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스트-108화 (108/280)

러스트 [RUST]-108

마루가 통신을 끝내자, 옆에서 듣고 있던 기순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급속치료제나, 중화제, 전투 마약에 관한 이야기 나올 줄 알았는데 하지 않네? 죽고 싶은 게 아니면 너한테 이야기하기가 좀 그렇기야 하지···.”

기순이 뭔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잘못 말했다가 뒷감당을 어떻게 하나?

“사실. 급속치료제 레시피나 연구 자료 챙겨오면 어쩌나 걱정했었는데, 잘했다.”

“어래? 안 챙겼다고 뭐라 그럴 줄 알았더니?”

날 뭐로 보고 그런 소릴 하느냐는 듯 기순이 말했다.

“지금 보면 모르겠냐? 불 질렀다고 했는데도 가서 확인한다고 하는 거 봐라. 아마 자료 있다고 하면 지구 끝까지 쫓아올 거다.”

“없다고 하긴 했지만 믿겠냐? 가서 찾아보고 없으면 또 쫓아 오겠지. 진짜 있나 없나 확인하러.”

하긴. 그냥 자료가 있었으면 좋겠네. 아니면 타버렸다는 증거라도 남아있어야 피곤하지 않겠다. 제일 좆같은 상황은 공개적으로 저 새끼들한테 연구 자료 있다고 까발리는 건데, 설마 거기까지 하지는 않을 거고. 기순이 어깨를 툭툭 쳤다.

“쫓아 오면 어떻게 하게?”

“조용히 쉬게 해드려야지 뭐.”

“조용히··· 푹 쉬게?”

“그래, 조용히 푹-”

“그래서 미친 새 떼랑 투석형 일본원숭이. 그런 건 말 안 해준 거냐?”

“아니, 그건 아니고.”

“그럼?”

“싸워 보지 않아서 뭐가 약점이고 어떻게 해야 할지 나도 모르는데, 뭔 조언을 해주겠냐?”

기순이 묘한 표정으로 마루를 봤다.

‘왜? 뭐? 어쩌라고?’

“그래, 그럼 그렇지. 이 과장 명복이나 빌어줘야겠네.”

“그 아재도 만만치 않아. 부산에서 봤었잖아? 그 아재 제법 치는 거. 뭣보다 최 전무도 살아서 왔는데, 설마 그 아재가 어떻게 되겠어?”

그렇기도 하네. 기순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계획대로 간다. 오케이? 혼슈 동쪽으로 쭉 올라간다?”

카타마란의 돛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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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기를 내려놓은 이기영 과장이 한탄했다.

존나 씨발. 어쩌라고? 뒈지라는 건가? 조언이라고 한다는 소리가 그냥 나가 죽으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더 심각한 사실은 이 새끼가 구라칠 새끼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냥 썰어대는 새끼가 뭐가 아쉬워서 구라를 치겠나? 그럼 사실이라는 소리. 바퀴벌레랑 쥐새끼라니, 거기에 괴물도 있다고? 심지어 사람 잡아먹고 재생이랑 진화까지 하는 괴물? 이거 실화냐?

“미치겠네.”

원거리에서 네이팜이랑 화염방사기로 조지라고?

흐흐흐

허허허

월드 그룹 칼잡이 최 전무가 갔다가 뒈졌으니, 월드에서도 추가로 사람을 보낼 게 분명했다. 재수 없으면 월드 그룹과 싸우면서 괴물 딱지에··· 바퀴벌레에··· 쥐새끼에··· 또 뭐가 있을지 모르는 똥통으로···.

“반쯤 뒈지러 가는 거네.”

심은영 사장이 그러는 것도 이해는 갔다. 대행의 생사도 불분명했고 경호원도 마찬가지인 상황. 누굴 보낸다면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보내야 했다.

