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스트 [RUST]-183
마루는 이게 이렇게 되나 싶었다.
혹시라도 모를 일에 대비해서, 해병대 액션 카메라를 모조리 부쉈다. 그 결과, 누군지 어떤 능력인지 알 수 없지만, 피난민 가운데 괴물을 죽일 능력이 있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돈 것이다.
심지어 한쪽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여기 번쩍, 저기 번쩍했으니 여러 사람이 있다고 착각하기에 충분했다.
거기에 피난민들의 능력은 같이 싸운 해병대원들도 인정하는 바였다. 그들이 앞에서 막아주고 어그로를 끌어줬기에 괴수들을 잡기 쉬웠으니까.
그건 그렇고 날붙이 딸랑 하나 들고 괴수들과 맞서 싸우는 피난민을 보고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놀람? 부러움? 두려움? 모르겠지만, 결코 평안한 마음은 아니었을 것이다.
[병신들임.]
김 양은 웃었다. 육 할 넘게 백정 혼자서 썰었는데, 어디서 사오정 같은 새끼들이 부심을 부리고 있는 건지. 그래도 삼에서 사할 정도는 자기들이 썰었다는 건가?
근데 사실 따지고 보면, 간신히 거죽에 상처 낸 정도였잖아. 잘해야 앞발 조금 찌른 거? 뒤에서 미군이 쏴주지 않았으면 못 잡지 않았나? 그런데 뭔 자신감이지? 상처입혔다고 그러는 건가?
그렇다면 인정해줘야지. 응.
한 마리도 못 잡았으면 모르겠는데, 자기들끼리 합심해서 죽인 것도 있다 보니 개념을 상실한 게 분명했다.
“난감하네.”
마루의 혼잣말에 김 양은 고개를 갸웃했다.
신경 쓸 이유 없지 않나? 요즘 물이 올라서 그런가? 하긴 살아남기 아등바등했을 때보다 여유 있어 보이는 게 좋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관리가 필요해 보였다.
[신경 쓰임?]
“아니, 괜히 내 책임도 있는 거 같아서.”
엑소슈트 헬멧 속. 김 양의 얼굴이 후웃-했다.
말랑말랑하다. 물러.
이러다가 갑자기 스르릉- 휙- 하기도 했지만, 그래.
막 썰고 다니는 백정은 아니었지.
그랬다.
역시 백정에게는 관리가 필요한 게 맞았다. 응.
그러고 보니 가슴년 유지 보수도 해야 하고, 막 들어온 막내도 조여야 하고, 할 일이 제법 쌓였다.
힐끗-
백정도 살살 관리해야겠지. 응.
에러 뜨면 앞날에 먹구름 끼는 거니까.
[신경 끄셈.]
“···하긴 내가 신경 쓴다고 될 일도 아니고. 그나저나 이상하네.”
[?]
“이 사람들 대체 어떻게 버틴 거지? 괴수는 그렇다고 쳐도 감염자들도 있었을 텐데.”
김 양이 팩- 고개를 돌렸다.
존나- 말 안 듣는 백정이었다. 신경 끄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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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현재 호위 병력으로는 몇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통제, 보호하는 건 어려웠다. 그렇다고 같이 눌러앉아 있을 수도 없었고 전진기지에서부터 호위했던 피난민들만 강제로 끌고 가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
거기에 가다마 노인을 시작으로 나름 일본 정계와 재계에 이름 좀 날린 자들도 버티겠다고 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을 회유하기도 힘들었다.
“단체로 미친 건가?”
지휘관은 그저 갑갑했다.
‘아프간에서 데려가 달라는 사람들은 왜 버리고 갔고?’
‘쿠르드도 그랬었지···.’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미친 것들.”
아프간이랑 여기랑 비교할 건가? 쿠르드랑 지금 상황이랑 같아? 그거에 혹하는 것들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통신은?”
