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스트 [RUST]-126
괌에 도착한 4척의 요트에서 사람들이 내렸다.
“이쪽으로.”
직원의 안내에 따라, 기순은 사령부로 향하는 차에 올라탔다. 괌에는 미 해군기지와 앤더슨 공군기지가 있다. 공군기지와 해군기지의 중간 거리에 있는 니미츠 힐 기지 안에 합동사령부가 있었다.
“굳이 제가 갈 필요가 있을까요?”
“저도 위에서 동행하라고 하니까 같이 가는 겁니다.”
직원이 쌀쌀맞게 대답했다. 기순은 밖을 살폈다. 기다란 야자수가 도로변을 장식하고 있었다. 미국의 북태평양 전선 최후의 보루라고 하기엔 너무나 평화로운 풍경.
2000년대 들어서 중국이 무섭게 군사력을 확대하면서 미국이 주도하던 북태평양 질서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팽창을 견제할 수 있는 괌과 오키나와는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전략적 이익을 지키는 군사적 전략기지가 됐다.
“생각보다 기지가 크네요.”
“해군만 하더라도 11.500명이 넘게 있으니까요.”
태평양함대사령부 7함대 소속 11.500여 명과 7함대 소속 아닌 해군 6.700여 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해병대만도 19.000명이 넘습니다.”
“많군요.”
공군을 제외하고, 해병대와 해군만으로 4만 가까운 규모. 여기에 앤더슨 공군기지에 있는 12.000여 명의 공군까지 생각하면, 5만 명에 육박하는 병력이 괌에 있었다. 병력 구성에서 알 수 있듯, 괌의 미군은 해·공군, 해병대를 핵심으로 이뤄진 신속기동군이었다.
한반도 유사시 언제든 달려갈 준비가 된 부대였지만, 현재는 중국의 대만 침략 도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합동사령부 작전회의실 문을 열기 전, 직원이 기순을 보며 말했다.
“합중국의 안보와 관계된 회의에 참석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시간이 없어 말로 하지만, 추후 비밀 유지서약을 해주셔야겠습니다.”
‘아니, 저기요. 난 알고 싶지 않았다고요.’ 기순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직원은 무시했다.
“지금은 미국 시민으로서의 애국심을 보여야 할 순간입니다. 태평양함대도 그렇지만, 이곳에 주둔하고 있는 해병대도 좋은 감정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겠죠?”
“······.”
‘난 한국인이라고.’ ‘신분 세탁만 아니었으면···’ 기순의 침묵을 긴장으로 해석했는지, 직원이 덧붙였다.
“일본군과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부대의 후예라, 전통적으로 좀 그런 경향이 있지만 그래도 많이 좋아졌으니, 최대한 정확한 정보를 솔직하게 전달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 이미 알고 있는 건, 이메일로 전부 보냈는데 말입니다.”
직원이 피식 웃었다.
“저번에 말하지 않았었나요? 군은 확인을 좋아한다고?”
“···확인이 아니라 복습이라고 했었습니다만.”
“복습을 왜 하겠습니까?”
“······.”
“그럼 들어가죠. 비밀서약, 정확하고 자세한 정보 전달.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직원이 문을 열 자, 날카로운 눈빛들이 기순을 향해 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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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순은 입을 꾹 다물었다. 절대 말하지 않겠다. 엮이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아직 사세보에 있는 해군은 건재합니다. 그 함대를 이용하면···.”
“어느 쪽으로 간단 말입니까? 사방에서 화산이 터지고 있는데 자칫 잘못하면 그대로 표류하게 될 수 있습니다.”
“요코스카 기지가 완전히 침묵했는데, 고작 1개 중대 병력으로 구출 작전을 한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립니까?”
“···해병대 정예부대와 델타포스로 위력정찰을···.”
미군은 이런 건가?
작전 나오면 착착 아래로 서류 보내서 명령하고, 직속상관이 ‘네가 가라 하와이.’ 이러면 하와이 딱 가고 그런 거 아니었나? 뭔가 이런 분위기는 예상과는 매우 달랐다.
“···알파 중대는 가마쿠라에서 동쪽을 정찰하며 요코스카 해군기지 방향으로···.”
“베타 중대는 가마쿠라에서 북쪽 요코하마 방향으로 수색을 시작해···.”
기순은 작전참모가 지도를 가리키는 것을 보며 생각했다. 일단 자신이 이메일로 보낸 정보를 고려해서 작전을 짠 것 같았다. 도쿄만으로 진입하지 않고 사가미만에 상륙해 육로로 이동하는 동선은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상대적으로 안전해 보였다.