오래된 사람들이 본사와 결탁해 배신한 상황인지라,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 다시 말해 서울 본사와 끈이 닿지 않은 인력 가운데서도 월드 그룹과 연결될 가능성이 없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렇게 따지면 딱 자기밖에 없었다. 김수현 실장 조지면서 월드 그룹과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고 서울 샬롯 본사 엿 먹이는 데 앞장섰으니···.

“어떻게 준비할까요?”

안동구 실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기영 과장은 허허-욕을 반복했다.

“들었잖아. 네이팜 던져서 터뜨릴 수 있게 화염 수류탄으로 만들어서 챙기고, 화염방사기도 구할 수 있으면 구해. 최대한 많이. 최대한 빨리. 씨발. 시간이 생명이다.”

“예.”

원거리라. 진짜 돌아버리겠네. 주먹질하던 애들한테 원거리 챙기라고? 군필이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동구야. 그리고 총도 최대한 많이 챙겨라. 구경 큰 거로. 샷 건도. 그리고 105mm 남는 거 많다고 뉴스에서도 떠들고 그랬잖냐. 혹시 우리도 105mm 구할 수 있겠냐?”

“···있겠습니까?”

군부와 연결된 월드 그룹이라면 몰라도 견제받고 있는 샬롯 그룹에서 대구경 포나 포탄을 챙기긴 힘들었다.

“힘들겠지? 그건.”

“샷건이랑 M50 아니면 M60까지가 한계입니다. 그것도 많이는 힘들고요. 화염방사기도 그렇기는 한데, 훈련에서는 거의 안 쓰니까 어떻게든 구하는 건 가능할 겁니다.”

“염병. 비행기로 가는 건 일본 도쿄 쪽 활주로가 아작났다고 하니까 힘들 거고. 헬기라도 있어야 할 판인데, 수배할 수 있겠냐? 배로는 힘들어.”

“헬기라면 2대까지는 어떻게든 될 겁니다.”

2대라. 진짜 갑갑하네.

“몇 명까지 가능하겠냐?”

“헬기 2대로 실어봐야 많아야 12~14명 정도겠죠. 완전무장 한다고 치면 12명도 아슬아슬할 겁니다.”

“그렇겠지? 3대만 되더라도 한 대에 기름 싣고 가서, 중간에 급유하고 가겠지만. 2대면 기름 꽉 채우고 가도 중간에 내려야 하잖아.”

“그건 도난 병원에 내려서 급유하면 될 겁니다. 아까 그쪽에 안전지대 만들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좋아. 일단 장비부터 챙기고. 빠릿빠릿한 애들로 좀 뽑아서.”

“알겠습니다.”

픽- 썩은 미소를 지은 이기영 과장이 작업용 장갑을 꼈다. 이거 존나 인생 더럽게 꼬이네.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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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벅저벅

투박한 소리. 군화가 내는 특유의 발걸음 소리가 복도를 채웠다.

“요새 장비가 많이 좋아졌어. 그렇지 않나?”

“그렇습니다.”

유 이사가 자리에 앉아 발끝을 쭉 뻗었다. 이라크랑 아프간에서 이런 걸 신고 다녔어야 하는데 말이지.

“최 전무. 그 모자란 새끼가 이동한 경로는 확인했고?”

“넷. 최 전무는 히로시마 인근에서 급유하고 도쿄 항만 인근에 있는 다카이치 제약으로 향했습니다. 2대의 헬기로 이동 중, 한기가 추락했고 나머지 한기만 도착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2대가 가서 한 대가 추락? 싸워 보지도 못하고 50% 손실? 헛웃음이 나왔다.

“가지가지 하네. 어쩌다가 추락했는데?”

“새 떼가 공격한 것으로 보고됐습니다.”

유 이사의 눈에 어이없음이 채워졌다.

“그게 무슨 병신 같은 소리? 새가 헬기를 공격했다고?”

“옛. 보고에는 그렇게 올라왔습니다.”

“좋아. 그래서 다카이치 제약에서 샬롯 쪽 애들이랑 교전한 건가?”