“성층권까지 화산재와 연기가 올라갔는지, 위성통신은 어렵습니다.”
지진 대비가 잘됐다는 일본이니 유선 전화망은 살아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것도 먹통이었다.
“어쨌든 캠프와 교신하려면 수송선이 대기하기로 한 항구도시까지 가야겠군. 오늘 하루는 여기서 보내도록 하지,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한다.”
“알겠습니다.”
“도시 안이라고 풀어지지 말고 사주경계, 불침번 정확하게 하라고 해.”
“넷.”
동계올림픽을 했었던 지역이라 그런지 호텔이 제법 있었다. 수도와 난방이 문제였지만, 제대로 된 침대에서 하루 푹 쉬는 것만으로도 전투력 회복에 도움이 될 것이다.
“사고 나지 않게 애들 관리 똑바로 하고.”
“넷.”
똑- 똑-
[블라디마루 칼린 씨 오셨습니다.]
“부르셨습니까?”
밖에서 대충 돌아가는 이야기를 엿들은 마루가 덤덤하게 말했다.
“이리 앉으시죠.”
간단한 상황 정리와 덕담 아닌, 덕담이 이어진 끝에 지휘관이 어렵게 입을 뗐다.
“피난민 호송 임무를 완수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피난민 대표와 이곳 유지들이 반대하는 실정입니다.”
“저도 들었습니다.”
“피난민들도 이곳에서 자경대에 들어가길 원하는 사람들이···. 아니, 사실상 피난민들 전부 여기에 남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강 건너 불구경하는 듯한 마루의 반응에 지휘관이 대놓고 말했다.
“칼린 씨와 미스 킴이 이곳에 남아, 방어의 구심점이 되었으면 합니다.”
“······.”
“능력자들이 있지만, 단번에 괴수를 마무리할 정도의 사람은 제가 보기에 없더군요. 해병대가 빠진다면, 원거리 견제도 없을 테고 이곳을 괴수들이 노린다면 사실상 저들만으로 방어하기 불가능합니다.”
“······.”
마루의 공격력과 김 양의 엑소슈트라면 확실히 구심점이 될 수 있었다. 이들이라면 뜬금없이 반미정서를 보이는 가다마 노인과 이 지역 유력자들과 갈등할 필요도 없었다. 해병대를 남기겠다는 것도 아니고 용병 2명이 남는다는 데 핏발 세울 일은 없을 테니까.
“거절합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시죠. 사실 피난민들이 저렇게 나오게 된 것에, 일말의 책임도 없다고 하지 못하실 것 아닙니까?”
지휘관이야 은신 장비를 적극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괴수들 습격에서 마루가 제일 큰 활약을 했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역시···.’
부른다고 해서 왔더니 예상대로였다.
“그거야 그들의 선택입니다. 이런 상황인데 누구에게 무슨 책임을 논하는 건 우습군요. 하실 말씀이 그것뿐이라면 이만 일어서겠습니다.”
“의뢰는 어떻게 하려고 합니까? 캠프까지 피난민들을 이송하는 게 의뢰였지 않습니까?”
지휘관의 말에 마루가 계약서를 내밀었다.
“특약 사항 2번 항목에 뭐라고 적혀있습니까? ‘피난민들이 이송을 거부할 경우.’, ‘이송에 비협조적으로 나올 경우.’, 그 밑에 뭐라고 했지요? ‘의뢰를 완수한 것으로 한다.’ 보셨지요? 의뢰는 여기서 끝났습니다.”
역시 계약의 나라 미국. 계약서는 꼼꼼해야 했다. 구두 계약? 믿고 계약? 훗-
계약을 들먹이자, 지휘관의 얼굴이 언제 부탁했었냐는 듯 딱딱하게 변했다.
이거. 이 분위기. 좆같은 분위기. 길버트 브라운 중령까지 구해줬고, 해달라는 것 다 해줬는데도 이러면··· 진짜···
지휘관이 운을 떼기도 전, 짜증이 솟구친 마루가 먼저 입을 열었다.