“그럼 도쿄에서 탈출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지. 어떤가?”
“구조대를 처음 보내는 겁니까?”
기순의 질문에 장교들이 서로를 쳐다봤다.
“음- 그렇지는 않아. 사세보 해군기지에서 프리덤급 연안전투함 1척을 요코스카 해군기지 쪽으로 보냈지만, 중간에 실종됐네.”
“······.”
도쿄만에 표류하고 있다던 선박 가운데 하나가 됐단 말인가? 아니면 정말 침몰한 것인가? 부상 때문에 직접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
“요코다 기지에 있는 통합사령부를 구조하기 위해, 주한 미군이 부산에서 헬기를 보냈지만, 사라졌어.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추락했을 것으로 보고 있네. 주한 미군 쪽에서 모두 3차례나 구조대를 보냈지만, 전부 연락이 끊긴 상황이야.”
“······.”
마루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헬기로 갔다면, 아마 조류의 습격을 받아 추락했을 겁니다.”
“확실한가?”
단순한 충돌사고가 아닌, 습격이 확실하냐는 의미였다. 항공기가 새와 충돌하는 사고는 생각보다 많았다. 특히 헬기의 경우 수평 날개에 충격을 받으면,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고 추락할 위험이 컸다.
“확실합니다. 원인은 알 수 없지만, 동물들이 굉장히 공격적으로 변했습니다. 특히 조류는 배도 헬기만 공격한 것이 아니라 배도 공격했습니다.”
“새의 공격을 회피한 방법이··· CS 탄을 사용했다고?”
“최루탄과 섬광 폭음탄을 사용했습니다.”
이메일로 보낸 내용을 묻고 또 묻는 이유가 뭔지 조금 짜증이 났지만, 표정 관리 하나는 잘하는 기순이었다.
“자극과 교란을 통해 새를 쫓아낸다는 생각은 자네가 한 건가?”
“아닙니다. 제 일행이 했습니다.”
기순은 재빨리 여기에 없는 마루를 들이밀었다.
“그런가?”
뭔가 아쉬운 표정을 짓는 준장이었다.
“뭔가 우리에게 조언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기탄없이 말해주면 좋겠군.”
“없습니다.”
척수 반사적으로 대답한 기순을 바라보며 볼을 긁적긁적 긁던 준장이 피식 웃었다.
“다시 잘 생각하고 이야기했으면 좋겠군. 직접 현장에서 굴러야 생각하는 타입일지 모른다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기 시작했으니까 말이야.”
“그···.”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꾹 참은 기순이었다. 뻥카냐? 뻥카겠지? 무슨 미군이 민간인을 강제로 작전지역에 끌고 가겠냐? 그러고 보니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현지인을 징집했다는 소문이 떠올랐다.
“동물들을 최루탄과 섬광 폭음탄으로 쫓을 수 있다는 거지, 사살할 수 있다는 건 아닙니다.”
계속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준장이었다.
“숫자를 줄이기 위해서는 화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후지산 폭발로 항공지원이 불가능한 이상, 항공 보급도 불가능하다고 봐야 합니다.”
“게다가, 작전지역은 대지진과 2차례에 걸친 쓰나미로 인해 도로가 끊기고 진창으로 변한 곳이 많습니다. 후지산 폭발로 화산재와 연기로 내연기관을 사용하는 이동 수단 또한 사용할 수 없죠.”
“그래서? 요점이 뭔가?”
“전기로 움직이는 운송 수단이 필요합니다. 배터리 팩 교체형으로, 최소한 화력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운송 수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진과 쓰나미로 인해 늪지 같은 진창이 생겼습니다. 진창이 얼지는 않겠지만, 매우 차갑습니다. 진창에서도 체온을 유지할 수 있는 장비가 필요합니다.”
준장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기순을 보고 불길하게 웃으며 말했다.
“다들 들었지? 예상보다 현지 상황이 열악해, 보급이 더 중요해졌다.”
“최루탄과 섬광 폭음탄을 최우선 순위로 보급한다. 부족하면 주한 미군에 있는 비축분을 가져오도록 해.”
“전기로 기동하는 수송 장비는 시제기라도 좋으니, 일단 쓸 수 있는 건 전부 가져오도록. 도난 병원에 임시 캠프를 설치하고 그곳을 중심으로 보급 계획을 짜봐.”
“옛!”
장교들이 해산했다. 이제 끝인가? 기순이 살짝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내가 보기엔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더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아닙니다.”
“흐음. 역시 현장 체질인가?”
“······.”