“그렇지 않습니다. 샬롯 쪽은 간발의 차이로 놓쳤고 실험체로 보이는 괴물과 교전했습니다.”

괴물이라는 말에 유 이사의 얼굴에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인간을 공격해 잠식하는 괴물로, 재생력이 엄청났고 정신파를 이용해 ‘혼란’에 빠뜨렸다고 합니다.”

“재생력이라. 상처 입은 곳에서 촉수 같은 게 돋아나고 그런 건 아니겠지?”

“······.”

붉은 약이 떠올랐다. 김수현 실장을 순식간에 괴물로 만들어 버린 약. 그런 약을 만들라치면, 괴물 실험체 하나쯤은 있을 법했다.

“계속해.”

“큼-흠- 우리 쪽에 붙은 헬기 조종사의 이야기로는···”

콱-!

“결론만.”

“최 전무를 죽인 건, ‘하마루 또는 김 양으로 보인다.’까지가 마지막이었습니다.”

“장소는?”

“야마츠키 신약입니다.”

유 이사가 눈을 감았다. 까딱까닥 꼬아 앉은 다리가 살짝살짝 흔들렸다. 재생하는 괴물 실험체. 미친 새 떼, 바퀴벌레. 김 양과 하마루. 전장은? 무기는? 적의 화력은? 아군의 편제는? 유효한 전술은?

“도쿄에 있던 직원들과는 연락이 두절 됐다고 했지?”

“예.”

최 전무팀이 보고했던 것도 그렇고 헬기 조종사가 연락한 것을 보자면, 한국에서 가져간 위성 통신망은 사용할 수 있었다. 그렇다는 건 순간적으로 EMP나 그에 준한 전자기장이 터졌다고 봐야 했다.

“민 사장. 아니, 민 장군에게 연락해서. 블랙호크로 5대 필요하다고 말해. 그쪽 인원 중대 규모로 필요하다고. 생화학전 시가전 훈련된 애들로. 언제나 그렇듯. 결과는 50:50으로.”

“무장은 어떻게 할까요?”

“VX탄, 백린탄. MK -77 네이팜. 러시아제 노비촉도 있으면.”

직원이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유 이사님. 그 VX탄은 신경 가스탄 말씀이십니까? 노비촉도 신경 가스탄인데요?”

“그래서?”

“백린탄도 그렇지만 MK -77은 폭탄입니다.”

“그래서?”

폭격할 때 쓰는 폭탄이라고. 미친년아 일본에 전쟁하러 가냐? 거기에 전부 금지 무기잖아? 걸리면 어떻게 하려고?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리는 직원을 보고 유 이사가 코웃음 쳤다.

“증인이 없으면 증거도 없는 법이란 걸 모르나?”

모가디슈, 베이루트, 이라크, 아프간··· 의혹은 있어도 증거는 없는 법이었다. 후- 진득하게 타오르는 네이팜 냄새가 코끝을 간질이는 것 같았다.

“적은 인간이 아닌 괴물이야.”

히죽- 길게 웃은 유 이사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재생하는 괴물이 설치고 있다고. 그렇다며? 응?”

“신경가스와 백린탄은···.”

“이거 왜 이러나. 응? 신경가스는 본래 살충제라고. 살충제. 벌레 새끼들을 죽이는 약이라고. 응? 벌레에 괴물이 설치는데 그 정도는 기본 아닌가?”

“······.”

“버지니아 회사에 연락해서 이스라엘제나 터키제 백린탄 달라고 해봐. 일본에서 연구인력 구조하고 벌레 잡는 데 쓴다고 하면 얼씨구나 하고 줄 테니까.”

침을 꿀꺽 삼킨 직원이 숨도 삼켰다. 진짜다. 진짜로 여차하면 주변까지 모조리 날려 버릴 년이었다. 대체 조 사장은 뭔 미친 봉인을 푼 거냐?

“가 봐. 블랙호크 2기는 폭격 셋팅이야. 네이팜과 백린탄으로. 알았지?”

중대 규모라.

오랜만이네.