“···국가 안보에 위급한 어쩌고, 군작전에 중요한 저쩌고 그딴 재미 없는 소리를 할 생각이라면 정말···.”
순간 말문이 콱- 막힌 지휘관이었다.
농축된 감정은 무엇?
짜증?
살기?
짜증이 살기라고?
마치 새까만 무언가가 스멀스멀 퍼지는 것 같은. 환상?
아프간의 참혹한 테러 현장에서도, 사방에서 쏟아지는 증오와 죽음이 넘치는 전장에서도 이런 건 없었다.
점점 조여오는 숨통. 폐가 눌리고 심장이 짜이는 것 같은 감각. 지휘관이 이를 앙다물었다. 뿌득 어금니 갈리는 소리와 함께 핏줄이 툭툭 솟아올랐다.
“···실망할 겁니다.”
“······.”
순식간에 사라지는 죽음의 그림자.
헉- 헉-
지휘관은 자기도 모르게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방금 그건 뭐였지?
초능력?
살기?
내가 미친 건가?
부르르 떨리는 손가락이 현실임을 알려줬다.
현실?
“스트레스가 심하신가 본데. 좀 푹 쉬시죠.”
“······.”
마루는 푹 쉬라고 말한 뒤, 후딱 밖으로 나갔다.
깜짝 놀랐다. 인상 좀 썼다고 지랄병을 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짜증 좀 냈다고 호흡곤란에, 막 얼굴에 핏줄이 솟는 것을 보니 고혈압이 심한 사람이었지 싶었다.
‘혈압은 위험하지.’
저러다가 고혈압으로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러는지···.
그건 그렇고 말 좀 끊었다고 성질 부린 건가? 성격이 그렇게 더러워서야 살겠나? 어린 것이 말대꾸했다고 그런 건가? 다시 생각하니까 화나네.
울컥한 심정으로 걷다 보니, 언제 왔는지 모르게 숙소로 돌아온 마루였다.
끼융- 끼융-
소리를 죽인다고 죽인 엑소슈트가 살금살금 다가왔다.
[뭐라고 함?]
“예상했던 대로지 뭐. 남아서 뒤치다꺼리해달라고 하더라.”
[······.]
“안 한다고 했어.”
마루의 대답에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끄덕한 김 양이 방문을 열곤 마루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먼저 쉬셈.]
끼융- 끼융-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 엑소슈트가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먼저 쉬라고 하니까 좋기는 한데···
“쟤는 또 왜 저래?”
매번 자기가 먼저 쉬겠다고 하던 녀석이 어쩐 일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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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융- 끼융-
김 양의 엑소슈트를 보자, 불침번을 서고 있던 해병들이 먼저 말을 걸었다.
“수고하십니다.”
[수고.]
해병대는 알아서 잘하고 있었다. 불침번도 잘 서고 있었고. 사주경계도 잘하고 있었다.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았다. 이제 한국에 잠깐 들렀다가, 마음이 포근해지는 디트로이트로 돌아가면 되는 일이었다.
‘그 종간나 새끼는 왜 연락을 하지 않아서리.’
기순이 새끼. 죽어랏! 죽어 버렷!
어? 죽으면 백정이 미쳐 날뛸 텐데. 그건 아니었다.
이번에 만나면 일단 좀 때려야겠다. 정신 차릴 때까지 맞으면 다시는 안 그러겠지. 응.
뀽-뀽- 뀨웅-
잽-잽- 스트레이트-
허공에 주먹질하던 김 양의 눈에 날렵하게 움직이는 것이 포착됐다. 열감지 영상과 적외선 카메라 영상으로 봤을 때 괴수는 아니었다. 일단 2족 보행이었으니까.
‘변종?’
변종이었다면 ‘크아아아아!’ 괴성부터 질렀겠지.
