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스트-173화 (173/280)

러스트 [RUST]-173

공터 여기저기 20mm 발칸이 긁고 지나간 흔적이 가득했다.

검붉은 기갑병에서 내린 로이 스턴 소위는 이를 갈았다.

“로제 년이 배신해?”

소령진급을 앞둔 시기, 자기 부인이 바람났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 로제 룽이었다. 불륜 현장으로 달려간 로이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상간 남을 두들겨 팼다. 그걸 말리던 부인도 같이. 그 결과는 이혼과 1계급 강등이었다.

그 뒤, 기갑병 출력 제한 해제를 위해 해커가 필요했을 때, 다리를 연결해 준 것도 그년이었고. 나중에 걸려서 불법개조로 다시 1계급 강등.

소령진급을 앞에 둔 대위에서 순식간에 2계급이 강등 소위. 근데 씨발 지금 생각해 보니 전부 로제 룽이랑 연관됐었다.

‘꼬인 것 같은데. 나중에 같이 PMC로 가죠. 어때요?’

‘공군 전투기 조종사도 에이스급이면 서로 모셔가려고 하는데 기갑병 에이스면 돈다발 싸 들고 오지 않겠어요?’

지금 생각해 보니, 간 보는 말들이거나, 포섭하려는 말들이었다.

‘날 가지고 놀아? 빌어먹을 년이.’

“로이 스턴 소위님! 괜찮으십니까?”

장갑차에서 병사들이 뛰어내려 산개했다.

“도망친 놈들은 어떻게 됐나?”

“놓쳤습니다. 놈들이 눈 속으로 도망쳐서 추적할 수 없었습니다.”

괴물들이 바글거리는 방향으로 도망쳐 어쩔 수 없었다.

“룽년이라도 잡았어야 했는데.”

망치로 잘근잘근 다져버린 룽의 기체를 보며 중얼거리는 스턴 소위였다.

주변은 엉망이었다. 룽년을 몰아붙여서 끝장을 내기 직전, 하얀색 위장복을 입은 놈들이 대전차 미사일로 로이의 기갑병을 공격했다.

엎드려 있던 자들, 아마도 월드 PMC 유다인과 관련된 자들이 이 연막탄을 터트리고 큰 폭발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저기 아래에 월드 쪽 생존자는 있고?”

“저쪽에는 생존자가 없습니다.”

“씨발. 시신이라도 잘 수습해라. 그 사람들 때문에 내가 살았다.”

자기 목숨을 살려준 은인들이었다. 시신이라도 수습해야 했다.

‘그 여잔 뭐냐?’

유다인이 월드 PMC 이사가 됐다는 소식을 들었었다. 10년 전에도 40대였던 유 이사였다. 자기가 아무리 동양인 나이를 구분 못 한다고 해도. 20~30대로 보이는 여자였다. 그것도 유 이사를 똑 닮은.

‘아- 젠장-’

정말 유 이사 딸이면 정말 골치 아파졌다. 미친년이 자기 딸 죽었다는 소식에 어떤 짓을 할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저 소위님. 그 위에서 명령인데 말입니다.”

“그래.”

“월드 PMC 애들 말입니다. 전부 생포 또는 사살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뭐?! 다시 말해봐. 뭐라고?”

스턴 소위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월드 PMC 소속 유 이사 외 용병들 전원 생포. 생포가 어려울 시 반드시 사살, 시체 회수할 것. 이상입니다.”

“미친 새끼가. 제대로 들은 거 맞아? 누구야 누가 그딴 명령을 내렸어? 이유가 뭐야! 엉?”

병사의 멱살을 잡은 스턴 소위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이게 무슨 병신 같은 소리지? 같은 소속이 아니더라도 같이 싸운 전우였다. 그런데 다짜고짜 생포 또는 사살하라고?

“컥- 소위님. 이건 위에서 온 명령입니다.”

“다 까고. 이유가 뭔데? 좆도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스파이··· 스파이 혐의입니다.”

“야. 이. 씨발- 그게 말이···.”

화를 낼 번지수가 틀렸다. 얘가 뭘 알겠나? 스턴 소위가 잡았던 멱살을 풀고 이를 뿌득 갈았다. 어떤 새끼가 작업한 게 틀림없었다.

스파이 혐의? 씨발 누굴 병신인 줄 아나? 스파이가 스파이랑 싸우다 자폭하는 거 봤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C구역에서 월드 용병 발견!”