사막 한가운데서 피어나는 붉은 불꽃. 폐허 속에서 치솟는 연기. 찡한 총연.

후흐흐흐

좋다. 좋아.

[유 이사님. 조 사장님께서 연락하셨습니다.]

“연결해.”

[야! 이 미친년아. 백린탄? MK -77 네이팜? 너 돌았냐? VX는 또 뭐고 노바촉? 아니, 노비촉은 또 뭐야. 전쟁 가냐? 그리고 말했잖아. 군부 씹새끼들이 우리 쪽 넘본다고. 씨발 너 귓구멍에 좆 박았지? 내 말 뭐로 들었어? 엉? 근데 바로 민사장 그 씹새끼한테 손 벌려?]

“조 사장님. 꼬우시면 직접 가세요.”

[······.]

“바퀴벌레 같은 최 전무도 뒈졌는데, 뭘 믿고 총 하나 달랑 들고 가랍니까? 벌레 득실거리고 괴물까지 설친다는데···.”

[······.]

“부산 샬롯이 서울 본사까지 먹었다면서요? 호텔 샬롯 배신한 새끼들이 이쪽저쪽 다 흩어져서 살겠다고 정보 팔아먹었을 테고. 아닙니까?”

[······.]

급속치료제에 대한 소문, 전투자극제, 전술 마약에 대한 정보가 여기저기 펴졌을 것이다. 재난으로 일본 정부도 치안도 무너진 상황, 일본은 세계 맛집이 될 게 뻔했다.

약쟁이들부터 카르텔, 마피아, 갱단이 전부 몰릴 게 분명했다. 이슬람 테러 조직은 가지 않을까? 그럴 리가? 각국 정보부를 비롯해 별의별 떨거지들이 설칠 텐데? 그럼 뭐가 될까?

[유 이사. 그래도 신경가스에 백린탄, 네이팜까지 가는 건 아니지.]

“아니면, 조 사장님이 가시면 되는 일입니다.”

[야- 씨발! 너 나 엿 먹이는 거냐?]

“흐흐흣- 어쨌든 제가 말한 거 다 갖추기 전에는 안 갑니다.”

[야!!!]

“소리만 지르지 말고 좆 같으시면 조 사장님이 가시라니까. 뒈지시겠지만.”

[······.]

“솔직히 다 알면서, 날 보내려는 거 아니었습니까? 가면 뒈질 상황이라는 거. 그러니까 뒈지더라도 가준다잖아요. 무기만 챙겨주면.”

딸깍-

인터폰을 끊은 유 이사가 시원하게 웃었다.

연구 자료? 병신 새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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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돛이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카타마란이 연한 녹색으로 빛나는 바다 위를 달리고 있었다.

“와- 바다 색깔이 이게 뭐냐? 형광 녹색도 아니고. 녹조도 아니고. 진짜 미친.”

기순이 바다를 보고 연발 욕을 내뱉었다.

“여기가 어디쯤이냐?”

“조금 있으면 후쿠시마 다 왔다.”

“후쿠시마면 원전 사고 터진 동네 아니야?”

“그렇지.”

녹색 바다라니 이거 방사능 때문 아닌가?

“이거 바다 색깔이 영 찝찝한데. 더 밖으로 나가서 가면 안 되냐? 아니면 그냥 바로 횡단하면 어떨까?”

“바로 횡단하자고?”

“그래.”

“야. 전에 말했잖아. 바로 횡단하다가 뭔 일 생기면?”

“뭔 일은 이렇게 가다가 생기겠다. 연료도 충분하니까 그냥 횡단 가자. 이거 진짜 기분이 영 더러운 게 이대로 가는 건 아니지 싶다.”

“최소한 홋카이도까지는 가서 옆으로 꺾으려고 했는데.”

기순도 영 찝찝했는지 툴툴거리면서도 동쪽으로 키를 돌렸다. 점점 멀어지는 열도에서는 아지랑이처럼 짙은 연기가 이곳저곳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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