의 목적은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국제사회에서 외면받고 있는 일본의 비참한 현실을 알리고자 했다는 주장이 있는 가운데]

[국회에서는 작년부터 이어진 일본 난민 특별수용법 문제가 다시 불거지면서, 여‧야 갈등이 커지고 있습니다.]

[무조건, 무제한으로 일본 난민을 받아야 합니다. 난민들을 받아들여야 향후 벌어질 인구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말입니까?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 우리와 함께 살아가겠다는 생각조차 없는 사람들을 받아들이면, 그 뒤에 벌어질 문제들은 어떻게 하겠다는 말입니까?]

[유럽을 보세요. 유럽을. 이슬람 난민 받아들인 뒤, 어떻게 됐습니까?]

[일본이 이슬람입니까? 일본은 우리와 비슷한 문화를 가졌습니다. 유럽처럼 극심한 문화 갈등은 없습니다.]

이걸 또 이렇게 돌리나?

‘일본인 테러범임.’, ‘이게 다 재난 터진 일본을 돕지 않아서 벌어진 일임.’, ‘일본 난민 받아야 함.’, ‘미쳤음?’ 이런 이야기들이 쌓이고 쌓였다.

“여러모로 대단들 하네.”

“?”

“아니. 샬롯 회장 이야기는 코빼기도 안 보여서.”

“당연.”

김 양은 ‘후훗- 아직 어른들의 세계를 모르는군.’하는 표정을 지었다.

“대충 이렇게 끝나겠지?”

“응.”

일본이 사실상 국가기능이 마비된 상황이라는 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테러범이 일본인이라고 하더라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현재 일본에는 정부가 없으니 항의할 수도 없고, 책임을 물을 수도 없었다.

김 양이 초롱초롱 마루에게 물었다.

“심 회장이 뭐라고 했음?”

“앞으로 한국 개판 나게 생겼다고 했지 뭐.”

살짝 실망한듯한 김 양의 눈빛.

“다른 이야기는 없었음?”

“무슨 얘기?”

금이라든지, 금괴라든지, 생명의 은인에 대한 보답이라든지 그런 거랄까? 금색으로 빛나는 김 양의 눈빛을 외면하는 마루였다.

“딱히 다른 이야기는 없었다.”

‘어째서? 왜?’

“기순이 찾는 거 도와주기로 했고. 열차 폭파하면서 증거 다 지워줬잖아.”

‘아니. 고작 그걸로 자기 목숨 구해준 걸 퉁 친다고 했다고? 열차 폭파는 자기도 좋은 일이었잖아.’

거칠어지는 김 양의 눈빛. 심은영 회장 그렇게 보지 않았는데, 내레 실망이야.

“중화제 추가로 넉넉하게 받기로 했으니까.”

‘보상이 전부 백정한테만 갔음? 기순이 찾기, 백정이 신 나게 썰어댄 증거 지워주기, 중화제까지. 다 백정한테만 좋은 거잖음.’

김 양의 눈빛에 마루가 화답했다.

‘복창 하루 쉬었더니 그러냐?’

‘······.’

마루가 지긋이 쳐다보자, 김 양이 고개를 팩 돌리곤 눈을 감았다.

웅- 웅-

후드가 보낸 문자가 떠올랐다.

[친구분 흔적 찾았습니다. 연주회 당일, 오진 그룹 나주현의 차를 타고 이동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이후 같이 차에 타고 있던 연주회 피아니스트와 카페에 들어가 대화를 나눈 뒤, 숙소로 돌아간 것이 확인됐습니다.]

‘연주회 피아니스트? 나루 이야기를 하는 거지? 맞다. 얘는 나루가 내 동생이라는 걸 모르지.’

웅-

카페 CCTV 자료였다. 영상을 재생하자, 나루와 기순의 모습이 보였다. 나루의 옆자리에 놓인 커다란 꽃다발. 연주회 시작 전에 기순이 들고 있던 꽃다발이었다.

음성이 지원되지 않아,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두 사람의 표정은 심각했다. 이어서 나루가 벌떡 일어났고 기순이 따라나서려고 했지만, 나루가 따라오지 말라고 하는 것 같았다.

꽃다발을 그대로 두고 밖으로 나가는 나루,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기순의 모습. 소리가 없어도 알 수 있었다.

‘까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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