“전원 승차! C구역으로 간다.”

흩어졌던 병사들이 전부 장갑차로 향했다.

“소위님. 명령입니다.”

소위가 파랗게 물든 팔뚝을 내밀었다.

“좆까. 나 부상이라고 해.”

“대령님께서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사살은 피해야 하지 않겠냐?’.”

“···빌어먹을.”

그린필드 대령이 내린 명령이 아니었다. 그 양반이 그럴 양반도 아니었지만, 사살을 피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건, 더 위에서 내려온 명령이라고 봐야 했다.

‘알렉스 파머가 이딴 명령을 내렸다면 그린필드 대령이 들이받았을 거고.’

그렇다면 그보다도 위란 말인데. 가능한가? 더 위면 본국에서 명령이 내려왔다는 소린데? 가까운 근거리 교신이나 간신히 가능한 수준인데. 이딴 명령을 내렸다고?

“공병들이 반파된 기체 회수하는 것 보고 간다고 해.”

“알겠습니다.”

변종들에 괴물까지 넘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죄다 월드 용병 잡는데 몰려갔으니, 공병들 경호가 빈다는 말. 병사는 소위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경례를 하고 먼저 떠났다.

“아오- 돌아버리겠네.”

생포? 그게 가능할까? 월드 PMC 그것도 유 이사와 연관된 애들이라면 인명피해도 엄청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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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이이이----------------

삑-삑-삑-삑-

삑-삑-삑-삑-삑-삑-

삑-삑-삑-삑-

삐이이이----------------

동작감지 센서가 미친 듯 지랄 냈다.

김 양이 나무 위에서 열심히 주변을 살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붉은색 점도 뜨지 않았다.

‘?’

열화상 카메라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는 소리.

‘이거 고장?’

기온은 영하 3도에서 5도를 오르내렸지만, 바람이 차가워 체감온도는 그보다 낮은 영하 8도를 찍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잿빛 눈발을 흩날리기 시작하자, 전진기지로 향하는 피난민들의 발걸음이 더욱 느려졌다.

빙 돌아간다고 해도. 시간 단위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인데, 40분이 넘도록 한쪽으로 돌고 있는 건 이상했다.

‘선도하는 애들이 방향감각을 잃었나?’

삐이이이익---------

아. 진짜 뭐임?

시야에 잿빛으로 덮여가는 하얀 벌판 한쪽이 들썩이는 게 보였다. 들썩들썩. 취리릭 삐져나온 두 가닥의 촉수?

‘촉수?’

저거 어디서 본 건데?

‘어?!’

저거 더듬이였다. 제약회사 지하에서 본 거대 바퀴벌레 더듬이. 그럼 설마 이 소리가 전부?

삑-삑-삑-삑-

삑-삑-삑-삑-삑-삑-

츄릭- 취릭-

더듬이들이 눈밭을 뚫고 삐죽삐죽 솟아나기 시작했다.

[화염방사기. 화염방사병! 화염방사기 준비!]

김 양의 외침에 피난민들과 병사들이 자리를 잡았다.

“뭔가? 무슨 일인가?”

[바퀴. 괴물 바퀴다!]

하얀색 들판을 뚫고 나온 짙은 갈색이, 잿빛 눈발 아래를 물들였다. 반들거리는 키틴질 껍데기로.

툭-두투둑-툭카-

김 양의 체인건이 불을 뿜는 것과 동시에, 바퀴벌레들이 피난민들을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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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벌레는 끔찍했다.

다카이치 제약 비밀 실험실에서 봤던 바퀴벌레는 커봐야 20~30cm였다. 대부분 크기는 손바닥만 했고 아주 크다 싶어도 30cm 넘는 건 어쩌다 한두 마리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 보이는 바퀴들은 전부 덩치가 컸다.

푸화아아아아악!

뜨거운 화염이 뿌려졌다. 노릇노릇 새우 볶는 냄새 비슷한 향이 치솟았다. 사람들은 낙관했다. 커봐야 벌레였고, 많아봐야 벌레니까.

하지만 놈들은 그냥 벌레가 아니었다. 3억 4천만 년을 버틴 바퀴벌레였다.

화염을 제외하면 놈들에게 큰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거의 70~80cm에 달하는 바퀴는 총알이 잘 먹히지 않았다.

철갑탄으로 놈들의 몸통을 뚫어도 마찬가지였다. 머리통이 날아가도 나머지 부분이 살아 꿈틀거렸다.