기순은 그냥 모르쇠 하기로 했다. 진짜 여기까지 했으면 할 만큼 했다. 더 건드리면 들이 받아버리겠다고 다짐하고 있는데, 추가 압박이 없었다.
“이 보고서에 나온 이야기들. 솔직히 100% 믿기 어려워. 그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말이지···.”
뭔가 말을 이으려던 준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 그냥 말을 하지 말라고, 난 듣고 싶지 않아.’ 기순의 필사적인 기원에도 불구하고 준장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라크전과 아프간전에서 한국의 월드 PMC와 작전을 했었지, 아주 뛰어난 PMC였어.”
“······.”
“그 PMC도 구조작업을 하러 일본에 가서, 도난 병원을 거점으로 잡고 있더군. 그래서 우리도 거점을 확보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 같아,”
‘씨발. 월드 PMC라니 그거 월드 그룹 산하 회사 아니야? 아니겠지? 아니긴 뭐가 아니야.’ 기순은 생각이 복잡해졌다. 월드 그룹 무력 단체가 도난 병원을 장악하고 있다니, 정말 인명 구조 때문일까? 겸사겸사 인명 구조도 하기야 하겠지만, 다른 걸 노리는 게 분명했다.
‘급속치료제’ 아니면 ‘전투자극제.’
‘젠장.’ 대체 왜 나한테 이런 말을 하는 거지?
“···자 말해보게. 한국 제일의 PMC 회사에서 임원이 직접, 지옥으로 변한 도쿄로 가서 인명 구조를 진두지휘한다? 무슨 생각이 드나?”
“······.”
순간 정신을 딴 데 둬서, 뭔 소리를 하는지 듣지 못한 기순. 기순의 침묵에 준장도 침묵으로 압박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끝까지 모르쇠 하는 기순을 가만히 바라보던 준장이 말했다.
“모를 일이군. 모를 일이야. 일단. 협조해줘서 고맙네.”
기순은 진이 다 빠진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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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장은 기순이 적은 보고서를 보며, 도난 병원에 거점을 만든 월드 PMC에서 보낸 정보를 떠올렸다.
이라크전과 아프간전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한 월드 PMC였다. 당시 월드 PMC를 이끌던 사람은 조 사장과 유 이사였다.
언제 다시 지진이 터질지 모르고, 치안이 완전히 무너져 무법천지가 된 일본에 이사급 직원이 직접 진두지휘한다? 단순한 인질 구조 문제가 아닌 게 분명했다.
“임원이 직접 지옥으로 변한 일본에 가야 할 이유가 있다는 건데···.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준장의 질문에 직원이 대답했다.
“중요한 인물을 구출하거나, 중요한 뭔가를 찾고 있는 것이겠죠. 어쩌면 731부대처럼 일본이 비밀리에 연구하고 있던 것을 노리고 있는 것일지 모릅니다.”
“구체적인 정보는 없고?”
“안타깝지만, 이쪽에서 파견한 요원들도 전부 연락이 끊긴 상황입니다. 추가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도 도쿄에 가야 할 상황입니다.”
“방금 버나드라는 사람. 그 일행들은 어떤가?”
“다른 건 모르겠지만, 전투력은 확실하더군요. 갱단과 카르텔 17명을 순식간에 정리했다고 합니다. 회사에서는 저들이 일본의 특수부대 출신이나 내각정보실 산하 요원 출신이 아닌가 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직접 만나보지 않았으니 모르겠지만, 버나드?(기순) 그 친구는 아닌 것 같군.”
“······.”
“단순한 민간인이라고 하기엔 확실히 군무에 밝은 부분이 있지만, 특수부대나 정예 요원이 풍기는 특유한 느낌이 없어. 살기도 없고 말이지.”
“그렇습니까?”
“조금 특이한 민간인이라면 굳이 현장에 끌고 다닐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네. 당장 해야 할 것도 많고. 민간인에게 보여줄 수 없는 작전도 있고 말이지.”
“알겠습니다.”
‘운이 좋은 놈이네.’
버지니아가 버지니아 하지 않게 되어, 어쩐지 조금은 아쉬운 직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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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여러 곳에서 다양한 데이터를 확보한 미군이었지만, 지금 일본에 닥친 재난과 같은 상황은 없었다. 이런 난감한 환경에서 기순의 경험은 많은 도움이 됐다.
군함이라고 하더라도 공기필터가 화산재와 연기에 막혀 버리면 그걸로 끝이었다. 기순의 조언대로 최대한 많은 양의 보급품을 실어 다행이었다.
구조대를 실은 선단은 필터를 여러 차례 교체하고서야 간신히, 도쿄 남서부 사가미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