그럼 사람이라는 소린데, 저런 움직임이라면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신체능력자가 왜 저기 창문에서 나와? 저긴 그러니까 해병대 장교들이 있는 곳 아니었나?
김 양은 조용히 멀어지는 붉은 점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끼융- 끼융-
살금살금 고양이 발걸음으로 추격해 도착한 곳은 피난민들이 묵고 있는 지역이었다. 다양한 숙박업소들이 밀집한 곳 가운데 제일 화려하게 생긴 곳으로 들어간 붉은 점.
‘가다마?’
그 영감과 유력자들이라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었다. 근데 왜 지휘관이 있는 곳에서···? 김 양은 가만히 기다려봤다.
얼마나 지났을까? 2시간? 3시간? 별일 아니었나? 그렇게 교대하러 가야겠다 싶었을 때, 동작감지기에서 소리가 났다.
삑-
삑-삑-
삑-삐이이익-
움직임은 있는데, 열감지기와 적외선 카메라에 잡히지 않고 있었다.
‘은신 장비?’
그것도 넷이나 되는 소리가 아까 붉은 점이 들어갔던 곳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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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설깬 마루가 다시 한 번 되짚었다.
“그러니까. 은신 장치가 확실한 거지?”
[확실함.]
열감지랑 적외선에도 흐릿했으니까. 분명했다. 김 양의 대답이 마루는 고개를 좌우로 스트레칭했다.
그렇다는 건, 중국 애들이 왔다는 소린데, 여길 어떻게 알고 왔을까? 추적하고 있었을까? 한 참 뒤에 도착했다는 건 아주 멀리서 추적했다는 소린데.
“밖에서 기다리지도 않고 바로 들어갔다고?”
끄덕끄덕. 고개를 끄덕이는 김 양.
‘음.’
추적은 했다고 쳐도, 곧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이건 이상했다. 안에 누가 있는지 알고? 빈집과 호텔이 넘치는데 어디에 사람이 있는 줄 알고? 그렇다는 건 모종의 방법으로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소리였다.
‘연락?’
병원 15층에서 썰었던 애들이 전송기를 가지고 연락을 주고받고 했었다. 그렇다는 건 피난민들 가운데 전송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
태블릿 PC가 떠올랐다.
이런저런 정보들이 가득 담긴 태블릿.
그걸 중국으로 가져간다고? 어떻게?
12.7mm 화기도 이상했다.
7.62mm를 두고 보급 까다로운 12.7mm 돌격소총을 가져왔다?
심지어 러시아제를 구해서. 왜?
그 정도 개인 화력이 필요할 거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
길버트 브라운 중령을 포위했던 병력은 어디서 그렇게 튀어나왔을까?
그 정도 병력을 동원하려면 도보로 이동 가능한 거리에 거점이 필요했을 텐데.
차량을 쓸 수 없으니 무조건 걸어서 움직여야 했다.
도보 이동 가능한 거리?
거점?
아무리 괴수가 없더라도 몇 마리는 있었을 텐데, 여기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남았지? 자경단으로 살아남았다고? 경찰이 쓰는 리볼버랑 야쿠자들이 가진 무기 따위로?
괴수는 없었다고 하더라도 감염자는 있었을 거 아닌가? 감염자들 가운데 변종이 생겼다면? 그 변종을 어떻게 막았지? 누가?
12.7mm?
마루는 잠이 확 깼다.
“이런 젠장.”
[?]
“배터리는?”
[잔량 45% 예비 1개.]
“총알은?”
[540발 정도··· ?]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놈들이라면 미군을 전멸시키고 증거 인멸하려고 할 테니까. 해병대가 전멸한다면 수송선은? 여기서 캠프까지 700~800km를 걸어서 간다고? 중간에 배터리 떨어진 엑소슈트고 전리품이고 다 버리고? 무조건 수송선을 타야 했다.
“총알 더 챙겨. 습격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