그 끔찍한 벌레를 피해 도망치던 피난민들이 갑자기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이어지는 긴 비명.

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악

눈 밑에 굴을 팠는지, 함정을 깔았는지 도망치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눈 아래로 사라졌다.

“이 새끼들 우리를 한쪽으로 몰고 있습니다.”

바퀴들은 영악했다. 마치 물고기를 어망에 밀어 넣는 것처럼. 사람들을 한쪽으로 몰고 있었다. 불에 타오르면서도, 몸통이 박살 났으면서도 사람들에게 달라붙는 바퀴들.

“그냥 쏴. 어차피 틀렸어. 그냥 쏘라고!”

바퀴가 달라붙은 사람을 향해 화염이 쏟아졌다. 찢어지는 비명이 설원을 가득 채웠다.

새우 냄새, 고기 냄새 그리고 길고 긴 비명. 여기가 소문난 맛집이라고 근처에 있는 괴물들에게 광고하는 꼴이었다.

“젠장- 전진기지에서는 응답 없나?”

“잡음이 심해 연락이 닿지 않습니다.”

아시아계 군인이 대답했다.

“척후는 어떻게 된 거야? 이딴 게 이렇게 매복하고 있었는데, 뭘 한 거야!”

“······.”

“빌어먹을. 길버트 브라운 중령님을 최우선으로 한다. 애들 모아. 벌레 새끼들 포위망 뚫고 전진기지로 향한다.”

“피난민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대위는 병사의 질문에 잠시 침묵하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용병들과 부상병들 그리고 자원자를 받는다. 이곳에서 버티라고 해.”

“알겠습니다.”

푸화아아아아악

밀려오는 바퀴의 물결을 불꽃의 성벽이 가로막았다. 화염에 전진이 막힌 바퀴들이 사각사각 눈을 뚫고 불꽃 아래로 이동했다.

이거 꿈이지? 벌레들이 이렇게 움직인다고?

“미친!”

“JESUS!!”

으아악!

허벅지에 달라붙은 바퀴가 한입만을 시전했다. 뭉텅이로 잘려나간 살점. 비명이 끝나기 전에 또 다른 바퀴가 한입만을 실시했다.

전신을 뒤덮은 바퀴를 떼어내려 이리 구르고 저리 굴렀지만 소용없었다. 갈고리처럼 휘어진 발톱이 남자에게 박혔다. 발톱을 박아 넣은 바퀴들이 아작아작 소리를 내며 사내를 산채로 씹어 먹었다.

탕!

한 발의 총성에 고통에 몸부림치던 사람이 축 늘어졌다.

“화염! 어디야? 여기 불 뿌려!”

“잔량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화염방사기 연료가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남은 연료 몰아 줘!”

“중령님 모신다.”

“남아서 버틸 애들 있나? 지원받는다.”

피난민들과 연애를 시작한 병사들이 애인을 지키겠다고 손을 들었다. 절반 가까운 병사들이 방어전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아비규환 저편으로 괴물들의 눈동자가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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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렁-

공간이 흔들리고. 허공에서 나오듯 마루의 모습이 드러났다.

“휘유- 이거야 원.”

폭발의 흔적, 20mm 발칸 포탄의 흔적, 거대한 근접무기로 싸운 흔적이 뒤섞여 있었다.

‘이건 기갑병들끼리 싸운 흔적 같은데?’

이상했다. 기갑병은 미군의 신병 무기였다. 정보가 돌아 다른 나라에서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해도 여기까지 와서 미국 기갑병이랑 싸운다? 그게 말이 되나?

그럼 이 흔적은 자기들끼리 싸운 흔적이란 소린데.

마루는 주변을 살폈다. 길게 이어진 자국이 있었다. 마치 썰매를 끌고 간 것 같았다. 그 자국을 따라 계속 가자, 짙은 코발트 색상의 콜트 파이슨이 눈 속에 묻혀있었다.

‘유 이사가 쓰던 총인데? 이게 왜 여기?’

냉큼 총을 챙긴 마루가 썰매의 흔적을 따라 계속 이동했다. 감각에 걸리는 것들이 점차 늘어났다.

‘미군들? 미군이 수색을?’

무엇인가 찾고 있는 모습.

점점 더 많은 병사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마루는 은신 장비 속으로 몸을 숨긴 채, 김 양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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